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14권 : 11부 『다인의 기다림』 (38/520)

11부 『다인의 기다림』

김한서 부장은 그의 스승이며, 하늘이 내린 진정한 천재 과학자 유병준을 보고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에 핏발이 선 것처럼 충혈된 눈동자, 두꺼운 안경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유병준이었지만, 그의 두뇌는 천재라는 수식어조차도 실례가 될 정도다.

'세상에서는 나와 17인의 과학자들이 함께 로열 로드를 만든것으로 알고 있지만‥‥.'

김한서 부장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외부로 알려진 것과 진실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는 스승님꼐서 개념을 만들고, 선도 기술들도 개발하셧지. 나와 다른 과학자들은 스승님깨서 만들어 준 뼈대에 살을 붙인 정도에 지나지 않아.'

김한서 부장과 다른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담당한 개발 파트를 수행하기도 벅찬 지경이었다.

불가능하다고 일컬어지는 완벽한 가상현실 시스템은 말 대로 신기루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실패의 악몽을 꾸며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났던 것도 수십차례.

길이 막혀 있을 때마다 유병준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고, 시스템 전체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그뿐이다.

김한서 부장을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도 일반적인 업무를 위해 여신 베르사를 다룰 수 있었지만, 권한은 제한되어 있었다.

김한서 부장은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 유병준의 앞에 섰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본사의 애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더냐?"

"예. 부활의 군대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클클. 그럴테지."

"특히전략운영실의 손일강 실장은 매일 야근을 하고 있다고 앓는 소리를 하더군요."

"클클클."

유병준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데이몬드라는 유저, 스승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글쎄다. 뭐, 나쁘지 않구나."

유병준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부활의 군대 퀘스트‥‥ 뭐, 굉장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의뢰이기는 했지."

시스템관리 부서에서 메인 콘솔을 다루고 있던 과학자들이 이곳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명리를 초월해서, 본인읜 능력을 세계에 공개하지 않고 은둔 자중하고 있는 과학자 유병준.

외부에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실제로 이곳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을 진정 경악하게 만들고, 소름 돋게 했던 것은 여신 베르사의 위력이었다. 어떤 오작동도 없으며, 인위적인 개입으로 수정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로열 로드가 문을 연 이후로 완전무결하게 동작하고 있는 슈퍼 인공지능.

진정 여신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가공할 시스템이었다.

로열 로드만이 아니라, 관련된 유니콘 본사의 행정적인 업무까지 관장한다. 그러고도 아직 여신 베르사가 가진 관리 자원은 채 20%도 사용되지 않고 있다.

과학자들에게는 경이로울 수밖에 없는 노릇.

이런 시스템을 1명의 과학자가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도무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유병준을 아는 과학자들의 평가는 이랬다.

―인류 천만 명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과학자.

―로열 로드가 아닌 다른 것을 만들었다면, 세계의 기술 발전 속도를 30년 정도는 앞당길 수 있는 과학자.

과학자들에게는 경이로움과 함께 존경의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유병준과 동시대의 사람이라는 게 자부심을 줄 정도였따.

"탐욕 때문에 일을 그르쳤어. 잔꾀가 있기에 승승장구하고 있지만‥‥나중에는 더 많은 적을 만들게 될테지."

유병준의 말을 의심하는 과학자는 없었다.

이 세기의 천재가 하는 말은 틀린 적이 없다. 그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언제든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신 베르사를 통해 예정된 퀘스트와 숨어 있는 위협들을 알고 있는 과학자들에게는, 부활의 군대가 진정한 위기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로열 로드는 위대한 가상현실이다.

복잡하게 적용된 기술만큼이나, 대륙에 숨어 있는 사연들, 역사들이 무수하다.

숨어서 힘을 키우고 있는 모험가들, 전사들이 어떤 수준인지, 어떤의뢰를 진행하고 있는지 아는 과학자들로서는 부활의 군대쯤에 긴장을 할 까닭이 없기도 했다.

너무 넓은 대륙과, 인류 사회의 집약판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유저

과학자들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이 개발에 참여했지만, 로열 로드는 정말로 재미있는 가상현실이다. 로열 로드가 문을 열고 나서 인류의 행복도가40% 이상 늘었다는 보고도 나왔다.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과학자들은 본연의 업무로 돌아갔다.

                     * * * * * * * * * *

유병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 쉽게 착각을 해."

그가 보고 있는 화면에는 베르사 대륙에서 활약하는 모험가들이 보이고 

있었다.

남들이 찾지 않는 정글에서 사냥을 하며 힘을 키워 나가는 유저.

대륙에서 가장 험난한 산을 오르며 기초 체력을 단련하는 유저.

몬스터로 가득한 무인도에 상륙하여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며 강해지는 유저.

유병준은 이런 유저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끊임없는 한계 실험, 지구에서는 겪을 수 없을 극한상황들을 경험하고 있었다.

"로열 로드가 게임이라니 말이야."

로열 로드가 만들어지고 문을 열었을 때 언론 매체들은 그 기술에 열광했다.

가상현실을 실제로 구현시킨 첨단 기술!

급증하는 유저들과 기존 게임들의 몰락.

유저들에게는 신천지가 열렸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던 일반인조차도 매료되어 버리는 게임성으로 인하여, 로열 로드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평정했다는 기사들이 속속 뒤를 이었다.

현실에서는 기업의 과장, 부장 들이 중세의 성에서 손님들에게 과일을 팔고, 칼을 차고 모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즐거움인 것이다.

막대한 자금을 긁어모으며, 게임 업계의 차세대 주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유병준은 그런 기사들을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따.

"나약하고 게으른 인간들. 그들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는 것도 모르고 있지."

유병준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평생을 로열 로드의 연구에 바쳤다. 열과 혼을 바쳐 그가 자식처럼 만들어 놓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기껏 게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을 것이다.

                     * * * * * * * * * *

노을 해골의 종적을 뒤쫓았던 파티는 장장 이레에 걸친 추격을 벌였따, 마침내 공동묘지 근처에서 대상을 발견, 성직자의 신성 마법으로 정화할 수 있었다.

"성공이예요!"

"모두 잘하셨습니다."

성직자와 파이크맨이 특히 기뻐했다.

"특히 다인 님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노을해골을 쫓는 것은 숙련된 사냥꾼이 있더라도 어렵다. 몬스터들이 많은 산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던전을 찾아서 내부로 숨어 버리기 때문이다.

노을 해골을 뒤따라가서 사냥을 하다 보면, 어느새 다른 곳으로 도망을 쳐 버린 뒤였다.

이동속도를 올려주는 샤먼의 마법이 없었다면, 노을 해골을 잡기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다인은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전투에는 큰 도움도 안 되었는데요."

"아닙니다. 샤먼인데도 치료와 각종 부가 스킬의 위력은‥‥정말 다인 님이 없었다면 의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다인 언니는 정말 진정한 샤먼이에요."

그녀는 파티원들의 신뢰를 단단히 받았다.

"언니, 계속 우리와 함께해요."

"같이 다음 의뢰를 하시겠습니까?"

"네, 그럴게요."

다인은 파티원과 함꼐 몇 달이나 자유롭게 모험을 즐겼다.

인지도도 날로 향상되었다.

샤먼 다인을 모르는 모라타의 유저들이 드물어질 무렵, 그녀는 검은 저주의 땅으로 모험을 떠났다.

모라타의 정예 모험가들이 스무 명 넘게 자발적으로 참여 한 모험 원정대!

새로운 몬스터들과 던전, 의뢰를 경험하고 모라타로 돌아왔따.

                   * * * * * * * * * *

"휴우! 겨우 다시 모라타구나."

다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모라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천공의 도시 라비아스에서 고독을 만끽하던 그녀가, 북부에 새로 자리를 잡고 모라타에서 친구들을 사귀었기 때문이다.

"근데 저주를 해결해야 되는데‥‥‥."

다인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검은 저주의 땅에서 원정대 전체가 저주를 받았다.

피부가 다크 엘프처럼 흑색으로 변하고, 원시 부족 같은 문양들이 생겼다.

마법이나 스킬의 효과도 절반이나 감소하는 강한 저주!

샤먼이나 성직자의 신성 마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저주였다.

:사제들부터 만나 봐야겠지.'

모험 원정대의 사제들도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걸어 볼 수 있는 것은 사제들뿐이었다.

다인은 프레야 교단으로 들어갔다.

함꼐 왔던 원정대를 비롯하여, 축복을 원하는 유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다인은 한참이나 차례를 기다려 프레야 교단의 사제를 만났다.

"제가 당한 저주를 해제하고 싶습니다."

"오래된 악령의 저주를 받으셨군요."

"네."

"들어가서는 안 될 땅에 들어간 대가. 침입자를 좋아하지 않는 곳을 탐험하면서 생긴 저주입니다. 저주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겔피 나무와 백금 가루, 당근, 흰 토끼의 피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 재료들을 몸에 바르고 갈아서 마시면, 저주를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겔피 나무를 제외하면, 모으는 것은 다소 시간이 거려도 어려운 물건은 없었다.

다인은 예상외로 쉬운 해결 방법이란 생각에 미소가 나왔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모든 조화가 여신님의 뜻대로."

                * * * * * * * * * * *

"잡템 사고팝니다!"

"필요하신 물건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프레야 교단을 나서서 광장으로 나왔더니 상인들이 줄지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상인들의 경쟁은 이제 베르사 대륙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다인은 모아 놓은 잡템들을 모두 처분하고, 차분히 광장을 거닐었다.

'이번에는 느긋하게 기다려 봐야지.'

모라타로 온 이유는 위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위드는 모라타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기다림에 지쳐 모험을 떠났다.

그랬는데 프레야의 여신상이나 여러 조각품들이 만들어지고, 성도 발전되어 있다.

모라타의 백작 위드가 돌아왔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현재는 다시금 어딘가로 모험을 떠났는지,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하필이면 그녀가 없을 때 왔을 건 또 뭐란 말인가.

모라타의 발전한 거리. 없었던 건물을 보면서 다인은 외롭게 걸었따.

'프레야의 여신상이라‥‥‥."

화려한 외모의 여신상을 보면서 질투심도 생겼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이더라도 평범해서 약간 예븐 정도인 그녀로서는 솔직히 짜증나 났다.

추억이 어려 있는 라비아스 동굴벽화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위드를 만나기는 더 어렵게 된다.

다인이 광장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누군가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키가 작고 날씬하며, 눈매가 굉장히 선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성직자나 사제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흰 로브 차림이었따.

"저를 부르셨어요?"

"네."

"무슨 일인데요?"

"저기, 초면에 죄송하지만‥‥샤면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다인이라는 분 맞죠?"

"맞아요."

"휴! 겨우 찾았네요. 제 이름은 이리엔이에요."

이리엔은 말을 거는 것이 어색한지 무척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인을 발견해서 기쁜 듯한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저희 파티다 지금 퀘스트를 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거리도 멀고, 여러 모험 계열 마법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샤면 한 분을 초대하려고 해요."

페일이 발견한 퀘스트의 이름은. '고대 흉갑의 제조 비법'.

제조하는 방법이 기록된 책자가 북부의 땅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했으니 모험가와 샤면을 영입해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다인이라는 유명한 샤먼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이리엔이 다시 긴장된 기색으로 설명했다.

"난이도는 C급이에요. 괜찮다면 저희와 함꼐 모험을 하시겠어요?"

다인은 천천히 이리엔의 얼굴을 살폈다.

'착해 보이는 사람이내. 나이도 나와 비슷한 것 같고‥‥.'

그래도 모험을 떠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지금은 누군가를 기다려야 할 입장이다.

위드가 모라타로 돌아오기만을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겠지만, 방금 모험을 마치고 온 후라서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죄송해요. 지금은 쉬려고‥‥‥."

다인이 막 말을 이을 때, 상점이 있는 방향에서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걸어왔다.

그녀가 사뿐사뿐 걸을 때마다 광장에 있는 유저들의 시설들이 따라서 움직였다.

걸음걸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활력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느낌의 소유자.

'댄서구나.'

하지만 드레스를 입고 모험을 하거나 사냥을 할 수 있는 직업은 음유시인이나 댄서밖에없다.

팔찌와 목걸이, 귀걸이 들과 춤을 추기 편한 낮은 구두.

악기를 들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댄서라고 생각했다.

"화령 언니, 어디에 있었어요?"

"식당에서 밥 먹고 있었어. 근데 이분은?"

"다인 님이세요. 샤면으로 유명하신‥‥."

"아, 그분!"

화령이 새삼스러운 얼굴로 다인을 보았다.

검은 보석 같은 피부를 가진 샤먼이라니, 무척 독특했으니까.

"의뢰에 같이 가실 거냐고는 물어봤어?"

"네. 하지만 아쉽게도 같이하지는 못하실 것 같대요."

화령과 이리엔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다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저기, 저생각이 바뀌었어요."

"예?"

"방금 전에 이야기하신 그 모험, 저도 같이하고 싶어요."

"정말요? 잘됐네요! 잘 부탁드려요."

"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다인은 이리엔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라타 영주 위드가 조각한 프레야의 여신상!

여신상의 얼굴과 화령이 절묘하게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 * * * * * * * * *

이현은 안현도의 도장에서 매일 몸을 단련시켰다.

조근의 군더더기도 없이 갈라질 듯한 선명한 근육, 육체적인 힘과 지구력도 나날이 강해졌다.

4명의 사범들이 각기 30분씩 이현을 맡아서 지옥 훈련을 시킨다

그 훈련을 경험하면서 이현의 몸은 무기가 되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이라고 해도, 인간의 몸이 둔하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지고 만다, 제 한 몸도 다스리지 못한다면 영영 검을 쥘 수 없다. 훈련이 거칠더라도 검을 쥐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다."

정일훈의 따금한 훈계에 이현은 충실하게 따랐다. 불만을 가지지도 않고 지옥훈련을 수행했다.

사법들끼리 의논을 할 정도였다.

"훈련 강도가 너무 쎈거 아닙니까?"

"저러다 그만두겠다고 하지 않을까요?"

"나도 모른다. 스승님께서 시키라고 하셨으니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

"역시 그러시겠죠?"

"가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으시긴 하지만‥‥‥."

"‥‥‥."

이현은 몸을 다스리면서 정식력도 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육체가 고되어지면 정신의 힘이 고양된다.

고된 훈련을 거쳐야만 생기는 의지력!

사범들과 함께 지옥 훈련을 마치고 나면 안현도가 내주는 차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했다.

"인삼차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이현은 인삼차를 후루룩 마셨다.

갈증이 나기도 했고, 몸에 좋은 차를 한 잔 더 마시기 위한 것!

안현도는 인삼차를 한 잔 더 따라주고 나서 물었다.

"훈련이 힘들지는 않더냐?"

"할 만합니다."

"그래. 기특하구나. 그런 자세라면 더 많이 발전할 수 있겠지. 그외에 다른 생활은 어떠냐?"

"생활이라니요?"

"너 자신의 삶 말이다. 너 자신의 생활이 어떠냐는 말이다."

이현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좋아? 무엇이 좋은데?"

"할머니는 치료를 잘 받고 계시고, 동생은 학교를 잘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현은 잠깐 망성이다가 말했다.

"생황에 큰 불만은 없습니다."

어렵던 시절에는 먹고사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따.

아파도 치료를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제법 저축도 하고 있다. 로열 로드를 하면서 필요로 하던 것들을 장만하고 있으니 불만을 가질 만한 요소가 없다.

안현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 그대로 일상적인 너의 생활일 뿐이지 않느냐."

"‥‥‥."

"지금의 너의 삶에 만족하고 있느냐?"

"예."

이현은 쉽게 대답했다.

학교 수업들이 좀 귀찮고 성가시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원하던 것들을 얻고 있으니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있따.

"지금이 딱 좋습니다. 대학교에도 다니고 있고, 여동생은 공부도 잘하고, 할머니는 건강을 되찾고 계시고‥‥‥."

안현도가 불쑥 물었따.

"그럼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냐."

"‥‥하고 싶은 일요?"

"어릴 때부터 가졌던 목적이라든가, 혹은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것 아니냐."

이현은 잠시 침묵했다.

어린 시절에는 여동생을 위해서 살았다.

밤에 잠을 자면서,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웠던 시절. 밥을 먹으면서는 허기가 사라지고 난 이후가 걱정되던 시절.

희망도 없고, 자포자기하면서 살았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가 없었다면 진작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이제 여동생도 성장해서,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할머니도 큰 수술들이 다 끝나고 회복만을 기다리신다.

인생의 목표가 가족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었다.

막상 가족들을 보살피고 난 이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이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꿈이 없습니다."

                   * * * * * * * * * *

검치 들은 절망의 평원 너머 유로키나 산맥에 있는 오크 마을에 도착했다.

돼지 얼굴을 하고 있는 오크 유저드리 바글바글했다, 번식력이 매우 좋은 편이라서 일가족을 이룬 경우도 있따.

암컷, 혹은 수컷들이 서로를 배우자로 정하고 밥 한 끼만 함께 먹어도 어디선가 새끼 오크들이 슴풍슴풍 튀어나왔다.

검오치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망했다. 유부녀 오크들이라니‥‥‥."

검삼치가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습니다, 사형 그냥 남자랑 여자랑 밥 한 끼 먹는 것뿐이잖습니까. 오크들은 원래 이런다니 이해를 해야지요."

검사치도 끼어들었다.

"사형, 남자다운 대범함으로 승부하는 겁니다."

로열 로드에서는 실제 성관계도 당연히 가능했다.

인간이나 엘프 들이 집을 구하는 목적도, 사랑하는 연인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인 경우가 상당수다.

하지만 오크들은 특수한 경우로서 배우자, 혹은 친밀한 사이인 경우 저녁에 밥 한 끼만 먹어도 새끼 오크들이 나왔다.

초창기에는 당연히 너무 비현실적인, 쉬운 전개가 아니냐고 아쉬워하는 수컷 오크들이 많았다.

오크의 종족 특성상 왕성한 번식력이 특징이다. 이런 성향을 이용하여 음흉한 속셈, 본능을 충족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오크들이 밤만 먹어도 어린 새끼 오크들을 만들 수 있어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상대는 오크암컷 콧구멍에 손가락이 4개는 들어가겠어.'

'상대는 오크 수컷!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면 수박도 통째로 삼키겠군.'

'뒤룩뒤룩한 옆구리 살과 배를 좀 봐, 맨정신으로 같이 자기 힘들다.'

'다행이다.'

밥만 먹어도 된다는 사실에 극히 만족하며, 오크들은 번식을 거듭했다.

유로키나 산맥에 오크 마을들이 늘어 가고 있었다.

어른 오크들은 어린 새끼 오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장시킨다. 오크족의 일가를 형성하고, 부족을 다스리는 오크들이 등장했다.

세에취는 오크 지휘관으로서, 유로키나 산맥에 도착하고 나서 재능이 빛을 발했다.

"오크들이여, 취취췻! 우리는 더 많이 먹어야 된다. 더 많이 가져야 된다. 싸우자. 취익!"

타당한 설명이나 이유 따위는 없다.

먹고 싸우자는 단순한 논리로 오크들을 만족시키고, 부하들을 만들었다.

오크 마을 인근에는 호기심으로 구경 온 여행객들이 다수 있었다.

"오크들은 정말 특이하게 생겼네."

"개개의 오크들은 약하지만 번식력만큼은 무서울 정도야. 용병을 구하는 게 아니라, 새끼 오크들을 쉽게 낳을 수 있ㅅ고 끝없는 충성심을 바치게 되니‥‥‥. 오크들은 정말 빨리 성장 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크 엘프과는 극히 나쁜 사이라고 하던데 괜찮을까?"

"다크 엘프들도 유저들이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들끼리의 대립이 첨예하게 이루어지겠지."

"훗날 인간과의 전쟁도 이루어질 수 있겠군."

"오크와 인간의 종족 전쟁? 가능성이 없진 않을 거야. 오크들의 개체 수가 늘어서 중앙 대륙으로 나온다면 부딪칠 수 밖엥 없을 테지."

"오크들의 힘이 약한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

"오크들과 싸워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잖아. 인간의 군대가 절망의 평원을 넘어서 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고. 오크들과 싸움이 벌어지면 그 자체로 퀘스트가 될 수도 있으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

구경꾼들은 마을에 들어가지는 않고 관찰하고 있었다. 오크와 인간의 사이는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가까이 가기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치들이 스스럼없이 오크들의 마을에 들어가고, 암컷 오크들과 함꼐 퀘스트를 진행하는 광경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오크들이 전혀 경계를 하지 않잖아."

"퀘스트 도중이겠지."

"내 생각에는 직업의 특색일지도. 다른 종족과의 친밀도가 높은 직업이 있다고 들었어."

구경꾼들 사이에 의견들이 대립되고 있을 때, 유력한 해답이 나왔다.

"생긴 걸 봐. 수컷 오크랑 무슨 차이가 있어?"

"‥‥‥."

자세히 보니 그도 그럴듯했다.

인간 종족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떡 벌어진 어깨나 체격들은 오크들마저 압도 하고 있다.

단순한 오크들은 그 체구만 보고도 쉽게 친해지도 있었던 것이다.

                   * * * * * * * * * *

"차합!"

검치는 거칠게 투핸디드소드를 휘들렀다.

오우거. 힘으로만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몬스터가 상대였다.

기와 교, 검술의 최정점에 있는 검치는 쌓여 있던 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검의 움직임이 빠르고 격렬했다.

크오오오!

오우거가 극도로 분노해서 도끼를 휘둘렀따, 풍압이 얼굴을 쓸고 지나갈 정도였지만, 검치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했다.

"탓!"

검치가 휘두른 검이 오우거의 옆구리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의 뛰어난 공격력으로도 오우거는 잘 죽지 않았다.

스킬을 아예 시전하지 않고 있으니 마나는 펑펑 남아돈다.

일부러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지도 않고 오우거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늦게 거둔 수제자가 낮에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꿈이 없다고‥‥‥."

검치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내겐 싸움뿐이었다.'

강함을 쫓아서 피가 튀는 싸움터를 전진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끔찍한 부상을 입어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강자들을 꺾으면서 아주 잠깐 만족함을 느꼈지만, 더 강한 자들을 향해 도전하는 과정에 불과할 뿐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싸움과 단련만 하다가 젊은 시절이 지나갔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검으로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강자들을 꺾을 때마다 받았던 칭송과 상처투성이의 영광.

검으로 누구도 오를 수 없는 신기원에 오른 검치였다.

일반인 중에는 모르는 사람들도 많지만 무술인, 뒷골목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경외시하고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검치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목적을 이루고 나니 일생의 반려자도 없고, 가족들도 모두 그가 죽을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난 가족이 없었지."

일생을 바쳐 이루었던 목표에 대한 공허함과 허탈감!

"검으로는 최고가 되었지만, 내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치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가족을을 찾고 제자들을 기르는 평범한 생활로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고독의 시간을 지나야 했다.

제자는 그와 비슷한 전철을 밟을 리가 없다.

가족들에 대한 부담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떄문이었따. 가족과 친구, 사형제들이 함께할 것이므로 고독함을 느낄 까닭이 없으리라. 위드는 강한 의지와 판단력,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행동력을 가지고 있다. 뭐든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는다. 간혹 매우 소심한 경향을 보이기는 해도, 남자였다.

현재의 상태는 평생의 목표와 꿈을 찾고 있는 아이와도 같다.

"그 녀석이 부럽다."

검치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수제자가 백분 이해되었다. 이혜연처럼 예쁘고 귀여운 여동생이 있었다면 그도 가족을 떠나지 않았으리라.

"친구들은 또 어떻고."

화령이나 이리엔, 로뮤나처럼 아름답고 싹싹한 아가씨들도 주변에 있다.

검치는 회상해 보았다.

자신의 젊은 시절은 과연 어떠했던가.

"재수 없게 생긴 사내놈들밖에 없었다! 건방진 놈들을 밟아 주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했어."

위드처럼 부러운 환경에 있었다면 외 젊어서 싸움만 했겠는가!

"이런 지긋지긋한 독신 인생."

검치는 푸념을 하며 결심을 굳혔다.

"사범 녀석들에게만 맡겨 놓고 너무 내버려 두었지. 이제 가르칠 때도 되었어."

진정한 지옥 훈련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리라.

위드에게 진정한 검을 가르쳐 줄 작정이었다.

                 * * * * * * * * * * 

축제가 다가오면서 부터 한국 대학교 교정에는 밤늦게까지 남아 있는 학생들이 부쩍 많아졌다.

학과마다 연극과 뮤지컬을 준비하고,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무대가 설치되었다. 가요제, 마술 쇼, 인근 대학과의 운동회까지 추진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퍼졌다.

이현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텔레비전을 보면 나오는 걸 굳이 왜 해야 되는 거지?"

철저하게 메마른 감수성으로, 축제란 학교에 출석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반가운 것에 불과했다. 지역 문화와 어울리고, 유명 인사들도 많이 찾아오는 한국 대학교의 축제도 이현에게는 번거로운 일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학과의 선배들이 나와서 으름장을 놓았다.

"이번 축제에는 다른 과에 뒤지면 안 된다. 신생 학과라고 얕보이면서 살 수 없어. 모두 알겠지?"

"네!"

웃는 얼굴로 화답하는 신입생들.

이현은 혀를 찼다.

"쓸데없는 경쟁 심리야. 왜 얕보이면 안 되는 거지? 무시당하면서 사는 인생이야말로 편안한 건데. 한 학교 내에서의 반목과 편 가르기라니, 정말 말세로군."

불만이야 상당히 있었지만 번거로운 일에 끼고 싶지 않았으니 침묵을 지켰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하겠지.'

축제에 모두가 참석하라는 법은 없으니, 그냥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축제의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가상현실 학과에서는 구체적인 계획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로열 로드의 캐릭터들로 분장해서 행진을 하는 건 어떨까요?"

"대형 공룡을 만드는 거예요. 티라노사우루스를 영상화 시켜서 축제에서 돌아다니게 하면 압권일걸요."

"잔인성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벨로시랩터들은 어때요?

수백마리가 뛰어다니면서 인간 사냥에 나서면‥‥."

황당무계하고 거창한 의견들만 나오다 보니 실속 있는 계획이 수립되지 않았다.

축제가 이 주일 정도 남았을 때였따.

학회의 임원들은 전체 학과 회의를 개최했다.

"우리도 뭔가는 해야 해."

학회장을 비롯한 학회 임원 선배들의 통일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아무 준비도 계획도 없었따.

"매번 축제마다 뭘 준비하기도 피곤하고, 이미 시간도 없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요?"

최상준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복학생 선배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교수님들이 방학하기 전에 학과MT를 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중이라시던데."

"‥‥."

"실미도 6박7일 코스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축제에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귀찮아하던 선배들이나 신입생들의 의견까지도 하나가 되었다.

"문제는 뭘 하느냐인데‥‥운동회에는 당연히 학과 이름으로 참석을 해야 되고. 우리 과에는 여자들이 많으니까 많이 나서 주면 좋겠어. 싫은 사람?"

"‥‥."

"없구나. 그럼 전원 참석하는 걸로 해."

학회장의 말은 절대적이었따.

실미도에 가느니 축제날 조금 고생을 하는 편이 백번 낫다.

"그다음으로는 급히 가요제라도 나가 봐야 될 것 같아. 교수님들이 가요제는 꼭 챙겨 보시니까."

"가요제에는 다섯 팀 정도 연습시켜서 올려 보내죠."

의견이 빠르게 일치를 보고 있었다. 학생들이 즐겨야 하는 축제였지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뭐든 해야 했다.

학생들도 본인이 참석하는 것만 귀찮아할 뿐, 한국 대학교의 축제는 유명하고 볼 것도 많았으니 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저도 열어야 될 것 같은데. 주점에서 행사 진행비를 벌어야 되거든. 주점에 참여할 사람?"

주점이라면 늦게까지 요리도 해야 하고, 잡일이 많다. 이래저래 피곤한 일이었지만 이현은 선뜻 손을 들었다.

"이현 맞지? 그래, 고맙다. 또 할 사람?"

분위기상 신입생이나 선배들이나 뭐든 최소 하나씩은 참여해야 될 것같았다.

차라리 상대적으로 편한 주점의 일을 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이 주일 내내 연극이니 뭐니 준비하느니, 축제 기간에만 고생하는 편이 더 낫겠지.'

주점은 낮부터 문을 여니 시간도 나름 남길 수 있다. 이현을 제외하고는 자진해서 손을 드는 학생은 없었다. 주점에서 일하면 축제를 구경하기도 여러모로 힘들고 귀찮다고 여겼으니,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손을 든 1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그저 같은 학교를 다녀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그녀. 학교에서 매일 보고 있긴 하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혹은 천국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

서윤이 손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학회장도 당황해서 존댓말을 했다.

"설마 주점 일에 참가하시려고요?"

서윤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학생드링 일제히 손을 들었다.

"학회장님, 저요! 저도 주점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먼저 손들었습니다. 꼭 시켜만 주세요."

"선배. 아니 형님! 저 동훈이입니다. 저 끼어 주실 거죠? 그렇죠?"

"상혁아, 내가 졸업할 때까지 술 살 테니 주점 일에만 좀 부탁한다. 정말 평생의 은인으로 모신다!"

남학생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참여하겠다고 나서면서, 주점의 인원은 금방 채워졌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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