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데이트
이현이 면사포를 벗겨 주자마자, 천막 주점에는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영업 시작할 시간이죠?"
"주점 열었죠?"
미리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15분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니 손님들
이 밀고 들어온 것이다.
"헉!"
"서, 서윤이다."
서윤은 한국 대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
"주문요."
서빙을 맡은 여학생들이 드레스를 입고 뛰어다녔다.
"손님, 주문해 주세요!"
"주문 안 하실 거예요?"
손님들은 음식을 시키라는 재촉에도 서윤만 넋을 잃고 볼 뿐이었다.
아름다움이 주는 시각적인 충격!
주문을 하라는 여학생들의 재촉에 메뉴판을 보고 다시금 놀랐다.
"산 곰장어, 자연산 우럭, 대게찜, 장어구이, 해물 자장면 등... 이거 진짜 메뉴예요?
우럭을 시키면 매운탕도 따라온다니......"
"네. 오늘은 주로 해산물 위주고요, 축제 기간 내에 메인 메뉴는 매일 바뀌어요. 과일
안주나 계란말이, 파전 같은 메뉴는 늘 주문 가능하고요."
"일단 산 곰장어 3인분 주세요."
"여기 산곰 3인분!"
손님들의 테이블에 버너와 불판이 척척 놓였다. 그러고는 곰장어들이 살아 있는 채로 양념과 함께 요리가 되는
것.
곰장어가 꿈틀러릴 때마다 양념과 뒤섞였다. 요리가 다 된 후에는 영양가 만점의 곰장어를 토막 내어 먹는다.
이현은 기왕 주점을 할 것이라면 수익도 내고, 음식의 질도 끌어 올리고 싶었다.
"아무리 축제 주점이라고 해도 대충대충은 있을 수 없지!"
손님들이 돈을 내고 사 먹는 음식이다.
어수룩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맛도 영양도 확실하게 책임져야 할 일.
우럭 등의 회를 뜨는 것은 이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가장 바빴다.
도마에서 예술적으로 움직이는 칼질!
살점을 발라낸 우럭이 살아서 눈을 끔벅였다.
신경들을 교묘하게 피해 가면서 이루어질 칼질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자연산 우럭이나 대게, 곰장어 들은 평소 친분이 있던 시장 상인들이 납품을 해 주었다. 재료의 신선함은
물론이고, 믿을 수 있는 제품들을 염가에 받을 수 있었다.
"정말 대학생이었어?"
"아무튼 학생들에게 많이 홍보해 줘. 시장 상품 사 달라고 말이야."
넉넉한 인심 덕에 좋은 재료들을 쓸 수 있었지만, 장소가 학교 주점이다 보니 가격이 비쌀 수가 없다.
로열 로드에서야 사냥을 통해 너 나 할 것 없이 돈을 벌 수 있으니 바가지를 씌워도 부담이 적다. 하지만 학생
들에게 비싼 가격을 받는 건 양심의 문제였다.
결국 적당한 수준에서 양을 줄이고 가격을 높지 않게 조절했다.
그럼에도 손님들은 만족했다.
"여기요."
"9번 테이블에도 주문 받아 주세요."
서윤도 드레스를 입은 채로 주문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단지 걸어만 다닐 뿐인데도 뿜어 나오는 여신의 포스!
멍하니 쳐다보다가 손님들이 음식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술을 먹다가 몇십 분씩 서윤만 바라보는 일은 다반
사로 일어난다.
서윤이 걸어 다닐 때마다 달콤한 레몬 향도 났다.
화장품은 가벼운 스킨이나 로션만을 바른다. 맨 얼굴로도 압도하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특별히 향수를 뿌린 날이
다.
서윤이 손님들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
주문을 바라면서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주위 손님들의 눈길에 부끄럽지만 참아 내고 있었다.
"과일 안주 주세요."
"......"
서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돌아섰다.
테이블에 안주가 상당히 남아 있던 손님들도 앞다투어 새로운 주문들을 했다. 순전히 서윤에게 말 한마디라도
해 보기 위한 욕심에서였다.
"손님들이 30분이나 기다리고 있어요."
"주방장, 대게찜 언제 나와요?"
"금방 나가!"
이현만 초주검이었다.
요리 속도가 느린 다른 학생들 때문에 2배, 3배 일해야 했던 것이다.
축제의 첫째 날에는 폭죽도 학생들의 노래도 구경하지 못하고 아예 주방을 떠자니도 못했다.
다음 날 주점에는 더욱 많은 손님들이 일찍부터 밀려들었다.
"주문 받아 주세요!"
"여기 주문요!"
주방과 테이블 모두 분주했지만, 첫날보다는 한결 여유가 엿보였다.
요리들은 미리 손질을 마쳤고, 밑반찬도 충분히 준비를 해 놓았다. 술도 박스째로 쌓아 놓았으며 천막도 확장
했다.
학과에서 10명이나 되는 지원군도 보내 줘서 설거지와 테이블 청소 등 잡일을 해 주었으니 일이 줄어든 탓이다.
돈을 버는 재미로 이현은 일을 하는 보람을 느꼈다.
'첫날 마진이 70만 원. 그릇 등의 닷새간 대여료를 다 포함하고도 이만큼이나 남았어.'
지금의 장사는 다 훗날의 경험!
손님을 상대하는 법이나 요리법은 아르바이트 경력 등을 통해서 이미 충분히 안다. 그럼에도 자영업이란 만만
하게 봐서는 안 될 일.
'이런 특수에 대박을 치지 못한다면 앞으로 장사 쪽으로는 눈길을 돌려서는 안 돼!'
남들이 즐기고 노는 축제의 날 비장한 각오로 주방을 책임졌다.
둘째 날도 큰 규모의 수익을 내고, 셋째 날부터는 테이블에 자리가 비는 시간이 없게 되었다.
축제의 나흘째가 되었을 때도 이현은 축제 구경은 일절 불가능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선배들이 대신 부엌칼을 잡았다.
"이현아,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도 가서 놀고 와."
"제가 맡은 장소는 여기인데요."
"지금이 무슨 신라 시대냐, 임전무퇴의 정신을 발휘하게? 축제가 무슨 전쟁터도 아니고, 가서
놀다 와. 다른 애들도 눈치껏 빠져서 놀기도 하고 그러는데, 너도 축제를 즐겨야지."
이현은 앞치마를 벗어 놓고 허리를 폈다.
'축제라...... 다른 학과에서는 무슨 장사를 하는지 볼 필요성은 있겠군. 식당에서도
여러 노하우들이 필요한데. 정보란 다양할수록 좋지.'
"그럼 잠시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푹 쉬어. 벌써 저녁 6시다. 주점은 10시까지만 하기로 되어 있으니까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 볼게."
축제의 열기가 과열되지 않도록, 주점들은 10시면 문을 닫았다.
"예."
이현이 천막 주점을 둘러보았다.
테이블이 손님들로 가득 차 있고, 학생들은 주문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 사흘간 서윤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모든 손님들이 그녀에게 주문을 하기를 원했다. 덕분에 고생하던 서윤은 오늘은 휴가를 받아 주점에 나오지 않
았다.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 돌아갈 테지."
이현은 천막 주점을 나오자마자 축제의 인파에 휩쓸렸다.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 타 학교 학생들, 분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한국 대학교 학생들.
조용하던 교정이 시끌벅적했다.
젊음의 열기가 느껴지는 공간!
이현은 그 열기를 들이마시기라도 할 듯이 크게 숨을 쉬었다.
"아, 좋다.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구나!"
항상 도시락을 까먹던 잔디 광장에는 무대가 만들어져서 밴드들이 연주를 했다.
가상현실학과에서는 체육대회와 가요제, 연극에 몇 팀씩 참여했다.
결과는 모두 참패!
체육대회는 예선 탈락, 가요제는 라이브 도중에 고음 불가 사태, 연극에는 초등학생 관객들만 몇 명 찾아왔다
고 한다.
"저 누나들 연습 안 했나 봐."
안경을 쓰고 있는 예리한 눈빛의 초등학생은 이런 말도 했다.
"허술해."
초등학생들에게도 비판받는 연극!
가상현실학과의 모든 지원이 주점으로 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다른 학과들은 미리부터 많은 준비를 한 듯 다양한 행사들을 개최하고 있었다.
학과의 특성을 살려서 수의학과 쪽에서는 소고기를 판매 했다.
사회복지학과에서는 장애인들과 노약자들의 휠체어를 밀어 주며 안내를 해 주고 있었다.
인근 호텔이나 본인의 집 등에서 숙박을 시켜 주면서 직접 목욕도 시켜 주고 선물도 주는 뜻깊은 행사를 한다
고 한다.
의상디자인학과에서는 직접 만든 옷들을 염가에 판매 했다.
음대생들은 항상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미모의 여대생들이 연주를 하니 남자 관객들이 바글바글해 흥행 몰이
를 했다.
무대들이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고, 소규모 행사들도 끊이지 않는다.
쓰지 않는 물건들을 처분하는 벼룩시장도 활발했다.
이현의 발길이 메인 무대의 뒤에 있는 벼룩시장 쪽으로 향할 때였다. 그의 팔을 옆에서 누군가가 잡아끌었다.
"자, 여기 또 1명의 지원자가 나온 것 같습니다."
무대에서는 사회자가 노예팅을 진행 중이었다.
진행 요원들이 관중 중에서 노예팅 참여자를 선정하고 있었는데, 관중을 제치고 이현이 불쑥 튀어나왔던 것이다.
노예팅에 참가한 남학생들은 총 30명!
사회자가 마이크를 가까이 대고 외쳤다.
"각자 갈고닦은 장기 자랑을 보여 줄 시간입니다. 얼마나 멋진 장기들을 보여 주느냐에 따라서
주인님이 달라질 수 있으니 노예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야겠죠! 그럼 1번 참가자부터 시작입니다."
이현은 23번의 번호를 받았다.
무대에 올라서지 않고 버티려고 했지만, 관중의 야유로 인해서 부득이하게 올라왔다.
'장기 자랑이라니, 오늘의 운수는 최악이구나.'
잘하는 게 대체 뭐가 있는가!
그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무술뿐이다.
다른 참가자들이 노래와 춤, 악기 연주, 마술, 개그 쇼 들을 보여 줄 때마다 이현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관중의 싸늘한 눈초리에 겁이 났던 탓!
나서는 성격도 아니고, 개인기가 있지도 않았으니 긴장이 더해졌다.
무대 공포증. 같은 학교 학생들이 보고 있으니 더욱 끔찍 했다.
'춤을 추자. 국민 체조라도 할까?'
6번 참가자가 머저 국민 체조를 했다.
"우우우!"
"지겹다. 때려쳐!"
이현은 안도했다.
'다행이야. 국민 체조는 안 해서. 그럼 노래를 부를까? 명곡인 <끝까지 사랑해요>가 좋겠군.'
14번 참가자가 먼저 그 곡을 불렀다.
웃을 수도 없어요
매번 당신의 웃음이 기억나서 울지도 못하죠
내가 슬퍼하면 당신이 아파할지도 몰라서
이현이 듣기에는 기가 막힌 가창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높은 점수는 못 받았다.
이제 점수를 잘 받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겨야만 한다.
"23번 참가자의 장기 자랑을 보겠습니다."
어느새 순서는 이현의 차례로 넘어왔다. 짧게 보여 주는 장기 자랑이었기에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칼을 좀......"
"네?"
"사과 깎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사과요. 사과 준비되겠습니까? 네, 금방 과도와 함께 준비된다고 합니다. 23번 참가자의 장기
자랑은 사과 깎기. 모두 한번 감상해 보시죠."
진행 요원들로부터 넘어온 잘 익은 사과와 과일칼!
이현은 사과를 빙글빙글 돌리며 어루만졌다. 그리고 한 순간.
사사사사사삭.
한 호흡에 과도가 사과의 껍질을 깎으며 미끄러졌다.
칼날이 스칠 때 허물 벗듯이 벗겨져 나가는 사과 껍질. 중간에 끊어짐이나 잔여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벌써 다 깎으신 건가요?"
"예."
"정말 빨리 껍질을 깎았네요. 어쨌든 좋은 묘기를 보았습니다!"
사회자가 흥을 돋우기 위해서 치켜세워 줬다. 노래나 춤등의 흔한 장기 자랑만 보다가 새로운 묘기를 보았다는
생각에서였다.
관중도 적당히 박수를 쳐 주었다.
'휴. 겨우 넘어갈 수 있었군.'
이현의 뒤에도 7명이 장기 자랑을 하고, 이제 노예들의 가격을 매길 시간이 되었다.
사회자가 노예들을 줄지어서 세웠다.
"잘생긴 분들은 뒤쪽에! 본인이 평범하다 싶은 분들은 앞쪽에 서 주시기 바랍니다!"
이현은 사회자의 말대로 앞에 서려고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그런데 다른 노예들이 먼저 튀어나가서 앞쪽을 차지했다.
관중 중에 노예를 구입할 의사를 가진 사람은 일부일 뿐!
구입해 줄 친분 있는 사람들을 미리 섭외해 놓은 마당이었으니 앞에 서려고 했다.
무대책으로 나온 사람은 이현과 몇 명뿐이었다.
"30,000 원에 팔렸습니다."
"15,000 원에 팔렸습니다."
"이번 노예는 꽤 고가로군요. 48,000 원! 구매하실 분의 말씀으로는 오늘 하루 제대로 부려
먹어서 본전을 뽑을 생각이랍니다!"
이현의 차례도 돌아왔다.
사회자는 이현을 살피더니 크게 낙담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이번 노예에 대해 말씀드릴 것 같으면... 힘은 좋아 보입니다. 가격 포기합니다.
10 원부터 시작합니다."
노예의 가격 10 원!
다른 노예들은 최소 몇백 원, 혹은 천 원에서 시작했는데...... 장난인 줄 알면서도 이현은 비참함을 느꼈다.
그런데 10 원에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여기요. 20 원!"
관중 중에서 아이를 업고 있는 아줌마가, 딱해 보였는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다른 쪽에서도 손을 들었다.
"20 원 받고 10 원 더!"
소리친 곳을 쳐다보니 여동생 이혜연이 있었다.
30 원까지 불러 주는 감격적인 가족의 정!
사회자가 소리쳤다.
"자, 30 원까지 나왔습니다. 40 원 부르실 분 없습니까?"
"40 원!"
"55 원!"
"80 원!"
어차피 싼 가격이다 보니 마구 부르는 사람들이 나왔다.
"175 원."
"199 원!"
"390 원!"
"390 원! 390 원을 끝으로 더 이상 부르는 사람이 없으면 이대로 낙찰됩니다. 열을 세겠습니다.
열. 아홉... 일곱......"
비참한 가격 390 원!
더 이상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자 사회자는 낙찰을 시키려고 했다.
숫자를 둘까지 세었을 때였다.
청바지에 야구 점퍼,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는 여자가 손을 들었따.
"2백만 원!"
"2백만 원! 2백만 원 나왔습니다. 정말 2백만 원을 부르셨습니까?"
사회자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관중의 시선도 일제히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너무나도 당연히 장난일 줄로 안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야구 점퍼와 선글라스를 벗자 찬탄의 소리들이 나왔다.
"정효린이다!"
"정효린이 우리 학교 축제에 왔다."
세계적인 무대 위의 노래하는 요정이라는 정효린이 노예팅에서 2백만 원을 부른 것이다.
이현은 그렇게 정효린에게 낙찰되었다.
"노예, 팔짱!"
"넷."
이현은 서둘러서 정효린과 팔짱을 끼었다.
고혹적인 향기가 맡아질 정도로 밀착된 거리. 팔짱을 끼고 사람들을 헤치며 다른 장소로 향했다.
정효린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정효린이 생글생글 웃었다.
"저, 축제 구경시켜 줄 거죠?"
"나도 잘 모르는데......"
"괜찮아요. 같이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해 보는 게 재밌는 거잖아요. 저도 대학생이기는 해도
학교에는 거의 못 가봤거든요. 축제 구경도 처음이에요. 축제에서 노래를 부른 적은 많아도요."
"그냥 다른 사람이랑 돌아다니시죠. 전 바쁜 몸이라서......"
"노예, 반품한다?"
"......"
노골적인 반품의 협박!
노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무대에 오르거나, 혹은 2백만 원을 물어 줄 수도 없다.
"축제를 안내해 드리죠."
"진작 그러시지."
정효린은 이현을 잘 파악하고 다루는 법에 익숙해졌다.
'협박이 가장 잘 먹혀!'
정효린은 이현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이현은 걸을 때마다 그녀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군살 한점 없는 몸매와 포근한 가슴이 팔에 자꾸 부딪쳤다.
"저기, 주인님. 연예인이 이래도 됩니까?"
"뭘요?"
"팔짱 끼고 돌아다니면 오해를 살 수가 있지요."
"어떤 오해를 사는데요?"
"무릇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붙어 있다 보면......"
사람들이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정효린 씨, 진짜 착해."
"불우이웃돕기 노예팅에 2백만 원도 기부했다잖아."
노예팅의 수익금은 전액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쓰이게 되어 있었다.
"팔짱 낀 것 좀 봐."
"쉿! 팬 관리야. 팬 관리."
"역시 착한 정효린이라서 저런 남자에게도 애인처럼 잘해 주는구나."
"팔리지도 않던 노예 주제에 완전 행운을 잡은 거지, 뭘."
한국 대학교 축제에는 기자들도 있었지만,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첫 앨범부터 떠서 데뷔 초반 이후로는 대학교 축제와는 담쌓고 지낸 줄 알았는데 정효린 씨가
이런 곳에 오다니... 의외인걸."
"세계적인 요정답지 않게 정말 착해."
화사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는 그녀였다.
주점에서 일하다가 나온 이현과는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린다.
할리우드의 유명 남자 배우들의 고백까지도 무시해 버린 전력이 있었기에 더욱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캔
들이나 남자관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깨끗했던 정효린이었다.
노래만을 사랑한 그녀였던 것이다.
"남자랑 팔짱 껴 보니까 살짝 설레네. 다들 이런 기분으로 팔짱을 낄까."
"예?"
"그냥 혼잣말이에요."
이현은 그녀가 한 말을 들었다.
'나도 여자와 팔짱을 끼어 본 건 처음인데......'
스물두 살이 넘도록 여성과의 접촉은 거의 여동생이 유일했다.
어린애일 때 업고 다니고, 기저귀를 갈아 주고, 목욕을 시켜 주던 아득한 시절의 접촉이 전부였던 인생!
"우리 인간 두더지 잡을래요?"
"싫은데......"
"2,000원이래요."
"......"
이현의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두 장이 나왔다.
'역시 여자와의 데이트에는 돈이 드는구나.'
2,000원이나 쓰다니,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 같았다.
늙어 죽는 순간에도 떠오르게 될지 모를 일.
정효린은 팔짱을 풀지 않은 채로 왼손으로 뿅망치를 들었다.
"얏! 얏!"
이현은 방관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빗나가는 그녀의 뿅망치를 보면서 집중이 되는 자신을 어쩌지 못했다.
"좀 더 왼쪽!"
"알았어요."
"오른쪽에 지금 나오려고 해!"
"봤어요!"
"위쪽에서 두 번째! 지금 안 들어가고 있다. 빨리 잡아!"
"내가 알아서 할 거라니까요!"
두 남녀의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우씨, 12마리나 놓쳤어."
"더 빨리 움직였어야지."
"옆에서 자꾸 말 시켜서 그렇다니까요. 말만 안 시켰어도 안 놓쳤어요."
"다시 해 봐."
"진짜 다 잡을 거예요."
정효린은 아까보다 과격하게 뿅망치를 휘두르면서도 팔짱을 풀지 않았다.
불편하겠다는 생각에 슬며시 팔을 풀려고 하다가, 이현의 손이 그녀의 손을 살짝 스쳤다. 그러자 정효린이 이현
의 손을 꼭 붙잡는 것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친밀하게 이루어져 버린 일이었다.
"쳇! 3마리 놓쳤네."
"그래도 잘한 편이야."
"다음엔 뭘 하고 놀까요?"
두더지를 잡으면서 친해진 남녀!
이현도 편안함을 느낀 탓인지 말을 놓았다.
"비비탄 권총 쏴서 인형 뽑기 할래?"
"좋아요."
한 발에 300원!
이현은 가격대를 보고 나름 저렴한 놀이를 골랐다.
"아저씨, 각자 열 발씩 총알 장전해 주세요."
정효린은 이번에는 자신이 지갑을 꺼내 계산했다. 이현에게 큰 감동을 주는 행위였다.
'좋은 여자구나......'
정효린이 한 손으로 권총을 들었다.
"제가 먼저 쏠게요."
"응."
정효린이 쏘는 총알들은 절묘하게 인형들을 빗나갔다. 어쩌다가 인형이 맞더라도 쓰러지지 않았다.
원래 이 바닥이 다 그렇다.
함부로 인형을 넘보려고 하는 손님들고 주인 간의 전쟁!
정효린의 실패 후에, 이현은 큰 인형은 노리지 않았다.
'중형 인형 무게 대략 780그램. 인형 눈을 붙일 때에 수없이 느껴 봤던 무게다. 비비탄으로는
정확히 쓰러뜨리기 쉽지 않아.'
인형의 중심을 맞히더라도 타격력이 크지 않다.
연발로 쏴야만 가능하리라.
한 발에 300원씩 내던지는 셈이라서 이현은 작은 참새 인형만을 신중히 노려서 떨어뜨렸다.
'성공이다.'
이현은 참새 인형을 여동생에게 줄 작정이었다.
'올해 생일 선물은 이걸로 때우면 되겠군.'
그런데 정효린이 인형을 가로챘다.
"이거 저 주는 거예요?"
"......"
눈을 반짝이며 달라고 하는 예쁜 표정에 차마 거부할 수가 없다.
"가, 가져도 돼."
"고마워요."
장효린은 소중한 듯이 인형을 품에 안았다.
둘은 회전목마도 타고, 대학생들의 연극도 관람했다.
한국 대학교의 본관 옥상에서는 축제와 도시의 야경을 보는 기회도 가졌다.
폭죽이 하늘을 수놓고 있을 때에도 정효린은 이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좋아하는 감정을 고백하지 않고, 느낄
수 있도록 전하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이현은 생각했다.
'손잡는 거 참 좋아하는구나.'
호숫가의 작은 무대에 정효린이 올랐다.
청중도 몇 명 되지 않는 초라한 무대. 악기로는 피아노 한 대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 노래 부를래요?"
정효린이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물었다.
여전히 손을 잡은 채라서 이현도 옆에 앉아 있었다.
"어떤 노래?"
"아무 노래라도... 원하는 곡을 말씀해 보세요. 어떤 노래라도 좋지만 행복한 곡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이 너무 행복하고, 기분이 좋아요."
정효린은 콘서트를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마력적인 음성으로 콘서트에서 6만 명을 열광시키고, 어느 사회주의국가에서는 광장에서 수십만 명의 청중에게
음악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했다.
노래를 부르면서 더없이 빛이 나던 매력적인 그녀였지만, 무대를 마치고 나면 외로운 호텔 방에서 혼자 잠이 들
었다.
음악만이 유일한 벗이었고, 허전함과 고독을 달래 주는 수단이었다.
행복을 노래하지만, 정작 노래를 부른 후의 그녀는 너무도 외로웠다.
이현과 함께 있으면 진심으로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눈빛 대화>를 들려줄래?"
정효린의 데뷔 곡 <눈빛 대화>.
이현의 여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다.
정효린이 열여섯 살 고등학생일 때 발표한 것으로, 이 곡이 전 세계적인 히트를 치면서 그녀는 스타가 되었다.
후속 곡들이 대중의 더 큰 사랑을 받았지만, 앳된 소녀가 부르던 <눈빛 대화>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불러 줄게요. 대신... 한 손으로만 연주할게요."
이유는 손을 놓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세상에 언어는 없어요.
단지 우리는 의미 없는 웅얼거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죠.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저는 듣지 못하고 있으니.
정효린의 목소리는 마법처럼 퍼졌다.
한 손으로 연주하는 약간 부족한 피아노의 멜로디를 감싸 안기에 충분할 만큼 곱고 아름답다.
어떤 몸짓도 허용되지 않아요.
대화는 존재하지도 않아요.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눈빛뿐.
당신의 눈빛을 내게 보여주세요.
간절함, 안타까움, 애절함, 분노, 실망, 염원, 친근함, 사랑.
이 모든 감정을 눈빛으로 표현해 주세요.
음악에 이끌린 청중이 무대로 걸어오고 있었다.
조그마한 소란도 일으키지 않도록 조용히 좌석을 찾아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호수 공연 무대에서 정효린 노래 중. 빨리 와!'
밥을 먹을 때에는 무엇을 고를지.
맛있게 먹었는지, 그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두 눈빛으로 말해 주세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마음을 읽어 나가죠.
어떤 오해와 왜곡도 없는 세상.
그대의 눈빛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을 볼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해요.
그래도 우린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죠.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더라도 저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저 또한 그럴지도 모르니까요.
눈빛을 본다는 건 정확하지 않은 모호함.
감동 없는 말이 아니라, 행복을 비춰 주세요.
그대의 눈동자에 내가 보이도록.
잠시라도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말아요.
눈빛 한 번에 마음 한 번
그렇게 마음을 비춰 주세요
당신의 빛나는 눈동자가 가깝다면 더욱 좋겠네요.
여전히 신비로운 목소리.
앳된 고등학생이던 그녀는 없지만, 이제 막 사랑을 알아가는 여인이 있었다.
신비로운 목소리로 슬픔과 비통함이 아니라 사랑을 가르쳐 달라고 흐느끼고 있다.
딱딱한 말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지 못한다면.
그때 저는 눈빛으로 말하고 싶어요.
눈빛이야말로 고막을 통해 들리는 음성보다도
훨씬 당신의 가슴에 깊이 파고 들어갈 테니까요.
말로는 전하지 못하는 무엇을 전할 수 있을 거예요.
눈빛으로 말하기.
저는 당신의 눈빛을 보고 싶네요.
정효린은 피아노를 보지 않았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이현을 보면서,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노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