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블랙 드래곤
= 콰아아아아아!
성벽을 밟고 선 초대형 킹 히드라의 머리 9개가 먹이를 노렸다.
쏜살처럼 날아간 머리들이 사제와 병사 들을 집어삼킨다.
콰르르릉!
돌로 지어진 탑을 부숴 버리고 궁수들을 으적으적 깨물어 먹었다.
신선한 풀을 보면 열불이 터질 정도로 느릿느릿 먹는 누렁이의 되새김질과는 차원이 달랐다.
공포와 현기증마저 느껴지는 모습.
명문 길드 3개가 동시에 연합해서 탐험했던 늪지에, 전설적인 몬스터 킹 히드라가 있었다.
당시 킹 히드라는 불과 몇 분 사이에 명문 길드원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또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더 많은 먹이를 먹기 위해서였다.
끊임없는 식욕을 불사르는 존재, 킹 히드라!
"쏴, 쏴라!"
궁수들의 표적이 언데드에서 히드라로 바뀌었다.
성벽을 밟고 동료들을 먹어 치우는 히드라의 몸통을 향해서 화살을 날린다.
히드라의 9개나 되는 머리들이 그 화살들을 보았다.
대부분의 화살은 두꺼운 가죽을 뚫을 수 없었고, 설혹 미세한 상처를 남기더라도 금방 초록색 피가 멎고 아물어 버렸다. 트롤을 능가하는 재생력을 가진 히드라의 특성 때문이었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살려 줘!"
"암흑 기사들이여, 사제들을 보호하라."
히드라의 머리들은 수십 미터씩을 움직여서 먹잇감들을 찾았다.
성탑보다도 큰 주둥이에, 불과 독가스를 내뿜는 공격까지!
요새의 성벽 위는 터져 나오는 비명으로 아우성 그 자체였다.
"암흑 기사들이여, 돌아오라!"
전투의 일선에서 언데드들을 상대한 암흑 기사들이 히드라와 싸우기 위해서 모여야 했다.
그러나 미처 체계적인 대응을 하기도 전에 히드라가 밟고 있는 성벽의 기퉁이가 우르르 무너졌다.
육중한 히드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요새의 성벽 일각이 한꺼번에 붕괴해 버리고 말았다.
"우히히힛."
"성벽이 무너졌다. 올라가자."
지상에서부터 무너진 성벽을 타고 좀비, 구울, 스켈레톤을 앞세운 언데드 군단이 줄지어 밀려왔다.
엠비뉴의 병사들 중 바위에 깔려서 죽은 이들도 많았다.
"싸우라!"
"엠비뉴의 병사들이여, 저들에게 신성한 땅을 내주지 마라!"
요새 내부로부터 엠비뉴의 병사들이 대규모로 몰려와서 언데드를 향해 돌진했다.
암흑 기사와 사제 들까지 포함된 엠비뉴 교단의 잔여 병력!
전투에 동원되지 않았던 엠비뉴 교단의 숨겨진 전력이 새로 등장한다.
바르칸은 그들이 언데드들을 몰아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코어 익스플로전!"
사악하기 짝이 없는 네크로맨서 마법에 의하여 죽은 시체들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뼈와 살점이 튀면서, 엠비뉴의 병사들이 몰려 있던 진형에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혔다.
수백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훨씬 많은 숫자가 큰 부상으로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방패와 갑옷이 없었다면 정말 씻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평범한 네크로맨서 마법조차도 바르칸이 펼치면 전율적인 대량 살상 마법이 된다.
들썩들썩.
무너진 성벽에서 잔해들이 움직였다.
다크 룰 마법에 의하여 언데드가 되어 살아난 데스 나이트들이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이들을 살육하기 위하여 검을 휘둘렀다.
"신성한 힘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강철 같은 의지와 육체를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아이언 아머."
사제들의 보호 마법이 병사들을 뒤덮었다. 또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대신관 페이로드가 드디어 나타났다.
페이로드도 외관상으로는 바르칸에 그리 꿀리지 않을 정도의 고급 아이템으로 도배하고 있었다.
손가락마다 주렁주렁 달고 있는 보석 반지와 팔찌, 목걸이, 귀걸이!
비싸기 짝이 없는 액세서리 아이템들이 햇빛에 번쩍거린다.
금빛 수실로 장식된 대사제복이 그의 비만형 몸을 덮고 있었다.
페이로드가 외쳤다.
"엠비뉴 교단의 종들이여, 고통은 사라지고 환희에 불타 오르리라. 디바인 블레스!"
페이로드도 주로 병사들을 축복시키는 성향이 강했다.
리치 샤이어나 본 드래곤의 경우 자체적인 위력이 정말 폭발적이었다면, 대신관 페이로드는 그러한 공격력은 보여 주지 않는다. 하지만 엠비뉴 교단 군대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단단한 벽이 없을 정도였다.
요새의 성벽은 일부가 무너졌지만, 엠비뉴 교단의 병사들이 대신 그 자리를 채웠다.
"오. 오. 오!"
"우리의 땅을 빼앗기지 않으리."
"적들에게 소멸을. 엠비뉴 신께서는 저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주시리라."
페이로드와 사제들의 축복 마법에 뒤덮여 있는 병사들은 웬만한 고통이나 공격 따위는 거뜬히 이겨 낸다.
방패와 갑옷을 완벽하게 착용하고 있는 보병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단단한 힘을 보여 주었다.
망치와 도끼를 휘두르면서 언데드 군단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전투에 이골이 나 있는 듀라한이라고 해도, 서넛의 보병들이 함께 방어하고 반격을 가하니 쉽게 뚫지 못했다.
하지만 성벽이 무너질 때에 이미 꽤 많은 언데드의 군대가 요새 안으로 진입한 후였다.
둠 나이트와 데스 나이트 들이 사제들을 골라서 살육하고 다닌다.
"엠비뉴 교단 제11지파의 기사, 소우드 베른이다."
"크. 크. 크. 크. 바르칸 님의 부하, 데스 나이트 테이럼이다."
암흑 기사와 데스 나이트가 일대일의 결투를 벌이는 장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암흑 기사가 제압을 당하여 신성한 검에 목을 베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데스 나이트가 이겼을 때에는 죽은 암흑 기사가 금세 같은 데스 나이트나 둠 나이트가 되어서 되살아났다.
"덩치 큰 괴물."
"가자. 싸우자."
일부 언데드들은 킹 히드라에게 덤벼들었다.
바르칸에 의하여 공포심을 제거당한 언데드들은 킹 히드라조차도 사냥하려고 했다.
하지만 킹 히드라가 어쭙잖은 언데드 수십 마리에게 사냥 당할 리가 만무!
9개의 머리가 번갈아 움직일 때마다 언데드들이 하늘로 날았고, 수십 명의 병사와 사제 들이 잡아먹혔다.
엠비뉴 요새의 전투는 대난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킹 히드라가 움직일 때마다 병사와 언데드 들이 아래에 깔렸다.
= 콰아아아아아아아!
킹 히드라의 거침없는 포효가 천둥처럼 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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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 너머에서 야만족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위드는 하늘을 보았다.
흘러가는 구름의 방향이 바뀌었다.
물론 위드의 행동이 전설적인 천재 지략가들이 했던 것처럼 천기를 살피기 위한 건 아니었다.
"해가 중천에 떴군. 밥 먹을 시간이다. 밥 먹자, 얘들아!"
위드는 야만족들과 함께 일단 식사부터 했다.
배꼽시계에 든든한 약을 줘야 할 시간.
"많이 먹어 두지 않으면 몸이 못 견디지."
위드는 블랙 와일드보어 등의 고기를 아끼지 않고 구웠다.
최고급 멧돼지 통구이!
큰 전투를 앞에 두고 먹을 수 있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멧돼지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소금과 후추를 듬뿍 뿌린다.
꿀꺽!
야만족들의 넘어가는 군침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잘 익은 통구이는 고소하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멧돼지 통구이를 먹으면서 최고의 구경이라 할 수 있는 싸움 구경을 한다.
"꽤 오래 걸리겠군."
킹 히드라와 엠비뉴 교단, 바르칸의 싸움은 이제 막 본격화되고 있었다.
언데드 군단이 점점 숫자를 불려 나가고, 킹 히드라는 요새를 제집처럼 부수면서 설친다. 엠비뉴 교단의 잔여 병력도 모두 나오면서, 전투의 향방은 어디로 흘러갈지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성벽이 무너질 때에는 엠비뉴 교단이 잠깐 밀리는 것 같지만 추가 병력으로 막아 냈다. 엘리트 암흑 기사들의 참전으로 인해 끄덕없는 세력을 과시했다.
마물들의 조력도 받으면서 싸우고 있으니, 엠비뉴 교단은 건재하다고 봐야 한다.
"요새도 완전히 파괴된 게 아니니까 말이야."
엄폐물에 숨어서 화살을 쏘는 궁병들!
좁은 통로와 구조물 들을 이용한 사제들의 신성 마법에 의해 언데드들이 소멸하기도 한다.
질서만 회복한다면 단숨에 언데드 군단을 몰아칠 것도 같은 엠비뉴 교단!
킹 히드라는 독가스 등을 뿜기 시작하면서 최악으로 날뛰고 있다.
바르칸은 네크로맨서의 특성으로 안전한 후방에서 언데드 군단을 일으킨다.
보는 사람의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지독한 명장면들이 끊이지 않았다.
높기 치솟은 탑이 굉음과 함께 옆으로 점점 기울어져서 완전히 무너진다. 첨탑에 비스듬히 올라 있던 스톤 가고일이 날개를 펼치며 다른 곳으로 향한다.
바르칸이 어느새 스톤 가고일이나 하피 같은 공중 몬스터도 소환한 모양이었다.
성에 화재가 나서 매캐한 연기를 하늘로 뿜어내고 있었으며, 성벽에서 추락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난전 중의 난전!
식사를 마친 위드는 두 팔을 넓게 펼쳤다.
"드디어 마지막 손님이 올 시간이로군."
가장 귀한 손님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자세.
인도자의 권능에 의해서 마지막 손님이 소환될 시간이었다.
세 무리가 날뛰고 있는 엠비뉴 요새의 공간이 크게 일그러지더니 시커먼 덩어리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고귀함과 품격의 결정체!
미스릴보다도 단단한 비늘을 가지고 있으며 완벽한 조형미로 인하여 아름다움까지도 갖춘 존재.
베르사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종족.
체내에 가지고 있는 드래곤 하트는 복용만 하면 마나의 최대치를 5,000 이상 늘려 주며, 마법사가 먹으면 마법 수준을 한 단계 올려 준다는 소문이 있다.
위대한 권위의 상징인 블랙 드래곤.
엄청난 마나의 유동에 킹 히드라도, 바르칸도, 대신관 페이로드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들 전부를 절망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
작은 날개와, 대조적으로 60미터에 달하는 몸집을 가진 몬스터의 등장.
블랙 드래곤과는 모습이 매우 많이 다를뿐더러 훨씬 초라했다.
일단 수염도 없고, 대형 뱀처럼 생긴 머리통에서는 위엄도 느껴지지 않는다.
진짜 드래곤의 몸의 크기는 300미터가 넘는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시커먼 덩어리는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70미터도 안 되었다.
몸통은 얇고 길었다.
드래곤이라기보다는 날개 달린 뱀의 일종이었다.
수련을 많이 하고 좋은 음식을 오랫동안 많이 먹은 결과 드래곤으로 탈피하려고 하는 녀석.
블랙 이무기!
위드는 나름 힘과 권위의 상징인 드래곤을 소환하였다.
단지 짝퉁이었을 뿐!
물론 이무기라고 해서 절대 얕잡아 볼 게 아니었다. 킹 스네이크 정도의 몬스터가, 수백 년에서 천 년 이상의 수행을 거쳐야 된다.
보스급에서도 거물인 녀석.
짝퉁도 급이 다르다.
"보통 짝퉁이 아니라, 드래곤 짝퉁이니까!"
블랙 이무기가 입을 쩍 벌렸다.
= 무아오오오오오!
드래곤 피어!
엠비뉴 병사들이 양손으로 귀를 감싸며 비틀거렸다.
언데드들도 괴로운 듯이 신음 소리를 흘렸다.
스펙터와 고스트 같은 유령체들은 강제로 소환 해제되기까지 했다.
블랙 이무기는 이렇게 화려하기 짝이 없는 등장을 알렸다.
진짜 정통 드래곤이 아니라 이무기임에도 사용하는 드래곤 피어의 위력.
성 전체를 영향권으로 두었으며 몬스터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힐 정도였으니, 위드의 사자후 따위는 상대가 안 되었다.
바르칸과 페이로드는 이무기를 보면서 투지를 불태웠다.
"죽여서 본 드래곤으로 만들면 적당한 크기의 놈이로군."
"저놈을 엠비뉴 신에게 제물로 바치겠다."
블랙 이무기는 그러한 도전을 좌시하지 않았다.
= 어리석은 인간들, 보기도 싫은 언데드들, 추악한 히드라! 여기 내가 싫어하는 족속들이 모두 모였구나.
블랙 이무기는 거침없이 세 무리를 함께 조롱했다. 자존심만큼은 진짜 드래곤과 비슷했던 것이다.
이무기가 끼어들면서 엠비뉴 요새의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늘을 지배하는 이무기가 마법을 사용한다. 복잡한 주문도, 수식도 필요하지 않은 존재.
이무기의 몸집만 한 벼락과 대형 곤충들이 소환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요새가 박살 나면서 언데드들이 소멸되고, 엠비뉴의 병사들도 무참히 죽어 나갔다.
짝퉁 드래곤이었지만 괜히 이무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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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C미디어의 연출부!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영상을 분석하고 편집하기 위해서 인원이 총동원되었다.
국장과 부장, 그 외에 이사들을 포함한 임원들은 영상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
"과연!"
"어떻게 저럴 수가......"
"킹 히드라가 저렇게 생겼구나."
전신 위드의 전쟁! 베르사 대륙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전쟁이었다.
누구도 꿈꾸지 못할 존재들이 한곳에 모여서 보여 주는 압도적인 스케일!
방송사 임직원들도 당연히 로열 로드 이용자였다.
'음, 해골들이 무섭군.'
'몬스터 군단이 정말 센 편이야. 내가 지휘관이라면 저 병사들을 데리고 절대 성벽을 내려가지 않겠어.'
요새 아래는 언데드 군단으로 바글바글했다.
병사들과 함께 내려가는 건 아무리 봐도 자살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엠비뉴의 군대는 겁이 없었다.
일단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언데드들을 처단한다면서 성벽에서 뛰어내린다.
잠깐 동안 절정의 무력을 자랑하던 이들도, 스켈레톤들과 구울들이 사방에서 들이치면 금방 한계를 드러낸다.
바다 한복판에서 조각배 하나가 가라앉듯이 사라지고 나면, 언데드로 탄생했다.
언데드 군단을 늘리는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엠비뉴의 군대는 정말 가공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지경이라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밀려 나와서 킹 히드라와 맞서고 있다.
'대단하네.'
'아, 저 장소에 내가 있었다면......'
'나도 싸우고 싶다. 레벨도 320을 넘겼는데......'
임원들은 몸이 달아 있었다.
영상을 보고 있자니 현장에서의 생상한 긴장과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죽을 지경이다.
방송을 만드는 입장에서, 이렇게 애가 탄 적이 얼마 만이었던가.
'이런 퀘스트를 나도 한번 받아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텐데.'
'저곳에서 한낱 스켈레톤으로라도 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임원들은 자리에 서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사그라졌던 혈기가 들끓는다. 배가 고픈 것도 잊고, 다리가 아픈 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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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는 부채를 꺼냈다.
혹시나 쓸모가 생기리도 몰라서 잡화점에서 사 두었던 30쿠퍼짜리 부채였다.
싸구려 중의 싸구려로, 기능이라고는 거의 없다.
베르사 대륙의 시간으로 하루가 넘는 동안에 엠비뉴 요새의 싸움은 점점 처절해지고 또 격렬해지고 있었다.
- 깃털이 듬성듬성 빠진 부채 : 내구력 3/5. 공격력 0~1.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으로도 가지고 놀지 않을 부채.
소량의 바람을 만들 수 있지만, 더위를 식히기에는 무용지물.
누군가에게 선물을 했을 때에는 분노와 짜증을 일으킬 것 같다.
위드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누렁이가 옆으로 다가와서 머리를 불쑥 들이밀어 보았지만 시원하지가 않아서 다시 풀이나 뜯어 먹었다.
위드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어렸다.
"역시 나의 계략대로 이루어졌어."
위드는 부채를 손바닥에 탁 쳤다.
그 탓에 그나마 얼마 남지 않았던 깃털이 2개나 뽑혔다.
남아 있는 깃털은 간신히 11개!
"제갈공명도 탄복할 계략이지."
엠비뉴 교단은 전체적인 세력과 지형적인 요소를 강점으로 가졌다.
바르칸은 중급이나 하급 언데드를 일으키면서 끝없는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킹 히드라는 거의 불멸의 회복력으로 전장의 한복판을 휘젓는다.
블랙 이무기는 징벌자나 다름이 없다. 짝퉁 드래곤임에도 엠비뉴 교단과 언데드 무리를 사정없이 파괴한다.
엠비뉴 교단, 바르칸, 킹 히드라, 블랙 이무기!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천하사분지계!"
제갈공명이 이루었다는 천하삼분지계의 업그레이드판.
물론 전적으로 위드의 생각일 뿐이었다.
불사조들이 빙룡에게 물었다.
"선배님, 천하사분지계가 뭡니까?"
"나도 몰라. 누렁아, 너는 알고 있니?"
"저도 몰라요. 음머어어어."
조각품들끼리 서로 물어보아도 답이 안 나오는 사태!
그래도 빙룡이 큰형이라고 머리를 굴려서 대답했다.
"저기 네 무리가 싸우도록 한 게 천하사분지계라는 것 같은데. 네 무리가 나누어져서 서로를 공격하면서 싸우고 있지 않느냐. 예를 들어, 입김도 안 불고 얼린 셈이지."
불사조들은 감탄했다.
"진정 엄청난 계략이군요."
"부인에게 이런 좋은 잔머리까지 있을 줄이야."
불사조들도 크게 본다면 새로 분류된다. 조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쉽게 위드의 계략에 놀라워했다.
빙룡이 으스대며 말했다.
"주인 무시하지 마라. 가끔은 깜짝 놀랄 정도로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다."
"예, 선배님."
무심하게 풀을 뜯어 먹느라 대화에 잘 끼지 않고 있던 누렁이가 물었다.
"지금 이게, 그냥 세 놈 더 소환해서 네 놈이 싸우게 만든 거랑 뭐가 다른 거죠?"
"......"
빙룡은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는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도 충분히 그렇게 여길 수 있었으니까.
제갈공명이 천재적인 지략과 전술적인 승리를 바탕으로 위, 촉, 오의 삼국을 이루었다면 위드는 달랐다.
숱한 고생을 해 보면서 얻었던 경험과, 한계까지 싸우면서 몸으로 익힌 몬스터들의 전투 능력을 바탕으로 했다.
다크 게이머 연합이나 로열 로드의 정보 게시판 등을 통해서 습득한 여러 정보들로 소환할 몬스터들을 정했다.
그리하여 상극의 네 무리가 싸우게 만든다.
조각품들이 나누는 대화를 모르는 위드는 부채를 여유롭게 부쳤다.
"이 천하사분지계의 진정한 무성무은 여기에 있지 않지!"
제갈공명의 계략은 현대에 와서도 탄복해 마지않을 정도다.
불리하던 형세에서, 삼국을 기반으로 한 위나라의 견제!
"하지만 결국 제갈공명도 천하 통일은 이루어 내지 못했어."
엄청난 놈들을 불러와서 싸움을 일으키더라도 퀘스트를 실패해 버리면 소용이 없다.
"이 천하사분지계는 기다림에 미학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저 네 무리가 한껏 싸우다가 지쳤을 때, 저들의 군대가 약해졌을 때 우리가 공격한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위드의 말을 듣고 있던 빙룡과 불사조들은 완벽하게 공감했다.
"정말 뛰어난 계략."
"과연 주인이다."
"엠비뉴 교단을 밑바닥까지 내몰고, 덤으로 다른 놈들까지 몽땅 같이 잡겠다는 최고의 판단이 아닌가."
마트에서도 1+1 정도의 행사로 고객을 유인한다. 그러나 기본 마진이 있기 때문에 사은품에도 제한은 있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위드의 계략이 가진 장점은 최대 1+3까지 얻을 수 있다는 부분에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날도둑놈 심보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렁이는 여전히 삐딱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남들 실컷 싸우게 해 놓고, 지치면 다 잡겠다는 작전 아닌가요. 음머어어어어."
천재적인 전략이라고 해도, 위대한 도전이라고 해도 결국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위드는 외줄타기 같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한 고생문. 난이도 S급 퀘스트라서 쉽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엠비뉴 교단의 전력을 매우 높게 평가해 주었다.
퀘스트를 성공할 때마다 보통 고생을 한 게 아니었으니, 아예 숨겨진 전력까지도 넉넉하게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새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잔여 병력은 여전히 꺼림칙한 존재!
야만족들을 데리고 그냥 싸웠더라면 절대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바르칸이 이겨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다.
퀘스트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요새를 점령해야 한다.
엠비뉴 교단이 아닌, 언데드 군단을 상대로 요새를 점령하는 것도 똑같이 어렵기는 마찬가지.
"슬슬 시기가 다가오는군."
위드가 눈빛을 날카롭게 했다.
기다리고만 있으면 퀘스트를 성공하더라도 공적치가 적어 얻는 소득이 거의 없다.
S급 퀘스트의 막대한 보상을 위해서라도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입장.
네 무리는 사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많이들 지쳤다.
바르칸은 무한한 체력을 가진 리치였지만, 엠비뉴 사제들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었다.
언데드를 잡는 건 사제라는 말처럼, 성가와 신성 마법 들이 바르칸을 향해 날아갔다.
대신관 페이로드까지 합공을 가하면서, 휘하의 언데드들과 함께 요새에 오른 바르칸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킹 히드라는 움직임이 둔화되었고, 블랙 이무기의 마나도 예전 같지 않다.
격렬한 싸움의 흔적으로 요새는 불바다가 되었다.
전투는 정점을 향해 치닫는 중이었다.
위드가 검을 뽑았다.
"이제 갈 시간이다."
방만하게 늘어져서 쉬고 있던 야만족들이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일어났다.
휴식을 취하고 잘 먹었으니 전투 의지가 솟구친다. 회복력이 제법 빠른 편이었다. 물론 싸움은 신경 쓰지 말라고 지시하고, 엠비뉴 요새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던 덕도 있으리라.
블랙 이무기와 킹 히드라, 언데드 군단을 보면 금방 움츠러들 테니까.
"사냥의 시간이다. 전군 전진!"
위드는 야만족과 누렁이, 빙룡, 불사조들과 함께 요새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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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
블랙 이무기가 날아다니며 하늘에서 큰 암석들을 소환해서 떨어뜨리고 있다.
"지상으로 다가왔다. 지금이다. 쏴라."
"공격 마법을 드래곤에게 집중시켜라!"
사제들의 신성 마법이나 궁수들의 화살이 하늘로 향했다.
스켈레톤 아처와 스켈레톤 메이지들도 상공으로 화염구와 녹색 독 기운들을 발사했다.
진짜 드래곤이라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중화되고 무력화되어 버릴 미미한 공격들!
하지만 블랙 이무기는 날개를 움직여서 마법 공격들을 피해야 했다. 일부 마법들은 그대로 몸에 부딪쳤다.
몸통을 튕기면서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마법 공격들이 뒤를 따라다닌다.
이무기의 몸에 올라타서 칼을 휘두르는 둠 나이트와 엘리트 암흑 기사들도 있었다.
처음 등장 때보다 약화된 게, 싸우는 모습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비늘의 방어력만으로도 거뜬히 튕겨 내던 화살들이었는데 일부러 피한다.
언데드와 엠비뉴 교단 양측의 합공을 받아서, 한없이 매끄럽고 보석처럼 빛나던 비늘들에 자잘한 흠집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도 이무기는 이무기!
초반에 화끈한 공격을 퍼부으면서 킹 히드라의 머리를 7개 넘게 날려 버리고, 엠비뉴 교단의 요새 절반을 박살 냈다.
독을 토해 내서 언데드 군단도 절반가량을 녹여 버렸다.
심각한 마나 고갈 현상 때문에 약해져 있지만, 이무기의 전투 능력이야말로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 맛있는 드래곤이다. 먹어 버리자!
이미 병사들을 1,000명도 넘게 잡아먹은 킹 히드라의 머리통들이 입을 벌린 채로 이무기를 향해서 날아갔다.
= 감히. 미물 주제에!
블랙 이무기는 공중에서 선회하여 킹 히드라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킹 히드라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뜯겨 나간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킹 히드라의 새로운 머리통이 금방 생성되었다.
트롤을 능가하는 재생력!
바르칸과 번갈아서 공격을 주고받던 대신관 페이로드가 사제들을 향해 명령했다.
"희생의 주문을 외워라."
"숭고한 엠비뉴 신이시여, 저희의 육신을 바치나니 세상을 향해 휘두를 칼을 내려 주소서."
희생의 검!
100명의 사제들이 생명력을 잃고 쓰러졌다.
그 직후 이무기 위에서 황금빛 거대한 검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이무기는 다급하게 날갯짓을 하며 옆으로 돌았지만, 얇은 날갯죽지가 잘리고 말았다.
= 크아아아아아아! 비겁한 놈들!
괴로움에 찬 이무기의 비명!
블랙 이무기가 빙글빙글 선회하며 요새로 추락했다.
밑에 있던 수백 명의 병사와 마물, 언데드 들이 깔려서 박살 났다.
"드래곤을 사냥하라."
"놈을 잡아라!"
그리고 병사들과 언데드들이 새까맣게 뒤덮었다.
블랙 이무기는 한쪽 날개를 잃고도 뒤뚱거리면서 분전했다.
요사스러운 눈빛이 번뜩이면, 인간 병사들은 몸이 굳어 버리고 소름이 돋아서 싸우지 못한다. 하지만 언데드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둠 나이트들이 비늘에 대고 마구 칼질을 하고, 회복 마법을 펼칠 사이도 없이 화살과 마법들이 날아온다.
날파리 떼처럼 덤비는 암흑 기사와 둠 나이트 들은 블랙 이무기에게 야금야금 피해를 가중시켰다.
위드와 빙룡, 불사조들과 야만족들은 바위산을 내려왔다.
"언데드부터 쳐라!"
위드는 외곽 지역의 언데드들부터 목표물로 삼았다.
"바르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언데드들을 사냥하도록 해."
야만족들이 구울과 좀비 들에게 화살을 쐈다.
레키에 부족 주술사들의 힘이 담겨서, 화살에 적중당한 언데드들은 얼어붙거나 불에 탔다.
"재생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부숴 버려라!"
위드는 언데드들을 조금씩 완전히 없애 버렸다.
빙룡과 불사조들이 짓밟고 지나간 자리에서 베자귀 부족의 용사들과 함께 싸운다.
조각 검술을 바탕으로 급소들을 베어 버리고,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자잘하게 부쉈다.
그리고 잡템까지 습득했다.
언데드의 사망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표시!
빙룡이 먼저 밟고 물어뜯으면, 불사조들이 화염을 방출하면서 언데드들을 녹였다.
신성 마법 다음으로 언데드들을 상대하기 좋은 화염!
불사조들의 불은 정화의 능력까지 약간 가지고 있었기에 일반 스켈레톤과 고울, 좀비 들은 밥이었다.
음머어어어어!
누렁이도 빙룡의 근처에서 열심히 싸웠다.
새끼 소를 낳으면 먹일 건초라도 사기 위하여, 빗물을 피할 우사라도 짓기 위하여 돈을 벌려는 갸륵한 심정!
다만 불사조들의 근처에는 다가가지 않았다.
근육질의 건장한 몸에 달려 있는 약간씩의 지방질들!
꽃등심, 아롱사태, 갈비살 등이 굽히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위드는 요새의 외곽에 있는 약화된 언데드들을 쉽게 쓸어 버릴 수 있었다.
주력이 되는 고위 언데드들은 요새 안으로 들어가 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양쪽 모두 규모가 정말 많이 줄어 버렸군."
언데드들은 초반에 1만 구가 넘었고, 엠비뉴 교단의 병력은 2만 이상이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양측의 전력은 2,000씩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블랙 이무기가 녹여 버리고, 킹 히드라가 먹어 치운 병사들!
게다가 거대한 군대들끼리 싸우면서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다.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퀘스트를 완료했을 때의 공적치는 그만큼 줄어들겠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부분!
무너진 성벽을 넘으면 언데드와 엠비뉴 병사들이 아수라장을 이루며 싸우고 있다. 킹 히드라와 블랙 이무기, 바르칸, 페이로드가 격전을 벌이는 장소다.
"요새로 들어가서 잔당을 소탕하자!"
약화된 적들!
그럼에도 어느 한 무리라도 위드와 야만족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바르칸은 여전히 강성할 테고, 킹 히드라는 난폭하다. 엠비뉴 교단과는 적대적인 사이이고 블랙 이무기도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싸웠다.
고래 싸움에 깨지는 새우 등 신세가 되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위드가 기세 좋게 외쳤지만 야만족들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저 안은 위험하다."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다."
영 꺼림칙한지, 야만족들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저 요새를 점령해야 한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영원히 엠비뉴 교단의 하수인이 되어 살아야 하리라. 인도자의 동맹이여, 용감하게 싸우자!"
위드의 사자후에 의한 외침으로 야만족들은 다시 싸울 마음을 갖췄다.
그런데 빙룡과 불사조, 누렁이도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주인."
"이 자리에 굳이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조각 생명체들의 항명!
위드가 폭력을 동원하더라도 매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맞을 만큼 맞더라도 위험한 요새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누렁이는 벌써 잡템을 한 보따리 이상 먹은 상태!
평화로움을 사랑하는 소답게 더는 싸우고 싶지 않아 한다.
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의 입장도 이해한다. 내가 배려심이 모자랐다. 정말 미안하다."
솔직한 반성과 사과!
위드에게서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무조건 다그치고 우기고 보는 그가, 부하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용서해 다오. 그리고 나를 잊어 다오."
"주인?"
"이게 내 마지막 모습이 될 테니까. 동맹 부족들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한 걸로... 그렇게 알고 나를 이제 잊어라."
"주인!"
"나를 잊고 안전한 곳에 가서 편안하게 잘 쉬고 잘 살아라. 특히 누렁아, 너에게는 잘해 주지 못해서 마지막까지 가슴에 무언가가 얹힌 것처럼 후회만 남는구나."
음머어어어어!
"좋은 풀 많이 뜯어 먹고, 새끼 소 많이 낳고. 돈이 없어도 절대 대출은 받지 마라."
음머어어어!
유언과도 같은 말에 감수성이 뛰어난 누렁이가 굵은 눈물을 흘렸다.
"해 준 것도 없이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 작별의 시간이 너무 길면 기분만 이상해지니 이만 가겠다. 잘 살아라."
그리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는 위드.
그러나 그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았다.
조각 생명체들이 충분히 따라올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것. 일부러 어깨는 왜소하게 좁히고 고개는 땅으로 푹 숙였다.
"주인, 같이 가자."
빙룡이 요새를 향해서 날고, 불사조들이 뒤를 따랐다.
누렁이는 뒷발로 땅을 긁으며 돌격 자세를 취했다.
조각 생명체들까지 전투준비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