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타의 영주>
윤나희는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그분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구나."
이현과의 대면!
세 번이나 전화 통화로 계약을 할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약속을 잡은 후에 그녀가 직접 계약서를 들고 가려고 했
다.
그녀는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할 정도의 재원이었음에도 이현만큼 강한 인상을 남겨 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30억은 거리의 푼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야."
첫 번째 전화 통화에서 그는 30억 9천만 원이라는 거금에 계정이 낙찰되었다고 알려 주었는데도 퉁명스럽게 전화
를 끊었따.
이것이야말로 윤나희가 선망해 오던 강한 남성상의 표본이 아니던가!
그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8인의 영웅들 프로그램 섭외도 그녀가 전담하면서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현의 레벨은 219밖에 안 됐다.
윤나희도 로열 로드의 유저였는데, 오히려 그녀가 더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습게 보았던 것도 잠깐이었다.
진혈의 뱀파이어 퀘스트,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 퀘스트, 본 드래곤 사냥, 엠비뉴 요새 함락에 이르기까지!
윤나희는 그의 모습을 다른 방송사의 영상을 통해서만 접했다.
오크 카리취로서 뭇 오크들과 다크 엘프들을 지휘하던 그 늠름함이란 어찌나 멋지던지!
윤나희는 오크 카리취의 사진을 크게 인쇄해서 벽에 붙여 놓을 정도의 광팬이기도 했다.
"으음, 갑자기 전화를 해도 될까?"
불쑥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했던 윤나희였다.
회장 비서실이라는 자리와, 그녀 정도의 여성이라면 누구든 반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이현에게 전화를 하려니 떨려서 쉽게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윤나희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벨이 두 번도 올리기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달칵!
"안녕하세요, 윤나희입니다. 저를 기억하시죠?"
다정하면서도 녹아들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만약에 상대가 이현이 아니면 어떻게 할지를 잠깐 고
민햇지만, 다행히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맞았다.
-누군데요?
이현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서 들렸다.
이미 긴장하고 있던 윤나희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제가 윤나희인데요."
세 번째의 통화이니 이름쯤은 기억을 해 줄 거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요?
"......"
-바쁜데 자꾸 전화하지 마세요.
띠이이이이이.
그리고 전화를 끊어 버린 이현이었다.
위드가 과거에 빛의 탑을 조각했던 언덕은 대낮에도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빛의 탑을 보면서 저
녁까지 기다리려는 관광객들이었다.
언덕에는 위드가 만들어 놓은 여러 조각품들이 있고, 초보 조각사들도 실력을 발휘해서 빈자리에 예술품들을 만들
어 놓았다.
훌륭한 조각 공원이라고 할 만하다.
베르사 대륙에서 이미 빛의 공원으로 꽤 유명해진 언덕이었다.
더구나 언덕에서 보이는 모라타 마을과 영주성의 풍경!
예쁜 건축물들과 프레야 여신상 등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위드는 누렁이와 함께 그 자리에 올랐다.
"모라타 영주다."
"영주? 그러면 빛의 탑을 조각한 조각사잖아."
"전신 위드다."
위드가 언덕에 올라가면서 그를 알아본 관광객들이 속속 소리쳤다.
위드는 그들을 지나쳐서 조각품 언덕에 자리를 잡고 조각칼을 꺼냈다.
'퀘스트에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돼.'
인도자의 동맹 퀘스트를 하면서도 한계를 느꼈다.
조각사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스탯은 높지만 전투 능력은 다소 떨어진다. 조각 검술이나 다른 스킬들로 만회하더라
도 앞으로 수행해야 할 퀘스트에 비하면 안심이 안 될 상황.
'인도자의 권능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고, 바르칸이든 킹 히드라든, 그런 적이 또 나타난다면
무조건 진다.'
위드가 가지고 있는 밑천을 전부 동원하여 싸웠던 전투다.
지팡이에 있던 인도자의 권능도 다 소모해 버렸고, 안식의 동판의 내구력도 떨어져서 죽음의 선고를 남발할 수도
없다. 2단계 3단계 퀘스트도 해야 되는데 가지고 있는 밑천이 고갈된 셈이었다.
기껏 죽을 고생을 하여 S급 난이도 퀘스트와 1단계 목표를 완수했는데 2단계, 3단계에서 실패한다면 이보다 더 억
울한 일은 없는 것이다.
사각사각.
조각칼을 움직일 때마다 바위들이 잘려 나간다.
위드가 만들려고 생각해 놓은 조각품들이 많이 있었다.
프레야 교단은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성이 좋은 루의 신상부터 만들 작정이었다.
루의 교단은 밝음을 숭상하고, 어둠을 틈타 습격하는 몬스터들과는 천적 관계였다.
치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도 루의 신상이 있으면 나쁘지 않으리라.
'거대 조각상, 내구력이 좋아야 하니 기초 재료는 바위로 만들어야 돼.'
위드는 빠르게 조각품의 토대가 되는 바위를 잘랐다.
빛의 탑과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지는 조각품!
루의 조각상은 베르사 대륙 각지에 세워져 있었다. 프레야 여신상처럼 막연한 생김새가 아니라서 조각을 하는 데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부터지."
위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재료가 아까워서 식은땀이 바싹바싹 마를 정도였지만 조각품에는 투자가 필요했다.
고급 조각술 6레벨.
조각품을 조금만 더 만들면 곧 7레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아깝지만......"
위드는 엠비뉴 요새에서 입수했던 금속 파편들을 분류했다. 강도가 높은 대장장이용 재료들은 제외하고, 깨진 금
조각들을 녹였다.
"아이고, 아까운 것......"
누런 빛깔을 내며 완성된 금물.
대장장이 스킬이 향상될 때마다 얇게 금을 바를 수 있다.
전문용어로는 도금!
"이 정도로는 절반도 못 바를 텐데......"
위드가 가진 금 조각들을 다 녹여도 거대 조각상에 전부 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순물들을 좀 섞어 볼까?"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금의 순도가 낮아지면 조각품에도 타격을 줄 테니까.
"금은 무조건 24k야."
위드는 고대 금화와, 사냥을 통해서 획득했던 금괴들도 넣어서 녹였다.
"아이고, 이 아까운 것."
막대로 휘저을 때마다 금물이 형용할 수 없는 광채를 내면서 저어진다.
멀건 된장국만 젓던 위드에게는 호강 아닌 호강이었다.
관광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조각사 위드가 대형 조각상을 만드는 거야?"
"금을 통째로 뒤집어씌우려나 봐."
루의 신상을 과연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낼지에 대한 궁금증.
그것이 무엇이든, 완성되기 직전에 기대 심리가 가장 증폭되기 마련이다.
피라미드, 빛의 탑, 프레야 여신상 등의 조각품을 만든 위드였으므로 관광객들은 갈수록 늘어 갔다.
"모라타에서 얼마나 많은 세금을 거두었으면 조각품에 저런 투자를 할 수가 있는 거지?"
"역시 영주들이 엄청나게 돈이 많은 거겠지."
"다 사기꾼에 도둑놈들이라니까. 북부에 유저들이 몰리면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겠어?"
갑부로 보고 부러워하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위드의 명성은 거대했다.
"우리 영주님을 비난하지 마세요!"
"맞아요. 우리 영주님이 얼마나 낮은 세율을 유지하시는데요."
"사비를 털어서 조각품들을 만들고, 폐허나 다름없던 모라타에 건물들을 올려 주신 분이에요. 이
런 훌륭하신 영주님에게......"
"시장에서 여러분에게 물건을 파실 때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는 이유도 모르죠? 흑흑."
착해 보이는 여성 초보자는 위드에 대한 비난에 눈물까지 보이면서 변호를 했다.
"그 한 푼을 더 받아서 모라타에 투자를 하려는 거예요. 다 우리를 위해서라고요!"
살아 있는 성인, 주민들과 유저들을 아끼는 훌륭한 영주라면서 감싸 주는 유저들!
위드는 관광객들의 논란에는 관심도 갖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
황금 도금 작업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도배와 장판을 하면서 이력이 나 있었다. 배달을 하고 남은 신문지를 겹겹이 붙여 한겨울을
나기도 했다.
"도배는 민첩하게! 절대 중복되어서는 안 돼. 우둘투둘 튀어나오거나 비뚤어진 부분이 있어서는
곤란하지."
도배를 했던 경험을 되살려서 도금을 한다.
물론 두 가지 작업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도금은 금을 얇게 펴서 발라야 했으니 훨씬 어려운 난이도.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스킬들의 보조를 받아서 메웠다.
조악한 그림 실력이었지만 미리 그림 그리기 스킬을 올려 놓은 덕분에 붓질에도 약간의 효과가 있었다.
이윽고 머리 부분이 다 칠해졌다.
그러자 루의 신상의 머리가 햇빛을 받아서 금빛 광채를 낸다.
눈에는 푸른 보석을 박았다.
금방이라도 찰랑거릴 것 같은 금색 머리에, 먼 곳을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
오연한 태양신의 조각상이 머리부터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만들어지고 있었다.
"오오."
"너무 멋지다."
조각상이 완성되는 광경은 관광객들을 통해서 인터넷으로도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다.
위드가 만들어 낸 루의 황금 신상.
대형 활과 화살까지 들고 있는 장엄한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보통 조각사라면 신상만 만들기도 벅찼겠지만, 이제 위드는 대형 조각품에 이력이 생겼다.
큰 조각품을 만들 때에도 미리 여분을 남겨 놓아서 장비까지 함께 조각한 것이다.
띠링!
『루 교단의 신상을 완성하셨습니다!
두터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조각술계의 거목, 조각사 위드가 탄생시킨 또 하나의 대표작.
베르사 대륙의 신들 중의 하나로, 태양을 상징하는 루의 신상이 완성되었다.
순수한 금으로 씌워진 이 작품은 루 교단에서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가치 : 거장 조각사 위드의 작품.
9,112.
특수 옵션 : 루의 신상을 본 이들은 밝은 곳에서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23% 증가한다.
루의 성직자들은 하루 동안 신성력이 12% 증가한다. 신성 마법의 실패 확률도
감소한다.
루의 성기사들은 믿음의 힘으로 사기가 하락하지 않으며, 용기가 최대치로 증
가한다.
힘 12 상승.
체력의 최대치 20% 증가.
생명력 최대치 25% 증가.
사냥 시 하루 동안 아이템 획득 확률 7% 증가.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종교적인 조각품의 숫자 : 1 』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고급 손재주 스킬의 레벨이 7이 되었습니다. 도구나 손을 이용하는 능력이 추가로 8% 증가하며,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영향을 주게 됩니다.
-명성이 499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이 35 상승하셨습니다.
-힘이 3 상승하셨습니다.
-종교적인 조각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루의 교단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지고, 그들로부터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루의 사제들이 모라타에 방문할 확률을 높여 줍니다.
-종교적인 조각품을 만든 대가로 전 스탯이 2씩 추가로 상승합니다.
종교적인 조각품을 만드는 데 성공!
위드의 조각술 스킬 숙련도는 7레벨까지 17%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대작 1개나 2개 정도면 충분하겠군."
조각술은 갈수록 성장이 느려졌지만 충분히 욕심이 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레야 여신상과 루의 신상을 조각해 놓았으니 상성이 나쁜 다른 신의 조각품들은 만들지 못한다.
"바위를 이용한 대형 조각품은 이 정도면 됐어."
밤의 신상이나 도둑의 신상, 바바리안의 신상 등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모라타에는 어울리지 않으리라.
괜히 도둑들을 위한 신상을 조각해 놓았다가 치안이 하락하고 도둑들이 늘어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바바리안의 신상도 그들의 종족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면 그 건장한 체격으로 인해서 주민들이 무서워했으니 무리.
"상관없겠지. 조각할 물품들은 많이 있으니까."
위드는 조각칼을 거꾸로 잡았다.
루의 신상을 보기 위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고 있으니,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요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위드가 모라타의 영주라니!"
모라타에서 사냥과 모험을 즐기던 유저들.
사냥 파티의 상당수는 위드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더 강한 몬스터와 퀘스트를 위해서 중앙 대륙에서 북부로 왔다.
관광객들이나 막 시작한 초보들은 전신 위드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위드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다지 관심이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사들에게 위드란 존경의 대상이거나 뛰어넘고 싶은 경쟁자다.
"위드를 보러 가죠."
"혹시 위드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소식은 일찍 접했지만, 북부에서도 꽤 먼 곳의 사냥터까지 원정을 나갔기 때문에 귀환이 늦었다.
사냥터에서 방금 돌아온 전투 파티는 마을에서 위드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위드에 대해서 알고 있는 상인이 있었다.
"영주 위드요?"
"네, 그 위드요."
"아, 구경하러 오셨구나. 저쪽 바위산에서 조각품을 만들어요."
"조각품요?"
"네, 무척 오래 걸리고 지루한 작업이니까 웬만하면 모레쯤 가 보세요."
상인의 말에 전사 혼은 고개를 갸웃했다.
"조각품을 만든다고?"
성기사 빌레오가 살짝 긴장되는 목소리로 답했다.
"직업이 조각사란 말도 있더군."
"모라타의 영주가 조각사라는 얘기는 나도 들었어. 하지만 조각사라니 말이 안 되잖아. 적어도 우
리가 봤던 위드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마법의 대륙에서 위드에게 꽤 많이 죽었던 그들이다.
물론 마법의 대륙에서 그들의 레벨은 중수를 조금 넘는 정도라서, 길드와 함께 싸울 때 정도나 낄 수 있었다.
더없이 효과적으로 적들을 학살하던 위드의 모습!
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조각사라니... 소문과는 달리 전신 위드가 아닌 거 아니야?"
워리어 갈릭이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보면 알 수 있겠지.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얘기해 봐야 헛수고 아니겠나?"
혼, 빌레오, 갈릭을 비롯한 7명의 사냥 파티는 바위산으로 향했다.
모라타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유저들이 모인 파티!
성직자의 레벨도 300이 넘었는데, 사제복이 휘날리도록 뛰었다.
모라타에 머무른 지도 상당히 오래되어서 조각품들이 있는 바위산의 위치는 잘 알았따. 빛의 탑이 있어서 그들도
모라타에 오면 반드시 들르는 장소였다.
"우리가 거점으로 머무르고 있던 마을의 영주가 전신 위드라니 정말 상상외로군."
"그보다도 그가 만든 조각품들을 보면서 사냥을 했다니, 고마워해야 되는 건가."
머릿곳이 둔기로 후려 맞은 것처럼 복잡했다.
바위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많은 관광객들과 초보 유저들이 있었다.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면서 바위산으로 걸음을 옮기는 초보 유저들!
"와, 진짜 최고야."
"모라타에서 시작하기를 너무너무 잘했다니까. 이런 조각품들을 보면서 사냥할 수 있는 건 우리밖
에 없을걸."
초보 유저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혼이 시작한 마을은 황량한 광산촌. 남들보다 빨리 성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인적이 뜸한 광산촌을 택했다.
나중에 대도시로 가기는 했지만, 그곳에서도 예술품들을 보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로자임 왕국에 피라미드의 조각품이 만들어졌다는 소문을 듣고는 약간 부러워하기도 했다.
부족한 게 많은 초보들에게 조각품들의 감동이 있다면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겠는가.
"빛의 탑만 해도 엄청났는데 말이지."
혼이 포함된 파티는 바위산으로 오르는 행렬의 뒤를 따랐다.
바위산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하필 해가 저물려고 할 무렵이었다.
한밤의 빛의 탑은 명물 중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모라타에 있는 유저들이라면 반드시 찾는다. 마법사들은 줄
을 서지 않고 플라이 마법을 활용하여 날아가며 부러움을 샀다.
갈릭이 제안했다.
"이렇게 갈 게 아니라 우리도 날아가지."
"그렇게 할까?"
마법사 이스턴이 플라이 마법을 외워서 파티원들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러자 몰려드는 유저들.
"마법사님, 저도 플라이 마법 좀 어떻게 안 될까요?"
"저희도 띄워 주세요! 마법사님, 부탁드립니다."
"마법사님."
이스턴은 플라이 마법만으로도 인기인이 되었다. 유명 스타들에 못지않을 정도였다.
이스턴의 근처에 수많은 유저들이 모인 것을 공중에서 확인한 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끼리 먼저 가세."
깔끔하게 이스턴을 포기한 것이다.
"마법사이니 알아서 따라오겠지."
파티원들은 플라이 마법을 통해서 공중으로 산을 올랐다.
바위산에는 빛의 탑 외에도 또 다른 대형 조각품이 완성되어 있었다.
파티원 중 1명인 루의 성직자 하인스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이곳에 루의 신상이......"
조각품의 효과!
신앙이나 신성 마법에 미치는 효과 때문에 하인스에게는 모라타에서 사냥을 할 때의 효율이 훨씬 높아지게 될 것
이다.
프레야 교단의 성직자들은 이미 이 효과를 누리고 있다.
여신상의 주변에서 축복이나 치료 마법을 펼치면 효과도 다른 때보다 훨씬 커졌다.
프레야의 여신관 모임.
남성 사제 연합.
풍요의 길드.
모라타 내에 모임이나 관련 길드들도 다수 생길 정도였다.
"루의 성직자들이 모라타로 많이 오겠구나."
성직자들이나 성기사들이 많아지면 정식으로 신전이 세워질 날도 머지않으리라.
"위드는 어디에 있는 거지?"
혼이 빛의 탑 부근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어둑어둑한 밤인 데다 관광객들이나 모라타의 유저들이 너무 많아서 분간을 하기가 어려웠다.
빌레오가 어느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곳에 있는 거 아닌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무언가를 사 먹는 장소에만 유별나게 횃불들이 밝혀져 있었다.
"일단 가 보지."
혼과 빌레오 등은 하늘을 날아서 그 장소에 착지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음식 메뉴들을 보여 주는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저것 좀 보게."
"응?"
드래곤 탕 120골드
킹 히드라 자장면 100골드
스켈레톤 뼈다귀 해장국 13골드
드래곤구이 (1인분 150그램) 380골드
킹 히드라구이 (1인분 100그램) 80골드
원산지 표시 : 통곡의 강 유역산. 신선한 고기만 취급합니다.
"헉!"
요금도 요금이지만, 내용물들이 일행을 충격에 빠뜨렸다.
"자, 자! 쌉니다, 싸요! 여러분, 이런 고기 드셔 본 적이 없을 겁니다. 드래곤 미트! 드래곤의 고
기로 만든 얼큰한 탕입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주방장의 말소리가 들렸다.
"너무 비싼데."
"그래도 언제 이런 고기를 먹어 보겠어?"
"맞아, 드래곤 탕이라니 죽인다. 그렇지?"
손님들은 줄을 서서 요리들을 받아 가고 있었다.
테이블도 없이 그릇을 가져오면 떠 주는 열악한 구조였다.
"설마 여기에 위드가 있을까?"
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불행히도 그 추측은 사실이었다.
빌레오가 줄을 서서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물어보고 나서 진실을 말해 주었던 것이다.
"주방장이 위드라고 하네."
"전신... 위드라고?"
"그건 모르겠고, 모라타의 영주 위드는 맞아."
"확실한가?"
"위드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더군."
모라타의 주민들은 프레야 여신상이라는 초거대 조각품을 만들면서 노역에 동원되었다.
좋은 말로 하면 퀘스트에 동참한 것이었지만, 그 때문에 위드의 얼굴을 잘 알았다.
"조각품을 만들고 있다더니 웬 음식인가?"
"루의 신상을 완성하면서 관광객들이 정말 많이 모였다네. 모라타의 주민들이나 유저들도 위드를
보기 위해서 이곳에 왔고. 바위산에 유저들이 엄청나게 몰리지 않았던가?"
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이 정도의 인파는 왕국의 수도 같은 대도시 외에는 없었다.
북부의 모라타에서 이런 인파라면 정말 굉장한 일이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의미로 오늘부터 요리를 판다는군."
"요리라니... 이렇게 비싼 요리를 누가 사 먹을 수 있는데?"
"위드는 싸게 판매하려고 했지만 유저들이 이 정도 가격은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 같네. 놀라지
말게. 드래곤의 고기를 1킬로그램 먹으면 무려 체력이 20, 생명력 최대치가 120, 힘이 7이나 늘
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혼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정말이란 말인가. 요리로 그런 일이 가능해?"
"벌써 효과를 본 사람이 많이 있다는군."
"킹 히드라나 드래곤의 고기라면 몇 골드를 받더라도 비싼 건 아니지."
혼과 갈릭 등은 납득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오히려 귀한 요리를 먹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스탯들을 올려 놓으면 두고두고 혜택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도 일단 줄을 서 볼까?"
"그러지. 언제 드래곤 고기를 먹어 보겠나. 스탯도 올려 준다는데, 이런 기회에 먹지 않으면 두고
두고 후회할 거야."
혼과 갈릭, 빌레오 등이 줄을 섰다.
스탯 욕심은 직업 여하를 막론하고 극심했다.
마법사들에게는 지혜와 지식이 가장 중요하지만, 근력과 민첩성을 향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망설이지 않는
다.
몸보신에는 직업 구분이나 남녀노소가 없는 것!
그렇게 음식을 사 먹기 위한 손님들이 점점 늘어 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드래곤이 헤엄치고 지나간 것 같은 탕!
킹 히드라의 엄청난 고기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에, 면발은 밀가루를 쓴 자장면!
스켈레톤 뼈다귀 해장국에는 살점도 거의 붙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힘이나 민첩, 체력 같은 스탯을 1개나 2개씩은 올려 주었다.
최고급 요리 재료인 이무기나 히드라의 고기가 가진 효과를 요리 스킬이 보완해 주기 때문이었다.
위드는 폭리를 취하면서 엄청난 양의 요리들을 제조했다.
군대 취사병이 와서 보고는 감동받을 정도의 양이었다.
"역시 장사는 처음이 힘들어. 잘되기 시작하면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정신이 없지."
사업의 가장 큰 곤란함은 세금!
하지만 모라타에서는 정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더라도 결국은 위드의 호주머니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위드는 모라타의 주민들을 고용해서 주방 일을 돕도록 했다.
손님이 몰려드는 대박 집은 요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돈을 만든다.
잘되기만 한다면 음식 장사만큼 많은 이윤이 나는 업종도 흔치 않다.
더구나 지금처럼 바가지를 듬뿍 씌울 수만 있다면!
-요리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하셨습니다.
요리 스킬도 중급 6레벨에서 지금은 두 단계나 올라서 8레벨이었다.
통곡의 강에서 열심히 술을 담그면서 숙련도를 쌓았다.
이미 7레벨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킹 히드라나 이무기의 고기 자체가 워낙에 귀하고 좋은 음식이라서 요리
스킬의 숙련도도 쑥쑥 올랐다.
심지어 이무기의 고기는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고기의 양이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서로 사 가려고 난리다.
"위드 님, 여기 7인분만 주세요."
"제가 12인분 삽니다."
빙룡이 얼린 고기를 누렁이를 통해서 수입!
고기를 녹이자마자 불티나게 팔린다.
모닥불을 피워서 직접 구워 먹는 이들 때문에 바위산에는 고기 굽는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이무기 사골 국물도 팝니다."
무려 열두 번 우려내서 기름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사골 국물 전격 판매!
고기를 팔 때에는 빼놓을 수 없는 음료도 준비되어 있었다.
"왕이슬 30골드, 백년주 80골드. 수량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빨리 구입해 주세요."
뱀파이어 토리도에게 잡혀서 석상이 되었던, 꽃을 키우는 소녀 프리나가 술을 판매했다.
위드는 이참에 담가 놓은 술도 몽땅 팔아 치우고 있었다.
개별 판매보다는 식당 판매가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엠비뉴 요새에 모험가들이 도착했다.
"으음, 여기가 그 격전지로군."
"뭔가 나올 것만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예요."
혼과 빌레요, 갈릭 등이 통곡의 강 유역으로 이동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어제 그들은 히드라 고기, 이무기 고기 들을 더 이상 스탯이 오르지 않을 정도로 잔돈까지 탈탈 털어서 먹었다.
"많이 드시는군요. 특별히 고기 한 근에 20실버씩 깎아 드리겠습니다. 아주 귀한 고기니까 맛있
게 드세요."
위드의 말을 들었을 때는 물론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저쪽!
음식을 먹고 나서는 이동 포탈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라타의 병사들과 성기사들이 막고 있었다.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혼은 정중하게 물었다.
"저희가 어떤 의뢰를 수행해야 합니까. 혹시 퀘스트가 있습니까?"
이동 포탈의 사용을 허락받기 위한 질문에 병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사용 요금을 내야 합니다."
"요금요?"
"일인당 350골드입니다."
고기를 먹느라 가진 돈을 다 써 버린 혼과 일행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혼이 일행을 보며 물었다.
"어쩌지?"
"뭘 어떻게 해. 돈을 만들어 봐야지."
마법사 이스턴이 주섬주섬 돈주머니를 뒤적였다.
평소 마법 물품 제작을 통해 쏠쏠한 돈벌이를 했던 그였지만 고기를 먹으면서 술까지 마신 덕에 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다.
"하는 수 없지. 이번 기회에 안 쓰는 물건이나 처분하세."
"그럴까?"
"그래, 이번에 배낭 정리나 하도록 하지."
일행은 모라타에서 예전에 사용했던 검과 갑옷, 따로 챙겨 두었던 광석 등을 팔았다.
기념 삼아 간직하고 있던 물품들을 팔아서 사냥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동 포탈 요금이 다소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더 좋은 사냥터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지불할 만한 금액이었다.
그렇게 마탈로스트 교단의 신전으로 이동하여 엠비뉴 요새까지 찾아왔다.
무너진 성벽과 탑,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해골 무더기.
강가에 안개까지 끼어서 으스스한 밤이었찌만 혼 일행처럼 이동 포탈을 통해서 온 유저들이 80명 넘게 있었다.
새롭고 위험한 탐험을 개시한다는 흥분으로 가득한 여행자들은 통곡의 강 근처에 와서 방송에서 보았던 격전지 엠
비뉴 오새를 둘러보았다.
"사냥에 필요한 물품들 팝니다. 각종 잡템들 고가에 매입합니다."
엠비뉴 오새 입구에는 어느새 상인 마판이 와서 노점을 차렸다.
고레벨 유저들만을 대상으로 한 장사였기에 마진이 상당하리라.
"전사 데려가실 분.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비테세입니다. 저 아시는 분만 데려가 주세요."
혼자 온 유저들은 이곳에서 파티들을 구하고 있었다.
혼 일행은 파티원을 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끼리 사냥을 하려고 했다.
그때 평원 쪽에서 위드가 걸어왔다. 검은 망토를 펄럭이면서 엠비뉴 요새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위드가 도착해서 폐허 속 요새를 구경하고 있는 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혹시... 퀘스트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
"제가 받고 있는 퀘스트 공유해 드립니다. 난이도 B급의 의뢰입니다."
위드가 해결하기에는 애매한 난이도였다.
지하라서 조각 생명체들을 잔뜩 끌고 갈 수도 없고, 또 내부에 미로가 있어서 시간이 제법 많이 잡아먹힐 것이기
때문.
"무슨 퀘스트인가요?"
금발의 여자 정령사 1명이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전신 위드.
아직 의견이 분분하지만, 상당수가 전쟁의 신이라고 믿고 있는 인물의 퀘스트였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퀘스트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연계 퀘스트의 일부죠."
"정말요?"
위드가 연계 퀘스트를 공유해 주더라도 중간에 끼어든 이들은 처음부터 진행한 게 아니라서 후속 퀘스트를 받지는
못한다. 하나의 퀘스트가 종료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여기에 온 이들은 대부분 부활의 군대와도 관련이 있는 마탈로스트 교단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데이몬드, 부활의 군대와 관련이 있는 장소였지?"
"맞아. 그랬던 것 같아."
위드가 엠비뉴 교단의 음모를 저지하면서, 부활의 사제들은 죽은 원혼들을 바탕으로 마물들을 일으킬 수 없게 되
었다. 엠비뉴 교단과의 싸움뿐만이 아니라 위드의 모험가로서의 명예가 더욱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탓에 현재 부활의 군대는 세력이 더 커지지 못하고 오데인 요새에서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퀘스트의 위치는 어디인데요?"
"바로 이곳, 지하 감옥입니다."
"정말요?"
정령술사를 비롯하여, 엠비뉴 요새에 있던 유저들은 서둘러 위드에게 다가왔다.
매우 좋은 퀘스트였기에 기꺼이 공유를 받으려고 하는 것!
"공유 부탁드려요, 위드 님!"
"고맙습니다. 어렵게 받으신 퀘스트를 나누어 주셔서요."
감사의 인사를 하는 그들을 향해 위드가 웃으며 말했다.
"단, 소정의 참가비를 받습니다. 800골드입니다."
"......"
난이도 B급의 마탈로스트 교단과 관련된 의뢰!
연계 퀘스트는 이어지지 않더라도 경험치나 명성을 포함한 다른 퀘스트의 보상들은 받을 수 있다.
끊임없는 삥 뜯기와 바가지요금으로 돈을 벌고 있는 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