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17권 : 바드레이와의 악연 (68/520)

<바드레이와의 악연>

  엠비뉴 교단 11지파의 파멸은 난이도 B급의 의뢰였다.

"우와아!"

"우리, 엠비뉴 교단의 전투부대와 싸우는 거야?"

"너무 위험한 거 아닐까?"

"정말 재밌겠다."

  위드는 퀘스트를 팔아먹고 무려 13만 골드나 벌어 버렸다.

  모라타에서 연락을 받고 뒤늦게 온 사람들에게, 저녁까지 퀘스트를 팔아먹었다.

  철저한 현금 장사!

  누렁이가 질펀한 엉덩이를 실룩실룩 흔들면서 기뻐했다.

음머어어어어어어!

  주인이 부자면 쑥이라도 한 뿌리 씹게 해 줄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위드는 매정했다.

"보리 빵도 비싸서 명절이나 되어야 겨우 부스러기나 주워 먹을 판에... 쑥?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어. 나중에 고기에 섞어 줄게. 한우 쑥 야채 비빔밥!"

  큰 눈동자를 끔뻑이며 서러워하는 누렁이였지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다.

  그래도 위드가 건초는 항상 잘 준비해 주었고, 유린이나 화령으로부터 약초도 얻어먹었다. 따로 불만은 없지만 일

 부러 배고픈 듯이, 굶주려서 힘이 없는 것처럼 늘어졌다.

  막 생명을 얻고 나서는 건장한 체격과 힘을 가져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야 했던가.

  누렁이에게도 삶의 지혜가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걸 감정해 봐야 할 때로군."

  위드는 용병 스미스로부터 받은 도장을 꺼냈다.

  생김새로 보아서 대충 용도는 짐작이 간다.

  조르디아의 직인처럼, 영주나 귀족 들이 자신을 증명하는 도장이리라.

  위드는 드래곤이 있는 부분을 어루만지며 조각품의 특별한 점들을 살폈다.

"감정!"

『알 수 없는 황제의 옥새 : 내구도 3/20.

  베르사 대륙의 역사와 함께한 귀한 옥새.

  실력의 한계를 짐작하기 어려운 조각사가 만들었다.

  파손되어 완전한 상태는 아니다.

  예술적 가치 : 39,600

  옵션 : 기품 +60.

카리스마 +25.

소유자의 육체에 해로운 모든 마법들에 대한 저항력 50%.

귀족들과 기사들을 주눅 들게 만들 수 있음.

띠링!

-알 수 없는 황제의 옥새를 자세히 살핌으로 인해서 예술 스탯이 49개 올랐습니다.

  위드도 명작이나 대작의 조각품을 많이 만든 실력 있는 조각사다.

  그의 조각품이 완성될 때마다 베르사 대륙이 떠들썩하게 달아오르지 않았던가.

"커억!"

  그런 위드조차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굉장한 작품!

  옥으로 된 넓적한 도장 면과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황금빛 드래곤은 생동감과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다.

"낡아서... 정말 많이 만져서 닳은 느낌은 있지만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야."

  손이 닿는 부분은 심하게 때가 타고 무늬들도 많이 사라졌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러운 품격까지 더해졌다.

  옥과 황금.

  재료의 특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만든 도장이다.

  손상되지 않은 부분은 위드조차도 세공하지 못할 정도의 기술력으로, 세밀했다.

  멀리서 보면 때가 탄 황금빛 드래곤이었지만, 눈에 가까이 대고 보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느낌이다.

"보통 작품이 아닌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의 조각품을 과연 누가 만들 수 있었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사람은 있었다.

  황제의 옥새라면 귀하게 간직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럼에도 이렇게 닳을 정도로 긴 세월을 버텨 온 옥새다.

  위드에게 어떤 영상이 흘러들었다.

  조각품에 간직된 추억이었다.

  평범한 천 옷을 입은 노인이 조각을 하고 있었다.

  드넓은 대전에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지극히 공손하게 부복하여 있다.

  사각사각.

  노인의 조각칼 아래에 황금 드래곤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시간조차도 숨을 죽인 듯이 서서히 조각칼이 움직인다.

  더할 곳은 더하고, 뺄 곳은 뺀다.

  그저 평범한 손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만들어지고 있는 황금 드래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존귀함을

 가지고 있었다.

  조각칼이 움직일 때마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이 위대한 작품이 훼손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

  하지만 조각칼이 지나가고 나면, 그 소심함조차 비웃어 줄 정도로 점점 완전에 가까운 조각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

 다.

  보물!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의 품격조차도 높여 줄 것 같은 황금빛 드래곤과 인장.

  옥새의 탄생이었다.

"이것이 나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리라."

  도장을 만든 노인이 그렇게 선포했다. 그러자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외쳤다.

"폐하의 뜻을 받듭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전 너머에 잇는 수많은 조각품들!

  인간과 비슷하지만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는 조각품, 짐승들의 조각품, 새들의 조각품, 몬스터들을 닮은 

 조각품 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주인님의 뜻을 받듭니다!"

  검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이를 먹어도 너무 먹었어. 여자를 만나는 것도 늙으니 힘들구나."

  사범들이나 수련생들은 오크들이나 다크 엘프, 인간들을 만나서 그럭저럭 어울리고 있었다. 여자 친구도 만들고,

 파티 사냥도 했다.

"검십육치도 여자 친구와 손을 잡았다는데."

"언제?"

"삼십칠 일 만이래."

"우와, 빠르다! 그렇게 빨리 진도를 나가도 되는 거야?"

"정말 빠른 놈은 따로 있지. 검사백일치는 벌써 팔짱 끼고 영화관도 갔어."

"커허, 영화관까지! 유별나게 영화 같은 거 싫어하던 녀석이잖아. 영화 보다가 코 골면서 잠들지

는 않았나?"

"액션 영화를 봤다더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벽돌 깨기랑 2단 돌려 차기를 보여 주니까 여자애가

든든하다고 좋아했다고 해."

  수련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전설 같은 연애담들은 희망을 주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아서 연락이 끊어지거나 친구 등록이 취소되거나 아니면 미안하다는 문자가 오는 경우도 많았지

 만.

"휴, 그런 것도 다 젊을 때의 일이지."

  검치는 수련생들의 열정이 부러웠다.

  사범들 정도만 되어도 어떻게 여자를 만나 볼 수 있었으리라. 아저씨에게 오빠가 되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금방

 이었으니까.

  하지만 검치는 어엿한 중년이라서 어린 소녀들이나 여자들과 많이 어색했던 것이다.

  물론 검치의 레벨은 200대 후반에 불과했지만, 전투 능력 만큼은 가공할 수준이라서 어떤 파티에서든 환영을 받았

 다. 검치가 광장에 가기만 하면 서로 영입하려고 들었다.

  단지 사냥터에서의 분위기가 곤란했을 뿐이다.

"저기, 검치 님."

"......"

  꼬박꼬박 붙여 주는 존댓말.

  젊고 어린 파티원들은 서로 반말을 하면서 친근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검치가 그들과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던 것.

  검치는 본인과 연령대가 비슷한 여자를 찾아보려고 했다.

"로열 로드의 세계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드니까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30대나 40대 초반도 물론 많이 있었다. 도시나 마을에 가면 매우 흔히 만날 수 있다.

  남자들이 낚시를 하면, 아마도 그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매운탕을 끓여 주었다.

"여보, 매운탕 드시고 하세요."

  무척이나 훈훈한 광경이었다.

  상점을 차려서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어린 자식들이 가끔 무기나 방어구, 잡동사니 들을 사러 온다.

"아들아, 화살 20골드에 사 줄래?"

"엄마, 무슨 그런 심한 농담을 하세요?"

"여보, 우리 아들 집 나간대요."

"그래. 부모로서 이삿짐센터 정도는 불러 주는 게 도리겠지?"

  부모로서 과감하게 자식들에게 바가지를 씌워 주는 다정한 모습들.

  검치는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방랑했다.

  황야에서 덤비는 몬스터들을 도륙하기도 하고, 검 한 자루를 들고 몬스터들의 소굴에도 뛰어들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짓도 참 많이 해 보았지."

  검을 입에 물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배가 고프면 맑은 강의 깊은 곳에서 생선들을 베었다.

  물의 흐름과 힘을 이기고 검을 휘둘러서 고기를 잡기란 정말로 어렵다. 하지만 검치는 오히려 쉽게 성공시켰다.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급류의 흐름을 따라가서 생선들을 잡았기 때문이다.

띠링!

-검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생선을 잡으면서도 검술 스킬이 올라간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장소의 특성상 검술 스킬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검술 스킬도 조각술처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된 바에야......"

  검치는 물 위로 떠올라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강물로 들어갔다.

   파라라라라라라!

  검치가 한 호흡에 휘두르는 검이 생선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잘게 저미어서 회를 뜨는 검술!

  생선은 산 채로 눈을 끔뻑이면서 회가 되고 있었다. 그것도 수중에서!

  검치의 눈빛에 미안함이 어렸다.

'잔인해서 못 할 짓이로군.'

  검술 실력을 제대로 발휘한 적이 언제였던가.

  삶과 죽음을 일수유에 가르던 그때 이후로는 최선을 다한 적이 없다.

  로열 로드조차도 여흥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녹슬지 않은 검술 실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는데, 생선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검치는 토끼나 다람쥐, 사슴 같은 초식동물은 베르사 대륙에서도 거의 사냥하지 않았다.

'먹지도 않을 것을... 무의미한 살생을 할 필요가 없겠지.'

  검치는 미안한 마음에 생선들에게 붕대를 감아 주었다.

  신기에 달한 검술로 인해서 아직 살아 있는 생선들이었다.

"푸하!"

  그리고 강물 위로 올라와서 하류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를 정해 놓은 게 아니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발걸음이었다.

  강의 하류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낚싯대를 들어 올린 중년 남자와 부인의 대화가 들렸다.

"여, 여보."

"왜요?"

"우리 지금... 회를 낚았어!"

  붕대가 거의 떨어져 나간, 살아 있는 메기가 그들의 낚싯대의 미끼를 물고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참 어렵구나."

  검치는 큰 고목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검술 스킬은 고급 6레벨 89%.

  믿기지 않는 속도의 성장으로, 검술 스킬의 마스터도 그리 머지않은 단계였다.

  하지만 레벨을 올리고 검술 스킬을 연마한다고 해서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나이 먹은 게 죄지. 혼자서 돌아다니는 아줌마는 없을까?"

  처음 보는 여자에게 친한 척 말을 붙여 보기도 어색했다. 말을 걸어도 되는지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으면 남편이

 와서 데리고 가는 경우를 두어 번 당하고 나니 의욕도 안 생길 정도였다.

  검치가 자책하고 있을 때,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다가왔다.

"아저씨, 여기서 뭘 하세요?"

"......"

  검치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유저로 보이는 인간 여자아이는 상당히 귀엽고 예쁜 편이었다.

'사냥터나 물어보거나 하겠지.'

  평소라면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으리라.

  깜찍하고 어린 여자애를 어떻게 해 보려는 나쁜 의도가 아니라,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서였다.

'제피도 조언을 했었지. 여자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사실 여자애가 먼저 말을 걸었던 게 검치의 인생에서 몇 번이나 되었던가.

  덩치가 있어서 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는 없는 외모다.

  하지만 그보다는 눈빛이나 기세가 정상인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폭력배들이라고 해도 알아서 피해 간다.

  지금은 다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라서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다른 장소로 갈 생각이 없는지 검치의 앞에 앉았다.

"저기 아저씨, 혼자세요?"

  검치는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일부러 계속 묻는 걸 보니 뭐라도 팔아 보려는 상인인가? 아니면 도움을 바라는 거? 대충 쓸 만

한 무기 정도 남는 게 있으면 줘야겠군.'

  여자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저희와 함께 사냥하실래요?"

  짐작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에 검치가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냈다.

"지금 파티에 초대하는 거니?"

  수련생들을 향해서는 짧고 엄격한 말투만을 고집했다.

  여자아이가 놀라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이성과 대화를 나눈 경험이 많지 않아서 더욱 낮게 깔리는 중후한 목소리

  나쁘지 않은 반응에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함께 사냥해요, 네?"

"글쎄다. 귀찮은데...... 사냥터 추천 정도라면 해 줄 수 있다."

"로자임 왕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희끼리만 사냥하기에는 좀 벅차거든요."

"허어."

  결국 검치는 이 귀여운 여자아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뭐 따로 할 일도 없으니 잠깐 같이 싸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여자아이가 도움을 바라고 와서 일부러 친근하게 굴었다해도 그 정도는 봐줄 작정이었다.

  검치가 별생각 없이 물었다.

"다른 일행은?"

"2명이에요. 우리 엄마랑 막내 이모요. 엄마 직업은 정령술사고 이모 직업은 소환술사예요."

  여자들은 정령이나 소환물들이 귀엽다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령술사, 소환술사. 그리고 이 아이의 직업은 마법사 정도 되나? 3명이서 사냥하기가 어렵긴

하겠군.'

  일행이 있는 장소로 걸어가면서도 여자아이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아빠는 일하느라 바빠서 같이 못 놀아 줘요. 막내 이모는 대학교 졸업하고 유학 다녀오느라 아

직 남자 친구가 없어요."

  왠지 막내 이모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여자아이.

"직업은 회계사거든요. 올해 서른두 살인데 공부에 빠져서 남자 친구 사귀어 본 적도 없어요.

예쁘고 날씬하고 성격도 좋아요. 우리 엄마랑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저랑은 어릴때부터 언니처

럼 같이 놀기도 했어요."

"그랬구나."

"근데 눈이 높아서... 선 자리에도 몇 번 나갔는데요, 웬만한 남자들은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다

고 하면서 바로 일어났어요."

"높겠지."

  검치는 무덤덤하게 말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여자아이의 일행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큰 개를 닮은 정령을 데리고 있는 차분해 보이는 중년 여성 1명 그리고 단아한 얼굴의 30대 초반의 여성.

  여자아이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모는 사내다운 남자를 좋아해요. 격투기도 좋아하고요."

"......!"

  헤르메스 길드이 정도 담당 암살자 스티어.

  광범위하게 퍼진 연락 조직들을 바탕으로 베르사 대륙의 동향을 주시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북부의 모라타 영주가 전신 위드일 가능성이 높다라......"

  스티어는 상부에 보고할 필요성이 있는 사안이라고 여겼다.

  바드레이는 현재 하벤 왕국의 쥬벨린 던전에 있다. 몬스터가 쏟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사냥터였다.

  하벤 왕국뿐만이 아니라, 베르사 대륙의 어디를 뒤져 보더라도 유저들에게 최악의 사냥터로 손꼽히는 곳.

  바드레이는 귓속말이나 길드 채팅 창도 꺼 놓고 쥬벨린이라는 거구의 주술사를 사냥하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어떻게 할까요, 스티어 님."

  정보 담당 부하가 물었다.

  바드레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동료들과 함께 던전 안에서 보냈다. 사냥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스티어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직접 가야겠지. 길드 병단에 인원 요청을 해. 총수 바드레이 님을 만나기 위해서

던전에 들어간다."

  스티어와 30명의 헤르메스 길드원은 던전으로 들어갔다.

  모두 레벨이 360이 넘었지만, 몬스터의 수준이 너무도 높은 쥬벨린의 던전이라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5명이 사망하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바드레이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바드레이는 12명의 친위대와 함께 무기를 정비하고 쉬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는 장소 주변에는 몬스터의 사체들이 널려 있고 악취가 풍겼다.

"바드레이 님."

"무슨 일로 스티어 자네가 여기까지 왔지?"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바드레이는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최상급의 아이템들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는 그는 베르사 대륙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는 이답게 여유가 넘쳤다.

"전신 위드의 일입니다."

"위드라......"

  바드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야기라면 자네가 여기까지 찾아올 만도 하겠지."

"위드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모라타의 영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

도 많습니다만."

"어떤 점이지?"

"로자임 왕국에서 시작한 유저로 추정되는데, 로열 로드를 시작한 지 1년 6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는 겁니다. 이게 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조각사가 부업이라는 겁니다."

"부업?"

"그의 전투 능력을 감안한다면 조각사라는 직업은 사실이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취미

로 한 조각술이 대작을 만들고, 대륙을 떠들썩하게 할 수준이라는 겁니다."

  취미로 만든 조각품이 피라미드에 빛의 탑, 여신상이라고 판단했던 것!

"호오, 대단한데?"

"조각사가 부업이었어? 이야! 나 그 녀석이 만든 조각품 보고 완전히 감탄했는데."

  바드레이의 동료들이 한마디씩 떠들었다.

"그러고 보니 위드라면 우리의 후배라고 할 수도 있지."

"아, 마법의 대륙에서?"

"우리가 떠나고 6개월 정도 후에 지존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말이야."

"우리가 마법의 대륙에서 지존이었던 적이 있지. 그것도 꽤 오랫동안."

  친위대는 반가운 듯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마법의 대륙에서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다.

  마법의 대륙에서 유명한 성들을 지배하고 있던 성주 출신들!

  바드레이는 마법의 대륙에서도 최고의 성주였다.

"그때가 그립기도 하군."

"뭘. 나는 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이 베르사 대륙의 맑은 공기와 직접 몸을 움직이면서 싸

울 수 있는 장점을 놓치고 싶지 않거든."

"나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던 시간들이었어."

  잦은 전쟁과 다툼으로 미운 정이 들게 된 성주들은 로열 로드가 생긴다는 말을 듣고 한자리에 모였다.

  마법의 대륙의 인기는 정점을 지났고, 명백하게 쇠락하는 중이었다. 한 지역의 패자들이었던 그들은 그 부분을 매

 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성주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매달 엄청난 양의 아이템과 골드가 들어온다. 일반 직장인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

 금을 벌어들였다.

  성주들은 단체를 유지하면서 수입을 올리는 다크 게이머의 대부들이었다.

  그들은 회합을 통해서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로열 로드로의 이전.

  성주들은 세력을 그대로 이끌고 로열 로드로 넘어왔다.

  이것이 헤르메스 길드의 탄생 비화였다.

"우리가 떠나고 나서 위드가 엄청나게 유명해졌어."

"우리도 포기한 퀘스트나 던전들을 정복했다지? 이반포르테 섬의 미궁까지 파헤쳤다는 소식을 듣

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정말 굉장한 유저야. 물론 바드레이가 그대로 마법의 대륙에 남아 있었다면 호락호락하게 자리를

넘겨주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바드레이는 친위대의 대화를 들으면서 웃기만 했다.

  헤르메스 길드의 서열에 따른 명령 체계는 엄격하지만, 친위대에만은 통용되지 않는다.

  바드레이와 성주 출신의 친위대는 헤르메스 길드를 설립한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은 협약을 통해 가장 강한 사람이 총수의 자리에 올라서 다른 이들을 다스리도록 했다.

  율법은 친위대 중에서 언제라도 바드레이보다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곧 총수가 되는 것.

  그래서 로열 로드 초창기에 헤르메스 길드의 총수는 몇 번 바뀌었다.

  바드레이나 친위대나, 선의의 경쟁을 통해 더 빨리 강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경쟁을 하는 중간 과정에서 완전히 도태된 성주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로열 로드는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고, 매우 빠른 판단력과 감각을 가져야 한다. 낙오된 성주들은 대리인을 통해

 서 길드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헤르메스 길드는 마법의 대륙에 기원을 두고 있는 최고의 길드였다. 위드에 대해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 하고 있었다.

"마법의 대륙과 위드라......"

  바드레이는 상념에 젖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에게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스티어."

"예, 총수님."

"북부를 계속 주시하라."

"알겠습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일을 키울 필요는 없다."

"그 말씀은?"

  스티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평소 헤르메스 길드는 조금이라도 반항의 기미가 보이는 상대들은 처참하게 짓밟아 주었다.

  암살자들을 파견해서 중요 요인들을 척살하거나 매수한다. 전투 병단을 파병해서 마을과 성을 불태우는 등 잔혹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다. 우리가 나서기도 전에 먼저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에게 잡아먹히게 될

테니까."

  스티어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총수님의 말이 맞습니다. 데이몬드가 이끄는 부활의 군대도 곧 그쪽으로 향하게 될 겁니다."

  부활의 군대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오데인 요새를 넘지 못하고 후퇴를 결정, 중앙 대륙에서의 영토는 급격히 위축되고 있었다.

  부활의 군대는 더 이상 중앙 대륙에서 버티지 못한다.

  북부에는 아직 강한 왕국이 없으니 그곳을 노리기 위해 철수하는 것이다.

  위드와는 원한 관계도 있었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퀘스트를 통해서 부활의 군대를 저지한 큰 공로를 세운 게 바로 위드였기 때문이다.

  바드레이가 말했다.

"위드가 유명하기는 하지. 하지만 가지고 있는 명성은 패배를 겪으면 그만큼이나 빨리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몰락도 한순간이지."

  사냥을 통한 스킬 상승과 레벨업 그리고 세력 확장!

  바드레이는 퀘스트와 방송 출연에 대해서는 보여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높은 레벨과 세력

 이야말로 다른 유저들을 두렵게 만들고,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드레이는 친위대와 함께 사냥을 마치고 나서 휴식 시간동안 과가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마법의 대륙이라."

  뜻을 함께하는 성주들과 함께 마법의 대륙을 접었다.

  로열 로드에 대한 정보들을 일찍 입수하면서 미리 몸을 만들고 준비를 하여야 했다. 하지만 간간이 심심풀이로 마

 법의 대륙에 몰래 접속했다.

  캐릭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법의 대륙은 그의 청춘을 바친 게임이었다.

  쇠락해 가고는 있었지만 깊은 정이 들어서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위드에 대한 소문을 게임 내에서 접하게 되었다. 바드레이가 떠나고 난 이후 최강의 자리에 등극했다

 는 소문.

"전쟁의 신 위드. 지금 마법의 대륙에서는 그 위드가 최고지."

"바드레이가 접속을 안 하니, 여우가 날뛰는 건가?"

"그 반대야. 바드레이보다도 훨씬 뛰어나다고 봐야 해. 바드레이는 사냥하지 못했던 드래곤도 혼

자 잡을 뿐만 아니라, 던전들도 혼자서 탐험하거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말이야?"

"바드레이는 절대 못하던 일이지."

  바드레이는 자존심이 상했다.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성격은 아니라서 넘겨 버렸지만, 그래도 기분은 더러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의 장난인지, 혼자서 던전에서 사냥을 하던 와중에 위드를 만나게 되었다.

  바드레이는 그의 장비와 이름을 보자마자 소문의 위드임을 직감했다.

  마법의 대륙은 키보드로 말을 쳐야 되는 게임이었다.

"네가 위."

  위드냐라는 말을 미처 다 치기도 전이었다.

  상대가 공격 스킬을 발동시켰다.

  던전에서 만나면 가차 없이 공격을 하는 위드였기 때문!

  바드레이는 허겁지겁 방어 스킬들을 활용하고 도망쳐야 했다.

  생명력을 300 정도 남기고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다.

  절대 최강자로 군림하던 바드레이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날이었다.

  바드레이는 생명력과 마나를 완전히 회복하고, 최고급 장비들의 손질까지 마치고 나서 다시 위드에게 도전했다.

"나는 바드레이다. 위드, 너의 목을 베어 주마."

  미리 쳐 놨던 대사를 재빨리 입력했지만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바드레이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

  위드는 평범하게 공격 스킬을 발동시킬 뿐이었다.

  그렇게 벌어진 전투에서 바드레이는 말할 수 없는 벽을 느꼈다.

  현재의 그로서는 절대 오를 수 없을 만큼 높고 두꺼운 요새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위드는 그가 사용한 연계 스킬들을 모조리 풀어 헤쳤다.

  장비와 레벨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데 스킬의 운용에서 지고 들어갔다.

  바드레이가 어떤 공격을 시도하든 간에 빠르게 대응하고 역습을 가한다.

  망망대해를 대하는 것 같은 절망감 속에서 패배를 경험 했다.

  바드레이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마법의 대륙 최강자라는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잠깐 쉬었던 기간이 있기는 했어도, 마법의 대륙을 한 경력을 따지면 절대 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바드레이는 다섯 번이나 몰래 위드를 쫓아가서 다시 싸움을 걸였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똑같았다.

  스킬의 운용이나 전투법을 바꾸어 보아도 너무 쉽게 파훼해 버린다.

  위드의 레벨은 점점 오르고, 장비는 만날 때마다 좋아졌다.

  격차가 심한 몬스터들은 사냥을 해도 경험치를 거의 주지 않는다. 바드레이는 한계라고 생각했던 레벨을 넘어, 그

  는 스스로 사냥터를 개척해서 궁극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퀘스트와 미궁, 마법의 대륙에 있는 드래곤들을 혼자 사냥하면서 장비들까지 비교할 수없을 만큼 높아졌다.

  바드레이에게는 전투의 패배보다도 그러한 점들이 더 큰 충격이었다.

  좌절과 모욕감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위드라...."

 바드레이는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날의 치욕을 잊은 적이 없다. 로열 로드에 더욱 전념하게 만들어 준 당사자가 위드였다.

         '아직은 봐주겠다. 여기서 짓밟기에는 내 원한이 너무크니까. 좀 더 성장해라. 사람들에게 관심과 존경을 받으면서 친구와 동료들도 사귀어라. 그리고......"

 바드레이는 그날을 상상했다.

 헤르메스 길드와 동맹 길드들.

 "철저히 짓이겨 주겠다. 너뿐만이 아닌, 네가 아는 모드를. 이베르사 대륙에 다시 발붙일 수도 없도록!"

달빛 조각사 18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