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체부르그의 위치 ]
페트는 그림을 그리던 도중에 위드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나의 숙명적인 적이 왔군."
바르고 성채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이곳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다른 지역보다는 레벨이 높은 유저들이 많았고, 성문만 넘어도 거침없는 대자연의 장관이 펼쳐진다.
유저들도 주민들도 빨리 늘어나고 있었으며, 갈수록 점점 고풍스러운 맛을 더해 가는 바르고 성채.
이곳에서 화가로서 영주가 되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영주님이 고기 파티를 열어 준대."
"진짜?"
"창고를 열어서 모두 공짜야. 마음껏 먹어도 돼. 그리고 영주님이 있는 장소에서는 고기를 직접 구워도 준대."
"빨리 가자!"
위드가 욌을 뿐인데, 바르고 성채는 몬스터 대군이 밀려왔을 때보다도 더욱 소란스러웠다.
유저들이 야단법석을 떨면서 창고에서 고기를 받아 왔다.
고기를 사 먹더라도 부담이 될 정도의 금액은 아닐 테지만, 영주 위드가 무료로 나누어 준다니 받아 와야 되지 않겠는가.
"캬하! 기름진 멧돼지 고기는 언제 먹어도 일품이야."
"응. 여기에는 건강하게 산에서 뛰어다니는 사냥감이 많아서 고기의 질이 더 훌륭한 것 같아."
꿀꺽.
천장화를 그리던 페트조차 무의식적으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안 되겠다. 나도 그냥 먹고 할까?'
위드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승부를 벌이려면 상대방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가서 먹어 보자.'
페트는 위드가 고기를 구워 준다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벌써 고기 한 점 얻어먹어 보겠다고 유저들과 주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오늘 내로는 먹을까?"
"줄이 빨리 줄어드니까. 1시간 내로는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페트는 한숨을 쉬면서 맨 뒤쪽에 섰다.
오랫동안 기다려야 될 테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과연 그 고기 맛이 어떨지 궁금하여 빠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어느새 조각 생명체들도 도착하여 있었다.
덩치가 너무 큰 녀석들은 성채 바깥에서 따로 수레에 실어서 내온 먹이를 먹었고, 이곳에서는 켈베로스를 비롯하여 기사 세빌 프렉스턴이 벌써 위드에게 고기를 받아먹고 있었다.
"왈왈!"
고기 맛이 어찌나 좋았는지, 켈베로스가 꼬리를 흔들다가 땅바닥에 발라당 누워서 애교를 부렸다.
페트에게는 보여 준 적이 없는 친근한 모습이었다.
"고기 맛이 정말 뛰어납니다. 위드 님이 요리 솜씨는 제 검술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기사 세빌 프렉스턴까지도 위드에게 존경심을 보였다.
불 조절이 워낙 탁월해서, 위드가 구운 고기는 육즙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당하게 뿌려지는 마늘 소금.
페트가 그동안 조각 생명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이 물거품처럼 사그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니야. 그래도 나와도 친해졌어. 나중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투자한다면 기회는 올 거야.'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 위드는 여자들에게 인기도 참 많아."
"그러게, 정말 예쁘네."
그사이 줄이 많이 줄어들어서, 페트가 있는 장소에서도 이제 위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위드는 불의 정령인 화돌이를 소환하여 단체로 고기를 굽고 있었다,
고기에 후추와 소금을 뿌리고 칼질을 하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크흠! 정말 예,예쁜데?"
페트의 눈에 화령이 들어왔다.
어디서도 보기 힘든 환성적인 미모의 아가씨가 위드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음식을 하는 걸 돕고 있었다.
뜨거운 불 때문에 발그스름하게 물든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예븐 아가씨가 곁에 있을 수가 있지?"
페트는 괜히 위드가 더 미워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위드가 고기 한 점을 집어서 어떤 여자에게 먹여 주는 모습이 보였다.
페트가 잊지 못하던 사람, 조르디보오스 성에서 만났던 유린이 위드에게서 고기를 받아먹고 있었다.
둘이서 보낸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그의 가슴에 불꽃처럼 남았던 소녀.
'유린이다.'
페트는 유린이 위드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이는 걸 보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녀를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고기나 얻어먹으려고 줄을 서서는 아니었다.
'차라리 남자답게 이대로 뒤돌아서서 바르고 성채를 떠나자.'
모든 걸 묻어 버리고 떠나려고 했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건, 유린이 위드롸 계속 붙어 있는 광경이 앞으로도 쭉 상상에 남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심란함에 빠져 있는 페트의 귀로 쏙쏙 들어오는 이야기.
"저 여자애는 누구야?"
"화가라던데......."
"몰랐어? 위드의 여동생이잖아. 예전에 뱀파이어 왕국에서 모험도 같이했었는데."
"정말 귀엽다. 내 여자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위드가 처남이 되면 앞으로 인생도 활짝 펴지는 걸 텐데."
페트는 반쯤 뒤돌아섰던 몸을 돌려 다시 똑바로 줄을 섰다.
'여동생이었구나.'
조르디보오스 성에 유린이 남겨 놓은 글귀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
검치 들이 먹고 마시는 비용은 전부 위드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으으윽."
"배, 배가 터져서 죽을 것 같다"
폭식으로 인해서 벌써 생명력이 많이 깍여 있었다. 그런데도 새로 고기가 오면 환호했다.
"고기다!"
"갈비찜이네."
"허브로 풍미를 돋운 갈비찜입니다."
위드는 계속 음식을 제공했고, 이건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504명이 먹다가 전부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요리사가 무서운 직업이구나.'
'본 드래곤과도 지칠 줄 모르고 싸우던 분들이 저렇게 나가떨어지다니....'
정성인 페일과 제피는 이제 고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는데 그걸 계속 꾸역꾸역 먹어치우다니, 정말 대단했다.
탑을 세울 정도로 엄창나게 많던 고기가 드디어 다 사라졌구나 할 무렵, 바바리안들이 사냥을 나갔다 오더니 다시 신선한 고기를 더 높이 쌓았다.
"고기다."
"와!"
일반 유저들도 검치 들 부근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먹었다.
"먹자, 먹어."
"아우... 김 부장 진짜!"
"적당히 좀 하고 살자. 칼퇴근 좀 시켜 줘!"
"주말에는 좀 쉬어야지. 사람이냐 기계냐. 기계도 고장 나겠다!"
"시험, 취업, 자격증. 시험, 취업, 자격증. 으아아아악!"
유저들은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폭식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 많이 먹자.
- 위드 님이 구운 고기는 정말 맛이 최고야.
페어리들도 공중에서 날아다니며 고기를 뜯어 먹었다.
나중에는 체중이 무거워져서 날갯짓을 해도 날지 못하는 페어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 밤이 되었을 무렵에는, 곳곳에 모닥불이 피워지고 검치 들이 두런두런 앉았다.
마지막 후식으로 곱창을 구워 먹는 사람들!
검치가 말했다.
"요즘 위드에게 적이 많은가 보더구나."
검삼치가 말을 받았다.
"방송을 보니 헬멧인가 뭔가가 자꾸 죽이려고 한답니다."
검사치, 검오치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놈들, 평이 아주 안 좋던데요. 악랄하고 욕심이 많답니다."
"이 베르사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놈들이라는데. 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 단체는 거의 없답니다.'
수련생들은 조용히 경청하기만 했다.
검치가 분위기를 잡고 말하고 있었고, 사범들도 진지하게 대화를 한다.
수련생들이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검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의 싸움에 우리가 꼭 나서야 될 필요는 없다. 막대노 다 생각은 있을 것이다."
위드는 물론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나름의 대응책을 가졌다.
아직 그들이 대륙을 제패한 것도 아니니 버틸 수 있는 데 까지는 버틴다.
당장은 조각 변신술로 피해 다닐 수 있으니 일단 조각술 최후의 비기나 퀘스트로 끝까지 가 본다.
그러고 나서도 헤르메스 길드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때 가서는 친한 척하기....를 할 계획이었다.
검삼치가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막내도 생각이 있을 테니 알아서 하도록 그냥 놔두는 게....."
"하지만 나는 스승 된 입장에서 막내가 혼자서 외롭게 싸우는 걸 지켜보기에는 다소 언짢구나."
검삼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알아서 하도록 그냥 놔두어도 물론 잘하겠지만, 사형인 저희가 도와주어야죠. 좋은 말씀이십니다, 스승님."
검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봤다.
"여기 이 베르사 대륙은 참으로 신비하다. 그리고 자유롭다. 평생 검을 익혔지만, 나조차도 이렇게 마음껏 다닐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하였다."
"........"
검치의 말은 사범들이나 수련생들이나 모두 공감하던 바였다.
육체와 정신을 극한까지 단련하여도 현실에서는 쓸 수 있는 환경이 없다.
스탯이나 레벨이나 스킬 숙련도 같은 여러 가지 변수가 복잡하게 적용되긴 하지만, 그래도 베르사 대륙은 자유롭게 검을 들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다.
강한 적과 싸우고, 모험을 하고, 동료들을 맞이한다.
남자들이 꿈꿀 수 있는 바로 그런 세상이었다.
"나는 강한 사람이라면 이 대륙을 차지하는 것도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야비한 자들이 힘을 모아서 횡포나 부리고 다니는 건 참지 못하겠다."
"저희 생각도 그렇습니다."
검치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그동안 많이 놀지 않았느냐?"
"예."
"재밌게 놀았습니다."
검치 들이 몬스터를 때려잡고 검술을 수련했던 행위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원해서 즉흥적으로 했던 것이다.
때로는 미친 짓도 해 보면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제는 좀 강해지자꾸나. 어떤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도록. 집단이 아닌 개인의 순수한 힘이 무엇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지 시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태풍이 오더라도 쓰러지지 않는 굳건함은 강함에서 나온다.
검치는 수련생들과 같이 로열 로드의 체계에 맞춰서 레벨을 올리고 강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
라체부르그.
이현이 컴퓨터로 정보 검색을 해 봤지만 로열 로드와 관련된 어떤 게시판에도 나온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게시판은 헤르메스 길드에 가입하려는 유저들과, 엠비뉴 교단에 대항하자는 글들이 봇물 터지듯 하고 있었다.
"내가 발견하면 최초일 가능성이 높겠군."
막무가내로 돌아다녀 본다면 넓은 대륙에서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
추리를 바탕으로 영역을 좁혀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극지방은 아니야."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본다면 열대우림이나 사막, 빙하 지대는 아니었다.
"네 종족이 살다가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섬일 가능성도 적겠지."
웬만큼 큰 섬이라면 뒤져 봐야 할지 모르지만, 그건 대륙에서 찾을 수 없게 된 이후로 우선순위를 미루어 두었다.
"넓은 강과 평원이 있는 장소로."
이현은 베르사 대륙의 지도들을 구해서 살펴봤다.
탐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장소는 완전히 밝여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맹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네 종족이 같이 살 정도로 큰 도시가 세워질 만큼 평탄한 지형이어야 해."
그것만으로도 찾아봐야 할 장소가 많이 줄어들었다.
숲은 나무가 잘면 이루어질 수 있어도, 높은 산이 쌓일수는 없으니까.
"돌로 집을 지었다. 모래를 쌓거나 나무로 집을 짓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아니. 엘프들이 반대했을까? 어쨌든 집을 지을 만큼 주변에 돌이 많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집을 짓는데 사용한 마룬석을 근처에서 많이 캘 수 있어야 한다....."
이현이 분석해 보니 자유도시들이 있는 부근이나 브리튼연합, 리튼 왕국 쪽에 그런 지형이 많은 편이었다.
"새들의 이동이나 꽃과 나무가 자라는 모습까지 감안한다면... 이 주변 왕국들 중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
대륙의 정중앙에서 약간 남쪽에 가까웠지만, 크게 치우친 위치는 아니다.
땅도 비교적 비옥하고, 떠돌아다니는 몬스터도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었다.
왕국과 자유도시를 끼고 있는 광범위한 그 지역에 흐르는 큰 강은 24개!
이현은 돌의 재질과 지형을 바탕으로, 강유역에서 가능성이 높은 장소를 대략 백삼십여 군데로 추려 냈다.
"베르사 대륙에서 수천 년 전에 존재했을 도시를 찾는 일이다 보니 과연 쉽지가 않군."
지도를 보면서 세부적으로 분석하는 데에만 사흘이 걸렸다.
그러고도 계속 수작업을 해야 되었다.
"여행객들의 사진을 찾아봐얒."
유저들은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나 유명한 장소에 방문하면 그 장면을 갈무리해서 인터넷에 올려놓는다.
이현이 우너하는 장소들은 검색만으로 대부분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는 비슷하지 않아. 풀과 나무가 그동안 많이 자랐다고 해도... 강이 흐르는 방향도 해가 저무는 쪽이 아니고, 곡물을 길렀다고 보기에는 평원에도 암석이 너무 많아.
바람이 불면 곡식으로 황금빛 물결을 이룰 수 있는 장소야야 해."
농사를 지은 흔적이 없는 땅이었다.
이현은 사진들을 보기 위해 로열 로드의 동호회 모임에도 가입했다.
로열 로드에서 귀농의 꿈을. 로열귀농
씨앗 재배에서 수확까지. 농부 길드
잘 자란 꽃을 보면 마음까지 행복해져요. 꿀과 나비
땅투기 실전 투자. 이렇게 하면 앉아서 부자 된다, 부동산 상인 길드.
땅을 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단체들.
그곳에 올라온 사진들도 이용하면서, 확실히 라체부르그가 아닐 것 같은 장소들은 가차 없이 뺐다.
"크흠, 역시 추리란 어렵군. 쉬운 작업이 아니야."
일일이 확인하기가 어렵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직접 가 보고 아니라서 돌아서는 쪽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이틀을 추리고 나니 남는 장소는 예순여덟 곳이었다.
"이 중 어딘가에 있을 텐데. 수수께끼와의 싸움이 되겠군. 그것도 상당한 두뇌 싸움이 되겠어."
지금 인간들의 마을이나 도시가 있는 장소들이 그중에서 마흔두 곳이나 되었다.
이현은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봤다.
라체부르그와 비교적 지형이 비슷한 장소는 어떤 종족이든 살기가 좋은 위치다.
강물이 뱀처럼 굽이치는 장소로, 몬스터들로부터의 방어도 용이한 지형이다.
"내가 만약에 살 집을 짓는다면......"
실거주 측면에서의 분석!
당시의 땅값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좋은 입지를 골라잡을 수 있었다.
"최대한 좋은 장소로 골라 봐야지."
이현은 자유도시들이 있는 알바스 지역이 마음에 들었다.
비옥하고 넓은 평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큰 강이 마을을 지을 수 있는 장소를 둘러싸 몬스터들을 삼면에서 막아 주고 있었다.
그리고 평원을 넘어서는 적당히 험한 산들이 솟아 있다.
"여기에 오크 부대들을 주둔시킨다면 상당히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겠지. 곡창지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빼앗겨서는 안 되니까."
몬스터들이 식량을 빼앗으러 왔을 때의 방비도 상당히 수월했고, 주변에 마룬석도 풍부한 편이었다.
다른 다섯 지점들의 위치도 그럭저럭 나쁜 편은 아니라서, 어디든 살 만했다.
"이곳들 중에 있을 가능성이 상당할 것도 같은데....."
이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여섯 지점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모두 직접가 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리튼 왕국와 브리튼 연합의 가능성이 높은 장소들에는 현재 도시가 지어져 있었다.
"알바스 지역부터 가 보는 거야. 돌아올 때 조금 많이 헤매야 되겠지만, 첫 번째로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까."
장고 끝에 겨우 결정을 내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학교는 다니고 있었고, 로열 로드에서는 바르고 성채에서 묵묵히 조각품을 깎으며 스킬 숙련도를 높이려고 애썼다.
"오빠, 안 자고 있었네?"
한밤중에 여동생의 방문이 열리더니 잠옷 차림의 이혜연이 거실로 나왔다.
"응. 요즘 생각할 게 있어서."
이혜은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서 마시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베르사 대륙 최초의 도시를 찾는 퀘스트를 받아서 그래."
이현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컴퓨터로 출력한 각종 자료들이 두꺼운 책 세 권 분량이었고, 어디선가 가져온 유리 칠판에는 가득 낙서가 되어 있고 군데군데 쪽지를 붙여 놓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나오던 그런 명장면을 재현하며 라체부르그를 찾으려 했던 이현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봤던 그 도시의 영상. 이 영상을 바탕으로 해서 이 자료들을 가지고 추적을 한 거지."
이현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깔려 있었다. 내가 이렇게 똑똑하다는 사실을 여동생이 새삼스럽게 깨달아 주기를 바라는 오빠의 마음으로 분위기를 잔뜩 잡은 것이다.
"아, 이 그림이 찾으려는 그 도시의 모습이야?"
"그렇지."
이현의 그림 실력은 개구리를 공룡으로 만들고, 지렁이를 강으로, 개미를 삼단 변신 로봇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 봤던 영상을 바탕으로 로열 로드의 사진들을 이용하여 최대한 비슷한 지형도를 만들어 놓았다.
"아이데른 왕국의 보르니스네?"
"응? 여긴 자유도시들이 있는 알바스 지역인데?"
"아냐. 나 여기, 나비 축제 한다고 해서 구경 가 봤단 말이야."
유린은 컴퓨터의 마우스를 조작하더니 보르니스의 영상을 화면에 띄웠다.
"이거 봐. 여기 맞잖아."
이현이 봤던 뱀처럼 꿈틀거리는 강, 넓은 평원과 새들, 꽃과 나무 들이 화면에 고스란히 있었다.
강줄기의 흐름이 조금 바뀌었다고는 해도, 저 멀리 보이는 산줄기들이 영락없이 똑같았다.
"올고르 고원도 있잖아. 일스 대평원도 있는데, 오빠?"
"......"
모니터를 째려보면서 아무리 흠을 잡으려 해도 라체부르그의 지형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크흠! 그러면 뭐, 알바스 지역에 가기 전에 한번쯤 들러 보도록 하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