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안타로사의 몬스터
"저기 뭐가 있다."
"뭐냐. 먹을 거냐."
"아니다."
"그럼 관심 없다."
안타로사의 몬스터들은 빛의 조각품에도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없애 버리자."
"캬캬캿."
도낏자루나 돌멩이를 던지는 놈까지 있었다.
위드는 데루거가 되어 잔해 더미에 올라가서 앉아 있는데, 외모는 물론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저놈의 눈빛 좀 봐."
찢어진 눈가 사이로 번들거리는 눈알.
"툭 튀어나온 주둥이는 마치 동족이라도 잡아먹은 듯하군."
같은 데루거들조차도 위드를 기피했다.
투지와 카리스마가 상위 몬스터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정도이기는 했지만 외모 자체에서도 차별화된 면이 컸다.
위드는 몬스터들의 태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다들 내 얼굴을 보며 부러워하는군. 성형외과 의사가 되었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돈도 잘 벌고, 나쁘지 않지."
자칫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파탄 낼 수 있는 위험한 꿈!
위드는 몬스터들이 하늘에 있는 조각품을 보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기를 꾸준히 기다렸다.
'어쩌면 실마리는 이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험에 대한 정보는 감춰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기야 너무나도 오래된 과거의 조각 생명체 용사를 추적하는 일이니 이 정도의 어려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위드는 산골에 있는 새끼 강아지도 알고 짖는다는 명성을 묵혀 두지 않고 이용할 계획이었다.
게시판과 동영상을 통해서 로열 로드의 거의 모든 유저들이 바하모르그에 대해서 보게 될 테고, 그들이 이를 제보해 주는 정보원이 되어 주리라.
대륙 전체에서 살아가는 NPC들도 위드의 작품을 통해서 이를 보게 되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번 퀘스트는 조각사로서 그리고 모험가로서, 남보다 높은 명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돌파구를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
마을에 있는 주민들이 떠들었다.
"조각사 위드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그가 안타로사에 조각품을 만들었다더구만."
"빛의 조각품이라는데, 아주 멋지다고 하더라고. 안타로사의 밤을 밝히는 멋진 조각품이 떠올라 있다고 해."
"그것을 보고 온 모험가가 있다면 이야기를 듣고 싶어. 술값 정도는 당연히 내줘야지."
안타로사의 모험가들은 다른 마을에 가서 위드의 조각품을 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주민들을 통하여 대륙 전체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
예술을 좋아하는 귀족들은 더욱 큰 관심을 가졌다.
"바바리안 용사의 조각품이라니! 조각사 위드의 작품이라면 꼭 소장하고 싶었는데 이곳에 가져올 수 없다니 아쉽게 되었군."
"요즘 위드의 조각품은 귀족들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필수품이 되었어요. 위드가 최근 1년 안에 만든 작품을 가져와 준다면 보상은 섭섭하지 않게 해 주겠어요."
안타로사에서 가까운 조각사 길드에서는 퀘스트도 발생했다.
"위드는 진정한 예술가이며 모험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왕의 신분으로도 대륙을 떠돌고 있다니 대단하지요. 빛을 다룬 조각품이라면 거의 없는데, 그 작품을 보고 온다면 더 가치 있는 조각물 의뢰를 맡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송수철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에휴, 오늘도 참 길었다.
그는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통닭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매일 닭을 튀기고 오븐에 굽다 보면 녹초가 되어서 자취집에 오곤 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으려나."
그는 컴퓨터를 켜고 게시판으로 들어갔다.
남들이 로열 로드가 재미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하지 않았던 사람.
뒤늦게 푹 빠져서 매일 접속하고 있었다. 캐릭터의 레벨은 156밖에 안 되었지만 관심은 누구보다도 많았다.
"내가 있는 지역에 특별한 퀘스트가 뜬 건 없고... 천년여우라는 사람이 희귀한 창을 입수했군."
로열 로드는 워낙 방대하다 보니 마을과 도시, 성마다 게시판이 별도로 있었다.
제목 : 위드의 조각품이 화제네요
제목 : 빛의 조각품의 위엄
제목 : 저는 역시 위드가 제일 좋네요
제목 : 위드한테 시집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위드가 또 뭔 짓을 저질렀군."
송수철은 신이 났다.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모험을 보면서 화끈하게 풀어 버릴 수 있다.
송수철도 위드를 좋아했는데, 그것은 단지 모험의 즐거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열 로드를 하는 유저들이라면 누구나 베르사 대륙에 애착을 갖게 된다.
명문 길드들이 대륙에 끼치는 해악, 강한 유저들이 곳곳에서 살인자로 돌변하는 모습에 분노하기도 한다.
위드는 지금까지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힘겨운 모험을 해 왔다.
베르사 대륙을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가는 그를 보고 있다 보면 마음속으로나마 조금의 응원이라도 해 주고 싶어진다.
"어라, 근데 여긴......"
안타로사!
그가 있는 브리튼 연합 왕국의 에드가 성에서 아주 먼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생긴 조각품을 본 적도 있는 것 같아."
송수철은 빛의 조각품을 보면서 자꾸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보는 게 아니라, 지나치면서 본 적이 분명히 있었다.
제목 : 안타로사에 떠오른 조각품
제목 : 위드의 표현력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제목 : 조각사의 솔직한 고백. 초급으로는 절대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어떤 게시 글을 봐도, 이 조각품의 원래 모습을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거참 신기하네. 다들 이거 정체가 뭔지 모르나?"
송수철은 콜라를 따라 마시면서 생각했다.
위드가 조각술 마스터 퀘스트를 하러 안타로사에 갔을 거란 이야기는 정말 많이 나오고 있었다.
평소에 게시판 활동을 활발하게 하기는 했지만, 그걸 공개적으로 적어 버리면 어쩌면 위드에게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나도 빨리 접속해서 사냥이나 해야지. 요즘 늑대들이 번식을 많이 해서 사냥 파티 구하기가 쉬워져서 다행이야."
송수철은 캡슐로 들어가서 접속하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 아는 것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왠지 허전했다.
"위드 님에게 팬레터라도 써야지."
경매 사이트에 적혀 있는 위드의 메일 주소는 이미 유명해진 상태.
수만 명이 매일 메일을 보낼 테니 읽지도 않으리라.
"그래도 내가 로열 로드에 빠지게 된 것도 다 위드 님 덕분이니까."
송수철은 정성껏 메일을 작성해서 전송했다.
제목 : 안녕하세요, 위드 님.
아마 읽어 보시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브리튼 연합 왁국의
에드가 성에서 살고 있는 초보 유저 제르라고 합니다.
직업은 워리어죠. 다른 사람들을 지켜 주고 싶고 여러 가지
무기를 골고루 쓸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안타로사의 하늘에 떠 있는 조각품
잘 보았습니다. 위드 님께서 언제 에드가 성 근처에 오신
적이 있으셨나 보네요.
바바리안 시체의 살아 있는 모습을 표현하신 게 맞죠?
제가 던전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곳의 몬스터에게 맞아서
금방 죽어 버렸죠.
무서워서 아이템 찾으러 다시 가지도 못했지만 위드 님의
조각품으로 다시 보니 새삼 반갑네요.
더 길게 쓰고 싶지만 저도 이제 로열 로드에 접속할 시간이
라서 이만 줄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수고해 주세요.
★★★★★★★★★★★★★★★★★★★★★
에드가 성!
브리튼 연합 왕국에 속해 있는 만큼 상인들과 여행자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이곳을 선택해서 시작한 초보자들은 온갖 물품들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을 누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아무래도 상인들이 많지만, 호송 의뢰나 몬스터 퇴치에 따른 보상금도 후해서 전투 계열 직업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유저들이 북부로 떠나고 말았다.
아르펜 왕국의 역동적인 모습들이 알려지면서 그곳을 선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붉은 늑대 파티 자리 구합니다. 워리어입니다. 레벨은 156으로, 갑옷은 내구력 53짜리 강철로 입고 있어요!"
제르는 광장에서 열심히 외쳤다.
보통 어느 정도 레벨에 이르면 자주 사냥하는 파티가 있기 마련이지만, 계속 같이 가기는 어려웠다.
제르의 경우에는 남들보다 열심히 사냥을 해서 레벨을 올렸기 때문이다.
"샤먼도 붉은 늑대 파티 자리 구합니다. 레벨 174인데요, 필수 스킬 다 익히고 있어요."
제르의 옆에는 슬리아라는 여성 샤먼 유저가 있었다.
최근 인기인 붉은 늑대의 파티 자리를 구하는 유저들은 찾아보기 쉬운 편이었다.
붉은 늑대의 레벨은 200이 넘지만 따로 1마리씩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고 가죽이 비싼 값에 팔리기 때문에, 사냥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몇몇 직업들끼리 즉석에서 파티를 조합하여 사냥을 떠나기도 하는 편이었다.
제르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기만 했다.
워리어는 파티의 능력이 부족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몬스터에 의해서 파티가 무너지게 되면, 최후까지 사냥터에 남아서 싸우다가 죽어야 하는 의무도 갖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워리어가 보통 파티의 리더가 되기도 했지만, 제르는 평소 아는 유저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예전에 같이 사냥을 했던 유저들은 레벨 업 속도가 느리거나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거나 했던 것이다.
아마 그들 중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이 북부로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보통 파티에는 워리어가 1명이나 2명이 속하게 되는데, 대다수 파티의 리더가 워리어이다 보니 제르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사실 기사가 갑옷을 잘 갖춰 입으면 방어력이 상당히 높아지게 되어서, 익숙한 사냥터에서는 워리어를 빼놓는 경우도 있었다.
에드가 성에서 레벨 200대 이하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스캇이라는 유저가 다가왔다.
"뭐, 긴말은 할 필요 없고, 저희랑 사냥 가실래요? 사제랑 마법사, 도둑. 다 준비되어 있어요."
"예, 가겠습니다."
잘 오지 않는 기회라 제르는 서둘러 승낙했다.
스캇의 사냥 파티는 효율이 좋기로 유명했고, 앞으로도 그를 따라다니면서 레벨을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쪽은 샤먼이라고 했죠?"
"네."
"같이 가시죠."
"고맙습니다."
그리고 붉은 늑대의 서식지인 론디스 산에서 사냥을 시작했다.
제르와 슬리아는 무진장 구박을 당했다.
"그것도 똑바로 못해요? 몬스터를 데려오라니까요. 아이참, 그렇게 느려서 뭘 하겠다고."
"아, 왜 벌써 아이템 집으려고 해요? 우리 파티에는 규칙이 있는데, 처음 사냥 온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가져요. 그것도 몰랐어요?"
"나중에 사냥 끝나면 장비 수리비 정도는 주니까 걱정 마요. 오늘 똑바로 못하면 다음부터는 파티에 끼워 주지 않을수도 있으니까 정신 차리시고요."
제르는 몬스터를 끌어오면서 방어까지 담당했다.
파티의 다른 유저들은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키면서 공격만 했다.
사제의 치료도 가끔 늦어질 때가 있어서 불안했지만, 말을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
슬리아도 샤먼으로서 공격과 축복, 치료까지 다 해야 해서 아주 바빴다.
그렇게 구박을 당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에드가 성으로 돌아가서 다시 파티를 구해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스캇이 아는 사람이 많아서 안 좋은 소문이 나게 되면 그의 레벨대에서는 파티를 구하기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에드가 성에서부터 제르를 찾아다니다가 이곳까지 따라온 사람이 있었다.
때 묻은 초보자용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
그는 나무를 등지고 앉아 조각품을 깎으면서 사냥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가끔씩 중얼거리는 말.
"건강보험료가 올해도 적자라는군. 그렇게나 많이 거둬 가면서 얼마나 뒤로 빼먹었으면...."
한숨도 가끔씩 쉬었다.
"물가는 계속 오르기만 하다니... 경제가 좋다는데 왜 살기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거야. 이렇게 되면 돈벼락을 맞아도 평생 놀고먹기는 힘들겠어."
그러면서 행복한 단꿈을 꾸기도 했다.
"열심히 저축해서 나중에는 만날 늦잠이나 자고 빈둥거리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조각품을 깎으면서 제르가 파티에서 구박당하면서 사냥하는 것을 한참 쳐다보았다.
제르는 3시간 정도를 꼬박 혹사당하다가 슬리아와 함께 버려졌다.
"베르메르 산 쪽에 검사 퀘스트가 떴다고?"
"응. 거기서 지금 난리래. 바위 베기 스킬은 퀘스트가 떴을 때만 익힐 수 있잖아."
"우리도 그쪽으로 가자. 제르 님이랑 슬리아 님은 아직 우리 정규 파티원이 아니니까 같이 갈 수 없겠네요. 그럼 다음에 봐요."
제르와 슬리아는 허탈하게 둘만 남게 되었다.
"성으로 다시 돌아갈까요?"
"그럼련 시간이 너무 걸리는데. 이 주변에서 파티를 알아 보는 편이 나을 거 같아요."
론디스 산의 다른 사냥 파티에 끼는 것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워리어는 위험한 던전이 아닌 이상 2~3명까지는 필요하지 않고, 샤먼은 더욱 여러 명이 필요하지 않은 직업이다.
그들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조각품을 깎고 있던 사람이 일어나서 다가왔다.
"워리어 제르 님 맞습니까?"
"네에, 맞는데요."
제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쳐다봤다.
'어라. 어디선가 많이 봤는데.'
상대는 너무도 흔한 초보자용 옷을 입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체형이나 목소리가 너무 익숙했다. 분명 자신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이었다.
'같이 사냥을 한 적이 있나? 예전에 나한테 검을 싸게 넘겨주었던 그분?'
기억력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만나 본 경험을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불청객이 말했다.
"잠시 시간이 되면 저랑 사냥하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뭐, 파티도 없는 처지라서, 저야 좋습니다."
제르는 그 말에 선뜻 나서기로 했다. 아직 잘 기억은 나지 않았어도 어딘가 좋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아, 그런데 슬리아 님이....."
"전 괜찮아요.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돼요."
불청객은 슬리아를 보면서 잠시 상념에 빠진 얼굴이었다.
'딱 저런 장비였지.'
첫사랑이었던 샤먼 다인이 입던 장비보다 등급은 떨어지지만 같은 종류였다.
"같이 가셔도 됩니다."
"정말요? 고맙습니다! 열심히 마법 쓸게요."
그녀는 샤먼을 육체적인 전투보다는 마법 위주로 성장시킨 경우였다.
제르와 슬리아는 이제 이 불청객이 자신의 파티로 안내를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제르가 물었다.
"다른 동료분들이 계신 장소는 여기에서 멀리 있나요?"
"파티는 우리뿐입니다."
"에? 그러면 다른 직업을 더 모집해야 될 것 같은데요."
제르는 파티에 속하게 되었으니 이 근처에서 놀고 있는 직업을 구해 볼 기색이었다.
워리어와 샤먼이 있으니 다른 직업 몇 명만 더 있으면 조심해서 어쨌든 사냥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우리끼리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넘치는 자신감!
슬리아가 밝게 웃으면서 물었다.
"붉은 늑대를 사냥해 본 경험이 많으신가 봐요?"
"해 본 적 없는데요. 비슷한 놈들을 사냥한 적은 있지만."
"에, 생각보다 이놈들 엄청 강한데요. 우리끼리는 조금 무리가...."
슬리아가 막 말리려고 할 때, 불청객의 뒤쪽으로 붉은 늑대가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왔다.
"조심하세요!"
붉은 늑대는 갑자기 뛰어올라서 덮치는 습성을 가졌기에 이 정도라면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
불청객이 뒤를 돌아보더니 인상을 썼다.
"쓰읍!"
깨갱! 깽깽!
꼬리를 말고 죽을힘을 다해 내빼는 붉은 늑대!
제르와 슬리아는 황당함에 빠지고 말았다.
레벨이 200을 넘으면 갑옷만 잘 갖춰 입어도 붉은 늑대를 사냥하는 것이 어려운 것 아니다.
그런데 투지만으로, 사나워서 무리에서도 쫓겨난 붉은 늑대를 눌러 버리다니!
"사냥할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그럼 어디로 가는데요?"
"던전 사냥을 가야죠."
던전 사냥!
워리어라면 당연히 꼭 해 보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어지간히 친하거나 손발을 자주 맞춰 본 사이가 아니라면 던전 사냥에는 잘 끼워 주지 않았다.
"우리끼리요? 거기가 어딘데요?"
"그곳의 위치는 제르 님이 알고 계실 겁니다."
"저요?"
제르는 당연히 무슨 수수께끼라도 들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놀리시는 겁니까?"
하지만 불청객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니 입을 쩌억 벌렸다.
"설마... 혹시....."
"알아채셨군요. 맞습니다."
"이거 꿈인가요?"
"......"
★★★★★★★★★★★★★★★★★★★★★
드라푸킨 던전!
몬스터의 평균 레벨이 자그마치 430대를 넘나드는 위험한 곳이었다.
브리튼 연합 왕국의 정말 유명한 사냥 파티들도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던 곳.
몇 번 이 던전에 사냥 파티가 오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간 적은 없다.
위험한 정도가 보통 이상이기도 하였지만, 사냥의 효율만을 놓고 본다면 레벨을 올리기 더 편한 곳들도 많기 때문이다.
"여기입니다."
제르는 위드와 슬리아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예전에 클라우드 길드에서 이곳에서 사냥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앗, 저도 기억나요. 4개월 전쯤에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사냥을 했죠?"
"쭉 내려가며 사냥을 하다가 지하 3층에서 철수를 했죠. 저는 구경한다고 따라가다 중간에 함정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 바바리안 조각품의 시체를 봤습니다."
위드는 검과 갑옷의 장비를 최고의 것들로 바꾸었다.
검 갈기와 방어구 닦기 스킬은 기본.
"그럼 갑시다."
"정말 이곳에서 사냥하려고요?"
슬리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물론이죠. 콜 데스 나이트 반 호크, 콜 뱀파이어 로드 토리도!"
데스 나이트와 뱀파이어 로드도 불러들여서 사냥 준비 완료.
"축복 마법이 있으면 저한테만 걸어 주세요."
"일단 써 드리기는 할게요.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산들바람이 불어오네요. 가벼운 마음으로 적을 상대하세요. 당신의 발걸음까지 가벼워질 테니까요. 스피릿 오브 울프."
샤먼은 이동속도와 공격력, 방어력, 투지를 올려 주는 다양한 축복 마법을 쓸 줄 알았다.
사제에 비해서는 약하더라도 종류가 다양해 상당히 유용한 편.
도시에서도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샤먼에게 돈을 주고 이동속도를 늘려 주는 마법을 받았다.
위드의 경우에는 지상에서는 누렁이, 하늘에서는 와삼이를 타면 되었으니 별로 필요는 없었지만.
이곳의 1층에서는 드라킨이라는 암흑 계열의 몬스터가 나왔다.
시커먼 도마뱀처럼 생겼지만 훨씬 크고, 흑마법도 사용할 줄 알았다.
제르와 슬리아는 흥미진진하게 전투를 구경하기로 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렇게 죽더라도 친구들에게 자랑거리는 될 것 같아요."
위드는 반 호크에게 명령했다.
"먼저 가서 싸워 봐."
"알겠다."
어려운 건 항상 부하 먼저!
드라킨의 흑마법도 데스 나이트의 저항력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반 호크의 레벨이 드라킨보다도 더 높았기에 무난히 두들겨 팰 수 있었다.
하지만 피부의 방어력이 높아서 잘 죽지는 않았다. 두들겨 맞을 때마다 옆으로 찔끔 밀려나서 물어뜯으려고 하거나 흑마법을 사용했다.
"별문제는 없겠군. 가자, 토리도."
위드도 토리도와 같이 실컷 공격해서 사냥에 성공했다.
대부분의 알려진 몬스터에 대한 지식들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글을 읽거나 동영상을 미리 봤더라도, 직접 상대해 보면 또 조금 다른 법이다.
실제 사냥에 있어서는 미세한 행동 습관에 따라서도 가지고 있는 스킬들을 잘 이용해 생각보다 손쉽게 잡을 수도 있는 것.
"방어력이 상당히 강하기는 하군. 일점 공격술!"
그다음에 나오는 드라킨들에게는 일점 공격술을 사용하면서 사냥 시간을 줄였다.
헤라임 검술을 일점 공격술로 연달아 성공시키는 파괴력.
처음 사냥에는 4분 정도가 걸렸지만, 그다음에는 45초 정도 단축시켰다.
"지금은 괜찮지만 몇 놈 더 불러와야 편하긴 하겠군. 조각 소환술!"
황금새와 은새, 누렁이, 금인이, 켈베로스, 하이 엘프 엘틴, 여자 바바리안 전사 게르니카까지 불러들였다.
위드는 조각 생명체들이 있다면 언제든 파티 구성을 마칠 수가 있었다.
단지 아쉬운 부분이라면 신성력을 사용할 줄 아는 조각 생명체가 없다는 점.
위드의 공적치라면 어느 교단을 가더라도 사제를 불어올 수 있었기에 사실 그렇게 모자란 부분도 아니다.
조각 생명체가 사제라면 챙기느라 더 여러모로 신경을 써야 하는데, 공적치로 불러온 사제는 상황에 따라 미끼로 내던질 수도 있으니까!
"가자."
위드는 조각 생명체들과 같이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드라킨이 1~2마리씩 나올 때마다 집중 공격으로 금세 사냥!
반 호크, 토리도만 하더라도 강력한 전력인데 조각 생명체들까지 왔다면 끝난 상황이었다.
"이곳에 게이하르 폰 아르펜 황제의 용사였던 바하모르그가 잠들어 있다. 우린 그곳으로 가야 한다. 쉴 시간이 없다."
"째잭잭!"
황금새가 조인족으로 변하여 평소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사냥을 하였다. 그 덕에 1층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마무리를 지었다.
슬리아는 치료라도 해 주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할 일이 없었다.
레벨이 낮은 샤먼으로서 치료 능력이 부족하진 않을지 굉장이 초조했는데 그저 구경만 하며 따라가도 되는 상황.
위드의 붕대 감기 스킬은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었고, 약초학과 재봉 스킬을 활용하여 최고급 붕대를 만들어서 썼기 때문이다.
"도대체 갑옷의 방어력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무래도 이상해서 제르가 물어 왔다.
드라킨이 돌진해서 위드를 물었는데도 그리 많이 다친 것 같지가 않았다. 여신의 기사 갑옷의 놀라운 위력이었다.
"이 갑옷, 생각보다 좋은 겁니다. 그리고 제 인내력이 900대를 넘었고, 맷집은 곧 500이 됩니다."
"커헉."
위드는 사냥터에서 조각품을 깎으면서 인내력을 키웠다.
게다가 항상 맞을 만큼 맞아 주면서 사냥을 했는데, 그것이 쌓이다 보니 무서운 수준이었다.
몬스터가 조금 덜 때렸을 때는 일부러 더 맞아 주고 사냥을 하는 잔인함!
지하 2층에서는 한층 더 무서운 마법을 발휘하는 전투 드라킨이 여러 마리씩 나왔다.
"황금새, 은새가 적들을 교란해. 엘틴은 뒤에서 화살로 지원."
위드와 조각 생명체들은 익숙하게 사냥을 했다.
제르와 슬리아는 그저 지켜보는 정도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던전 사냥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수준이 높은 곳이라서 그들이 나선다는 자체가 폐가 될 수 있다.
당장 얻는 것은 없더라도, 위드의 전투를 옆에서 따라가며 보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물론 드라킨이 죽을 때마다 침을 꼴깍 삼켰다.
이곳에서 나오는 전리품을 조금 넘겨주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진정한 대박!
물론 위드에게 그럴 낌새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전투 도중에 다른 드라킨이 난입하여 판이 복잡하게 벌어져도, 잡템 하나까지도 찾아 가면서 줍는 꼼꼼함.
제르와 슬리아는 들러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 참! 파티 초대를 안 했죠. 제가 혼자만 사냥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리고 보통은 다른 동료들에게 초대받는 일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띠링!
-아르펜 왕국의 국왕 위드 님께서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둘은 파티 가입을 받아들였다.
"저희는 파티에 있더라도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요."
레벨 차이가 많이 나면 경험치를 거의 받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그리고 다시 사냥이 계속 이루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드라킨의 막대한 경험치!
역시나 낮은 레벨 때문에 제르와 슬리아는 붉은 늑대를 파티 사냥한 것을 조금 웃도는 정도밖에는 경험치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위드와 조각 생명체들이 사냥하는 속도가 너무 엄청나서, 레벨이 올라가는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마치 레벨이 50대였을 때만큼 경험치가 쑥쑥 쌓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