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윤의 웃음
위드는 3개의 레벨을 더 올릴 때까지 사냥만 했다.
던전에 있다 보면 중앙 대륙의 전쟁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
어버린 채로 사냥에 집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미료, 숫돌
같은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아르펜 왕국의 영토 확장으로
얻게 된 유셀린 마을에 가끔 가야 되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클라우드 길드도 보통이 아니야. 그런 대군을 어쩜 그리
빠르게 조직했는지 모르겠어."
광장에서 유저들과 주민들은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위드는 아르펜 왕국의 국왕으로서 전쟁과 무관한 관계가
아니었다.
"안 돼. 신경 쓰지 말아야해. 이러다가 두통약을 먹어야
할지도 몰라."
자칫 만성 변비까지 걸리게 될지도 모를 노릇!
현대에 살다 보면 만날 혼란의 연속인 정치판, 도무지 일
자리가 안 생기는 경제, 범죄와 부패가 판을 치는 사회를 보
게 된다. 차가운 도시 남자 이전에 스트레스에 찌들어서 술
과 커피, 두통약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위드는 조금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거만 생각해야지. 그리고 텔레비전
을 보며 욕을 하고 싹 잊어버려야 돼. 세상은 어차피 도둑놈
들로 가득하니까."
중앙 대륙의 전쟁은 머지않아 정말 큰 위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벤 왕국이든 브리튼 연합 왕국이든, 그들 중
승자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게 된다.
북부의 경제가 발전하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정말 달
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렇지만 애만 태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위드는 사냥에 충실하면서 조각품을 깎았다.
던전 사냥에 충실하면서 조각품을 깎았다.
던전 사냥을 계속하다 보니 슬슬 지겨워졌는지, 페일 일행
은 모라타에 가서 놀고 있었다.
"고작 하루에 18시간씩밖에 사냥을 하지 않았는데...
쯧쯧!"
현실 기준으로 24시간 중에서 18시간씩 사냥.
로열 로드에서의 시간은 그 4배였다.
며칠 정도는 기꺼이 같이할 수 있었지만, 이 주일이 넘어
가면서부터는 몬스터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현상까지 벌
어졌던 것이다.
적당히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빠른 이동과 쾌속 사냥
이 이루어지다 보니, 결국에는 동료들마저 모라타로 피난을
갔다.
바하모르그와 서윤이 있어서 그나마 원하는 대로 사냥을
할 수 있었다.
사냥을 다녀오면 사제들은 지쳐서 쓰러지기 때문에 도시
로 가서 항상 다른 이로 교체를 했다.
위드가 틈틈이 만드는 조각품은 환상적이라고 해도 될 만
큼 성공적이었다.
많은 조각품을 깎다 보면 나중에는 무엇을 깎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얻는 것은 필수였다.
대륙의 금역을 다니면서 절박한 마음에 악착같이 작품들
을 만든 적도 있었다.
"이것저것 많이도 만들었지. 그리고 지금 조각해야 할 것
은..."
가까운 곳에 최상의 모델이 있었다.
태양과 해, 바람, 구름. 장엄한 자연을 바탕으로 조각하기
도 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위드가 조각품을 깎고 있으면 서윤은 곱게 자리에 앉아서
구경을 했다.
위드는 무심코 말했다.
"저기, 조각품 좀 깎아도 돼?"
"네?"
"너를 대상으로 말이야."
"..."
서윤이 당연히 거절하리라고 여겼다.
다른 사람에게는 가면을 쓰고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는 그
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억지로 말을 걸거나 달라붙는 사람
은 가차 없이 죽이는 버릇까지!
그런데 예상외로, 서윤은 창피하지만 허락하겠다는 뜻으
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예쁘게 깎아 줄게."
위드는 그녀를 모델로 해서 조각품을 깎으면 되었다.
정면에서 얼굴을 쳐다보면서 조각품을 깎으려니 괜히 마
음이 떨렸다.
서윤의 얼굴은 같이 다니면서 날마다 보면서도 그때마다
정말 예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자세히 보면 더욱 빛이
나는 외모였다.
그 모습을 조각하고 있으니 저절로 조각품에 진지해지게
되었다.
위드가 정성껏 조각을 하는 광경을 보면서 서윤은 부끄러
워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검을 들고 있어 볼래?"
"이렇게요?"
자세도 바꾸어 가면서 다양하게 그녀의 조각품을 만들
었다.
"다른 옷 없어? 갑옷이 아니라 평상복도 입어 보면 좋을
것 같아."
던전에서 그녀를 조각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생명력과 마나, 체력이 다 찬 것도 모르고 조각품에 빠져
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조각품을 깎다 보면 미녀의 조각상이 간단히 나
온다.
신이 내린 여성의 아름다움.
프레야 여신이 질투할 정도의 미모.
황금 비율의 조각상.
걸작에 명작들이 나왔다.
그동안 서윤의 조각상을 많이 만들어 봤지만 미칠 듯한 미
모에는 유통기한이 없었다. 평생을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
은 얼굴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음... 그래도 조각상마다 표정에 변화가 없어서 단조로운
느낌인데."
위드는 서윤의 조각품을 깎으면서 조금 아쉬웠다.
사람은 표정이나 몸짓에 따라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진다.
보다 여러 가지의 다른 모습들도 조각하고 싶었던 것이다.
조각사로서, 어쩌면 한 남자로서의 욕심!
"이 포도주를 조금 마시면서 감미로운 것 같은 표정을 지
어 봐."
서윤은 포도주를 마시고 어색해했다.
얼굴 표정을 일부러 지으려고 하니 잘되지 않는 편이었다.
위드는 원하는 모습을 얻으려면 좀 더 능숙하게 전달을 해
야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감미로운 건 조금 어려울 것 같고, 편안한 표정부터 시작
하자. 그러니까... 사냥을 마치고 푹 쉬고 있어. 그럴 때의
표정을 지어 봐."
"...?"
서윤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사냥을 끝내고 나면 지쳐서 휴식을 취할 뿐이었다.
"광장의 분수대 옆에서 쉬고 있는 거야."
"..."
"아니, 그냥 와삼이 등에 누웠어."
"아!"
그때야 정확히 나오는 서윤의 한결 편안해하는 얼굴!
와삼이를 타고 구름층을 뚫고 올라가서 바람과 햇볓을 맞
는 순간처럼 편안한 적이 없다.
위드는 그녀의 표정을 조각품으로 남겼다.
"이번에는 은새랑 황금새랑 장난을 치고 있는 거야."
"어떤 장난요?"
"은새의 깃털을 뽑으면서..."
"그건 괴롭히는 거잖아요?"
말로 설명이 완벽하게 되지 않을 때는 은새와 황금새를 소
환해서 놔두었다.
조금의 시간만 주어도 2마리의 새들은 툭탁거리며 싸우다
가도 친밀하게 부리와 날개를 서로 비비면서 놀았다.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음, 더 예뻐졌군.'
위드는 그 장면도 조각품으로 남겼다.
서윤은 무표정하게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 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가 버린다. 정확하고 세밀한 관찰력이 있어야 조각
할 수 있었다.
둘만 있으면서 조각품을 만들고, 완성되면 서윤에게 보여
주었다.
"어때, 괜찮지?"
"..."
서윤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조각품을 깎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위드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기분도 좋아졌다.
"이거 널 표현한 거지만... 내가 가져도 될까?"
서윤에게 위드의 말은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대사보다도
더욱 달콤하게 들렸다.
"그래...요."
부끄러우면서도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있었나 싶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위드가 조금 둔했지만 이제는 자신
의 마음을 알아준 것 같았다.
위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됐군.'
모라타에서 서윤의 얼음 미녀상이 발굴되었다.
예전만 하더라도 서윤을 무척이나 무서워해서 빙룡에게만
생명을 부여하고, 아깝지만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그 얼음 미녀상이 발굴되고 나서 모라타의 유저들은 굉장
한 충격을 받았다.
"으아... 보고 있으니까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예
쁘다."
"이런 얼굴이 진짜 존재할 수는 없잖아.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니, 위드의 조각술 실력은 정말 하늘에 닿았네."
"크흐흑, 29년간 여자 친구를 못 사귀어 본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구나."
"모라타를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습니다,
여러분!"
유저들은 얼음 미녀상을 지극히 아꼈다.
풀죽신교에서 모라타의 보물 조각품 1호로 지정할 정도.
위드가 모험을 하고 전투를 하는 것도 물론 좋아하지만,
일부 유저들은 조각품에 더 기대를 했다.
-얼음 미녀상과 관련된 조각품을 더 보고 싶습니다.
-조각술이 제 마음을 완전히 홀려 버렸네요. 어제는 얼음 미녀
상의 꿈도 꿨어요.
-저는 말을 타고 다른 지역으로 모험을 갔거든요.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돌아왔어요. 얼음 미녀상을 보고 싶어서요.
유저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환상적인 옵션이나 예술성을 가진 다른 대작들을 물리치
고 대중적인 인기에서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위드가 서윤이 행복해하는 조각품들을 예술 회관
에 전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매일 사람들로 붐비게 되겠지. 그러면 입장료가...'
관람객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면 집도 팔고 논도 팔고 자동
차도 팔고 회사에 사표를 쓴 다음에 퇴직금까지 바치고 패가
망신할 수준!
위드는 과거 서윤의 차가운 표정에 아쉬움을 느끼며 조각
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빛은 간혹 아침 햇
살처럼 따뜻해 보일 때도 있었다.
서윤의 경직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얼굴 표정은 당연히 위
드이기에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다른 조각사가 실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불가능한, 위드
만이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조각품.
'예술 회관 전시 부분은 잘 생각해 봐야 되겠군. 아무래도
좋은 생각은 아니야.'
위드는 짧은 생각을 바탕으로 서윤의 조각품을 진열하여
함부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
겠지.'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조금 미루어 둘 뿐.
위드와 서윤이 사냥을 하는 순간에는 바하모르그와 반 호
크, 토리도가 거의 같이 다녔다.
거의 가족처럼 다니면서 던전을 쓸어버리는 무리!
"나처럼 고귀한 혈통을 가진 밤의 귀족이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바바리안과 어울려야 하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군."
반 호크야 충성스러운 어둠의 기사였지만, 토리도는 다소
말을 안 듣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가 날 잡아서 바하모르
그에게 제대로 두들겨 맞고 얌전해진 토리도였다.
바하모르그는 전투를 정말 좋아했다. 성격 자체가 강해지
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될 정도다.
위드가 새로 생명을 부여하면서 과거보다는 다소 약해졌
기 때문에 더욱 전투에 열을 올렸다.
서윤과 위드가 바하모르그를 따라가면서 전투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 위드를 경계하며 완전히 믿지 않았다.
"내가 모셔야 할 유일한 황제가 있다면 그는 게이하르 폰
아르펜이다."
바하모르그는 워리어로서 자신보다 약한 위드에게 충성심
을 보이지 않았다.
되살아나게 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같이 다닌다는 것이
맞을 정도.
싸우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약하면 천천히 와라"
위드와 서윤도 기다리지 않고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혼자
서 잡으러 갈 정도로 타고난 전사였다.
그러나 위드가 서윤의 조각품을 깎으면서부터는 바하모르
그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옆에서 구경을 했다.
게이하르 폰 아르펜.
조각사로서 황제가 된 사람의 모습을 위드를 보며 떠올리
는 것이리라.
* * * * * * * * * * * *
위드는 다시 4개의 레벨을 올리도록 사냥과 퀘스트, 조각
품의 완성을 반복했다.
그야말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사냥에의 완벽한 집중!
아르펜 왕국의 영토에서 주민들의 의뢰를 받으면서 새로
운 던전과 마굴을 발굴하고 다닌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퀘스트와 사냥을 하니 주민들이 떠들었다.
"아르펜 왕국의 미래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국왕 폐하가 우리를 몬스터로부터 지켜 주니 말이야."
"홀덴 던전을 최초로 깨끗하게 정리한 전사들이 나타났다
는군. 놀라지 말게. 그들 중에는 우리의 국왕 폐하가 있어!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마을 입구에서 오래전에 잃어버린 물건을 찾던 노인을
본 적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나서 주었지만 모두 실패했
지. 그 노인이 그 물건을 드디어 찾았다고 해. 국왕 폐하이
신 위드 님께서 해내셨다는군!"
위드의 사냥과 퀘스트가 주민들로 하여금 소문을 일으키
는 것이었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던전들은 상당히 많은 보물을 간
직하고 있었다. 최초 탐험가만이 누릴 수 있는 혜텍으로, 과
거 니플하임 제국 시절의 그 부유하던 재물들을 몬스터들이
약탈한 것을 다시 빼앗는 것이다.
위드의 조각술 숙련도도 고급 9레벨이라서 느리지만 착실
히 쌓여 가고 있었다.
서윤과 있을 때는 그녀의 조각품을 깎다가 페일 일행과 있
으면 화령, 벨로트, 이리엔, 로뮤나를 대상으로 삼았다.
"여자들의 질투란 끝도 없지. 여자들의 조각품을 만들 때
에는 작고 사소한 부분도 예쁘고 매력적이라고 무조건 칭찬
을 해 줘야 돼."
살면서 자연히 깨닫게 되는 인생철학.
바하모르그가 있으니 전투에서의 돌파력이 보통이 아니었
다. 독을 뿌리거나 이동력을 깎는 등의 번거로운 기술을 가
진 보스급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바하모르그에게 싸우라고
지시하고 측면이나 뒤를 공격한다면 쉬워졌다.
바바리안 워리어 바하모르그!
그는 특별한 존재감을 몬스터의 시선을 잡아끄는 재주
가 있었다. 몬스터들은 그를 보면 무언가 위협을 느껴서 무
작정 공격을 하는 것이다.
"맷집이나 인내력이 잘 오르지 않는 건 문제로군."
레벨이 잘 올라도 문제.
모든 스킬과 스탯이 골고루 자라야 나중에도 벽에 부딪치
지 않고 계속 강해질 수 있다.
"바하모르그, 이곳에서는 내가 앞으로 나서겠다. 나를 공
격하는 녀석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도록 해."
"원하는 대로 해라."
위드는 몬스터의 공격을 몸으로 받았다.
"역시 맞아야 사냥하는 맛이 나지."
그동안 조금 미진했던 부분까지 채워지는 기분!
위드는 모스터와 싸우면서 공격보다는 수비에 대한 계산
을 많이 했다.
전에는 주로 사제 없이 다녔으며 전투 중에 다른 몬스터가
난입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곳이 아니면 생명력을 바
닥까지 낮추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제는 배 째라는 식으
로 실컷 맞으면서 더욱 치열하게 공격했다.
바하모르그는 자신의 전투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
했지만 위드가 위험하면 고함을 지르면서 몬스터들을 유인
해 갔다.
이리엔이나 사제도 데리고 다니고 있었기에 유사시에는
치료를 받을 수가 있다.
그리고 슬로어의 결혼반지!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배우자로부터 생명력을 가져올 수
있는 기능.
물론 정말 강한 몬스터에게 결혼반지만 믿고 덤빌 수는 없
지만, 조금 더 위험하게 사냥을 하는 데에는 든든한 밑천이
었다.
위드는 광전사의 스킬까지 쓰면서 활약할 수 있었다.
과거의 전투보다도 더 맹렬하게 싸우며 바하모르그와 비
슷하게 거칠어졌다.
위드는 원래 이런 전투를 좋아했다.
강렬하게 몬스터와 죽기 살기로 싸우자는 식!
스탯과, 현재 습득하고 있는 다양한 스킬의 숙련도를 차곡
차곡 높이는 것이다.
"국왕이 좋긴 좋아."
퀘스트의 보상도 크고, 친밀도가 없더라도 의뢰를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는 게 장점.
그간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 지골라스, 불사의 군단이 지배
하던 바르고 성채 등을 많이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아르펜
왕국의 영역 내에서 모험을 하면서, 초보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평원에서 잔뜩 긴장한 채 걸어오는 초보자들의 파티.
위드는 그들에게 경고를 해 주었다.
"앞쪽으로 가면 굶주린 하이에나 떼가 있습니다. 32마리
정도 되더군요."
정확한 숫자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은, 위드의 분류 기준은
짐승이 아니라 가죽이었기 때문!
하이에나의 가죽은 싼값에 팔리고, 정말 빨리 잡지 않으면
대다수는 도망쳐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입맛만 다시면서 지
나쳤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저희로는 조금 버겁겠지요?"
"레벨이 65를 넘으면 가셔도 되는데... 대략 60대 초반 정
도로 보이는군요."
"헉, 그렇게 정확히..."
"장비하고 있는 아이템을 보고 알았습니다. 한 분이 사슬
갑옷을 입고 있고, 다른 한 분은 가죽 갑옷이군요. 그 가죽
갑옷에는 몬스터의 이빨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높여 주는 옵
션이 있죠?"
5명으로 이루어진 파티는 깜짝 놀랐다. 상대방이 너무나
도 훤히 그들의 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심해서 간다면 사냥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화살을
잘 겨누시고, 뭉쳐서 덤벼드는 건 주의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 주셔서요."
"뭘요. 다 서로 돕고 도우면서 사는 것이지요."
위드는 넉넉한 여유까지 생겼다.
저들이 다 세금 줄이기 때문에 가능한 살아남는 편이 좋다.
그렇게 사냥을 하면서 조각품을 만들다 보니 조각술 숙련
도는 61.5%가 되었다.
손재주 역시 고급 9레벨에 63.7%의 경지. 요리는 중급 9
레벨 99%, 대장장이도 고급 1레벨에, 재봉도 중급 7레벨.
가히 노가다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생산 스킬들에, 전
투 스킬까지 마구 올리고 있다.
"조각술의 비기를 정해야 되는데..."
위드는 사냥을 하면서도 여전히 결정하지는 못하고 있
었다.
욕심이 많다 보니 벌어지는 일.
서윤의 조각품을 깎으면서 조각술이 늘어나고 있기에 빨
리 선택을 해야 되었다. 그러면 사냥도 원활해지고, 어쩌면
조각술을 마스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고민하던 중, 위드는 불현듯 서윤이 그가 원할 때는 같이
다니며 부탁을 거절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반지로 생명력을 분배받은 적도 몇번 있는데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지.'
광전사인 그녀는 위드보다 더 많은 몬스터를 잡을 수 있었
다. 그렇지만 바하모르그처럼 먼저 앞서 가지 않았다.
위드의 곁에 있으면서, 조각품을 깎는 그 길고 긴 시간 동
안 지켜봐 주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서윤을 떠올리면 눈을 빛내면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모습이 떠올랐다.
위드는 혹시나 싶어서 그녀에게 물어봤다.
"만약인데 말이야."
"...?"
"내가 대출 보증 서 달라고 하면 서 줄 거야?"
"..."
이보다 더 확실히 마음을 알아볼 수 있는 질문은 없으리
라. 요즘 세상에 친구는 물론이고 형제끼리도 보증을 서 달
라고 하면 싸움이 나는 건 예사였으니까.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지.'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증을 설 수 있다고?"
"그래요. 제가 할 수만 있다면요."
"음... 그러면 이것도 만약인데 말이야, 내가 사냥을 하다
가 위험에 빠졌어. 대신 죽어 줄 수도 있어?"
서윤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식이었다.
'하기야 지골라스에서 쿠비챠와 싸우다가 죽어 주기도
했지.'
위드는 그보다도 큰 희생이 필요한 것을 머릿속에서 찾아
냈다.
"내가 다단계에 빠지면?"
"물건 사 줄게요."
"도박할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계좌 이체해 줄게요."
현대사회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지고한 애정!
위드는 더욱 심각한 상황을 떠올렸다.
'이것만큼은 절대 받아들이기 어려울걸.'
그녀의 입에서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대가 되었다.
"내가 많이 아파. 그래서 간을 이식해야 되는데... 그것도
해 줄 수 있겠어?"
"..."
간 이식은 작은 수술이 아니었다.
이식을 해 주고 나서 회복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멀
쩡한 배를 갈라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있어요."
"골수이식은?"
"해 줄게요."
위드는 이제야 서윤이 한 말들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하긴 나도 집에 금누렁이 있지. 금빙룡도 있고, 금와삼
이도 있거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