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기사들의 집결
"오오, 우리 프레야 교단의 은인이며, 나의 형제여!"
"대신관님을 뵙습니다."
위드는 아르펜 왕국의 국왕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거만을 떨지 않고 기사처럼 검을 올려서 예의를 취했다. 부탁할 것이 없었다면 잘 지냈냐고 턱 끝으로만 인사를 끝냈겠지만, 지금은 자기 자신을 낮춰야 할 때였다.
"프레야 교단은 도처에서 창궐하는 엠비뉴 교단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네. 그대가 구해 준 헤레인의 잔과 파고의 왕관 덕분에 우리는 엠비뉴 교단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수가 있었지."
대륙의 정의를 수호하는 모든 교단이 엠비뉴 교단과 싸우고 있다. 왕국의 존립이 위태롭거나 주민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 짓밟히려고 할 때에 성기사단이 나타나서 구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성물을 되찾은 프레야 교단과 루의 교단은 엠비뉴 교단과의 전쟁에서 어마어마한 활약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위드는 겸손함 외에 때로는 공을 내세우며 잘난 척도 할줄 알았다.
"맞습니다. 그게 다 제 덕이지요. 그렇지만 대신관님께서 제게 올바른 길을 안내해 주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프레야 교단의 모든 신도들은 그대의 모험에 찬사를 보내며, 악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음을 믿고 있다네. 북부에 사는 주민들에게 큰 빛이 되어 준다는 이야기가 이곳까지 들리고 있어."
"저 역시 아르펜 왕국에서 프레야 여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는 점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북부 대성당의 건축이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지."
"저 역시 프레야 교단을 위한 일이라서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위드는 건축비가 늘어 갈 때마다 아까워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아부를 했다.
"오늘은 차나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나 하지. 모험을 많이 했다는데, 듣고 싶군."
친밀도와 명성이 높아서 대신관과 편안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프레야 교단에서 입수한 정보들을 들을 수도 있었으며, 이곳에 있는 음식들을 공짜로도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위드는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제가 중요한 일을 해야 해서 프레야 교단에 긴급한 도움을 청합니다."
"어떤 일인가?"
"믿음이 강한 성기사와 신의 축복을 실현할 수 있는 사제들을 보내 주시길 원합니다. 그들과 같이 싸운다면 어떤 역경이라도 이겨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위드의 부탁에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야 교단에서는 형제나 다름없는 그대를 위하여 기꺼이 검을 뽑고 기도를 할 것이네. 지금 많은 이들이 엠비뉴 교단과 싸우고 있어서 빼낼 수 있는 병력이 많지는 않은데, 몇명이나 필요로 하는가?"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전부를 바랍니다."
위드는 아예 프레야 교단의 기둥뿌리를 뽑으려고 직접 찾아왔던 것이다.
"그대가 쌓은 공로라면 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말했듯이 지금은 엠비뉴 교단과의 싸움 때문에...이곳과 북부 대성당의 인원을 합쳐서 성기사 240명과 사제들 120명 정도는 파견이 가능할 것이네."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목숨을 잃는다면 프레야 여신의 진노를 살 수도 있을 거야."
"명심하고 있습니다. 제 몸처럼 아끼겠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프레야 교단에서 많은 것을 뜯어내지 못했다. 엠비뉴 교단과의 전쟁은 위드에게도 이런 식으로 피해를 주었다. 그럼에도 성기사들의 레벨은 보통 300대 중반에 이른다.
과거 진혈의 뱀파이어족에게서 구할 때만 하더라도 그보다는 훨씬 낮았지만, 전투를 경험하거나 신에 대한 봉사를 하면서 강해진 것이다. 사제들은 그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310 정도가 평균 레벨이라고 알려져 있다.
성기사보다도 사제들이 공헌도를 쌓아서 데려가는 데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성기사는 없더라도 사냥을 갈 수 있지만, 던전으로 파티 사냥을 가는데 사제가 1명도 없으면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노예처럼 고생하면서 성물도 찾아 주고 신도들도 늘려주었는데, 대성당도 내가 지어 줬는데...'
위드는 아쉬워서 물었다.
"더 많은 병력을 보내 줄 수는 없겠습니까?"
"그대의 부탁이니 무리를 한다면 이곳을 지키는 성기사와 사제까지도 포함시켜 줄 수도 있겠지. 성기사 40명과 견습 사제 135명을 더 불러 줄 수는 있을 걸세."
견습 사제는 레벨이 200도 안 되었다. 전투 중에는 사제의 역할이 매우 커서 도움이 되겠지만 그들을 보호하는 것도 일이었다. 사제들이 목숨을 잃으면 교단과의 관계도 더욱 많이 악화된다.
'기둥뿌리 하나는 남겨 놓아야 되겠군. 어차피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퀘스트이니...'
"성기사들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앞으로 악착같이 고생을...아니, 그들과 함께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견습 사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엠비뉴 교단과의 전투 때문에 많은 이들을 지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이만큼도 대단한 전력입니다."
성기사와 사제들을 이렇게 많이 끌고 갈 수 있는 것도 위드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엠비뉴 교단과의 전쟁으로 인해 현재는 성기사들을 잘 빌려 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퀘스트에 실패하고 로드릭 미궁에서 몽땅 다 죽어버리면 프레야 교단과의 우호 관계도 끝장이 나겠군.'
위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에, 프레야 교단에서는 도움을 줄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모집되었다. 프레야 교단의 문양이 가슴에 새겨져 있는 당당한 성기사들. 그리고 아리따운 여사제들과 잘생긴 남자 사제들!
어쩌면 몽땅 사지로 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위드와 모험을 함께하고 위해 모집된 사제들 중에는 알베론도 있었다.
"무슨 고민거리가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위드 님이 하시려는 일이라면 프레야 교단과 대륙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
철저히 사리사욕으로 미궁에 가려는 것이었는데도 믿음을 주는 알베론.
"다시 너와 함께하게 되었구나, 잘 부탁한다."
위드는 고마워서 알베론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생각했다.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절대 이렇게 키우진 말아야지.'
험한 세상, 함부로 사람 잘못 믿으면 그대로 죽는 것이다. 위드는 루의 교단에 가서도 협조 요청, 즉 병력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루의 뜻을 펼치는 기사여, 깊고 어두운 곳까지 퍼져 있는 그대의..(생략)"
류의 교단에서도 400명의 성기사를 파견하기로 결정! 프레야 교단보다는 공헌도가 낮았지만 사제보다는 성기사 위주로만 요청을 한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바르칸의 가슴에 꽂혀 있던 루의 검이었다.
위드가 간직하고 있다가 넘겨준 신검이 아골디아로 가서 힘을 회복하고 돌아왔다. 검의 주인은 성기사 데리안. 루의 교단에서 최고의 기사로 꼽히는 그가 루의 검을 착용한 채로 위드의 모험에 따라나서기로 하였다.
"위드 님께서 그동안 엠비뉴 교단과 어떻게 싸워 왔는지 소문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루의 뜻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저는 기사로서 충성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엠비뉴 교단과의 싸움이 중요하지만 위드 님을 돕는 것 역시 그 못지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드는 꼭 기뻐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다시금 급격하게 커져 가는 스케일!
*
"에휴, 벌써 낙엽이 떨어지는군."
이현은 청소를 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큰일을 앞두고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징크스라고 부를 수준은 아니었고, 만약 로열 로드에서 목숨을 잃고 캡슐에서 나왔다면 집이라도 깨끗해야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가장 저렴한 취미 생활로 청소, 빨래, 설거지를 하고 있는 이현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조용하군."
이현은 마당에 나와서 물건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빗질로 낙엽을 쓸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심각한 허전함을 느꼈다. 여동생은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다.
"설마 이 고요함은...안 돼! 보신이가 없어졌어."
납작하게 엎드려서 꼬리를 흔들면서 애교를 부리던 강아지, 몸보신이 목줄을 남겨 놓고 없어진 것이다.
"안 돼. 집에 된장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데."
사실 오리나 닭은 잡아먹었어도 개를 잡기는 꺼려졌다. 개의 육질을 연하게 만든다면서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리는 것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잔인한 일인가.
"동물보호협회 등에서 고소가 들어올지도 몰라."
벌금에 대한 두려움!
더군다나 지금의 몸보신은 아직 6개월밖에는 안 되어서 한참이나 덜 자랐다. 서윤에게 전부터 키우던 몸보신을 주고 나서, 개천 주변에서 열리는 오일장에서 무려 2만 원에 구해 온 녀석이었다.
이른바 몸보신 2세!
몸보신 1세는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이현의 집에 들어오고 난 이후로 새를 잡아다가 바칠 정도로 영특했다. 지금 키우는 강아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을 잘 따르고 늠름한 면이 있는 백구였다.
"이 녀석을 빨리 찾아야 되는데..."
이현은 정붙이고 키우던 동물이 없어졌다기보다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이 사라진 것 같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수색에 나섰다. 집 안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몸보신이 딱히 갈 장소는 없었다.
"대문도 확실히 잠겨 있고...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복날을 그냥 허투루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현은 혹시나 싶어서 서윤의 집으로 건너갔다. 두 집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낮은 나무 울타리가 있고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아예 길까지 터놓아져 있었다.
"이 집은 언제 와도 좋군. 잔디를 밟는 느낌이라니.."
대한민국에서 집에 깔려 있는 잔디야말로 부의 상징!
정원의 나무들에는 과일이 열려 있고, 멀찌감치 물웅덩이에서는 오리들이 살판난 듯 헤엄을 치고 다녔다.
꽥꽥!
아직 더운 날씨라서 오리들이 물가를 떠날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현은 물가 근처에서 몸보신을 찾아냈다. 서윤이 정원에 물을 주는 호스로 몸보신을 목욕시켜 주는 중이었다.
"흰둥아, 깨끗하게 씻어야지. 목욕하니 좋니?"
따스한 햇살 아래 반바지와 반팔티를 입고 강아지를 씻겨 주는 서윤. 몸보신이 몸을 털 때마다 그녀에게 물방울들이 튀었는데, 그 모습마저도 아름다웠다. 서윤을 보고 있으면 그저 모든 것들이 한순간의 즐거운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순전히 그녀의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예쁜 외모 때문이었다.
'몸보신이 나보다도 더 따르는군.'
서윤은 어느새 집에 있는 동물들에게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먹여 주고 씻겨 주고 놀아 주고 그녀의 집에서 재워 주기까지 했다. 오리들이 서윤네 집으로 옮겨 간 이후, 토끼마저도 우리에서 풀어 주면 깡충거리며 그녀의 집으로 가서 풀을 뜯어 먹으며 놀았다.
으르릉!
이현의 옆에 와서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는 몸보신 1세!
서윤의 집에 슬그머니 들어왔기에 경계를 하는 것이었다.
이현에게는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아직 머리에 된장도 안 마른 개 주제에 감히 하늘 같은 주인을 몰라보고...앉아."
몸보신 1세는 땅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워."
발라당!
"숨 쉬어."
헥헥헥헥!
머릿속 깊은 곳까지 부리내려 있는 이현에 대한 복종심!
서윤은 수건으로 강아지의 몸에 있는 물기를 닦아 주었다.
"목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씻겼어요."
"비 오면 해결되는데...."
이현은 그러면서도 더 이상의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보신이들끼리 잘 지내지?"
"매일 같이 놀아요."
몸보신 1세는 암컷, 2세는 수컷이다. 서로 간에 혈연관계야 없으니 친하게 지내는 걸 권장할 만한 일이다. 조만간 어울려서 새끼들을 낳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흐음, 강아지가 3마리 정도라면 탕, 찜, 수육이가..."
"네?"
"응? 아무것도 아냐."
이현은 의자에 앉아서 한가롭게 몸보신 커플이 목욕하는 것을 구경했다. 어쩌면 지금의 평화야말로 꿈결처럼 행복한 일이었다.
'사실 내가 그동안 이룬 것이 많기는 하구나.'
로열 로드에서 유명인이 되면서부터는 방송 출연만으로도 넉넉하게 먹고 살 정도가 되었다. 여전히 매일 돈, 돈, 돈을 외치면서 살고 있지만 그렇게 궁핍하던 생활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할머니도 요양원으로 가셔서 더 이상 큰돈이 들어갈 일은 없고, 여동생 학비는 유학 비용까지 따로 다 저축을 해 놓았고.'
방송국에서 출연료로 거액을 받고 있고, 지금까지 판매하거나 보관하고 있는 아이템도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 벌써부터 이혜연의 장례 혼수 비용까지 챙겨 놓았을 정도다. 과거에 돈이 없어서 겪었던 설움 때문에 여전히 저축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이제 마음을 편히 가져도 된다.
'최악의 경우에 아르펜 왕국이 멸망을 하고 헤르메스 길드로 인해 더 이상 모험을 못 하게 되더라도, 가족들을 챙기는 데에는 모자라지 않겠지.'
이현은 혼자라면 시장에서 이불 장사를 해도 되고, 통닭집을 차릴 자신도 있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평생 빵을 굽거나 닭을 튀기면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물론 술에 취한 손님들이 와서 주문한 통닭에 다리와 날개가 정확히 두 쪽씩 있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겠지만!
'도전이 좋은 거야. 지금도 충분히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부담스럽던 이현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로열로드는 그의 직장,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잘 풀리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전쟁의 신 위드의 전실이 생겨났던 것은 더 어렵고, 더 위험한 모험에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거침없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부딪쳐서 해결하고, 위험을 극복해 나가면서 역사를 써 왔다. 가진 것만 지키려고 산다면 이룰 수 있는 것은 갈수록 적어진다.
'걱정하지 않아. 프레야 교단, 루의 교단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성이나 조각술 최후의 비기. 이런 건 언제까지나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 짐은 아니야.'
실패란 떠올리기 때문에 겁나는 것.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으니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현은 상황이 불리할수록 더 집중하고 격렬하게 부딪치면서 해결책을 찾아 왔다. 모험이란 남들이 가지 못한 곳으로 걸어가고 성공할 자신이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 그런 게 아니겠는가. 무겁던 짐을 훌훌 털어 버리고 시원하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보는 것이다.
'내가 정말 원하던 것이었을지도 몰라. 온몸이 짜릿한 그런 순간들을..조각술 최후의 비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 하고 싶은 거지.'
그 순간을 맞춰서 배에서 나오는 소리.
꼬르륵.
"음. 나는 역시 깊은 생각을 하면서 무게를 잡으면 안 돼. 에휴, 그냥 죽도록 고생하면서 사는 팔자인 거지."
"네?"
"배고프지?"
"약간요. 뭐 해 줄까요?"
"해물 칼국수. 오늘은 내가 요리해 볼게."
지금은 휴학 중이지만 학교에서는 그녀가 싸 준 도시락을 매일 먹었다. 이번엔 자신이 요리를 해 주는 것으로 보답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현이 마당에서 밀가루 반죽을 찰지게 만드는 사이에 서윤은 옆에서 김치전을 부쳤다. 깨끗해진 몸보신들이 뛰어다니는 야외에서 보내는 한가로운 한때였다.
*
모라타의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선술집으로 위드가 들어갔다.
"꺼억, 취한다."
"오늘따라 술맛이 좋은데. 여기 맥주 두 잔 더!"
술꾼들은 낮에도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가계가 뒷골목에 위치한 만큼 술값이 저렴해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다. 유저들이 절반은 되었고, NPC들이 나머지 자리를 차지했다.
모라타가 대도시가 되는 과정에서 북부의 유민들이 많이 몰려왔다. 사냥꾼, 용병, 전사 등의 직업을 가진 유민들은 사냥을 나갈 때를 제외하면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 시간이면 이곳에 있다고 했는데...'
위드는 가게를 둘러보다가 빈 잔이 잔뜩 쌓여 있는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백발의 노인을 발견했다.
'저기로군.'
위드는 그곳으로 걸어가서 옆자리에 앉았다.
"의뢰할 것이 있습니다."
"의뢰?"
노인은 코가 빨갛게 보일 정도의 고주망태였다. 북부의 유명한 도둑 NPC 제이든!
현직에서 은퇴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술집을 찾아오는 도둑과 암살자 들에게 함정 해체 기술을 가르쳐 준다.
위드는 그동안 던전이나 마굴을 조금씩 가려 온 편이었다. 사냥하기 좋은 몬스터들이 있더라도 함정이 많은 던전이라면 그냥 돌아 나왔다. 만약 함정이 몸으로 버틸 만한 정도라면 반 호크를 앞세우거나 직접 견뎌 냈다.
이번에 가야 하는 로드릭 미궁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함정이 발동되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근처에 있는 사람까지 그대로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 그렇다고 함정만 해체하고 걸리지 않으면 안전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변종 몬스터의 레벨이 그나마 약해서 400대 중반,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악마병들은 레벨이 자그마치 500대였다. 그리고 보스인 몬투스의 레벨은 무려 600대로 추정! 위드는 최소한 함정에만이라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제이든을 찾아왔던 것이다.
"계약을 맺고 나를 따라가서 함정을 해체해 주면 됩니다."
"용병 계약이란 건데..난 현업에서는 손을 씻은 지 오래라서."
용병은 일반적으로 용병 길드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 주민이나 NPC를 고용하는 방식도 가능했다. 당연히 친밀도가 높으면 유리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지불해야 했다.
"뭐,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하루에 5,000골드씩을 준다면 생각은 해 보도록 하지."
┌────────────────────────────────────┐
│ -제이든과 용병 계약을 맺으시겠습니까? │
│ 하루에 5,000골드를 지불해야 하며, 최하 열흘분의 급료를 선불로 지급해 │
│ 야 합니다. │ └────────────────────────────────────┘
함정 해체 및 자물쇠 따기에는 거의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제이든이라서 고용 비용이 매우 비쌌다. 사실상 하루 5,000골드는 고용을 하지 말라는 뜻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북부에서는 제이든이 가장 뛰어난 함정 해체 기술을 가지고 있다. 중앙 대륙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도둑들을 고용하고 싶지만, 그들은 신출귀몰하여 만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위드는 아끼던 술을 꺼냈다.
"일단 목부터 축이시죠."
"크윽, 이렇게 좋은 향기라니..."
"술은 많이 있습니다."
"의뢰를 하는 동안에 매일 이런 술을 준다면 4,200골드에 해 주지."
"평생 맥주를 마실 수도 있게 해 주겠습니다."
"그게 가능만 하다면...3,900골드에도 해 줄 수는 있어."
여전히 고용은 불가능한 금액.
"과연 그럴 줄 알았다, 제이든. 북부의 평화를 위한 길이다. 평생 도둑으로 살아왔던 세상을 위해 떳떳하게 올바른 일을 하지 않겠는가?"
"국왕 폐하!"
위드는 자신의 신분까지 드러냈다. 선술집의 모든 NPC들이 위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르펜 왕국의 국왕으로서 모든 주민들에게 의뢰를 부여할 수 있는 특권!
"폐하를 위해서 일하겠습니다."
"고용 비용은 하루에 2골드를 주겠다."
"그걸로는 육포값도...."
"광장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싶으냐?"
"북부의 영웅이신 폐하를 따르는 것만도 영광입니다."
국왕의 권위로 간단히 제이든을 고용했다.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할 경우에 부작용으로는 주민들의 충성도가 떨어지고 용병들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 놓은 평판이 있어서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함정 해체는 제이든에게 맡기도록 하고, 그리고 조각 생명체들 중에서는 누구를 데려가야 하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될 가능성이 현재로써는 너무도 높았다. 빙룡, 불사조 등은 큰 덩치로 인해 애초에 들어가지도 못할 테고, 금인이와 누렁이의 경우에는 이렇게 위험도가 높은 곳에 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금인이는 다재다능하고 누렁이는 좋은 체격과 힘을 가졌지만 둘 다 전투력에서는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바하모르그, 뼈가 부서지도록 싸울 수 있는 기회다."
"어떤 곳이든 좋다."
워리어, 특별히 바하모르그만 데려가기로 했다. 위드보다도 탁월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워리어의 각종 스킬들은 다른 사람의 체력과 생명력을 많이 높여 주기 때문이었다. 위험한 던전에 반드시 데려갈 만하다.
"미궁에 들어갈 인원 구성은 이것으로 끝났군."
*
"은화살에 은무기 그리고 생존과 전투에 필요한 용품들이라, 이렇게 많이 어디에 쓰려는 거지?"
마판에게도 물자 조달을 부탁했다. 숯돌과 약초, 해독제를 기본으로 하여 미궁에 들어갈 인원이 쓸 물자를 비밀리에 운반해 오는 역할이었다. 고급품만 골라 충분한 양을 구입하다 보니 구매 비용만 무려 7만 골드!
예비용 갑옷이나 검, 상하지 않는 식재료들도 준비했다. 대장장이 스킬이 고급에 오른 위드이니 웬만하면 수리를 할 수 있겠지만, 전투 중에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벌써 마차 스무 대 분량이 넘었어. 이 정도면 전쟁도 치룰 수 있을 분량인데...정말 이 정도까지 사 모아야 하나."
마판은 귓속말로 몇 번이나 위드에게 이렇게 많은 양을 사야 하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틀림없었다.
ㅡ 가격은 조금만 따지고, 품질은 좋은 것으로 가능한 많이 구해 주셔야 됩니다.
결국 마차 스물 두 대 분량의 양을 채우고 나서 마판은 목적지로 이동을 했다. 중앙 대륙에서도 약간 치우친 북쪽 지역이 정해진 약속 장소였다.
"여긴 별것도 없고 치안도 불안한 장소인데..."
마판은 이번 상행에 용병들을 대거 고용하였다. 과거 부활의 교단이 마물들을 이끌고 휩쓸었던 장소이기도 하고, 그 후에는 엠비뉴 교단이 성과 도시들을 파괴해 버렸다. 현재는 몬스터들이 들끓고 있는 곳으로서 인간들은 산으로 흩어져서 살아가는 실정이었다.
도처에 도적 떼가 들끓었고, 안전한 길을 대낮에 이동하더라도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는 경우가 잦았다. 물품을 운송하는 상인으로서는 가능한 피하고 싶은 길이었다.
중앙 대륙과 북부를 오가면서 교역을 하는 상인들도 육로보다는 뱃길을 많이 활용할 정도였다.
"목적지에 무사히 다 왔군!"
마판은 위드가 말해 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목적지에는 위드만이 아니라 성기사들, 사제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마판은 한곳에 이렇게 많은 성기사들이 무장한 채로 서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평원에 열을 맞추어서 서 있는데, 햇빛에 비친 갑옷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모습이 일대 장관이었다. 사제들도,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도 엄청나다 보니 계속 눈길을 끌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물품들은요?"
"확실히 챙겨 가지고 왔습니다. 세 번씩 점검했으니 수량이나 품질은 완벽할 겁니다. 위드 님, 그런데 여기 성기사들은 왜 있는 거죠?"
"제 퀘스트를 도와줄 인원입니다."
"조각술 마스터 퀘스트요?"
"그건 아닙니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연계 퀘스트를 진행중이죠."
위드는 전투 물자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돌아섰다. 마판은 좋은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을 이리저리 관찰하다가 알베론과 데리안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저들만이 유명한 것이 아니라, NPC들 중에도 유명인들이 있었다. 프레야 교단의 사제 알베론, 루의 성기사 데리안은 영웅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인지도를 가졌다.
굳이 비교하자면 대형 명문 길드 수장급의 명성!
알베론은 프레야 교단의 성물 중 하나인 파고의 왕관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데리안 역시 루의 신검을 착용하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 화려한 지원 병력이란 있을 수가 없다. 모험을 하고 왕국을 건국하면서 두 교단에 공헌도를 쌓아 놓은 위드였기에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전력이었다.
위드가 사자후를 터트렸다.
"우리는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로드릭 미궁에 왔다!"
"우와아아아아!"
성기사들은 검을, 사제들은 지팡이를 들면서 함성을 질렀다.
"허억!"
마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로드릭 미궁!
상인으로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과 마을을 이동하는 경로 외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교역에 방해되는 몬스터들의 서식지 등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고 있지만, 근처에 어떤 던전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모른다. 상인이 던전에 들어가서 사냥을 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저곳이 로드릭 미궁이구나.'
조금 떨어진 곳에 아주 오래된 궁전이 있었다.
마법사 로드릭은 왕국의 별궁으로 운영되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마법 연구는 지하에서 했다. 미궁의 입구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근데 아무도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는데?'
위드는 그사이에 짧게 연설을 마쳐 가고 있었다. 성기사들의 사기를 높게 유지하는 것은 중요했지만 단기간에 끝날 의뢰도 아니기 때문에 오래 끌 필요가 없었다.
"그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신이 우리를 돌봐 줄 것이다. 가자! 그럼 마판 님, 나중에 모라타에서 뵙겠습니다."
"예에."
위드는 마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로드릭 미궁으로 이동했다. 무성하게 수풀이 우거져 있는 정원, 부서진 동상의 밑에 지하로 향하는 시커먼 계단이 있다. 돌로 만들어진 계단은 온통 금이 가고 깨져 있었으며, 박쥐의 사체도 있었다.
로드릭이 살던 궁전 전체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한 한기!
아마도 저주받은 폐가란 이런 분위기일 것이다 하는 느낌이 강렬한 장소였다.
"한여름에 은행에 들어온 것 같군."
여기까지 온 이상 위드는 망설이지 않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