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34권 (221/520)

달빛조각사 34권

노들레의 고난 

"에...고고, 온몸...이 아...프...지 않은... 부...위가... 없구...나."

"스...탯 창."

캐릭터 이름: 노들레 성향 : 무 

레벨 :37 직업 : 없음

칭호 : 가문의 상속자 명성 : 53

생명력 : 69 마나 : 282

힘 : 19 민첩 : 16 체력 :23 

지혜 : 95 지력 : 77 예술 : 3,153

통솔력 : 5 행운 : 5

공격력 : 3 방어력 : 4

마법 저항 무

상태 : 중증 흑토병으로 인해 죽어 가고 있음,

생명력의 최대치가 13% 정도 줄었습니다.

생명력의 회복 속도가 저하됩니다.

발병 이틀째, 발작 증상이 잦아집니다.

"이러...다...가 정...말 죽겠...군."

현재 위드는 그래도 약간씩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은 갖췄다. 하지만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마을로 가거나 숲을 마음껏 돌아다닌다는 건 도저히 무리!

그때 주변에 우거진 수풀들이 위드의 눈에 띄었다. 

코볼트의 영역에 들어와서 덤불 안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들었으니 주변은 수풀들로 가득했다. 

'저것들은.......'

약초라고 볼 수는 없는 풀들이 여러 종류였다.

위드의 정신이 땅에 떨어진 돈을 봤을 때만큼이나 맑아졌다.

'노들레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아났을 테지. 그렇다면 분명히 방법이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노들레도 어떤 수단을 써서든 살았을 것이다.

위드에게는 시간의 모래가 있어서 노들레가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의 모래가 필요하지 않았다.

풀들을 보는 순간 노들레가 했을 행동이 그대로 떠올랐던 것이다.

흔하게 보이는 풀과 몇 가지 뿌리들을 조합하면 향토병을 이겨 낼 수 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치료약이 많이 제조되면 주민들이 병마와 싸워서 이겨 낼 수 있으리라.

보로타 가문의 저택 문을 열고 들어가서 봤던 양피지에 적혀 있던 내용!

위드는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꺼냈다.

향토병의 종류가 수십 가지나 되었다.

흑토병에 걸리자마자 이 양피지를 떠올리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흑토병. 흑토병.......'

흑토병

켈튼 왕국의 늪지대에서 주로 발병. 하지만 그곳의 파리나 모기 등이 상당히 먼 곳까지 병의 기운을 옮기기도 함.

치료를 위해서는 엉겅퀴와 쇠뜨기풀, 쐐기풀, 껄껄이풀, 가시나무의 뿌리가 필요함.

완전한 치료약은 아니지만 흑토병을 이겨 내는 데 큰 도움이 됨.

이미 숲으로 들어왔기에 근처에서 흑토병을 치료하기 위한 풀들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것들을 그릇에 몽땅 넣고 갈아서 입에 넣었다.

띠링!

-노들레의 비법으로 제조한 흑토병 치료약을 먹었습니다.

약효가 몸에 퍼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조가 잘못되었을 시에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위드는 으슬으슬 떨면서 약효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이러다 죽으면 그것도 박복한 탓이겠지. 조각술을 거의 마스터하고 고생 끝에 5개나 되는 비기를 몽땅 찾아냈는데 허무하게 흑토병에 걸려서 죽게 되다니.'

자꾸만 드는 부정적인 생각!

초보 시절에 늪지, 춥고 축축한 던전 같은 곳에서 사냥을 하다 보면 병에 걸리기가 쉽다. 그러나 레벨이 높아지면서 힘과 체력이 늘어나다 보면 어지간한 병에는 신경도 쓰지 않게 된다.

레벨이 50을 넘기면 향토병 같은 것쯤은 걸리더라도 목숨이 오갈 정도는 아니었다.

위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며칠간 사투를 벌이더라도 약한 감기 증상과 과로 정도로 버텨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조각술 최후의 비기를 얻기 위한 퀘스트를 하는 도중에 고작 흑토병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다니,

노들레의 양피지는 그런 면에서 잡템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버리지 않고 챙겨 둔 탓에 유용하게 쓰였다.

'나는 장사는 하면 안 돼. 아마 한창 잘나가다가도 온갖일이 벌어지겠지. 직원이 횡령을 하거나 건물이 무너지고, 재개발을 한다고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난다거나.......'

끊임없는 불안감에 떨고 있는 사이 몸의 괴로움이 점점 사라져 갔다.

"약이... 제...대로 들었구...나."

역시 아프면 푹 자고 약 먹는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후, 다시 메시지 창이 울렸다.

띠링!

흑토병 치료 완료 

노들레의 비법을 통해 몸을 치료할 수 있었다.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으리라.

위드는 일단 살아남은 것에 감사했다.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의 한 단계를 또 무사히 넘겼다. 하지만 흑토병이 나았다고 해도, 스탯 창을 확인해 보니 여전히 레벨37의 노들레인 상태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메시지 창에 또 새로운 퀘스트가 나타났다.

띠링!

힐데른의 구출

포르투의 국왕에게 잡혀간 힐데른.

그녀는 언제 마법 실험의 도구가 되어 죽을지 모른다. 너무 늦기 전에 그녀를 구출해야 하리라.

난이도 :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

퀘스트 제한 : 남아 있는 시간 알 수 없음.

              

              힐데른의 사망 시에는 퀘스트 실패.

*주의

노들레의 몸으로 퀘스트를 완료해야 합니다.

조각술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조각술의 비기를 사용하여 스탯과 레벨이 감소하는 페널티는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더라도 적용됩니다.

시간의 틀어짐 속에서 조각술의 비기로 만들어 낸 생명체와 정령 등은 정상적인 시간대로 따라가지 못하게 됩니다.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거부할 수 없습니다.

'무슨 좋은 조건은 하나도 없군.'

위드는 간단히 육포로 허기를 때웠다.

몸이 점점 회복되고는 있으니 돌아다니는 코볼트 정도야 문젯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조각술의 비기 중 하나인 조각 검술은 마나를 아껴서 잠깐씩 쓸 수 있었다. 레벨이 400을 넘어갈 때의 위력은 발휘할수가 없을 테지만, 겁이 많은 코볼트들을 물리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포르투의 왕성에 쳐들어가서 힐데른의 역을 하고있는 서윤을 구출한다는 건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왕성의 내부 구조나 수비 체계도 모르고, 서윤이 탑이라고 하긴 했지만 정확히 어디에 갇히게 될지도 알 수가 없어. 지금은 왕성 출입 허가 자체도 불가능하겠지."

흑토병이 깨긋하게 낫고 체력이 회복되자 이제 혼잣말도 다시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나 서윤이나, 지금 레벨로는 왕실 기사 1명도 물리칠 수가 없을 텐데."

아무리 기본적인 퀘스트라도, 해결할려면 어느 정도 상식은 있어야 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서윤이 죽기 전까지 왕성의 구조 등을 알아낼 수는 있다 해도, 실제로 침입하여 그녀를 구해 낸다는 건 불가능이었다.

"여기서 포기할까? 그러면 목숨은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퀘스트를 포기해 버리면 어쩌면 위드와 서윤의 목숨은 구해서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현재로써는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의 난이도란 끔찍하게 높았다.

지금껏 쌓아 올린 수많은 잡다한 스킬과 스탯까지 정작 중요한 때에 활용하지 못한다니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세상에 땀과 노력만큼 정직한 게 없다더니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야. 역시, 사회 지도층이나 정치인들은 몽땅 거짓말에 능숙하지!"

화풀이로 남 탓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시간의 모래가 다시 떠올랐다. 노들레와 힐데른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설마 그들도 여기서 좌절하고 끝을 내고 말았을까.

"이제는 써 봐야겠군. 어려운 퀘스트에 시간제한까지 있으니 더 기다릴 수가 없어."

위드는 가죽 주머니에 담긴 시간의 모래를 꺼내서 손에 쥐었다.

"시간의 모래 사용!"

-시간의 모래가 사용됩니다.

 시간의 축을 뒤흔들어서 과거의 일을 보여 줍니다.

 남은 사용 횟수 2회.

-시간의 모래를 사용하며 아이탬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획득하였습니다.

노들레는 보덴 마을 근처에서 치료약을 제조해서 바로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도 하고 근처의 귀족 성으로 가서 힐데른을 구해 달라고 눈물 섞인 애원도 했다.

"쓸데없는 일을 하는군. 그냥 여자가 죽은 셈치고 포기하는 편이 나을 거네."

"미친놈. 백작 전하께서 한가롭게 너 따위를 만나 주실 것 같으냐?"

"더 듣고 싶지도 않다. 전장에 화살받이로 끌려가기 싫다면 썩 물러가거라!"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어는 주었지만 관심이 없었고, 귀족들은 경비병조차도 넘어서지 못해 얼굴도 보지 못했다.

노들레는 도와줄 사람들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인간을 위해 포르투의 국왕에게 항의를 해줄 귀족이란 당연히 어디에도 없었다.

정의가 무너진 세상!

노들레는 좌절하였지만 일주일이 지날 무렵에 기회가 왔다.

적국 라움 왕국이 포르투 왕국을 침략한 것이다.

포르투의 국왕은 군대를 이끌고 싸우러 출진했다.

그리고 그날 노들레는, 힐데른을 구하기 위하여 시종으로 가장하여 왕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무사히 힐데른을 구해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중간 중간 기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녀가 있는 장소까지 갈 수가 없었다. 또한 라움 왕국과 싸우러 나간 포르투 국왕이 예상치 못한 대패를 당하고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 버렸다.

라움 왕국에는 어마어마한 실력의 마법사가 있어서, 포르투의 국왕이 사용하는 흑마법이 봉쇄된 것은 물론이고 군대까지도 떼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패잔병들을 데리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포르투 국왕은 왕성에서 수성을 준비를 했고, 라움 왕국은 곧바로 진격하여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왕성이 무너지고 불타던 날.

노들레는 힐데른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치열하게 도망을 다녀야 했다.

왕실기사, 왕실 병사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온 사방의 모든 것이 죽음의 위기였다.

공성 무기와 마법이 성을 무너뜨리는 난장판의 와중에, 노들레는 바닥을 굴러 가며 위험을 피하기도 하고 무너진 성벽 잔해에 깔리기도 하고 몸에 불이 옮겨붙기도 하면서 처절하게 전진을 해 나갔다. 

노들레에 비하면 도서관 직원이나 지방 공무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셈 쳐야 하지 않을까.

영상을 보면서, 마치 액션과 스릴러를 섞어 놓은 아슬아슬한 영화를 수십 편은 감상한 듯한 기분이었다.

꼭 주인공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상황인데도 어떻게든 기어이 살아난다. 적어도 열일곱 번 이상 목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위기를 넘기고 감옥 열쇠를 구해 힐데른이 있는 탑의 문까지 도착을 하며 영상은 끝났다.

"감동적이군. 문제는 내가 노들레의 입장에서 이 퀘스트를 해결해야 한다는 건데."

위드는 엄두가 안 났다.

노들레의 행동을 통해 왕성의 지리를 파악할 수 있었고, 서윤이 갇히게 될 탑도 알아냈다.

포르투의 왕성은 이 시대에 존재했던 난공불락의 요새 중한 곳으로 꼽힌다. 그만큼 험하고 수비가 철저하며 천혜의 요새였다.

나약한 몸으로 이제 조그마한 실수라도 범한다면 퀘스트는 실패하고 말리라.

사실 노들레가 살아서 탑까지 도착한 건 기적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아등바등 어찌어찌 도착을 한 것이다.

거기다 영상에서 힐데른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녀를 데리고 포르투의 왕성에서 탈출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만나기는 만났더라도, 무너지는 성에서의 탈출은 그때까지보다 훨씬 어려울 게 분명했다.

"근본적인 다른 문제도 있어."

위드는 노들레가 아니었다.

과거의 일들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작은 오차라도 생긴다면 엉뚱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수 있다.

노들레를 따라 하더라도 과거의 모든 일들이 그대로 다시 일어나리란 법이 없는 것이다.

노들레가 있을 때에는 무너지지 않았던 천장이 위드가 통과할 때는 폭삭 무너질 수도 있고, 마주친 왕실 기사들의 행동이 달라질 수도 있다.

시간을 매번 정확하게 맞춰서 행동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상으로 본 내용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그대로 똑같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의미!

"알고도 대처를 한다는 게 쉽지 않겠군. 그보다 시간의 모래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고 했는데. 감정!"

시간의 모래

2회 사용 가능

시간의 모래, 혹은 회상의 모래라고도 불리는 신비한 물건이다.

대륙 남부 사막 부족의 보물로서, 시간을 되돌려 오래전에 있었던 모습들을 보여 준다.

원래 살던 시간대로 돌아가서 물건이나 사람을 데려올 수 있다.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시간과 엮이기도 함.

아이템의 정보가 조금 추가되었다.

"물건이나 사람을 데려온다면... 음."

위드는 현재로써는 이 퀘스트를 그 혼자 깬다는 게 도무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다. 지금까지 그도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 왔지만, 그래도 시도를 해 볼 수 있을 만큼의, 약간의 희망 정도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아무리 잘 대처하더라도 승산이 적어. 시간의 모래를 쓰는 수밖에 없겠군. 시간의 모래 사용!"

-시간의 모래가 사용됩니다. 

 시간의 축을 뒤흔들어서 과거의 일을 보여 주거나 원래의 시간대로 돌

 아가서 물건이나 사람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사용을 하시겠습니까?

노들레가 힐데른을 구출하고 어떻게 하였는지를 보면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전력 상승이 필요했다.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간다."

-베르사 대륙의 시간의 축을 바꾸어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갑니다.

 필요한 물건이나 사람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남은 사용 횟수 1회.

 제한 :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은 1명, 물건은 직접 소지할 수 있는 것으로 제한됨.

 사흘 내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시간의 균열이 합쳐져 지금의 시간대로 영영 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의 모래가 가죽 주머니에서 하나씩 솟구쳐 올라서 공중으로 뿌려졌다.

잠시 후에는, 여전히 숲이었지만 풀과 나무 들이 자라 있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온 모양이군.'

숲을 걸어서 나가는데 유저들과 마주쳤다.

"아, 코볼트 무기 세트 모으기 너무 힘드네."

"벌써 일곱 번이나 사냥 나왔는데 이번에도 안되면 그냥 포기하자."

"강철 무기들로 상점에서 새로 사는 편이 훨씬 낫다고 내가 진작 말했잖아."

파티 사냥을 하는지 4명의 유저들이 티격태격 다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안 돼. 돈 많이 모아서 던전 입장 요금 내야 한단 말이야."

"칸톨 던전에 가려고?"

"응. 우리 레벨대에는 거기 들어가는 게 최고라니까."

칸톨 던전은 라살 왕국의 초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여기가 아마 하벤 제국의 땅이었지.'

하벤 제국이 영토 확장을 하여 위드가 있는 숲도 그들의 영토에 속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사냥하러 가시는 길이면 같이하실래요?"

"아뇨. 이제 도시로 가는 길입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네. 사냥 즐겁게 하세요."

위드는 그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지나쳤다.

물론 코볼트 사냥터에서 마주친 사람이 전쟁의 신 위드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으리라.

'딱 1명이라면 정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으로 결정해야겠군.'

위드는 유린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동생아, 오늘 저녁에 피자나 시켜 줄까?

-알았어. 기다려.

눈치 빠른 유린이라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림 이동술로 부려 먹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후후후, 던전 사냥이라. 어렵지 않지!"

페일은 활을 꺼내 들고 조용히 지하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오늘을 위하여 특별히 마판에게 고강도 화살도 주문했다.

강철 화살보다 무려 20배나 비싸지만 관통력이나 정확도, 사정거리에서는 비교도 안 되는 물건이다.

"개당 15골드나 된다고요? 화살이 너무 비싼데요."

"말 그대로 고강도라서 그렇습니다. 이 화살을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가 아직 몇 명 안 돼요. 바쁜 일이 있다는데 주문 제작을 부탁하느라 혼났어요. 마판 상회가 아니었다면 물건 구경하기도 힘들었을걸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남입니까? 페일 님이니까 저도 땅 파서 장사하는 셈치고 파는 건데....... 구입이 어려우시다면 어쩔 수 없이 도로 가져갈게요." 

"그래도 일부러 가져오셨는데요."

"뭐, 화살 2,000발, 제가 억지로 팔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손해 조금 보면 되죠."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었는데....... 제가 사겠습니다."

"전부 구입하신다면 1골드씩 깎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구매한 화살 2,000개!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페일은 마판이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고로 돈거래는 가까운 사람을 주의하라고 하였지만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필요한 물건을 추가 주문까지 해두었다.

하지만 대상인이 된 마판이 두툼한 뱃살을 출렁거리면서 기뻐할 때의 표정이 잊히지가 않았다.

"레벨이 올라도 돈에는 항상 쪼들리는군."

그래도 이번 퀘스트만 성공시키면 괜찮을 것이다.

니플하임 제국!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에 비해 이제는 그 흔적만이 북부에 남아 있을 뿐이다. 주민들까지 완벽히 아르펜 왕국에 복속되고 있으니 니플하임 제국의 재건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페일은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모으던 중에, 니플하임의 궁수가 맹렬한 바람을 일으키는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스킬을 얻기 위한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에고, 번개 치는 계곡이라. 혼자 가기는 무서운데."

수르카는 번개의 저항력을 올려 주는 옷과 장신구 등을 미리 구했다.

어떤 퀘스트를 하든 철저한 준비가 우선!

그녀는 권사 길드에서 특별한 의뢰를 받았다.

"요즘 들어 자네의 이름이 자주 들리더군. 권사로서 자부심을 느끼네. 번개 치는 계곡에서 보름달이 뜰 때마다 어떤 몬스터가 나타난다는데... 그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대단할텐데 맡길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보상으로는 충격 전달의 장갑을 주도록 하지."

장비를 얻을 수 있는 의뢰였다.

로뮤나도 화염 마법 스킬을 올리기 위한 수련을 한다며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산에 가면 심심할 텐데, 몬스터가 보이면 맨날 방화하고 다 태워 죽여야지!"

이리엔은 도시에서 축복과 치료로 사람들을 보살피는 성직 봉사를 했다.

이제 그녀의 레벨과 신앙심도 높아졌으니 교단 내에 지위를 얻기 위해서였다.

교단 내에서 지위가 오르게 되면 추가적인 신앙심을 얻는건 물론이고 그녀만을 위하여 파견된 성기사가 항상 뒤를 따르며 보호해 주게 된다.

위드가 퀘스트를 진행하는 사이에 다른 동료들도 이렇게 계속 발전하고 있었다.

다만 페일과 수르카는 직업 마스터 퀘스트에 도전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마스터 퀘스트를 하는 걸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스터 퀘스트에 도전을 할 수 있는 실력이지만, 막상 스킬의 마스터까지는 멀었으니 뒤로 미룬 것이다.

나중에 마스터 퀘스트를 완료한 사람들이 나오고 나면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령. 어디에서도 매력을 뽐내는 그녀는 모라타의 음악과 춤에 푹 빠져서 신곡 작업 중이었다.

"로열 로드를 주제로 한 음반, 모험과 전투, 도시의 느낌을 곡에 담고 싶어요."

"꼭 그렇게 해야 되겠어?"

프로듀서들은 골치가 아팠다.

화령은 앨범의 상당 곡을 자작곡으로 채울 수 있는 실력이지만 그럼에도 기존의 음반들과는 느낌이 너무 많이 달라졌다.

"네 이미지를 깎아먹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잘해 오던 것처럼 남녀 간의 연애나 어떤 감정을 바탕으로 써 보는 건 어때?"

"음악에는 경계가 없잖아요. 로열 로드에도 음악이 있어요. 그리고 몇 곡 정도는 로열로드에 있는 악기들로 연주해서 넣어 볼 계획이에요. 그러니 최고의 연주자들을 위주로 섭외해 주세요."

벨로트는 최근 <찬란한 재산>이라는 드라마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서 열연 중이었다.

 착하고 지고지순하며, 가난하지만 구김 없고 예쁜 여자!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배역이었다.

자하브와 이베인 왕비

유린의 그림 이동술을 통해서 위드가 도착한 장소는 브라이스 고원!

넓고 평탄하지만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초원이었다. 양떼와 표범, 불곰 같은 짐승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엄폐물이 거의 없고 굳이 이곳까지 찾아와서 사냥을 할 사람은 없기에 유저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자하브가 은거한 곳이로군."

과거에 자하브를 만난 장소는 10대 금역 중의 한 곳인 그라페스였다. 거기서도 공헌도를 이용하여 쏠쏠하게 부려 먹으며 사냥을 했었다.

자하브의 전투 능력에 대해서는 위드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으리라.

'강하지. 그리고 싸울 줄도 알고.'

조각술 마스터이지만 검술의 마스터이기도 하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절대 잊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어."

한번 부려 먹은 대상은 끝까지 기억을 해 둔다. 물론 나중에 보답을 해 주기 위한 목적은 당연히 아니었다.

'다음에 또 부려 먹을 기회를 만들어 봐야지.'

자하브와 함께 그라페스의 던전들을 휩쓸었던 행복한 기억!

포르투 왕성을 침입할 때에도 자하브가 있다면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NPC의 경우에는 공헌도나 친밀도가 아주 높지 않으면 쉽게 따라나서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NPC의 레벨이 높을수록 어지간한 공헌도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저번 일로 프레야 교단의 공적치도 많이 써 버린 상태라 당분간은 위드라고 해도 알베론을 위험한 일에 끌고 가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위드는 자하브를 부려 먹을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조각 소환술!"

위드는 켈베로스를 소환했다.

흑색의 기운을 대지에 뿌리고 다니는, 머리 셋 달린 지옥의 파수꾼!

켈베로스는 나타나자마자 무시무시하게 포효했다.

"크어어어엉!"

"시끄럽고, 이거 냄새나 맡아 봐."

위드는 과거 자하브의 통나무집에서 얻었던 조각품을 켈베로스의 머리 앞에 가져다 댔다.

켈베로스가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이 고개를 들어서 쳐다보았다. 주인이 그를 소환하기에 당연히 어마어마한 마수와 전투를 치르는 줄 알고 잔뜩 기를 세운 채 왔던 것이다.

"찾을 수 있겠지?"

"컹컹!"

"가자, 사냥개!"

지옥의 파수꾼이라고 해도 개는 개일 뿐!

켈베로스는 3개의 머리로 킁킁대며 냄새를 맡으며 이동했다.

위드는 누렁이를 소환하여 타고서 뒤를 따라갔다.

"음머어어어. 주인, 모습이 바뀌었다."

"사정이 조금 있었다."

"역시 나쁜 짓을 많이 하다 보니 벌을 받아서......," 

"시끄러. 그보다 머리가 셋이다 보니 이런 쪽으로 쓸 만하군,"

켈베로스는 여러 방향으로 나 있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제대로 냄새를 맡았다. 그라페스에서처럼 자하브를 찾기 위하여 헤맬 필요가 없었다.

브라이스 고원의 짐승들은 켈베로스가 뿜어내는 투기로 인하여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했으니 따라가는 위드로서는 산책하는듯 편안하기까지 했다.

자하브의 고원의 언덕, 전망 좋은 곳에 통나무집을 지어 놓고 살고 있었다.

"한적한 곳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사는 게 주거 취향인가 보군."

자하브가 정착한 장소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검술 마스터라는 사실도 아직까지는 비밀!

만약 유저가 방문해서 친밀도를 올리거나 어떤 의뢰를 완수했다면 광휘의 검술을 습득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현재까지는 찾아온 유저도 없었고, 자하브는 집 앞에서 할 일 없는 사람처럼 평범하게 조각품을 깎고 있었다.

'잘됐군. 무사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돼. 이번에도 확실히 부려 먹어 줄 수가 있을 테니,'

위드는 반가운 티를 내기 위해 누렁이에게서 내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뛰어갔다.

"자하브 님, 제가 왔습니다!"

"여기까지 손님이 왔군."

자하브는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 사이의 우호도는 다 떨어진 후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왔는가."

자하브는 바로 용건부터 물었다.

위드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그가 만들고 있던 조각품, 아직 얼굴도 만들지 않은 여인의 조각품을 보았다.

아직도 이베인 왕비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내가 이베인 왕비와 관련이 있는 퀘스트를 빨리 했더라면 왕실 기사 이올린이 죽지 않았겠지. 그랬으면 자하브와 함께 엠비뉴 교단을 박살 내고 로자임 왕국을 구하는 의뢰를 할 수도 잇었을 텐데.'

지나간 일이라도 아쉽다.

지금은 엠비뉴 교단이 전 대륙적으로 성행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이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파괴하는 퀘스트들도 많이 있었으리라.

위드의 경우처럼 초반부터 이어진 연계 퀘스트들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드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저들도 그런 퀘스트는 진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잦은 전쟁과 치안의 악화, 독재 등으로 엠비뉴 교단이 활약하기 좋은 환경만 조성해 주고 말았다.

베르사 대륙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은 결국 유저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위드는 아쉬움을 떨치면서 말했다.

"제가 조금 곤란한 일에 처해 있습니다. 광휘의 검술을 가르쳐 주신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시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로군."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는 일입니다."

"가게."

곧바로 축객령!

위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인정이 없고 각박하다고 탓하고 싶진 않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의지를 꺾고 부려 먹을 만하지 않겠는가.

"잠시 집 근처에서 조각품을 깎아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하지만 밤이 되기 전까지는 떠나 주었으면 좋겠군. 지금은 별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 굳이 내가 검을 들고 쫓아내진 않게 해 주게."

"가지 말라고 해도 때가 되면 갈 겁니다."

물론 그때에는 자하브를 노예처럼 부려 먹게 될 테지만!

위드는 조각 재료를 흙을 이용하기로 했다.

조각사이지만 지금은 힘이 약해서 바위나 나무를 깎기에는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조각품이라기보다는 스킬 그 자체니까. 서두르더라도 되겠지.'

누렁이와 켈베로스를 시켜서 파낸 흙을, 바닥에서부터 올라가면서 빚어 갔다.

작은 발에서부터 종아리, 치마로 이어지는 여성의 몸!

조각술로 자하브를 감동시켜야 하는데 너무나도 건성으로 만드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컹컹! 실망이다, 주인."

"음머어어엉. 어떻 저런 짓을! 내가 뒷발로 만들어도 그 정도는 아니겠다."

누렁이와 켈베로스조차도 실망했다.

그냥 조각품도 아니고, 옆에 자하브가 만들어 놓은 이베인 왕비의 작품의 구도를 그대로 따라서 한 것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드레스가 아닌, 시골 처녀들이 입을 만한 허름한 옷이라는 점.

'왕비 시절이 아니라 자하브와 어울렸던 그 모습 그대로.......'

이베인 왕비가 아니라 젊은 이베인 아가씨의 형태!

물론 지켜보는 자하브의 눈빛은 싸늘하게 짝이 없었다.

일부러 찾아와서 이베인을 조각한다고 해서 친밀도가 대폭 늘어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설프게 하다가는 오히려 악감정이 드는 경우도 많다.

물론 위드도 고작 이 정도로 자하브를 부려 먹기 위한 우호도를 얻으려고 했던 건 당연히 아니었다.

조각품은 평작으로 완성!

"음, 잘 만들어졌군."

그러나 위드는 만족스러워했다.

너무 서두른 탓에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을 빨리했을 뿐, 이베인의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조각품을 깎으며 쌓인 경험이 얼마이던가.

'페널티가 심하지만 어쩔 수 없지.'

기적을 일으키는 조각술.

위드는 스스로 창조해 낸 자신만의 스킬을 시전하기로 했다.

"조각 부활술!"

-조각 부활술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로자임 왕국의 현숙한 이베인 왕비, 그녀가 예술의 부름을 받아 이 땅에서 다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예술 스탯 45가 영구적으로 사라집니다.

 신앙 스탯 10이 영구적으로 줄어듭니다.

 레벨이 3 하락합니다.

 생명력과 마나가 70씩 소모됩니다.

 조각 부활술에 의하여 되살아나는 인물은 생전의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해진 짧은 시간이나마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조각 부활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흙으로 빚은 이베인의 조각품!

조각품에 생기가 어리더니 눈을 깜박이고, 숨을 쉬었다. 

고작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이베인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멍하니 있던 자하브와 이베인은 서로 눈을 마주 보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을 떨었다.

"자하브......."

"이베인! 이베인, 정말 너야?"

"자하브!"

자하브와 이베인은 격렬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사무치는 애정을 얼마나 참아야 했던 두 사람인가.

"자하브, 어떻게 이렇게......."

"아무말도, 아무 말도 하지마."

상대방의 떨리는 눈빛만 봐도 수많은 말들이 전해졌다.

가슴이 벅차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연인들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후후후."

그리고 조금 멀리 물러서서 사악하게 웃고 있는 위드!

저 순수하게 기쁨과 행복에 겨워 울고 있는 남자 자하브를 보라. 이 얼마나 흐뭇하게 짝이 없는 광경이란 말인가.

"끝났어. 이로써 마음껏 부려 먹을 수 있는 노예 확정이군."

위드는 사후 서비스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 간 식재료들을 요리하여 자하브와 이베인이 행복한 시간을 가지도록 해 주었다.

통나무집에는 3쿠퍼짜리 알록달록한 싸구려 장식품들을 주렁주렁 달아서 꾸며 주고, 아늑하고 훈훈하도록 모닥불도 피워 주었다.

공적치와 우호도를 위한 아첨과 뇌물은 베르사 대륙에서 위드가 독보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쪼르륵.

위드는 깨끗한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며 진심을 가득담은 감탄을 내뱉었다.

"워낙 흔하게 들으셨을 말이라서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는데... 이베인 님은 정말 아름다우시군요. 자하브 님이 사랑에 빠지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이베인에게 아부하면 옆에 있는 자하브와의 우호도가 오른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다 필요한 것들이지.'

어설프게 아부를 하면 사람이 가벼워 보이고 소신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십이지장을 갖다 바칠 정도로,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하면 당연히 이득이 되는 것.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이베인이 살 수 있는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아서, 물거품처럼 다시 사라져야 했다. 그렇지만 자하브와 이베인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하루였다.

-자하브의 숙원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는 당신을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자하브와의 우호도가 491이 되었습니다.

이베인이 다시 원래대로 조각품으로 변하고 나자 자하브는 땅에 파묻은 검을 꺼냈다.

"부탁이 있다고 했나?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했지? 가세. 정의롭거나 올바른 일이 아니어도 괜찮아. 어떤 일이든 자네의 부탁이라면 무조건 도와줄 테니."

"감사합니다."

자하브 노예 만들기 작전은 당연히 대성공이었다.

딱 이틀 정도의 시간이 남아서, 위드는 마판에게 급히 주문을 했다.

"고급 조각 재료들이 필요합니다."

"엘프목이나 나베목으로요?"

"아뇨. 상아나 천연 원석 같은, 구하기 어려운 최고급이 필요합니다."

싸구려만 찾던 위드였지만 조각술 최후의 비기가 걸려 있으니 최고급품을 구해야 했다.

"흠집 하나 없는 최고급을 구하려면 시간이 상당히 많이 들 텐데요."

"이틀 내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마판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세히 물어보진 않겠지만, 퀘스트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예. 성공과 실패가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요."

"으음, 이건 제가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대륙적으로 하벤 제국의 황궁 건축 등으로도 재료들이 많이 나가서요. 일단 마판 상회의 이름으로 다른 상인들에게도 도움을 청해 보겠습니다. 날짜 내로 어떻게든 구할 수 있도록 해 보죠."

마판 상회는 북부의 각 지역에 널리 퍼져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물론 마판 상회만 잘되는 것은 아니다.

북부 상인은, 낮은 세금 덕분에 큰 혜택을 입고 있는 직종이었다.

상인들은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영업을 하여 도시와 왕국을 발전시키고 큰 부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당연히 아르펜 왕국 국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위드는 상인들에게 아주 호의적이었다.

이른바 상인 우대 정책!

'나중에 쥐어짜기 위해서라도 상인들은 부유해져야 해.'

마판 상회는 북부의 모든 상인들에게 조각 재료를 구한다는 협조 요청을 했다.

보통 상인들끼리는 이런 협조 요청까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판 상회가 위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상인들은, 그때부터 물건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어디? 헬센 섬에 재료가 있다고? 가까운 곳이기는 하지만 순풍이 아니라면 시간에 맞추기는 빠듯한데. 일단 배부터 띄워!"

"로스본 강에 조각 재료들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걸 발굴하면 도움이 되겠지? 낚시꾼들과 발굴가들의 도움을 얻어야겠네."

"가몽 님이 유령 동굴로 들어가셨다더라. 조각 재료들을 구하기 위해서."

"로이스 님은 늪 속을 헤매고 다닌다던데. 니플하임 제국 도시의 폐허에서 재료를 구한다면서 말이야."

위드에게 조각 재료가 필요할 거란 추측에 북부의 상인계 전체가 들썩였다.

"이틀 내로 구해지면 좋겠는데."

그렇게 상인들이 동분서주하는 사이, 위드는 남은 시간 동안 북부를 돌아다니며 여유롭게 보내기로 했다.

원래 시험 전날에 놀아야 더 재밌는 것과 같은 이치!

바다 냄새가 풍기는 항구도시 바르나는 무역과 모험을 즐기는 유저들로 북적였다.

"여긴 시장이 아주 크군."

고래 시장, 참치 시장, 고등어 시장이 일품이었다.

바르나까지 일부러 와서 해산물들을 맛보는 유저들이 많았다.

그리고 다음 도착 장소는 벤트 성!

니플하임 제국의 벤트 성은 위드의 아르펜 왕국에 투항하여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거주하는 주민들의 수준도 높았고, 드나드는 유저들의 옷차림도 범상치 않았다.

상인이 아니라면 보통 200대 이상의 레벨의 유저들이 벤트 성에 많이 왔고, 간혹 300대 후반에서 400대의 유저들도 있었다.

중앙 대륙에서의 전쟁으로 파멸을 맞이한 명문 길드들이 많았다. 친목 모임으로 근근히 지속되기도 하였지만 해산된 길드의 유저들은 방랑자가 되었다.

그들도 북부로 오고 있었으니, 높은 레벨의 유저들도 은근히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위드가 성문으로 다가갔다.

정문 옆에 있는 쪽문은 통행을 원하는 유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위드가 향한 곳은 당연히 크게 뚫려 있는 정문!

"국왕 폐하, 누추한 이곳까지 방문해 주셔서 심히 영광이옵니다."

"고개를 들라."

벤트 성의 성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위드를 보자마자 땅에 엎드렸다.

뎅뎅뎅뎅!

성문에서는 급한 타종 소리가 들리더니, 내부에서 기사들이 뛰쳐나와서 연속으로 엎드렸다.

가히 국왕다운 위엄!

"진짜 전쟁의 신 위드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해. 친구들에게 자랑해야겠다."

유저들은 그 멋진 모습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위드의 앞에 벤트 성의 뛰어난 기사NPC들이 전부 엎드려있다. 충성도가 아주 높고 진심으로 따르기에 국왕을 향하여 기꺼이 최상의 예의를 다하는 모습.

위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구경을 온 것일 뿐이다. 그러니 기사들은 돌아가서 할 일을 하라. 치안을 단단히 지켜서 주민들이 믿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며, 또다시 아르펜 왕국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수련에 힘쓰도록 해라."

영화에나 나오는 성군으로서의 위엄!

전쟁의 시대에는 말단 귀족들에게도 굽실거리며 아부를 하였지만, 아르펜 왕국에서는 위드가 존엄한 국왕이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폐하."

"기사여, 그대의 이름은?"

"살로몬입니다."

"살로몬이여, 우선 무기점부터 가 보도록 하자."

"영광이옵니다, 폐하."

벤트 성에 방문한 실질적인 이유는 세금을 얼마나 올릴 수 있을지 탐색하기 위해서였지만, 겉보기에는 민생과 치안에 관심이 많은 국왕이었다.

위드는 무기점만 가 보더라도 대충 경제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무기점에 걸려 있는 상품들을 보면 대장장이들의 수준을 알 수 있고, 판매량을 따져 보면 고레벨 유저들이 벤트 성에서 얼마나 많이 사냥을 하고 있는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하다.

'음, 상당히 대단하군.'

벤트 성에는 뛰어난 대장장이들이 많았다.

이 주변의 던전들이 수준이 높다 보니 유저 대장장이들도 많이 온 것이다.

기사들과 전사, 사냥 파티들도 벤트 성을 거점으로(스켄본이상해서... 예측) 활동하다 보니 판매량 또한 어마어마했다.

'다만 물가가 너무 저렴하게 유지되고 있어.'

아르펜 왕국은 유저들이 늘어나는 만큼 물가가 폭등하여 살기 어려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몬스터가 많고 던전과 사냥터, 퀘스트가 널려 있는 만큼 기초적인 품목들을 직접 구하는 사람들이 상당했다.

게다가 생산직들을 적극적으로 우대해서, 유저들이 늘어나는 만큼 높아지는 식량과 광물, 무기와 방어구 등의 수요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상인들이 열심히 실어 나르는 덕분에 아르펜 왕국의 작은 마을이라 하더라도 모험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들은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식량의 효율적인 분배는 아르펜 왕국 주민들의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물가가 더 올라야 되는데.......'

위드는 무기점을 나와서 성으로 향했다.

기사들의 성!

니플하임 제국에서 건설한 성은 웅장하기 짝이 없었다.

모라타의 흑색 거성은 허름하게 느껴질 정도로, 입구에서부터 복도, 영주의 방까지도 최고급 양탄자가 깔려서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니플하임 제국의 예술품들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한 시대를 풍미하던 기사들의 무구들도 보관되고 있다.

'음, 괜찮은 장비들이 많군.'

위드는 장식용으로 쓰이고 있는 이 장비들을 꺼내서 팔 수 있었다.

물론 정말 그렇게 한다면 돈에 환장해서 기사들의 명예를 짓밟았다는 소문이 퍼지며 악명이 높아지고 반발도 만만찮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국이 침략하였을 때에는 약탈을 해서 마음대로 처분을 하지만 위드가 아르펜 왕국의 보물들을 팔아서 돈을 얻는 방식은 무리가 있었다.

위드도 그런 극단적인 방법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돈에 환장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찔려서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방법!

"지역 정보 창!"

벤트성

아르펜 왕국에 소속되어 있는 성.

국왕 위드에 대한 기사들의 충성심이 대단하다.

길고 긴 혹한의 세월도 견뎌 낸 두꺼운 성벽은 여전히 어떤 침입이라도 격퇴할 수 있을 것처럼 튼튼하다.

생활력이 강한 주민들은 사냥의 달인들이다. 검과 갑옷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병사로서 군대에 속할 수 있음.

니플하임 제국 시절부터 내려온 많은 세공품과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혹한의 세월 동안 사용되지 않은 재물들은 성의 재정을 풍족하고 부유하게 만들었음.

폐쇄되어 있던 성문을 열어 교류를 하고 있다.

현재 높아진 출생률과 이주민들로 인해 대대적으로 마을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중.

군사력 : 4,998                        경제력 : 1,421

문화 : 934                            기술력 : 677

종교 영향력 : 23 

지역 정치 : 79                        인근 지역에 대한 영향력 : 81%

구(한자있음) 니플하임 제국의 영향력 : 15.2%(영향력은 군사, 경제, 문화, 기술, 종교,인구,                                                

                                            의뢰 등의 분야와 관련이 깊음)

도시 발전도 : 199 

위생 : 64                                   치안 : 98%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강력한 자경단과 기사단으로 인해 도둑들은 발을 붙이지 못함.

기사들이 전직할 수 있는 최고의 수련장이 있으며, 고급 기마술을 익힐 수 있다.

니플하임 제국 시절에 건설된 주요 군사 건물들은 꾸준한 보수를 거쳐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마을의 영역은 성 밖으로 대대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몬스터 소탕을 위한 기사단의 순회로, 근처 지역들에 대해 군사적인 영향력을 행사함.

자유 기사들이 모여들고 있음.

주민들은 북부에 아르펜 왕국을 세운 국왕 위드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무너진 니플하임 제국의 영광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그의 믿기지 않는 모험담에 대해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무기 제작 기술과 방어구 제작 기술이 쭉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공성 무기는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서 그 제작 기술이 아직 미숙한 편.

몬스터들을 겁내지 않을 정도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아르펜 왕국의 재능 있는 기사 후보생들을 많이 양성하는 중이다. 기사들은 긍지와 충성을 최우선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니플하임 제국 검술은 본래 예리하고 날카로웠지만, 거친 세월을 지나며 강인함을 겸비하게 되었다.

식량의 자급자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식료품은 외부에서 조달함.

사냥과 몬스터 소탕을 통해서 수입의 대부분을 얻고 있음.

주민들은 상인들에 대해 긍정적이며, 시장의 확대가 이루어져서 더 많은 물품들을 보기를 원한다.

예술에 대한 관심은 미진한 편.

생존이 우선이 되는 삶을 살아왔기에 예술보다는 넉넉한 식량과 무기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어린아이들은 커서 훌륭한 기사가 되고 싶어 하며,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최근 상인들에 대하여는 약간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지역 신앙으로는 아르펜 왕국을 풍요롭게 하는 프레야와 전투의 신 티르를 믿고 있다.

특산품 : 철제 검, 철제 갑옷, 세공품, 니플하임 제국의 보물.

영토의 전체 인구 : 33,920

매달 세금 수입 : 74,006골드.

성 운영비 지출 내역 : 군사력 64%, 경제 발전 22%, 문화 투자 비용 3%, 의뢰 및 몬스터 토벌 7%, 성보수 4%.

"음, 철저한 군사 요새로군."

위드는 상업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모라타나 항구도시 바르나와는 다른 벤트 성에 만족했다.

군사력이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벤트 성에 인구가 적어서 그동안 발전이 더디고 힘들었던 거지. 이제 이주민들을 바탕으로 인구야 금방 늘어나게 될 테니......."

훈련된 병사들과 적진으로 뛰어들 용감한 기사들도 순식간에 불어나게 되리라.

물론 군대의 보유는 그만한 자금을 잡아먹는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반드시 적자가 나라는 법도 없었다. 

던전을 소탕하고 몬스터들을 물리쳐서 안전지대를 확보하여 국경을 넓힐 수 있다. 국가 공적치를 쌓은 유저들이 보상으로 기사들을 데리고 다니며 활동할 수도 있으니, 도시 하나만 있던 모라타 시절과는 쓰임새가 많이 달라졌다.

"조금 더 투자를 해야 돼. 전쟁의 시대 건물들을 지어야겠군."

위드는 벤트 성에 건물을 지었다.

국왕으로서 직접 지배하고 있는 성에 건물을 당연히 지을 수 있었다. 내버려 두더라도 알아서 확장되겠지만, 적재적소에 건물을 지으려면 개입이 필요하다.

이번에 퀘스트를 하며 봤던 켈튼 왕국과 마폰 왕국의 건물들을 지어서 완전한 군사 요새로 키우는 것이다.

건축가가 영주가 된 마을과 도시에서는 건물들의 조형미를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골목길조차도 이리저리 꼬아 놓는 경우가 있었다.

위드는 그냥 바둑판을 선호했다.

"땅만 비싸게 분양 잘되면 건축가들과 상인들이 알아서 하겠지!"

벤트 성은 군대가 있기 때문에 마을 영역이 아주 넓었다.

"미리 집들을 많이 늘려 놓을 필요가 있어."

근처의 산마다 판잣집들로 도배를 해 놓는 건 기본이었다.

이현은 고추장 불고기를 굽고 된장찌개도 끓일 준비를 했다.

"역시 큰일을 하려면 배를 든든하게 채워 두어야 돼."

퀘스트를 하러 접속하기 전에 청소도 하고 집안일도 끝마쳤다.

단지 한 가지 걸리는 면이 있다면 서윤이었다.

퀘스트를 잠깐 도와주면 되는 건 줄로 알았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위험을 무릅쓰고 옆에 붙어 있었다. 더군다나 현재는 포르투의 국왕에게 사로잡혀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음, 이런 찝찝하고 미안한 기분은... 열아홉 살 때 유치원다니는 여자아이 딸기 우유를 뺏어 먹었을 때 느꼈던 것과 같군."

그 당시에는 배가 너무 고팠고 감기에도 걸려서 몸이 안좋았다.

깜찍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막 딸기 우유를 먹으려는 순간, 이현이 말을 걸었다.

"꼬마야."

여자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왜요, 오빠? 아니, 아저씨."

"그 딸기 우유 나한테 팔아."

"싫은데요."

"200원 줄게."

"이거 600원인데요. 요즘 물가 몰라요?"

이현은 상당히 낙심했다. 유치원생이라고 해도 순박하거나 어리바리하지 않고 똑똑해진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게다가 웃어른을 향한 예의와 공경의 마음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그럼 마시고 나서 1,000원 줄게."

"자요!"

"캬아, 맛 좋다."

맛있게 딸기 우유를 다 먹고 나서 도주!

달려가던 뒤로 여자아이가 울면서 쌍욕을 퍼붓던 기억이 났다.

철없는 시절에 어쩌다 저질렀던 짓이지만 두 번 다시 행하고 싶지 않은 슬픈 추억이었다.

서윤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도와주고 있으니 그때만큼이나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선물이라도 하나 해 줄까. 어디 목걸이나 귀걸이 세트나... 아냐, 비쌀 텐데. 길거리에서 파는 것도 최소 만 원 이상일 거야.'

이현은 그래서 꽃씨를 사서 마당에 뿌려 놓았다.

'길러서 꽃다발을 만들어 줘야지.'

하지만 실속은 없는 꽃다발이라서, 그것만으로는 뭔가 약할 것 같았다.

'선물은 먹는 게 최고인데. 닭을 1마리 줄까? 아냐, 지난 번에 지골라스 다녀와서도 줬는데.'

양념반프라이드반을 포함해서, 닭도 몇 번 써먹었던 방법이다.

보신이들끼리는 아직 교배를 하려면 멀었고, 태어나지도 않은 새끼를 벌써부터 주겠다고 하면 왠지 치사하고 쪼잔한 사람 같지 않겠는가.

"음, 가방을 사 줘야겠군. 역시 여자들한테 할 선물로는 가방이 최고지."

이현도 어디선가 들은 내용은 있었다.

"어디보자, 적당한 가방이......."

서윤이 들고 다니던 가방의 브랜드를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 충격으로 몸이 굳었다.

수술실에서 심장박동이 멈췄다가 다시 뛰는 것처럼, 경직된 몸은 한참 후에나 풀렸다.

이현은 조용히 컴퓨터를 껐다.

"음, 김치나 담가 줘야겠군."

서윤은 보통 김치를 배달시켜 먹는다. 이현은 그녀가 먹을 김치들을 정성을 담아서 담가 주기로 결정했다.

"중동 쪽에서 건설 대금 결제가 계속 미루어지고 있습니다, 회장님."

"그거야... 조금 기다려 보도록 하지. 아무튼 그쪽은 나중에라도 받을 수는 있을 테니."

서윤의 아버지인 정득수 회장은 요즘 매일 일찍 회장실로 출근을 했다.

계열사들마다 이사회가 소집되고 있었고, 올라오는 보고들은 심각한 내용들이었다.

"국내 건설업 쪽은?"

"건설 경기가 갈수록 나빠지는 중입니다. 우리 회사 미분양 아파트만 1만 채가 넘었습니다. 주택 용지로 분양받은 수도권의 땅들도 사업성이 악화되어서 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땅들은 어떻게, 처분해서 자금을 마련할 방법은 마련되었나?"

"아파트 용지라서... 지어 봐야 미분양이 확실하니 다른 업체들도 가격을 낮춰 줘도 구입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축은행들이 대출 상환을 요구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호성 건설의 자금 사정으로는 대출 상환이 불가능합니다."

"회사채 만기일은?"

"내년 초에 몰려 있습니다, 회장님."

건설 쪽은 대대적인 신규 자금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가장 큰 계열사인 호성 전자의 상황도 상당히 위험했다.

"유니콘 사의 신모델 출시로 인해 우리 업체의 상품 점유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평면 텔레비전은 가격 할인을 해도 잘 팔리지 않고, 공장 가동률이 하락해서 적자가 커지는 중입니다. 작년 2분기보다 영업이익이 79%나 급감했습니다."

"가전 쪽은?"

"불황이라 제조원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수출 물량도 절반 이하로 감소했고, 고정 거래처들로부터 추가 주문도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휴대폰은 광고에 톱 배우들을 기용했는데도 판매량이 감소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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