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불세출의 전사
위드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시체를 보고 있었다.
피부는 용암처럼 이글거리고 있었으며, 이마에 돋아 있는 3개의 뿔은 위협 그 자체였다.
메타페이아의 보스 몬스터 말살의 불도마뱀 왕.
사막에서 살아가던 전설적인 존재.
하지만 위드와 부하들에 의해 막 사냥을 당하고 만 것이다.
저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특별한 가죽과 피, 뿔 등은 이제 조각조각 해체되어 상점에 팔리게 되리라.
물론 그 과정에서 흥정을 통해 가격을 높이려는 시도는 필수!
"과연 역대 최강의몬스터라고 할 만했군."
-부상이 심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생명력 4.3%
화염의 피해를 계속 입고 있습니다.
즉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합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붕대를 꺼내서 몸에 둘둘 감고 약초를 발랐다.
-완벽한 붕대 감기 기술로 출혈을 방지합니다.
상태의 악화를 막습니다.
타고난 맷집으로 부상 회복 속도가 67% 빨라집니다.
말살의 불도마뱀 왕.
위드가 직접 상대해 본 몬스터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사냥 도중에 두꺼운 벽면과 천장이 녹아서 무너져 내렸다.
깔려서 부상을 입거나 죽은 전사들만 하더라도 부지기수.
워낙 회복력이 빨랐던지라, 사막 전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덤벼들고 위드가 몬스터의 머리에 올라타서 치명적인 일격을 연속으로
터뜨리고 목을 베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싸우고 있었으리라.
"정말 간신히 잡았어."
금방 쓰러진 몬스터의 몸에서는 아직도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위드의 몸에서도 여전히 화려하게 불꽃이 일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화염 각인의 효과가 아니라, 불도마뱀 왕에 의해
옮겨붙은 특수한 불꽃! 하지만 높은 불 저항력으로 인해 더 이상의
피해를 주지 못하고 서서히 사그라졌다.
띠링!
-전설의 괴수 말살의 불도마뱀 왕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위대한 전투 대업적으로 인하여 명성이 16,782 올랐습니다
-카리스마가 7 상승하셨습니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 과감한 지휘로 통솔력이 6 상승하셨습니다.
-사막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될 영광적인 전투의 승리로, 전투에
참여 했던 모든 이들의 전 스텟이 7씩 오릅니다.
"크후후훗, 역시 이 맛이지!"
100배의 경험치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보스급 몬스터 사냥은 짭짤했다.
물론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쳐 온 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위드는
레벨에 비해서 가지고 있는 스킬이 다양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조각사로서
성장할 때처럼 공들여 골고루 스탯들을 높게 쌓지도 못하였다.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어쨋든 어마어마한 레벨!
눈빛이라도 마주치면 레베 400대 정도의 몬스터들은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기 바빴으며, 검이라도 휘두르면 불의 기운이
크게 일어나서 몰살이었다. 위드가 작심하면 도시 하나를 뭉개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사막 전사에서 승급을 하여 태양의 전사가 되었다.
세상에서 오로지 단 1명, 가장 강한 사막 전사에게만 부여되는 직업.
태양의 전사 최강 스킬, 종말의 날을 사용하면 마나가 허용하는 한 모든것을 태운다.
"아이템부터 챙겨야지."
샤샤샥!
-마스터급 재봉 아이템. 말살의 불도마뱀 왕의 두꺼운 가죽을 획득하셨습니다.
-말살의 불도마뱀 왕의 마나 심장을 획득하셨습니다.
-마스터급 조각술, 대장일아이템, 말살의 불도마뱀 왕의 뿔을 3개 습득하셨습니다.
-화염의 생츄어리로 인도하는 크리스탈을 입수하셨습니다.
"과연 이것들이 무엇일지. 기대가 되는군. 도움이 되는 물건이여야 할 텐데."
위드는 부하들을 힐끗 보았다.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나서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모습들.
던전에 들어왔던 사막 전사들은 절반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부상병들은
중간에 버리고 왔기 때문에 그들이 무사하더라도 최소한 200~300명은 넘게 죽었다.
마지막에 혼자 말살의 불도마뱀 왕을 차지하고 아이템을 독식하려니 최소한의
양심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몰래 확인해야지. 감정!"
부하들 몰래 숨어서 아이템을 확인하면 상관없어지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양심!
띠링!
말살의 불도마뱀 왕 가죽 : 내구력 125/125.
전설의 몬스터 말살의 불도마뱀 왕의 가죽.
두껍지만 매우 가볍고 신축성이 있다.
고귀한 무늬는 열을 가할 때마다 드러나며, 잘 찢어지지 않는다.
가죽에 기본적으로 화염 저항 +85% 속성이 부여되어 있다.
물리적인 공격의 피해를 88% 감소시킨다.
스킬의 레벨에 따라 추가적인 마법 저항이 부여되고, 특징이 부여된다.
제대로 가공만 한다면 불가사의할 정도의 방어력과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
마스터급 재봉재료
불도마뱀 왕의 마나 심장 : 내구력 17/17.
불의 마나가 응축되어 있는 심장.
매우 희귀한 물건이다.
섭취하는 것만으로 마나의 최대치를 1,700 늘려 주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이 3% 증가한다.
스킬 '불의 세계' 사용 가능.
여러 개의 심장을 먹을 시에는 추가적으로 얻는 효과가 점차 감소하게 된다.
요리사가 이 재료를 가지고 특별하나 요리를 했을 때에는 얻게 되는
능력이 더욱 커짐
아직 싱싱하다.
말살의 불도마뱀 왕의 뿔 : 내구력 182/196.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뿔이다.
가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궁극의 겨잊에 도달한 조각사나 대장장이라면
이를 뜻에 맞게 변형시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무기를 만든다면 어떤 갑옷이라도 꿰뚫을 수 있다.
"음, 훌륭해."
위드는 전리품이 만족스러웠다.
이런 행복함이야말로 보스급 몬스터를 힘겹게 사냥하고 얻을 수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붉은색의 기운이 감도는 크리스털!
"감정!"
화염의 생추어리로 인도하는 크리스털 : 내구력 9/10.
신비한 생추어리로 갈 수 있는 포탈을 생성하는 크리스털이다.
사용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마나를 주입해야 함.
단 1명만 통과할 수 있음.
만약 크리스털을 파괴한다면 화염의 대정령이 나타나서 사방으로
노여움의 불꽃을 발산함.
"이건 들어 본 적이 있군."
사막의 도시에서 어느 노인이 했던 말이 있었다.
-불, 물, 바람, 땅, 번개. 이 모든 것들에는 근원이 되는 특수한 장소가 있지요.
이 사막에는 불과 관련이 있는 생추어리가 숨겨져 있다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불에 타 버린 시체의 일기장에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오. 킬킬. 그 책은
아마도 모래가 덮어 버린 도시에 그대로 남아 있겠지.
찾으려고 한다면 고생깨나 할걸.
노인이 알려 준 단서에도 불구하고 위드는 귀찮아서 찾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찾을 계획은 없었다.
80일간의 사냥이 불과 4분을 남겨 놓고 있었던 것.
줄기차게 사냥으로 달려왔던 일정에 대단원의 막이 내려질 시간이었다.
"녀석들. 고생 많았다."
아이템을 확인하고 나서 부하들의 몸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크으으, 대제께서 저희를...."
"너희라면 여기까지 올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수고 많았다."
이후에 어떤 퀘스트로 이어지게 될지 모르기에 베푸는 호의!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여차하면 이놈들이라도 때려잡아서 레벨을 더 올려봐?'
위드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현재 레벨은 824.
믿고 따르던 부하들까지도 전부 해치우면 레벨이 상당히 높아질 수 있었다.
조각 생명체들은 놔두더라도, 사막 부족들 중에서 충성을 바친 겉절이들이야
죽여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아냐. 아직 이놈들이 몇 백명이나 남았는데. 나를 따라 다니면서 온갖 구박에도
버틴 놈들이라 무력이 만만치가 않아. 나도 부상이 꽤 심하니 단체로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거꾸로 당할 수도 있어. 나중에라도 이놈들을 써먹을 곳이 있겠지.
없다면 뭐라도 만들어서 부려 먹으면 돼. 새우잡이 배에라도 팔아먹어야지.'
위드는 무기를 뽑으려고 망설이던 손으로 다시 정성껏 부하들에게 붕대를 감아 줬다.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다. 이렇게 승리한 것은 다 너희 덕분이다."
"아닙니다, 대제님. 대제님의 뒤를 따를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어디든 가겠습니다. 그곳이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제 마지막 모습을 잊지 않아 주시면 영광일 것입니다."
"너희를 어떻게 나보다 먼저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너희가 아플 때마다
내 생살이 찢겨 나가는 그런 고통인데."
"대제님!"
"그래, 느드말 부족의 전사 호로타야!"
"허억! 미천한 제 이름까지 기억을 해 주시다니요."
"당연히 내 머릿속에는 너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단다!
내가 너희를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단 말이냐."
위드는 부하들의 이름을 1명씩 부르면서 격려를 해 주었다.
"달로냐, 볼로수, 크렌그래드, 아이..스미치? 흠흠, 우라쓰. 너희의 부상도 심하구나.
이리 오너라. 붕대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제 부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제님의 그리자가 되겠습니다."
"앞장서서 대제님의 적을 가르는 칼과 활이 될 것입니다."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 주니 그것만으로도 감격하는 부하들이었다.
'너 이놈 헤스티거!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팔 보호대가 바뀐 걸 보니 어디서
또 아이템 좋은 걸 주워 먹었군.'
질투와 시기로 기억되는 이름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노들레의 성장 퀘스트가 끝날 시간이 되었다.
띠링!
노들레의 성장 완료
뜨거운 열사의 땅.
노들레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났다.
힐데른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피를 원하게 되리라.
주의 :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100배에서 원래대로 변합니다.
다음 연계 퀘스트는 하루 후부터 진행됩니다.
한고비가 무사히 넘어갔지만 이후의 퀘스트는 더욱 파란만장하리라는 예감이 이미 강하게 들었다.
"무슨 의뢰가 수비게 풀리는 경우가 없어."
위드는 한숨을 쉬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들은 한번 하기도 어려운 퀘스트들을 연달아서 받아 내고, 또 그것들을 완벽하게 성공시켜 왔다.
그렇기에 그다음에는 더 어려운 퀘스트를 받는 일들이 당연하게 이어져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위드는 부하들을 챙겨서 오아시스가 있는 사막 도시 라호스로 돌아왔다.
던전을 떠날 때에는 당연히 말살의 불도마뱀들에게서 나온 가죽과 뼈, 이빨, 발톱까지 몽땅 챙겨 왔다.
던전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텅 비어 있었다. 화염의 정화 속에서 생성되는 말살의 불도마뱀이기에
놈들이 다시 나타나려면 최소한 1년 정도의 시간은 걸릴 것이다.
이번 사냥에서 살아남은 사막 전사들은 총 741명!
산전수전 다 겪은 부대는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불도마뱀의 던전에서 대단한 경험을
겪었기에 전체적으로는 훨씬 강해져 있었다.
"전일아, 여기가 라호스가 맞느냐."
"예. 제 생각에는 맞는 것 같습니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사이에 라호스의 모습은 굉장히 많이 변해 있었다.
주민들이 흙을 구워서 지은 수만 채의 붉고 흰 주택들이 모래 언덕을 끼고 세워져서
아름다웠으며, 형형색색의 성벽도 우아하기 짝이 없었다.
중앙 대륙의 왕국들에는 울창한 푸른 숲과 멋진 산에 어울리는 귀족들의 성과 도시
건축물의 주거 문화가 있다. 재료들은 돌을 쪼개거나 깎고, 나무를 많이 이용한다.
라호스는 그보다는 대중적이면서도 사막의 모래와 어울리는 흙의 도시였다.
단단하고 아늑한, 생명이 움트고 살아나는 대도시의 느낌!
사막 전사들의 도시이다 보니 외부의 침략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높지 않은 성벽은 수비보다는 도시의 경계를 나누는 역할을 했고, 성문이
있는 자리도 그대로 뚫려 있었다.
구름 조각술로 인하여 비가 풍부하게 내리면서 오아시스는 맑은 청녹빛 호수로 변하고
인근에는 강줄기도 흐른다. 꿀과 젖이 흐르는 라호스라는 도시 별명이 있었으며,
상인들과 유목 농민, 예술가 들이 모여서 항상 붐볐다.
"돈 아깝게.. 예술에 쓸 돈이 있으면 차라리 내가 횡령을 해야 하는데."
위드는 예술에 투자하는 걸 마땅치 않게 여겼지만, 서윤은 용병 길드를 통해 얻은 수익금을
예술에 아낌없이 재투자했다.
열정적인 춤과 노래, 조각, 미술 등은 사막지대의 독창적인 문화로 정착되었다.
"대제님의 방문이다!"
"주민들은 모두 나와라!"
위드가 부대를 끌고 방문을 하자, 주민들은 왕의 행차를 접한 것처럼 앞다투어 길거리로
달려 나와서 공손히 땅에 엎드렸다.
사막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
지위를 얻거나 선정을 베풀지도 않았지만, 사막에서 가장 강대한 자에게 경배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실제로, 세력이 큰 부족들 간의 묵히고 묵힌 분쟁을
위드가 힘으로 종식시킨 적도 있었다.
"너희가 매번 싸우니 내 지켜보기 심히 귀찮구나."
"대제님, 저들이 먼저 80여 년 전에 우리가 키우는 양 떼를 강탈해갔습니다."
"아닙니다. 이곳은 우리가 가꾼 목초지. 저들이 먼저 넘어왔던 것입니다.
여기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끄럽다. 이유는 필요 없다. 내 눈에 거슬리니, 계속 분쟁을 일으킨다면 너희
부족 중 하나는 사막의 모래가 되리라."
"살려 주십시오!"
"저희가 잘못하였나이다."
"잘못을 안다면 그에 대한 배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양떼와 목초지를 내놓아라.
너희의 관계가 좋지 않으니 그 재물은 내가 대신 받겠노라. 싫다면 죽어라."
"고, 공정하신 판결에 감사하옵니다."
위드는 가볍게 힘을 과시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뜯어냈다.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를 완료하고 나서 이 시간대의 물건들을 가지고 되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돈은 필요했다. 좋은 무기와 장비, 스킬 북 등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추가로 '뇌물의 추구자'라는 호칭이 붙기는 했지만 상관없었다.
"뭐 어때. 내 자신이 떳떳하면 되지."
관행이나 상부상조라는 미덕으로 승화시키는 적극적인 뇌물 수수 정신!
도시에서 서윤과 만나기로 했지만 여자들은 눈을 제외하고는 천을 둘러서 얼굴을
가리고 이씩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위드는 서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어디야?
-분수대예요.
-금방 갈게.
서윤은 도시의 분수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위드는 쌍봉낙타에서 내려서 파라오의 가면을 벗었다.
태양 빛에 번쩍번쩍 빛나는 대머리!
그를 맞아 서윤이 쓰고 있던 차도르를 벗자, 사막의 단정한 복장은 지적인 느낌과
함께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불합리하게도, 똑같이 퀘스트가 진행되는데도 그녀는 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수대를 등지도 위드를 향해 웃고 있는 서윤의 얼굴은 바가지를 듬뿍 씌우기 위해
텔레비전에 나오는 비싼 화장품 광고 모델처럼 화사하게 빛났다.
여자들이 피부 미용에 돈을 쏟아붓는 이유를 그녀가 증명하고 있었다.
"우린 안될거야, 아마..."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러. 하수구로 들어가면 살 수 있을거야!"
도시에서 화가들이 붓과 물감을 챙겨서 부리나케 달아났다.
보통 도시라면 몬스터로부터의 안전지대였지만 이들은 암살자들에 의하여 쫓기고 있었다.
"어디쯤 와?"
"몰라. 안 보이는데. 하수구에 도착했다. 이젠 살 수 있을...커억!"
하수구에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독을 바른 보라색 단검을 휘두루는 암살자!
"역시 도망치는 놈들이 생각하는 곳은 뻔하군."
"닥쳐, 이 헤르메스의 개!"
"유언으로 알겠다."
서걱!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하벤 제국 내의 치안을 지키기 위하여 무자비한 암살자 부대를 운용했다.
"낙서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치안의 악화가 심각한데요."
"의심 가는 놈들은 모두 죽여라. 도시의 화가들은 특별히 감시를 하도록."
화가들은 물론이고 저항군, 엠비뉴 교단 할 것 없이 모조리 암살 허락!
조금이라도 하벤 제국의 치안을 혼란스럽게 하는 행동을 하면 즉결 처분을 했다.
황궁 광장에서 유저들의 항의 시위도 벌어졌지만, 전투마차를 포함한 군대를 동원하여
몰살시켰다. 여론이 나빴지만 대륙 최강대국으로 중앙 대륙의 패권을 차지한 하벤 제국은
유저들의 반발을 힘으로 억눌렀다. 심지어는 바드레이 황제 일므의 칙령도 내려졌다.
1. 하벤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 사형
2. 몰락한 왕국의 저항군과 관련하여 그들을 돕는 퀘스트를 하면 사형
3. 영주를 비방하거나, 제국에 해가 되는 낙서를 하면 사형
4. 엠비뉴 교단과 관련되면 사형
5. 치안을 악화시키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즉결 처분. 사형
황제 바드레이가 적는다.
하벤 제국은 앞으로 베르사 대륙을 통일하여 반복되어 오던 지긋지긋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펴화를 가져오려고 하는 바.
기득권을 잃고 패배한 왕국의 유저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던 길드의 유저들이
제국의 정당한 통치를 방해하기 위한 음해 공작으로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있다.
잘못된 판단으로 이들을 돕거나 가담한 자는 앞으로 영원히 하벤 제국의
모던 시설물과 사냥터에서 추방될 것임.
일반 유저들은 그래도 대다수가 참고 하벤 제국에 눌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베르사 대륙에서 고향은 아주 중요했다. 익숙한 도시에, 동료들도 있다.
NPC와의 공헌도와 친밀도를 올려놓은 모험의 기반 도시가 되는 것이다.
남들이 헤르메스 길드를 비난하더라도, 원래부터 하벤 왕국에서 시작했던 유저들은
이미 적응했기에 그리 나빠졌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냥터 입장료와 비싼 물가, 과중한 세금. 이런 사정들이야 다른 왕구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날로 강성해지는 제국에서 활동하는 이득도 분명히 있었다.
하벤 제국이 확장되면서 소속 유저들은 자연스럽게 활동 영역이 넓어지는 효과도 얻었다.
게다가 하벤 제국은 가장 먼저 국가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다른 길드들이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장소들보다는 위험하지도 않고 신경 쓸 것도 덜했다.
나중에 헤르메스 길드의 박해를 피해서 북부로 떠난 유저들도 꽤 되었지만, 그래도
제국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갔다.
"칙령? 이제는 장난 아니다."
"뭐야, 이게 다 하벤 제국에 잘못 보이면 그냥 다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잖아."
"독재국가가 따로 없네."
유저들은 불만을 가졌지만 그래도 밖으로 표출하지는 못했다.
하벤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이 그들을 위에서 찍어 눌렀다.
더군다나 대륙 연합군마저도 철저히 패배하고 난 이후가 아니던가.
하벤 제국은 계속 점령지를 늘려 가고 있었으며, 또한 약탈로 쌓이는 재정을 바탕으로
군대의 규모도 계속 키워 나갔다.
사람들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외면하면서 조용히 사냥과 모험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파비오의 손 아래에서 불꽃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금속과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
대장장이 스킬의 숙련도가 고급 99%에 도달하였다.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검을 아무리 만들어도 숙련도는 더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구하기 어렵다는 이리듈라스 금속을 얻어서 제련을 해도 숙련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단순 생산의 한계인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봐야 되겠군."
사실 파비오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임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최고의 대장장이란 결국 평범한 철검 몇 자루를 제작하였느냐가 아니라 대륙 전체에
이름을 날릴 만한 전설의 명검을 탄생시키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대장장이 마스터.
불과 금속의 지배자가 되려면 그에 걸맞은 위업을 쌓아야 하리라.
숱한 유저들이 누군가 최로로 스킬을 마스터하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파비오는
진짜 마지막 단계를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파비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고의 검 그리고 완벽한 방어구. 좋은 물건은 그걸 쓸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가야겠지.
혼란스러운 대륙을 통일하는 최초의 영웅, 그리고 누구도 쌓을수 없는 업적의 모험을
하는 자에게 그에 걸맞은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어 주어야 대장장이로서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야"
그는 대장간에 있으면서도 세상이 변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드워프 왕국 토르는 아직까지 외부의 침략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있다.
드워프는 왕이나 지배 귀족의 문화가 없었고, 타협을 모르는 호전적인 드워프 전사들은
적들과 싸우기 위한 도끼를 다루는 데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악룡 케이베른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쉽게 정복당할 땅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이 하벤 제국에 의하여 정복된다면 드워프들 역시 자연스럽게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본인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휩쓸려 버리게 되는 소수 종족의 운명.
토르가 아닌 더 넓은 세상에서 활동할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대륙의 변화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헤르메스 길드와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되겠군. 더 늦기 전에 선택을 내려야지."
파비오뿐만이 아니라 대장장이 후배들까지 있는 아이언로드 길드 전체가 하벤 제국의 정복을
돕기로 했다. 정복 전쟁 와중에 얻는 광석들은 드워프 대장장이들에 의해 무기와 방어구로
가공될 것이다. 아이언로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조용히 정복 전쟁을 지켜보던 수많은
길드들이 하벤 제국으로의 이전을 추진했다.
저항을 포기하고 하벤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페일, 수르가, 이리엔, 로뮤나, 화령, 벨로트, 메이런, 마판까지 모두 모였다.
"에효.. 다들 고생이 많으셨군요."
벨로트가 측은하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드라마를 촬영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로열 로드에 접속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사이 다른 사람들의 몰골은 다들 말이 아니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거나, 얼굴은 핼쑥해지고 갑옷이 깨지고 더러워져 있었다.
수리를 하면 말끔해질 수 있다지만 그동안 어떤 퀘스트를 하다가 돌아온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보람도 있었는데요, 뭐. 이제야 손맛이 제대로예요!"
다크 엘프처럼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수르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주먹질에 맞으면 일정 확률에 의해 상대방이 번개더미에 휩싸이게 된다.
번개 치는 계곡에서 몬스터와 싸우면서 얻은 스킬!
페일도 늘 옆에 기대 놓는 활이 바뀌어 이썽서, 적지 않은 소득을 거두었음을 알려 주었다.
"아, 차 향기가 참 좋네."
로뮤나는 얼굴까지 가리는 로브를 착용하고 그냥 묵묵히 앉아서 차만 마시고 있었는데,
평소에 떠들기 좋아하는 그녀의 성격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아주 크게 실패를 했거나 제대로 한탕 했거나 둘 중 하나!
'아직까지 신경질을 안 부리는 걸 보니 성공했구나.'
'뭐라도 건졌겠어.'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여겼다.
화령은 옷차림이 인디언 아가씨처럼 변해 있었는데, 새로운 춤을 익히고 있었던 탓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다들 자리에 앉아서 인사말을 나누고 나서, 마판이 묵직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은 마판의 초대로 모라타에 있는 그의 저택에 오게 된 것이었다.
"저기, 제가 여러분을 이렇게 모시게 된 이유는..농부로부터 헐값에 사게 된 책이 한권 있습니다.
그걸 읽어 보다 보니 뭔가 심상치가 않아서요."
마판은 배낭에서 책을 꺼냈다.
책장의 귀퉁이가 뜯겨 나간 고서적으로, 제목은 '할메른산의 발견물'.
"서장을 제가 조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다지
많은 곳을 돌아다녀 보지 못한 모험가이다. 하지만 이버네 소개할 곳만큼은 상당히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북부에 와서 내가 처음 한 일은.. 도망 다니기였다. 몬스터들은 무섭고, 나를 믿고 지켜 줄
동료들은 없다. 이 책을 쓰는 지금도 동굴 속에 숨어 있지만 이것도 모험에 의한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이지? 제발 곰의 냄새가 아니길 바란다. 오늘 밤에 곰의 든든한 저녁
식사가 되어 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맛이 없다. 샤벨 타이거에게 팔을 물렸지만
곧 침을 흘리며 다른 먹잇감을 찾아서 떠나 버렸다. 내가 몸에 바르는 특수한 비법이 통한 까닭이다.
...중략...그리하여 길을 잃고 헤매던 중에 포비아느 나무들이 우거진 곳으로 가게 되었다.
깊고 어두운 나무들 사이, 그 근처에서 반지 하나를 줍게 되었다.
니플하임 제국의 명기사,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아이반슈타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반지였다.
그 주변을 더 돌아다녀 보면 무언가 발견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가지고 있는 식량이 떨어져서
나는 그냥 돌아 나오기로 했다.
어두운 밤에 갑자기 마주치는 굶주린 몬스터는 아주 위험하기 때문이다.
"아이반슈타인이 누군데요?"
수르카가 질문을 던졌지만, 사람들은 조용히 말이 없었다. 그들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게 생칙이었다.
"니플하임 제국의 병사들을 데리고 이종족들을 물리치고 몬스터들의 침입을 셀 수도 없이
격퇴하였다는 기사입니다. 대도서관에 가서 아이반슈타인의 기록들도 좀 살펴봤는데,
그가 최후에 사라지기 전에는 기사의 황동판을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니플하임 제국의 4대 보물 중의 하나죠."
"기사의 황동판에 어떤 효과가 있는데요?"
"아쉽게도 그것까지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찾아볼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요?"
"네, 그렇죠."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마주쳤다.
과연 이 책에 나온 이야기만 믿고 할메른 산까지 갈 것인지!
멀기도 하고, 근처에 몬스터들의 서식지도 여럿 뚫고 지나가야 했다.
줌니으로부터 퀘스트를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단서를 얻어서 모험을 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가죠."
"가겠어요."
"어디든 못 갈까요."
중요한 결정이지만 저마다 쉽게 판단을 내렸다.
설혹 모험에서 예측할수 없는 어려움을 겪더라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가 좀 힘들더라도, 위드 님은 이거보다 훨씬 더 고생하고 있을 거야.'
'위드 님이 깨는 퀘스트들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위드와 어울리면서 덩달아 간이 커져 버린 그들!
일반 퀘스트들 정도로는 긴장도 잘 되지 않았다. 가끔씩 위드가 일감이 있다고 부를 때만이
정말 떨리고 흥분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