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전쟁의 시대 속으로
꼬꼬댁, 꼬꼬.
이현은 닭에게 모이를 주었다.
"맛있게 먹어라."
건강하게 자란 닭들이 병아리와 함께 모이를 먹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키우는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다 보면 행복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역시 난 정말 좋은 주인이야."
닭들의 운명은 비참한 경우가 많다.
알에서 부하되면, 달걀을 낳을 수 없는 수탉들은 병아리 상태에서 그대로 폐사시켜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리고 암탉들은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사료를 먹고
매일 달걀을 낳다가, 2년 정도가 지나면 죽는다.
동물들의 삶에 대해서 알수록 너무 슬프고 안타까울 때가 많다.
아마 그래서 동물을 보호하자는 운동도 있는 것이리라.
이현도 닭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중에 맛있게 잡아먹어야지."
양념과 프라이드를 반반씩 섞어서 배부르게 먹었을 때의 기쁨!
마당도 청소하면서, 최근에 조금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던 집안일을 즐겼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퀘스트는 대륙 전체의 시간이 이현이나 서윤이 접속했을 때에만 흐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의 여유는 부릴 수가 있지만, 정상적인 베르사 대륙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보니 한가롭게 진행하면서 아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저녁부터 다시 접속을 해야 되겠지. 룰루루!"
매번 일이 끊이지 않지만 자기 집이라는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집안일을 하는 이현이었다.
"돈을 벌자. 쑥쑥 벌자. 지난번에는 예금을 했으니 이번에는 땅을 사야지. 어느 곳이 개발이 될까.
고속도로, 전철역이라도 하나 들어와 주면 대박이라네."
큰일을 앞두었거나, 기분이 좋을 때에 나오는 흥겨운 노래!
이현이 일을 하는 모습을 멀리 떨어진 건물의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무리가 있었다.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게 살 만해졌군."
"형님, 털면 제법 나오겠는데요. 사채 계약서라도 하나 찍어서 만들까요?"
"큰형님이 알아서 잘 하실 거다. 우리 일은 그저 놈을 잘 지켜보는거야."
명동의 사채업자들!
그들은 전쟁의 신 위드가 이현이라는 걸 알고 근처에서 관차랗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워낙 주목하고 있고, 또한 대중적인 인기도 있기에 건드리기에 만만치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한 계획,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을 파서 걸려들게 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불법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 모르기에 정보를 모으고자 이현의 주변을 계속 감시했다.
-띠리리리릿!
사채업자들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들이 있는 건물의 주변 하늘에는 9개의 미세한 작은 점들이 반짝이며
떠다니고 있었다. 최신형 스텔스 무인 항공기들!
유병준 박사의 인공지능이 보낸 일종의 감시용 항공기들이었다.
탐지 전파를 발사하여 사채업자들이 하는 말은 물론이고 생체반응, 행동 등을 천분의 1초 단위로
감시했다. 유사시에는 소형 항공기에 탑재된 미사일을 발사해서 사채업자들을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사채업자들은 이현을 직접 감시하는 것뿐 아니라, 명동의 본사에서는 이현의 가족 관계 등을 파악하며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할머니와 여동생이라. 양로원에 있는 늙은 노인네는 쓸모가 없을 것 같고. 여동생의 경우에는
인질의 효과가 있겠군."
"여동생과의 사이가 끔찍하게 좋다고 하니 납치를 하면 우리의 뜻대로 써먹기가 편하겠습니다, 실장님."
"신중해야 해. 자칫하다가는 일이 커져서 언론에 알려질 수도 있고, 만의 하나 경찰이 수사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져."
"조용히, 그러면서도 우리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확실히 처리하는 편이 좋겠지요. 그동안 벌어 놓은
돈도 꽤 있을 테니 사채 계약을 맺는 편이 유리한데 말입니다."
"재산 목록을 확인해 보니 부근 일대의 땅을 상당히 많이 사 두었답니다, 실장님."
그리고 당연히 이곳에서도 벌과 파리를 가장한 소형 안드로이드들이 정보를 보으고 있었다.
얼마 전에 유병준 박사는 인공지능에게 사채업자들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치워 버려. 다시는 내 귀에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처리해.
인공지능은 사채업자들의 행동에 따라서 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한 최적의 판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론이 나왔다.
띠리릿!
-위험수위 높음. 정상적인 대화로는 해결이 안 됨. 적극적인 처리 대상.
그날부터 명동의 사채업자 조직에는 일이 정신없이 터졌다.
"뭐라고요? 조사국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정당한 공무 집행을 하고 있는데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는 이야기요.
당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네가 이럴 수가 있어? 지금까지 가져다 바친돈이 얼마인데.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돈 먹은 만큼은 해야지!"
-당신네들이 어디의 누구인지 나는 들어 본 적도 없고 만난적도 없소.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우린 모르는 사이이니 앞으로는 이런 일로
연락하지 맙시다. 또 연학라면 이후로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음을 명심하시고.
달칵!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국세청과 검찰 특수부의 조사.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뇌물을 받던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은 도움을 달라는 요청에
한꺼번에 안면 몰수를 했다.
"후원금이라고? 허허허. 떽! 이 사람을 보게.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불법 후원금을 조성하고, 또 내가 받아 왔단 말인가! 좋은 말로 경고하는데,
밖에서도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다가는 크게 당할 수 있다는 사실 명심해 둬야 할 걸세!"
"나 권재혁이, 의원 식당 밥만 16년을 먹은 사람이야! 너희가 지금 감히 나를
협박하는 거야? 이 대한민국에서 매장 당하고 싶어?"
공권력에 의해 명동 바닥에서 상당한 입지를 다져 온 신진금융이 밑바닥부터
흔들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건...이건, 갑자기 이렇게 될 수는 없다."
한진섭은 처음에는 경쟁 파벌에서 일을 시작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잡고 있던 모든 끈이 끊어져 있었다.
정치인, 검찰, 경찰, 국세청.
이건 도저히 신진 금융의 영역을 노리는 일개 사채 조직이 움직여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자료들부터 정리하자.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포함해서 모든 자료를 폐기해."
"하지만 이 장부들은 10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데요."
"증거를 없애는 게 우선이야."
압수 수색에 대비하여 장부와 컴퓨터, 서류 등을 처리했다.
사무실을 지키고 능력 있는 변호사들을 구하기 위한 자금도 적지 않게 소모했다.
대한민국의 법은 가진 자에게 관용과 배려를 베풀기 때문에 그 점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신진 금융의 대외적인 모든 영업 활동은 불법이 아닌 정상적인 부분만을 남겨 놓았다.
"이것들이 무슨 영문이지?"
"자금을 대 준 어르신들이 움직여 주신 게 아닐까요?"
"그랬다면 어떤 말씀이라도 있었을 텐데 아무 연락도 없다. 오히려 우리한테 자금
회수를 하고 흔적들을 지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않나."
"방송에서는 우리 일이 별로 나오지 않고 있는데...으외로 사회적인 파장이
적어서 묻혀 버린 걸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
끝까지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 채권자에게는 인간으로서 벌여서는 안 될 일도
과거에는 일상적으로 많이 저질렀기에, 적발되면 끝장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 정신없이 증거들을 없애며 엿새 정도가 지났다.
압수 수색을 나오더라도 이제는 찾을 만한 자료들이 없어졌다.
신진 금융에서는 준비들을 끝낸 만큼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검찰은 기다릴 여유를 준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군."
사법부가 신속하고 강하게 움직이지 않는 점에 있어서 대한민국에서
영업을 하는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인공지능의 계획의 일부!
-1단계 완료.
-2단계 시작
그날 저녁 한진섭과 신진 금융의 중요 인물들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집이나 회사에서, 그리고 길거리와 공중화장실에서 혼자 있는 사이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아주 캄캄하고 작은 방 안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감옥이 연상될 정도로 좁은 공간에 침대와 오물을 처리나는 통, 텔레비전, 그리고
식사를 하라는 의미인지 진공포장된 채로 잔뜩 쌓여 있는 보리 빵이 있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문득 예전에 영화에서 봤던 남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딘가에 갇혀서
15년간 군만두를 먹고 살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날부터 일주일 동안, 보리 빵과 수돗물만 마시면 살게 되었다.
"누군가.. 반드시 나를 찾아 줄 거야. 조직원들 그리고 경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사채업자들은 날이 갈수록 부드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자신을 포함한
조직원들 전체가 몽땅 갇혀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경찰들도 사채업자들에 대한 조사를 종결지었다.
뒤늦게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서 사무실을 급습해 보니 이미 모두 자취를 감춘 후였다.
휴대폰 기록이나 다른 흔적들을 살펴보니 범죄인인도가 되지 않는 외국으로
밀항선을 타고 사라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로부터 대략 열흘 전, 인터넷 커뮤니티 지식천에 글이 올라왔다
제목 : 사채업자들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무엇이 좋을까요?
작성자 : AI.BERSA
자꾸 귀찮게 구는 사채업자가 있습니다.
돈을 이미 다 갚았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는데요. 말로는 설득이 안 될 것 같은데 이놈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냥 묻어 버리면 좋겠네요. 다만 갯벌에 묻어야 함.
-에이, 농담이죠? 진짜라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세요.
-신고해도 안 됨. 신고해서 되면 진작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음.
-사채업자들은 교도소 다녀와도 똑같죠. 나와서 더 괴롭힐 수도 있어요.
글 쓴분, 조심하세요.
-그런 놈들은 영영 회개가 안 돼요. 그냥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 시키는게 최선임.
-올드보이처럼 가둬 놓고 평생 군만두만 먹여야 됩니다.
-찬성!
-진리임.
-나도 찬성!
-군만두는 비싸요. 사채업자 주기에는 아깝잖아요. 그냥 잔반이나 줘요.
-근데 배달하는 사람도 귀찮고요, 오토바이 기름값도 낭비되죠.
그리고 그 후에는 사채업자들을 가둬 놓고 무엇을 먹여야 좋을지에 대한
음식 목록이 주르르 떴다.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방법들이 열거된 이후에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건 보리 빵과 참치 통조림이었다.
보리 빵과 참치 통조림을 5년씩 번갈아서 지급하는 것이다.
위드는 로열 로드에 접속했다.
태양의 전사로서 824라는 레벨을 가진 무지막지한 능력자.
그 순간 다시 흐르게 된 대륙의 시간!
사막 도시 라호스는 아직 별들이 창창히 빛나고 있는 서늘한 밤이었다.
하루 동안의 여유를 서윤과 그냥 도시를 구경하고 전갈과 낙타구이 정식을
먹는 것으로 보냈기 때문에 얼마 후면 날짜가 바뀌게 된다.
"음, 조금 떨리는군."
노들레로서 폭발적인 성장을 해 왔기 때문에 이어지게 될 퀘스트도 약간은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방심할 수는 없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스케일 때문에 고생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퀘스트도 절정으로 흐르면서, 제대로 뭔가를 이루어
내야 할 것만 같은 예감!
서윤도 곧 이어서 접속을 했다.
"일찍 왔네요."
"응. 좋은 밤이군."
위드와 서윤은 돌무더기에 앉아서 다음의 퀘스트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사막의 저녁이지만 너무 춥지도 않고 분위기가 아늑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를 하면서
함께 보낸 시간이 길었다.
'적당한 퀘스트만 나와 준다면.. 조각술 최후의 비기를 얻고 나서 헤르메스
길드의 공격을 막아 내고,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서 가정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서윤한테는 가..방도 사 주면서,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도 해야
될 것 같은데.'
김치가 막 끓고 있는 국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위드는 앞으로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로열 로드의 상황이야 걷잡을 수 없도로고 흘러가고 있다.
비단 전쟁의 시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다른 명문
길드들의 싸움은 종국으로 치달아 갔다.
'결국 그놈들이 대륙을 먹을 것 같아.'
하벤 제국의 중앙 대륙 점령이 기정사실화!
아르펜 왕국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는 있지만 그렇게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위드의 인기와 신화를 바탕으로, 그리고 북부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유저들이
좋아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사실 정복당하고 나면 부질없는 게 아니던가.
하벤 제국이 정면공격을 감행해 와 승리를 거둔다면, 그리고 풀죽신교와 같은
단체가 어떤 유언비어에 의해 흔들리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벌써 헤르메스 길드의 첩자들이 북부 대륙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었다. 중앙 대륙에서의 싸움이 마지막으로 흘러가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엠비뉴 교단과 북부다.
동부의 로자임 왕국, 브렌트 왕국은 엠비뉴 교단에 의해서 거의 파괴되었고,
서부는 크게 의미를 둘 만한 나라가 없었다. 남부는 원래 인구 자체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위드의 모험으로 인해서 급격하게 번성을 하고 있다.
위드는 어제 휴식을 취하면서 인터넷을 하며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지.'
남부가 발전했다고는 해도 로열 로드에서 가장 번화하고 유저들이 탄탄한 중앙
대륙의 우월함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사막 도시들이 커지더라도 하벤 제국의 군대에 의해서 하나 둘 점령되다 보면
결국 그건 위드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바드레이 좋은 일.
'결국 내가 한 모든 일들이 바드레이를 위한 것들이 아닐까. 남부와 북부를
키워서 진수성찬을 차려서 입에 넣어 주는 거지.'
어쩌면 인생의 주인공 역시 바드레이일지도 모른다.
무신으로 추앙받으면서 이미 한 번의 전투도 그가 승리하지 않았던가.
대륙 연합군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헤르메스 길드를 막을 세력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위드의 자격지심이 불타올랐다.
'그놈이 나보다 나은 것도 별로 없는데. 막상 보니까 키도 한 10센티 정도밖에
안 큰 것 같았어. 내가 170인데 남자 키 180정도면 요즘에는 별루 큰 키도 아니지.
암! 그리고 얼굴을 봤을 때.. 곱고 귀하게 자란 데다 교육도 많이 받은 것 같던데.'
강렬한 눈빛과 깔끔하게 정돈된 이목구비, 엘리트의 전형 같은 바드레이의 외모.
'리더십도 상당하고..음, 난 리더십을 별로 없지. 예전 학교 다닐 때에는
그냥 적당히 빌붙어 살았으니까. 나이도 제법 있어 보이던데.. 넓은 주택과
좋은 차, 그리고 결혼도 했겠지. 은행 예금도 엄청나게 많고, 소위 말하는 있는 집
자식일 거야.'
생각이 깊어질수록 적대감보다는 부러움뿐!
현실적으로 바드레이와는 경쟁자가 되지 말고 그의 부하가 되었어야 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실컷 챙겨 먹으면 좋지 않겠는가.
'인생이 활짝 피는 거였는데.'
기회를 놓치고 아쉬워하는 앞잡이의 정신!
그렇게 바드레이를 부러워하고 있을 때, 위드와 서윤의 눈앞에 영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깊고 어두운 음침한 동굴!
"챠크젤이여,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오다니, 포르투에서의 일이 실패하였는가?"
"흑마법에 필요한 재료들을 충분히 모았으니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사람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최소한 둘 이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동굴 깊은 곳까지 울릴 정도로 힘이 있었다.
"데슨은?"
"죽었다."
"흘흘, 애지중지 키운 제자였는데 아까운 일이로군."
"이용 가치가 다해 가던 참이었다. 내 손으로 처리하지 않은 것뿐이지."
포르투의 국왕 이름이 데슨이었다.
"제물은?"
"도망쳤다. 하지만 마족을 강림시켜서 그 힘을 빼앗기 위한 계획은 아직
수포로 돌아간 게 아니다. 대륙 전체를 수색해서라도 희생앙을 모으고 다시
시도할 것이다. 충분한 희생양을 구한다면 마족을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돕도록 하지. 싸우고 죽이는 정쟁의 시대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다."
길고 긴 여운을 남기며 영상은 천천히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넓고 거대한 붉은 황무지.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곧 새의 시선에 따라서 화면이 앞으로 이동했다.
무너지고 허물어진 성벽의 잔재를 넘고, 추악하게 생긴 마물들이 우글거리는
장소를 지나쳤다. 시커먼 물이 흐르는 강에는 종류를 알기 힘든
여러 종률의 뼈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신전이 나타났다.
높은 감시탑에는 인간이 아니라 켄타우로스처럼 반인반수의 마물들이 활을
들고 경계를 섰다. 중앙부에서는 사람들이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높이의 탑을
계속 쌓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신전의 정중앙에는 높이가 200미터는
넘을 듯한 동상이 보였다.
12개의 팔을 가진 동상!
위드는 영상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엠비뉴다!'
또 엠비뉴 교단!
위드와는 정말 지긋지긋한 악연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었다.
'왜 또 나한테 나타난 거야. 나 말고 다른 놈들, 특히 바드레이나 좀 괴롭히지.
엠비뉴 교단까지도 바드레이 말고 나만 괴롭히다니, 이놈의 인생은 진짜 재수도 없구나.'
엠비뉴 교단과 엮일 때마다 편하고 시원하게 풀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이는 엠비뉴의 신전은 규모가 보통이 아니었다.
동상이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건물들이 있는 대도시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까지 연결되고 있는 탑, 마물들을 생산하는 건물, 영혼을 팔아서
힘을 얻는 제단도 있었다.
훈련장에서는 어린아이와 여성을 가리지 않고 광신도들이 눈에 혈안이 되어서
무기를 휘둘렀다.
생명체들, 짐승이나 곤충은 광신도들에 의해 잡혀 와서 엠비뉴의 제단을 거쳤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몸집이 일그러지고 말을 잘 듣는 마물들로 변해 갔다.
이곳은 엠비뉴 군대의 생산 기지이며, 악의 소굴이었다.
'웬지 느낌이 안 좋아.'
화면은 다시 중앙의 동상 주변으로 가까워졌다.
"신도들이여, 이 타락하고 잘못된 세상을 정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의지와
힘을 모았다."
어떤 중요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듯, 커다란 체구의 대사제가 동상 앞에서 연설을 했다.
그가 크게 외칠 때마다 수십 개의 청동 항아리에 담겨 있는 붉은 액체가
폭발적으로 솟구치며 끓어올랐다.
땅에 엎드려 있는 수많은 인간들이 일제히 답했다.
"우오오오오!"
"엠비뉴 신이여,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소서."
묵직하면서도 살벌한, 무언가가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
"엠비뉴 신께서는 우리에게 대답하셨다. 파괴하라, 파괴하라, 모든 것을
파괴하라! 너희의 노력이 나에게 닿는다면 힘을 주리라!"
띠링!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엠비뉴 교단에서는 탑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탑이 구름을 뚫고 하늘까지 도달한다면 그들은 엠비뉴 신의 의지와 권능을
얻어 더욱 강한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탑의 완공까지는 197일 16시간 남았습니다.
엠비뉴 교단에 복종하는 인간들이 등에 돌을 지고 한없이 높아져 가는
탑으로 걸어갔다. 종종 힘이 다하여 비틀거리다 쓰러져 목숨을 잃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면 다른 광신도들이 돌과 시체를 가져가다 탑에 그대로 쌓았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세상, 꿈과 희망을 먹고 자라나야 하는 미성년자가
봐서는 안 될 지극히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대사제가 지팡이로 땅을 내려찍으며 외쳤다.
"엠비뉴 신께서는 한없이 자비로운 분이시다! 위선자들의 세상을 물리치고,
완전한 무의 세계를 열게 해 주시기 위해 그분의 종속을 우리게에 보내 주셨다!"
"오오, 엠비뉴 신이시여!"
"잔혹한 분이시여, 저희를 벌해 주소서!"
북소리가 급하게 울리면서 광기가 신전 전체를 지배하였다.
신도들은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입에 거품을 물고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대사제의 옆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어마어마한 형체!
길고 날렵한 몸, 펼치면 100미터가 넘을 만큼 웅대하기 짝이 없는 한 쌍의 날개
그리고 위엄으로 가득한 얼굴.
가장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생명체.
드래곤 아우솔레토였다.
고대의 시대.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려는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아우솔레토는
증오와 광기라는 불안정한 감정만을 갖고 태어났다.
다른 드래곤들조차도 아우솔레토와 가까이하지 않았다.
아우솔레토는 성체가 된 이후에 오크들을 조종하여 평화로운 엘프의
숲을 태우고 인간 세계를 침략했다.
나중에는 본신의 힘으로 직접 전쟁에 뛰어들기까지도 하였지만 다른 드래곤들과
신의 힘을 빌린 인간 성직자, 하이엘프들에 의하여 봉인되었다.
그리하여 붙게 된 이름이 혼돈의 드래곤 아우솔레토.
엠비뉴 교단에서 봉인을 해제하고 혼돈의 드래곤을 손에 얻기 위해
투입한 물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제들이 스스로의 영혼과 육신을 희생하고, 기껏 모은 엠비뉴의 성력을
아우솔레토의 봉인을 해제하는 데 사용했다.
이제 아우솔레토의 육체에는 어떠한 제약도 없어졌다.
드래곤 아우솔레토는 마치 석상처럼 날개를 접은 채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다운 묵직한 분위기와 위압감은 말을 하는것보다도 더 했다.
드래곤의 무력이랑 악룡 케이베른을 통해서도 가끔 드러난다. 하루아침에
산맥 전체를 불태우고 소멸시켜 버리는 대파괴의 현장을 만들어 낸다.
드워프들에게 케이베른은 넘을 수 없는 사나 그 자체였다.
인간들로서도 아직까지 드래곤은 범접하지 못할 존재, 아무리 인원이 많더라도
드래곤을 사냥감으로 생각하진 못한다.
실제로 대규모의 인원이 드래곤 레어로 접근한다면 마법에 걸린 몬스터
군단이 일어나서 1차로 막을 것이다.
평범한 몬스터와는 다르게 드래곤은 복수를 아는 존재이기에, 공격을 한 길드나
왕국은 두고두고 후환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엠비뉴 교단은 드래곤 중에서도 강했던 혼돈의 드래곤 아우솔레토의 봉인을
찾아서 꺼낸 것이다. 횃불들이 일렁일 때마다 아우솔레토의 몸에는
음영이 지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엠비뉴 신께서 우리에게 내려 준 드래곤의 영혼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힐로인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신성한 축복을 받은 어린 아기들이 필요하다."
"오오오, 엠비뉴 신의 눈과 귀가 되어 구하겠습니다."
"더 죽이고 파괴하라. 그리하여 드래곤의 영혼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깨긋한 아이들을 데려오라!"
광신도들은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환호했다.
"으음."
영상을 보는 짧은 시간 동안 위드는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다.
'남들은 로열 로드에서 적당히 놀면서 즐겁게 잘 지내는데 왜 내게는 자꾸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대륙의 평화나 엠비뉴 교단의 음모 같은건 전혀
관심도 없는데.'
어릴 때, 열두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지하도에 앉아 있던 점쟁이가 그의 얼굴을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크게 쉬며 말해 왔다.
"쯧쯧, 만 명의 몫은 하겠구나."
그때 이현은 발길을 멈추고 그 점쟁이에게 말뜻을 물었다.
"제가 앞으로 만 사람의 몫이나 되는 큰돈을 버는 건가요?"
"아니야. 만 명이 할 일을 혼자 해야 돼. 관상을 보면, 꼬이고 꼬이고 꼬여서
흙탕물은 다 모여들 거야."
"설마요."
"그걸 헤쳐 나가려면 보통의 고생으로는 안 되겠지. 흘흘, 먹구름이야,
먹구름. 세상의 험한 일들은 다 몰려오겠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아무래도 그 점쟁이가 제법 용한것 같았다.
영상이 끝나고 위드는 잠깐 현실도피도 했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드래곤은 얼굴 마담이고, 그냥 고블린이나
소탕하고 말겠지. 암, 바드레이만으로도 무거운 짐인데 엠비뉴 교단에 혼돈의 드래곤까지
짊어져야 하다니, 그럴 리가 없어.'
띠링!
세상을 위한 길
노들레는 사막에서 자신의 힘을 일깨웠고 이제 힐데른의 저주를 풀기 위하여 중앙
대륙으로 건너간다. 하지만 중앙 대륙은 여전히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왕가들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원한과 욕심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대륙 최대의 사교 집단 엠비뉴 교단!
그들은 총본영에서는 대륙을 파괴하기 위한 병력을 결집시키며 대전쟁의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혼돈의 드래곤을 뜻대로 부리기 위해서는 크고 맑은 영혼의 씨앗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앞으로 닥치는 대로 어린 아기들을 납치할 것이다.
영혼의 씨앗 10만 개가 모이게 되면 아우솔레토는 깨어나게 된다.
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성자 아헬른은 종족을 넘어서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엠비뉴 교단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무모한 계획을 실행에 옮겨 죽임을 당하기 전에 만나야 한다.
정해진 기간 내에 아헬른을 만나지 못하면 힐데른의 몸에서 마족이 깨어나게 될 것이다.
난이도 :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
퀘스트 제한 : 남아 있는 시간 3개월.
본인이나 힐데른,아헬른의 사망 시에는 퀘스트 실패.
주의 : 노들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퀘스트가 끝났을 시에는 대륙이 그만큼의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마족의 깨어남, 혼돈의 드래곤의 지배, 엠비뉴 교단의 세력 확대가 연속된
퀘스트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으음!"
위드는 침음성을 삼켰다.
"솔직히 드래곤 정도가 나올 수도 있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복권을 사면 당첨이 안 되는데 왜 이런 안 좋은 예상은 정확히 들머맞는단 말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거창하게 혼돈의 드래곤과 싸워야 하는 건 아니다.
드래곤은 깨어나지 못한 상태이고, 엠비뉴 교단을 습격하기 전에 아헬른만 만나면 된다.
"근데 그게 끝은 아니겠지."
물론 일이 그렇게 간단히 진행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유치원생들이 읽는 동화의 엔딩처럼, 멋진 왕자를 만나서 신데렐라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마무리될 리가 없다.
그 뒤로 맨날 남편의 불륜에 시부모와의 다툼, 시누이의 구박, 말 안 듣는 자식
등으로 고생하며 살지 않겠는가.
깊은 수렁에 발이 빠져든 것처럼 결국에는 아헬른의 동료들과 함께 엠비뉴 교단과
적극적으로 싸우게 될 것이다.
"전쟁의 시대에서 엠비뉴 교단의 세력은 어마어마하군. 드래곤까지 깨운다면
정말 말할 것도 없겠지."
위드는 역사서에서 노들레와 힐데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찾아내지도 못했던 점을
떠올렸다. 또한 전쟁의 시대에 이렇게 대단한 엠비뉴 교단의 준동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대륙의 피해 없이 전부 아헬른과 노들레의 모험으로 막아 냈기 때문이겠군.
그 임무가 나한테 이어지게 된 거고."
엠비뉴 교단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겪어 본 사람들만이 안다.
원래의 시간대에서도 하벤 제국을 제외한 다른 지역들에는 엠비뉴 교단의 신도들이
상당히 많이 퍼져 있었다.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고, 수만 명의 광신도 군대들이 돌아다닌다.
독버섯처럼 자라나서 베르사 대륙을 뒤덮으려고 하고 있는 상태다.
만약 위드가 퀘스트를 실패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강력해 지고 있는 엠비뉴 교단에
큰 선물 두가지, 탑과 혼돈의 드래곤을 안겨 주게 되리라.
이는 수많은 유저들에게는 재앙과 같은 일이었다.
"뭐, 그렇게 된다고 해도 어차피 나야 손해 볼 건 없지만."
도덕심으로 철저히 중무장한 영웅들과 위드는 기본적인 생각 자체가 달랐다.
욕이야 먹거나 말거나!
어쨌든 간에 깨어날지 모를 마족도 그렇고 엠비뉴 교단의 경우에도, 주로 사건이
벌어질 장소는 중앙 대륙이다.
이 땅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나쁜 것들은 몽땅 벌어진다고 해도, 형용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는 건 아마도 중앙 대륙의 왕국들이 아니겠는가.
특히 대륙 연합군을 격파하여 최고의 성세를 구축하고 있는 하벤 제국도 그 여파로
인하여 얼마나 망가지게 될지 모른다.
마족과 엠비뉴 교단.
이 둘 모두를 상대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드가 퀘스트를 실패한다면 그다음에 이 사태를 감당해야 할 사람은 헤르메스 길드와
바드레이다 되리라. 이제야 입가에 맺히는 한 줄기 안도의 미소.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 퀘스트를 실패하더라도 배는 안아프겠군. 묵은 체증이 확 풀려 버리겠어."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전략적인 치밀한 사고를 바탕으로 정책들을 시행해 나갔다.
풍부한 자원, 충분한 생산 거점 마련, 주민들을 쥐어짜 내서 넉넉한 재정 확보,
군사시설 고급화, 도로를 통한 이동망 개선.
라페이를 중심으로 한 지휘 체계는 경영과 전략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으로 돌아갔다.
"하베스크에 군대 4만 파견. 14일까지 점령 가능."
"롬 지역에서는 진군을 멈추고 병력을 재정비하라. 전장 지휘관의 보급 요청은?"
"아직 없었습니다."
"숲을 통과해야 하니 마법 무기 여유분을 보내 주도록."
"보급로를 확보하여 19일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방대한 군사 지원을 바탕으로 적들보다 우위를 점했다.
대륙 연합군은 루비돔 산맥에서의 패전 이후로 병력을 수습하고 다시 지휘 계통을
가다듬어서 도전을 해 왔지만 연전연패!
경험 많은 병사들의 사망은 전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소속 길드들의
이탈로 세력도 감소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만만한 몇몇 길드에 동맹 신청을 했다.
말이 동맹 신청이지 실제로는 하수인이 되라는 의미였다.
"승산도 없이 하벤 제국에 대항하느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투항하고 들어가면 제국 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고 합니다만."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더라도 하벤 제국의 편에 서야 됩니다. 그들의 군대에 속해서
공적을 세우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나을 수도 있어요. 카멜롯 길드는 점령군의
선봉에서 활약하고 나서 성을 2개나 얻었다는군요."
연합군의 와해로 하벤 제국의 대륙 점령 속도에는 한층 탄력이 붙었다.
제국군이 진군을 하면 싸워 보지도 않고 백기가 내걸리는 경우고 흔히 있었다.
하벤 제국에 대한 인식이 안 좋기 때문에 치안을 확보하는 일에 다소의 시간이
걸릴 뿐, 파죽지세로 대륙을 점령해 나갔다.
그라디안 왕국의 완벽한 점령, 노튼 왕국 함락, 네스트의 주요 도시 장악!
방송국들은 이 소식을 곧바로 전하였다.
"하벤 제국군을 본 드레곤 성에서는 성문을 열고 투항 의사를 밝혔습니다."
"며칠 전까지 결사 항전의 의지를 보이던 네피아드 요새에 백기가 내걸렸습니다.
하벤 제국군과의 싸움을 포기한 모양이군요."
방송국들은 하벤 제국의 위세를 더욱 크게 띄워 올려 주었다.
제국군에게는 무적의 군대, 패자의 군대라는 새로운 별명도 붙었다.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에서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는 군대를 둘로 나눈다. 점령군을 일차로, 전투 자월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후속 병력은 예비대로 편성하여 점령 지역에 대한 제국화 작업을 진행한다."
영토가 넓어지다 보니 정복 사업보다도 관리가 더욱 큰 부분을 차지했다.
대륙 정복 작업은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연합군은 크게 뭉쳐서 바드레이와
중앙군에 맞서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토르 왕국 아이언로드의 가세는 하벤 제국에 확실한 날개까지 달아 주었다.
명장의 반열에 오른 드워프 대장장이들이 만든 무기는 전장에서 위력을 뽐냈고,
방어구들은 일반 병사들이 화살에 입는 피해를 거의 무시할 정도로 줄여 주었다.
"토르 왕국은 아이언로드를 내세워서 내부적으로 흡수할 방법을 고려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엘프들은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나?"
"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종족적인 성향 때문인지 잠잠합니다."
엘프들은 성향상 도시를 건설하거나 성채를 짓지 않는다.
큰 숲에서 많이 몰려 살기는 하지만 그들끼리 지배권을 다투진 않는다.
그런 분위기로 인하여 엘프 종족을 선택한 유저들도 전쟁은 남의 일처럼 여겼다.
중앙 대륙이 전란에 휩싸이고 나서도 엘프들은 자유로웠다. 명문 길드들이 지배하던
도시와 성채에서도 굳이 세력을 이루지 않는 엘프들은 건드리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엘프 유저들이 많이 늘어나기도 했고, 이젠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엘프들은 계속 내버려 두실 겁니까?"
"아니. 엘프의 숲 중에서 드래곤이나 수호령의 보호를 받지 않는 곳들을 골라서
군대를 진입시킨다."
"숲이라서 엘프들에게는 천연의 요새가 됩니다."
엘프들은 나무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으며, 높은 자연 친화력을 이용해 정령들을
동료로 부린다. 휘어지는 화살로 인하여 숲 속에서는 레인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도끼병들을 차출하여 나무들을 모두 베어 버리면서 진군하도록 하고, 저항이 심할 경우
숲을 전부 태워 버려도 좋다. 후한 보상을 내걸고 악명을 감수할 수 있는 지원자들을
모집 하는 게 좋겠지."
"알겠습니다. 조치하겠습니다."
하벤 제국이 일으키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엘프의 숲으로도 향했다.
"휴우, 여기까지 오니까 조금 살 것 같네."
"조심해서 가자. 사람들도 믿을 수가 없어."
초보 유저 30명가량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면서 숲 속에서 나왔다.
그들은 지금은 망한 도시 크레아의 유저들이었다.
딱 이틀 정도 만에 접속해 보니 마지막에 종료했던 분수대 주변은 전부 폐허로 변해 있었다.
건물들은 불타거나 무너진 흔적들만 남았으며, 거리에는 시커멓게 변한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온통 뒤덮은 먹구름으로 인해 저녁처럼 어둡고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아우우우우우우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울고 있는 늑대.
가히 공포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삭막한 분위기였다.
"이쪽이에요. 오세요!"
"늑대들이 냄새 맡기 전에 빨리 숨어요."
뒤늦게 들어온 크레아의 유저들은 먼저 있던 사람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미처 피난 가지 못했거나 마찬가지로 뒤늦게 접속한 이들이었다.
"여기가 왜 이렇게 변했어요?"
"모르셨구나. 엠비뉴 교단이 싹 쓸고 갔어요."
"아, 나 무기점 상점 주인이 내건 퀘스트 끝내고 보상 못받았는데."
"포기하세요 상점 주인은 식인종으로 변해 버렸으니까요."
"여관집 종업원은요?"
"지금 살아남은 주민 자체가 몇 명 안 돼요. 그나마도 광신도로 변한 자들이 대부분이고요.
퀘스트는 다 망했다고 보면 되니 그런 데 미련 가지지 말고, 살기 위해서는 서둘러서
엠비뉴 교단이 장악하지 않은 다른 안전한 도시로 빠져나가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룹이나 파티가 그렇듯이 이곳에서도 워리어가 대장 역할을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 레벨이 230 정고든요. 늑대들은 아무것도 아닌데...."
"전 300이 넘어요. 근데 엠비뉴 교단이 차지한 지역에서는 몬스터와 마물의 성장 속도나
힘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생명력이나 체력은 그대로이더라도 힘이 세고 독까지 있어요.
그리고 싸우는 중에 광신도들이 몰려들면 끝장이에요."
"밤이 되면 도망갑시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크레아의 유저들은 계속 접속을 해 하나 둘 합류했고, 그들은
우물 밑의 공간에 숨었다.
"엠비뉴 교단이 북쪽으로 올라갔으니 남쪽으로 가요."
"그렇게 합시다. 다들 소리 내지 말고요."
저녁이 되고 나서 30명 정도의 무리가 엠비뉴 교단과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거나 비틀거리면서 걸어 다니는 광신도들이 나타날 때마다
바위 뒤에 모습을 숨겼다.
스릴 만점의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엠비뉴 교단에 대하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이렇게 되어도 되는 거야?'
'아, 베르사 대륙에 평화는 언제 찾아올까.'
유저들은 최대한 은밀하게 이동하여 안전지대로 빠져나왔다.
도시 일렉.
"엠비뉴! 엠비뉴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파괴하십시오. 주변에 있는 모든 걸
죽이고 파괴해야만 스스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던 지금까지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광기와 분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응징을 하여야 합니다.
엠비뉴의 이름을 믿으십시오!"
하지만 이곳에도 엠비뉴 교단의 신봉자들이 도시를 배회하고 있었다.
도시의 병사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잡아서 가두었지만, 또 새로운 신봉자들이 어디선가
계속 나타난다.
"엠비뉴 교단의 군대가 이쪽으로도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래."
"그래? 그럼 어디로 가지?"
"살아남으려면 어디로든 가야지."
유저들은 엠비뉴 교단을 피해서 계속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