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37권 : 1) 들모레 요새의 불행 (239/520)

달빛조각사 37권

1) 들모레 요새의 불행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는 베르사 대륙의 역사를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칼을 든 자가 정의인 전쟁의 시대.

사막에서 전사로 성장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엠비뉴 교단의 군대를 막아 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

위드는 검술의 마스터, 세계를 구하는 용사라는 칭호까지 얻을 정도로 지니고 있는 무력도 엄청났지만, 당당하게 싸울정도로 고지식하진 않았다.

"인생은 열심히 공부하고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만 성공하는 게 아니지. 적당히 타협도 해 가면서 잔머리를 잘 굴려야 돼!"

인생은 실전!

위드는 쌍봉낙타를 타고 들모레 요새의 성벽 위에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에 의해 마폰 왕국군과 베이너 왕국군은 크게 놀랐다.

얼마 전까지도 전투를 벌였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막 군단의 대제왕이 아닌가.

"죽여라."

"끼요옷! 엠비뉴를 거역하는 역적들의 내장을 파먹을 것이다."

무엇보다 위드를 쫓아서 엠비뉴 광신도, 괴물 군대가 요새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엠비뉴의 군대는 머릿수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마폰 왕국과 베이너 왕국의 동맹국 병사들, 사막 군단에 비하면 적다고 할 수 있는, 고작 30만!

전쟁의 시대 왕국들이 조금 무리를 한다면 동원할 수 있는 규모의 병력이다.

그렇지만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인간 병사 수백 명 정도는 아침, 점심, 저녁을 배부르게 잘 먹고 나서 야식으로 잡아먹을 수 있는 커다랗고 이상하게 생긴 괴물들만 5만이 넘는다.

키가 30미터가 넘어 요새의 성벽을 그냥 넘어올 수 있을 정도의 청동 거인도 1,000명이나 되었다.

엠비뉴의 축복과 암흑의 오라를 받은 광신도들은 인간 기사들을 두 손으로 잡고 그대로 찢어 버릴 수 있었다.

이렇게 그나마 정상적인 병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각종 대형 괴물들!

수십 미터씩 늘어나는 혓바닥으로 땅의 인간들을 잡차애서 먹고, 산성 침을 아래로 내뱉는다.

전설에 남아 있는, 하늘을 나는 대형 거북이 바라테스.

거북이들의 위에도 엠비뉴의 정예 궁수들이 5,000명씩 나눠서 타고 화살과 투석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엠비뉴의 군대 중에서도 징벌의 사제, 극악의 기사단이 무서운 것은 그들에게 목숨을 구걸하거나 투항하면 바로 이성을 상실한 엠비뉴의 광신도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

종교재판관, 주교 들은 신성력을 바탕으로 심판을 내린다.

엠비뉴가 버린 존재로 낙인을 찍으면 온갖 저주가 괴로움 속에서 죽어 가게 된다.

"인간들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죽이고, 죽여라."

"하염없이 지긋지긋한 고통을 느끼게 해 주리라."

"엠비뉴를 위하여 전진하라!"

위드를 뒤쫓아 온 청동 거인들과 비행 생명체에 타고 있는 궁수들의 화살 공격들도 요새로 집중되었다.

수만 발의 화살이 들모레 요새의 성벽 위로 날아왔다.

위드의 사막 군단을 토벌하기 위해 모였던 마폰 왕국군과 베이너 왕국군은 어쩔 수 없이 엠비뉴 교단을 막아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는 저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기사들이 요새를 공격하는 적들을 향하여 힘껏 외쳤지만, 단순하고 파괴밖에 모르는 엠비뉴 교단이 사정을 봐줄 리가 만무했다.

대화가 조금도 통하지 않는 최악의 상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장!"

"저들이 요새를 함락하려고 합니다."

"어느 쪽이든 빨리 공격 허가를 내려 주십시오!"

병사들은 위드에게로 화살을 쏴야 할지 당장 성벽 아래로 몰려오고 있는 엠비뉴 교단의 광신도와 괴물부터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슈우우우우우우우!

청동 거인들이 던지는 거대한 돌덩어리들은 바람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날아와서 성벽을 강타하면서 무너뜨리고 있었다.

들모레 요새가 아무리 절벽을 끼고 있는 천혜의 지형에 위치해 있고 마법과 순수한 은의 강으로 인해서 보호를 받는다고 해도, 이런 파상 공세를 오래 버틸 수는 없다.

하늘에 떠 있는 비행 군단에서 쏘는 화살들은 성벽의 궁수 들을 향하여 직접적으로 쏟아졌다.

 - 요새 보호 마법. 바람의 영역, 성대한 방패, 강철의 벽이 발동되었습니다.

마법 방어진들이 발동되면서 화살들을 차단하고, 청동 거인의 돌덩어리와 투창 공격을 약화시키는 화려한 효과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청동 거인들의 돌덩어리들은 마법 방어에도 불구하고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뚫고 들어와서 성벽을 부수기도 했다.

"요새를 점령하는 적들을 향하여 공격하라!"

마폰 왕국의 지휘관이 참다못해서 국왕이 내린 검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렸다.

"발사!"

"적들을 물리쳐라!"

"국왕 폐하를 위하여!"

마폰 왕국과 베이너 왕국의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벽에 갈고리를 던지고 올라오는 엠비뉴 교단의 광신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공격이 우선 그들에게 집중된 것은, 아무래도 가만히 있는 위드보다는 엠비뉴 교단이 훨씬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때를 맞춰서, 눈치를 보고 있던 위드는 더 크게 고함을 질렀다.

"엠비뉴 교단이여, 이것 보아라. 존경해 마지않는 베이너 국왕 폐하께서 군대를 움직여 너희를 벌하고 있다!"

그러자 성벽 아래에서 광신도들의 외침이 들렸다.

"이교도들을 죽여라! 엠비뉴를 받들지 않는 자, 끝없는 고통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그냥 들어 주기만 해도 충분했다. 딱히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절묘한 호응.

"크흠, 내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베이너 국왕 폐하께서는 엠비뉴 신을 향해서 차마 전하지 못할 정도의 쌍욕을 하셨다. 특히 밤일이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아주 짧다던가."

"베이너 국왕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라!"

위드와 엠비뉴 교단의 광신도들은 죽이 척척 잘 맞았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광경!

얼마나 미웠는지, 들모레 성에 있는 수비 병력이 위드에게로도 화살을 쏘았다.

티디팅!

그러나 화살들은 위드의 갑옷에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 화살 공격으로 인하여 경미한 피해가 생깁니다.

  높은 방어력과 맷집으로 인하여 생명력이 3 감소합니다.

 - 화살에 연속으로 적중되었습니다.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정도의 미약한 공격입니다.

   갑옷이 이를 완벽하게 막아 내고 역으로 튕겨 냅니다.

워낙에 높은 생명력을 가진 데다 좋은 방어구들로 무장하고 있으니 일반 궁수들의 화살 따위에 피해를 입을 리가 만무했다.

위드는 병사들의 공격을 관대하게 용서해 주기로 했다.

"뭐, 객관적으로 봐서도 나처럼 나쁜 짓을 하면 조금은 욕을 먹어도 돼."

여전히 최소한의 양심은 가지고 있었다.

모든 수비병들이 위드를 향해서만 공격을 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귀찮은 정도의 위기가 될 수 있었다.

마폰 왕국과 베이너 왕국의 영웅 로하드람과 안드레 그리고 동맹군의 영웅들까지 가세하여 위드를 죽이려고 덤벼든다면, 또한 엠비뉴 교단에서도 만사를 제쳐 두고 위드에게만 집중 공격을 한다면 영락없이 빠져나올 곳이 없는 막다른 길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엠비뉴 교단의 성향을 이용하여 양측에 싸움을 붙이고, 잠깐이지만 최고의 자리에서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신경을 써 둬야 하는 로하드람과 안드레는 각자 성벽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엠비뉴 교단을 막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 사리사욕을 위해… 아니, 대의를 위해서 마폰 왕국과 베이너 왕국은 망해야 돼. 여기서 보다가 수비병들이 잘 싸우고 있으면 쓸어버려야 되겠군. 그리고 엠비뉴 교단이 너무 쉽게 요새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도와주기도 해야지.'

양쪽을 오가면서 이득을 보겠다는, 얍삽하면서 추잡하지만 효과는 절대적인 전술이었다.

역사에 주로 나오는 위대한 전략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자 장점이 무엇이던가.

바로 상대방의 뒤통수를 얼마나 절묘하게 잘 치느냐였다.

순간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뒤통수를 강타해야만 좋은 전술이다.

"역시 난 나쁜 놈이야."

위드는 스스로를 향해서 칭찬까지 했다.

괜히 도덕심 때문에 사고를 경직되게 했으면 사막 군단을 데리고 엠비뉴 교단과 정면으로 싸웠을 것이 아닌가.

적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되지 않은 상태인 만큼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었을 테고, 이기든 지든 피해는 막심했을 것이다.

놈들이 들모레 요새를 파괴하는 것을 보면 적의 전력도 파악할 수가 있고, 공격 방법을 결정하기에도 좋았다.

역사를 통해서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

영웅 심리야말로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사는 데에는 손해였다.

"돌격!"

"신도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라."

"파괴의 순례자들이여, 죽음을 위하여 전진!"

광신도들은 강철 기둥을 들고 뛰어와서 들모레 요새의 성문을 부수려고 했다.

순수한 은이 흐르는 강 때문에 성향이 악에 완전히 치우친 마물들과 괴물들은 우물쭈물하며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에 돌덩어리들과 흙더미를 채워 넣고 있었다.

지옥의 문에서 튀어나온 마물들은 불규칙적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며 화살과 마법 공격을 뚫고 접근하여, 수비병들을 낚아채어 하늘로 끌고 갔다.

마법 보호 장막이 있기에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낄텐데도, 마물들은 인간 사냥을 계속했다.

"캬하핫, 이 맛이군."

"머리를 씹는 맛을 그리워했지."

지옥에서 온 놈들에게 인간들이 얼마나 맛있는 성찬이겠는가.

아마도 악마들이 키우는 마물들에게는 관광지의 맛집을 찾아온 느낌일 것이다.

들모레 요새는 삽시간에 마물들로 인해서 아비규환!

전쟁의 시대에 철벽의 성으로 명성을 떨치던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하지만 엠비뉴 교단의 군대를 오래 막아 내기는 힘들 것 같았다.

★★★★★★★★★★★★★★★★★★★★★★★★★★

"아… 시작되었습니다."

"엠비뉴 교단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런 것이죠. 우리가 생각했던 진짜 전투다운 전투는 이제 벌어질 것 같습니다."

방송국들의 중계 경쟁이 화끈하게 펼쳐졌다.

어느 채널을 돌리더라도 모든 방송국들이 들모레 요새의 전투를 생중계로 내보냈다.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을 박탈한다는 논란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방송국들이 생중계에서 빠질 수 없는 사정도 있었다.

위드의 모험을 중계하지 않는 방송국!

최신 유행에 뒤처진 이류 방송국의 느낌이 날 수 있다.

위드의 모험과 베르사 대륙의 운명까지 걸린 중요한 이벤트에 자신들의 방송국만 쏙 빠져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간대에 다른 프로그램을 방송해서 시청률이 좋다는 보장도 없었고, 어찌 되었건 위드만 내세우더라도 광고를 다 팔 수 있었기에 방송국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위드의 모험이야말로 가장 인기가 있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좋아하기에 채널 선택권과 연관된 비판도 극히 적게 받는 편이었다.

방송중계에 나오는 화면에 보이는 엠비뉴 교단의 어마어마한 군대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병력의 숫자 자체는 로열 로드의 전쟁 규모에서 여러 차례 나왔던 정도이지만, 단일 퀘스트에서 이렇게 격렬한 공성전은 극히 드물다.

산악처럼 우뚝 서 있는 청동 거인들이 땅을 울리면서 들모레 요새를 향하여 걸어가고, 비행 생명체들과 그것에 타고 있는 궁수들로 하늘까지 온통 뒤덮여 있다.

"이…교도들을 심판하라."

"참을 수 없는 고통의 형벌을 내리리라."

로열 로드의 유저들, 시청자들도 엠비뉴의 군대가 보이는 위력 앞에 전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드가 모험을 하고 있는 전쟁의 시대가 아닌 현재에도, 엠비뉴 교단의 전력은 무섭게 팽창을 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벤 제국이 중앙 대륙을 먹어 치우고 있다고는 해도, 엠비뉴 교단에 의해 파괴되는 지역들도 만만치가 않았다.

지금 보이는 것만이 전부도 아니었다.

마녀들에 의해 열린 지옥의 문을 통하여 여전히 마물들이 무더기로 떨어지고 있다.

아직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하늘도 종말을 의미하는 듯이 온통 검붉게 변해 갔다.

베르사 대륙의 운명을 건 결전에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KMC미디어에서는 신혜민과 오주완이 진행을 맡았다.

방송국 진행 요원만 1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큰 팀을 이루어서 생방송 중계를 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압도적인 영상이네요. 오싹하면서도 기대가 일어나는데요. 오주완 씨,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아, 요즘 안티들을 정말 열심히 모으고 계세요."

"제가 그랬나요? 그만큼 손에 땀을 쥐고 봐야 할 정도의 전투라서 그렇습니다. 위드의 무력이야 이미 퀘스트 도중에 나온 몇 번의 영상을 통해서 보인 바가 있습니다만, 저 엠비뉴 교단을 상대로는 과연 어떻게 싸우게 될까요? 항상 기대를 넘어서는 장면들을 보여 주었기에 이번에야말로 위드를 위한 최적의 자리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사막의 대제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할 수 있는 한판 승부가 시원하게 펼쳐지겠죠."

"제가 저기에 있다면 얼마나 막막하고 무서울까요. 그런데 사실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이 정도의 고난이 없으면 위드의 모험이 아니라른 말도 있어요."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위드가 어려운 퀘스트를 시도할수록 시청자들과 진행자인 우리는 정말 행복하니까요."

방송국 관계자나 시청자들조차도 위드가 고생을 하는 걸 이제는 자연스럽게 여겼다.

뭔가 사고만 쳤다 하면 대륙 전체가 떠들썩해지는 스케일!

1명의 개인으로서 로열 로드에 이토록 많은 변화와 관심을 가져오는 사람이 앞으로도 또 나타날까 싶었다.

"그런데 오주완 씨, 위드와 엠비뉴 교단 사이의 전쟁에 끼게 된 두 왕국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부분만큼은 제가 확실하게 설명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아마도 요새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크겠죠."

"그러면 마폰 왕국과 베이너 왕국은 정말 딱하게 되었네요. 어머, 지금 성문이 격파되었어요."

"과연 바로 부서지는군요! 엠비뉴의 광신도들이 계속 밀려오고 있습니다. 전투는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기에, 잠시 광고를 보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전투에 직접 참가한 위드는 전설의 프로스트 보우 요르푸시카를 무장한 채로 엠비뉴의 광신도들을 향하여 연속으로 화살을 쏘았다.

단순한 얼음 화살이 아니라, 좁은 지역 전체를 얼리면서 작렬하는 화살!

성문 근처에 모여 있는 광신도가 한거번에 수십 명씩 떼죽음을 당했다.

"이것이 대량 학살의 재미로군. 그래도 아쉬워. 저곳에 잡템이 잔뜩 떨어져 있을 텐데 말이야."

요새의 수비병들은 이제 위드를 공격하지 않았다.

당연히 적대적인 사이로서 죽여야 하는 관계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당장은 그들을 돕고 있었으니 공격의 우선순위에서는 밀려난 것이다.

엠비뉴 교단의 잔인함과 그로 인한 공포는 그만큼 컸다.

물론 그들이 물러가기라도 한다면 두 왕국의 집중 표적이 될 테지만, 그것도 살아남은 후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청동 거인들은 아예 요새를 남김없이 파괴해 버릴 작정인지 커다란 돌덩이를 거침없이 내던지고 있었다.

요새의 보호 마법이 어느 정도 위력을 반감시켜 주기는 한다지만, 느리게라도 날아와서 성벽에 부딪쳤다.

게다가 마법의 효과도 무한정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잠시 후 순수한 은의 강이 흙으로 메워지면 마물과 광신도 들이 더 많이 몰려와서 좁은 성문만이 아니라 성벽을 타고 올라오게 되리라.

어찌 보면 요새의 진정한 위기는 그때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공포가 전염되었다.

지옥의 문을 통해서 나온 마물들이 인간들을 마구 납치해서 먹어 치우거나, 혹은 강제로 육체를 빼앗아서 전투를 했기 때문이다.

위드는 아트록의 함성을 터트렸다.

"엠비뉴 교단은 잔인하여 우리를 살려 주지 않을 것이다! 살고 싶다면 끝까지 싸워라!"

마폰 왕국군과 베이너 왕국군은 적이었기에 지휘력을 높여서 명령을 내리는 효과는 없다.

하지만 사기에는 약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아, 안 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가자. 살려면 지금 도망을 치는 게 나아."

"우리 왕국은 이미 끝장이야. 안젤라. 그녀에게 가리라."

마물들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크게 떨어졌고 전투력까지 나빠졌다.

사기가 아예 바닥을 치게 되면 저마다 살기 위해 도망을 치다가 내분까지 일어나면서 군대가 사상누각처럼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다.

지휘관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군대의 전투력도 크게 차이가 났다.

"놈들에게 죽으면 우리의 영혼까지도 짓밟히게 되리라. 이 땅에 정착하여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여 일구어낸 땅이 불모지로 변할 것이고 도시는 폐허로 변하게 될 것이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저들에게 끌려가서 잔혹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

마폰 왕국의 병사들은, 사기는 올랐지만 다소 어리둥절했다.

"저 야만족의 수장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그러게 말일세. 지금 하는 말들은 모두 저자가 저지른 짓이 아닌가?"

위드는 잠시 자신과 사막 군단이 한 행동을 잊어버렸다.

전투 노예들을 붙잡고, 약탈하고, 도시를 불태운 정복자의 행동이나 엠비뉴 교단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당사자의 관점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난 나쁜 짓을 조금 해도 어쨌든 착하니까 괜찮아. 이 정도야 뭐, 인생 살다 보면 다 한번씩 저지르는 거 아닌가?'

긍정적인 자기 합리화!

현재 전쟁의 시대에 있는 모든 주민들은 위드와 서윤이 퀘스트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나중에 위드가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바람에 날리는 티끌처럼 사라지게 되리라.

그렇기에 양심의 가책이 덜한 채로 실컷 더 분탕질을 칠 수도 있었다.

사실 평화로운 시대로 왔다면 위드의 행동들을 미래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하지만 전쟁의 시대 주민들은 만약 위드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매일 싸워서 죽이거나 죽는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발전보다는 정체, 혹은 멸망의 시기.

파괴하고 복구되는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 의미 없는 싸움을 지속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의 하벤 제국도, 위드의 사막 군단이 중앙 대륙을 휩쓸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피해가 생각보단 적었다.

'흠, 병사들이 제대로 싸운다고 하더라도 엠비뉴의 군대와의 전력 차이가 너무 극심하게 나는군. 이렇게 쉽게 밀리면 곤란한데.'

위드는 성벽에 올라서 적을 향해 활을 쏘는 와중에도 전투 전체를 중립적인 관점에서 살펴야 했다.

궁극적인 그의 목적은 들모레 요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막 군단은 미리 계획한 대로 위드가 시선을 잡아끄는 동안 멀찌감치 물러났다.

멀리서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면 엠비뉴 군대를 강타하리라.

믿음직한 조각 생명체들이 병력을 지휘하고, 언제 죽어도 아쉽지 않은 헤스티거와 노인 자하브가 선두에 설 것이다.

반 호크가 이끄는 언데드들은 이미 투입되어 엠비뉴의 군대를 측면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언데드들이야 소모되더라도 얼마든지 계속 일어나기에 일찍 싸워 주는 편이 좋다.

어비스 나이트 반 호크와 둠 나이트의 돌격 기사단!

나름 언데드들의 질을 많이 향상시켜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의 시체들은 워낙 수준이 높아서 다시 일으키는 게 이득인 경우도 많다.

물론 반 호크만이 언데드를 소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엠비뉴 교단의 마법사들이 활약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나 당장 엠비뉴의 주력은 들모레 요새로 향하고 있기에 언데드들은 광신도들과, 또 난쟁이 종족을 상대로 하여 제법 공을 세우고 있었다.

"쿠힛!"

"쿠히히히힛!"

키가 1미터도 되지 않는 난쟁이들은 아주 골칫덩이였다.

마법도 쓰고, 짧은 거리를 순간 이동해서 손톱으로 할퀴니 위협적이라 상대하기가 까다롭기 그지없지만, 유저가 아닌 좀비와 구울 들에게는 좋은 간식이 되었다.

"성문이 부서졌다. 마폰 왕국의 형제들이여, 적을 막아라."

"장창 부대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왕국은 너희의 피를 원하고 있다. 국왕 폐하를 위하여 싸워라!"

청동 거인들의 돌덩이가 한꺼번에 성문을 강타하여 부숴버린 이후 광신도와 괴물 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마폰 왕국의 기사들이 앞장서면서 장창 부대와 함께 요새 안으로 들어오는 적들을 힘겹게 계속 막아 냈다.

성벽에서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화살만 쏘아 대는 위드가 제일 한가한 상황이었다.

가끔 가물들도 덤벼 왔지만 화살 두세 발을 맞고는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추락했다.

"그래도 상당히 빨리 밀리고 있군. 난공불락의 요새치고는 조금 허술한 거 아닌가?"

요새의 방어력이 이 정도라면 철벽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사막 군단을 데리고 왔어도 함락시킬 수 있었을 것 같다.

각종 전투와 전쟁에서 위드의 병력 지휘 경험이야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위드는 이미 뚫려 버린 성문 부근에 공격을 집중하기보다는 순수한 은의 강을 건너서 일렬로 다가오는 적들을 향하여 줄줄이 화살을 쐈다.

채채채챙!

시위를 떠난 화살이 사방으로 터지면서, 공격 범위에 있는 수백의 적을 결빙시켰다.

보통의 광신도라면 이것으로 죽었을 테지만. '악몽을 퍼트리는', '몸이 극독으로 이루어진', '어린아이를 뜯어먹는' 과 같은 지독한 수식어를 가진 존재들이다.

게다가 엠비뉴의 군대에 흐르는 암흑의 오라가 결빙의 피해를 덜 받게 하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도 빨리 풀려나게 했다.

결빙 상태에 걸려 죽은 광신도와 괴물은 불과 40% 미만이었다.

물론 살아남은 자들도 잠시 동안 행동이 느려지고 생명력이 떨어지긴 했다.

순수한 은의 강을 넘어서 요새로 돌진하는 무리 중에는 빙결의 효과가 걸려 있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그들을 향해서도 들모레 요새의 궁병들은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아 대고 있었다.

끊임없는 비명 소리, 공격을 독려하는 고함, 마물들에게 끌려가는 병사들을 부르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뭔가 왕국군의 전투력이 제데로 발휘되고 있지 않은 느낌인데. 벌써 왕족들과 함께 요새에서 도망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위드는 불현듯 드는 위험한 생각에 마폰 왕국과 베이너 왕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뭘 하는지 보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뒤쪽의 요새 중심 거리에서도 성문 부근 못지않은 격렬한 전투가 한창 펼쳐지고 있었다.

엠비뉴의 비행 생명체들이 공중을 장악한 채로 낮게 날아다니며, 그 위에 광신도 궁수와 공성 무기들이 요새의 건물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특히 무서운 것은 날아다니는 대형 거북이.

바라테스가 산성 독액을 토해 내자 병사들은 그대로 녹아버리고, 잠시 후에는 건물들이 폭발하면서 불에 타올랐다.

공격 수단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옥의 문을 통하여 등장한 마물들은 영악한 데다 학습 능력이 뛰어났다.

'저 인간은 당장 먹을 수는 없다.'

'우리의 몫이 아니다. 악마 이상으로 강하다.'

'잔인한 느낌이 든다. 우리를 붙잡아서 괴롭힐 것 같다.'

위드가 종말의 날을 펼치고 난 후, 어중간한 마물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목표를 인간 병사들로 바꾸었다.

날개가 달린 마물들은 들모레 요새의 병사들을 마구 납치해 가고 있었으며, 특이하게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튀어나와서 땅속으로 끌고 가는 부류도 있었다.

마법사들은 지상에서 비행 생명체들을 향하여 불과 얼음, 바람, 빛의 속성을 가진 마법 공격들을 하며 저항했지만, 워낙에 난전이라서 그 효율이 좋지는 못했다.

마법 공격들이 무작위적으로 하늘을 향하여 치솟았다.

기사들 역시도 요새가 워낙 넓고 크다 보니 도처에서 침입한 적들을 제거하고 막아 내느라 아주 바빴다.

폭발음과 비명 소리, 그리고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는 들모레 요새.

제아무리 난공불락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들끼리의 정규전에 국한된 것이라서, 마물들과 엠비뉴의 군대에는 취약점을 보였다.

"뭐, 불평을 할 수도 없겠군. 내가 조금 더 활약을 해 줘야겠어."

당장 급한 것은 성문과 공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문을 막아서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궁수들과 마법사들이 엠비뉴의 군대의 숫자를 많이 줄여 놓을 수 있다.

물론 요새를 향하여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투척하고 있는 청동 거인들도 심한 골칫덩이였다

위드는 타고 있는 낙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쌍봉아."

"푸르릉!"

"부를 때까지 알아서 잘 숨어 있어."

위드는 낙타에서 내리며 말살의 검을 뽑아 들었다

쌍봉낙타가 가장 잘하는 것은 지치지 않고 빨리 달리기와 회피술, 그리고 안전하게 숨는 것이었다.

"그럼 어디 놀아 볼까?"

생명력과 마나의 회복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그사이 완전한 몸으로 돌아온 상태.

위드가 성문을 틀어막는다면 아마 광신도와 괴물은 1마리도 넘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 지키고만 있다면 좀이 쑤시고 시시할 것이다.

한낱 광신도 따위가 어떻게 사막의 대제를 막을 수 있겠는가.

수백 명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이는 위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 보일 수 있다.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게 되면 잘 도망 다녀야 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위드에게 무서운 적이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청동 거인들을 서둘러 해치우지 못하는 이상 나중에 성벽이 다 파괴되고 난 이후를 생각하면 성문을 사수하는 것에 크게 의미를 둘 필요가 없었다.

"공중에서 놀아 봐야겠어."

위드는 궁수들이 가득 차 있는 성벽 위를 바람처럼 질주했다.

성벽을 타고 올라와서 기사들 수십 명과 싸우고 있던 괴물 몇 마리들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처리했다.

"섬광의 도약!"

충분히 빠르게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위드는 스킬을 시전했다.

마나 소모는 거의 없지만 힘과 민첩성이 필요했다.

뛰고 싶은 높이만큼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어야 하는 기술.

콰과쾅!

엄청난 충격이 땅으로 전달되면서 가까이 있던 궁수들이 튕겨 나가고 성벽이 오분의 일쯤 허물어졌다.

위드는 바람을 가르며 100미터가 넘는 거리를 단숨에 도약해서 대형 거북이 바라테스의 등판이 바로 앞에 보이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바라테스의 등에는 엠비뉴의 궁수들이 가득 차 있었으며, 마법사들을 향해 설치되어 있는 쇠뇌를 돌리는 중이었다.

"저, 적이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자다."

그러나 궁수들이라고 해 봐야 위드가 가볍게 말살의 검을 두세 번 휘두르는 것으로 전멸했다.

말살의 검에서 뻗어 나오는 세찬 화염. 불의 기둥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

무시무시한 화염이 바라테스의 등판 위를 뒤덮으면서 궁병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불덩어리가 되어 비명을 지르면서 땅으로 추락했다.

"푸흐흥!"

쌍봉낙타는 위드의 전투를 구경하다가 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몸이 흙처럼 변하더니 스르륵 벽에 빨려 들어갔다.

남아 있는 건 벽에 새겨진 쌍봉낙타의 형상뿐이었다.

쌍봉이는 어디든 사물 안에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조각 은신술을 익히고 있었다.

 - 저주받은 잡철을 습득하였습니다.

 - 알타 독을 바른 화살을 381개 습득하셨습니다.

 - 책, 엠비뉴를 위한 제물 목록을 습득하셨습니다.

   약간의 지식과 경험을 올릴 수 있습니다.

위드는 강한 전투력만큼이나 빠르게 바라테스의 등 위에서 궁수들이 남기고 난 잡템을 회수하고 나서 고민했다.

"이놈은 어떻게 죽이지?"

엠비뉴의 궁수들만 처리할 게 아니라 대형 거북이 바라테스까지도 없애야 한다.

꾸우우우우우!

대형 거북이는 목숨의 위기를 느껴서인지 갑자기 속력을 내고 몸을 비틀면서 날기 시작했다.

위드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거꾸로 몸을 뒤접었을 때에는 울퉁불퉁한 등판을 잡고 매달려 버텼다.

창공에 있기에 느낄 수 있는 스릴감!

지상이 아찔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워낙 무식하도록 많은 생명력 덕분에 이 정도 높이에서는 추락하더라도 별로 다치지 않는다.

주변에는 다른 마물들이 날아다니고 있었고 마법사가 쏘아 낸 화염 마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바라테스들도 그를 노리고 산성 엑기스를 내뱉었지만, 공중에서 마구 뒤집히고 있는 와중이라 역으로 거의 맞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때려야 죽을지 애메한데. 일일이 신경 쓰기도 성가시니 조금 강하게 처리해야겠군."

위드는 스킬을 시전했다.

"화염의 진노!"

말살의 검에서 불길이 크게 타올랐다.

일반적인 불꽃과는 다르게 아주 거칠고 격렬했다.

직접 닿지 않은 적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지만 검에 베이고 난 후에 불길에 휩싸이면 웬만한 몬스터라 해도 가죽과 뼈가 다 녹아 버린다.

특히 검에 직접 찔렸을 때는 공격력을 5배 이상 높여 준다.

위드는 대형 거북이의 등판을 연속으로 여러 번 베어 버리고 나서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높이 뛰었다.

이번에는 도약 스킬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다른 대형 거북이의 등판에 내릴 수가 있었다.

궁수들을 제압하는 동안, 지나왔던 대형 거북이가 화염에 휩싸여서 괴성을 지르며 지상으로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군!"

그 이후부터는 공중에서 풀쩍풀쩍 뛰어다니면서 대형 거북이들만 공격했다.

등판에 타고 있는 궁수와 기사 들이야 거북이들이 땅에 떨어지면 알아서 사망할 게 아닌가.

"피해라!"

"또 떨어진다."

"백작님이 저곳에……."

하늘에서 불덩이가 되어 추락하는 대형 거북이들로 인해서 들모레 요새는 더욱 처참하게 부사지고 있었다.

탑과 건물이 무너지면서, 병사들과 귀족들이 깔려서 수없이 많이 죽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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