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조각사 38권
1) 흩어진 부하들
메마른 울부짖는폐허에서는 몬스터들이 심심치 않게 돌아다녔다. 그렇다고 폭력적이지는 않고, 입가에 침을 줄줄
흘리면서 영혼을 잃어버린 좀비들처럼 멍하니 걸어 다닌다.
'음, 외모로 봐서는 레벨이 300대? 근데 여기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서 그 이상도 될 것 같군.'
위드는 바위 뒤에 숨어서 몬스터들을 분석했다.
고위 몬스터로 갈수록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피부색이 특별하다거나,
흉측하게 생겼으면서도 왠지 우아한 느낌을 풍긴다거나.
그런데 이곳의 몬스터들은 그냥 단순하게 못생겼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생길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크고 흉악하다.
하지만 도처에 흐르는 엠비뉴의 마력 때문인지 그저 평범하기만 한 몬스터 또한 없다. 몸의 비율도 정상적이지 않고,
한쪽 팔이나 머리가 기이하게 크거나 해서 위협적이었다.
'수준도 그렇게 낮지 않지만 몬스터들의 풍년이로군.'
기괴한 몬스터들이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끼야아악!
멀리서 까마귀가 위드를 스쳐서 무너진 장벽을 향해서 날아간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비교적 덩치가 크긴 해도 정상적인 까마귀였다. 하지만 곧 독수리처럼 커지더니 털이 숭숭 빠진다.
흡혈박쥐처럼 입안에 송곳니가 돋아나고, 발톱은 낫처럼 길게 자람다.
장벽에 도달한 순간에는 개와 까마귀가 반반 정도 섞인 특이한
몬스터가 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놓은 듯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배회하는 것이다.
'여긴 제법 위험해. 엠비뉴 교단의 총본영이 있기 때문이
겠지만... 아무튼 세상에 이런 곳도 흔치는 않겠지.'
위드는 바위 구석에서 조용히 살피면서 기다렸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몬스터들은 갑자기 멈춰서 주변을 돌아보거나,
코를 킁킁거리곤 했다. 따로 엄폐물이 많지 않기 에,
들키지 않고 장벽을 넘어가긴 힘들 것 같았다.
'일단 움직이면 대신전으로 가기 위해서 근처에 있는 놈들을 최대한 빠른 시간에 정리를 해야 해.
소란을 보고 몬스터들이 몰려오지 않도록.'
이곳의 몬스터들은 오크, 고블린처럼 누구의 지휘를 받거나 집단행동을 하지는 않는 느낌이다.
하지만 전투가 펼쳐지면 즉시 모여들 것이다. 어둠의 힘에 물들어 버린 마물들은 살아 있는 생물을 보면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가질테니까.
'이동하는 것도 차분히 기회를 노려야겠지. 정찰을 하려면 이동, 은신, 이동, 은신을 반복해야 한다. 부하들이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위드는 이곳의 지형과 분위기부터 파악해 보려고 했다.
퀘스트를 하는 데 열흘이라는 시간이 있지만,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는 기간이다.
조각술 최후의 비기를 구하는 장대했던 모험에서도 곧 결말에 해당하는 단계!
지금까지 퀘스트를 진행해 오면서 경험한 바도 있듯이,
난이도가 높다보니 틀림없이 넉넉한 시간은 아닐 것이다.
열흘간 죽어라 고생을 해도 마지막에 불과 몇 분 차이로 실패 할 수도 있기에 조바심을 내야만 했다.
마치 공부와 담쌓고 지내다가 시험이 내일로 닥쳐온 학생처럼!
'아무튼 이동한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가서 전체을 봐야돼.
이 부근에서 가장 높은건... 저 장벽이로군.'
느릿느릿 걸어오는 괴물!
위드는 괴물이 지나가기를 그냥 기다렸다. 그리고 말살의 검을 꺼내들고 뒤에서 기습을 가했다.
기사들은 정면이 아닌 뒤치기를 하면 명성과 명예가 감소하는
페널티가 있다. 심하면 '뒤를 자주 노리는 기사' 와 같은
악명도 붙는다. 하지만 다른 직업들, 근본적으로 기품을
상관하지 않는 전사 계열은 마음껏 뒤를 공격할 수 있었다.
도둑 계열 직업들은 아예 뒤통수나 등을 노리라고 태어난 직업!
-치명적인 일격이 터졌습니다!
쿠엑!
단숨에 사망.
위드의 레벨에 기회를 노려서 뒤치기까지 하였으니 일반 몬스터들이 버텨 낼 리가 만무했다.
캬악!
꽥!
커윽.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 몬스터들을 처리.
6~8마리가 함께 돌아다니는 놈들은 광역 스킬로 재빨리
한꺼번에 없애 버렸다.
"뭐지?"
"무...무슨 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소란이 일어나면 말을 할 줄 하는 괴물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위드는 그럴 때면 얌전히 그 자리에서 조금 물러나서 10분 이상 숨어있다가 다시 나왔다.
이곳의 몬스터들은 똑똑하지 않은 데다 활발하지 않고 단순하게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만 한다는 점을 알아차린 덕분이었다.
뭔가 시끄럽거나 이상하더라도 모여서 잠깐 두리번거리다가 좀비들처럼 다시 흩어진다. 무너진 장벽과 같은 엄폐물이
있을 때는 일부러 소란을 일으키고 뒤로 돌아서 지나가더라도, 눈에 띄거나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의심하지 않았다.
죽이고 먹으려는 기본적인 본능 외에는 모두 제거된 것 처럼.
'반응이 단순해서 최고의 사냥터라고도 할 수 있겠군.'
그러나 위느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건 어쩌면 정말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할퀴거나 물어뜯으면서 살기 위한 이유도 잊어버린 채로 그냥 덤벼들기만 할 것이다.
몬스터들과 싸우다가 소란이 점점 커지다 보면 이 주변 일대 전체의
적과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엠비뉴의 대신전에서
공격대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지형도 파악하지 못한 채로 대신전에서 튀어나온 기사단같은 것들과 싸우게 된다면 상황이 매우 않좋게 될 것이다.
'더 나쁜 경우도 생각해야 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전투를 두려워하진 않는 위드였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싸울 때는 아니라는 생각만을 확실했다.
목표는 이 주변의 몬스터들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인생 전반에 걸쳐 눈치를 보는 데에는 익숙하니까!'
그렇게 한참을 신중하게 움직인 끝에 이윽고 목표인 장벽에 도착해서 절반쯤 무너진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장벽에 도착하였습니다.
누가 세운 것인지,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한 장벽에는
음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생명력을 소진시켜서 강제로 몬스터화하게 됩니다.
생명력이 50,000 이하라면 즉시 몬스터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침침한 느낌으로 신체의 활동력이 23% 감소합니다.
체력이 절반 이하로 낮아졌을 때 생명력의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페널티!
"으음, 이런 건 안 좋은데. 그리고 지형마저도 최악이야."
장벽에 오른 위드의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메마른 울부짖는 폐허에만 몬스터들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엠비뉴의 대신전이 있는 방향을 살피니,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는 시커멓게 썩은 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몬스터 떼가
우글거렸다. 마치 달짝지근한 꿀물을 보고 모여드는 개미 떼처럼 시커먼 강물을 끊임없이 마시고 있었다.
강을 따라서 수만, 수십만의 몬스터들이 있는 것 같았다.
몬스터들의 대박람회, 종족 전시회라 이름 붙일 만한 곳중에서도
이곳이 단연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리라. 이곳만큼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들이 잔뜩 몰려 있는 장소는 대륙 전체를 찾아보더라도
없을 테니까.
대신전으로 가려면 반드시 썩은 강을 지나야 하는데 하늘을 날아서 통과할 수도 없다. 독 안개가 짙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몬스터들이 강을 건너려다가 독 안개에 닿아 그대로 녹아내리면서 강물로 떨어지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러한 장애물을 넘어서 엠비뉴의 대신전 근방에 도착하더라도 절망을 일으키는 성벽이 또 문제였다.
모래 언덕을 따라 지어서, 그 어떤 요새보다도 성벽이 높은 편이다. 바위만 쌓은 게 아니라 굵은 강철 줄을 연결하여,
청동 거인들의 돌덩이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단단해 보인다.
반인반수의 마물들이 감시탑에서 경계를 하고 있었고, 또한 짓고 있는 탑도 문제다.
거의 하늘 끝까지 닿을 것만 같은 탑에는 계단을 따라서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저런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어떻게 대신전에 침입할 수 있겠는가.
대신전은 엠비뉴의 군대의 특별한 몬스터와 괴물을 만들어 내는 생산 기지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부에는 괴물들의 훈련장이 작동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발각되는 순간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몬스터들이 끝도 없이 덤벼들게
뻔하다.
"차라리 한국은행에 가서 보관되어 있다는 금괴를 털어 오는편이 더 빠르겠군."
그만큼 절망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은 일개 개인에 불과한데 적들은 하나의 국가로 보아도 될만큼 규모가 방대하다.
"로또에 연속을 세 번 정도 당첨된다면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도대체 어떤 상식적인 수단과 방법을 떠올릴 수조차 없는 상태!
위드가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도 많이 겪어봤다.
저주에 약한 데다, 휴식도 없이 긴 시간을 싸울 수는 없다.
엠비뉴의 총본영이자 대신전이 이곳에서 힘을 자랑한다면
목숨이 남아나진 못하리라.
그리고 적들에게는 궁극의 무기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혼돈의 드래곤이 있다.
아우솔레토는 다른 드래곤들도 상대하기를 꺼릴 만큼 특별히 강하고 위험하다고 한다.
'차분해져야 돼. 어떻게는 방법은 있어. 그리고 열흘. 빠듯하지만 이 시간을 정말 잘 이용해야 되겠지.
의지할 건 그 정도박에 없으니까.'
위드는 대신전이 있는 방향이 아닌 주변도 살펴보았다.
장벽은 좌우로 끝을 모르게 계속 이어져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호기심이 들기도 하였지만,
어쨋든 대신전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장벽을 계속 따라가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중간중간 무너진 곳들이 많아서 몬스터들이 드나들기에 발각될 염려도 높았다.
위드가 왔던 뒤쪽으로는 붉은 황무지가 계속 이어졌다. 황무지를 지나면 아마 인간들이 사는 왕국이 나타날 것이다.
'여기의 정확한 위치는... 대충 태양과 달의 위치를 보니 아무래도 잃어버린 길의 황무지 너머겠군.'
중앙 대륙과 서부 대륙이 연결되는 길의 황무지라고도 불리는데, 여기는 정말 거대한 미로다.
사전에 길을 충분히 숙지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끝없이 헤매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장소.
전설의 검이 묻혀 있다거나 절세의 갑옷, 어마어마한 재물이 있다는 소문에 혹해서 들어간 많은 모험가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였다.
당연하게도 10대 금역 중의 하나였는데, 여기는 그 황무지도 넘어선 지역이 아닌가.
"으음, 안 돼. 여기서 끝낼 수는 없어."
위드는 지금의 명성도 지키고 모험도 방송국에 계속 중계하기 위해서 퀘스트는 가능하면 성공시키고 싶었다.
천문학적인 광고 수입!
모험과 사냥으로 얻는 아이템을 팔아서 버는 돈도 있지만
방송국들이 안겨 주는 숫자 개수는 다른 출연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눈먼 돈이 따로 있겠는가.
위드도 부유하고 넉넉한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배고프던 과거는 이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최근 버는 돈이 많다보니 호의호식, 사치가 몸에 배어 버린 것이다.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야. 돈도 써 본 사람이 쓸 줄 안다고, 지출도 많이 커져 버렸어."
밥 한 숟가락 뜰 때마다 햄을 나눠 먹지도 않고 한 조각씩 통째로 먹으니 이제는 누가 봐도 중산층이었다.
머리를 감을 때에도 보일러를 틀어서 따뜻한 물을 쓰고 시장에서 제철 과일까지 사다 먹으니,
사치스럽다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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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이란 시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위드는 몬스터들이 시커멓게 썩은 강까지 시장 통처럼 뒤덮고 있는 메마른 울부짖는 폐허에서 무너진 장벽을 끼고 1시간
정도를 보냈다.
조용히 궁리를 하고 있는 셈!
"방법을 찾아야 해."
바글바글한 몬스터들을 뛰어넘어 엠비뉴의 대신전으로 들어가서 하늘로 오르는 탑을 파괴하고 혼돈의 드래곤을 없앨 수
있는 방법.
"내 머리로 할 수 있을까. 어떤 묘수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으음 콜 데스 나이트 반 호크!"
-심상치 않은 기운이 소환을 막고 있습니다.
어비스 나이트로 승격된 반 호크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미 위드의 공식 노예라고 부를 수 있는 반 호크와 토리도까지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쓸모 있는 놈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군."
그렇다면 부득이하게 주변을 탐색하여 부하들과 아헬른이라도 빨리 찾아야 한다.
"몬스터들을 따라다녀야겠군. 굳이 놈들을 계속 죽이며 이동할 필요는 없지."
위드는 위장을 위해서 조각 변신술을 쓰기로 했다.
깡! 깡! 깡!
벽에다 주변의 비슷비슷하게 생긴 몬스터를조각했다.
두 눈 가운데 오른쪽 눈만 유별나게 크고, 턱은 앞으로 길쭉하게 뻗어서 휘어져 있다.
빠른 속도를 위하여 다리는 네발로 뛸 수 있도록 했으며, 뒷다리의 근육은 특별하게 발달시켰다.
유사시에는 그대로 달려서 도망쳐야 했으므로.
귀는 주변의 소리들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넓고 크게, 수염투성이에 입은 작게 만들었다.
비루먹은 망아지를 완성하셨습니다.
볼품없고 대충 만들어진 망아지입니다.
불행을 이끌고 다닐 이 망아지는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한편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며 모험을 즐기는 조각사에 의해서 만들어짐.
예술적 가치: 30
이 작품이 부서지지 않고 계속 간직된다면 엄청난 역사적 가치가 부여될 것입니다.
특수 옵션 : 5초 이상 이 조각품을 쳐다보면 행운을 65 감소시킵니다.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손재주 스킬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무지막지한 특수 효과를 가진 조각품!
식량을 먹어 본 지 일주일은 된 것처름 굶주려서 깡마른 체형은 다른 몬스터들의 이목을 최대한 끌지 않도록 해 주리라.
위드 스스로 조각을 하면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모습인지를 알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이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이 모두 이 모양이었으므로 유행을 따랐다.
"시간만 넉넉하게 있었으면 조각술을 완전히 마스터하고 모험을 할 텐데. 하긴 헤르메서 길드가 그러도록 가만 놔두지도
않겠지. 역시 인생은 조금만 먹고살 만하면 온갖 날파리들이 꼬여드는 법이니까. 조각 벽신술!"
-조각 변신술을 사용합니다.
조각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그 조각품과 조각사를 서로 닮게 만든다!
태양의 전사이며 사막의 대제로서, 몸 자체가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건장한 육체미를 자랑한다.
말살의 불도마뱀 왕까지 잡아 최상의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선망을 받을 만한 외모가, 급격하게 비루먹은
망아지로 바뀌었다.
형태가 이상해진 만큼 전투력도 거의 발휘할 수 없는 모양이 되었다.
공격 수단 중에서 항상 치명적인 일격이 터지는 것은 뒷발차기 정도!
위드는 망아지처럼 입술을 우물거렸다.
'음, 나름 괜찮군. 괜히 당근이 먹고 싶어지는데. 쌍봉이의 마음을 이해하겠어.'
비루먹은 망아지가 되어서 계단을 또각거리면서 방벽을 슬그머니 내려왔다.
크흥!
몬스터들이 그를 한번 힐끗 보았지만 자신들과 비슷한 종류라고 여겼는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우리지만 정말 저 외모는 아니다'
'내 앞으로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위드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방벽을 따라 걸었다.
**************
전이.
사막에서 위드에 의해 생명력이 부여되고 오직 전투를 위해서 살아온 그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막 태어났을 때에는 안전을 위협하는 무서운 적들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전부 평정하였다.
사막의 대제 위드를 따라다니면서 쌓은 용맹의 기록들만 수십 장!
그는 엠비뉴 교단을 무찌르기 위하여 메마른 울부짖는 폐허로 오고 나서도 자신감이 있었다.
'놈들을 전부 죽여서 대제께 인정을 받고 싶다.'
호위대를 통솔할 만큼, 충성심으로는 어느 부하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혼자 이곳에 떨어졌지만 전이는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시미터를 들고 적들을 노려봤다.
"모두 덤벼라!"
쿠릉?
"나 전이가 전부 죽여 주겠다."
굳이 일부러 소란을 떨어 몬스터들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했다.
크릉. 크르르르릉!
그 결과는 수백 마리나 되는 몬스터들의 집중공격!
전이는 영예로운 사막 전사답게 몬스터들이 덤비는 족족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
도끼와 창을 오른손과 왼손에 들고 몬스터들을 일격, 혹은 연속 타격으로 해치우는 그의 모습은 대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점점 소란이 커지고 시끄러워지자 부근의 몬스터들이 전부 모여들기 시작했다.
-뿔에 가슴이 강타당했습니다.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마비 효과가 발생하려고 하였지만 극복해 냅니다.
-어깨를 물렸습니다.
공격 속도가 저하됩니다.
꼬리를 물고 덤비는 몬스터들의 집단 공격.
제아무리 강철 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전이라도 몇 시간을 싸우니 점점 지치고 생명력도 감소했다.
독을 내뱉고, 자신의 몸을 터뜨려서 공격하는 몬스터들.
혼자서 수천 명의 병사들을 물리칠 수 있지만 이곳의 몬스터들은 지독한 면이 있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실력을 보이면 인간의 경우에는 투지가 꺾여서 덤비지 못하는 법인데 몬스터들은 그런 생각 자체를
못 했다. 침을 뱉고, 독을 발사 했다. 끊임없이 달려와서 아비규환에 가까운 공격을 해 올 뿐만 아니라,
장벽 너머의 몬스터들까지 밖으로 뭉쳐서 나왔다.
장벽 너머 썩은 강물을 마신 몬스터들은 레벨이 400이 넘기도 하였으며, 5~6마리가 하나처럼 생명력을 공유했다.
어떤 몬스터들은 주변의 다른 몬스터를 잡아먹고 순식간에 체형을 키우면서 더 강해졌다.
"싸우다가 죽는 것은 전사의 최후로서 아주 기꺼운 일이다."
웬만하면 도망을 갈 법도 하지만 전이는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서 버텼다.
수천의 적들을 상대로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싸우는 투혼!
죽어 가는 전이를 먹잇감으로 삼기 위하여 몬스터들은 갈수록 많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쉬...움은 없다. 그러나 대제를 뵙지 못하고 죽게 되다니......"
전이의 생명력이 10%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비루먹은 망아지가 전속력을 다하여 달려왔다. 몬스터들이 뭉쳐 있는 것을 알았다.
'이런 한심한 놈! 니들이 그러면 그렇지. 난 너희를 조각 하고 나서도 절대 미역국을 먹지 않았다.'
푸히히히히힝!
망아지의 달리는 속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위드의 스탯이 전부 질주형으로 바뀌어 있었기에 육상에서 달리기 능력 하나만큼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무리가 있는 곳까지 다가와서는 공중으로 풀쩍 뛰어오르더니 놈들의 머리를 지지대 삼아 밟아 가면서 이동했다.
앞발과 뒷발로 머리를 박찰 때마다 수십 미터씩 앞으로 쑥쑥 이동하는 망아지.
"크르르르르, 어딜... 가느냐."
갑자기 거대한 몬스터가 정면을 막으면 앞발과 뒷발을 수평으로 펼치며 날렵하게 도약해서 넘어갔다.
"아직... 싸울... 힘이 남...았다."
위드는 전이에게 바로 다가갔다. 몇 시간에 걸친 전투로 전이의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칼도 내구력이 다해서 휘어졌다.
조금만 더 싸우면 칼이 깨어져 버릴 수도 있는 단계였다.
전이는 무시할 수 없는 대단한 전사이다 보니 육체보다도 무기가 먼저 버텨 내지를 못한 것.
위드를 보자 전이는 반가워하는 대신에 푸념부터 했다.
"여기는 정말 온갖 불행이 모여 있는 장소로군. 이런 못생긴 망아지까지 몬스터가 되었다니!"
푸흐흥!
"어? 나를 보는 이 썩은 표정은 무척이나 익숙한데... 설마 대제님이십니까?"
위는는 전이를 등에 태웠다.
잠깐 둘러보니 몬스터들은 빼곡하게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적들이 빈 곳이 없는 때에 탈출로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 함께 있는 둘이 위드와 전이가 아니라면 아마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할 것이 틀림없다.
위드는 야생마처럼 제자리에서 뒷발로 따을 고르며 콧김을 뿜어냈다.
'이 부족한 몸을 믿어야 되겠군.'
파바박!
땅을 차며 일직선으로 돌파!
몬스터들 사이를 억지로 헤집고 들어가서 공중으로 뛰었다.
월등한 민첩성으로, 공주에 투명한 계단이 있는 것처럼 박차는 4단, 5단 뛰기!
날개 달린 말처럼 비상한 위드는 전이를 태운 채로 몬스터들의 어꺠와 머리를 밟고 이동했다.
몬스터들의 포위망을 단숨에 벗어나서는 그대로 정면을 향해서 내달렸다.
"쫓...아라."
"먹잇감을 놓치지 말자."
몬스터들이 계속 뒤쫓아 왔다.
갑자기 몬스터들로 구성된 장거리 마라톤이 벌어진 것과도 같은 느낌!
위드는 귀를 쫑긋 세운 채로 장벽을 따라 달렸다.
어디로 가더라도 계속 몬스터들이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고 공격해 왔다. 또한 한참 뒤에서 추격해 오는 몬스터들도
어지간해서는 포기하지 않을 듯한 느낌이다.
메마른 울부짖는 폐허에서 크고 작은 수많은 몬스터들을 만나고 피하고 이끌면서 달려 나간다.
4분 정도를 꼬박 달리자 장벽 아래에 푹 들어가 있는 구덩이가 하나 발견되었다.
'여기로군.'
위드는 전이를 태운 채로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지성을 갖지 않은 몬스터들은 쭉 해온 것처럼 그 들을 스쳐 지나갔다. 본능에 따라서 하염없이 앞으로 달리다가
다시 두리번거렸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지?"
"모른...다."
"배...가 고프...다."
몬스터들은 다시 의욕을 잃어버리고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위드는 이곳 몬스터들의 특성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둔하군, 둔해. 그래도 위험하고.'
몬스터들의 레벨은 일반 유저들에게는 부담이 될 정도로 높다. 왕국을 지배하던 명문길드가 전력을 이끌고 와도 여기를
토벌하기에는 무리 아니겠는가.
헤르메스 길드가 온다고 하더라도 여러모로 힘든 구석이 있다.
위드도 현재의 몸이 아니라면 몇십몇백 마리를 우습게 해치우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몬스터들의 생명력은 낮은 편이지만 목숨을 도외시하는 공격 방식과 비정상적인 신체 때문에 항상 방심하면
안 될 정도였다.
'뭐,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죽진 않겠어.'
몬스터들과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도망칠 수 있다는 자신이 위드에게는 있었다.
썩은 강의 몬스터 무리가 통째로 움직이거나, 대신전에서 기사단과 사제들이 나와서 저주를 건다면 상황이 복잡해지
기는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쌓아 온 무력과, 가끔 상상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재빠른 눈치 덕분에 쉽게
목숨이 위험해지진 않는다.
위드는 망아지처럼 입을 오물거리면서 말했다.
"이런 무능한 놈! 네 목숨이 너의 것이더냐. 쓸데없이 고집을 피워서 죽어 버린다면 나는 어디서 부하를 구해야
한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대제."
"그나저나 앞으로의 일이 깜깜하구나. 네놈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다른 놈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텐데."
위드가 던전과 사냥터를 오가면서 막 부려 먹은 덕에 조각 생명체 부하들은 기본적으로 용맹하고 물러서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지고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알아서 챙길 수 있는 자하브, 능력의 한계를 짐작하기 힘든 아헬른
그리고 슬슬 죽을 떄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헤스티거를 제외하면 꽤나 암울한 상황이 아닌가.
노인들이 다 큰 자식들을 믿지 못하고 노후를 걱정하며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놈을 찾은 이상, 계속 등에 태우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망아지가 된 위드는 몬스터들이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가까이 접근하면 냄새를 맡아보고
썩은 냄새가 나지 않아서 의아해하기는 했어도, 30미터쯤 멀어지고 나면 다시 멍하니 할 일을 했다.
몬스터들이 많이 배회하고 있어도 크게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편하게 얼마든 돌아다닐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 전사인 전이를 등에 태운다면 그들을 노린 몬스터들의 습격은 재개되리라.
'이렇게 많이 돌아다녔는데도 1명밖에 발견하지 못했군. 다른 부하들을 일일이 모두 찾을 수는 없겠어.'
위드는 그래도 포기는 하지 않고, 전이에게 구덩이 속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한 후에 밤까지 수색을 했다.
해가 저물도록 지치도록 달렸음에도 다른 부하들은 찾지 못했다.
몬스터 무리가 싸운 흔적이 조금 남아 있기도 했지만 부하들이 있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촉박한데 장벽 전체를 뒤질 수도 없고, 이러는 사이에 이미 썩은 강을 지나갔을 수도 있었다.
'부하들의 운명이라고 해야 될 거야.'
부하들도 스스로 대신전으로 모이기만을 기대해 보는 수밖에!
막상 전이조차도 찾아 놓고 나니 그 후게 둘이서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전이와 단둘이서 썩은 강의 몬스터를 뚫고 엠비뉴의 대신전으로 침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음, 그래도 이게 있었지!"
위드는 품에서 시간의 모래를 꺼냈다.
노들레가 했던 모험을 본다면 그것을 따라 좋은 공략법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진작 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진만, 아끼고 또 아까느라 쓰지 못했다.
"이런 시기를 위하여 남겨 놓았지. 역시 인생은 꿍쳐 놓으면 나중에 다 쓰게 되는 거라니까. 시간의 모래 사용!"
위드의 손에서 시간의 모래가 흘러내리며 은은하게 빛났다.
시간의 모래
시간의 모래, 혹은 회상의 모래라고도 불리는 신비한 물건이다.
대륙 남부 사막 부족의 보물로서, 시간을 되돌려 오래전에 있었던 모습들을 보여 준다.
원래 살던 시간대로 돌아가서 물건이나 사람을 데려올 수 있다.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시간과 엮이기도 함.
띠링!
-시간의 모래가 사악한 마력에 의해 잠식되어 사용되진 않습니다.
시간의 모래가 쓸모없어졌습니다. 영구히 사라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