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집주인의 눈빛
이현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르포이 평원의 전투를 보았다.
"제대로 대패로군."
하벤 제국을 몰아내겠다고 덤빈 북부 유저들은 절반 이상의 희생자들만을 남기고 퇴각했다.
퇴각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안쓰럽던가.
초보 유저들 일부는 끝까지 싸우겠다면서 그 자리에서 버티다가 의미 없이 죽어 가고, 후일을 기약하자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던 나머지도 제국군의 기병대가 쫓아오니 살기 위해서 뛰다가 목숨을 잃었다.
병력의 규모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하벤 제국군의 질과 전쟁 능력이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한 공포와 무력감이 유저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우린 어떻게 해야 돼?"
"아아, 안될 거야, 아마......."
"우리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지. 여기서도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사는 수밖에는."
다수의 전쟁을 경험해 본 하벤 제국군은 정체적으로 전투를 보는 눈이 냉정하고, 각 병과별로 확실하게 운용한다.
병력의 흐름, 시의적절한 공격과 방어, 병력 배치, 진형 변경 등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 중앙 대륙을 통일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헤르메스 길드원 중 전쟁 지휘관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자는 먼저 전술 교본들을 보고 시험까지 쳐야 한다고 한다.
이른바 똑똑한 엘리트들만 모아 놓은 셈!
그에 비해 북부 유저들은 단순했고 어떠한 전술도 없었다.
북부 유저들의 결정적 약점은, 대군을 지휘하는 사람이 없기에 군중심리에 쉽게 휩쓸린다는 점이다.
적군을 격파하기 위한 전술이 없으며 적절하게 병력을 운용할 능력도 갖지 못했다.
그 점을 완벽하게 파악한, 명력 체계과 확고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부대 입장에서는 요리하기가 이보다 쉬울 수가 없다.
이현은 큰 전투를 많이 지휘해 봤기 때문에 지휘의 중요성을 알았다.
동일한 부하들을 데리고 싸우더라도 전술과 적절한 지휘에 따라서 전투의 결과는 극단적으로 다르게 나온다.
중앙 대륙을 정복한 하벤 제국에 막무가내로 무작정 덤비기만 했으니 처참하게 박살 나는 것이야 정해진 운명 같은 것 아니었겠는가.
"음, 납득이 되는군."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헛된 희망도 갖지 않았다. 세상사가 다 이런 게 아닌가.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엮이고, 또 머리 좋은 놈들은 어떻게든 출세를 한다.
평범한 서민들을 홀리는 대형 사건들이 얼마나 많던가.
붕양 사기, 대출 사기, 부실 회계, 주가조작, 금융회사 파산 등으로 수백억씩 뜯기는 정도는 예사로 벌어진다.
개천에서 용이 나온다는 말은 완벽한 사기다.
이 세상에서 중산층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모험이지 않은가.
돈만 있으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
로열 로드 역시 남에게 짓밟히지 않으려면 무력은 필수적인 요소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밝힌 이번 정복 전쟁의 이름은 '개미 밟기 작전'.
북부 유저들을 개미처럼 밟아 버리겠다는 의미이리라.
그중의 대왕개미야 당연히 위드를 뜻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현은 그래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대를 안 해서 다행이야."
로또라도 당첨되라는 심정으로 북부 유저들을 응원했다면 실망감은 더욱 커졌을 터!
나쁜 놈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이 바닥에 정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그럭저럭 버틸 수는 있었다.
"오늘따라 밥맛이 떨어지는군."
그렇더라도 기분만큼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그의 중요한 밥그릇과도 같은 아르펜 왕국이 하벤 제국의 침공에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
언젠자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벌어지니 최악의 기분에 빠졌다.
위드 캐릭터가 원래의 시간대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벤 제국에 맞서서 싸울 수도 없다.
이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어디 해보자는 거지. 난 잃을 게 하나도... 아니. 적당히 많지만 너희는 엄청 많지."
아르펜 왕국을 가지고 하벤 제국에 맞서려고 한다면 누가봐도 정신 나간 짓이리라.
솔직히 그도 진지하게 방법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강자에게 적당히 양보하고 굽실거리면서 사는 게 편한 것이 인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싸우려고 한다면 방법이야 없겠는가.
이현은 항상 불가능한 퀘스트에 도전을 해 왔고 적들을 깨뜨리면서 살아왔다.
하물며 지금은 그를 돕는 북부의 유저들도 있다.
이른바 하벤 제국을 상대로 수백만, 수천만의 파티 플레이가 진행되는 셈!
당장이라도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서 북부 유저들과 협력하고 싶지만 참았다.
감정적이 될수록 손해를 보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를 마무리하고 본전을 뽑아야 되었다.
이현의 그릇은 아주 컸다.
"밥그릇도 지키고, 국그릇도 지키고, 반찬도 지켜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지. 너희는 잠자는 미친개의 수염을 뽑았어."
**************
위드가 로열 로드에 접속해서 나타난 곳은 여전히 장벽 근처의 웅덩이였다.
"으으음, 대제님, 제가 위급한 걸 알고 와서 구해 주시다니......."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건장한 전이가 곁에 있었다.
붕대를 감고 푹 쉬었더니 원래대로 회복이 된 모양이다.
위드도 어쨌는 반갑게 일상적으로 말했다.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놈."
"......."
구박과 잔소리가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조각 생명체들은 하나같이 욕을 먹는 데에는 익숙했다.
못하면 막말, 잘하면 질투!
모든 시어머니들이 위드 같다면 대한민국의 이혼율은 몇배로 높아졌으리라.
"아무튼 몸조리 잘하고, 무모하게 싸우지는 말고 동료들을 찾아보도록 해라."
"옛! 대제님께서는 저와 함께하지 않으실 겁니까?"
"따로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동료들을 만나면 엠비뉴의 대신전으로 와라. 그 곳에서 만나자."
"꼭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전이를 남겨 두고 자리를 떠났다.
그를 챙겨서 퀘스트를 진행할 수는 없는 마당이었지만 부하들을 찾는 일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다른 부하들과 만나서 돌아오거나, 대신전으로 몰래 오라고 지시를 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역시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할 때도 있어."
위드가 할 일은 대신전으로의 잠입!
조각 변신술로 빼곡한 몬스터들의 무리에는 어떻게든 섞일 수 있었다.
중간에 있는 시커멓게 썩은 강은 다소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강의 어느 부분의 폭이 좁은지도 알아봐야 하고, 걸어서 건널 수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러나 대신전에 가까워질수록 엠비뉴의 감시탑을 피하진 못한다.
위드를 발견한 엠비뉴를 따르는 기사단이 대거 출격해 올 게 틀림없지 않은가.
-엠비뉴 신이 우리의 적이 될 거라고 신탁을 내린 자가 나타났다.
몸에 꿀 바르고 호랑이 굴로 찾아가는 상황!
기사단을 물리친다 해도 더한 적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위드가 아무리 강하고, 또 전투에 적합한 생명체로 변신을 하더라도
혼자서 전부와 싸울 수 없다는 건 겪어 봤다.
도망을 치려고 한다면 썩은 강과 몬스터의 무리가 또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바퀴벌레와 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애초에 정면 침입은 시도하나 마나 한 방법이었다.
"관찰은 해야겠어. 시간을 활용하면서 틈을 찾아내야겠지. 인생에는 편법이나 얕은 수작이 필요하니까."
위드는 더 이상 부하를 찾아보려 하지 않고 장벽을 넘어가서 시커멓게 썩은 강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비루먹은 망아지라서 그를 건드리는 몬스터는 없었다.
"냄새가 아주 지독하군. 보통 독이 아닌 것 같아."
강물을 마신 몬스터들은 자연스럽게 악취를 풍기면서 독을 내뿜는다.
일반적으로 사냥을 하자면 정말 까다로운 놈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강을 넘는 건 아주 어려울 것 같진 않은데.
몬스터들을 강물로 빠뜨려서 그걸 밟고 매우 빨리 지나가 버린다면 말이야.
조각 변신술로 독 안개에 저항력이 있는 생명체로 몸을 바꾸어도 될 테고."
거기까지 생각한 후, 위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장을 해결할 방법은 되자만 대신전까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시커멓게 썩은 강을 지나고 나면 엠비뉴의 대신전의 감시 영열게 들어가기 때문이다.
혼자 전부와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계획은 접어 두어야했다.
"으음, 좀 더 확실한 방법이 있겠지."
위드는 썩은 강의 하류를 향해서 계속 걸었다.
몬스터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비루먹은 망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또 너무 속도를 내서 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놈들이 의식을 하게 된다.
혈통 좋은 명마들처럼 머리를 꼿꼿하게 들고 말발굽을 또각거리면서 걷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실비실, 네 다리의 보폭을 달리해서 걸었다.
몬스터들 여럿이 지켜볼 때에는 정상적으로 앞으로 가기도 부담스러웠다.
샤샤샤샤샥.
갯벌에 사는 게를 흉내 내며 옆으로도 이동!
위드는 천금 같은 시간을 망하지로 행세하면서 지형을 살피고 몬스터들의 허점을 찾는 데 썼다.
그리고 시커멓게 썩은 강을 연결하는 석조 다리를 찾아냈다.
띠링!
-특별한 모험의 발견을 하셨습니다.
메마른 울부짖는 폐허에서 노예들이 지은 다리를 찾아냈습니다.
독가스가 올라오는 강 위에 다리를 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희생된 노르드 종족의 숫자만 7,600명이 넘습니다.
피와 시체로 쌓은 다리이지만 이용하는 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명성이 485 올랐습니다.
생명력의 최대치가 영구적으로 640 늘어납니다.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추가적으로 얻은 스텟은 그대로일 테니 생명력의 증가는 반가웠다.
"강도 그냥 건널 수 있겠어."
다리가 있으면 어쨌든 이용을 해 줘야 할 게 아닌가!
하지만 다리 맞은편에는 엠비뉴의 기사들 100여 명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썩은 강을 배회하는 몬스터들이 다리 위로 넘거가기도 하였지만, 엠비뉴의 기사들의 투창 공격에 의해서
대번에 목숨을 잃었다.
다리를 지키는 기사들이기 때문인지 혹은 엠비뉴의 총본영이 있는 장소라서 그러지, 기사들도 특별히 강한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드는 생각!
'대신전에는 어떤 놈들이 있을까?'
엠비뉴를 따르는 광신도, 사제, 기사들, 괴물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들은 대신전의 구성원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저들의 사제가 된다면... 아냐. 무리지.'
조각 변신술을 쓰더라도 없는 신성력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다.
위드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심이 제법 높지만, 특별히 신을 모시는 사제들에게 허락된 권능인
신성 마법 자체는 사용하지 못한다.
각 교단에서는 일종의 종교의식이나 세례나 축복을 부여받아서 신이 허락행만 신성 마법의 사용이 가능하다.
엠비뉴 교단의 사제가 되었는데 신성 마법을 하나도 못 쓴다면 전투적으로는 상당히 난감하고,
들킬 확률도 높은 상황!
대사제, 종교재판관, 주교 들은 상대방이 어떤 신을 믿는지를 간파할 수 있기 때문에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과연 저 넓은 대신전에 엠비뉴를 믿는 자들만 있을까.
'아니겠지. 그것도 한두 놈이 아니야.'
제물로 바쳐질 처녀부터 시작해서, 요리 재료로 사라질 동물들.
문제가 있다면, 모두가 곧 죽을 목숨들이라는 점!
엠비뉴 교단에 사로잡혔다는 사실 자체가 대부분의 생명체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아직 당장은 쓰임새가 있어서 죽지 않을 생명체들도 있다.
'하늘로 오르는 탑의 건설자들!'
마물들만이 아니라 노예들을 통해서 짓고 있다고 한다.
아주 먼 곳에서 정찰을 해 보니 엠비뉴의 포로 사냥꾼들이 노예들을 끌고 대신전이 있는 곳으로
주기적으로 다리를 넘어갔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군.'
**************
키가 작고, 눈이 앞으로 툭 튀어나온 종족 노르드!
오크들처럼 체격이 건장하지도 않고, 바바리안들처럼 용맹하고 전투를 즐기면서 힘이 세지도 않다.
금화나 보석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며 그냥 흙과 나무, 개울이 있는 부근에서 나무 열매를 따고
물고기를 구워 먹으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종족이었다.
전쟁의 시대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멸종 비슷하게 희귀해진 종족.
평범하고 약간 작은 노르드 1명이 시커멓게 썩은 강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엄마. 엄마."
아마도 엄마를 찾아서 온 것인 듯, 불안하고 애타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발걸음도 무겁고, 어린아이처럼 짧은 팔뚝은 아래로 축 쳐졌다.
먼 길을 걸어온 듯이 지치고 피곤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눈동자가 빠르게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전형적으로 간사한 타입!
봉건제도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첨과 횡령으로 부정 축재를 일삼았을 간신배의 전형!
시커멓게 썩은 강에 도착한 어린 노르드는 망설이다가 다리를 건넜다.
"멈춰라!"
"재수가 없군. 감히 엠비뉴의 땅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죽어야 한다."
엠비뉴의 기사들이 노르드를 포위했다. 얼마나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인지 무기도 꺼내지 않았다.
"왜, 왜 이러세요."
노르드는 아침 드라마에 주연으로 나올 법한 애처로운 연기를 하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저기요, 여기 우리 엄마 없나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흐음, 배가 고픈데 먹어 버릴까."
"노르드는 맛이 없어. 고기는 까마귀에게 주고 피는 흡혈초들을 키우는 데 쓰자."
"좋은 의견이로군."
노르드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났다.
'이런 무식한 놈들이.'
그의 정체는 조각 변신술을 쓰고 있는 위드였다.
엠비뉴의 기사들의 결정에 따라서 그가 할 행동도 정해질 것이다.
"저는 정말 맛이 없어요. 그리고요, 저희 엄마가 기사님들을 따라서 저쪽에 있는 대신전으로 가셨어요."
심심해서인지 엠비뉴의 기사는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래? 언제쯤인데?"
위드는 잠깐 머리를 굴렸다. 너무 길어서도 안 되고, 짧아도 좀 이상하지 않겠는가.
"6달 전요."
"킬킬, 그러면 뼈는 아직 남아 있겠군."
"모르지. 통째로 씹어 삼켜서 소화가 되었을지도......."
엄마를 찾아온 순진한 아이를 놀려 먹으려고 하는 기사들.
"중요한 시기인데 경계를 철저히 해야지. 어서 놈을 죽이고 주변을 경계하도록 하자."
"그럼 먹을까? 배도 고픈데."
"종교재판관님이 탑의 건설을 위해서 노예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 그 혹독한 노동을 견디지 못해서 맘ㄶ이 죽어 나가고 있다더군. 하지만 이 어리고 약한놈이 할 수 있을까?"
위드가 주먹으로 땅을 치면 쩍 하고 수십 미터가 갈라질 정도였지만, 노르드의 행세를 하고 있으니 상당히 약해 보였다.
사실 지금의 모습은 인간일 때보다도 전투력 측면에서는 오히려 손해가 더 컸다.
"상관없지, 며칠만 버티면 탑이 완공될 테니까 말이야."
"그때가 되면 위대한 엠비뉴의 능력이 이 땅에 내려와서 우리의 힘도 더욱 강해지겠군."
"암! 그날이 오면 노예뜰도 더 이상 필요 없으니 피의 축제를 열어도 된다고 하셨어."
"인간 놈들은 정말 맛있겠군."
엠비뉴의 기사들 중에서도 이곳에 있는 무리는 식인의 습성까지 있는 악질이었다.
기사들은 결론을 내리고는 위드에게 말했다.
"꼬마야."
"넷?"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되묻는 위드!
"너의 엄마한테 데려가 줄까?"
"정말 저희 엄마가 있는 곳을 아세요?"
"알지. 아저씨가 엄마가 있는 장소로 데려가 줄 거야. 그런데 조건이 있다."
"뭔데요?"
"엄마를 보려면 좀 고된 일을 해야 돼. 할 수 있겠지?"
"그럼요!"
위드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엠비뉴의 기사가 하는 말들은 전혀 통하지도 않을 개수작!
사기를 칠 사람이 없어서 어디 위드에게 치려고 한단 말인가.
"그럼 말에 타거라."
"일부러 데려다 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위드는 속는 척 기사의 말 뒤쪽에 탔다.
"잠시 다녀오겠네."
"갔다 오게, 중간에 마음이 바뀌더라도 혼자 먹지는 말고."
"으흐흐, 물론이지."
위드는 엠비뉴의 기사가 모는 말을 타고 대신전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엠비뉴의 성지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엠비뉴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능력이 ㄷ강화되고 불가사의한 회복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엠비뉴를 부정하는 자ㅡ 정신과 육체를 의지하지 않는 자들은 체력과 생명력, 마나의 회복 속도가 49% 감소합니다.
또한 다른 신들의 신성력이 이 공간에서는 86% 약화됩니다.
신앙의 성소가 파괴되지 않는 한 이 효과는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에고, 첩첩산중이로군."
엠비뉴의 기사가 이상하다는 듯이 돌아봤다.
"무슨 소리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 갈 것이다. 시끄럽게 떠들면 구워서 뜯어 먹을 테니 조용히 해라."
"예, 알겠습니다. 저는 맛이 없어요."
사악한 마력을 받아들인 말은 아주 빠른 데다가 지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래판을 쏜살같이 달리면서도 흔들림이 없던 쌍봉낙타보다는 훨씬 ㅁ놋했다.
성질 급한 운전수가 있는 마을버스와 모범택시 정도의 스차감 차이라고나 할까.
'쌍봉이는 잘 있겠지.'
벌써 쌍봉낙타가 그리워졌다.
조각 생명체들과의 이별은 이미 여러 번 겪어 봤는데도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전육, 전칠 등의 다른 조각 생명체들도 앞으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퀘스트를 마치고 나면 위드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테니 이 세계에서 만든 조각 생명체들은
다시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퀘스트와 전투를 함께하면서 나름대로 친숙해졌지만 이제는 추억만 남게 되리라.
와이번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예술가로서 생명을 부여하기 위한 작품 창조를 하면 할수록 더욱 애착이 갔다.
'아마 와이번들은 대충 만든 탓이겟지. 불량 식품이 더 맛있는 것처럼 말이야.'
인생에는 작별이 있기에 더욱 아련한 추억들이 깊어지는게 아니겠는가.
"여기가 네가 일할 곳이다."
엠비뉴의 기사는 하늘로 오르는 탑의 건설 현장에 위드를 데려다 놓았다.
노르드, 인간, 오크, 드워프, 엘프를 비롯하여 온갖 종족들이 다 붙잡혀 와서 강제 노동을 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인근의 채석장에서 캐낸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으아아악!"
안전 대책이라고는 전무한 탑에서 추락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위드는 아동 납치범에게 사탕을 빨리 달라고 보채는 어린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멋진 곳이네요. 원래 높은 곳을 좋아했어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지. 이곳에서 죽으면 대단한 영광이란다."
"여기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엄마를 만날 수 있는 거겠죠?"
"물론이다. 하지만 도망치면, 너는 물론이고 너의 엄마까지 찾아내서 죽일 것이다."
"어허헉! 절대 도망치지 않을게요."
"쉬지 않고 일하면 엄마를 빨리 만날 수 있을 거다. 아주 먼 곳에서... 크크크큿......."
기사가 떠나고 나자 탑의 보초병들이 소리쳤다.
"거기 어린놈! 왔으면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어서 일해라!"
"옛!"
위드는 근처에 잇는 바위로 가서 활기차게 등에 짊어졌다.
노르드 종족으로서는 다소 부담이 가는 무게였지만, 조각변신술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해도
기본 레벨이 워낙에 높기에 거뜬했다.
물론 힘든 척이나, 눈에 덜 띄는 적당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눈치쯤이야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그럼 시작해 볼까."
무사히 탑에도 도착했고, 공사 현장은 정말 익숙한 곳이었다.
위드는 바위를 짊어지고 탑의 계단을 힘차게 올라갔다.
**************
'2만 6,237, 2만 6,238, 2만 6,239......."
위드는 하늘로 오르는 탑의 계딴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숫자를 셌다.
숫자를 세다가 까마득하게 현기증이 날 정도로 계단은 많았다.
인부들이 오르고 내려오기 편하도록 계단의 높이가 낮은 것도 아니었다.
오크들이라면 모르겟찌만 다리도 짧은 노르드에게는 부담스러운 계단은 1개마다 30센티 정도의 높이로 되어 있었다.
계단이 1,000개를 넘었을 무렵에는 초고층 아파트 정도의 높이에 달했는데, 1만 개를 넘을 때부터는
웬만한 산보다도 가파르고 험한 산보다도 훨씬 높은 것 같았다.
2만 개를 넘었을 때에는 구름을 뚫고 지나서 계속 올라갔다.
그때부터는 탑의창가로 보이는 지상 세계가 장난감처럼 작게 보일 정도였다.
엠비뉴의 대신전, 시커멓게 썩은 강, 메마를 울부짖는 폐허까지도 전부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잇는 몬스터와 광신도들을 다 잡으면 적어도 100만 마리는 되겠군.'
구체적인 머릿수야 헤아릴 수가 없지만, 그만큼 지상과 하늘을 가리지 않고 중대형 몬스터들이 넘쳐 났다.
성벽을 힘으로 무너뜨리고 기사들을 짓밟을 수 잇는, 강력한 광신도들의 본거지!
'이런 세력을 가지고도 대륙 파괴에 실패하다니, 진짜 무능한 놈들.'
위드는 겁에 질리기보다는 한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쁜 놈들이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도 부지런하지 못하고 방심을 일삼으니까 용사나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서 매번 퇴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사회는 노력이 대한 보상에 인색해. 악당들의 정당한 노력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 주는 거야?'
계단참 옆에는 잠깐씩 앉아 쉬고 있는 노예들도 있었다.
"우린 어떻게 될까?"
"모르지. 다 죽은 목숨일 거야."
"며칠 전에 노르딕이 어떻게 되었는지 봤어? 커다랗고 팔팔 끓는 솥에 산 채로 던져져 버렸어."
"살점은 다 녹아 버리고, 뼈들은 건져서 새들에게 주었다면서?"
노예들의 이야기 중에는 쓸모 있는 정보는 거의 없고 잔인하고 우울한 이야기들만이 가득했다.
"헤울러 님? 그분의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말게. 어디서든 그분의 험담을 하게 되면 까마귀들에게 잡아먹히게 돼."
"모르는 것이 없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지. 저쪽의 엘프 노인 보이나? 끌려와서 100년이 넘도록 일을 하고 있지.
저 노인 말에 의하면, 헤울러 님은 예전보다 더 젊어지셨다는 거야."
"날씨를 바꾸고, 어둠을 불러올 수 잇찌. 이 탑에도 그분의 강대한 마력이 깃들었어. 가히 신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 아닌가?"
파수꾼들은 4, 5층마다 지키고 있으면서 순찰을 돌며 앉아 쉬고 있는 노예뜰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거기, 더 빨리 올라가라, 더 늦어지면 마수들의 먹이로 던져 줄 거야."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우으으흑!"
노예뜰이 돌과 모래를 운반하면서 내는 짓눌린 신음 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침울한 분위기가 드높은 탑을 채우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감정이 이입되어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잇는 상황!
'으하암, 심심하고 졸린데. 계단이 정말 길기도 하군.'
위드는 묵묵히 걸어서 결국은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중간에 약간 헉갈려서 정확하게 세어 보지 않았지만 계딴은 대략 4만 개 남짓이었다.
'정말 엄청난 높이야. 탑이 어렇게까지 높을 줄은 몰랐는데.'
구름을 넘어 한참을 올라와서, 바람도 이만저만 강한것이 아니다.
와이번들을 타고도 보통 이 정도 높이까지는 올라오지 못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고소공포증이 느껴질 만큼 아찔할 정도로 탑이 땅으로 뻗어 있고, 주변을 보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탑의 면적은 고층부로 갈수록 줄어들어서 꼭대기는 불과 작은 방 하나 정도의 넓이밖에는 되지 않았다.
아마도 여기가 베르사 대륙에 지어진 가장 높은 건축물의 정상 부위이리라.
이제부터는 읮할 난간도 없이 계단만이 하늘을 향하여 끝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이 향하고 있는 하늘의 끝!
;으음.'
위드는 탑이 향하는 부분을 볼 수 있었다.
대악마의 눈동자처럼 크고 위험학 음침한 무언가가 땅을 내려다보고 잇다.
탑은 눈동자를 닮은 그 검붉은 일렁임을 향해 지어지고 있었다.
그곳까지 도달하기에는 고작해야 600미터 정도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였다.
'3층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집주인의 눈빛과 닮았어.'
집주인은 그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었다.
이놈이 이번 달 월세를 정상적으로 납부할지, 혹은 보증금과 월세를 더 올려 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
기물을 파손하거나 한 건 없는지, 장독에서 김치를 훔쳐다 먹고 잇는 건 아닌지를 고민하는 눈빛!
상위 서열의 포식자가 만만한 초식동물을 볼 때의 자신감 까지도 묻어 나온다.
지하 방 월세를 살다 보면 대문을 열고 들어오고 밖에 나가는 것도 그렇게 신경이 쓰였다.
물론 날씨가 아주 맑은 날에는 감히 빨래를 널지도 못하고, 윗집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는 흐린 날에나 마당의 빨랫줄을 쓸 수 있었다.
탑 꼭대기의 눈동자는 뼛속까지 파헤치는 집주인의 그런 눈빛을 연상시켰다.
"할 일을 마쳤으면 어서 내려가라!"
"예."
파수꾼들의 재촉에, 위드는 돌덩어리를 놔두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간단한 정찰은 이쯤으로 충분햇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