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요정들의 세상
위드는 테네이돈의 퀘스트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꼼수를 떠올리기는 했다.
'30일을 기다려서 실패하면 된다. 그러면 명성이나 친밀도 등이 하락하긴 하겠지만 그걸로 이번 일의 매듭을 지으면 되겠지.'
그러나 물품 전달의 퀘스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네이돈과 관계가 악화되는 건 감수할 수 있지만 거울을 받아야 하는 쪽인 드래곤 라투아스의 분노도 사게 된다.
연계 퀘스트의 경우에는 일단 받아들이고 진행하는 도중에 실패하게 되면 더 큰 페널티가 부여된다.
의뢰가 드래곤과 연관되었다면 보통 찝찝한 게 아니었다.
'드래곤이 몬스터들을 풀어서 거울을 얻기 위해 나를 잡으려고 할 수도 있고… 직접 찾아 나설 수도 있겠지. 퀘스트의 난이도나 내용을 감안한다면 드래곤이 움직일 수도 있다.'
헤르메스 길드 이상으로 껄끄러운 존재!
남들은 드래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압도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지만, 자신에게는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에라, 모르겠다. 당장은 할 일을 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그때 고민을 해 봐야지.'
먹고살다 보면 나중에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
'근데 물건을 가져다주면 배송 의뢰가 아닌가. 뭔가 익숙한 것 같은데.'
위드의 머릿속에 마지막까지 잊으려고 했던 택배 회사의 아르바이트 기억이 떠올랐다.
'떠올랐다. 그곳은 진짜 생지옥이었다.'
당장 현금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추석부터 업무를 봐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세상의 가혹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놈의 사회에는 빌어먹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겨질 정도의 직업이 많고도 많구나!'
새벽의 우유 배달이나 신문 배달은 한마디로 미역국에 밥 말아 먹는 것만큼 쉽게 느껴질 정도의 난이도.
사과나 배를 박스째로 보내는 정도는 택배 회사에서는 너무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기술을 택배 회사에서는 경험할 수 있었다.
전자레인지, 오븐, 스피커, 전기밥솥, 식기세척기, 홍삼 원액기, 식품 건조기, 컴퓨터, 복합기, 스캐너, 온수 매트, 비데 등의 상품은 흔했고, 대형 텔레비전이나 세탁기, 냉장고, 가구 상품들은 특별히 말할 거리도 안 되었다.
스키용품, 골프채, 텐트, 낚시용품, 산악자전거, 유모차 등도 사람들은 택배로 보낸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웬만한 제품들은 모두 운송되는 택배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건 박스 안에 가득 차 있는 책과 생수!
쌀, 사과, 배, 귤, 곶감, 배추 등 농산물의 향연이야말로 생지옥!
"으으윽."
위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게 무슨 퀘스트가 시작되자마자 떠오르는 최악의 기억이란 말인가.
시작은 추석 대목을 위해서 임시직으로 고용된 것이지만, 일을 마치고 받는 쏠쏠한 현금 탓에 추운 겨울과 설날까지도 택배 상하차 업무를 계속했다.
그때 이후로 정신적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택배만 보면 치가 떨린다.
하다못해 네모난 상자, 혹은 폐지를 수집하는 할머니들만 보더라도 괴로움에 허리와 팔다리가 아파 왔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틀림없이 잊어버려야 하는 기억. 그러나 한 번만 경험하고 나면 나중에 힘든 일이 생겼을 때에도 강인한 정신력을 다져 주게 된다.
위드는 한겨울의 밤을 지새웠던 택배 상하차를 떠올리자 헤르메스 길드까지도 우습게 여겨졌다.
'그래, 이미 버린 인생. 헤르메스 길드, 무섭고 더러워서 내가 먼저 밟아 주지.'
중앙 대륙에서의 활약이 위험부담이 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인가!
'나만 당할 수는 없으니 헤르메스 길드, 너희에게 지옥을 보여 주마.'
마음으로 생각만 하고 결심은 내리지 못하던 중앙 대륙에서의 역습.
전쟁의 신으로 불릴 만한 계획이 이렇게 전격적으로 결정되었다.
즉흥적인 건 아니었고, 길고 오랜 고민 끝에 같이 죽자는 마음으로 결단이 내려지게 된 것이다.
테네이돈이 날갯짓을 하더니 말했다.
ㅡ 인간 중에서 믿을 수 있는 모험가가 맡아 주어서 고맙군요. 어려운 일은 아니니 꼭 성공해 주길 바라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요정의 샘을 당장 보고 싶습니다."
ㅡ 페어리를 따라가면 될 거예요.
위드는 시종 역할을 하는 페어리의 인도를 받아서 동굴 안의 기나긴 통로를 향해 걸었다.
서윤과 조각 생명체들이 따라오려고 했지만 페어리들에게 저지당했다.
ㅡ 멈춰요! 요정계는 허락된 자만이 갈 수 있어요.
"음머어어어!"
"골골, 여기서 기다리겠다."
누렁이와 금인이는 즉시 제자리에서 멈추면서 크게 환영했다.
위드가 어딘가를 간다면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것.
최근에는 특히 함께 사냥을 다니다 보니 심하게 혹사를 당해서 쉬고 싶었다.
서윤은 아쉽고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조심하세요."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안전한 이곳에서 기다려 줘."
위드는 서윤의 손을 잡았다.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금방 다시 오겠죠?"
"물론이야. 우린 꼭 다시 함께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나를 믿어 줘. 1시간 안에 오도록 할게."
누렁이가 큰 눈을 끔벅거렸다.
"인간인란 참 이상하다, 음머어어어."
금인이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떨어지는 건데 별짓을 다 한다, 골골골."
위드는 서윤을 달래 놓고 안내하는 페어리의 뒤를 따라갔다.
깊은 통로를 통해 지하로 계속 내려간다.
페어리의 날개에서부터 신비로운 금빛 가루들이 땅으로 떨어져서 빛났다.
동굴의 천장과 벽도 연달아 눈부신 빛을 냈다.
ㅡ 놀라지 마세요. 그냥 멈추지 말고 따라오세요.
페어리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묵직하게 울렸다.
"지하로 한참 내려가야 됩니까?"
ㅡ 아뇨. 요정계로 이동하는 데 위치는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러면 왜 가는 겁니까?"
ㅡ 처음이니까 이래야 뭔가 있어 보이잖아요?
역시 장난기가 넘치는 페어리.
위드는 금빛 가루들을 밟으면서 걸었다.
분명히 동굴 안인데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앗!
밝은 빛이 일어나더니 어느새 푸른 숲과 샘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으음."
밝고 신비로운 광경.
하늘에는 무지개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으며, 크고 작은 벌이나 나비들을 탄 페어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건 가히… 시골의 불나방과 비슷하지 않은가.'
띠링!
- 요정계에 도착하였습니다.
모험 역사에 새로운 여정을 추가하였습니다.
요정계에 찾아온 인간 방문자로서 행운이 31 증가합니다.
요정들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지만 악인에 대한 경계가 유난히 심합니다.
나쁜 짓을 저지른 악인의 상태에서 요정계에 들어온다면 심각한 공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요정계가 이렇게 생겼군."
위드는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대략 견적을 뽑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세상.
발전한 도시는 없고, 페어리를 비롯한 여러 종족의 작은 요정들이 꽃이나 나무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요정은 베르사 대륙에도 있었다.
유저들이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오래전에 요정으로부터 전해진 힘이나 혈통을 가진 마을에서 시작을 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직접 요정계에 와 본 유저는 페트와 위드 단둘뿐이었다.
페어리들과 친해지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서 앞으로도 요정계에 많은 유저들이 방문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위드에게로 요정의 샘에서 쉬고 있던 페어리들이 날아왔다.
ㅡ 손님이다, 손님.
ㅡ 어떻게 괴롭혀 줄까?
ㅡ 꺄르륵, 장난을 쳐야 돼. 밤새도록 재우지 않을 거야.
까불거리는 페어리들.
그렇지만 곧 위드에게 많은 구슬을 주었다.
ㅡ 여왕님이 그대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ㅡ 이걸 받아. 가지면 좋은 일이 벌어질 거야.
ㅡ 자연을 좋아하는 그대는 우리 요정들의 친구. 참고로 정령들도 그대를 좋아해.
- 페어리들이 선물을 주었습니다.
『 신비한 클로버
소유하고 있으면 행운을 3만큼 올려 주며,
전투 중에 생긴 불행한 일을 막아 주고 소모됩니다. 』
- 페어리가 기뻐합니다.
찰나의 에너지가 29 많아집니다.
"고맙다."
위드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요정의 샘으로 다가갔다.
이들의 수다를 들어 주다 보면 끝이 없기 때문이었다.
띠링!
- 요정의 샘을 발견하셨습니다.
위대한 모험의 여정에 새로운 발견물을 추가합니다.
통찰력이 3 증가합니다.
술집에서 모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높은 친밀도를 얻게 됩니다.
발견물을 보고할 시에는 보상으로 높은 명성과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정의 샘에는 여러 요정들이 헤엄을 치거나, 물속에서 잠을 자며 가라앉아 있다.
페어리 외에도 머리에 뿔이 나 있는 희귀한 종족, 꼬마 아이의 모습을 한 작은 요정들도 눈에 띄었다.
"이 광경은 파리들이 죽은 것 같군."
햇빛이 비치는 요정의 샘
빛의 알갱이들이 수중기처럼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지만 감수성이 메마른 위드에게는 고작 그 정도의 감상뿐!
위드는 요정들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샘에 손을 넣었다.
"으음, 온도는 딱 미지근하게 따뜻하군."
가까이에서 한가롭게 물장난을 치던 요정들이 난리법석을 피웠다.
ㅡ 더, 더러워.
ㅡ 물이 시커메졌다.
요정들의 호들갑이야 익숙한 일.
위드는 손바닥에 물을 떠서 마셨다.
노가다를 하루 종일 하고 나서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이온 음료를 마실 때처럼 시원한 청량감!
띠링!
- 요정의 샘의 물을 마셨습니다.
세상의 중심에서부터 솟구치는 샘.
요정들이 노는 이곳의 물은 자연의 생명력을 듬뿍 담고 있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육체에 활력이 증가합니다.
신체의 피로가 100% 회복되었습니다.
깊은 수면과 휴양의 시간을 보낸 것처룸 육체와 정신력이
완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생명력의 최대치가 13,980만큼 높아지게 됩니다.
마나의 최대치가 6,500만큼 높아지게 됩니다.
모든 스텟이 영구적으로 12씩 늘어납니다.
지식과 지혜가 10씩 증가합니다.
매력이 59 높아집니다.
육체적인 활발함으로 인하여 습득할 수 있는 경험치와
기술 숙련도의 향상 속도가 3% 빨라집니다.
자연과의 친화력이 61 증가합니다.
완벽한 신체 회복에 능력치 증가까지!
위드의 빈약하기 짝이 없던 생명력도 드디어 7만을 넘어섰다.
워리어라면 레벨 200대 중반에도 넘어설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이만하면 예술 계열 직업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단계.
위드는 요정들의 눈치를 보며 샘의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꿀꺽.
- 갈증이 완전히 해소됩니다.
생명력의 최대치가 일주일간 5,400만큼 증가합니다.
샘의 물이 가진 생명력이 아직도 약간의 영향을 주었다.
한 모금으로는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기에 모자랐던 모양이다.
"에헴."
꿀꺽. 꿀꺽. 꿀꺽. 꿀꺽.
ㅡ 더러워. 샘에 입을 대고 마시다니.
ㅡ 으악! 인간이 물을 다 마시고 있어!
ㅡ 큰일 났어. 머리를 감으려고 하는 것 같아!
★★★★★★★★★★★★★★★★★★★★★★★★★★
웅성웅성.
중앙 대륙과 북부 대륙, 동쪽의 로자임 왕국과 세라보그 성 그리고 그너머 오크들의 성채에까지 주민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요정에 대해 알고 있는가? 얼뜨기 모험가들은 만나지 못하는 한없이 신비롭고 특별한 존재들이라네. 이번에 위드라는 대모험가가 여왕의 부름을 받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 주었다는군."
"이미 들었겠지? 위드라는 모험가는 진정 이 대륙을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일 게야. 무척 바쁠 텐데 페어리들의 요정까지 언제 해결했는지 몰라."
"내 고민거리도 위드처럼 뛰어난 사람이 해결해 주면 좋으련만. 쉿,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아주 뛰어난 모험가가 오면 맡길 만한 일을 하나 알고 있다네. 자네에게는 절대 무리겠지."
"쯧쯧, 검을 차고 다닌다고 해서 다 똑같은가. 내 자식은 위드라는 모험가처럼 키울 거야. 물론 힘들고 어렵겠지만 내 자식은 꼭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러자면 먼저 술과 도박부터 끊게 만들어야 되겠지만."
"취이익, 위드 인간 대장. 노랍다. 무섭다, 취췩!"
베르사 대륙의 모든 유저들이 도시에 오면 귀가 따갑게 위드의 무용담을 듣게 되었다.
"조각술과 관련되어서 사막의 대제 퀘스트를 진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그러게 말이야. 하벤 제국을 상대로 전쟁도 했는데."
"역시 전설의 노가다꾼이란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일까."
유저들에게는 부러움과 시샘이 한꺼번에 생기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르펜 왕국의 국왕이라는 실질적인 직책에 최고의 모험가라는 명예는, 가히 권력과 영광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므로!
★★★★★★★★★★★★★★★★★★★★★★★★★★
ㅡ 저기… 인간아, 부탁이 있는데. 좀 어려운 일이야. 몇 가지 부탁을 들어주면 정말 인간들이 좋아하는 보물이 있는 장소를 알려 주지. 아직도 보물이 남아 있다면 네가 가져도 돼.
"싫어."
ㅡ 호기심 많은 이들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데. 영웅이나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관심 없다."
ㅡ 나와 조금만 놀아 주면 솔깃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어때?
"나는 원래 혼자 놀아."
위드에게 요정들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친밀도를 가지지 않더라도 요정들은 장난을 치기 위해서라도 접근한다.
요정계에서 퀘스트를 받아서 진행하는 일도 흥미는 있었지만 아직 이지역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 관두기로 했다.
퀘스트 보상이 높은 몬스터 퇴치 같은 부탁만 받으면 행운이지만, 반면에 어렵지 않은 것 같아서 받아들였더니 터무니없이 규모가 커질 수도 있다.
명성이 워낙에 높다 보니 의뢰 수행에 있어서도 굉장히 조심해야 했다.
위드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드러 누운 요정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요정계는 얼마나 넓지?"
ㅡ 결국 우리와 놀아 주려는 거구나? 인간들의 기준으로 어마어마하게 넓어!
"음, 아르펜 왕국을 알아?"
ㅡ 알아! 거지들이 많은 곳.
"거, 거기보다 넓어?"
ㅡ 천만 배쯤? 아니. 천억 배쯤 넓어!
"……."
위드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누구의 말이든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게 사회다.
더불어 장난꾸러기 요정들의 말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산은 몇 개나 있어?"
ㅡ 100개쯤? 아니, 200개?
ㅡ 바보야! 500개도 넘어!
"호수는?"
ㅡ 50개는 안 될 거야.
ㅡ 맞아, 맞아.
"강은?"
ㅡ 20개쯤 되려나?
ㅡ 아냐. 5개일 거야.
베르사 대륙보다 넓다는 건 과장이 분명했다.
그래도 요정계도 대륙처럼 구성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손톱보다 작은 요정들에게 물어보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겠지.'
위드가 서 있는 곳은 숲이었지만, 그 너머에는 멀리 비정상적으로 높은 산맥들도 보였다.
"그렇다면 퀘스트는 차차 이곳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이후에나 기회를 노려 보도록 해야지. 음, 좋은 사냥터가 있으면 자주 올 텐데."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요정계이니 별다른 사냥터가 없을 수도 있지만 또 숨겨진 마수가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혹은 정상적인 신수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눈에만 띄지 않는다면 그대로 쓱싹!
"흠, 그럼 원래 세상으로 가 볼까."
위드는 몸을 돌려서 떠나려고 했다.
ㅡ 가지 마. 가지 마.
ㅡ 우리랑 놀자. 놀지 않으면 놀릴 거야?
요정들이 붙잡는 것을 무시하고 가려고 했지만 불현듯 든 생각에 그자리에 멈춰야 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기념으로 물이라도 약간 떠 가도록 할까."
위드는 배낭에서 수통을 꺼내더니 요정의 샘의 물을 듬뿍 담았다.
신비한 생명력이 가득한 물이 초보용 나무 수통으로 꼴깍대며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 볼까. 감정!"
『 요정의 샘물
자연력의 원천이 담긴 물이다.
인간이나 요정, 엘프, 드워프 등 모든 동식물에
부족한 생명력을 더해 주며, 물의 지혜를 안겨 준다. 』
"역시 기념이니까. 조금 더 챙겨 가야지."
위드는 그런 식으로 수통을 5개나 가득 채웠다.
ㅡ 이제 가려나 봐.
ㅡ 인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어.
ㅡ 어떻게 해. 샘의 귀중한 물이 줄어들어 버린 것 같아!
요정들이 지켜보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실제로 샘의 물은 계속 중앙에서 솟구치고 있었기에 수위가 줄어들진 않았다.
하지만 요정들은 장난기로 떠들고 있었다.
이윽고 요정들은 두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ㅡ 맙소사.
ㅡ 저 인간… 지금…….
ㅡ 흙을 파서 굽는데. 저게 뭐야?
ㅡ 본 적이 있어. 저건 인간들이 항아리라고 부르는 물건이야.
기념수를 넘어서 물장사를 하기 위해 위드는 즉석에서 항아리를 제조하고 있었다.
★★★★★★★★★★★★★★★★★★★★★★★★★★
서윤과 조각 생명체들은 위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디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음머어어어. 절대 안 죽을 거다. 내 가죽보다 질긴 인간이다."
바하모르그도 한마디 했다.
"약한 인간은 아니더군."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위드가 돌아왔다.
물장수처럼 등에는 지게를 메고 양 팔에는 2개의 큰 항아리를 달고 있었다.
"무사히 다녀왔어요?"
"응. 한몫 챙겨 왔어."
위드는 샘물을 가져오면서 요정계의 다양한 요정들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첫인상을 만들었으며, 친밀도 역시 제법 하락했다.
ㅡ 아무튼 인간들이란…….
ㅡ 인간들이 요정계에 많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인간들이 많아지면 곤란해질 거야.
비난을 무릅쓰고 챙겨 온 요정의 샘물.
인간 망신은 다 시켰다.
조금 더 떠 왔다면 요정들의 태도가 적대적으로 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고나니 메시지 창이 떴다.
띠링!
- 보유하고 있는 요정의 샘물에서 생명력의 원천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요정의 샘물의 효과가 감소합니다.
위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특별한 효능 때문에 멀쩡한 상태로 팔 수만 있다면 부르는 게 값인 아이템!
하지만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처럼 어디까지나 요정계에서 마셔야 제대로 효과를 보는 모양이었다.
위드가 수통을 들었다.
"감정!"
『 요정의 샘물
세상의 중심에서부터 솟구치는 샘물.
진하게 모여 있던 자연의 생명력이 빠르게 흩어지고 있음.
현재의 농도 54%. 』
"이건 뭐, 금방 불량 식품이 되겠잖아."
성수나 일시적으로 힘이나 활력을 증가시켜 주는 포션류의 경우에는 약간의 농도 차이에도 효과가 크게 달라진다.
위드는 서윤에게 수통을 건넸다.
"어서 마셔 봐. 요정계에서 가져온 귀한 물이야."
"고마워요."
서윤은 머리카락을 걷고는 수통의 물을 마셨다.
"효과는 어때?"
"최대 생명력이 2,300 정도 늘었어요. 스탯도 전부 하나씩요."
"음, 요정계에 있을 때보다 효과는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몸에 해롭거나 죽진 않는군."
"……."
임상 실험 완료!
위드는 조각 생명체들에게도 샘물을 나눠 주었다.
서윤이야 당연히 중요하지만, 조각 생명체들의 중요성도 그에 못지않았다.
조각 생명체들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에 더욱 아껴야 했다.
"항아리 하나는 여기에 없는 녀석들에게 먹이도록 하고, 나머지는 팔아야지."
위드가 챙겨야 할 조각 생명체만해도 47마리나 되었다.
요정의 샘물의 판매는 마판에게 귓속말을 보내는 것으로 간단히 처리했다.
ㅡ최대 생명력과 마나양, 스탯까지 높여 주는 좋은 상품이 있는데…….
ㅡ옷! 양이 얼마나 됩니까?
ㅡ지금은 한 30명분?
ㅡ효과는요?
ㅡ지금은 성기사들이 축복받은 물을 마실 때와 비슷한 정도요.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떨어지는 것 같으니 신속한 처분이 필요합니다.
ㅡ즉시 호구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위드 님의 모험 성공에 대한 이야기가 마을마다 자자합니다. 축하드립니다.
ㅡ흐흐흐.
은밀하면서도 신속한 대화.
광장에서 직접 고객들을 찾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현장 판매의 특성상 가격도 비싸게 받기 힘들다.
마판의 인맥을 통해서 제대로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고레벨 유저들에게 직접 파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불과 1시간 만에 2백만 골드를 넘게 벌었다.
요정의 샘물이 늘려 주는 혜택은 기가 막힌 것이었지만 효과가 떨어졌다는 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물장사야말로 마진이 좋단 말이야."
위드는 샘물을 처분하고 난 뒤에 얻은 돈을 세며 만족스러웠다.
1달의 기한 안에 드래곤을 만나야 했지만 당장은 테네이돈의 일이 마무리가 되었다.
위드는 앞으로 갈 곳을 결정했다.
"중앙 대륙으로 가야지."
하벤 제국이 자리 잡고 있는 영토.
이제부턴 그곳에 가서 난장판을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나쁜 짓을 할 생각에 벌써부터 졸음이 달아나고 두뇌 회전이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