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44권 : 2) 서윤의 아버지 (299/520)

2) 서윤의 아버지

포르모스 성에서 벌어진 대형 사태!

위드가 저지른 사건이 베르사 대륙을 강타하고, 헤르메스 길드의 위신은 또다시 추락하였다.

하벤 제국에서는 인근 도시에 주둔하던 군대를 보내서 다음 날 포르모스 성을 되찾았지만 그것으로 자존심이 회복될 순 없었다.

성난 유저들이 창고를 깨끗하게 약탈해 버렸으며, 도시의 시설물까지 파괴해 버렸다.

이 광경이 밤새도록 방송국들을 통해 중계되어 하벤 제국의 커다란 망신거리가 되었다.

하벤 제국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응징을 해야 합니다. 더는 마음대로 뛰어놀지 못하도록 합시다."

"언제까지 참아 줘야 합니까. 놈이 중앙 대륙에서 활개를 치는데도 아무 보복 수단이 없단 말입니까? 언제부터 우리 헤르메스 길드가 이렇게 나약했단 말입니까?"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수뇌부와 주요 영주들이 모두 모이는 대회의를 열었다.

위드에 대한 처리 방안을 놓고 심사숙고하여 경계를 한 단계 높이기로 결정했다.

위드의 목숨에 대한 현상금을 1억 골드까지 높이고, 대도시 영주의 자리와 함께 최고 등급의 장비들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고위 마법사와 암살자로 구성된 추적조의 파견도 단행했다.

"작전명은 큰곰 사냥으로 하죠."

라페이는 신출귀몰한 위드를 붙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위드의 스킬들이나 이동속도, 판단력을 고려했을 때에 추적조가 성과를 달성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대신에 출현 가능성이 높은 장소들에 빠져나가기 힘든 죽음의 함정을 파 놓았다.

추적조 파견을 강력하게 추진한 수뇌부 집단에서도 생각이 있었다.

'놈이 날고뛰는 재주가 있다 해도, 하늘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 법이지.'

위드 사냥이라면 헤르메스 길드에서 원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최고 수준의 실력자들에게만 자원을 받아서 오직 하나의 임무를 부여한다.

위드의 흔적을 대륙 끝까지 쫓아다니는 것이다.

어디든 따라다니다 보면 활동도 그만큼 위축될 것이고, 언젠가 기회를 제대로 잡기만 하면 죽은 목숨이다.

중앙 대륙에서 위드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만 같았다.

라페이는 대륙의 지도를 놓고 고심에 잠겼다.

"그보다도 근본적인 부분을 손봐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하벤 제국의 약화입니다. 우리 제국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습니다."

"제국의 약화요? 군사력은 역대 최고이며 반란군과의 싸움도 거의 모조리 이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군대는 매일 더 강해지고 있으며, 대륙의 완전 정복도 시간문제입니다."

수뇌부에서는 곧바로 반론이 튀어나왔다.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 중에는 영주들과 그리고 전쟁 영웅들이 많았다.

"반란군을 걱정하십니까? 그놈들은 시끄럽기만 하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절대 다시 뭉치지 못하지요. 우리가 조금만 더 힘으로 밟으면 약한 자들은 다신 일어나지 못합니다. 지금 조금 귀찮아졌다고 해서 제국의 약화를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하벤 제국이 여러모로 뒤숭숭하기는 했다. 하지만 중앙 대륙을 통일했으니 벌어지는 일시적인 소란으로 여겼다.

도처에서 반란군이 튀어나오고 있어도, 군사적으로 압도하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과거의 명문 길드들 역시 두더지 잡기처럼 튀어나오는 대로 밟아 주면 된다.

헤르메스 길드에는 정복 전쟁을 경험한 백전노장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중앙 대륙을 정복할 때도 그랬으니, 하물며 이미 하벤 제국이 완벽하게 영토를 다스리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북부 정복이 실패했고 어려웠던 이유는 순전히 장거리 원정이기 때문이다.

중앙 대륙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지 못했으며, 북부 유저들의 저항이 너무 거세서 실패했다.

그렇지만 베르사 대륙 전체에서 자신들만큼 강력한 군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백작, 후작, 공작의 귀족에 임명된 강자들.

바드레이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강한 유저들이다.

헤르메스 길드야말로 베르사 대륙의 최강자들이 전부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페이는 수뇌부와 대영주들과의 눈을 1명씩 마주쳤다.

"제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으셨군요. 하벤 제국의 군대는 틀림없이 강합니다. 대륙에서 최강이며 우리를 따라올 수 있는 세력은 없죠. 하지만 제국이 약화되면서 드러나는 진정한 문제는 경제에 있습니다."

라페이가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하벤 제국의 내정이었다.

"통계자료를 보면 우리 하벤 제국이 왕국에 머물렀던 초기 시절, 국가의 1달 세금 수입은 약 13억 골드에 달했습니다."

"그렇게나 많았습니까?"

"네. 로열 로드의 초창기였던 만큼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돈이었습니다. 우리도 고작 10골드짜리 의뢰를 성공시키기 위해 도시를 뛰어다니던 때 였죠. 그 전에는 담비 가죽을 구하기 위해 며칠씩 산과 숲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유저들은 잠시 눈을 감고 그때를 회상했다.

누구나 처음은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기반을 닦기 이전에 지금의 수뇌부나 대영주가 된 이들은 누구보다도 바쁘게 뛰어다녔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위에 있고 싶어서 악착같이 강해졌다.

그 후 유저들이 물밀듯이 유입되면서 도시의 마을이 발전하고 퀘스트와 교역이 활발해졌다.

그 과정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실제 현실보다도 로열 로드에서 더 극적인 인생을 경험할 수 있기에 감회가 깊었다.

"통계를 따로 낸 건 아니고 여러 자료들을 모아 본바, 정확하진 않지만 유저들이 유입되고 경제가 가장 활발 했던 전성기에 하벤 왕국의 1달 세금 수입은 약 24억 골드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놀랍군요. 대단한 액수입니다."

당시에는 하벤 왕국뿐만 아니라 다른 크고 작은 왕국들도 사정은 비슷해서 많은 세금을 국가에서 거둬들였다.

지금처럼 세율이 높지도 않았지만 유저들의 유입으로 인한 경제성장 효과는 대단했다.

이후 유저들 중에서도 귀족과 영주가 나타났고, 명문 길드들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큰 야망을 가진 명문 길드들은 물론 하벤 왕국이나 칼라모르, 톨렌 왕국 같은 발전되고 많은 인구를 가진 곳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토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고 격렬하게 싸웠다.

NPC 국왕과 영주, 귀족이 다스리는 왕국은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었으며, 세력과 유저 영주들 간의 군사력 확대는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농장과 목장이 파괴되고 광산은 폐쇄되었다.

전투 중에 주민들이 희생되고 생산 시설도 파괴되었다.

교역이 위축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젊은 주민들은 병사로 징집되어서 전쟁터로 끌려 나가야 했으며, 다양한 분야의 기술자들도 전투 무기 생산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다른 왕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하벤 왕국의 세금 수입은 그때부터 줄어들었으리라.

라페이와 바드레이를 포함하여 중앙 대륙의 사람들은 당시에는 대부분 그 현상을 가볍게 여겼다.

전쟁으로 인해 주변의 성과 도시를 정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던 시대에 자신의 것도 아닌 왕국의 경제 따위를 생각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물러서면 밟히고, 빼앗으면 강해진다는 단순한 논리.

중앙 대륙에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펼쳐졌고, 장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긴 헤르메스 길드는 승자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어떤 변수도 없었다.

"하벤 왕국이 칼라모르 왕국을 접수하고, 이어서 다른 세력들을 쳐서 중앙 대륙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대외비로 분류되고 있지만 중앙 대륙을 통일했던 직후 우리의 세금 수입은 약 88억 골드에 달했습니다. 도시의 입장료나 던전 이용료를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

수뇌부와 대영주들은 매달 거두어들이는 셰금의 단위에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자금이 있기에 외부로부터 투자를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인가?'

'가상현실의 가치는 날로 커지고 있다. 헤르메스 길드는 이미 기업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구나.'

각자 지배하는 도시를 통해 대략적이나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그 액수를 들으니 대영주들도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라페이는 감춰 두었던 정보를 한 가지 더 공개했다.

"반면에 우리의 정보대에서 추정하기로, 아르펜 왕국의 세금 수입은 2천만 골드에서 3천만 골드 남짓입니다."

"쿠흐흐흐,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질 않는군요."

"이거야 원… 정복할 가치도 없는 거 아닙니까?"

대영주들이 웃었다.

그 정도의 세금 수입이라면 사실 그들이 다스리는 영토에도 미치지 못한다.

방송이나 대중의 인기가 대단한 아르펜 왕국이라지만 속 빈 강정처럼 별 볼일 없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라페이는 웃지 않았다.

"아르펜 왕국과 우리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율에서도 우리는 그들의 몇 배에 달하고요. 만약 아르펜 왕국에서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인다면 적어도 3억 골드는 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 차이라고 해도 뭐……."

3억 골드라면 대영주들도 우습게 볼 수 없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벤 제국에 비해서는 너무 작은 금액이다.

그러나 라페이의 얼굴과 목소리는 여전히 심각해서, 그가 할 이야기가 중대하다는 점을 짐작하게 했다.

"실질적인 부분을 따져 본다면 격차는 더욱 줄어듭니다. 하벤 제국이 중앙 대륙을 통일한 이후부터 우리의 세금 수입은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영주 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그거야 아직 체계가 덜 잡혔기 대문이 아닙니까? 농장이나 광산 등 인수가 덜 된 곳들이 있습니다만."

"그런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의 세금 수입 감소는 무시해도 될 정도입니다."

"대체 현재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돈이 어느 정도이기에……."

"51억 7천만 골드입니다."

"크으음."

좌중에서 깊은 고뇌에 잠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88억 골드나 51억 골드나 마찬가지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다.

하지만 처음에 비해 37억 골드나 줄어들었다니 그것이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아르펜 왕국의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비웃던 대영주들의 얼굴도 굳었다.

자신의 영토에서도 크든 작든 대부분 세금 수입이 감소하였다.

그러나 그저 일시적인 일로 여기고, 경제 재건이 이루어지면서 복구되리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수입 감소 부분을 다 합치니 이렇게 많은 금액이 날아갔을 줄은 몰랐다.

라페이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우리에게도 약간의 잘못과 좋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반란군이 들끓어서 세금이 원활하게 징수되고 있지 않다는 점도 감안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경제 재건을 위한 투자 액수를 대폭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세금 수입이 계속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럴 리가요."

"지금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까?"

영주들 중에서는 다급하게 묻는 자들도 나타났다.

라페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1달을 기준으로 한다면 총 감소 금액은 3억, 4억 골드 이상이 될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이미 대략적인 정보를 알고 있는 수뇌부에서는 침묵을 지켰다.

영주들 역시 머릿속에서 계산을 해보고는 타당하다고 여겼다.

'내가 거두어들이는 세금 수입도 대충 그 정도씩은 줄어들었다.'

말을 꺼냈다면 더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좌중의 관심은 온전히 라페이에게로 쏠렸다.

"세금 감소의 이유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우리의 경쟁자였던 이들이 몰락하면서 생긴 공백, 도시의 피해, 주민들의 죽음, 생산량 감소, 반란군, 치안 악화 등. 유저들이 중앙 대륙에서 예전처럼 열심히 모험과 사냥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도 큰 이유이겠지요."

로열 로드에서는 강해지기 위한 욕구가 대단히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헤르메스 길드가 중앙 대륙을 장악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통치를 하니 유저들의 그러한 열기가 식었다.

휴양지에 가서 놀거나, 세금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떠나 버리는 사람이 늘었다.

생산직들과 기술자들도 자신의 일을 예전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다.

던전 입장료나 도시에서의 세금이 감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주들의 머릿속에는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건 현실 경제와도 비슷하잖아.'

'어렵다. 경제는 심리라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경제학 수업을 조금 들어 볼걸.'

여러 가지 조건들을 감안하면 경기 침체가 찾아오는 것도 너무나도 당연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악조건에서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간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다만 그렇더라도 아직도 하벤 제국의 세금 수입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영주들이 많았다.

실제로 자신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으니까.

라페이는 그런 착각까지도 깰 발언을 했다.

"아시겠지만 하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필수적인 기반 시설의 유지, 그리고 군사력에 지출되는 비용. 정확하게 추산하기 힘들지만 이 비용만 해도 20억 골드는 웃도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란군을 제압하는 한편으로 우리는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투자도 해야 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그다지 여유가 없단 말입니다."

하벤 제국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인 줄 알았건만, 속으로는 여러 가지 조건들과 상황들이 최악으로 흘러왔던 것이다.

똑똑한 자들은 구체적인 자료가 없으니 그 이유를 알면서도 설마 이렇게까지 나빠지진 않았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다.

세금 문제는 당장의 수입이나 통치와 관련이 깊은 너무나도 중대한 사안이기에 회의실은 적막감이 감돌 정도로 조용해졌다.

"하벤 제국에는 당장 우리의 뜻과 맞지 않는 이들을 억누르기 위해 다수의 군사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군대의 힘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엄청난 유지 비용을 필요로 하며, 경제성장에도 지장을 많이 주지요.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군사력 부분은 현재 수준을 유지하는 정도만 하며 최선을 다한 경제 복구입니다."

라페이는 명확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아울러 지금까지 헤르메스 길드의 방침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았던 영주들에 대한 경고이다.

하벤 제국에는 숱하게 많은 영주들이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 소속의 유저들, 이른바 개국공신들!

그들은 길드의 확장과 함께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각기 지배할 땅을 배정받았다.

정복 전쟁에서는 모든 자원을 오로지 군대에 우선해서 투입했다.

중앙 대륙에서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으니 비정상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이 갖춰지게 된 이유다.

개국공신에 대한 후한 포상은 지배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새로 정복한 땅을 멀리 떨어진 중앙에서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군사력을 가진 영주를 임명해 놓고 그에게서 일정한 세금을 거두는 것으로 뒤처리를 다 했다.

완전한 대륙 통일을 위한 정복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편한 선택이었다.

헤르메스 길드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다른 길드들 역시 모두 그런 방식으로 영주를 임명했다.

영주란 그 지역에서만큼은 대단한 권력자였으며 많은 유저들이 선망하는 자리였으니까.

길드원들의 동기부여에도 효과적이다. 하지만 당연하게 여겼던 그 선택이 발목을 잡았다.

전쟁에 익숙한 영주들은 그 지역의 경제를 성장시킨 게 아니라 군사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삼아서 철저히 착취했다.

젊은 주민들은 병사들로 모집했으며, 기술자들에게도 병장기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사치품이나 고급품은 생산량이 삼분의 일 이하로 줄어들었고, 제국 전체로 본다면 잃어버린 경제 규모도 천문학적이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건 중앙집권적 통치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빨리 중앙 대륙을 부흥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단행했어야 마땅했다.'

드넓은 제국, 하벤 제국의 수도에서 경제 재건을 위한 갖가지 조치들을 취하더라도 영주들을 통해야 하니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다.

영주들은 중앙 대륙을 정복하는 데 기여한 대가를 얻길 원했다.

그 결과 과중한 세금으로 주민들을 쥐어짰고, 경제를 재건하라고 황궁에서 푼 재물도 아까워서 움켜쥐고 풀지 않았다.

영주들에게 세금을 내리라고 명령을 했지만 그것을 따르는 이들도 절반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물론 전적으로 영주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리라.

중앙 대륙에서의 통치 문화는 눈앞에 황금이 있으면 힘이 있는 자가 가지는 것이 전통이었으니까.

라페이는 여기서 굳이 아르펜 왕국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정보대에서 파악하기로 북부의 유저들은 매일 숫자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나고 있으며 생산과 모험도 활발하게 증가하고 있다.

하벤 제국과는 사뭇 그 분위기가 다르다. 마을과 도시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으니 향후 1~2년 뒤를 보자면 경제적으로 역전이 되지 말란 법도 없는 게 아니겠는가.

세금 수입만 놓고 본다면 입장이 바뀔 가능성은 없을 테지만, 반대로 그 낮은 세금 때문에라도 발전의 속도는 비교가 안 된다.

중앙 대륙은 계속 퇴보해 왔다면, 북부 대륙은 떠오르는 태양과 같았다.

"대제국은 외부의 침략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란군의 활동도 진압되고 있지만 하벤 제국의 국력도 덩달아서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전쟁이 아니라 경제와 내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렌 성을 중심으로 하여 거미줄처럼 교통망을 연결하고 산업과 도시 개발에 집중적인 투자를 감행하기로 했다.

방대한 군사력의 유지와 반란군으로 인한 각자의 소요 사태, 유저들의 반발까지도 감안해야 했다.

모든 것이 헤르메스 길드 수뇌부의 생각보다 어렵고 더디게 진행될 게 틀림없지만 현재로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

하벤 제국의 수도가 있는 아렌 성의 상인 주민들은 불만으로 투덜거렸다.

"우린 정말 무거운 세금을 감당해 왔지. 그건 하벤 왕국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거야. 그런데 갈수록 사치품은 제때 들어오지 않고 가격은 오르기만 하는군. 손님들도 줄어들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몽땅 망하고 말 거야."

"반란군 따위도 제때 해결하지 못한다면 뭐하러 대륙을 정복한 거야. 무능한 귀족 놈들."

"식민지로부터 싼값에 물자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놈들을 쥐어짜서라도, 죽여서라도 싸게 가져와야 할 것 아닌가."

"이 시장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후후후. 사치품이야말로 한밑천 챙기기에 훌륭하지. 어디서 약탈한 물건이지만 상관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사실 이 바닥에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수도의 시장 상인들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교역이 불만족스러웠다.

교역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상인 주민들 사이에 대대적인 불만이 쌓여 갔다.

하벤 제국의 수도에서 벗어난 칼라모르, 톨렌 지역의 시장은 장사를 하기 힘들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식료품이 부족하다니 믿기는가? 물자 부족 현상이 최근에는 흔하게 벌어지고 있어. 반란군의 탓도 있겠지만 그들을 욕하고 싶진 않군. 다 황제가 자초한 일이니까."

"옷이나 무기가 있더라도 팔리지 않지. 사람들이 돈이 있더라도 안 쓰고 있으니까."

"대륙 북쪽의 농작물들은 품질이 훌륭했는데 더 이상 수입을 하지 않다니 안타까운 일이지. 포도주와 말린 과일들. 고객들 중에서는 웃돈을 얹어서라도 사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대장장이가 만든 검을 원하나? 그런 건 더 이상 구하기 어렵네. 대장장이들이 전부 일을 그만두었으니까."

제국에 대한 반발로 기술자와 농부, 대장장이 등의 주민들이 일을 하지 않아서 생산량이 감소하고 교역이 줄어들고 있었다.

하벤 제국에서 북부 원정에 실패하고 황궁이 붕괴되었을 때보다도 내실은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극심한 경제 침체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점령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경제 위축 현상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유저들도 비싼 세금 때문에 소비를 줄였으며, 의욕도 많이 꺾여 있었다.

"사냥 가자고? 그냥 놀러나 가자."

"주문이 들어왔다고? 다 귀찮아. 잠이나 잘래."

노세 노세 그냥 노세 운동!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놀기가 유저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유행을 탔다.

"돈도 안 들고 좋아."

도시의 광장이나 길가, 건물의 지붕 위에서 햇빛을 받으면서 그냥 노는 것이었다.

일부 발 빠른 유저들은 하벤 제국의 사태가 심상치 않아졌을 때부터 농지와 주택들을 팔아 치웠다.

상인 유저들은 활동을 줄였다.

반란군들 때문에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려면 비싼 가격에 용병을 구입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적었다.

중앙 대륙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모든 유저들이 조금씩이나마 느끼고 있을 때였다.

주민들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식료품과 약초, 광물 등의 공급이 조금씩 나아졌다.

예전보다 가격은 비싸지만 물품들이 공급된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인 지역이 하벤 제국에는 많았다.

도자기, 포도주, 직물, 고급 그릇, 예술품들은 귀족과 중산층이 꼭 원하는 물품이었다.

"앞으로 자주 거래를 해 줬으면 합니다. 꼭 또 와 주십시오,"

"물론이죠. 필요하신 물품이 있으면 저희 다판 상회에서 꼭 오겠습니다. 웃돈만 얹어 주신다면요."

 - 긴급 물자 운송 퀘스트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나르못 시장의 공헌도가 12.32%가 되었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다판 상회!

많은 물자들을 가져와서 하벤 제국의 시장에 대량으로 공급했다.

★★★★★★★★★★★★★★★★★★★★★★★★★★

"이 세상에 믿을 놈은 하나도 없어."

이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인터넷 사이트들을 돌아다녔다.

로열 로드의 홈페이지에서부터, 위드의 목에 걸려 있는 현상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 로열 로드에서 팔자를 펼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인데요. 헤르메스 길드에서 정말 내줄까요?

 - 위드부터 잡고 얘기합시다.

 - 한밑천 톡톡하게 챙길 수 있겠네요.

 - 일확천금이라니… 반가운 척하다가 뒤통수를 그냥 사정없이!

"아무튼 이놈들은……."

이현은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헤르메스 길드에 당하더라도 그들이 엄청난 대가를 약속한다면 기꺼이 협조하는 게 또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원망할 수만은 없었다.

이현 자신이라고 해도 충분한 대가를 준다면 헤르메스 길드의 편이 되어 주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사람이 의리는 있어야지."

이번에는 다크 게이머 연합에 들어 가 봤다.

[ 제목 : 다크 게이머 은퇴를 위한 최고의 기회!

         위드 사냥에 참가하실 분 모집합니다. 현재 인원 240명 입니다. 딱 300명까지만 받겠습니다. ]

[ 제목 : 언제까지 잡템이나 모으고 퀘스트나 해서 돈을 벌 것인가. 한방을 노리자!

         요즘 장비들 시세도 떨어졌는데 우리 목돈 한번 마련해 봅시다.]

"크으, 역시 이놈들도……."

현상금이 너무 막대하다 보니 모여서 이현의 캐릭터를 잡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막상 쉽게 덤벼들지는 못했다.

던전이나 사냥터에도 만날 일 자체가 드물다.

꼼꼼하고 방심을 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가끔 전투를 따라오는 구경꾼들에게도 빈틈을 잘 보이지 않았다.

모라타와 같은 북부의 우호적인 유저들이 넘쳐 나는 대도시에서도 안심할 수 없다.

몇 명 정도로 이루어진 현상금 사냥꾼 무리는, 애써 위드를 만나더라도 카리스마에 눌려서 싸움을 못 거는 현실.

물론 덤비더라도 대부분은 반 호크와 토리도를 소환하고 함께 싸운다면 어렵지 않게 격퇴가 가능했다.

다크 게이머 중에서도 최상의 수준에 있는 유저들은 웬만하면 만나기 힘든 강자들이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가볍지 않고 묵직하다.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야 하고, 실패했을 때에는 레벨과 스킬 숙련도를 비롯해 잃는 게 많기 때문에 신중해졌다.

다크 게이머들의 여론도 현상금에는 동요하지 않았다.

헤르메스 길드의 독재 체제가 갖춰지게 되면 로열 로드에서 다크 게이머들도 역할이 급격하게 축소된다.

다크 게이머들은 아르펜 왕국에 정착하면서 평소에도 경제력과 모험, 기술 등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전쟁에서도 하벤 제국군의 상당수를 처리해 주었으니 그들이야말로 은근한 후원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눈에 띄게 막 돌아다니기는 훨씬 어려워지겠어. 조각 변신술이 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앞으로 더욱 신중해져야겠지."

이현은 다크 게이머 연합의 정보 게시판을 세세히 분석했다.

퀘스트와 베르사 대륙의 지리, 하벤 제국 영주들의 세력까지 분석했다.

일반적인 사냥터보다도 훨씬 신중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다.

"싸울 장소와 시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은 뛰어난 장점이야. 치고 빠질 시기를 가늠하면서 조각술의 위력도 극대화시킬 수 있을 테고……."

중앙 대륙은 넓다.

가까운 지역은 와이번을 타고, 먼 곳은 그림 이동술을 통해 어디든 목표로 삼을 수가 있었다.

포르모스 성의 영주는 처음부터 의도했던 목표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너무 좋았다.

그가 출정을 한 직후에 바로 계획이 수립되었고, 반란군과 네크로맨서 스킬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잡아먹은 것이다.

한탕 제대로 해 먹은 상황!

"그다음으로 포르모스 성 못지않은 제물을 찾아야 해. 뭐, 경계가 늦춰질 때까지 던전 사냥을 하면서 성장을 하거나 살인자들만 암살해도 되겠지만… 상황이 어떤 식으로 바뀌게 될지 몰라.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지."

하벤 제국의 반란군이 진압되면 지금과 같은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큰 놈을 잡아야지. 누가 봐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진짜 큰 놈을."

이현은 고민 끝에 다음 목표를 용기사 뮬의 그리폰 군단으로 결정했다.

하벤 제국군 중에서도 가장 소수 정예의 강력한 부대로 손꼽히는 그리폰 군단.

병력 숫자는 5,000에 불과하지만 소속되어 있는 강자들이 즐비했고 전략적인 가치 역시 어마어마했다.

조인족들이 아직 날파리라면, 그리폰 군단이야몰로 하늘에서 쇄도하는 강철의 기사단!

모든 전투에서 불패를 자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적들을 압도적으로 섬멸해 버린 역사를 세웠다.

중앙 대륙에서도 변방에 위치한 그라디안과 네스트 왕국의 불안정한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핵심 군단이었다.

"일단 확실히 없애 놓는다면 복구하기는 힘든 병력이야. 그렇다면 상대해 볼 만하다."

다양한 꼼수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일을 저지르기 전에 KMC미디어에는 몰래 연락을 했다.

확실한 내용은 알려 줄 수 없지만 방송 시간을 따로 빼놓아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

이현은 오랜만에 시장에 가서 장을 봤다.

"왕새우 주세요."

"몇 개나? 오늘 새벽에는 작은 건 별로 안 들어왔는데."

"큰 것으로. 가격은 조금만 신경 쓸 테니까. 프라이팬을 박차고 나올 만큼 제일 싱싱한 녀석으로 주세요."

"호오, 별일이 다 있군."

수산물 상점에서는 평소 바지락과 국물용 냉동 꽃게 위주로 샀지만 오늘은 생선과 새우, 낙지 등 무려 5만원어치나 구입했다.

"해물탕 재료는 이쯤이면 됐고."

식육점에서는 한우 갈빗살과 살치살을 4만원어치나 골랐다. 돼지 삼겹살과 목살도 2만원어치를 구매했다.

식육점 주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현을 봤다.

"정말 돈 주고 사는 건가?"

"네."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별일은요."

"뉴스로 자네 소식을 듣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죽었다거나……."

"……."

돈이 있더라도 맨날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다녔으니 여전히 오해를 받을만도 했다.

이현은 동네 편의점에 가면 유통기한이 막 지난 삼각김밥과 햄버거를 무료로 먹을 수 있는 VIP였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내는 이현의 손가락이 중증 마약중독자처럼 떨렸다.

"크으, 식사 한 끼에 이런 지출이라니……."

신선한 식재료들을 잔뜩 산 것은 서윤을 위한 저녁 식사 때문이었다.

그녀와의 관계가 깊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윤이 말을 하지 않았으니 오해도 하고, 또 자격지심 때문에 일부러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도 했다.

이현의 현실은 가난한 게이머에 불과했으니 끌리는 마음에 솔직해지지도 못했다.

매달 월세에 부족한 생활비, 빚쟁이들에 쫓겨 다니던 기억은 자존심 따위는 잡아먹고 결단력까지도 흐트러지게 하기 충분했으니까.

남자의 자격지심!

그녀라면 충분히 더 자신보다 멋지고 훌륭한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현은 그러나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이젠 자신도 돈 때문에 서럽거나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이젠 나이키 양말을 신을 수 있고, 찢어진 청바지도 살 수 있어."

예전에는 청바지 한 벌을 가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돌려 입었다.

온갖 찌든 때에 절고 해어진 청바지는 아예 무릎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입었다.

과거처럼 200원 비싼 소금을 사서 열흘간 악몽을 꿀 일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쉽게 변하지 않을 그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

"앞으로는 재밌게 살아야지."

이현은 저녁에 맛있는 식사를 하고나서 그녀를 위한 이벤트로 직접 쓴 시를 읽어 줄 생각이었다.

베르사 대륙을 여행하고 조각품을 만들면서 지은 시.

시인이나 작가는 아니지만 감정에 솔직하면 그것이 훌륭한 시라고 생각했다.

[ 내가 좋아하는 그대에게

 춥고 어두운 거리를 혼자 걸었습니다

 기댈 곳 없이 하루를 살아가던 나 우체국 아저씨처럼 먼저 다가와 준 너

 내 삶은 방송 조명을 틀어 놓은 것처럼 밝아졌습니다

 그대의 따뜻한 마음은 한겨울의 전기장판, 네 번 타는 가스보일러

 내 눈은 그대를 보고 싶습니다

 75인치 최신형 LED 텔레비전보다도 더 자세히

 내 귀는 그대의 속삭임을 듣고 싶습니다

 돌비 서라운드 홈시어터 시스템보다도 선명하게

 휴대폰 음성 통화 무제한을 신청한 것처럼 매일매일

 그대를 향한 이 마음은 공기청정기보다도 맑고

 삼중 필터식 정수기보다도 순수하며

 사이클론 진공청소기보다도 깨끗합니다 

 홈쇼핑 광고처럼 꾸미지 않고 블로그 맛집 과장 광고처럼 허황되지 않고 

 10인용 전기밥솥처럼 든든하고

 가스레인지 위의 프라이팬처럼 뜨거운 이 마음으로 ]

옛 시들처럼 감성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쓰기보다는 직설적인 표현들이었다.

아마도 대형 마트 관계자라면 특별히 좋아할 만한 시가 되리라.

이현은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조금만 수정을 할까. 대한민국은 역시 넓은 집인데……."

좋은 생활용품을 가진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고 아이까지 낳아서 기르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가 있겠는가.

이현이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오는데 가벼운 차림의 노신사가 개를 끌고 산책을 나온 모습이 보였다.

정득수 회장.

서윤의 아버지였다.

그 둘의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안녕하세요."

"어허허험!"

'곤란하다. 그녀와 지난번처럼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내 달라고 하거나 혹은 헤어지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대답하지?'

'하필이면 이놈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날씨가 좋다고 해서 무턱대고 살피지도 않고 산책을 나오는 게 아니었어. 대화를 나눌 준비도 없었는데. 뭐, 뭐라고 대답하지.'

이현과 정득수는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할 말은 서로 많았지만 상황이 불편하고 애매해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이현은 상대가 서윤의 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더라도 뻔히 자신을 여전히 안 좋게 보고 있을 텐데 어떻게 친근하고 평범하게 먼저 말을 건넬 수가 있겠는가.

일반인도 아니고 상상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 명예, 지위 등을 가졌던 어려운 사람이다.

하지만 정득수에게는 과거 그룹 회장 지위로 있을 당시의 당당함이 사라진 후였다.

'앞으로는 아버님으로 모셔야 될 텐데. 앞으로 큰돈을 주시면서 헤어지라고 하시면 정말 곤란한데.'

'지난번에 돈을 주고 부탁했던 일을 가지고 날 비난하면 어떻게 하지? 호성 그룹이 산산조각 난 사실도 알고 있겠지?'

걱정하는 부분들이 서로 달랐다.

다만 이현은 호성 그룹의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호성 그룹의 경영난에 대해서 한동안 텔레비전이 떠들썩하게 나오기는 했어도 로열 로드에 빠져 있느라 바빴다.

호성 그룹의 계열사들이 완전히 부도가 나서 실직자들이 대량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일시적인 자금난이라서 은행의 자금 지원으로 빠르게 수습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랑 만나는 것도 모르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 지난번에 대지의 궁전 전투에서 봤던 그 상인분이 맞느냐고 물어보고도 싶은데.'

'이놈이 로열 로드에서 그 정도의 입지를 다졌다니. 방송도 그렇게 자주 출연할 줄은 몰랐어. 지난번에는 내가 너무 무시했던 게 아닐까. 아… 그때 대지의 궁전에서 잠깐이었는데 날 보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그렇게 눈썰미가 좋진 않을 거야. 틀림없이 그래야만 해.'

이현과 정득수는 무려 30분이 넘게 눈치만 보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짹짹짹!

참새와 비둘기가 공원을 지나다니고, 학교가 끝났는지 어린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뛰어갔다.

어떤 말도 꺼내기 힘든 어려움!

서윤과, 남자의 체면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양쪽 모두 곤란했다.

정득수의 입장에서는 더욱 껄끄러운 측면이 많았다.

이현에게 헤어져 달라고 말을 했던 건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커서 저질렀던 일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하나밖에 없는 예쁘고 귀한 딸이 좋은 남자들을 다 놔두고 평범한 이현을 만나는 건 아깝다고 생각했으니까.

여전히 그 생각은 마찬가지였지만, 바로 근처에서 살면서 이현에 대한 평판을 제법 들었다.

집을 계약하던 당시에 부동산 중계소에서부터 이미 이현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떤 놈입니까?"

"잔머리가 여간이 아니죠. 보통 그 나이에는 돈이 있더라도 술 먹고 놀기 마련인데… 재테크에 관심이 정말 많아요. 벌써 이 근처에 땅도 제법 사 놨습니다."

"예에?"

"저쪽 공원 아래의 땅이 1,500평방미터는 될 걸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20년 후에 재개발이라도 들어가면 엄청나겠죠. 아파트는 돈이 안 된다고 안 샀지만… 급매로 나온 상가도 두 채나 매입을 했습니다. 그쪽으로 지하철역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저보다도 빨리 움직였더라고요."

땅 투기의 달인!

우유 배달, 신문 배달을 하면서도 장래에 돈을 벌면 사야 할 땅들을 미리 점찍어 놓았다. 그리고 발 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동네 슈퍼나 기사 식당에서도 이현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 청년이라면… 왜 물어보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후… 우리 애가 고등학교 때 사고를 치고 다닐 때 안 좋은 일로 엮인 적이 있지요."

"무슨 일이었습니까?"

"아들놈이 오토바이를 타고 그 청년 여동생을 자꾸 쫓아다녔는데 말입니다."

"그랬는데요?"

"걸려서 작살이 났지요. 팔다리가 몽땅 부러져서 오더니, 그렇게 말을 안 듣던 애가 정신을 차리고 가게 일도 잘 도와주게 되었습지요."

"…가만히 계셨습니까?"

"그때야 뭐 내놓은 자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청년이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발이 넓어서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이 동네에서 계속 살려면 꿈에도 그런 생각 못 합니다."

막걸리를 마시고 있던 동네 노인들조차도 이현에 대한 험담을 못 했다.

"훌륭한 청년이지, 암……."

"부지런하고 좋은 청년이야. 남자라면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들마저도 이현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동네에서 오래 살다 보면 주변의 이목이나 구설수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현의 할머니가 소싯적에 워낙 말을 잘했고 억척스러웠다.

게다가 최근에 말이 많은 노인 중에 몇 명은 이현으로부터 명절 때마다 떡값이라고 받아 챙기는 돈이 있었다.

철저한 매수를 기반으로 하여,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동네 유지나 마찬가지였다.

이현이 방송에도 자구 나오고 은근히 알부자라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인심을 휘어잡았다.

'무서운 놈이야. 정치인의 기질이 있어. 그래도 딸의 남자 친구에게 이끌려 다녀서는 안 되지.'

정득수는 서윤과의 교제는 허락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서글픈 일이지만, 아빠라고 반대를 하기에는 서윤과의 관계가 그렇게 친하지 않다.

서윤의 표정도 아주 밝아졌으니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그냥 친구로만 지냈으면 좋았으련만. 요즘 세상에 연애 한두 번 하는 정도야 흠도 아니니까. 나중에 진짜 멋진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해도 늦지 않지.'

정득수는 연장자인 만큼 본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 딸과는 잘 지내고 있는가?"

"예.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돈으로 막으려고 한 내 잘못도 있지. 두 사람의 감정을 억지로 때어 놓으려고 한 건 내 실수였어."

"괜찮습니다. 아버님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한동안 침묵.

정득수의 눈길이 이현이 들고 온 장바구니들로 향했다.

"시장에 다녀온 것 같은데."

"예. 저녁거리를 좀 준비해 왔습니다."

"해산물을 꽤 많이 사 왔군."

"서윤이 해물탕을 좋아해서요. 저녁 음식으로 차려 보려고 합니다."

"저녁을 같이 먹는가?"

"네."

"뭐라고! 외식도 아니고 한집에서? 단둘이?"

"그, 그런데요. 꼭 둘만 먹는 건 아니고 여동생도 가끔 같이 먹기는 합니다."

다시 한동안 침묵.

못마땅하더라도 다 큰 딸자식이었으니 연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참견하기도 어려운 부분이다.

얼마나 쫀쫀하고 촌스럽게 보이겠는가.

그렇지만 섭섭하고 서운한 기분은 들었다.

이현이 그 감정을 알아차렸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 신경 쓰이시면 저녁 약속을 취소할까요?"

"아닐세. 요즘 세상에 밥 한 끼 먹는 거 가지고 그렇게 할 필요야 조금도 없지. 내가 그렇게 남녀 관계에 대해서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당연히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말게."

"그러면 저기… 음식은 충분할 텐데 저녁을 같이 드시겠습니까?"

정득수는 정말 함께 저녁을 먹고 싶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과 그 남자 친구와 함께 먹는 저녁 식사.

딸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원하는 자리일 것이다.

이현이나 서윤의 집 마당은 넓기도 했으니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저녁 내내 이야기꽃을 활짝 피울 수도 있었다.

넓고 화려해도 삭막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할 일이 없었다.

그룹 회장으로 바쁘게 살아가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부르거나 찾아오는 친구도 없다.

집에서는 혼자서 로열 로드에 접속하는 쓸쓸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음, 난 밥은 이미 먹었군."

"그러셨습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커허험!"

정득수는 크게 헛기침을 했다.

'이 눈치도 없고 멍청한 자식아! 기본 예의도 모르냐. 사람이 사양을 하더라도 두 번은 제의를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래도 딸과도 정답고 살가운 사이는 아니라서 갑작스러운 자리가 부담스럽기는 했다.

정득수가 그룹 회장을 괜히 한 것은 아니라서 그의 머리도 비상하게 돌아갔다.

'이놈과 친해져야 되겠군. 사윗감으로는 터무니없지만 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이용해 먹을 수 있겠어. 차차 시간을 두고… 후후후.'

그때 이현이 말했다.

"근데 로열 로드에서 뵌 것 같은데… 상인 복장을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설마…… 난 자네를 만난 기억이 나지 않는데. 허허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너무 똑같으셔서요. 턱살과 배가 조금 더 나오긴 하셨지만."

"농담도 잘하는군. 내가 그런 가벼운 농담이 통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물론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득수의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회사에서 쫓겨날 때에도 이처럼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걸려 있는 체면이란 값을 환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열 로드에서 상인 바트와 전쟁의 신 위드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남자의 체면이란 정말 사소한 부분에서도 엄청난 무게를 가지는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었다.

"젊은 친구가 벌써 눈이 어두운 모양이군. 절대 내가 아니네."

"아, 그렇겠죠. 역시 상인의 연미복은 유행에 뒤떨어지는 복장이라서요. 회계 스킬의 적용은 높은 편이지만 행운이 떨어져서 초보자들에게는 실제 거래 성공 가능성이……."

"가능성이 어떻게 되는데? 아, 그래서 자꾸 흥정을 실패하고 있었나. 이렇게 억울한 일이!"

"……."

"……."

이현과 정득수는 거의 동시에 공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맞았구나.'

'아니, 이놈이?'

★★★★★★★★★★★★★★★★★★★★★★★★★★

위드는 로열 로드에 접속했다.

목표물은 용기사 뮬과 그리폰 군단!

"다른 먹잇감도 많지만 이때쯤이면 제대로 된 진수성찬을 건드려 볼 때도 되었지."

명문 길드들을 건드려 본 경험으로 인해 그들의 속성을 알고 있었다.

'몇 번 타격을 입었으니까 지금쯤이면 온갖 곳에 날 잡을 함정을 만들어 놓고 있겠지?'

위드가 습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에는 헤르메스 길드의 유저들이 대거 잠복해 있을 것이다.

이른바 쥐 덫을 놓고 기다리다가 공격을 가하려는 것이다.

라페이의 꼼수 정도는 당연히 이쪽에서도 간파를 했다.

유명한 던전들의 구석에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고레벨 유저들 몇십 명이 숨어 있다가 공격을 가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중앙 대륙을 활보하는 대가로 치러야 하는 극단적인 위험을 언제나 감수해야 한다.

위드는 이럴 때일수록 발상의 전환을 했다.

'분명히 여러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나만 잡을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매우 크니까. 그렇지만 오히려 절대 나타나지 않을 장소들을 습격한다면, 거기는 비어 있을 수밖에 없겠지?'

위드가 공격하지 않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장소나 가치가 적은 지역을 목표로 삼으면 된다.

한동안 북부 지역에서 사냥이나 퀘스트에 전념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드래곤을 만나야 하는 퀘스트 기한이 이젠 이레도 남지 않았다.

간단한 물품 운송으로 끝나는 퀘스트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생각해서 큰 목표를 삼을 수도 있었다.

'용기사 뮬이라면 제물로 충분하지. 그마저 피해를 입히게 된다면 헤르메스 길드도 대대적으로 위축될 거야.'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위드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냥을 하면서도, 반란군을 무찌르거나 퀘스트를 하면서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게 된다.

작은 이익이 모여서 큰 결실을 낳는다.

헤르메스 길드의 절대적인 강함에 대한 인식을 꺾어 놓는다는 점에서도 이익이었지만 전체적인 실익도 고려해야 했다.

포르모스 성의 영주 데커드에 이어 용기사 뮬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제물.

헤르메스 길드에서 미처 대비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목표를 잡는 게 이점이었다.

"하벤 제국에서도 최정예 군단. 그리고 용기사 뮬은 개인적인 능력도 엄청나다고 알려져 있지. 그리폰 부대인 만큼 어지간한 함정으로는 잡기도 어려워. 그렇지만 빈틈이 없다고 여길 테니 대비도 취약할 거야. 승부를 걸어 보기에는 재미가 있겠군."

위드는 유린을 통해서 그라디안 왕국으로 이동했다.

산과 숲이 끝을 모르는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대자연의 그라디안 왕국.

엘프들과 온갖 희귀한 특성을 가진 이종족들도 많았다.

환경적인 특성 때문에 성과 도시를 기반으로 자리 잡은 세력보다는 일찍이 블랙소드 용병단이 장악했던 왕국이기도 했다.

★★★★★★★★★★★★★★★★★★★★★★★★★★

"정면 승부는 계속 피해라. 게릴라전을 유지하면서… 제국에 끊임없이 피해를 가하자."

블랙소드 용병단의 단장 미헬은 휘하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하벤 제국의 영토가 된 그라디안 왕국과 네스트 왕국의 땅을 되찾을 생각은 깨끗하게 포기했다.

대신 약탈을 통해서 물자를 차지하고, 군대에 피해를 주었다.

하벤 제국의 군대를 약화시키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

블랙소드 용병단은 자유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하벤 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력이 절반이상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블랙소드 용병단의 비밀 집주에 있는 미헬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전쟁의 신 위드?"

흑사자 길드 칼리스를 통해서 받은 편지였다.

위드는 포르모스 성에서 대활약을 하면서 흑사자 길드 유저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서 미헬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밀봉된 봉투가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뜯어보니 엄청난 악필로 쓰인 내용이 있었다.

 [ 보름달이 뜨는 날.

 전군을 이끌고 노드 그라페 침공해.

 윰은 내가 찜. ]

워낙 짧아, 한번 슥 훑어보니 끝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이것은… 암호인가?"

편지를 뒤집어서 보기도 하고, 문장들을 띄엄띄엄 읽기도 했다.

심지어는 물에 담가 보거나 태워 볼까도 고민을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블랙소드 용병단의 전 병력이 애들 칼싸움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위드 하나만 믿고 덤벼들자니 너무 황당한 일이 아닌가.

미헬은 편지를 가져온 흑사자 길드의 유저 헤겔을 향해 물었다.

"위드가 이 편지를 보낸 게 틀림없겠지요?"

"예, 맞다니까요. 아, 거 의심도 많으시긴."

"편지가 헤르메스 길드의 역공작일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헤겔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훗, 위드 형은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입니다. 거의 친형이나 마찬가지일 정도의 사이니까 염려를 놓으시죠."

"으음, 그렇다면야 믿을 수는 있겠지요."

헤겔은 흑사자 길드에서 나름 단단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흑사자 길드의 칼리스 역시 위드의 편지라고 직접 보증을 했으니 확실할 것이다.

헤겔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근데 정말 위드 형의 편지대로 노드 그라페를 침공하실 겁니까? 그거 성공하기 힘들 텐데요."

절벽 위에 세워진 성채 노드 그라페!

그라디안 왕궁의 수도 버겐 성의 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현재는 이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부의 역할을 한다.

하벤 제국군의 병력이 대거 배치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자체로 대단한 요새였다.

블랙소드 용병단이 그라디안 왕국을 정복할 당시에도 노드 그라페 때문에 애를 먹었으며, 하벤 제국에 빼앗길 때에도 나흘이나 버틸 수 있었다.

지금은 그라디안의 치안이 불안정해져서 삳당한 병력이 빠져나갔다고 하지만 그래도 습격한다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미헬도 속으로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전 설명도 없고, 전후 처리에 대한 논의조차도 없이 전쟁을 벌여?'

이런 큰 제안을 해 올 거라면 얼마나 합리적인 계획인지도 설득을 해 줘야 할 게 아닌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블랙소드 용병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절해야 마땅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건 아니야.'

미헬은 그러나 마음만큼은 계속 노드 그라페를 공격하는 쪽으로 끌렸다.

헤르메스 길드가 쌓아 올린 업적들은 자신이나, 과거의 명문 길드들만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다.

지금까지 그것이 가능했던 유일한 사람은 위드였다.

위드가 나설 때마다 헤르메스 길드는 참패를 면치 못하였으니 그의 의견이나 생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존중할 가치는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말보다는 행동이 아닌가. 이런 사람이야말로 믿을 수 있지. 위드가 헤르메스 길드와 결탁했다는 건 최근의 상황을 봐서 절대로 불가한 일이고.'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헤르메스 길드는 너무 강하다. 그들을 지금 내가 물리칠 수는 없어. 근거지를 갖지도 못할 테지. 게릴라전으로 피해를 입히더라도 이 방식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기회. 그래, 내가 한번쯤은 오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기회가 아닐까.'

미헬은 반신반의하고 있는 헤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린 침공할 것이네."

"정말로요?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리셨는지 이유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미헬은 물끄러미 위드의 짤막한 편지를 다시 보았다.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위드는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러 설득이나 사족을 달지 않더라도 충분하다고 본 것 아닐까.

윰을 자신이 책임진다는 말에도 확실한 자신감이 드러났다.

"자네도 큰 집단을 이끌게 되면 느끼게 될 날이 오겠지.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살게 된다는 것을 말이야."

미헬의 강렬한 눈빛이 헤겔을 향했다.

내내 블랙소드 용병단에 대해 무시하고 있던 헤겔이었다.

위드와의 약간의 친분, 흑사자 길드에서도 요직에 오른 자신의 입지 때문에 미헬조차도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뜻인지 조금이나마 알겠습니다."

"알아줘서 고맙군. 자네 역시 계속 성장을 한다면 언젠가 어깨를 같이할 날이 있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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