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48권 : 2. 흔들리는 민심 (323/520)

2. 흔들리는 민심

아렌 성의 중앙 접견실.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이 대거 모인 자리에 패잔병의 신세로 돌아온 다리우스가 불려나왔다.

"더러운 일들을 잘 처리해내더니 이번에는 제대로 물렸어."

"실력에 비해서 운이 좋았던 거지. 결국 밑천이 드러났을 뿐."

"그래도 다리우스는 수뇌부의 총애를 받아왔는데 처벌을 하게 될까?"

접견실에 모여 있는 유저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로열 로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헤르메스 길드에는 오로지 승리뿐!

패배를 겪은 지휘관들은 공개적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심하면 영토나 병력의 회수, 길드에서의 축출까지도 이루어졌다.

"천여 명의 몰살. 아무 책임을 지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문제야. 다리우스도 마찬가지지."

"하긴 드라카님도 그날 이후로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깐."

하벤 제국의 북부 총사령관으로, 서열 10위 안에 들던 강자 드라카.

아르펜 왕국에서의 큰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력을 잃은 후 근신에 가까운 처분을 받고 있었다.

"다리우스도 이젠 끝났다고 봐야해."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력이 강하지도 못하지. 사냥에 실패한 사냥개를 그냥 내버려두면 길드의 규율 자체가 망가지게 될 걸."

"로자임 왕국 출신 주제에 거만한 몰골로 돌아다니는 광경을 안 봐도 되니 좋겠군."

이윽고 라페이와 길드의 수뇌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리우스에 대한 공식적인 문책이 이루어졌다.

"몰스 던전에서의 참패. 생존자 전무. 지휘를 맡았으면서 아무도 살아오지 못했고 목표를 제거하는데도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위드만 본인이 겪은 일이니 잘 알고 있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다리우스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속마음은 달랐지만 반성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서 책임을 덜려고 했다.

"하지만 위드를 사냥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함정이라는 습격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길드의 중역 중의 한 명인 란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전투 결과가 아군 1054명 전원 사망입니다. 그에 비해 북부 유저들은 고작 34명이 죽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전력상으로도 북부 유저들이 오히려 더 적었던 것으로 방송으로 확인되었죠. 이 결과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습니까?"

"그거야 몰랐으니까요. 모르고 당한 겁니다."

다리우스는 전투에서 지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변명거리는 있었다.

"전혀 사전 정보가 없이 갑자기 싸우는데 적이 500명인지 1000명인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도망치기 바빴다는 거 아닙니까."

"쫓기는 입장에서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노력? 결과를 못 냈으면서 무슨 노력입니까."

"저와 같이 작전에 참여한 유저들을 다 바보로 봅니까? 그 상황이었다면 여기에 있는 누구든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 텐데요?"

다리우스가 란탄의 추궁을 반박하면서 아렌 성의 중앙 접견실에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곤란하군요."

"이번에야 말로 위드를 제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라페이와 수뇌부들은 씁쓸하게 대화를 나눴다.

다리우스에 대한 처분이야 그들 입장에서 큰 문제는 아니다.

다만 수뇌부의 의견도 둘로 갈린 상태였다.

"작전의 실패는 확실합니다. 형평성을 고려해서라도 패장을 대우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확실한 처벌을 공식적으로 건의합니다."

"헤르메스 길드가 무적이 아닌 것도 오래되었죠. 위드가 함정을 파놓았는데 실패한 걸 가지고..."

"문제는 방송으로 다 퍼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시청률 16%. 최소 2억 명 이상이 또 우리 헤르메스 길드가 죽을 쒀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죽 얘기는 그만합시다. 죽 소리만 들어도 토할 거 같으니까."

"져도 너무 무력하게 졌습니다. 게다가 네크로맨서에게 유저의 시체를 던져주다니... 빨리 성장하라고 영양제까지 투입한 꼴이 아닙니까."

"던전의 영상을 살펴봤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잘 싸운 게 아니긴 하죠."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은 상대방의 실수에 대해 용납하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과 승자에대한 확실한 대우.

이것들이야 말로 험난한 명문 길드들의 대립 속에서 헤르메스 길드가 최고가 된 비결이었다.

라페이는 결국 수뇌부의 의견을 모아서 결론을 냈다.

"다리우스는 헤르메스 길드원으로 명예롭지 못한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에 대한 처분으로 2개월간 A급 사냥터 진입 금지, 소유하고 있는 영토 체그랍 마을의 세금을 30% 높이겠습니다."

* * *

다리우스는 라페이의 결정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마음이 돌아섰다.

'그래. 이런 식으로 단물만 먹고 버린다 이거지?'

로자임 왕국에서부터 자신이 숱하게 뒤통수를 쳤던 방식이었다.

처음부터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입을 했던 것도 아닌 마당에 애정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너희들을 믿지도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쪽에서 먼저 움지여야지.'

다리우스는 아렌 성에서 돌아온 이후에 비밀리에 자신의 영지인 체그랍 마을의 자산을 처분했다.

중간에 대리인을 세우기도 해서 잠시 숨기는 방법쯤이야 수많은 일을 처리한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사냥개로 활동하며 벌어들인 자산은 꽤 많았고, 그걸 싸게 팔아야 했지만 그마저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라페이와 수뇌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냥개에게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들을 쥐어줬기 때문이다.

자산 처분은 하루 이틀 만에 대부분 이루어졌고, 영주성에 있는 말과 마차처럼 값나가는 물품들도 팔아치워졌다.

다리우스는 신속하게 그날 저녁 KMC미디어와 인터뷰까지 잡았다.

그동안 그는 유저들 사이에서 악명은 있었어도 전국적인 인지도는 뒤 떨어졌다.

몰스 던전에서의 몰살로 오히려 이름이 알려져서 방송국이나 시청자들도 알게 되었다.

"지금 생방송인가요?"

"생방송은 아니지만 편집을 거쳐 약 한 시간 후에 방송이 될 예정입니다. 보도 결정은 부장님이 결정하실 문제지만요."

"그래요."

다리우스는 취재를 나온 기자를 보며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뱀파이어를 흉내 낸다면서 특별히 붙인 이빨이었다.

"쓸 만한 내용이 있어야 방송이 되겠죠?"

"예. 위드와의 전투나 몰스 던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소감 정도로 시작하면 방송에 좋을 것 같은데요."

"그거야 당연히 해드려야 할 일이고... 일단 하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뭐든 하십시오. 다 녹화되고 있으니까요."

로열 로드 내에서 인터뷰가 진행중이었다.

영상의 녹화는 기본적인 시스템에서 지원을 해주었다.

다리우스는 느긋하게 앉아 있던 취재 기자를 향해 충격 발언을 꺼냈다.

"헤르메스 길드는 썩었습니다."

"예?"

"수뇌부는 뻔뻔한데가가 무능하기까지 하죠."

취재 기자는 놀라움에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이야기신지... 왜 갑자기수뇌부를 비판하십니까?"

방송국에서도 나름 사전조사는 했다.

다짜고짜 수뇌부에 대한 욕은 헤르메스 길드의 사냥개로 알려진 인물에게 들으리라 생각했던 말은 아니었다.

"라페이는 자신의 멍청한 작전 명령을 감추려고 저를 희생양으로 삼았죠."

"아. 이번 사건의 희생양이요."

"그러니까 몰스 던전에서 위드가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걸 몰랐던건 제 책임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네요."

취재 기자는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몰스 던전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전병력을 처박은 다리우스의 말이었지만 그래도 약간은 이해되는 면도 있다.

'근데 이런 변명을 방송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진 않겠는데...'

다리우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정보전에서 1차적으로 실패. 2차적으로는 라페이와 수뇌부에서 책임도 있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짠 계획대로 현장에서 움직이다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네. 듣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무적의 헤르메스 길드? 웃기지도 않죠. 자기들도 위드와 관련된 일에는 맨날 똥만 싸고 있으면서. 실패를 하면 열심히 싸운 사람들에게만 희생양으로 몰면서 전부 뒤집어씌웁니다. 정말 잘못한 자들은 고위층에 앉아서 말로 명령을 내리는 자들인데도 말이죠."

취재 기자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신랄하긴 하네. 근데 이걸 어떻게 편집을 하지?'

그가 보기에는 사냥개가 주인을 물고 있었다. 분명 재밌긴 광경이고 약간의 이슈가 되긴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터뷰를 방송으로 올리기에는 애매했다.

'핑계라고만 할 텐데. 뉴스에서 주요 부분만 내보내는 쪽으로 정해야할까.'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뽑으면 더 많은 시천자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헤르메스 길드를 욕하길 좋아하는 시청자들은 많고도 많았으니까!

다리우스가 피해자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헤르메스 길드는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었습니다. 진짜 척결되어야 할 대상은 잘못된 통솔로 위대한 길드를 우습게 만들어버린 라페이입니다. 그리고 자기 몫을 못하고 멍청이처럼 웅크리고 있으면서 사냥만 하고 있는 바드레이죠."

"..."

취재 기자의 눈이 커졌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하면 뉴스에서 파급 효과는 꽤 있겠다.'

다리우스의 거침없는 말은 계속 이어졌다.

"라페이가 헤르메스 길드를 이끌면서 그동안 보여준 능력은 인정합니다. 네. 그래서 중앙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은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그것도 형편없이요."

"네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다리우스의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맹비난이 게속 이어졌다.

취재 기자는 10여분 정도는 흥미롭게 들었지만 슬슬 지루함이 느껴질 때였다.

"기자님. 헤르메스 길드가 그동안 얼마나 추잡한 일을 많이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예? 물론 대중들에게 비판 받을 일을 제법 하긴 했다는 거로 알고있습니다."

"그런 거 말고요. 비밀리에 저지른 추악한 짓들 말입니다. 이른바 감춰진 진실 같은 것들이요."

* * *

다리우스는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들이 숨기고 있던 흑역사들을 대대적으로 공개했다.

그가 사냥개로서 직접 저지른 일도 있었고, 길드 활동을 하며 나름의 정보를 꾸준히 모아 아는 것도 많았다.

수뇌부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영토 내에서 약탈한 정도는 예사였다.

"길드 내에서 힘이 쎈 영주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도 작업을 했죠."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이었습니까?"

"길드 내에 그들의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건 애교 수준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지정해서 싸움을 부추기기도 했고, 해당 도시에서 활동하는 고레벨 유저들이나 상인들을 접촉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죠."

"영주들에게는 타격이 있었겠군요."

"당연한 거죠. 영주들이 크면 수뇌부 입장에서는 다루기 힘드니까.처음부터 길들인 거죠. 몇 명은 경제력이 약화되면 그걸 빌미삼아 영주의 자리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렇게 까지요?"

"예. 구체적으로 제가 보르데만 도시에서는 반란군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반란군까지요."

"저나 수뇌부의 직속 부대. 믿을 만한 유저들이 반란군 행세를 하면서 도시를 뒤집어놓은 것이죠. 영주의 군대와 싸우기도 했고요."

새로운 사실에 느슨해져 있던 취재기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통지 행위를 위해서 다리우스님이 비밀공작을 했다는 말씀이시군요."

"통치 행위?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냥 기분 나쁘면 같은 편이라도 힘으로 찍어 누른거죠."

"말씀하신 부분의 증거 자료가 있을까요?"

"그럼요. 당시 영상들. 전투를 비롯해서 라페이에게 명령을 받는 장면까지도 전부 녹화된 게 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전달해드리죠."

다리우스는 42가지늬 비밀공작에 대해서 공개를 했고, KMC미디어에 서는 그대로 방송했다.

뉴스로서는 경이적인 시청률이 나왔고, 로열 로드와 관련된 각종 사이트에서는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 딱 걸렸네.

- 진짜 더러운 것들.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다.

- 모르기는. 원래 딱 이 수준 아님?

- 정치판이 애들 다 버려놓은 듯. 로열 로드에서 정치질을 제대로 하고 있었네.

- 헤르메스 길드라면 규모 때문에라도 이만큼은 할 수 있었죠.

- 같은 편까지 공작한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됨.

- 어디 같은 편 뿐임? 방송 보니까 길드 많이 비판하는 도시는 반란군으로 위장하고 일반 유저들까지 쓸어버렸다는데...

- 헐. 헤르메스 길드는 해도 너무하네.

- 초 막장임. 얘들은 망해야 됨.

- 자유로운 북부로 이주합시다. 언제 우리도 그 대상이 될지 몰라요.

다리우스는 인터넷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중앙 대륙 어느 곳의 선술집을 가도 헤르메스 길드를 성토하는 목소리들로 가득했다.

'이만하면 들고 갈 선물은 충분할테지.'

그의 목표는 로열 로드에서의 성공과 강해지기.

단단히 자리를 잡은 헤르메스 길드를 이용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내쳐지면서 실패했다.

'어중간하게 버티고 있으면서 오지도 않을 기회를 기다리기보단 내가 만드는 것이지. 성공은 개척하는 사람의 것이다.'

다리우스의 머릿속에는 계획이 섰다.

라페이와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폭로를 하면서 그들의 입지를 줄이는것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큰 명성과 유저들의 호의를 얻게 되며, 아르펜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면 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아르펜의 영주라면... 레벤 200대의 유저도 있다는데. 풋. 내가 끼기에는 우스운 수준이지. 그래도 그곳은 장점이 많으니까 자리를 잡기에 좋아.'

아르펜 왕국에서 다시 도약을 하리라.

다만 다리우스의 계획대로 이루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 근데 까놓고 보면 다리우스 얘가 제일 나쁜 놈 같은데.

- 사냥개는 사냥개일 뿐임.

- 주인도 물었네요. 이제.

-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이런 사냥개들 때문에 더 살기가 힘든 세상이죠.

- 헤르메스 길드에 꼬리 흔들다가 안 될 것 같으니 저러는 듯.

다리우스로부터 터져 나온 헤르메스 길드의 스캔들!

각 방송국장들은 조용한 자리를 마련했다.

"윤 국장님. KMC미디어에서 시청률이 꽤 나왔다죠? 아쉽겠습니다."

"허. 우리도 다리우스 그 사람과의 인터뷰를 잡긴 했는데 하루가 늦어지는 바람에 특종을 놓쳐버렸습니다."

"시청률도 그렇지만... 화제성을 KMC미디어에서 최근 독점하고 있는 부분이 아쉽습니다."

CTS미디어의 신임 보도국장 윤창선이 불편한 듯한 목소리에 짜증을 조금 담았다.

"KMC에서 특종을 자주 터트리기는 하지요."

"위드와의 연관도 그렇고... 아무래도 우리도 쫓아가는 보도는 피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호오. 무슨 고견이 있으신지."

윤창선은 40대 후반의 다른 국장들에 비해서는 젊었다.

KMC미디어를 제외하고 12개 언론사들이 모인 자리였지만 방송국 사장 아들이라는 직함은 다른 언론들을 상대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했다.

"방송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취재만이 살길이겠지요."

"취재라... 역시 좋은 말씀이십니다."

"항상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긴하지요."

방송국장들은 노련하게 웃어넘기면서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방송국 내부의 치열한 정치를 이겨내고 성과를 내세우며 국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윤창선의 제안으로 은밀하게 모인 자리에서 식상한 취재 타령이나 하지 않을 거란 기대들을 갖고 있었다.

윤창선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취재의 목적이 무엇이냐인데. 위드쪽의 관심이나 폭발력은 뛰어납니다. 아시다시피 사냥 영상만 내보내더라도 시청률이 좋죠."

"맞습니다."

국장들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다른이들의 표정을 훑으며 지나갔다.

위드가 또 과거로 돌아가서 사냥을 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퀘스트로 한 번만 가능한 게 아니었던가?'

'또 다른 모험? 어떤 건지는 몰라도 이것도 꽤나 흥미가...'

'뭐든 벌어질 수 있고, 또 그게 황당할 정도로 크게 커지는 것이 위드의 모험이지.'

방송국들은 치열하게 위드의 집으로 선물세트를 보내면서 물밑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윤창성도 뻔히 알고 있지만 그 부분은 모르는 척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우리 방송국의 입장에서 시청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못 써멋는 재료들이 꽤 있습니다."

"재료라고 한다면?"

"이번에 폭로 때문에 제가 알아보니 우리 CTS미디어에서도 헤르메스 길드에 대해 따로 모아놓은 정보가 꽤 되더군요. 다른 방송국들도 상황이야 마찬가지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알고 있는 자잘한 정보들이야 꽤 됩니다. 큰 것도 있고."

온라인 중심인 로열스파이더의 한상규 국장이 관심을 드러냈다.

"지금까지는 헤르메스 길드의 영향력이 컸었고... 솔직히 취재나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그들의 협조를 원하는 입장이라서 방송을 안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막았던 정보들을 뉴스에 내보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윤창선이 얼굴 가득 자신감 있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때부터 국장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방송국들이 헤르메스 길드를 일제히 까자는 건데.'

'시청률은 높게 나올 거다. 베르사 대륙이 뒤집어질지도 모르지만 한꺼번에 한다면 그들의 보복을 신경 쓸 필요는 없지.'

'헤르메스 길드도 힘이 예쩐 같지 않아. 중앙 대륙의 절대 권력도 무너지고 있다. 반란군이 없더라도 말이지.'

국장들은 이 이야기야 말로 이번 회동의 주요 주제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막 KR채널의 국장이 고개를 저었다.

"방송국들은 유저들 간의 분쟁에 있어서 중립을 지켜왔습니다. 시청률 때문에 헤르메스 길드는 비난하는 것이 그 중립을 위반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죠. 방송 자체에서의 중립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보도할만한 뉴스가 있는데도 하지 않았던 것이 헤르메스 길드를 도와주었던거 아닙니까?"

윤창선의 말에 국장들은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비난이나 폭로가 아닙니다.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우리가 했던 것이 암묵적인 카르텔이나 눈치 보기가 아니었습니까. 방송국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보도할 가치가 있는 걸 이야기하자는 건데 나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국장들 사이에서는 은근한 교감이 흐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다리우스라는 변수로 인해 벽은 무너졌버렸다.

한 방송국이라도 헤르메스 길드가 감추고 싶은 흑역사들을 보도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흐름은 만들어질 것이다.

시청률의 파도가 일어날 때에 그 흐름을 타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방송국만 손해를 보게 된다.

일부러라도 대세를 만들어야하고 최소한 같이 따라는 가야한다.

'다들 반대는 안할 모양이군. 그럼 나도 묻어가자.'

직장인으로서 승진과 장수의 비결이었다.

* * *

- 다낭 던전에서의 진실.

- 은밀한 살인자들.

- 강압으로 빼앗긴 보물.

다리우스의 폭로와 방송국들의 보도로 로열 로드의 게시판은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저도 헤르메스 길드의 피해자에요. 운영하고 있던 경마장을 통째로 빼앗겼어요."

"그냥 가져갔단 말입니까?"

"네. 내놓으라고 해서요. 거부하면 죽이고 뺏어간다고 하는데 힘이 없느이 어쩔 수 없잖아요."

피해자들의 인터뷰도 매일 방송국을 통해 보도되었다.

방송국들이 그동안 갖고 있던 사건 정보들로 흐름을 만들어나가자 제보가 그치지 않았다.

"데이트를 해주지 않으면 죽인다고했어요."

"갑자기 헤르메스 길드 사람들이 초보 사냥터의 입구를 지키면서 5골드씩을 받았어요. 원래는 1골드였죠. 그 돈을 안내면 바로 죽였어요. 어쩔 수 없이 도시 안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사냥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죠."

"헤르메스 길드 유저라면 정말 부유하고 강하잖아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골드도 많이 벌 텐데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한번은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대답이 그냥 괴롭히는 게 재밌더래요."

명문 길드들이 관행적으로 저지르던 폭거에서부터 쌓이고 쌓여 있던 사건들이 한꺼번에 보도가 되었다.

위드는 주변 상황에는 신경 쓰지 않고 사냥에만 집중했다.

칼라픽 왕궁에서의 일주일 전투!

몬스터들의 무리까지 물리치고 나서 동료들은 지쳐서 땅에 드러누웠다.

"으아... 이젠 때려죽여도 못 싸워."

"체력이 바닥이야. 끝도 없어. 몬스터들이 이렇게 침략하니 왕궁이 멸망했구나."

"끄... 이런 전투라니. 한계를 경험 했어."

동료들은 누워서 언데드 부대를 이끌고 도망치는 몬스터들의 잔당을 사냥하는 위드의 뒷모습을 봤다.

바르칸의 지옥 군주의 로브.

불길하고 음침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핏빛 로브였지만 그걸 입고 있는 당사자는 언데드에게 잔소리를 하며 전투를 치른다.

위드의 오랜 동료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파이톤에게는 남달랐다.

'전쟁의 신. 강하군.'

전투를 치르면 멈추지 않는다.

칼라픽 왕궁에서의 전투를 치르며 위드의 순간 판단이나 공략이 눈부실 정도로 뛰어난 걸 확인했다.

'거기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다보면 질리기 마련인데. 전투를 하면 지치질 않는구나.'

위드는 전투를 치르면 아무 생각이 없었다.

체력이 허락하는 한 싸운다.

극도의 노가다 정신!

지겨움이나 정신적인 피로 같은 건 사치일 뿐이었다.

- 칼라픽의 생존자 완료

왕국 칼레에서의 전쟁은 마침내 끝났다.

무능한 왕가는 무사하지만 왕권은 땅에 떨어졌으며 주민들은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마땅한 보상이 있으리라.

<전사의 용맹을 증명하셨습니다. 행운, 정신력, 투지, 힘이 2씩 증가합니다. 명성이 5,000 늘어납니다. >

칼라픽 왕궁에서의 전투가 끝났을 무렵에는 동료들의 스탯이 올랐다.

위드의 경우에는 메세지창이 한 가지가 더 떴지만.

< 불길한 힘으로 칼라픽 왕궁을 뒤덮었습니다. 정식력, 지혜, 지식이 2씩 오르고, 기품, 명예, 신앙, 행운이 2씩 감소합니다. 마나의 최대치가 300 늘었습니다. >

<언데드 소환의 업적! 매일 3만 마리 이상의 언데드를 소환하였습니다. 시체들을 깨우는 자!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언데드들의 생명력이 5% 많아집니다. 언데드 소환에 필요한 마나가 3% 감소합니다. >

"어쨌든 이걸로 좋군."

스탯들의 변화.

네크로맨서에게 필요한 업적도 달성해가면서 강해지고 있었다.

레벨도 471을 달성!

위드의 장비에 의존하지 않은 기본 지혜 스탯도 500을 채웠다.

현재의 사냥터가 좋기도 했지만 몰스 던전엣 영양가 만점의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을 해치우며 스탯 보상을 받은 덕이 컸다.

"이제 잠시 관람을 좀 하죠."

반란군 마법사들을 해치우고 획득 한 마법서!

위드는 공중 부양의 마법서를 읽었다.

- 바람을 좋아하던 마법사 우드렌은 어느 날 작은 꿈이 생겼다.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늘을 나는 마법을 개발하기 위해 대륙을 여행하면서...

마법사는 그 자체로 역사서!

"으하암."

위드는 하품을 하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책을 읽었다.

료열 로드와 관련된 논문들이야 메모까지 하면서 찾아볼 정도였지만, 마법서에 적힌 대부분의 내용들은 그리 쓸모가 없었으니까.

모험에 대한 기록들이 있지만 기본 마법의 경우는 그야말로 잡다한 것 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드렌이 어느 마을에서 어떤 여관에서 잤는지까지가 기록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본 아름다운 여자에게 말을 걸었던 내용까지 나왔다.

- 우드렌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저 마법사인데요. 괜찮으시면 우리 하늘을 날아보지 않을래요?"

"땅을 벗어나서 하늘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높은곳에서 눈부신 태양의 뜨거움과 시원한 바람을 맞아보세요."

"아이 참. 저 남자친구 있어요. 아저씨."

< 공중 부양 마법을 습득하셨습니다. >

위드는 동료들에게 전부 공중 부양 마법을 걸어줬다.

마법사 계열이라면 전부 공중 부양 마법을 익히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혜 200이상, 약간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정도.

공중 부양 마법이 고급에 오르게 되면 비행 마법을 터늑할 수 있다.

그건 곧 우드렌의 모험을 16장까지 읽어햐 한다는 고역이 있었을 뿐!

"우와. 멋있어요."

위드와 동료들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올라서 땅을 내려다봤다.

건물이 부서지고 쓰러진 칼라픽 왕궁.

전쟁의 참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에는 수천 여구의 언데드들이 걸어 다이고 있었다.

저 멀리 반란군에게 함락된 지 오래되어 폐허가 된 요새가 보였다.

지금은 위드의 언데드 군단에 휩쓸려서 살아남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이런 곳에서 싸웠구나."

"해낸걸 보니 대단하긴 한 것 샅습니다. 대부분은 언데드들이 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런 걸 겪고 나면 평범한 전투는 시시할 것 같아요."

그리고...

크구구구궁!

대지가 떨리면서 가라앉고 바닷물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건물들이 파도에 휩쓸려서 부서져나가고, 서성거리면서 돌아다니던 언데드들 조차도 허우적거리다가 사라졌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지만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로 한 단계씩 강해진 동료들에게는 정말 다행스러웠다.

'됐다. 이제 내려가서 안 싸워도 돼.'

'끝났다... 진짜 끝이 있구나.'

'6시간 동안 참은 화장실을 간 것 같은 느낌이야. 정말 시원해.'

위드가 마치 한여름에 아이스크림을 사먹자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간단히 사냥이나 갈래요?"

수르카가 단호히 말했다.

"안 가요."

* * *

대륙 최고의 재봉사 드라고어.

그가 천과 가죽으로 만든 옷은 마법 방어력이 지극히 뛰어났다.

"치마로 만들어주세요."

"에... 직업이 검사 아닙니까? 치마로 제작하면 방어력이 낮은데요."

"괜찮아요. 짧고 잘 달라붙게 만들어주셔야 돼요!"

드라고어에게는 귀여운 여고생들의 주문도 밀려들어왔다.

'이런 이득이...'

모델급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 음유시인들의 주문도 줄을 이었다.

"드레스를 원하는데요. 일주일 후의 공연 날짜까지 가능할까요?"

"맞춰드리겠습니다."

가끔은 덩치 큰 남자들도 왔다.

"도복 스타일로 해주십쇼."

"재료는 뭘로 할까요?"

"호랑이 가죽이요."

"그게 호랑이 가죽으로 하면 디자인이..."

"참 좋겠지. 웃통이 잘 드러나는 것도 좋습니다."

"혹시 성함이 검...으로 시작되지 않습니까?"

"알고 계시네? 전 검이백사십구치 라고 합니다."

아르펜 왕국의 마스코트가 되어 있는 검치와 수련생들!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의 존재를 모르는 유저들은 별로 없었다.

"무식하긴 한데 보통 사람들한테 사납게 안 대해."

"광장에서 여자들이 지나가면 딱 얼어붙는다. 진짜 신기할 정도야."

"전투 계열 직업은 저 분들이랑 꼭 한 번 사냥을 해봐야하지. 배울 점이 많냐고? 그냥 마법사로 전직하고 싶어질 걸."

드라고어는 아직 모라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새벽의 도시와 벤트 성, 바르고성채가 커지고 있다고는 해도 모라타의 인구와 영향력만큼은 아직 아니었다.

도시에서 장사하는 보석 세공사나 대장장이들과도 친했고 북부의 상인들과도 자주 만났다.

가끔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재봉사답게 도시 생활을 즐기고 있는 드라고어!

'재봉사 마스터 퀘스트 안 하니까 정말 편하구나.'

이미 재봉사 마스터 퀘스트에서 13단계를 진행했다.

인형 눈 10만개, 단추 10만개, 바늘에 실 꿰기 10만개, 120미터 양탄자 뜨개질.

'아니. 무슨재봉사는 퀘스트가 모험도 없고 그냥 순전히 쌩노가다 뿐이야? 조각사는 무슨 대륙 전체를 돌아다니는데...'

드라고어는 가끔 작업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봉사 중에서는 딱히 경쟁자라고 부를 만한 유저도 없어서 혼자만 삭혀야 했다.

'퀘스트를 하고 싶다. 나도...'

드라고어는 재봉사 길드를 매일 방문하다가 퀘스트를 얻어내고 말았다.

"불우한 소녀가 있어요. 그녀가 결혼식을 하려고 하는데... 입을 옷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

기꺼이 웨딩 드레스 제작 퀘스트에 나섰지만 알고 보니 그녀의 존재는 거대 트롤!

트롤들이 결혼식에 입는다는 특수한 실을 필요로 했다.

'이번엔 모험인가? 드디어... 나의 인맥으로 아는 유저들을 전부 끌어들인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아.'

풀죽신교에서 상당히 이름을 알리고 있는 드라고어였다.

직업이 생산 계열일 재봉사인만큼 그와 친하게 지내려는 유저들은 많이 있었고, 로브를 착용하는 마법사나 사제들을 대거 이끌고 가면 난이도가 높더라도 깰 수 있으리라.

"마판 상회에서 왔습니다. 축복 받은 적염사 찾으셨죠?"

"커험...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필요한 적염사는 새벽이슬을 맞은 타크 거미가 만드는 것으로."

"그건데요."

"제가 원하는 양은 단지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입니다. 간단히 얻을 수 있는 양이 아니죠."

"단지 세 개 가져왔어요. 구하기 까다로운 거라 가격은 좀 비싼데 사실 거죠?"

"헛. 농담도 참..."

"세 단지 세트로 사시면 10% 할인도 해드립니다."

"..."

재봉사 마스터 퀘스트에 필요한 실은 그냥 상단을 통해서 구입이 가능했다.

* * *

'조각사랑은 달라서 좋아해야 하는 거야. 아닌 거야? 퀘스트가 편하기는 한데 이건 남들한테 자랑도 못하고.'

트롤의 결혼식까지 치러주고 노가다에 지쳐서 쉬고 있는 드라고어였다.

상점에서 주문 받은 옷을 제작하고 있는 그에게 어린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했다.

"이곳이 유명한 재봉사의 작업실인가요? 한 달 후에 모라타에 큰 홍수가 일어날 것이에요."

"응? 무슨 말이니?"

"이곳의 국왕이 네크로맨서가 되었죠. 그래서 정의를 수호하는 티른이 노했어요."

"티른이 노했다고..."

티른은 정의의 신이었다.

기사들을 수호하는 신으로 아르펜 왕국에도 몇 개의 교단이 있다.

"신의 분노는 그대만이 막을 수 있어요. 신비의 천을 펼쳐서 도시로 다가오는 물길을 막아내어 바다로 향하게 한다면요."

소녀는 말을 마친 후에 그의 앞에서 신기루처럼 빛으로 변해서 사라졌다.

띠링!

모라타의 홍수를 방지하라

정의와 법을 지키는 신 티른.

아르펜 왕국의 국왕 위드는 베르사 대륙을 위해 헌신하며 '신의 인정을 받은 왕' 이라는 고귀한 호칭을 받았다.

그가 네크로맨서가 되어 신들이 분노했다.

첫 번째로 나선 티른의 보복은 페살 강과 유셀린 강을 범람시키고 도시를 뒤덮을 것이다.

아직 재앙을 막기 위한 시간은 남아 있다.

신비의 천으로 물길을 만들어라.

범람하는 물을 바다로 돌린다면 신의 분노로 인한 재앙도 사라질것이다.

홍수를 막기 위해 뜻을 함께 할 동료들은 제한 없이 모을 수 있다.

단 퀘스트에 참여한 후에 홍수를 막지 못한다면 퀘스트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신 티른을 거서른 응징을 당하게 될 것이다.

티른의 응징 : 

*100일간 신성 마법 적용 안 됨.

*명성이 크게 하락.

*티른 교단과의 적대도.

난이도 : A

보상 : 아르펜 왕국의 공적치.

주민들과의 친밀도, 명성.

물의 구원자 호칭.

퀘스트 제한 : 재봉사 스킬 고급 7레벨 이상.

< 퀘스트 수락까지 5분 내에 결정 해야 합니다. >

"커엇."

드라고어는 깜짝 놀랐다.

모라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재앙이 일어난다는 점은 당연히 경악할 일이었지만 내용도 문제가 있었다.

"천으로 물이 흐르는 길을 만들라니. 모라타에서 가까운 바다라고 해도 그 거리가 얼마인데."

항구 바르나, 항구 레자드에도 가 본 적이 있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들이기 때문에 멋진 주택과 별장들이 들어서 있었다.

물 위로 솟구치는 고래들.

먹이를 받아먹는 상어들!

초보 유저들이 바람을 타는 작은 요트들을 바다에 띄워서 굉장히 낭만적이기도 하다.

"빠른 소를 타고도 며칠은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 물길을 이으라니 이건 절대 불가능한 퀘스트잖아."

< 퀘스트의 결정까지 남은 시간 2분. >

드라고어는 모라타에 대한 애정으로 퀘스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안 될 것 같지만... 어쨌든 해봐야지."

<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

퀘스트를 받은 후 혹시나 싶어서 마판 상회에 연락을 해봤다.

"신비의 천이요? 방수가 되고 신축성이 강해서 2천배까지 늘어나는... 그 마법천 말씀하시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구할 수 없겠죠?"

"재고 있는데요?"

"..."

"모라타는 대륙 최고의 천과 가죽이 제작되는 곳이잖아요. 있어야 할 건 다 있죠. 신비의 천은 얼마나 드릴까요?"

"제가 원하는 양이 엄청나서요. 감당이 안 될 겁니다만."

"신비의 천은 팔리는 곳이 없어서 넉넉하게 쌓여 있습니다. 싸게 드릴게요."

"모라타에 재앙이..."

드라고어는 혼자만 감당하기에는 억울해서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마판 상회의 모라타 지부장 흙소금은 사정을 들어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건 위드님이나 마판님에게 보고를 드려야 할 중대 사안이네요."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국왕인 위드님에게도 보고를 드리고 아르펜 왕국 전체가 움직여야..."

"드라고어님이 실패하시면 재난용 구명조끼와 보트를 팔아먹을 기회니까요."

"예?"

"미분양 주택도 빨리 팔아치워야겠네요."

* * *

"대체 재봉사가 왜? 건축가들이 댐을 짓거나 홍수 대비용 물 빠짐 수로를 건설해야 하는 거 아니야?"

드라고어는 투덜거리면서도 즉시 바느질을 하며 신비의 천을 이어나갔다.

마판 상회에서는 모라타 인근에 재앙이 벌어질 예정이라는 점을 널리 알렸다.

- 홍보!

모라타에 재난 발생 예정!

한 달 후에 홍수가 일어나서 싹 쓸어버리게 됩니다.

재난을 막고 싶으면 재봉사 드라고어님의 상점으로 모여주세요!

아르펜 왕국 국가 공적치와 명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양송이죽 지원 왔습니다!"

"들깨죽도 왔어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원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재봉사가 꿈이었습니다. 드라고어님에게 실밥 뜯는 법이라도 배우고 싶습니다."

드라고어의 상점에는 들어오는 유저들로 인해서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였다.

길거리와 광장, 재봉을 위한 창고에도 사람들이 가득 밀려들어왔다.

"혹시 레벨 1도 필요하세요? 모라타에서 4개월째 그냥 놀고 있습니다. 마을 밖으로 나갈 수는 있는데요."

"저, 저는... 차마 밝힐 수 없는 죽의... 그니까 벌레죽이긴 한데. 아무튼 퀘스트를 좀 공유해주시면 맛있는 벌레라도 몇 마리 튀겨서..."

"앞다리가 쏙. 뒷다리가 쑥. 팔딱팔딱 개구리죽도 왔어요!"

 극한의 노가다를 해야 할 줄 알았던 드라고어는 동참하는 사람들로 인해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다니?"

아르펜 왕국을 위해 모인 사람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유저들에 대해 감동이 일었다.

"이 퀘스트 실패하면 신의 응징이 따릅니다. 그래도 하실 겁니까?"

"그냥 놀면서 하면 되죠."

"노가다잖아요? 아르펜 왕국에서 노가다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죠."

"왕년에 삽질 하나는 잘 했습니다."

"무조건 성공하는 퀘스트 아닙니까. 이럴 때 독버섯을... 꿀을 빨아야죠."

풀죽신교에게 노가다는 신성한 작업이었다.

퀘스트 내용은 방수가 되는 신비의 천을 통해서 바다까지 이으라는 것이다.

순수하게 그 넓은 면적에 신비의 천을 까는 것은 재료의 한계가 있어서 불가능했고 지형을 이용해야만 했다.

넓고 평탄한 평원이야 물을 좀 휩쓸고 지나가더라도 피해가 없다.

도시와 마을을 보호하면서 강과 개천을 연결하여 범람하는 물을 인도하여 바다로 보내면 된다.

이 부분에서는 모험가이면서 지도 제작사 데이워커가 나섰다.

"구체적인 계획은 제가 세워보겠습니다. 드라고어님은 신비의 천을 최대한 많이 제작해주세요."

"저도 좀 현장에 가서 도와야..."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라타에서 한 장이라도 더 신비의 천을 만들어주세요."

"크흑."

대륙 최고의 농부 미레타스도 퀘스트에 합류했다.

"몇몇 물을 많이 흡수하는 식물들을 심어놓으면 도움이 될 것 같군요. 큰 나무들을 자라게 하는 것으로도 모라타와 그 인근을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레타스의 합류는 퀘스트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대지와 식물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아르펜 왕국의 식량 생산과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최고의 농부였다.

그는 홍수를 막기 위해서 유셀린 강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이디어를 냈다.

"물이 크게 범람한다고 하는데... 유셀린 강은 수심이 깊고 수량이 많죠. 홍수를 막기 위해 항구 레자드까지 물길을 내는 김에 안정적으로 농업 용수를 공급할 수 있도록 주변에 수로를 만드는 건 어떻겠습니까?"

모라타와 그 인근은 여신 프레야의 축복과 개간으로 인해 개발이 완료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미레타스가 원하는 땅은 모라타에서 남동쪽, 나달리아 평원!

과거 위드가 바르칸 데모프의 불사의 군단 퀘스트를 했던 지역이기도 하고, 중앙 대륙의 작은 왕국 정도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평원이었다.

'그 넓은 지역에 농수로를 만든다고?'

드라고어는 멍하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당연히 퀘스트에 집중하기 위해 안 된다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풀죽신교의 성녀 레몬이 동의했다.

"좋은 의견이세요. 나달리아 평원이 개발되면 유저들도 훨씬 살기 좋아질 거예요. 농부들의 수확량이 오르면 인구도 빨리 늘어날 거구요."

"역시 그렇죠."

레몬과 미레타스의 말을 들으며 드라고어는 이들이 정신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퀘스트 하기 벅찬데 무슨 일을 늘리기만 해.'

반대 의견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벌써 퀘스트에 합류한 차먹자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누구라도 나서서 거부를 할줄 알았는데 전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나달리아 평원을 싹 개발해버리죠!"

"아르펜 왕국은 땅은 넓은데 개발한 지역이 좁습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한꺼번에 통 크게 개발을 해봐야돼요."

"굳이 숙련자들이나 고레벨 유저들이 필요하지도 않죠. 누구나 삽 하나면 참여할 수 있으니 좋겠군요."

"아르펜 왕국에 삽은 대부분 유저들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풀죽신교에서도 비축분으로 천만개 정도는 있습니다."

"사람만 더 모으면 되겠습니다."

퀘스트 참여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나달리아 평원 개발안은 통과!

그 다음날 풀죽신교의 공식 공지문이 떴다.

< 북부를 일으키고, 풀죽신교의 기원이 되신 위드님의 덕분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모라타의 번영을 나달리아 평원과 동쪽으로 이어갈 수 있는 오랜만의 기회! 국가 퀘스트 참여에는 아무 제한이 없으니 누구나 참여하세요. >

드라고어는 신비의 천을 꿰매는 도중에 공식 공지문을 읽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이런 말을... 그보다도 사실 관계가 좀 이상하게 꼬인 것 같긴한데. 재앙을 일으킨 위드를 싫어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공식 공지문이 뜨고 나서부터는 모라타와 새벽의 도시, 벤트 성의 유저들이 삽을 들고 모이기 시작했다.

모라타와 흑색 거성에서 성문 너머까지 새까맣게 모여든 사람들으 무리!

숫자를 센다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인파의 행렬이었다.

"국가 퀘스트라고? 꼭 해야지."

"이런 건 해줘야 돼. 퀘스트 완수하고 나면 또 축제가 열릴까?"

"푸홀 워터파크에서 놀기도 지쳤다. 신나게 땅 좀 파고 또 놀아야지."

"이 퀘스트 완료하면 와삼이 발도장 찍어준대."

퀘스트 공유를 위해 사람들은 드라고어의 상점을 차례로 방문했다.

드라고어가 바느질을 하고 있어도 퀘스트는 공유가 가능했다.

광장에서 한꺼번에 수천 명씩 퀘스트의 공유가 이루어졌다.

일반 유저들이 작업을 위해 뛰어가고 나니 축산업자들이 황소들을 이끌고 모였다.

"음머어어어어!"

끝도 없는 소들의 행렬.

"이거 도대체..."

"소가 몇 마리야?"

"와. 내가 봐도 많긴 하다. 난 2천 마리 키웠는데."

"나도 4천 마리 좀 넘어."

"모라타 인구보다 소가 더 많은 거 아냐?"

말이나 소를 키우는 일에는 직업의 제한은 없었다.

목동은 가축을 키우는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필요에 따라 농부나 상인, 기사들도 동물을 키웠다.

아르펜 왕국 일대에서는 누렁이의 효과와 프레야 여신의 축복 등이 있어서 가축을 키우는 분야의 생산성이 몇 배나 높았다.

소들의 출산율이 높았고 넓은 땅에 풍부한 먹잇감들이 있어서 가축들은 자연히 많아졌다.

"아파트에서 개도 키우기 힘든데. 여기서는 소를 수백 마리 넘게 키울수 있어."

"소가 재산이지. 안 그래?"

"열심히 소 키워서 돈 벌어야지. 소 만 잘 키워도 떼돈을 벌 수 있다고!"

북부에서는 어디서나 편하게 소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고, 위드를 따라서 전투용으로도 길들였다.

축산업자들의 소떼가 지나가고 나서 드라고어는 생각했다.

'이 퀘스트. 확실히 어렵지 않겠구나.'

퀘스트의 난이도는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나 노동력에 따라 달라진다.

북부 유저들의 협력이 있으니 국가적인 재난 같은 것도 단순 이벤트로 끝내는 게 가능했다.

요리사들도 자발적으로 모여서 작업에 참여하는 유저들을 위해 영양만점의 풀죽을 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뒤늦게 건축가들이 합류했다.

"푸홀 워터파크 일대의 작업을 끝냈는데... 크흐흐. 재밌는 일이 또 생겼군요."

미블로스를 중심으로 한 돌망치 건축가 조합의 등장!

"산에 길을 연결하고 마을을 세우죠. 나달리아 평원이 개발되려면 마을과 곡물 창고는 필수입니다."

"수로를 더 넓혀서 몇몇 곳에는 교역을 위한 대형선박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겁니다."

"다리도 연결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봅시다."

"홍수라면 쉽게 볼 수 없는 건데 구경을 위한 관람대도 설치하죠."

건축가들은 홍수를 막을 뿐만 아니라 나달리아 평원의 전반적인 개발 작업에 착수했다.

'기가 막히는 구나.'

드라고어는 어이가 없었다.

'저 넓은 땅을 개발하려고 하면 천문학적인 돈과 인력을 투입해도 성공하기 어려웠을 일인데. 그걸 그냥 시작해서 어떻게든 진행하네.'

정부나 국가에서 추진했다면 돈만 들이고 흐지부지되었을 일이다.

그렇지만 자신들과 서로를 위하는 마음들이 모이니 기적이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졌다.

아르펜 왕국의 국왕 대리인 서윤도 모라타의 피해 수습과 나달리아 평원 개발을 위한 각종 정책과 예산들을 투입했다.

필요한 지역에는 위대한 건축물도 허락했으며, 모라타의 남동쪽이 발달하면 생성되는 마을에는 국가 공적치에 따라 공평하게 영주의 자리를 주기로 약속했다.

북부 대륙, 아르펜 왕국의 저력은 매일 늘어나는 초보 유저들과 이주민들로 인하여 거대해져 있었다.

중앙 재륙으로 친다면 하나의 작은 왕국 정도가 나달리아 평원에 통째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