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48권 : 4. 공략의 씨앗 (325/520)

4. 공략의 씨앗

풀죽신교 비상전략상황실.

모라타의 뒷골목과 언덕의 빈집에서 시작했던 풀죽신교에서는 하벤 제국의 감시를 피해 허름한 판자촌에 장소를 마련했다.

흙바닥에 싸구려 돗자리를 깔고 앉은 50명 정도의 유저들이 있었다.

"모두 식사라도 하시죠."

"예. 잘 먹겠습니다."

그들에게는 전복과 인삼, 소고기가 들어간 고급 풀죽이 주어졌다.

"음. 맛있군요."

"이 부드러운 목 넘김은 역시 풀죽입니다."

하벤 제국이 침략을 해오고, 아르펜 왕국을 무차별 파괴하는데 반발하며 대단한 인재들이 모였다.

처음에는 전쟁을 막기 위해 비상전략상황실이 장난처럼 급하게 결성되었지만 지금은 어느덧 뚜렷한 목적이 주어졌다.

< 자유로운 모험과 교역. 독재하는 헤르메스 길드를 물리쳐서 대륙의 평화와 자유를 쟁취하자. 아르펜 왕국 만세! >

"하벤 제국이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잠깐 움츠러들었다고 봐야 되겠죠. 수 개월 내로 통치가 안정되면 전열을 재정비하여 침략해올 것입니다."

"풀죽신교의... 북부의 운명이 풍전등화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북부 유저들의 뜻을 모으기는 어려우니..."

"전쟁을 원하지 않는 유저들도 많죠."

비산전략상황실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했다.

위드가 이끄는 아르펜 왕국군과 북부 유저들이 중앙 대륙을 전면 공격하는 작전도 계획했지만 약점이 많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하벤 제국군의 군사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북부 유저들이 얼마나 동참해줄지도 의문이었고, 정복 지역의 통치와 보급의 문제가 컸던 것이다.

"중앙 대륙의 동향은요?"

"안정적입니다."

"세금 감면이 단기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불만이 쑥 들어갈 정도죠."

비산전략상황실에 있는 인원들은 풀죽을 먹고는 있었지만 터무니없는 스펙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각 국가의 행정부의 고위 관료, 외교관, 군인.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갖춘 사람들이 뒤늦게 로열 로드를 시작하면서 북부의 아르펜 왕국에 모여들게 됐다.

행정고시를 합격한 5급 사무관정도는 풀죽을 마시다가 감히 단무지도 못 얻어먹을 정도!

어떤 국가의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도 풀죽신교에 어렵게 가입을 했다.

"저 국회의원입니다. 어디 공짜로 죽 한 그릇 안 되겠습니까?"

"맞을래요?"

초창기만 해도 공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도움을 바랬지만 그런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풀죽신교의 이름을 팔아서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대로 영상이 녹화되어 전 세계에 공개된다.

현실에서야 어지간한 잘못들이나 비리를 저지르고도 국내정치환경 탓을 하면서 그러려니 하고 살았지만 풀죽신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낯이 두꺼운 정치인들도 자신의 가족들이 도열 로드를 하니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헤르메스 길드의 전력을 약화시킬 방법이라... 군사력이 약하니 까다롭습니다."

"그들이 먼저 공격을 하면 받아치는 전략으로는 한계가 보입니다. 대지의 궁전이 무너졌던 과거 사례로만 봐도...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아르펜 왕국이 피해를 계속 입게 될테니 말입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북부는 초토화 될 겁니다. 중앙 대륙이 안정화가 되면 하벤 제국은 북부에 전력을 기울일 수가 있게 돼요."

"선제공격이 정답이죠. 헤르메스 길드와 같은 단체는 약하되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무저닐 가능성도 있습이다. 애초에 충서임으로 모인 자들은 아니니까요."

"이권이 있기 때문에 뭉쳤고, 중앙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여간해서는 흩어지지 않을 겁니다."

"중앙 대륙의 일부라도 정복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텐데..."

하벤 제국을 공략할 방법에 대해 수도 없이 많은 논의들이 나왔다.

마판 상회를 통한 경제적인 침투는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와 비슷한 방식의 자잘한 수단들이 나왔다.

팔로스 제국이 건국되면 남부 사막 지대를 활성화하자는 의견도 그 중의 하나였고, 풀죽신교에서도 장기적인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그러던 와중 심부름을 하던 순두부가 손을 들었다.

"예전에 위드님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검치 어르신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하벤 제국을 갈가리 찢어버리겠다더군요."

"오오오."

"지금도 아닌 하벤 제국이 가장 강력할 때에 했던 발언이라고 하네요."

"그런 패기를?"

"역시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

"아르펜 왕국을 북부에 만든 사람 아니겠습니까."

비상전략상황실에 모인 유저들은 감탄했다.

아르펜 왕국이 침공을 했을 때에 위드가 하벤 제국을 찢어버리겠다고 한 말의 뜻은 단순했다.

- 놈들이 내 밥그릇을? 절대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 찢어버릴 거야!

유치원을 다니면서 얄미운 짝궁의 공책을 몰래 찢어버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했던 말.

비상전략상황실에 있는 엘리트들은 그 의미를 깊게 해석했다.

"찢어버린다... 그때 하벤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긴 했죠. 하지만 표현한 것과는 형태와 결과가 달라요. 당시에는 전술적으로 대지의 궁전을 무너뜨렸던 것 아닌가요?"

"무너뜨린 것과 찢어버리는 것의 차이라. 묵직한 의미가 숨어 있을 것 같군요."

"그 순간에 짧게 앞을 내다본 게 아니라 먼 미래를 대비한 게 아닐까요?"

"하벤 제국을 부숴버리겠다. 뭐 그런 의미로 쓴 거 아니겠습니까?"

"위드님의 말입니다. 단순하게 대충 해석할 게 아닙니다. 그의 언어 세계와 대륙의 변화의 흐름까지도 이해해야 해요."

"언어의 의미를 알아낼 사람이 필요할 것 같군요."

"국문학 전공자나 인문학 박사 정도를 데려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하버드나 예일대 종신교수 분들을 초청하겠습니다."

엘리트들은 든든하게 풀죽으로 배를 채우고 쓸데없는 말 한마디를 세계적인 석한들까지 초대하여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내려진 결론!

방탄복 비리를 언론사에 제보했다가 쫓겨난 대한민국 군인이 말했다.

"문장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벤 제각을 찢게다는 것입니다."

잠수함 비리를 알리고 퇴직한 군인이 말을 받았다.

"여러 개로 찢는다? 방법은요?"

"아르펜 왕국에서 최고의 정예 병력을 보내서 다수의 지역을 파괴해버리거나..."

전투기 사업 비리와 방산업체와의 커넥션을 제보하고 쫓겨났던 군인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전력이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인원이 많다면 헤르메스 길드에서 움직임을 먼저 포착하고 대비할것이고요."

"아니면 영주들과 중앙의 관계를 악화시켜서 세력을 찢어놓는다는 거죠."

"설득력이 있군요."

"지금의 상황이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는... 으음. 이걸 예견했단말인가?"

"하벤 제국 영주들의 불만도 상당할 겁니다. 다리우스의 폭로도 있었고 세금이 낮아져서 그들의 이익도 줄어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냉정히 말해 성공 가능성이 높진 않아요."

"아르펜 왕국을 지키기 위해 시도 해보더라도 손해 볼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헤르메스 길드의 관계를 악화시킬 방법으로는..."

계획은 착착 세워졌다.

어느 한 사람이 주도했다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위드의 지휘를 따른다고 판단하니 신속하게 일이 추진되었다.

"1단계와 2단계로 나누어서 일을 추진해야 될 것 같습니다."

"계획이 마무리가 되면... 베르사 대륙은 대혼란에 빠질 지도 모릅니다."

"1단계의 일은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겠지만, 2단계가 본격 추진된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만... 그 외 계획엔 허점이 보이진 않는군요."

"위드님이 사실상 세운 계획입니다. 믿고 추진해도 되겠죠."

"보안을 유지해야 하니 믿을 만한 유저들을 동원하죠."

"어떠한 경우에도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헤르메스 길드에 매수되어서도 안 되고요."

"다행히도 우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유저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죠."

"역시 독버섯죽이라면 믿을 만합니다."

풀죽신교에서는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워서 아르펜 왕국에 보고했다.

최종 결정권자는 서윤!

그녀는 계획안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도장을 찍었다.

< 풀죽풀죽풀죽. >

* * *

용기사 뮬.

하벤 제국의 남부. 옛 그라디안 왕국과 네스트 왕국의 방대한 지역을 다스리는 그는 헤르메스 길드의 상위 랭커였고 지역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에게는 위드와 반란군의 습격에 의해 노드 그라페를 빼앗기고, 복수를 위해 북부까지 찾아갔다가 목숨을 잃은 흑역사도 있었다.

"크으윽. 이렇게 철저한 패배라니..."

뮬은 뒤늦게 복수심을 버리고 살아남은 그리폰 부대와 하벤 제국군을 중심으로 노드 그라페와 영토를 다시 회복했다.

반란군은 잠잠해졌지만 사막 전사들의 공격으로 일스 대평원이 있는 지역에서 지원 요청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 지역의 안정을 위하여 군대의 파견이 필요합니다. 구해주십쇼!

- 도와주셔야 합니다. 대평원을 정복당했습니다.

- 사막 놈들이 약탈하고 있습니다. 벌써 성문이 뚫리고...

뮬은 헤르메스 길드의 요청 때문에라도 출격하기는 했지만 사막 전사들은 재빠르게 철수해버리고 난 후였다.

"아아. 난 망했어."

"끝났다. 창고에 남은 게 없어."

"병사들까지 몽땅 끌고 갔군. 이젠 바닥에서 시작해야 하나."

피난에서 돌아온 남부의 영주들은 망연자실해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황금빛으로 출렁이던 대평원의 곡물들은 낱알까지 싹 털려버린 후였다.

풍요로움을 상징하던 일스 대평원의 거리.

오죽하면 길거리에도 사과와 배, 석류, 무화과 나무가 주렁주렁 심어졌었다.

그런데 아직 덜 익은 과실들마저도 몽땅 털어서 가져가버린 것이다.

중앙 대륙의 곡물 가격은 대평원의 약탈로 폭등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매입을 하려고 해도 어느 큰 손이 먼저 움직였는지 시중에서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번 피해는... 크. 일스 대평원의 올해 수확량의 절반을 넘게 빼앗겼습니다."

"정말 큰일이군요. 제국에서도 너무 방심했던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도시나 마을의 통치권이나 걱정을 했지. 식량을 쓸어가다니 말입니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주민들까지도 상당수 데리고 갔습니다."

"주민들을요?"

"기술자와 젊은이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사막에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아니... 그런 잔악한 짓을."

뮬과 영주들은 소식을 들으며 내심 크게 놀랐다.

명문 길드들끼리 매일 전쟁을 벌일 때에도 주민들에 대한 피해는 가급적이면 줄이려고 노력했다.

전투로 소모되는 인력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또한 가끔 흥분한 유저들이 도시에 불을 질러버리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에게 큰 손해가 오는 행위였다.

전쟁 중이라도 이런 행위는 악명이 크게 증가한다.

퀘스트나 통치, 모든 면에서 받는 패널티가 막대해서 상식이 있다면 하지 않았다.

건물이 부서지거나 재산상의 피해는 복구할 수 있지만 주민들을 이주시키면 단기간에 회복이 불가능했다.

다만 중앙 대륙의 영주들은 문화에 대한 차이는 알지 못했다.

문명화된 땅에서 포로를 만들거나 약탈하는 행위는 악명이 쌓이고 페널티가 크게 붙는다.

사막 지역에서는 대량의 포로를 얻거나 약탈을 하면 유능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아주 똑똑하거나 악명 가은 건 신경 쓰지 않는 자들이로군."

"유저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사막의 법칙을 따를 뿐이라고 하더군요."

"날도둑놈들이지."

"자기들은 칼든 강도가 맞다더군요."

뮬이 통치하는 노드 그라페와 남부 영주들은 생각보다는 경제적인 여유가 부족했다.

제국의 황실로 세금을 절반 넘게 보내고 나면 그동안 남는 금액으로는 반란군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허비했다.

"이제 정복 지역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는데 사막 전사들이 몰려온다라..."

"세율을 낮춘 만큼 여유가 더 없습니다."

"남쪽에서는 전사들이 팔로스 제국을 건국하겠다고 설친답니다."

"지금 사막을 병탄해야 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주민과 재산을 되찾으러 갑시다."

일스 대평원의 영주들과 헤르메스 길드의 남부 수비군에서는 강경한 대응책들이 나왔다.

지역 최고의 권력자인 뮬은 썩 내키지 않았다.

"뜨거운 사막에서 그리폰들이 적을 찾아서 헤매고 다니란 말입니까."

"우리가 함께 하겠습니다."

"병력은 얼마나 투입할 예정인데요?"

"20만 정도는 보낼 겁니다. 사막이 더 성장하기 전에 뿌리를 뽑아놔야 합니다."

뮬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20만으로 저 넓은 남부 사막을 전부 장악하겠다는 겁니까?"

"정예 병력으로 보낼 겁니다. 제국군은 무적...은 아니지만 어쨌든 강하니까요."

"사막이 얼마나 넓은지는 알고 계시죠? 교통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사막 한가운데서 헤매다보면 답도 없습니다. 혹시 아렌 성에서 지원 병력은 안 나옵니까?"

"여유가 없답니다. 전쟁을 벌일 시기가 아니라고 하고 헤르메스 길드의 적은 많고 지켜야할 땅이 넓으니까요."

"그들 입장에서 먼 남부의 일은 관심도 없는 거죠."

"그럼 사막 원정도 무리입니다."

"놈들이 또 쳐들어오게 될 텐데..."

"그때도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에는 더 신속하게 대응하는 수밖에는 없죠."

영주들끼리 토론을 해봐도 결론이 나오진 않았다.

싹 털린 자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구원금이나 바라고 있었고, 지킬 게 많은 이들이라도 자신이 나서고 싶진 않았다.

* * *

하늘을 지배하는 강철의 용기사단.

"녀석들. 또 새끼를 낳았구나."

뮬은 바쁜 와중에도 노드 그라페의 그리폰들을 돌봤다.

새끼 그리폰들이 배고프다고 울어대는 것을 보며 큼지막한 소고기를 잘라서 부리에 넣어주었다.

"많이 먹어라. 너희들처럼 귀여운 녀석들이 없어."

위드의 습격과 북부에서의 전쟁으로 그리폰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었다.

다시 어렵게 5천 마리까지 복구를 했고, 새끼 그리폰들도 많이 자라나고 있으니 앞으로 그리폰 군단은 더욱 강력해지리라.

"후후후. 대륙의 하늘을 너희들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지. 하늘이 우리의 것이 되면 땅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이게 큰 그림이 아니겠느냐."

뮬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에 총독부에 침입자가 등장했다.

공중에서 커다란 와이번을 타고 노드 그라페로 날아오는 초보자 복장을 입고 있는 남자!

"설마..."

뮬은 탑의 창가에서 눈에 익은 와이번을 확인했다.

"저것은 와이번 와삼이?"

위드를 태우고 다니는 와이번.

대륙에서 이보다 더 유명한 와이번은 없을 것이다.

'위드의 침략인가? 놈이 혼자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대규모 병력을 끌고 왔을 것이다."

뮬이 그리폰 부대와 군대에 비상 소집령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와삼이가 물고 있는 새하얀 깃발과, 그 위에 타고 있는 유저의 얼굴이 보였다.

'위드가 아니잖아?'

위드는 너무 평범해서 잠깐 지나면 얼굴을 금방 잊어버릴 정도다.

와삼이를 타고 있는 유저는 그럭저럭 잘 생겨서 위드와는 차이가 있었다.

'위드는 모습을 바꿀 수 있으니... 저건 속임수일 수 있어.'

뮬은 그러면서도 자신감을 잃진 않았다.

헤르메스 길드의 초창기부터 용기사로 전직하여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드높은 긍지는 일대일의 전투라도 위드에게 쉽게 패배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드 그라페는 절벽 위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막으려고 한다면 쉽게 함락될 요새가 아니다.

'싸워도 좋다. 그래도 설마 위드가 백기를 들고 얼굴까지 바꿔가면서 찾아오진 않았겠지.'

뮬은 창가에서 손짓을 해서 방문객을 노드 그라페의 그리폰 둥지로 오도록 했다.

* * *

뮬과 독대하는 초보자 복장의 방문자.

와삼이가 내려놓고 간 그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자신을 소개했다.

"풀죽신교 독버섯죽의 톳쿵이라고 합니다."

"독버섯죽?"

"예. 위드님의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뮬은 상대가 위드가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예상은 했지만 조금 실망했다.

'아쉽군. 혼자 찾아왔다면 부하들과 죽여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비겁한 방법이긴 하지만 위드를 죽이면서 얻는 명성에 비한다면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하지만 곧 풀죽신교에서 전하려고 한 말에 관심이 갔다.

하찮은 일이라면 독버섯죽 유저와 와삼이를 여기까지 보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겁니까?"

"후후. 좋은 제안을 하려고 왔죠."

톳쿵이라는 유저는 씩 웃었다.

"긴 서론은 생략하겠습니다. 하벤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독립이라니요?"

톳쿵은 풀죽신교의 제안에 대해서 설명했다.

뮬이 다스리는 그라디안과 네스트 왕국 지역이 하벤 제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서 독립을 한다.

독립 즉시 풀죽신교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막 전사들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관계가 좋아지면 북부의 특산품들을 거래할 수도 있죠. 해상으로 아르펜 왕국의 대규모 교역단이 방문할 것이고요."

"그래서 고작 사막 전사들이 시끄럽게 하지 않을 테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라? 이 제안이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이죠. 사막 전사들이 다른 지역에서 활동을 하게 될 테면 이 지역에는 아무런 피해가 안 생길 테니까요."

뮬은 가만히 듣자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군요. 그정도 이유로 제국의 든든한 울타리를 벗어나란 말입니까?"

"예. 아르펜 왕국의 체제로 바꾼다면 넘쳐나는 북부 유저들도 많이 와서 뮬님의 왕국. 그러니까 정확히 뮬님의 왕국에서 활동하게 될 겁니다. 발전이야 뭐... 아시다시피죠. 신 도시들이 생길 테고 남부 사막 지역도 영토로 들어오면 굉장히 큰 왕국이 되겠죠?"

"저와 헤르메스 길드와의 관계는요?"

"위드님이 그러시더군요. 사람은 화장실 갈 떄와 나올 때를 알아야 한다고. 받을 거 다 받았으면 나오기 적당한 시점이 아닐까요?"

뮬은 여기서 잠시 침묵했다.

'사막 전사들이 당연히 귀찮기는 하지.'

남부 지역에서 출몰하여 공격하는 그들 때문에 성가신 것은 사실이었다.

같은 헤르메스 길드로서 영주들의 구원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아직 자신의 영토에서 벌어지는 손해는 아니었고 귀찮음도 감수할 만 했다.

'하지만 화장실을 나올 때의 마음가짐이라. 확실히 상황이 달라지긴 했다.'

뮬은 헤르메스 길드의 초창기부터 함께 했다.

용기사로 전직을 하고 그리폰을 길들인 이후에 중앙 대륙 정복 전쟁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

기동력을 기반으로 한 그리폰 부대는 매번 영토 확장에 선두에 섰다.

거듭 쌓여운 전투 공적 덕에 만만치 않은 휘하 세력과 군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라디안과 네스트 지역을 다스리도록 넘겨받은 것도 전장에서의 능력과 군사력을 높게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더 이상 헤르메스 길드로부터 받을 것이 없기는 해. 하벤 제국이 아르펜 왕국을 정복하더라도 내게 떨어질 이득은 없겠지.'

영토에서 거둬들인 세금의 절반을 바치고 있다.

헤르메스 길드와의 의리를 떠나서 그들의 지배력을 인정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독립을 하게 되면 앞으로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

하벤 제국과 아르펜 왕국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장 대단히 넓은 지역을 독립적으로 통치하는 국왕이 되는 것이다.

'완전히 쓸모없는 제안은 아니군. 내게 이익이 커. 단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지만.'

하벤 제국으로부터 자신의 깃발을 드는 자체는 마음에 쏙 들었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수 없는 형편이었다.

헤르메스 길드와 하벤 제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니까.

독립을 선언하자마자 짓밟혀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톳쿵이 빙긋 웃었다.

"뮬님이 마음만 먹으면 아르펜 왕국군이 북쪽에서 움직일 겁니다."

"제국과 전쟁을 치른다? 아르펜 왕국군의 전력으로는 무리일 텐데요."

"무리가 있긴 하죠. 하지만 아르펜 왕국의 국경 근처에만 있어도 하벤 제국의 신경을 쓰이게는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신경을 쓰는 정도로는 의미가 없죠. 헤르메스 길드는 그런 방해에는 끄떡도 안 할 정도로 강합니다. 제국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면 저에게는 최악이 되겠군요."

"아르펜 왕국과 뮬님의 신생 왕국.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하벤 제국의 피해가 클 겁니다. 세금까지 낮춘 시점에서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르펜 왕국 역시 하벤 제국을 감당할 수 없죠."

"최악의 경우에는 아르펜 왕국에서 뮬님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넓은 땅을 다스리는 영주로 받아들이죠."

뮬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바쁘게 계싼이 오가고 있었지만 선뜻 내키는 마음이 들지않았다.

톳쿵의 제안은 나름 이유가 있긴하니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손해라고 생각되었다.

"그쪽이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하벤 제국이 나눠질수록 아르펜 왕국에는 유리할 테니까요."

톳쿵은 딱 한 가지만을 감추고 전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이런 제안을 여기서만 하는 건 아니지.'

풀죽신교에서 모은 방대한 정보력과 인맥.

헤르메스 길드의 유저들 중에서 포섭이 가능한 인물들과 독립을 제안할 사람들을 추렸다.

어지간히 큰 병력을 가진 영주들이나 그 지역을 관할하는 총독들에게는 비밀리에 독버섯 중에서 엄선한 정예 부대원들이 파견됐다.

하벤 제국의 남부 지역은 거리와 제안의 비중 때문에 와삼이를 타고 왔지만, 다른 곳들도 독버섯 유저들이 전부 동시에 방문 중이었다.

그등 중에서 몇 명이나 마음을 바꿔먹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몇 명 정도는 포섭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전부 실패하는 가능성을 높게 염두에 두었다.

'실패를 가정한 계획.'

계획의 1단계에서 아르펜 왕국의 입장에서 잃을 건 없다.

심지어 이런 제안을 보냈다는 사실이 들킨다고 해도 손해가 아니다.

북부 유저들을 물론이고, 어떤 유저들도 아르펜 왕국이나 위드를 비난하진 않을 것이다.

반면에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이탈자가 생기지 않을지 불안해하고 의심하게 될 것이다.

"흠..."

뮬은 고민했지만 찬성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진 않았다.

그의 선택에 따라서 아르펜 왕국은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된다.

'위드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진 않은데.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 손해도 커 보이고.'

위드에 대한 억하심정!

그에게 당한 사건들을 떠올리기만 하면 화장실에서 일을 제대로 치를 수 없을 정도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돌아가실 때는 와삼이가 또 옵니까?"

뮬은 용기사로서 순수한 호기심을 담아서 물었다.

그리폰들과는 호적수라고 할 수 있는 와이번, 그것도 최고의 승차감을 자랑한다는 와삼이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였다.

"아뇨. 구경이나 하면서 슬슬 아르펜 왕국까지 올라갈 겁니다."

"갈 길이 멀겠군요."

"인생은 언제나 먼 길을 돌아갈 때에 무언가를 얻을 수 있죠."

톳쿵은 그렇게 말하면서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뇌물이나 무기일지도 모른다면서 순간적으로 경계하던 뮬.

톳쿵이 꺼낸 것은 찻잔과 알 수 없는 시커먼 가루였다.

그가 찻잔에 시커먼 가루를 넣고 생수를 부어서 차를 탔다.

"협상을 마치니 차를 한 잔 마시고 싶군요."

"흠."

"같이 드시겠습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뮬은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제안을 거절했다.

그 거절은 올바른 판단이기는 했다.

"크어억!"

찻물을 마신 톳쿵이 가슴을 움켜쥐더니 쓰러지는 것이었다.

"여,역시 독버섯 차는..."

< 톳쿵이 사망하였습니다. >

* * *

뮬은 툿쿵이 죽고 난 이후에 고민에 잠겼다.

"독립이라..."

풀죽신교의 달콤한 제안.

헤르메스 길드를 배신하는 것은 큰 도박이지만 성공만 한다면 자신에게는 대단한 이익을 안겨주는 제의다.

'아르펜 왕국처럼. 위드처럼 자리를 잡는다면 이 지역의 유저들이 나를 도울 수도 있겠지. 그건 좀 긍정적이야.'

하벤 제국이 뿌리인 만큼 그들을 견제할 방법도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다.

대규모 군대가 쳐들어오더라도 그리폰 부대로 요격을 하거나 노드 그라페를 포기하면서 오랫동안 전쟁을 치를 수 있다.

한두 달만 버티게 되면 공격도 주춤해질 것이며, 충분히 한 지역의 패자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훗날에는 바드레이나 위드처럼 탄탄한 기반과 영향력을 갖추지 말란 법도 없다.

설혹 모든 것이 잘못되어 망한다고 해도 그동안 모은 재산이나 그리폰 부대를 이끌고 아르펜 왕국으로 떠나면 된다.

'흥미롭지만 위험한 제안. 지금으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지. 하지만 상황이 바뀐다면...'

위드가 무심코 했던 말이 풀죽신교의 비상전략상황실을 거쳐서 하벤 제국에 첫 번째 씨앗을 심어놓게 되었다.

* * *

- 북부 유저들이 우리 측 영주들에 대한 포섭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허점을 내버려두진 않는군."

하벤 제국의 몇몇 영주들은 접촉이 있음을 정보부에 고백했다.

라페이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렌 성의 옥상에 있었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맑은 바람은 시원하게 흐른다.

하벤 제국의 수도는 지금까지의 영광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궁지로 몰아오다니..."

라페이는 얼마 전에 당한 모욕을 생각하면서 눈동자를 빛냈다.

처음 길거리에서 깜찍한 소녀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는 분노가 치밀었다.

평생 엘리트로서 존중을 받으면서 살아왔던 자신이었고 실패란 단어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벤 제국이 약해지는 와중에 마음이 위축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보대를 통해서 들어오는 소식들이라고는 생각보다도 훨씬 좋지 않은 것들이었으니까.

- 르헨 지역에서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에 의한 일반 유저들의 대량 학살 사건 발생. 조사해보니 우리의 과실이 큼.

- 고뎃사 성에서 지원 요청. 대륙 정복을 기념하는 파티에서의 지출이 큰 것으로 밝혀짐.

- 즈로트 무역 도시. 북부의 푸홀 워터파크를 참고하여 관광업 활성화를 위한 대형 개발 사업. 개발 비용 3천만 골드. 완공 후 이용자 하루 340명.

제국의 구석구석을 통치하면서 수많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라페이와 수뇌부에서 끌어들인 천문학적인 자금이 삽질을 하면서 엉터리처럼 소모되고 있었다.

세금을 감면하라고 해놨더니 직속 상단을 창설하여 도시 내의 모든 교역을 독차지하여 욕을 먹는 경우도 있었다.

다리우스의 무차별 폭로는 헤르메스 길드의 비난 대열에 불을 붙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일 새로운 사실들이 방송에서 밝혀지면서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대륙의 남쪽에서도 팔로스 제국의 건국이 이루어지려는 중 대군이 침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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