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데인 요새의 파문.
< 레벨이 올랐습니다. >
위드는 던전의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면서 조각사일 때보다 레벨을 빨리 올렸다.
언데드 소환 스킬이 중급 4레벨이 되었고, 레벨도 480 돌파!
간단한 퀘스트는 받을 수 있으면 받았지만, 복잡하게 얽히는 일은 거부했다.
"그대에게서 짙은 어둠이 느껴지는군. 이 일은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하네."
직업 때문에 용병 길드에서는 퀘스트를 얻기도 쉬운게 아니었다.
위드의 명성이라면 뭐든 가능했다.
"똑바로 보고 말해."
"설마... 국왕 페하 아니십니까?"
"그래. 돈 좀 되는 일 있나? 귀찮은 건 싫어."
"말씀만 하십시오. 어떤 일이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르펜 왕국에서는 네크로맨서라고 해도 퀘스트를 얻는 장애가없다.
이것이야 말로 권력의 단맛!
"여신께서 인정하신 분. 그대가 다루는 힘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있지만 꼭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단에서도 악마 델암을 처치한 위드에게 퀘스트를 주었다.
명성과 신앙심, 정의, 명예 스탯들이 관리를 통해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악마 델암을 처치한 공적마저도 서서히 사라질 떄가 되면 힘들겠지만 꼼수랑 필요할 때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기운이 느껴집니다.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는데도 큰돈은 안 되니 나서주는 사람이 없군요."
"응, 아냐. 나도 바빠."
< 퀘스트를 거절하셨습니다. >
"요정의 정수라는 게 이싿고 합니다. 어떤 모험가도 찾아내지 못한 것이지요. 발견된 적 없는 보물을 확인 하는 건 멋진 일이지 않습니까?"
"관심 없어."
< 퀘스트를 거절하셨습니다. >
"동쪽으로 날아간 큰 몬스터.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건 드뭅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부터 이 도시의 사람들은 몬스터의 습격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놈을 찾아서 퇴치 해주시겠습니까?"
"귀찮아. 오면 불러."
< 퀘스트를 거절하셨습니다. >
구하기 힘든 재료나 사냥하기 귀찮은 몬스터는 과감히 통과!
원하는 지역의 몬스터 사냥에 대한 퀘스트만을 받았고 그것으로도 일감은 충분했다.
유저들이 공략하지 않았거나 실패한 던전은 베르사 대륙에 굉장히 많았다.
몬스터가 마법을 다루거나, 찾아가기 힘든 먼 던전, 공략하기에 다수의 인원을 필요로 하는 던전은 유저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위드는 바르칸의 장비 때문에 언데드들의 마법 저항력이나 방어력이 높았고, 각종 조각술 스킬들을 활용하면서 던전을 공략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경험치가 쌓여 레벨이 오를 때마다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다.
"레벨에 비해서 스킬 숙련도가 떨어지는 일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좋군."
위드는 마나를 아끼고 체력을 소모하기 위해 직접 검을 휘두르면서도 싸웠다.
검술 레벨은 고급 7.
비슷한 레벨의 전투 계열 직업에 비해서도 높다고는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상관없었다.
대제왕 시절에 검술 마스터를 해본 경험이 있기에 마의 장벽이라고 할 수 있는 이후의 스킬 레벨에도 자신이 있었다.
"강한 녀석들을 쓰러뜨려야 숙련도가 빨리 쌓이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강한 녀석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깐 말이야."
빠르거나, 조금 늦거나 어차피 마스터를 하게 될 기술!
'강해지는 것만 생각하자. 레벨을 올리는 일도 즐겁지만 던전 공략도 나쁘지 않아.'
끝없는 목표!
던전 공략에도 가장 빠른 시간에 완벽하게 해내려고 했다.
남들이 세운 시간 기록을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고, 일찍이 잡힌 적 없는 보스급 몬스터에게도 도전했다.
* * *
헤르메스 길드의 계속되는 고난!
위드가 사냥을 하는 동안에도 방송국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들의 비리가 폭로되고 있었다.
세금을 인하하며 억지로 다독여놓은 민심이 다시금 흔들렸다.
"너무 많은 사건들이 폭로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유저들은 앞으로도 우리 길드를 믿지 않겠죠."
"이러면 중장기 통치 계획에 너무 큰 차질이 생기는데 말입니다."
"괜히 세금을 낮추자고 해서... 쩝. 우리가 가져가는 수익금만 줄었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영지 내에서 투자를 위해 몇 가지 건설 사업도 진행 중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다 중단해버렸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수뇌부에서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영주들끼리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중앙대륙의 유저들을 막무가내로 쥐어짜내며 착취하던 영주들!
그들의 입장에서는 세율이 낮아지면서 수익금이 대폭 줄어들었다.
영지 내의 건설 사업이나 복지 계획에 돈이 필요하다는 말은 다 핑계였고 손에 들고 있던 맛좋은 떡을 빼앗긴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지역에서 힘이 있는 영주들의 입장에는 반란군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반란군이 출몰해져야 그들을 빌미로 착취를 합리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벤 제국 전체의 사정이야 자신들에게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대륙 통일까지는 고작해야 왕국 하나가 남았는데. 그걸 정복을 못해서 깔끔하게 마무리가 안 되다니 말입니다."
"시간을 너무 주는 것 같군요. 나라면 진작 군대를 이끌고 아르펜 왕국을 지도상에서 없애버렸을 텐데."
"유저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한 번 밟아놓고 출정을 해야죠. 무차별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확실히 심어주면... 반란군만 딱 진압하려고 하니 어려웠던 겁니다."
"헤르메스 길드도 예전 같진 않은거지요."
영주들은 비싼 술을 마시면서 마음 껏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헤르메스 길드에 충성을 바치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르펜 왕국으로 넘어갈 생각도 없는 이들.
'욕을 먹기는 해도 결국 하벤 제국이 이기겠지.'
'쯧. 아르펜 왕국으로 가면 마음껏 돈이나 장비를 챙길 수가 없잖아.'
'북부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다고는 하는데...'
돈과 권력에 흠뻑 취해 있는 영주들이었다.
* * *
"크험. 우리가 결과물을 꼭 검증 받으려는 건 아니네만..."
"그래도 어떤 완성품이 더 뛰어난 것인지는 확인을 해야 할 것 같군."
"승부를 가리자는 의미는 아닐세. 당연한 절차로서, 장인으로서 기념하고 싶은 것이지."
"무승부라고 해도 우린 인정할 거네."
신의 금속 헬리움!
베르사 대륙에서 대장장이 마스터의 위업을 달성한 파비오와 헤르만은 자신만만하게 위드를 기다렸다.
'이 승부는 내가 이긴다.'
'길고 길었던 경쟁. 종지부가 될 테지.'
대장장이 마스터를 하면서 마음이 넓어진 것 같았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다.
대장장이로서 한 자루씩의 검을 만들었다.
두 자루의 검을 비교하는 마지막 승부야말로 누가 진정으로 더 뛰어난 대장장이인지 가리는 것이다.
그 결과물은 헬리움을 재료로 제공 했던 위드가 판단하기로 했다.
'보나마나 나의 승리다.'
'후후. 파비오 어르신이 지금까지 검만 만들어온 나의 경험과 실력을 당해낼 수 있을까?'
지긋한 나이를 먹은 두 대장장이들.
그들은 느긋한 척을 했지만 어린 아이처럼 간절하게 위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 자존심 대결이란 나이가 많아 질수록 더 심해지는 법!
위드는 유린과 같이 그림 이동술로 대장장이들 앞에 나타났다.
"흠. 이것이 헬리움으로 만든 검들 이군요."
파비오와 헤르만의 거처는 모라타의 뒷산과 프레야 여신상이 보이는 넓은 저택이었다.
부유한 대장장이인 만큼 그들의 저택에는 넓은 정원도 꾸며졌고, 엘프목으로 지어진 정자도 세워져 있다.
연회를 열어도 될 것처럼 넓은 정자에서 꺼낸 두 자루의 검은 햇빛에 은은한 광채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파비오는 뿌듯함을 참아내며 말했다.
"손에도 쥐어보도록 하게. 느낌이 그냥 부드럽지 않은 정도지. 허허허."
속마음과 나오는 말이 다른 경우는 이런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위드는 대충 검을 보고 가고 싶었다.
'어차피 돈도 안 되는 것. 사냥터, 사냥터, 사냥터, 사냥터.'
파비오의 검은 외관만큼은 수수했다.
귀한 보석으로 검집이나 손잡이 부분을 치장하지도 않았고 있는 그대로 검에 충실했다.
위드가 만든 별의 조각품.
처자식 별을 보고 나서 든 깨달음을 담아 살아 있는 생명체를 돌보듯이 정성을 담았다.
마나의 원천이며 신성력을 뿜어내는 헬리움.
그 느낌이 검에도 실려서 부족한 것도, 여기서 더할 것도 남아 있지 않다.
파비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검은... 주인을 따를 것이야. 주인의 능력을 키워주고 같이 성장하는 것이지. 살아 있는 금속 헬리움이기에 그 특징을 최대한 활용해보았네."
그저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한명의 장인이 모든 걸 다해서 만든 역작!
"이 검도 보도록 하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네."
헤르만도 자신이 만든 검을 손으로 가리켰다.
평생을 검을 만들며 살아온 장인!
20세기 이후부터는 멍청하고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는 한 우물을 판 전형적인 인물!
그가 만든 검은 놀라울 정도로 서늘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차갑고, 날카롭다.
헬리움은 무한한 마나를 발산하기에 그 에너지를 차갑게 벼려냈다.
빙결의 검!
검 자체의 공격력도 뛰어나지만 무자비한 얼음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별 건 아니지만 재난도 일으킬 수 있네."
"재난요?"
"그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이 검은 얼음 푹풍을 불러들일 수 있다네."
적을 얼리고 깨뜨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전투에는 이로움이 많다.
어떠한 몬스터나 상대라도 빙결의 검을 상대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위드는 두 개의 검 모두 마음에 들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라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챙겼을 것이다.
'지금은 네크로맨서 잖아. 당분간 헬리움 장비를 쓰기는 어려운 처지인데. 물론 쓴다고 해서 죽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조각 변신술을 사용해서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그치기에는 아쉬움이 들었다.
'내가 이들을 제대로 착취한 것일까? 대장장이 마스터까지 되었는데. 그들이 만든 회심의 작품이기는 한데.'
위드가 베푼 것은 헬리움을 빌려줘서 대장장이 마스터까지 도운 것이었다.
그러한 도움이 없었더라도 파비오와 헤르만은 언제고 마스터를 했으리라.
어쩌면 방법을 찾아 더 빨리 마스터를 할 수도 있었고.
다만 이 두 대장장이 마스터에게서 뽑아낼 단물은 이제부터란 생각이 들었다.
'로열 로드에서는 흔히들 초보들을 대상으로 착취를 하지. 약하고 다루기 쉬우니까. 그런데 마스터를 상대로 착취를 하면 왜 안 된다는 거지?'
발상의 전환!
파비오와 헤르만은 대장장이로서 긍지가 있는 유저들이었다.
위드는 등에 차고 있던 로아의 명검을 꺼냈다.
로아의 명검.
엘프들의 보물이며, 인간들이 최고로 꼽는 보검.
헤스티거가 남겨놓은 유산이었다.
"그동안 이 부실한 검을 쓰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두 분이 검을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두 대장장이들은 뻔히 드러낸 떡밥을 덥석 물었다.
"오. 그건 무슨 검인가?"
"굉장하군! 완벽한 아름다움이 검에 있다니..."
위드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실제로도 매우 가벼운 검이었다.
"별 거 아닙니다. 두 분이 검을 만들어줄 때까지 임시로 쓰던 것이죠."
파비오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잠시 볼 수 있겠는가?"
"물론이죠."
대장장이는 자신의 손에 없는 무기라도 상대가 보여주면 상태를 확인 할 수 있다.
파비오는 로아의 명검을 살펴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세상에 이런 검이...'
헤르만도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왔다.
"나도 좀 보겠네."
"그러시죠."
헤르만도 로아의 명검을 보더니 말이 없어졌다.
'성검. 신검에도 못지않다. 이런 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두 대장장이는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내가 만든 검은 어떻지?'
'내 검은...'
그들이 만든 검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었다.
대장장이 마스터라는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한 검이었고, 그들이 지금까지 벼려온 검중에서도 필생의 역작!
보통의 검사들은 한 번이라도 빌려가서 사냥을 해보고 싶다고 애걸복걸을 하리라.
그렇지만 로열 로드 최고의 명검을 앞에 두고 약간씩 모자란 건 어쩔수가 없는 일이었다.
기본 공격력이나 옵션에서 한 두 가지씩은 부족했다.
'재료가 헬리움이 아니었다면 내 검이 많이 아쉬웠을 것이다.'
'지금 이런 검을 보게 되다니.'
그들이 만든 검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렇게 열등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갖고 있던 자부심은 깨졌다.
두 대장장이들은 눈을 마주치더니 거의 동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번 승부는... 없었던 걸로 하지."
"그렇습니다. 우리 둘 다 마스터가 되었는데 우열을 따져서 뭐 하겠습니까."
헤르만도 동의했다.
"처음부터 장난삼아서 시작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허허."
"그렇지요. 우리가 어린 애들도 아니고 말입니다."
대장장이 마스터로서 최고의 검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대장장이의 마스터는 과정이었어. 로열 로드에서의 최고의 검을 만든다.'
'절대의 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그런 검을...'
한가롭게 살아가려던 두 대장장이였지만 다시금 경쟁에 빠져들어야 했다.
위드는 그들에게 조언을 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금속을 다루는 기술은 발전시킬 여지가 적으니 마법을 배워보세요."
"마법?"
"인챈트. 즉 검에 궁극의 마법을 부여하는 것이죠."
"마법이라..."
두 대장장이들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최고의 검을 만들기로 한 이상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 * *
던전 바움 공략!
오데인 요새를 지배하고 있던 하벤 제국의 성주 체스트로는 병력 700명을 동원했다.
300명은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나머지는 일반 유저들 중에서 돈을 낸 지원자들로 편성이 되었다.
"던전 공략에 참가비로 3천 골드나 내라니... 장비 맞추려고 챙겨놓은 돈 다 내버렸네. 좀 심하긴 하다."
"그래도 던전 바움이잖아."
"헤르메스 길드를 뒤따라가며 참가비만큼 이득은 챙길 수 있겠지. 그보다 방송국에서 많이 왔나?"
"응. 12개나 되는 방송국에서 중계를 한다던데."
"KMC미디어도 왔어?"
"오기는 왔대. 근데 그쪽에서는 취재만 하고 생방송으로는 안 내보낸다더라."
"그건 아쉽긴 하네."
"KMC미디어 같은 메이저 방송을 타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한 번 나오기 힘들지."
일반 유저들끼리 쑥덕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던전 바움은 오데인 요새와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공략된 적이 없는 곳이었다.
출현하는 몬스터들도 강해서 평균 레벨이 600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강력한 지역.
과거 여섯 번에 걸친 공략 시도가 전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오데인 요새의 성주가 직접 추진하는 일이니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래도 이번에 좀 활약하면 유명인 되는 거 금방이겠다."
"실력 발휘 잘하면 헤르메스 길드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 않냐."
"크으. 그건 꿈을 너무 높게 잡은거고."
이른 새벽부터 오데인 요새에 모인 유저들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이 약속 시간을 지나 느긋하게 나타나고, 성주 체스트로가 방송을 다분히 의식한 일장연설을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출정한다!"
체스트로는 긴 연설 후에 커다란 코끼리의 등에 타고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에 유저들은 박수를 치며 적당히 호응하며 던전 바움으로 따라갔다.
"성주 나이가 30대 중반이라던데. 이런 거 할 나이는 지났지 않냐?"
"몰라. 대충 맞춰주자.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방송이잖아. 방송. 대본에 있을 거야."
던전 바움에서의 전투!
헤르메스 길드에서 주로 길을 뚫었고 일반 유저들은 옆으로 새는 몬스터나 해치우는 신세였다.
그럼에도 방송에도 출연을 하고 전리품도 얻었으니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던전의 중반쯤 부터였다.
쿠르르르릉!
던전에서 누군가 함정을 잘못 건드렸는지 천장에서 돌무더기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악!"
"아. 누구야. 이거..."
"빨리 전진을 하거나 뒤로 빠지자."
공략을 따라온 유저들도 최소 레벨이 400대를 넘었으니 함정 발동 정도로 당황하진 않았다.
그런데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출현했다.
설상가상으로 보스 몬스터 듀그니엘의 습격!
보스 몬스터가 부하들을 잔뜩 이끌고 함정에 빠진 틈을 타서 습격을 해온 것이다.
'어떻게 하지?'
'이길 수 있나?'
유저들은 눈치를 살폈다.
지형이 좋지 않아 어느 정도의 희생은 피할 수 없었고 시야도 확실치 않았다.
이럴 때 보스 몬스터를 먼저 공격하는 이들은 커다란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일반 유저들이나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이나 누군가가 나서주기만을 기다렸다.
불과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야. 일단 빠지자."
"그래. 여긴 틀렸어. 괜히 죽을 필요 없지."
그리고 누군가가 먼저 도망치고 일부의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헤르메스 길드가 아닌 유저들 중에서 자신이 없던 이들이 대거 빠져나가 버린 것이었다.
헤르메스 길드와 남은 유저들은 함정에 빠진 채로 보스 몬스터 듀그니엘과 전투를 치렀다.
결과는 아슬아슬한 패배!
던전 바움 공략이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참가인원의 7할이 넘는 230명이 사망했다.
일반 유저들은 집계가 여려웠지만 절반이 넘는 희생자들도 생겨났다.
중계를 했던 방송국들은 공략 실패에 시청률이 실시간으로 하락하며 씁쓸해했지만 정작 큰 이슈는 그다음에 생겨났다.
오데인 요새의 성주 체스트로가 던전에서 목숨을 잃고 부활한 후에 분노를 터트린 것이다.
"우리의 전력으로 봐서 이번 공략은 당연히 성공했어야 옳다. 모든 책임은 도망자들에 있는 만큼 그들에 대한 무차별 척살령을 발동한다."
한동안 뜸했던 척살령의 발동!
던전 바움에서 피해를 입은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은 공략에 참여했던 이들을 쫓아가서 목숨을 빼앗았다.
"왜, 왜 우릴..."
"멍청아. 헤르메스 길드의 일을 망치고도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냐?"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살고 싶어서 도망칭 건데요."
"잘못 했으면 죽어야지."
죽는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이고 생방송에서 공략에 실패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의 칼날은 가차 없었다.
"저는 끝까지 싸웠습니다. 철수를 결정한 이후에 도망쳤다고요."
"제대로 안 싸웠잖아."
"아니. 목숨 걸고 싸웠다니까요? 영상도 확인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헛소리 하지 마."
"영상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변명 하지 말고 닥쳐. 약하면 애초에 끼질 말았어야지."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은 던전 공략에 참여했던 유저들을 이유를 불문하고 죽였다.
던전에서 끝까지 싸운 유저들의 경우에는 봐줄 수도 있었지만 화가 난 이상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려고 하지 않았다.
일반 유저들의 목숨이야 헤르메스 길드원에게는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화풀이 대상을 찾아서 휘두르는 폭력의 규모는 짧은 시간에 급격하게 커져갔다.
"너희들은 누구야?"
"우,우린 같은 일행입니다. 지금 사냥을 같이 하고 있는데요."
"저 녀석을 죽일 건데 막을 거야?"
"그게 좀... 아. 친구라서 안 되는데."
"척살령이 떨어졌다. 대화 나눌 필요도 없어. 그냥 같이 있는 녀석들도 쓸어버려."
"왜, 왜요. 우린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지금 말대꾸하네. 잘못했지? 요즘 잠잠하게 있었더니 헤르메스 길드가 너희들 눈에 우습게 보이더냐?"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같이 사냥하던 파티원까지 쓸어버렸다.
유저들도 당하지만은 않고 끝까지 항의했다.
"이건 지나친 행동입니다. 입장료를 내고 사냥에 참가를 한 거지, 우리가 공략을 지휘하거나 주도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무차별 살상. 오데인 요새의 성주에게 그럴 권한이 있습니까? 이게 헤르메스 길드의 공식 방침입니까?"
사냥터에서 유저들이 반발을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강경하게 대응했다.
성주 체스트로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한 일을 집행할뿐이었다.
"너희들이 착각하는 걸 알려줄까? 니들 말이 맞을 지도 몰라. 근데 이 세상에 약자들한테는 말할 권리가 없어. 그러니까 결국 너희들이 잘못한 거지?"
중앙 대륙에서도 주요 거점 중의 하나로 꼽히는 오데인 요새!
체스트로는 거대 요새의 성주로서 방송에서 굴욕을 당한 만큼 감정을 앞세웠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만한 힘은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 유저들이 항의하면 짓밟는 이정도의 사건이야 중앙 대륙에서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흔히 일어났던 것이다.
"더 이상 항의하는 자들은 반란군이다. 전부 제거한다."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은 칼을 휘두르는 일을 반겼다.
공식적으로 경험치나 전리품, 전투 스킬, 공적을 얻을 기회가 되는 것이다.
"다 죽어."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쓸어버려!"
오데인 요새의 병사들과 기사단까지 움직이면서 사냥터에서 항의를 하던 유저 백여 명을 전부 죽였다.
이 사건은 몇몇 방송국에서 던전 바움의 취재를 위해 왔던 리포터들의 현장 중계를 통해 생방송을 탔다.
- 헤르메스 길드가 반란군을 제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 반란군이요? 중앙 대륙의 반란은 진정되지 않았나요?
- 이 일은 던전 바움 공략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리포터들은 고작해야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설명을 했다.
- 사실 이들을 반란군이라고 칭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 저희가 봐도 그런 것 같군요. 아침까지만 해도 평화롭게 오데인 요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는데요.
- 예. 집이나 상가를 가지고 있는 유저도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처형 되었습니다.
방송국에서는 실시간 시청률과 반응을 확인했다.
로열 로드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관련 방송국들도 많아졌다.
국가마다 최소 로열 로드와 관련된 방송국, 인터넷 전문 방송국이 10여개씩을 넘어갈 정도였다.
시청률을 합하면 지상파 방송국 드라마보다도 더 나올 정도가 되었다.
드 넓은 베르사 대륙.
거대 회사가 된 KMC미디어처럼 주요 소식을 전하는 방송국이 있는 가하면,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 대한 소식을 위주로 듣길 원하는 유저도 많이 있었던 것이다.
브리튼 연합 방송국이나 로자임 방송국들도 유명했다.
현실에서 오전 8시에 벌어진 일.
방송의 초기에는 1% 이하의 시청률로 시작되었지만 불과 20여분 만에 3%를 돌파했다.
낮은 수치이기는 해도 이 시간대에는 쉽게 올리기 힘든 시청률이었다.
"계속 취재하고... 영상 계속 내보내. 어제 진행했던 바움 던전 영상은 있지?"
"현장에 동행해서 취재한 게 있습니다."
방송국의 스탭들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주요 부분 간추려서 내보내고... 무고하게 죽은 유저들이 있나 확인 해봐."
"예. 알겠습니다. 분석팀에게 맡기겠습니다."
"오늘 헤르메스 길드가 유저들을 공격한 전투 화면도 있나?"
"시작부터 촬영한 영상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만 수소문을 하면 공격당한 유저들을 통해서 곧 입수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전에는 여기에 힘을 싣는다. 정규 방송 전까지는 계속 속보로 내보내."
방송국들의 시청률 경쟁은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최근에 다리우스의 폭로로 헤르메스 길드를 비판하는 것이 여론의 큰 흐름이 되었다.
시청률에도 긍정적이라서 오데인 요새에서 벌어진 사건을 생중계하면서 크게 키웠다.
당연하게도 대형 방송국들도 금방 냄새를 맡았다.
로열 로드 초기부터 자리를 잡았던 KMC미디어, CTS미디어는 회사의 규모부터가 수백 배나 커진 상태였다.
국내가 아니라 전세계로 취재영상을 팔아먹을 정도였으니 지상파 방송국이 아쉽지 않은 재력과 인력을 갖췄다.
재벌 계열사인 만큼 유행에는 둔하다는 평가를 받던 CTS미디어였지만 방송국장이 바뀐 이후로 이슈에 대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특히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건이 있다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악마의 편집으로 자극적인 방송을 하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방송국장이 사건을 생방송 중인 스튜디오에 직접 나타나니 PD들도 긴장했다.
"오데인 요새는 유명한 곳이지 않습니까?"
"예. 국장님. 난공불락의 요새로 브리튼 연합과 아이데른 왕국의 사이에 있던 장소입니다. 각 세력들 간에 이 요새를 차지하기 위한 엄청난 공방전이 벌어지고는 했었죠."
"좋군요. 사건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파헤치세요. 오데인 요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헤르메스 길드원들 중에 나쁜 소문이나 사건과 휘말린 자들이 있는지도 체크해보시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른 채널을 보고 있던 시청자도 우리 방송국으로 올 수 있게 해야 됩니다. KMC미디어보다 시청률이 높게 나와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각 방송국들의 관심이 오데인 요새로 집중되었다.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에서는 그제야 사건에 대해서 알고 성주 체스트로에게 중지 명령을 내렸다.
- 기가드 : 길드 행정부입니다. 척살령을 취소하고 던전 사냥에 참여했던 유저들에 대한 공격도 중단하세요.
성주 체스트로는 그 명령을 무시했다.
행정부라면 길드 내에서 권력 순위가 조금 떨어지기도 했고, 또한 여기서 멈추면 이도저도 안 된다는걸 알고 있었다.
'내가 한 번 죽으면 손해가 얼마인지 알아? 데가다 던전 공략도 실패했다. 성주로서 체면이 있지...'
성질 때문에 홧김에 시작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미 칼을 휘두른 상태였다.
길드의 명령을 따라서 전투를 중단하면 오데인 요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에게 낯이 서질 않는다.
'고작 몇 백 죽였다고. 방송 때문에 일이 생각보다 커지기는 했지만 지금 멈추면 나 혼자만 바보가 되고, 잘못을 뒤집어 쓸 텐데?'
오데인 요새의 성주가 되기 위해서 재력과 세력은 기본이었고 정치적인 감각도 필요했다.
방송에서도 주목하고 있는데 물러서게 된다면 결국 사태가 마무리되고 난 이후에 자신에 대한 비난 여론만 커질 거라고 봤다.
체스트로는 힘으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반발하는 놈들을 계속 쓸어버리자. 그러면 길드 내에 강경파나 친한 영주들의 도움을 얻어서 사탤르 무마시킬 수 있겠지. 이 지역 유저들도 한두 번만 더 쓸어버리면 나설 사람도 없을 거야. 내 스스로 정리를 하는 것이지.'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지는 것도 오데인 요새만을 통치하는 자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서너 달 전까지만 해도 오데인 요새의 성주 입장에서 일반 유저들은 사냥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조금만 거슬려도 죽였으나 항의하는 자들은 드물었다.
강력한 힘에 의한 통치!
그것이 헤르메스 길드의 정통성이라고 믿었다.
* * *
오데인 요새를 지배하는 체스트로가 항의하는 유저들을 반란군으로 지목하고 대대적으로 살육전을 벌였다.
이 모든 과정은 방송국들의 중계를 통해 전세계에서 볼 수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향해 다시 무차별 보복을 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오데인 요새 외에 다른 지역은 잠잠합니다. 그런데 오데인 요새의 성주 정도 된다면 헤르메스 길드의 중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거로군요?"
"가정이지만 사전에 조율이 된 살육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CTS미디어에서는 던전 바움에서 끝까지 싸웠음에도 공격당한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취대에 대거 성공했다.
희생자들은 헤르메스 길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했지만, 기자들이 부추기니 금세 성주 체스트로를 비판했다.
"이번 일은 헤르메스 길드, 체스트로가 모두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그들만이 최고라고 믿는 거죠. 말을 안 듣는 유저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이유 외에 다른 것들을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방송으로 적합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너희들 헤르메스 길드에게 까불지 마라. 뭐 이런 거로군요?"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정이나 추측에 의한 설명을 하면서도 자극적인 멘트를 쏟아내는 CTS미디어에서는 시청률의 효과를 단단히 누렸다.
* * *
그날 저녁,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공식적으로 입장을 발표했다.
- 오데인 요새에서 벌어진 사건은 헤르메스 길드의 의지와는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성주 체스트로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자세한 조사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입장을 내긴 했지만 사태를 뜨겁게 보진 않았다.
천여 명의 희생자!
세율을 낮추면서까지 민심을 감싸 안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학살 같은 건 필요악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길드 내부에 있었다.
'방송을 타서 재수 없긴 하지만 가끔씩은 보여주는 것이 좋아. 누가 강하고, 참아주고 있는지 말이야.'
최근의 헤르메스 길드는 힘을 쓰지 않았다.
유저들에게 한 번씩은 강압적인 무력을 보여줘야 통치에 도움이 될 것이란 인식이 대다수에게 있었다.
실제로도 중앙 대륙을 정복할 당시에 본보기로 과감한 학살을 했던 경우가 꽤 많았다.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지고 나면 유저들이 고분고분해져서 통치하기가 쉬워졌다.
판트웰, 파고, 룬디치.
그날, 세 곳의 영주들이 군대를 움직여서 도시에서 활동하는 유저들을 학살했다.
- 세금을 똑바로 내지 않는 자들. 헤르메스 길드의 통치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필요하지 않다.
영주들은 짤막하게 학살의 이유를 공개했다.
'내 땅이고 내 구역이다. 이곳에서 사냥을 하고 교역을 하면서 감히 나를 비난해?'
지역에서 왕처럼 군림하려는 이들!
세 지역의 학살극이 방송을 통해서 또다시 중계가 되었다.
- 놀라셨습니까? 변한 게 없죠. 헤르메스 길드는 원래 이런 놈들입니다.
- 세금 인하? 믿을 놈을 믿어야지.
- 아무 기준도 없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극!
- 언제까지 착취를 당하고 살 겁니까. 빌어먹을.
- 지금 CTS 미디어 방송 보세요. 아무 죄도 없는 레벨 30짜리 초보 유저도 죽이고 있습니다.
- 그냥 미친놈들이죠.
인터넷 게시판에 헤르메스 길드를 비난하는 글이 올라오게 되었다.
'귀찮은 일이군.'
최근 라페이는 제국을 통치력을 강화하는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레벨 유저들 중에 쓸 만한 길드원을 선발해서 최근에는 75만까지 인원수를 늘렸고, 300만을 넘는 제국군 역시 꾸준히 훈련을 시켰다.
던전이나 사냥터에 제국군을 배치하여 그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세율을 낮춰서 중앙 대륙을 안정화시키는 한편으로는 군사력을 늘려서 장기 지배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과거보다 적은 예산으로도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에 자잘한 사건사고들까지 신경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학살이야 자주 했었고, 게시판에 헤르메스 길드 비판 글이야 없는 날이 드물 정도였으니 말이다.
"제국 차원에서는 통치 명분에서 손해가 조금 있을 것 같군요."
"해당 지역들의 영주들에게 공식적인 경고를 내리려고 합니다. 또다시 사건을 일으킬 경우에는 영주 자리를 박탈하는 것으로요."
"그 정도 조치는 심하지 않을까요? 중앙 대륙의 영주만 수천여 명이 넘습니다. 그들이 불만을 가지면 곤란한데요."
"길드에 충성 서약도 새로 받도록 하죠. 방송으로 우리도 노력하고 있다는 정도만 보여주면 될 겁니다. 경고만 하고 처벌을 하는 건 아니니 영주들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심할 필요는 없죠. 영주들을 임명하는 것도 우리고, 찍어 누를 수 있는 것도 우리입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에서는 이번 일로 유저들에게 호감이 더욱 낮아졌을 거란 전망을 했다.
북부 아르펜 왕국으로 빠져나가는 유저들이 많아질 수 있겠지만 현재 상태에서 큰 변화를 예상하진 않았다.
이미 헤르메스 길드의 억압적인 통치에 유저들이 익숙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에 의해서도 수없이 자주 벌어졌던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이득이나 경제적인 원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벤 제국에서 세율을 낮췄고 여기에서 활동하는 게 충분히 유리하다면 아르펜 왕국으로 떠나지 않았겠죠."
라페이는 하벤 제국의 경제와 기술력이 발달했고, 모험과 사냥에 대한 정보도 많이 공개되어 있으니 아르펜 왕국에 가서 고생할 사람은 한정적이라고 봤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세금도 낮춰서 그럭저럭 살만하게 해주었습니다. 민심은 고려해야 할테지만 여전히 불만을 갖는 이들은 힘으로 누를 필요가 있습니다."
* * *
헤르메스 길드의 학살극에 대해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익숙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잠깐 화가 나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있는 듯 없는 듯 흘러가버리고 말 사건.
로열 로드의 홈페이지에는 헤르메스 길드를 비난하는 글을 포함하여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오데인 요새의 지역 게시판에 한 유저가 게시물을 올렸다.
- 저는 중앙 대륙의 유저 '핀트'라고 합니다. 레벨도 514임을 먼저 밝히겠습니다.
당연히 레벨 자랑을 하려고 올리는 글은 아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밝히려고 합니다.
저는 로열 로드의 세상이 열리자마자 칼라모르 왕국에서 시작했고 기사가 되었습니다.
레벨 200을 달성하고 전직하며 국왕으로부터 기사의 검을 받은 감동을 기억합니다.
수많은 지인들이 칭찬하고 격려를 했던 날에는 조촐하게 맥주 파티를 하기도 했지요.
무척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로열 로드의 초창기. 지금 저처럼 오래된 유저라면, 이 로열 로드에 많은 추억을 간직한 유저라면 그 시절의 아름다움과 낭만을 알고 있으실 겁니다.
모험을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성문을 나서고, 두려움에 맞설 동료들을 사귀었습니다. 힘을 합쳐서 강한 몬스터와 맞서고, 사람들과 한밤중에 야영을 하며 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지금은 흔한 요리 스킬도 다들 없어서 맛없는 감자 수프를 끓여도 기쁘게 먹었습니다.
세상의 지도조차도 밝혀지지 않았던 때라서 처음 보는 곳으로 갈 때에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야했죠. 하나씩 업적을 일구어가고, 탐험 지역을 넓혀가는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
서문이 너무 길었네요. 그만큼 저에게 로열 로드는 깊은 감동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기에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레벨 500을 넘겼습니다. 많은 분들이 부러워하시겠죠. 하지만 헤르메스 길드가 커진 이후로 제 능력은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못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매번 당연하게 들어가던 사냥터도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입장료를 납부했습니다. 퀘스트를 하고 싶어서 인맥을 동원하여 헤르메스 길드에 부탁을 했고, 몇 번의 거절 후에 자리가 빌 때 수행했습니다.
길거리에서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을 만나면 시비가 걸리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했죠. 그들이 저보다 약할 지라도... 길드의 후광이 있기에 저 같은 개인은 쉽게 짓밟힐 수가 있었으니까요.
강해졌지만 친한 사람을 지켜주는게 아니라, 겁내고 눈치를 살피는 약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며 피하고 싶은 건 죽음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헤르메스 길드에 반대해서 사이가 안 좋아지거나 척살령을 당하면... 고향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하벤 제국의 어디로 가더라도 안전하지 못하죠.
그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고향을 떠나야 하기에 귀한 전리품을 얻으면 선물도 하고, 일부러 싸게도 팔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떤 때는 길드의 사냥이나 퀘스트에 강제동원 되어 억지웃음을 지으며 며칠을 경험치도 못 먹고 봉사하며 시간을 날려야 했죠.
로열 로드가 너무 좋아서, 이 멋진 세계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숙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지금까지 굴욕을 참았던 사건들이 잊히지 않습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눈치를 보며 말도 안 되는 주장과 횡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러서야 했던 기억들이 밤마다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 건... 손해를 보면서 참고 넘어가면 가슴에 멍울이 생기고 상처가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창피한 패배자입니다. 고개 숙이며 부끄럽게 물러난 기억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우린 왜 로열 로드를 합니까? 우리는 왜 살아갑니까? 당장 내게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한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이 자존심을 팔아버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꼽만큼의 이득을 얻는다고 한들 그게 과연 행복입니까? 저는 귀중한 진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행복을 위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공유한 친구들과 동료들이 성주와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의 학살에 의해 죽어갔습니다. 참으면서 진실을 외면하는데 지쳤습니다. 저는 오데인 요새의 성문 앞에 설것입니다.
눈을 질끈 감고, 내 일이 아니니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손해를 안본다고 생각했던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새겨진 상처는 평생 비겁했던 기억이 되어 아프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오데인 요새에서 죽을 겁니다.
* * *
오데인 요새의 지역 게시판에 올라온 핀트의 글은 조회수가 오르면서 금방 화재가 됐었다.
게시판 이용자들에 의해 로열 로드의 각 사이트들까지 옮겨졌다.
- 꼭 봐야할 글.
- 어느 고레벨의 인생 이야기.
- 읽어보세요.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 제 얘긴 줄 알았네요. 저는 레벨 300 정도지만 당한 건 수도 없어요.
- 헤르메스 길드 때문에 자다가 악몽 꾼 사람?
수백 개의 사이트로 옮겨진 이후에는 번역까지 되어서 전세계로 퍼졌다.
전체 조회수는 집계가 어려웠지만 수백만을 넘어서 수천만에 이르렀다.
퍼온 글들마다 달린 댓글들도 헤르메스 길드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다.
중앙 대륙 유저들도 겪었고 공감하고 있었기에 핀트의 글은 더욱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한편 방송국들도 사건을 파악했다.
"오데인 요새가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더 주목 받는군. 현장 영상 입수 가능해?"
"예. 취재 요원들이 나가있습니다."
"봐줄만한 영상이 될 것 같은데."
"그냥 공격 스킬 몇 방에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요? 레벨 500대의 유저라고 해도... 혼자서는 얼마 감당하지 못할 거 아닙니까. 온갖 사고를 치는 위드도 아니고요."
"그렇게 보는 눈이 없나? 시청자들이 보길 원하는 건 사건이 아니고 스토리야. 스토리라고!"
방송국들은 오데인 요새에 집중했다.
몇몇 소규모 방송국에서는 과감하게 현장 중계를 결정하기도 했다.
* * *
핀트가 로열 로드에 접속했을 때에 평소에 지인들에게 시끄럽게 울리던 귓속말이나 통신 채널이 잠잠했다.
"후... 결국 친한 사람들에게도 버림받은 거구나."
오데인 요새 지역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부터 각오했던 바였다.
"나한테 척살령이 떨여졌겠지."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은 예상하고 있었다.
목숨을 몇 번이나 잃고, 동료들과 영영 결별하게 될지라도 옳다고 생각한 일에 나서고 싶었다.
"사귀었던 사람들과도 다시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후회하는 삶은 안 살 거야."
접속을 종료했던 사냥터에서 숲과 산을 지나서 오데인 요새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겁기는 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둘렀다.
평소에 오데인 요새 부근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전투로 인해서 인적이 뜸했다.
"게시판에 올렸던 글은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 모르지.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말 잘 듣는 개였던 날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킨다. 그리고 북부로 가야겠지."
오데인 요새의 일이 자신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면 아르펜 왕국이 있는 북부에 가서 살고 싶었다.
이미 아르펜 왕국으로 떠나서 활동하는 친분 있는 유저들도 많다.
자신은 고향의 친구들이나 추억이 깃든 장소를 떠나지 못해서 머물렀지만 죽음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되리라.
아르펜 왕국의 국경을 넘기까지 대 여섯 번, 혹은 십여 번의 죽음을 경험할지라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는 바였다.
"가자. 오데인 요새로."
아쉽고, 복잡한 감정을 떨쳐내니 후련하기까지 하다.
핀트는 거대한 산맥들의 사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오데인 요새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