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49권 : 7. 정면 승부 (336/520)

7. 정면 승부

아르펜 왕국에서부터 풀죽신교의 본대가 하르판 지역에 도착했다.

"풀죽풀죽풀죽!"

평원을 뒤덮으며 내려오는 끝도 알 수 없는 무리들.

전투 계열 직업만이 아니라 온갖 종족과 직업을 가진 유저들이 밀려왔다.

모라타와 새벽의 도시에서 로열 로드를 시작하고 100일도 안 된 유저들도 있었다.

"이 런 이벤트에 안 끼면 언제 끼겠어."

"응. 무조건 재밌지!"

"전 돌아갈게요. 길 좀 비켜주세요. 벌써 이틀째 밀려 내려왔어요!"

"저도 고구마 팔다가 하루 종일 밀리고 있습니다. 흑흑. 제발 부탁요."

풀죽신교의 본대는 어느새 새벽안개처럼 하르판 지역을 뒤덮고 있었다.

2군단을 이끄는 제롬이 굶주린 승냥이처럼 주위를 돌며 공격했지만 실속이 적었다.

1만 명을 죽이는 사이에 10만 명 이상의 유저들이 늘어났다.

이것도 상당항 피해라고 볼 수 있지만 제롬은 이에 만족하지 못 했다.

그들이 상대한 유저의 대부분은 레벨 100이하의 초보였고 레벨이 200만 되더라도 잘 걸려들지 않았다.

초보자들이 발길에 채이다 보니 실력자들은 그 사이에 전부 도망쳐버리는 것이다.

"적의 규모는요?"

2군단 작전 회의를 위한 천막.

제롬의 질문에 마법사 로냐그가 대답했다.

"대략 7천만 정도 되는 거 같습니다."

"인구의 뻥튀기가 심하군요. 방송으로도 심하게 과장이 된 것 같고."

"미국 국방부에서 파악한 통계입니다."

"...걔들이 왜 그걸 세고 있죠?"

"현실에서 풀죽신교의 영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는군요."

2군단의 작전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지간한 국가의 인구보다도 많은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

'이거 이기고 나면 소문나서 동네에서 발붙이고 못 사는 거 아닐까?'

'앞으로 학교도 못 다니는 거 아냐?'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은 7천만이라는 숫자를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포기했다.

풀죽신교의 본대가 대대적으로 밀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말로는 수천만의 규모를 이야기하고 전투력을 평가할 수 있지만, 막상 보게 된다면 정신이 멍해질 정도의 규모다.

정면에서 싸울 자신이 없기에 외곽을 공략했지만 피해를 입힌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풀죽신교의 본대는 계속 남하하고 있었고, 위협은 오히려 2군단에서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런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분명 막고는 있지만 막는 거라고 볼 수고 없습니다."

전투가 벌어져도 그 주위를 둘러 싼 북부 유저들이 계속 남하를 하고 있다.

이제 풀죽신교의 본대가 하르판 지역을 전부 장악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특단의 조치로... 풀죽신교의 본대를 일점 돌파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제롬은 풀죽신교를 난장판으로 헤집어놓기로 결심했다.

군대 전체가 적진을 돌파하고 그대로 벗어나자는 것이다.

"너무 위험한 것 같습니다만..."

"반대입니다. 중앙 대륙을 정복할때는 우리 군단의 용맹이 크게 효과를 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의 규모가 너무 거대합니다!"

제롬의 2군단은 기사단이 주력이었다.

정복 전쟁에서 적진을 돌파하고 와해시키면서 전투 공적을 톡톡히 세웠었다.

"우리군의 최대 장기는 기동력과 화력의 집중 아닙니까? 설마 우리가 돌파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귀찮은 자들은 길게 상대하지도 않고 그대로 꿰뚫습니다."

"우리들도 피해가 있을 텐데요."

"피해야 있겠지만 성공적으로 풀죽신교의 본대를 관통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저들의 충격이 더 클 것이고, 2군단은 로열 로드 최강의 군대가 될 겁니다."

"그것은..."

반대하던 유저들도 조금은 잠잠해졌다.

그들은 헤르메스 길드의 핵심 주력이라서 말로는 위드나 아르펜 왕국의 명성을 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아직까지 패배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많지만 약한 적들이 대다수인데."

"돌격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겁니다. 정 불리해지면 중앙이 아니라 외곽을 꿰뚫는 것도 방법이 되겠습니다."

제롬의 거듭된 설득에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도 마음이 동했다.

2군단에 소속된 유저들은 아직까지 패배를 경험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놈들은 우리의 기동력을 따라오지 못합니다. 멋지게 싸워봅시다. 모든 방송국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으니 말이죠."

"옛!"

2군단은 하르판 지역의 울르프 대평원에서 풀죽신교의 본대를 맞이했다.

"돌격!"

제롬은 용감하게 2군단을 이끌었고 계획대로 중앙 돌격 작전을 펼쳤다.

멀리서 보면 한없이 무모해보이기는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로열 로드 전체에 이름을 남길 만한 위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걸어라. 우린 2군단이다. 제국군의 자부심과 긍지를 바탕으로 우리 모두가 송곳이 되어 적진을 꿰뚫는다!"

제롬과 2군단이 끝을 모르는 무리인 풀죽신교의 본대를 향해 밀려들어갔다.

* * *

풀죽신교에서는 고위 군인 출신의 전쟁 전문가들이 많이 있었고, 싸우는 방식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골치 아픈 건 지금처럼 제국군 2군단이 우리의 손발을 계속 끊어 내는 겁니다. 하르판 지역에 퍼진 유저들을 학살하면서 불안정을 확산시키는 전술을 위험합니다."

"의기로 일어선 유저들이지만 시간이 지체되고 대여섯 번씩 죽는다면 소문이 퍼질 겁니다. 진군이 멈춰지면 그걸로 허무하게 끝입니다."

"사람들이 많으면 분위기의 변화에 민감하게 휩쓸리게 되죠. 북부 유저들에게는 헤르메스 길드의 강함이 충격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으음. 중앙 대륙을 장악한 헤르메스 길드는 정말 강하죠. 그들 모두가 백 번 이상의 전투를 경험한 정예입니다."

"레벨 400대나 500대의 유저가 강한 건 알겁니다. 근데 그들이 모이면 얼마나 충격적인기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쟁 전문가들은 풀죽신교를 위한 작전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2군단은 풀죽신교의 본대에 정면으로 돌격해왔고, 파죽지세로 뚫고 들어왔다.

"말을 달려라. 우리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는 자들은 없다!"

제롬이 기사단의 지휘를 발동시켰다.

범위 내에 결속해 있는 아군의 공격력과 기동력을 높여주는 전쟁 스킬.

2군단은 사기가 충천해서 풀죽신교의 유저들을 공격하며 적진을 꿰뚫었다.

"크하하하. 다 덤벼라!"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이 신이 나서 날뛰었다.

선두에 서는 제롬이나 2군단 최고의 유저들도 즐거웠다.

스킬 한 번에 수십 명씩을 제거하며 말을 달렸다.

이런 통쾌한 진격을 위해 기사가 된 것이었다.

"적들은 마법도, 화살 공격도 못 할 것이다. 원거리 공격이 안 된다면 직접 전투에서는 스치면 죽음이지."

"원거리 공격을 해주면 더 좋습니다. 우릴 겨냥하더라도 빗나간 공격들이 더 많을 테니 아군에게 공격을 받게 되어 난장판이 될 테니까요."

2군단은 풀죽신교의 본대를 3킬로미터 넘게 쭉 밀고 들어갔다.

전장을 꿰뚫는 최정예 군단!

강철 기사단은 지치지도 않고 싸우면서 길을 뚫었으니 전력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도망치자!"

"싸워. 끝까지 버티면 이길 수 있어!"

풀죽신교 유저들이 나서더라도 워낙 힘의 격차가 커서 2군단의 진군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방패를 들고 막아!"

"소용없어. 그대로 다 뚫려버리고 있다."

풀죽신교의 본대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고레벨 유저들이 산발적으로 나선다고 해봐야 2군단의 돌격을 막을 정도는 아니라서 집중 공격을 당하고 회색빛으로 변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광연 스킬 한 번에 목숨을 잃는 초보 유저들까지 수천 명 단위로 몰려 있어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전멸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에게 정면 돌격을 하다니..."

"적이지만 기발한 방법입니다. 손발을 끊어내다가 갑자기 이동하고 있는 본대를 꿰뚫는 것은 말입니다."

풀죽신교의 전쟁 전문가들은 제롬의 수단을 높게 평가했다.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제대로 허점을 찌른 것이다.

솔직히 만일의 경우를 예상하긴 했지만 수천만의 유저들이 대비를 갖춘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내버려두었던 일 중의 하나였다.

"지금이라도 진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저들과 싸울 수 있는 고레벨 유저들이 전선에 나서도록 합시다."

"선봉을 설 수 있는 전사들을 모으는 데만 해도 수십 분은 걸릴 겁니다. 또 그들이 나서더라도 돌격해오는 적 앞에 그대로 내주었다가는 이후부터는 속수무책으로 완전히 꿰뚫리게 됩니다."

"시간과의 싸움이군요. 이건 몇 백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죽게 될 겁니다."

풀죽신교의 본대는 제롬과 2군단의 맹렬한 공격 앞에 허술하게 꿰뚫렸다.

중앙 대륙 정복 전쟁에서도 막강한 공격력과 기동력을 발휘했던 2군단이었는데, 그들의 질풍과도 같은 돌진이 허를 찌르며 막대한 효과를 발휘했다.

풀죽신교에서는 안 되면 몸이라도 던지는 용맹한 선봉부대인 독버섯죽과 같은 우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먼저 남쪽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약점을 공략 당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피를 흘리는 수밖에는..."

"차선책이라도 찾는 게 맞겠죠..."

2군단의 힘과 속도를 전혀 감당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풀죽신교의 수뇌부에서는 당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도 반격을 준비했다.

"건축가들을 비롯한 지원 부대에 부탁을 하겠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무서움을 보여줍시다."

* * *

2군단은 풀죽신교의 본대를 파죽지세로 꿰뚫으면서 느꼈다.

'전혀 대비를 하고 있지 못했구나!'

'우리가 이들의 숫자에 겁을 먹은 만큼, 절대 돌진해오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모양이야.'

풀죽신교의 유저들은 허무하게 죽어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제롬이 뒤를 따르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을 향해 외쳤다.

"더 가겠는가!"

"어디 가봅시다. 여기서 발걸음을 돌리기엔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북부 유저들을 살육하며 예정보다도 5킬로미터 정도를 더 전진했다.

제롬과 그 뒤를 따르는 강자들은 창과 검을 양손에 들고 휘두르며 돌파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계속 간다!"

"우리의 업적을! 2군단이 있음을 보여라!"

기사단이 전광석화처럼 뒤를 따르면 멍하니 서 있는 북부 유저들을 학살했다.

"이렇게 빨리..."

"막아야 되는데."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유저들.

스킬 한 번에 아군이 수십 명씩 죽어나가는데 제대로 버틸 리 만무했다.

아르펜 왕국에서도 헤르메스 길드와 싸워본 적이 있긴 했지만 속도와 돌파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도 계속 체력과 마나가 소비되는 스킬을 쓸수는 없었지만 유저들이 밀집한 곳을 뚫는 용도로는 충분했다.

선두에서 막강한 위력을 보이면 싸우려는 의지가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는 후속 부대가 말을 달리며 추수를 하듯이 베어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더 앞으로 간다!"

"우릴 막을 수 있는 자들이 누가있는가!"

중앙 대륙에서 북부로 이주한 고레벨 유저들이 산발적으로 나섰지만 돌격해오는 기사단의 제물이 되었다.

2군단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들만이 남겨질 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었구나. 이들은 많지만 약하다.'

'숫자가 군대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 하지만 싸우는 방식에 따라서... 그걸 우습게 만들 수도 있어.'

제롬과 2군단 유저들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었다.

골렘으로 이루어진 강철 기사단이 후방을 지키며 따라오기에 뒤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날카로운 창이 되어 풀죽신교를 꿰뚫는다. 우리는 오늘 신화가 될 것이다!"

제롬이 창을 들고 고함을 질렀다.

2군단의 유저들은 조금 지치기는 했지만 체력과 마나가 넉넉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

"적진을 돌파하라!"

2군단의 목표는 풀죽신교의 정중앙을 돌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적에게 영향을 주는 병력의 손실도 상달할 테지만, 멋진 전투 업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경험으로 정중앙을 꿰뚫린 군대는 의지가 꺾인다.

상대를 두려워하게 되고, 싸워도 이길 수 없다는 공포에 빠져드는 것이다.

"우리의 방식대로 싸우자!"

2군단이 적진을 돌파하는 화려하고 멋진 광경은 방송으로 수없이 중계되면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디를 알려주리라.

수천만의 대군이 밀집한 곳을 관통하는 위업!

제롬과 2군단의 진격이 계속 되면서 풀죽신교의 혼란도 계속 되었다.

"방패병! 방패를 들 수 있는 사람이 앞으로!"

"이쪽으로 모이세요. 이쪽에 저지선을 만들 겁니다!"

유저들끼리 방패병들을 구성하여 기사단의 돌진을 막으려고 해도, 전쟁경험치 많은 제롬과 2군단은 그 지역을 돠우로 지나쳐버리는 것이다.

일부 강철 기사단에는 방패병들을 남김없이 전멸시키고 따라오도록 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풀죽신교였지만 길드 채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 하일론 : 이렇게 무너지지 맙시다. 여러분. 움직이지 말고 그자리에서 싸워야 돼요!

- 렉탑 : 잠깐. 잠깐이라도 버텨주십시오. 병력은 계속 모이고 있습니다. 싸울 사람은 많아요.

- 반달곰 : 우린 무적의 풀죽신교입니다. 흔들리지 마세요!

활발한 길드 채팅은 북부의 유저들이 겁에 질려서 사방으로 도망치며 무너지는 것만큼은 막아주었다.

그 사이에 건축가들을 비롯한 유저들은 임무를 수행했다.

"더 깊이 파요. 놈들이 재미를 본 이상 분명히 이쪽으로 옵니다."

"함정을! 우리들이 당장 할 수 있는 건 이겁니다."

건축가들은 주위의 유저들과 함께 땅을 팠다.

노가다에 익숙한 북부 유저들이 삽 한 자루씩은 가지고 다녔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2군단에서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 실컷 본대를 유린하다가 빠져나가면 소용이 없어질 함정이다.

하지만 2군단이 정면 돌파를 끝까지 고수한다면 반드시 올 수밖에 없는 중앙 지역에 넓고 깊은 함정을 팠다.

두두두두두!

2군단의 말발굽 소리가 들렸고, 건축가들과 가까이 있던 유저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오는군요!"

"여기서부터 반격입니다."

2군단의 병력은 건축가들과 다른 유저들까지 그대로 돌파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유저들을 학살했기에, 밀집해 있는 이들에게 광역 스킬을 사용하며 돌파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2군단의 병력이 막 그 지역에 발을 딛었을 때, 대지가 한꺼번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따,땅이..."

"함정이다!"

"멈춰! 함정이야!"

뒤늦게 제자리에 서려고 했지만 전력에 가까운 무서운 속도로 돌파해오던 2군단은 멈추지 못했다.

수천 명 이상의 병력이 여기저기 파놓은 구덩이에 빠지면서 진형이 무너졌다.

구덩이 내부나 땅에도 건설용 날카로운 강철못들이 사방에 뿌려져있었다.

"더 뿌려요! 계속!"

주변에 있던 북부 유저들도 가지고 있던 강철못을 땅에 내던지듯이 뿌렸다.

헤르메스 길드의 유저들은 멀쩡했지만 말들은 달릴 수 없게 되었다.

"공격하자!"

"동료의 복수를!"

풀죽신교의 유저들은 2군단을 향해 해일이 되어 거세게 밀려들었다.

궁수들과 마법사들까지도 무자비한 원거리 공격을 했다.

"풀죽, 풀죽, 풀죽!"

"반격이다. 모든 군고구마죽 부대여. 오늘 뜨거운 맛을 보여주자!"

"커피죽 부대도 집결. 출동 준비 완료했습니다!"

풀죽신교의 본대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아서 모이고, 공격을 시작한다.

막강한 전력을 가진 2군단이었지만 그들의 최대 장점인 기동력이 막혀버린 상태였다.

"그래봐야 쓸어버리면 된다. 별로 달라질 것도 없어."

2군단은 재빨리 방어진형으로 바꾸면서 구덩이에 빠진 이들을 구출하고, 강철못들을 주웠다.

원형진을 펼친 채 싸움을 벌이는데, 북부 유저들의 공격이 짧은 시간에도 대단하게 매서워지고 있었다.

2군단이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북부의 강자들이 집결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서 언제까지 싸울 겁니까?"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은 사방에서 덤벼드는 무시무시한 숫자의 병력에 기가 질렸다.

뚫고 지나갈 때에는 약해보였지만 그들이 멈춰 있으니 초보 유저들이 무섭게 돌격해오고 있었다.

게다가 수 천만에 달하는 풀죽신교 본대가 2군단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2군단의 기사단장들이 제롬에게 달려갔다.

"북부 유저들을 전부 죽일 게 아닌 한, 이 자리에서 계속 싸우는 건 무립니다."

"알지만..."

"지금 물러나야 됩니다."

"여기서 전부 빠져나가진 못할 겁니다. 적진 한복판에서의 퇴각은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인데요."

"그래도요. 다른 선택이 없지 않습니까."

제롬은 이를 악물고 전장 이탈 명령을 내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명령이었지만, 완전히 멈췄던 2군단이 다시 움직이는 건 거센 저항을 받았다.

"도망치려고 한다!"

"헤르메스 길드 놈들을 잡아라!"

"더러운 놈들. 당할 만큼 당했다. 다 죽여주마!"

집요한 북부 유저들의 공격에 2군단의 허리가 끊기며 후방의 병력은 따라오지 못했다.

제롬과 기사단은 그걸 보면서도 전 병력의 발길이 묶일 상황이었기에 서둘러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남겨진 이들은 사투를 벌였지만 북부 유저들의 파상공세에 의해 전멸하고 말았다.

그 피해만 2군단의 절반에 육박했고, 비장의 무기인 강철 기사단도 3할 이상을 잃어버렸다.

강철 기사단은 어떻게해도 제압이 어려워서 북부 유저들은 다시금 방법을 찾아냈다.

"묻어요!"

인근에 있던 유저들이 일제히 구덩이를 파고, 정령사들이 물을 채우는 방식으로 해결을 봤다.

엄청난 격전이 일어났지만, 결과적으론 풀죽신교 본대의 대승리로 집계되었다.

풀죽신교에서는 초보 유저들이 대량으로 죽어나갔지만,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핵심 전력 중의 하나가 큰 손상을 입었던 것이다.

이 전투도 방송국들이 중계를 하면서, 바르칸을 제거하고 기세를 타려던 헤르메스 길드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 * *

위드는 사막 전사들이 진군하는 일스 대평원에 합류했다.

"사형들. 잘 지내셨죠?"

"잘 왔다. 막내야. 군대나 지휘해라."

"군대요? 사형들이 있는데 어찌 제가..."

"크크크. 우린 실컷 싸울 수만 있으면 된다."

검치나 사범들, 수련생들은 기꺼이 위드에게 전쟁 지휘권을 일임했다.

귀찮은 일들은 머리 좋은 이들에게 맡기고 나면 훨씬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 걸 자주 겪어봤던 것이다.

"스승님을 아르펜 왕국의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겠습니다."

"오. 좋구나."

"스승님처럼 강한 분이 딱 적격이죠. 둘치 사형. 사형은 외교부 장관입니다."

"허험."

"삼치 사형. 전쟁부 장관을 맡아주십시오."

"음. 그래."

위드는 스승과 사형들에게 듬뿍 관직들을 나눠주었다.

57개의 장관과 총독, 301개의 원장, 처장, 협회장, 상장 자리를 만들었고, 부족한 건 기사단장 자리로 메꿨다.

실제로 검치나 사형들이 낙하산이 되어 아르펜 왕국의 행정을 전담한다거나 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명함만 파면 되는 일.

'원래 우리 사형들이 관직을 좀 좋아하긴 하지.'

몇몇 사형들은 욕심을 부리며 자리를 더 달라고 했다.

"요즘 만나는 여자 친구가 있는데 말이다. 뭐하냐고 물어보면 이야기할 게 있어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이력서에 쓸 게 없잖냐."

"알겠습니다."

위드는 즉석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협회를 만들어서 임명했다.

- 베르사 대륙 평화 조직 위원회.

- 아르펜 왕국 몬스터 퇴치 협회.

- 드래곤 사냥 협회.

- 조각 예술 협회.

- 던전 사냥 전문직 협회.

"고맙다. 역시 막내뿐이구나."

검치나 사형들의 환심을 사는 일이야 동네 꼬마들 사탕 뺏기보다 쉬운 일!

위드는 바드레이가 불사의 군단과 싸우는 며칠 동안에 사막 전사들과 남부 지역을 휘젖고 다녔다.

"만세!"

"하벤 제국을 어서 해방시켜 주세요. 위드님!"

"풀죽풀죽. 위드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중앙 대륙의 유저들은 위드가 이끌고 온 사막 전사들을 열렬히 환호했다.

실제 전쟁이었다면 식량이나 돈을 얻기 위해서 죽이고 약탈을 해야 했을 테지만, 이곳은 로열 로드의 세상!

위드가 사막 전사들과 같이 도시에 들어오면 중앙 대륙의 유저들이 합류했기에, 하벤 제국의 영주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띠링!

< 가덴트로 도시를 정복했습니다! 눈부신 속도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전쟁 업적 달성! 전투와 관련된 모든 스탯들이 1씩 증가합니다. 호칭 '방대한 땅의 주인'을 획득하셨습니다. >

"위드님. 무명소졸 꼼냥이라고 합니다. 같이 싸워도 되겠습니까?"

"예."

"같이 싸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평소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사막의 대제왕 시절에는 전투병을 만들기 위해 항복한 병사들이나 주민들도 강제로 군대로 영입했다.

그러나 지금은 중앙 대륙의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사막 전사들과 같이 하려고 한다.

사막에서 출정을 했을 때보다도 열배 많은, 하벤 제국군으로서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병력들이 모였다.

검치가 진지하게 비결을 물어봤다.

"막내야. 지휘력이 심상치 않구나. 부하들을 이렇게 많이 늘릴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냐?"

"어떻게 얻어걸린... 그게 아니고 환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상?"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 사람은 바퀴벌레가 가득한 반 지하 방에서 밥을 굶더라도 희망이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죠."

"꿈을 말하는 것이구나."

"예. 모두가 모이면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겁니다."

검치는 장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물었다.

"못 바꾸면...?"

"어쩔 수 없는 거죠. 현실이 이 모양인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북쪽에는 아르펜 왕국, 남쪽에는 사막 전사들이 중앙 대륙을 공략하고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는 일찍 독재와 착취를 시작했지. 난 아직 하지 않았으니 인심이 따라주는군.'

중앙 대륙 유저들은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많았다.

그들 중에는 최근 몊 달 동안 접속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는데 위드와 사막 전사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

"위드 만세!"

"우리를 구해주세요. 순수하고 즐거운 로열 로드를 만들고 싶어요."

로열 로드는 초창기부터 전무후무한 큰 인기를 누렸다.

새로운 모험의 세계에서 누리는 즐거움 때문에 돈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게도 캡슐을 샀고, 시간이 생기면 잠깐이라도 캡슐방에 가서 즐겼다.

로열 로드는 전세계 사람들이 누리는 새로운 문화의 일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수많은 유저들 중에 일부는 북부로 왔지만 그대로 머물렀던 이들이 기꺼이 합류했다.

몇 개의 도시를 지날 때마다 엄청난 병력이 모여들었다.

위드는 그들에게 싸우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하벤 제국을 몰아내는 건 거대한 목표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냥 구경을 하러 따라오는 사람마저도 상대에게는 큰 압박이 되는 것이다.

'명령을 내리더라도 잘 듣지도 않겠지. 누가 감시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인력시장을 다니면서 터득한 요령 중에 한 가지가 있었다.

사람을 열 명만 모아놔도 꼭 서너 명은 노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해봐야 어차피 놀 사람은 놀고, 일할 사람은 일한다.

거기에 잔소리를 해봐야 말 안 듣는 사람은 더 열심히 안 듣는다.

"위드님은 우리에게 바라는 게 없어."

"어... 원하는 대로 살아라. 이 말 왜 이렇게 멋져 보이냐."

하벤 제국을 몰아내겠다고 모인 유저들은 위드의 무관심에 더 환호했다.

"전쟁은 처음인데... 뒤에서 화살만 쏴도 되죠?"

"치료는 해줄 수 있습니다. 죽이지는 않을게요."

전투 경험이 없는 유저들도 조금씩 나섰다.

"여기 가입하면 진짜 커피 공짜인 거 맞나요?"

"케이크 쿠폰은 언제 보내줘요?"

"...?"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유저들.

위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번 전쟁은 현실 세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중이었다.

풀죽신교의 인원은 대단히 많았고, 각 기업들의 상업적인 마케팅 수단으로도 쓰였다.

- 베르사 대륙 해방 전쟁! 참여 하신 분에게는 커피가 공짜!

- 치킨 1+1 행사해요. 풀죽신교 한정.

- 신규 풀죽 회원님들을 환영합니다. 머리에 꽃을 꽂고 인증하면 수영장 입장료 면제!

- 곰팡이죽 유저분들에게는 신나호텔 이용요금 절반에 아침 식사 제공합니다.

- 벌레죽이여. 싼 값에 곱창을 먹을 시간이 왔도다!

기업 차원에서, 동네 가게들도 만만치 않게 마케팅을 했다.

풀죽 아이스크림, 풀죽 버거, 풀죽 치킨, 풀죽 떡볶이, 풀죽 족발, 풀죽 감자탕.

"풀죽신교가 전쟁을 하니깐 더 활발해진 거 같다."

"응. 자주 싸웠으면 좋겠어."

초등학생들도 풀죽풀죽 하면서 다닐 정도였으니 현실에서의 영향력은 로열 로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벤 제국의 통치를 무너뜨리자!"

"자유와 진리, 풀죽신교를 위해!"

* * *

불사의 군단을 물리친 헤르메스 길드의 유저들은 방송국 스튜디오에 출현했다.

"바르칸과 싸울 때는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어디라도 시체들과 유령들이 날뛰었으니 안전지대 따위는 없었습니다."

거인 기사 보에몽.

현실에서는 차분한 인상의 20대 후반인 그가 CTS미디어에 출연했다.

배우 출신의 진행자 한승빈은 대본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저도 로열 로드를 즐기고 있는데요. 이런 큰 전투는 경험하지 못해서 궁금해요. 도망치고 싶지 않으셨어요?"

"네.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질 수 없는 전쟁이었죠. 베르사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 옆에는 헤르메스 길드의 유저들 4명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목숨을 잃기도 한 아크힘의 차례도 돌아왔다.

"바르칸이 예상보다도 훨씬 강했는데요. 승리의 요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헤르메스 길드이기에 이겼습니다. 우린 피할 수도 있었지만 유저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불리한 걸 알면서도 발키스 성에서 싸웠습니다."

출연자들의 앞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시청자들의 실시간 의견도 볼 수 있었다.

- 크코 : 허겁지겁 싸우다가 간신히 승리.

- 벨데가르 : 와... 지들이 손해 보기 싫어서 발키스 성에서 싸웠으면서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거 보소.

- 꼬냑세병 : 안 궁금. 하벤 제국 망하는 이야기나 물어보자.

- 방어력3 : 대륙 평화는 무슨. 지들이 먼저 북부를 초토화시키고 싶어서 시작한 거면서.

- 웅딩웅딩 : 헤르메스 길드가 암적인 존재임. 아르펜 해방 지역은 천국임.

- 백골전사요한 : 리튼, 하르판 지역 전부 정복당하면 아르펜 왕국으로 넘어갈 겁니다.

- 케르 : 걱정 하지 마세요. 하벤 제국 대위기임. 곧 망할지도 모름.

- 차분히침착하게 : 저도 풀죽신교 가입이요!

- 공부안함 : 풀죽신교가 대세. 하벤 제국은 지는 별.

"..."

헤르메스 길드의 유저들은 방송모니터를 통해 바르칸과늬 전투가 이미 유저들의 관심사를 끌지 못한 것을 확인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건 바르칸을 해지우면서 베르사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위드는 모험을 할 때마다 시청자들이 그렇게 띄워주었는데?'

대륙을 휩쓸었던 엠비뉴 교단과 바르칸은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헤르메스의 신속한 대처로 불사의 군단이 유저들에게 입힌 피해는 거의 없었고, 직접 본 이들도 소수였다.

사고를 친 위드를 비난하고자 해도 바르칸을 부른 자체가 팔마 그림자 부대 때문이었으니 항의를 하는 것도 우스울 지경.

'고생은 우리가 했는데 유명세는 위드가 떨치는구나.'

바르칸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유저들이 불만을 품었지만, 라페이나 수뇌부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중앙 대륙의 유저들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아르펜 왕국으로 넘어갈 줄이야."

"정복 지역의 유저들은 그대로 아르펜 왕국의 편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간신히 바르칸을 막아낸 건 다행이었지만 2군단과 5군단의 피해가 컸다.

하벤 제국이 유저들을 통치하기 위한 억제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르펜 왕국의 정복 지역들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통치권을 잃었으며, 사막 전사들의 진군로 역시 마찬가지.

팔다리가 끊어지는 피해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하벤 제국에서 임명한 영주들이 축제까지 벌여가면서 정복자들을 환영했다는 것이었다.

영주들은 각자 살 길을 찾은 것이지만, 헤르메스 길드의 입장에서는 도처에 배반자들이 깔려 있다고 느낄 수밖에는 없었다.

일반 유저들도 아르펜 왕국 편에 서는 걸 망설이지 않았으니 위기감이 대단했다.

"전반적으로 위드나 풀죽신교의 전략이 너무 뛰어납니다. 철저한 사전계획에 따라 모든 일들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지요. 손발이 제대로 움직인다고 할까."

"풀죽신교의 최상층부를 위드가 장악하고 관리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다보니 손을 쓰기 힘들 정도로 빠릅니다."

헤르메스 길드는 풀죽신교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최근에는 모든 게 위드의 음모가 아닐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바르칸을 처치하며 목숨을 잃었던 유저들과 바드레이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바드레이는 사투를 벌였지만 바르칸의 최후를 자신의 손으로 끊어놓지 못해서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하벤 제국이 그동안 아르펜을 봐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붙어보니 군사력도 무시하지 못하겠군."

"제대로 싸운 건 아닙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서지요."

보에몽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라페이가 씁쓸하게 말했다.

"전략과 인기도 실력의 일부라고 봤을 때 아르펜 왕국을 이제는 인정해야 합니다. 게다가 방송을 장악하고 여론을 이끄는 능력만큼은 완전히 우릴 압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군사력은요?"

누군가 항의를 했지만 라페이는 다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너무 많은 유저들이 돌아서고 있습니다."

"중앙 대륙도 세금을 낮추고 각종 제한 조치들도 해제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요?"

"우릴 그만큼 믿지 않기 때문이죠."

"크흠."

솔직히 잠깐 사탕을 줘서 달랠 뿐, 위드와 아르펜 왕국만 정리되면 원상복귀를 하려던 영주들의 말문이 막혔다.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훨씬 불리해지는 상태입니다. 만약에 몇 번의 전투를 더 패배해서 군대를 다 잃어버리면 우리는..."

라페이는 나머지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의미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군대가 사라진 헤르메스 길드!

손발이 잘린 채로 맹수 우리에 던져진 검투사와 마찬가지였다.

지금에 와서 라페이의 전략 미숙이나 판단 착오를 탓할 수도 없다.

중앙 대륙을 정복한 이후로 그가 완벽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유를 따지자면 위드가 항상 예측을 깼었다.

누가 상대를 했더라도 위드와 풀죽신교를 격파하긴 힘들었으리라는 걸, 당하고 나서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바드레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흑기사...의 효과가 있었을까?'

흑기사에게는 주민들과 부하들의 충성도를 낮추고 그들을 의심하는 퀘스트가 나온다.

스스로의 무력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퀘스트를 임하긴 했지만, 그 손실이 현실적으로 드러나기도 전에 빠르게 제국이 위축되고 있었다.

바드레이는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책을 가진 사람은?"

라페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나섰다.

"확실한 방법은 하벤 지역으로 물러나는 겁니다. 중앙 대륙의 정복 지역들을 내주고 물러나면... 우리들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겠지요."

"그게 대책입니까?"

아크힘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가 듣기에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중앙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시간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대책입니다. 지금의 위드나 풀죽신교의 인기도 영원하지 못할 겁니다. 중앙 대륙의 노른자 땅들을 차지하면 일반 유저들도 틀림없이 분열하고 싸우게 될 테니 몇 달 동안만 확실한 우리의 영토인 하벤 지역에서 조용히 힘을 축적하는 겁니다."

"..."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에서는 그 뜻은 알지만 아무도 선뜻 동의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철수를 위해서는 길드 내에 수많은 영주들이 영토를 잃어야 하고 극심한 반발에 시달릴 것이다.

헤르메스 길드가 외부적으로도 막대한 자금을 지원 받았기에 투자자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것도 문제였다.

"가장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이지만 실행이 불가능하겠죠."

라페이는 고개를 흔들며 스스로도 포기한 전략임을 밝혔다.

자신의 영향력이나 바드레이의 결단이 있더라도 실행하기가 힘든 방법이었다.

"차선책으로는 방어를 중심으로 한 전쟁으로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우리에게 유리해집니까?"

"수비전으로 나서면서 여러 가지 유언비어 유포나 매수, 여론전. 풀죽신교나 위드의 인기를 추락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하는 것입니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베르사 대륙 전체가 자신들의 손에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 새부터인가 패배를 걱정하고 있었다.

"제대로 큰 싸움 한 번도 못해봤는데... 다른 방법으로 그냥 전투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까?"

보에몽이 검을 뽑아서 땅에 꽂았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의 눈길도 그 순간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투!

강함을 추구하며 살아온 그들이었기에 자꾸만 패배하거나 피해를 입은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최고의 전력이 총집결해서 전투를 치르면 우리가 질 리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바르칸마저 제압한 지금 당장 올라가서 싸웁시다. 싸워서 다시 제국의 힘을 보여줍시다."

"간단하게 위드를 죽이면 되는거 아닙니까? 그러면 놈들이 의지 할 구석도 사라질 테니 말입니다."

라페이도 뜨거운 분위기를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정답이 될지도... 머리를 써서 이득을 보려고 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머리로 중앙 대륙을 얻었지만, 사람들의 미움을 샀기에 지금의 손해를 입는 게 아니겠는가.

전쟁으로 일어선 하벤 제국으로서 더 물러설 곳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헤르메스 길드의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 로열 로드는 꿈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다. 초창기부터 신세계를 꿈꾸며 많은 유저들이 시작했고, 스스로를 성장하며 베르사 대륙에서의 삶에서 즐거움을 찾게 되었다. 전쟁과 세력들끼리의 다툼을 벗어나 간신히 안정을 찾고 있는 중앙 대륙! 우리의 터전이 되는 땅이 북부의 침략으로 흔들리고 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이에 결연히 맞서며 정면으로 싸울 것임을 선언한다! 유저들이 살아가는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전쟁으로 파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이상의 혼란과 피해를 막기 위해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전력을 이끌고 가르나프 평원으로 달려갈 것이다. 위드와 아르펜 왕국은 이에 상대할 용기가 있다면 기꺼이 응하라. 힘 대 힘. 하벤 제국의 영토를 빼앗고 싶다면 스스로의 강함을 마땅히 증명해야 할 것이다.

전격적인 포고문이 중앙 대륙의 각 성과 도시마다 내걸렸다.

방송국의 긴급 속보를 통해서도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곧 로열 로드의 대부분의 유저들에게 퍼졌다.

"으아아. 정면 승부라고?"

"미쳤다. 진짜 총력전을 펼치려는 건가?"

"얼굴 구경하기도 힘든 랭커들이 다 모이고, 중앙 대륙을 통일할 때 동원된 군대도 싹 출동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이 싸움에서 이기는 쪽이 대륙을 통일하는 거잖아?"

"그건 잘 모르겠는데... 이런 전투에서 풀죽신교는 져도 되지만, 헤르메스 길드는 지면 미래가 없는거 아닌가?"

"풀죽신교도 유리한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인해전술도 바드레이를 비롯해서 최강 전력들이 전부 출동한다면 어렵지 않겠어?"

광장이나 선술집마다 유저들끼리 모여서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헤르메스 길드에 맥주 한 통 건다!"

"난 풀죽신교. 풀죽신교야 말로 진짜 무패의 전설. 한 번도 진 적이 없지."

"중앙 대륙에서 싸우는 거잖아.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서 쉽지 않을 걸."

"승부는 가늠하기 어렵지. 팔마 그림자 부대. 바르칸 같은 걸 떠올려봐. 이 전쟁에는 무슨 수단이 나올지 모른다고."

"위드도 재앙을 일으킬 거고."

"그렇게 해서 뒷감당이 되나?"

"모르지. 모르니까 흥미진진한 거 아냐."

"캬... 보고 싶다."

가르나프 평원은 하벤 지역의 동쪽, 하르판 지역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넓은 평지라서 대규모 전투를 펼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으며, 어떤 비열한 수단도 허락되지 않는 지역이었다.

* * *

풀죽신교의 비상전략상황실에서는 헤르메스 길드의 포고령을 듣고는 웃어넘겼다.

"터무니없는 소립니다. 하벤 제국과의 총력전이라니요. 그러면 진짜 1억 명 이상이 모일지도 모르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인기에서 우리가 앞서고 있고, 시간도 우리 편이죠. 더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천천히 인구를 늘리면..."

"아르펜 왕국의 영토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중앙 대륙에서 단단히 자리 잡을 겁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헤르메스 길드의 제안은 무시하면 될 뿐이었다.

하지만 흥미를 느끼는 여론의 반응이 상상 이상이었다.

- 위드와 바드레이. 과연 최강의 유저는!

- 하벤 제국의 모든 군대들이 총집결할 것.

- 사상최대의 전투가 조만간 열릴 것으로 기대.

- 로열 로드를 개발한 유니콘사에서 내건 상금의 주인은 과연?

풀죽신교에 대해 호의적이던 방송국들도 메인 뉴스로 헤르메스 길드의 포고령을 방송했다.

풀죽신교의 밑바닥 여론도 한 번 싸워보자는 무리들이 많았다.

"드디어 위드님과 바드레이가 싸운다. 캬. 진짜 꿀재미가..."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어떤 칼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데 싸워주는 건 순진한 생각입니다."

"도전하는데 안 받아줘요? 게다가 이기기만 하면 중앙 대륙 전체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데요?"

"이미 풀죽신교와 헤르메스 길드는 싸우고 있죠. 언젠가 부딪쳐야 한다면 기세가 오른 지금이 호기입니다."

풀죽신교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유저들끼리도 의견 통합이 되지 않았다.

위드의 결정이 중요한 바!

위드가 싸우자고 하면 풀죽신교는 당연히 따를 것이고, 아니라고 한다고 하면 실망하면서도 받아들이긴 하리라.

사막 전사들과 같이 약탈을 하던 와중에 위드는 포고령 소식을 접했다.

중앙 대륙이 전장이 된 지금 상황에서는 리튼 지역이나 하르판, 브리튼, 일스 대평원.

어디든 유리한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싸울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로서 언데드를 대규모로 소환하여 헤르메스 길드에 타격을 입히면서 이득을 추구했다.

야비함의 결정판!

그럼에도 성장 속도만큼은 다른 이들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였다.

지금까지 해온 노가다의 결실을 맺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숟가락을 들고 가봐야 먹을 것이 없겠지."

위드는 상식적으로 간단히 판단하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생각이 바뀌는 데는 고작 전화 몇 통화면 충분했다.

"출연료가... 네? 정말입니까?"

위드와 바드레이.

둘이 자신의 군대를 이끄는 베르사 대륙의 사상 최대의 전투!

위드의 행동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방송권을 사기 위해 방송국들이 빠르게 제의를 해왔다.

"5억 정도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만."

"5억이나요?"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기에 충분한 금액.

"네. 광고주들의 연락이 굉장히 많아서...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면 방송 시간도 길 것 아닙니까? 준비 과정도 찍어야 하구요."

"그렇죠. 그렇죠."

"10시간 방송을 기준으로 해서 5억을 드리겠습니다."

톱 연예인들이 광고 한 편을 찍고도 5억씩은 받는다.

위드의 인지도나 방송을 함으로써 얻는 영향력이나 수익을 감안하면 방송국들의 입장에서는 많이 남는 장사였다.

몇 분 뒤에는 다른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저희 방송국은 8억 준비했습니다. 광고료 10%도 따로 드립니다."

"KMC미디어에서는 맞춰줄 수 있는 한 최대치로 해드리겠습니다. 12억. 광고료도 20%를 드립니다."

"CTS미디어입니다. 딱 잘라서 20억 어떻습니까. 광고료 부분도 협의할 의향이 있습니다."

위드는 전화 몇 통화에 수억씩 출연료가 뛰는 걸 보고 현실감각이 조금 무너졌다.

"음... 마법의 대륙 계정을 팔 때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군. 돈이 돈 같지 않게 느껴지는 기분 말이야."

방송국들 입장에서는 이때까지만 해도 사실 전면 전쟁이 이러우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봤다.

위드가 불리한 결정을 내리지도 않을 것 같았고, 설혹 응하더라도 준비 과정에서도 취소될 여지가 높은 것이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좀 더 현명하게 판단할 여지가 있었다.

북부 유저들이 대거 내려오고는 있지만 분노의 감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지기 마련이다.

한참 기세가 오른 그들과 싸우느니 일부의 땅을 내주고 시간을 끌다보면, 하벤 제국은 다시 안정을 얻을 기회가 있으리라.

북부 유저들이 중앙 대륙의 도시와 영토에서 언제까지나 머무르면서 수비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략적인 후퇴가 유리한 상황인것이다.

그럼에도 만약을 감안하여 방송국들은 나름 적당한 출연료를 제시했다.

정말로 베르사 대륙의 사상 최대 전투가 벌어진다면 출연료는 얼마를 지불하더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방송국들의 입장이었다.

CTS미디어에서는 전무이사급에서 추가적으로 거래가 들어왔다.

"전쟁이 벌어지면 앞으로 몇 년간 최고 시청률을 찍을 거야. 광고도 최고가를 갱신할 거고... 그러면 방송국 홍보를 위해서 프로그램 수익을 전부 줘서라도 잡아야지."

"이 전쟁을 어떻게 중계하느냐에 따라 방송국의 등급이 달라질 수도 있어. 일단 위드는 잡아놓고 봐!"

돈을 밝히는 위드의 성격에 대해서는 파악이 끝난 바!

방송국 관계자들의 섣부른 전화 몇 통에 위드는 헤르메스 길드와 정면으로 싸우기로 결심했다.

"이 전투만 이기면 건물주... 시내 한복판에 빌딩을 사는 거야."

어릴 때부터 쭉 꾸었던 꿈.

부동산 투기와 건물주!

매달 세입자로부터 월세를 받아가면서 돈 걱정 없이 사는 삶.

"인생을 살다보면 피해갈 수 없는 싸움이 있다고 하지. 이 싸움이 바로 그것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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