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영웅 집결
위드는 방송국 인터뷰를 통해 공식적으로 헤르메스 길드의 제의를 수락했다.
- 가르나프 평원에서 싸우자는 제의에 기꺼이 응한다. 단 15일 후의 토요일 저녁으로 하자.
라페이와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위드의 수락을 받고는 당황스러웠다.
"모든 주력을 데리고 정면으로 싸우자고? 진심인가?"
"이거 위드가 말한 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CTS미디어와 KMC미디어를 통해서 인터뷰 영상도 나오고 있습니다."
"허어..."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 유저들은 이를 갈고 있던 참이었다.
위드와 북부 유저들을 박살내버릴 기세였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제안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라페이에게로 모였다.
"정면 승부는 우리에게 크게 유리한 거 아닙니까?"
"절대적으로요. 우린 제국의 넓은 땅을 지킬 필요 없이 모든 전력을 한 곳에 집결시킬 수 있습니다."
"근데 위드가 왜 이 전투를 간단히 수락한 겁니까?"
"..."
라페이는 작은 단서들을 모아서 상대의 의중을 꿰뚫고 음모를 계획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방송국들의 제안을 받았지만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미 여러 곳에서 투자를 받아서 그들은 부자였다.
게다가 위드의 돈에 대한 집착이 그가 생각하는 상식보다 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이건 그동안 쌓은 명성은 버려도 된다는 생각으로 쓰는 속임수이거나."
라페이는 자신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능성 있는 추측을 이어나갔다.
"이 전투에서도 우릴 이길 자신이 있어서겠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쩌면 위드는 인기에 대해 과신을 하고 있거나, 헤르메스 길드의 군사력에 대해 정확히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싸웠는데도 말입니까?"
"솔직히 우리가 여러 번 졌으니까요."
"..."
"그러나 이번 전쟁은 오히려 인해전술로만은 극복하기 힘들 것입니다. 정예병력.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방패를 헤르메스 길드는 전부 동원할 수 있지요."
라페이는 아르펜 왕국과 정면으로 싸운다면 절대 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헤르메스 길드의 총 전력은 넓게 분산되어 중앙 대륙 전체를 통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북부 유저들은 인해전술에 전적으로 의지하는데, 그것이 무적이 될 수는 없다.
2군단만 하더라도 피해를 입었지만 중반까지 대단한 전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었다.
아크힘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싸우기로 해놓고 바르칸 같은 녀석을 부르는 거 아닙니까?"
끔찍한 언데드!
결코 다시 싸우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속임수를 쓰더라도 전쟁 자체를 하지 않는 쪽이죠. 전투가 벌어지면 풀죽신교나 아르펜 왕국을 따르는 유저들이 그자리에 모일 겁니다."
"사람들이 방해가 되어 반드시 위드도 나타나야 하고, 바르칸 같은 몬스터를 소환하지 못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바르칸 같은 걸 부르면 아르펜 왕국 스스로 자멸하는 겁니다. 아마 재앙도 일으키기 힘들 겁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가르나프 평원과 같은 장소는 수작을 부리기에는 적합한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라페이와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이 원하는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설마 했다.
'아르펜 왕국을 건국한 것만 봐도 장기적인 안목을 가졌다. 전투를 할때마다 치밀하고 잔꾀가 많았어.'
'중계권? 돈? 당연히 의미가 없지. 그만큼의 명성이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라페이는 깊게 생각해봐도 답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하벤 제국에는 좋은 상황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먼저 제의를 했고 위드가 받아들인 이상 전쟁 준비만이 남았습니다."
학살자 칼쿠스가 물었다.
"그런데 전투 날짜를 미룬 것은 무슨 의도겠습니까? 15일 후의 토요일에 하자고 한 것을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위험한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 *
위드는 유린의 그림 이동술로 가르나프 평원에 먼저 도착했다.
"오빠. 여기는 풀 밖에 없네."
"그래. 잔꾀나 속임수가 많이 쓰일 곳을 아니군."
헤르메스 길드에서 선택한 전장이기에 인터넷으로 미리 조사를 해봤다.
가르나프 평원은 넓고 시야가 탁트여 있어서 함정을 파기가 어렵다.
드문드문 경사가 심하지 않은 언덕이 있지만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대군이 모여서 한판 붙기 좋은 장소야."
안 그래도 악명이 자자한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결전을 제의하면서 엉뚱한 비난을 받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을 꺼야."
위드는 가르나프 평원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번 전쟁만 승리를 거둔다면 대대손손 먹고 살 돈이 생기리라.
'건물주, 땅주인, 집주인, 투기꾼. 그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
어렸을 적에 부모님을 잃었을 때의 기분을 떠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모든 행복이 빠져나가는 기분, 눈앞에서 세상이 흐려졌다.
버려지고 내쳐져서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절망감.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공장 일과 노가다를 하면서 세상의 무서움과 독함을 맛봤다.
약하고 가진 것이 없으면 얼마든지 짓밟혔다.
백화점이나 커피숍 같은 곳을 지나갈 때 보이는 사람들은 다른 세계에 사는 것만 같았다.
여동생을 데리고 번화가를 지나가면 그들만이 낙오자이거나 거지처럼 느껴졌다.
시험 성적이 나쁘거나, 친구와 싸우는 건 이 아픔이 며칠이 지나면 줄어들 테니 부러웠다.
'조각술을 마스터하고 힘겨운 퀘스트를 했던 것들. 이 모든 게 어쩌면 이번 전투를 위해서일지 몰라.'
위드는 과거 회상을 마치자마자 전투를 이기기 위한 계획들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풀죽신교와 헤르메스 길드.
베르사 대륙의 양대 축이 맞붙는 전투였기에 변수들이 다양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일도 많이 벌어지겠지.'
헤르메스 길드의 작전도 그렇지만, 풀죽신교가 얼마만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싸워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조각사 마스터. 지금까지 배워온 모든 능력이 총동원 될 시간이다.'
야비하고 치사한 방법들이 숱하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패널티가 큰 조각품에 생명 부여나 조각 부활술도 필요하다면 당연히 사용해야 했다.
특히 조각 부활술의 경우에는 로열 로드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 낸 특별한 존재 정도는 되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나서 대충 놀다 가면 곤란하지. 무조건 나를 돕도록 만들어야지."
대충 하는 아부란 얼마나 무성의한 것인가.
진정한 아부꾼이란 칭찬 한 마디에도 영혼을 걸어 상대방의 십년묵은 변비가 나아버릴 정도의 아첨을 해야 한다.
"큰 그림을 위해서 시간 조각술도 써야 되겠군. 딱 한 번 이지만 써먹을 수 있는 존재가 있지."
평범한 전쟁 예측은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당연히 하고 있을 것이다.
눈치 보기와 아부, 빌붙기.
탁월한 재능들을 바탕으로 베르사 대륙의 옛 역사까지 관통하는 거대한 그림이 그려졌다.
* * *
마판!
마판 상회를 이끄는 상계의 거두인 그에게 귓속말이 들어왔다.
- 위드 : 북부의 모든 상단에 전하세요. 가르나프 지역으로 최대한의 보급을 집중합니다. 무기와 전투 물자는 물론이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식재료를 충분히 동원해주세요. 특히 술이나 음식이 3일안에 도착해야 합니다.
마판은 위드의 말이라면 의심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금으로 만들어버리는 마이더스의 손!
'조각사를 괜히 한 게 아냐. 길거리에 떨어진 나무토막마저 주워서 조금 만지더니 비싸게 바가지를 씌워서 팔아먹은 직업이잖아. 조각사는 위드님의 천성이었어.'
마판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면서도 이유가 궁금했다.
"무기나 전투 물자는 있는 대로 끌어 모아 보겠습니다. 모라타에 있는 물량을 싹 쓸어서라도 어떻게든 맞춰봐야죠. 근데 따로 식량이 필요할까요?"
가르나프 평원에서의 전투까지는 2주나 남아 있는 시점이었다.
더군다나 유저들도 각자 어느 정도의 식량을 가지고 있을 테니 굳이 보급의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 위드 : 후... 이렇게 순수해서야.
마판은 그 말을 듣자마자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 위드의 꿍꿍이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 위드 : 가르나프 평원에는 지정된 날짜보다 일찍 오는 유저들도 많겠죠.
"그렇겠죠?"
하르판 지역을 장악한 풀죽신교가 가르나프 평원까지 내려가는데 필요한 시간은 이틀이었다.
검치와 사막 전사들이 가르나프 평원에 도착하는데도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운명을 건 결전을 벌이기로 한 이상 제국군과도 서로 싸울 이유는 없었다.
제국군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서 북상하고 텔레포트 게이트까지 이용한다면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 위드 : 일찍 일어나는 새부터 잡아야죠. 술과 음식이 있다면 그들의 호주머니를 털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까.
"오오. 그것은!"
마판은 그 광경이 상상되었다.
어마어마한 군중들이 가르나프 평원에 모일 것이다.
북부 유저들은 당연했고, 중앙 대륙의 유저들도 이 거대한 이벤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려올 것이다.
그 많은 인원이 모였는데 술이나 음식들이 제공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축제로군요!"
- 위드 : 그렇습니다. 호주머니가 털려도 모를 정도로 흥청망청 놀고먹을 겁니다.
"여, 역시!"
- 위드 : 사람들은 불안할 때에 더 돈을 헤프게 쓸 수 있죠. 전쟁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항상 변치 않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 위드 : 제가 15일의 유예 기간을 둔 것은 중앙 대륙의 유저들도 다 같이 즐기자는 의미입니다.
"철저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북부의 모든 상단들을 동원하여 베르사 대륙 최고의 축제로 열어야겠습니다."
위드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것도 전투 승리를 위한 중요한 꼼수 중의 하나였다.
로열 로드 전체를 놓고 보면 베르사 대륙의 패권 같은 걸 신경 쓰지 않는 유저들이 은근히 많았다.
누가 지배를 하더라도 크게 신경을 안 쓰기도 하지만, 작은 도시 한곳에서만 쭉 지내면 대륙의 정세는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전쟁에 지친 중앙 대륙 유저들에게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평범한 유저들까지 눈이 뒤집혀서 달려오게 만드는 거창한 축제!
그렇게 와서 축제를 즐긴 중앙 대륙의 유저들은 약간의 바람만 넣어도 위드의 편에 설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것만 해도 전력이 수십 퍼센트는 올라가는 거겠지.'
* * *
땅! 땅! 땅!
대장장이 마스터를 하고 나서도 경쟁하듯이 검을 만들고 있던 헤르만과 파비오.
"위드와 바드레이라..."
대장장이들에게 전쟁은 피해가 없다.
누가 지배를 하더라도 최고 실력을 가진 대장장이들에게 함부로 대할 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륙의 최강자가 결정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그럼 가볼까."
* * *
농부 미레타스.
로열 로드에는 농기계가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농부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작물을 수확할 때까지 모든 과정이 노가다로 이루어졌다.
넓은 땅을 경작하려면 쉬는 날이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러 종류의 곡물과 수십 종이 넘는 과일, 관상용 나무들을 돌봐야 했다.
"아름답구나."
미레타스는 그의 땅에 바람이 일때마다 출렁거리는 황금빛 벼들을 보았다.
"농부는 자연에 씨앗을 뿌리고 땀을 흘리며 결실을 맺는 직업이지. 땅과 식물을 만지면서 사는 재미는 후회가 없단 말이야."
그의 이마에는 노동으로 흘린 땀으로 흥건했다.
띠링!
< 신품종 개발! 새로운 쌀 품종을 탄생시켰습니다. 높은 영양분을 가지고 있으며, 밥을 지어서 입 안에 넣으면 저절로 녹아버리는 최고등급의 쌀입니다. 1등급 음식 재료! >
"이건 다른 농부들에게 나눠줘야겠군."
농부는 같은 직업들끼리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직접 개발한 품종이나 희귀한 묘목을 나눠주면 그걸 재배하는 것만으로도 스킬 레벨이나 명성을 올릴 수 있다.
욕심을 부려서 혼자 키울 수도 있었지만 미레타스는 그러지 않았다.
농부들이 수확량을 늘리는 것은 곧 로열 로드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니까.
"가르나프 평원이라..."
미레타스에게 시급 2실버에 초보조인족 참새들을 시켜서 발송한 위드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 가르나프 평원에서 멋진 전투를 구경하세요. 그동안 아르펜 왕국을 위해 힘써주신 바에 감사드리며 관람을 위해 와삼이의 넓은 등을 제공합니다. - VIP초대장 - ]
"당연히 나도 가봐야지. 농부를 우습게보던 헤르메스 길드 놈들에게 복수를 해야 하니 말이야."
미레타스는 개량한 전투용 씨앗을 배낭 가득 채웠다.
농부는 전투를 하진 못해도 간접적인 도움을 주는 건 가능하다.
식인 나무들로 구성된 숲을 조성 한다거나, 마비독초들이 들판 가득 자라나게 하는 방식을 통해서였다.
* * *
재봉사 드라고어.
그는 밀린 빨래를 하다가 초대장을 받았다.
"아쉽지만 일이 많아서 가기는 힘들겠는데."
어떻게든 재봉사 마스터 퀘스트를 하려고 했지만 산 너머 산!
품위 있는 멋진 재봉사의 손이 부르틀 정도로 빨래를 했다.
빨래 퀘스트가 옷감과 친해지는 장점은 있었다.
이미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찌든 때가 쑥 빠지고 옷감도 부드러워진다.
"이번 일을 끝내고 멋진 퀘스트를 해야... 설마 진짜 마스터까지 노가다만 하고 끝나진 않을 거 아냐."
드라고어는 빨래가 얼마나 남았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봤다.
"..."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은 더러운 옷들의 산이 있었다.
"타, 탈출이다."
그는 가르나프 평원으로 즉시 달려가기로 결심했다.
* * *
풀죽신교의 요리사 엘크군.
그는 최고의 맛을 손끝에서 낼수 있는 요리사였지만 풀죽을 마실 때마다 반성했다.
"담백하고...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그저 한 끼의 허기를 때울 뿐이지만, 이조차도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니. 요리 재료를 낭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엘크군은 풀죽신교의 여러 죽부대를 요리로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독버섯죽에서도 까다로운 몇몇 레시피들은 다른 요리사들은 알고도 만들지 못했다.
엘크군이 만든 요리만이 제대로 된 향긋한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독버섯죽이 되었다.
"북부와 중앙 대륙의 입맛은 다르지. 중앙 대륙 유저들에게 더 많은 독버섯죽을 먹여주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가봐야 할 일이다."
* * *
건축가 미블로스.
그가 북부에 오면서 건축 양식이 확 달라졌다.
크고 세련된 건문들이 도시의 풍경을 멋들어지게 바꿨다.
모라타의 수많은 판자촌들은 그의 손길에 의해서 개조되기도 했다.
"낡은 건 추한 게 아냐. 그 형태를 바꾸면 이것도 충분히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다."
판자집들의 구조나 색을 조금씩 바꾸었다.
멀리서보면 모라타의 집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여겨지는 멋진 풍경들을 만들어냈다.
훌륭한 건축가는 화가이기도 하고, 조각사이기도 했기에 가능한 설계.
그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한 새벽의 도시는 깔끔한 기획 정리와 함께 북부의 역사를 그대로 자아냈다.
얼음의 거리, 개척의 거리, 예술의 거리, 문화의 거리, 상업의 거리, 모험의 거리, 생산의 거리.
도시 건축에 있어서 거주하게 될 사람들의 행복이란 무척이나 중요했다.
"사람들이 이 도시에서 즐거운 꿈을 꾸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도시가 멋지고 아름답다면 여기서 머무르는 사람들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것이다.
살아가는 사람과 관광객들이 하루라도 더 머무르고 싶어 하는 도시.
미블로스는 새벽의 도시를 건설하다가 위드의 초대장을 받았다.
"당연히 가볼 일이었는데... 흠흠."
아르펜 왕국과 하벤 제국의 결전이라는 데 빠질 수가 없다.
만약 하벤 제국이 이기기라도 한다면 그가 땀방울로 지은 대지의 궁전을 그들이 점령하고 사용할게 아닌가.
미블로스는 최악의 경우에는 전부 부숴버릴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초대장까지 보내주니 좀 체면이 사는군. 아르펜 왕국에 와서는 무시를 당하지 않아서 좋아."
조각사가 국왕이라서 그런지 생산직에 대한 대우가 아주 후했다.
미블로스는 온 힘을 다해서 아르펜 왕국을 도울 작정이었다.
* * *
오베론.
로열 로드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차가운 장미 길드를 창설했던 장본인.
멋진 모험을 이끌기도 했던 그는 현재 아르펜 왕국의 벤트성 영주였다.
풀죽신교가 대거 남하하는 와중에도 성주로서 지역의 치안과 유저들 지원을 위해 남았지만 초대장을 받았다.
"결전이 벌어진다고? 그럼 무조건 가야죠."
그는 벤트 성의 총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오베론은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했으며 모라타의 광장에서는 명연설까지도 남겼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생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검을 들지 않으면 우린 평생 부끄러워하며 살 겁니다. 당당하게 걸어갑시다. 우린 풀죽신교입니다!"
* * *
파보와 가스톤.
북부의 건축가들을 이끄는 그들은 풀죽신교의 본대와 같이 움직였다.
"길을 놓아요. 여기는 앞으로 아르펜 왕국이 남쪽으로 진출하는 핵심 교역로가 될 거니까요!"
아르펜 왕국의 건설부장으로 임명되어 퀘스트를 만들 수 있는 그들!
< 교역로 건설 >
아르펜 왕국의 국가 퀘스트.
남쪽 평원까지 이어지는 길을 건설하라.
건설 작업에 동원되는 노동자들은 공헌도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난이도 : D
보상 : 국가 공헌도.
퀘스트 제한 : 아르펜 왕국 주민 한정.
건축가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도로가 만들어진다.
그들의 헌신 덕에 풀죽신교의 본대를 빠르게 남하시킬 수 있었으며, 마차들이 과속으로 달릴 수 있는 수송로도 확보되었다.
"달리자. 취이익!"
오크 부대도 그 도로를 지났다.
끝도 없이...
* * *
모험가 체이서.
"작은 실마리를 얻어서 대륙 전체를 헤매는 게 모험가의 일이죠. 발굴의 짜릿함? 1초 후에는 사라질 기분이라도 그걸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는 니플하임 제국의 오래된 유물들을 꺼내서 아르펜 왕국에 가져왔다.
유물들의 효과로 경제력, 기술력, 상업이 빠르게 발달했다.
아르펜 왕국 발전의 공신 중의 한 명.
체이서의 이름은 북부 유저들에게 널리 알려질 정도였는데, 이번 전투에도 당연히 참석했다.
* * *
데이몬드.
대지의 약탈자 길드장으로 최초로 S급 난이도 퀘스트를 받은 이.
부활의 사제로 엠비뉴 교단의 마물을 이끌고 중앙 대륙으로 침략한 전적도 있었다.
하벤 제국에 의해 토벌을 당하고나서 퀘스트의 패널티로 영원한 죽음으로 캐릭터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대지의 약탈자 길드원들은 로열 로드를 다시 시작해서 레벨 100을 간신히 넘긴 상태였다.
과거의 강력함은 추억이 되었지만 모라타에서 시작해서 던전을 돌며 열심히 성장 중이었다.
"여긴 천국이야."
"물가도 싸고... 제품의 품질도 높고."
"불량품이 있으면 수리나 교환을 해준다는 게 놀랍네요. 헤르메스 길드의 상단은 그런 거 절대 없었는데."
중앙 대륙에서 살아갈 때와는 다르게 초보자인데도 살맛이 났다.
"대장.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연합니다. 갑시다!"
* * *
헤겔, 벨라, 르미, 나이드.
한국대학교 가상현실학과의 학생들도 모라타에 머무르고 있었다.
"우리... 가봐야 하는 거 아냐?"
"훗. 가보나마나야. 헤르메스 길드를 이길 수는 없어. 그 강대하던 흑사자 길드도 무너졌는데."
"헤겔아. 넌 왜 말을 그렇게 하냐."
"딱 보면 각이 나오는 걸 몰라? 세상에 무의미한 환상을 품고 살아선 안 되는 법이야."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답답하다.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커억."
도둑 나이드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르미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어디 가?"
"가르나프 평원."
"멀잖아."
"그래도 구경 가보고 싶어. 안 보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
"같이 가자. 그럼."
한국대학교의 학생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겔이 끝까지 남아서 버텨보려고 했지만 붐비던 모라타의 거리가 한산했다.
성문에서는 남쪽으로 몰려가는 마차와 황소 떼들이 북적거렸다.
"에휴. 가준다. 가줘... 딱히 궁금해서 가는 건 아니라니깐."
* * *
"우리 형님께서 헤르메스 길드와 전투를?"
물빛의 화가 페트는 아렌 성의 하수구에서 그림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의 낙서는 치안을 떨어뜨리고 주민들의 충성심까지 낮췄다.
"아마 그녀도 있을 테지..."
페트는 유린을 떠올렸다.
그러자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림 이동술로 당장 가자."
그리던 그림마저 대충 완성했다.
황제 바드레이가 홍게 라면을 끓여서 사람들을 나눠주지 않고 혼자 먹는 그림이었다.
* * *
할마, 마르고, 레위스, 그랜.
세상에 아는 유저들이 그리 많진 않지만 이들에게 당한 이들은 치를 떨었다.
뒤치기의 4인조!
"전쟁의 신 위드님께서 무신 바드레이와 싸우다니..."
"그분에게 당한 것조차도 영광이다."
"야. 이번에 이기면 대륙 통일 아냐?"
"전투 한 번 진다고 중앙 대륙을 다 뺏기겠냐."
"그래도 제일 큰 싸움을 이기면 대륙 정복을 한 거나 다름없긴 하지. 이거 지고 나면 헤르메스 길드가 어떻게 막겠냐."
"크흐. 베르사 대륙의 황제라니..."
"우린 그 황제가 되려는 사람을 뒤치기 하려고 했던 거야."
뒤치기의 4인조들은 주로 로자임 왕국에서 활동했다.
로자임 왕국만 하더라도 동쪽의 변방이지만 그래도 대단히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수많은 마을과 도시, 성들이 있었고 발길이 닿지 않은 사냥터나 신비로운 퀘스트들이 남아 있었다.
한 왕국의 지배자만 되어도 대단한데 베르사 대륙의 통일 황제라면 얼마나 위대한 자리인가.
"가볼까?"
"당연히 가봐야지."
"가는 동안 만만한 녀석도 좀 알아보자."
"그래, 뒤통수 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살펴야지."
* * *
은링, 벤, 엘릭스.
그들은 위드가 사막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었다.
"대지의 그림자 파티가 아니십니까. 로열 로드를 시작하기 전에 그 명성은 자자하게 들었습니다."
"알아봐주셔서 영광입니다."
엘릭스가 대표로 악수를 했다.
"도전장을 보내신 적도 있었는데."
"큼큼. 잠시의 호기로... 그랬던 적이 있긴 합니다."
은링과 벤은 시선을 피했다.
엠비뉴 교단과 엮인 일로 인해서 약간의 흑역사가 생기고 말았다.
결국 그들이 허송세월을 하는 동안에 엠비뉴 교단을 물리친 것은 위드였으니까.
"요즘에는 팔로스 제국의 건국 퀘스트를 하고 있습니다. 사막 지역에 제국을 세우는 일이죠."
엘릭스는 여전히 경쟁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자랑했다.
드넓은 사막 지역의 통합, 전사들을 키워서 국가를 세우는 일.
아르펜 왕국의 건국에 비해서도 절대 가치가 낮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위드가 땅을 산 사촌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 그 퀘스트요."
"알고 계십니까? 검치 분들을 통해 이야기를 들으셨으리라고..."
"저도 그 퀘스트 하고 있습니다."
"네?"
"팔로스 제국의 건국까지는 딱 한 단계 남겨놓고 있죠. 뭐 남은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고요."
"..."
"번거로운 일들을 다 처리해주셔서 이 다음 퀘스트에서는 도움을 많이 받겠네요."
대지의 그림자 파티는 그렇게 또 다시 눈뜨고 당하고 말았다.
그들끼리 고난을 뚫고 어렵게 퀘스트를 진행해왔더니 중간에 끼어든 경쟁자!
평범한 경쟁자라면 대지의 그림자 파티를 당해낼 수가 없겠지만, 문제는 위드였다.
온갖 직업 스킬과 노가다 스탯, 명성, 퀘스트 경험, 전투력에 인맥까지 빵빵한 위드.
위드가 끼어든 이상 뒤로 밀려나는 건 당연한 순리였지만 어디다 하소연을 하기도 애매했다.
대지의 그림자 파티가 사막까지 와서 퀘스트를 진행한 데에는 애초부터 위드의 공이 적지 않았으니까.
위드가 사막의 대제왕으로서 기반을 다져놓지 않았더라면 퀘스트가 지금 단계까지 올 수도 없었으리라.
"에효. 헤르메스 길드와 전쟁이라니 가보긴 해야겠죠."
"앞으로의 역사가 결정되는 순간이니 보긴 해야겠지."
"위드를 도와줘야 할까요?"
"헤르메스 길드가 잘 되는 걸 볼 수 없으니 그래야겠지. 뭔가 또 내키진 않지만..."
* * *
로빈은 아르펜 왕국에 큰 복수심을 갖고 있었다.
"내 땅을 몽땅 빼앗아가다니... 내가 어떤 노력으로 영지를 키웠는데."
하벤 제국이 북부의 점령 지역을 빼앗기면서 헤르메스 길드에 의해 임명된 영주들은 허공에 붕 뜬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위드와의 협상을 통해 자리를 보전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상대를 어리숙한 청년 정도로 생각했지만 철저한 오산.
협상에 반발해 도시를 불태우고 떠난 7인은 최악의 악당이 되어 베르사 대륙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대로 남은 영주들은 수천만 골드를 아낌없이 퍼부어서 성장시킨 도시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70%나 바치고 있었다.
"그래도 도시를 운영하는 맛이 있긴 하지만..."
로빈은 아직 서윤을 포기하지 못했기에 중앙 대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만큼 뛰어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사람은 없어. 무엇보다도 한눈에 반해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얼굴과 돈이 받쳐주니 여자들과의 소개팅이나 접근도 많았다.
일주일에 열 명 이상, 한때는 도저히 서윤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다른 여자들도 만나봤다.
그럼에도 서윤에 대한 생각만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외모만이 아니라 특유의 아우라가 있어 다른 여자들과의 비교를 거부했다.
'언제까지 그녀가 이런 놈을 만나진 않을 거야. 그래. 로열 로드... 로열 로드가 문제지.'
로빈의 생각은 조금의 근거를 가지고 엉뚱한 곳까지도 향하게 됐다.
'그녀도 로열 로드에 푹 빠진 거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 외롭게 지낸 그녀에게는... 맞아. 천국이었을 거야. 그래서 위드처럼 강하고 명성이 높은 남자와 사귀게 된 거지.'
결론도 상당히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로열 로드 외에 그 무엇으로도 위드에게 진다고는 납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열 로드에서 성공하자. 그러면 더 이상 그녀가 그 놈에게 붙어있을 이유가 없지.'
로빈은 이를 악물고 다스리는 도시 아스에 투자했다.
"8천만 골드. 환전해서 넣어. 다음주에는 1억 골드 더 투자한다."
그에게도 부담이 되는 금액들이지만 아끼지 않았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도시 아스를 개발한다면 이걸로 능력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서윤이 아르펜 왕국의 실질적인 행정을 전담한다는 소식을 듣자 더욱 도시개발에 열을 올렸다.
'가까운 곳에 있어. 이 도시가 북부 최고의... 아니, 대륙 최고의 도시가 될 것이다.'
로빈은 부모님으로부터 미리 증여받은 재산을 쓰고, 부동산도 팔아서 로열 로드에 집어넣었다.
도시의 영주가 자신이다보니 허공에 날아가는 건 아니지만 재벌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금이 소모됐다.
- 도시 아스에 주거지를 등록하면 천 골드 증정.
- 초보자 여러분들이 퀘스트를 할 때마다 상금 500골드를 드립니다.
- 복지 혜택! 모든 물품 구매시 20%의 금액을 환급해드립니다.
- 방문자 이벤트. 도시 아스에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여행용품을 나눠드립니다.
- 식사를 나눠드립니다.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도시 아스의 모든 식당들이 공짜!
주민들을 위해 벽돌집을 지어서 무료로 분양을 해주기도 했다.
이용자 숫ㅈ가 3명밖에 안 되는 해적들을 위해 길드도 개설했다.
그야말로 백년대계!
백년을 내다보지 않고서야 해서는 안 될 투자들을 마구 했다.
'부족한 것보다는 넘치는 게 낫다. 모든 이들이 압도될 수 있는 그런 도시를 만들자.'
영주성도 호화로운 궁전으로 지어지고 있었다.
총 52개의 구역을 나누어서 1구역부터 순차적으로 완성을 하는데, 완공 후의 전체 면적은 대지의 궁전을 능가할 정도였다.
궁전의 설계는 외국의 유명 건축 사무소에 맡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돈으로 바르고 있는 도시 아스는 북부 유저들이 들어오면서 매일 활기를 띄었다.
"여기 살기 좋네."
"응. 아르펜 왕국이잖아."
"도시가 깨끗해."
"아르펜 왕국이니깐."
"위드님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도시까지 만들어지는 거야."
"위드님한테 우린 정말 고마워해야지."
눈 뜨고 당한 느낌!
로빈은 울화를 참고 있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교역을 위해서 방문한 상인, 그 중에서 서윤의 아버지인 바트를 만난 것이다.
"회장님!"
"허허. 회장 자리는 다 내려놓았네. 솔직히 말하면 뺏겼지. 그러니 편한대로 부르게."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근데 이 도시는 무슨 일로..."
"올리브와 맥주는 좀 가져왔군."
바트는 타고 있는 마차와 뒤에 연달아 서 있는 짐마차를 손으로 가리켰다.
"로열 로드를 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상인으로 활동하고 계십니까?"
"그렇네. 조촐하지만 뒤늦게 재미를 만끽하고 있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로빈은 영주성으로 바트를 안내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도시에 투자한 보람이 있구나. 영주성을 이렇게 멋지게 지은 걸 보면 대단하게 여기겠지.'
바트는 고급스러운 도시의 거리와 사치의 정점에 달한 영주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H그룹을 이 녀석이 물려받으면... 거기도 오래는 못 가겠군. 기업을 한 번에 털어먹을 놈일세.'
그날 이후로 로빈은 바트를 극진히 모셨다.
바트가 가져오는 물건은 당연하게도 웃돈을 얹어서 매입을 했고, 방문시마다 필요한 서비스는 모조리 제공했다.
"어르신을 위해 집을 짓고 있습니다."
"내 집까지?"
"예. 오실 때마다 별장이라 생각하고 편히 지내주십시오."
상인을 위한 물품들도 전부 최고급으로 맞췄다.
레벨과 스킬에 따른 장비들을 경매 사이트를 밤새고 뒤져서 가장 좋은 것들을 구했다.
"자그마한 성의입니다."
"고맙네."
로빈은 바트가 기뻐할 때마다 더 없이 행복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있어. 이제 그녀만 정신을 차리면 모든 조건은 완벽해진다.'
기다림을 참는 것이 힘들긴 했지만, 그 대상이 서윤이기에 행복했다.
그러던 준 위드가 헤르메스 길드와 가르나프 평원에서 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하. 이거였어. 이번에 바드레이에게 패배한다면 그걸로 그녀도 돌아올 것이다.'
로빈은 바트에게 같이 가르나프 평원에 구경을 가자고 제의했다.
"그래. 같이 가세."
"어르신. 근데 이번 전투에는 어느 쪽이 이길까요?"
묻고는 있지만 헤르메스 길드가 이길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도시 아스가 다시 하벤 제국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면 그건 또 다른 멋진 결과이리라.
바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위드가 이기겠지."
"위드가... 네?"
"난 이길 거라고 보네. 그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남자니까."
"..."
로빈의 얼굴이 구겨지는 건 어쩔수가 없었다.
'어르신이... 설마 아니겠지?'
참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진심으로 궁금한 질문이 생겼다.
'남자답게 물어보자.'
로빈은 굳은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서윤. 따님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역시 저 아니겠습니까?"
"위드가 잘 어울리네."
"예?"
"진국이지. 알수록 훌륭한 청년이야."
"..."
"둘이 잘 만났어. 내 딸과 행복하게 잘 살 거야."
* * *
페일은 결전의 날 가르나프 평원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위드님이 불러주시면 가긴 가겠지만 어디까지나 정중한 부탁을 먼저 하셔야 한단 말이지.'
세간에 퍼져 있는 소문을 그도 들은 것이다.
로열 로드의 명예의 전당에는 큰 인기를 끄는 동영상도 하나 등록 되었다.
- 위드의 전투 노예 페일!
위드가 싸운 전장마다 페일이 나서서 싸운 장면들이 동영상에 편집되어 나왔다.
초보 시절에 같이 사냥을 다녔던 영상도 나와 있었는데, 조회수가 무려 3억 7천만!
위드와 로열 로드의 인기 때문에 어지간한 국가의 인구를 몇 배나 넘어섰다.
- 빼박 전투 노예 인증 영상.
- 노예라고 부를 수도 없죠. 인간이 아니라 꿀벌 수준입니다.
- 혹시 음머어어 하고 울지 않나요?
- 그보다 편집한 동영상의 길이가 19시간을 넘는 게 극혐 수준이네요.
- 하루 종일 전투한 3초 정도로 컷 했어도 이 정도.
- 4시간 29분 43초. 달밤에 허리를 숙여서 전리품 줍는 광경이 어찌나 서글픈지...
- 위드님이 강하다고해도 뭔가 꼼수가 있으리라고 봤는데요. 생각을 바로 잡게 되네요. 전투 노예가 저 정도면 위드님은 도대체...
- 며칠씩 줄에 매달려서 대형 조각품 만드는 거 못 보셨어요? 토 나와요...
- 북부 유저이고 풀죽 원리주의자 중의 한 명입니다. 남들은 우리가 고되게 산다고 하는데, 위드님을 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갑니다. 노가다에 미쳤어요.
- 인간이 죽어서 신이 될 수 있다면 노가다의 신은 확정입니다.
- 인력사무소 사장입니다. 페일님. 연락 주세요. 특별 채용하겠습니다. 일당 두 배 무조건 보장합니다.
- 이 동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과를 먹다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 노예의 노오오오오오력.
페일도 그 동영상을 보며 위드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착취를 당했단 말인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전리품이나 경험치를 주지 않는 것만이 착취가 아니었다.
자유와 시간을 빼앗는 것도 일종의 착취!
전투 노예 페일이 자아를 깨닫게 되었다.
'가르나프 평원에 가면 죽도록 싸워야 되겠지. 아르펜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위드님이 부르지도 않는데 가는 건 정말 노예나 할 짓이야.'
페일은 이제부터라도 정확히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자신에게도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무리한 사냥 요청이나 부탁을 한 다면 단호하게 거절을 하리라.
'나도 이제 사람답게 살 것이다!'
페일은 아버지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부모님들과 형제들, 사촌까지도 로열 로드에 강하게 중독이 되었다.
필요한 게 있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보니 가끔 먼저 귓속말을 보냈다.
- 젠터 : 없다. 우린 신경 쓰지 마라. 넌 큰일을 해야 되잖니.
"예?"
- 젠터 : 가르나프 평원에서 멋지게 싸우는 광경 기대하고 있다. 네 엄마도 다른 여편네들에게 계모임에서 얼마나 아들 자랑을 했는지 몰라.
"어, 어떻게요?"
- 젠터 : 내 아들이 바로 그 페일이라고!
페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동네 주민들이 대부분 모여 있는 초대형 계모임!
그곳에서 페일이 자신이라고 들키다니 앞으로 마음 편히 마트를 가기도 틀렸다.
"아주머니들 분위기는요?"
- 젠터 : 엄청 부러워하지. 로열 로드를 하는 사람 중에 궁수 페일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모라타와 대지의 궁전에는 네 조각상도 세워져 있는데.
그 조각상도 문제였다.
위드의 옆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광경이 영락없이 전투 노예의 광경이 아니던가.
"자식이 전투 노예라는데 화 안나세요?"
- 젠터 : 말조심해라. 화는 무슨 화! 네가 위드님의 최측근이잖냐. 옛날 같았으면 정승이지. 지금도 장관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이야.
"그거랑은 좀 경우가 다른 거 같은데..."
- 젠터 :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아르펜 왕국에서 얼마나 혜택을 입고 사는데... 네 형이 상인이잖냐.
"예. 그렇죠."
- 젠터 : 광장에서 전투 노예 페일의 친형이라는 깃발을 달고 장사를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십분도 안 되어서 물건이 동나버린다.
페일은 낯이 뜨거워서 들 수도 없을 정도였다.
'아아. 내 명예와 긍지가...'
- 젠터 : 이런 이야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네 대학 등록금도 위드님이 마련해주신 거나 마찬가지야.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 젠터 : 몇 달 전에 위드님이 풀죽여신님과 같이 식당에 오셨잖냐.
"식당을요?"
페일의 부모님들은 현실에서 곰탕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도 원활하고 공무원들도 자주 찾아서 그럭저럭 장사는 되는 집이었다.
- 젠터 : 오셔서 곰탕 두 그릇 먹고 가시고 그 이후로 방송까지 나가서 손님들이 미어터진다. 저녁때 번호표 150번까지 내준 거 알고 있냐?
"그런 일이..."
페일은 도저히 위드가 펼쳐놓은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유의지?
그런 게 무슨 필요란 말인가.
자신은 충실한 전투 노예인데.
페일은 등이 서늘해지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버지. 근데 위드님한테 밥값은 받으셨습니까?"
- 젠터 : 수육까지 따로 포장은 해가면서 잘 먹었다고 맛집으로 소문내야한다고 하시더라. 앞으로 네 인생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그래서 밥값은요?"
- 젠터 : 나는 안 받으려고 했지. 하지만 밥값은 떼먹으면 안 된다고 억지로 쥐어주고 갔다.
페일은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오랫동안 위드와 함께 하고서도 잠깐이지만 의심을 했다.
'그런 분이 아니었지.'
자린고비이긴 했지만 무전취식을 하진 않는다.
남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도 정작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잊지 않는 사람이 위드가 아니던가.
'작은 지출은 아끼더라도 크게 써야할 때 망설이지 않았지.'
전재산을 털어서 모라타에 투자하거나, 푸홀 워터파크를 설립할것만 해도 그렇다.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 위드라고 생각했다.
* * *
만돌.
그는 셸지움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은 유저들을 데리고 가르나프 평원으로 향했다.
"아. 괜히 싸워가지고."
"레벨이 떨어진 건 참겠는데. 스킬 숙련도 진짜..."
"난 장비까지 잃어버렸잖아."
셸지움에서 대거 사망한 유저들이 불만으로 투덜거렸다.
좋은 일을 위해 나섰지만, 그럼에도 목숨을 잃고 나니 후회가 든 것이다.
"괜히 가서 또 죽는 거 아니겠지?"
"설마... 모이는 사람이 몇명인데. 다 싸우지도 못할 걸."
"흠. 어떻게 싸울지 궁금하긴 한데... 겁나기도 하다."
"죽으면 자기만 손해지."
유저들은 잘난 척 나서봐야 정작 챙겨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없다고 불만을 품었다.
셸지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죽었지만 그 후에 남은 건 후회밖에 없었다.
그들이 가르나프 평원에 막 발을 딛었을 때였다.
이미 이곳에는 풀죽신교의 유저들이 산더미처럼 모여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풀 밖에 없던 한적한 평원에 상인들이 임시로 상업 지구를 형성했고, 잠을 잘 수 있게 천막촌도 세워졌다.
최소 백만 명 이상이 가르나프 명원에서 이미 먹고 놀 준비를 하고 있다.
"와. 역시 풀죽신교 규모가 대단하네."
"스케일 봐라. 확실히 놀라워."
셸지움에서 온 유저들은 조용히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데, 그들을 발견한 유저들의 일부가 외쳤다.
"우와아... 영웅들이다!"
"영웅?"
"방송 못 봤어? 셸지움에서 싸운분들이잖아. 재방송 몇 번이나 돌려서 봤는데."
"어. 맞네."
"박수치자. 박수."
짝짝짝!
가까이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이 시작한 박수 소리, 땅에 앉아 있던 유저들도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그 박수소리가 일파만파로 퍼져서 가르나프 평원 전체에서 박수로 환영했다.
"어서오세요!"
"용감하신 분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피곤하시죠. 식사하고 싶으신 분은 오세요. 원하시는 음식 다 만들어드립니다. 돈이요? 공짜로 다 드세요."
"고생하고 오신 분들한테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빠질 수 없지. 순서 상관없이 제일 먼저 드리겠습니다."
셸지움에서 죽은 유저들은 이곳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진짜 우릴 환영해주는 건가?"
축 늘어진 채로 온 유저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박수소리만 하더라도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다.
많은 유저들이 그들을 향해 서서 경례까지 하고 있었는데,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축제를 준비하던 마판은 소식을 듣고 뱃살을 출렁거리면서 뛰어왔다.
"셸지움 용사 여러분?"
"에엑. 마판님이다."
셸지움의 유저들은 유면 인사인 마판까지 나온 걸 보며 깜짝 놀랐다.
만돌도 당황하고 있었다.
위드를 위해 싸우기는 했지만 이런 대접을 받길 기대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 네. 그런데요?"
"모두들 저녁에 약속이 있으십니까?"
"약속은 뭐..."
만돌을 비롯한 유저들은 서로를 돌아봤다.
축제를 즐기고, 사람 구경이나 좀 하려고 했을 뿐, 대부분 딱히 약속이란 건 없었다.
북부에서 시작한 친구나 가족들과 여기서 만나기로 한 이들도 있었지만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판이 기름진 볼살을 푸들거리며 말했다.
"여러분들의 저녁 식사를 위해 위드님이 멧돼지를 잡는다고 하니 같이 드시겠습니까?"
"위드님이 직접이요?"
"예. 멧돼지만이 아니라 이것저것 최고급 재료들을 준비해서 만찬을 차리실 거라고 합니다. 신선한 해산물들도 리튼 지역에서 급하게 공수되고 있고요."
"..."
말문이 막힌 셸지움의 유저들이었다.
이 광경은 가까이 있던 가르나프 평원의 유저들이 모두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방송으로도 중계가 되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금메달 증정식도 있습니다."
"금메달은 또 뭡니까?"
"아르펜 왕국의 용사 분들을 위해 위드님이 직접 조각한 금메달을 달아드릴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요."
셸지움의 유저들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목숨을 잃어서 후회하는 감정이 들었던 순간을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대신 아르펜 왕국을 위해 싸웠던 자긍심이 마음에 가득했다.
"나... 집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큭.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칭찬을 들었어."
"이런 기분이구나. 아르펜 왕국을 위해... 죽을 만 하구나. 이거."
셸지움에서 살던 1만여 명의 유저들은 아르펜 왕국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다시 한 번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품은 그 감정은 입소문과 방송으로 가르나프 평원 전역에 퍼졌다.
달빛조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