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불타는 유성 소환
라페이는 아렌 성의 가장 높은 탑에 서 있었다.
“투쟁의 길에… 팔랑카 전투라. 남들이 한 번 하기도 힘든 모험을 쉽게 해내니 대단하기는 하구나.”
가르나프 전투 직전에 위드는 방송을 이용하여 주도권을 가져갔다.
그 과정과 결과들을 보면 헤르메스 길드를 이끄는 입장으로서 입맛이 썼다.
“계획대로 진행을 할 건가?”
완전 무장한 차림의 바드레이가 탑을 올라왔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이번 전투를 위해 바드레이의 장비들을 가장 좋은 것으로 새로 맞췄다.
라페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계획대로 갑니다.”
“목표물은?”
위드와 아르펜 왕국 진영으로 불타는 유성 소환을 3개 동시에 발동시킬 것이다.
다만 유성들을 어느 쪽에 떨어뜨릴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결정되지 못했다.
라페이는 평원 지도를 펼쳐서 바드 마레이의 공연이 벌어졌던 장소를 손으로 가리켰다.
“두 개 정도는 여기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떨어뜨려야겠지요.”
“나머지 하나는?”
“조각품들을 건설한 곳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전쟁을 대비하여 만든 것들이 부서지게 될 것입니다.”
바드레이는 대부분의 경우에 라페이의 결정에 만족했으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헤르메스 길드는 제국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조금씩 막다른 절벽으로 몰리게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완전한 무력행사 밖에는 없다.
사실 이 방식이야말로 헤르메스 길드가 가장 잘 하는 것이었다.
* * *
쏴아아아아.
갈대가 밤바람에 흔들린다.
하벤 제국의 군대는 말을 타면 가르나프 평원까지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델라우드 강가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벤 제국의 병력도 엄청나다.”
“그러게. 진짜 장관이다.”
“크으. 오늘은 드디어 끝내주는 전투가 벌어지겠구나.”
수십만 명은 훌쩍 넘는 유저들이 멀리 있는 산에서 강가를 내려다봤다.
질서정연하게 세워져 있는 군용 천막과 전투 마차, 군마들은 감탄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진짜 주력이 움직여서 치른 전투에서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잖아.”
“그 이상이었어. 바드레이가 이끈 전쟁이 패배한 적이 없었으니.”
“싸움도 안 되고 압도. 압살. 절대적인 승리. 뭐 다 그런 식 아니었나.”
중앙 대륙 출신 유저들 중에는 무력을 숭배하는 이들이 많다.
하벤 제국의 승리를 매번 지켜봤고, 이번에도 이길 거라고 믿었다.
그들은 북부 유저들에게 합류하지 않고 하벤 제국의 결집지로 따라왔다.
헤르메스 길드의 가입을 꿈꾸거나, 추후에 떨어질 떡고물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북부 유저들에 비해 숫자는 적은 거 아닌가?”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진짜 핵심은 고급 전투력이라고 할 수 있지. 돈을 막 쓴다면 마법 스크롤 하나에 천 명씩도 죽잖아.”
“그런 마법 스크롤이 흔한 것도 아니고. 머리 숫자를 무시 못 하지. 하벤 제국도 매번 잘 싸웠어도 머릿수가 부족해서 졌잖아.”
“이번에는 달라. 준비를 철저히 했을 테고, 하벤 제국의 모든 전력이 다 모여.”
“아르펜 왕국 쪽에는 베르사 대륙 전역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여 있을걸. 오늘은 최고의 전투가 벌어지는 날이야.”
“싸우면 정말 엄청나긴 하겠다.”
하벤 제국과 아르펜 왕국!
어느 쪽의 승리를 점치기란 쉬운 게 아니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한쪽으로 크게 기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몰랐다.
하벤 제국의 승리를 믿는 유저들은 델라우드 강가로 계속 모이고 있었다.
* * *
가르나프 전투까지 1시간 전!
하벤 제국의 아렌 성에는 최상위 랭커들이 한 명씩 등장했다.
“드디어 오늘이로군.”
“북부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겠군요.”
델라우드 강 유역의 진지가 아니라 아렌 성에 핵심 유저들이 모이고 있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최고의 장비들을 착용하고, 전투준비를 마친 그들은 느긋하게 와인을 마셨다.
고정식 텔레포트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언제라도 아렌 성에서 가르나프 평원의 동서남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게이트를 설치하는 작업을 비밀리에 수행하기 위해 정보대와 암살단을 지휘하는 스티어가 큰 수고를 했다.
“보에몽님도 어서오십시오.”
“쌍날도끼를 새로 마련했는데… 오늘 도끼가 부서지도록 싸워야겠습니다.”
“네로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까?”
“마법 병단 쪽에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얼음 병단이라면 당연히 그럴 만도 하지요. 네로님이 빙계 마법의 마스터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그건 아닐 겁니다. 마법은 스킬 레벨을 굉장히 올리기 힘든 학문 중의 하나니까요. 뭐 그렇더라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겠죠.”
대륙의 사냥터와 던전에 흩어져 있던 그들이 모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큰 세력의 영주들과 기사단장을 비롯한 지휘관들도 음식을 들며 대화를 즐겼다.
“요즘 큰 전투가 없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습니다.”
“이번이 규모만큼은 확실히 크죠. 잔챙이들이 많아서 다소 김은 빠지더라도 말입니다.”
“차후 북부로의 원정도 계획되어 있겠죠?”
“물론 그럴 겁니다. 전투에서 이기자마자 치고 올라갈 것 같더군요.”
북부 유저들이 의외로 강하고, 중앙 대륙의 유저들도 꽤 많이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앙 대륙을 지배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여유를 부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 한 명이, 초보 유저 천 명을 상대로도 일방적인 학살을 벌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솔직히 레벨 100이하의 유저들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과거 북부 정벌군의 총사령관을 맡아서 아르펜 왕국을 침략했던 드라카가 거인 기사 보에몽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구체적인 계획이 뭡니까?”
“계획이요?”
“예. 그냥 싸우기에는 전투규모가 너무 커서 말입니다.”
“드라카님은 13군에 소속된 걸로 아는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군대가 어떤 역할을 해야 된다는 말도 없었고 그에 대해 준비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드라카가 항의하듯이 강하게 말하자, 연회장에 모여 있던 랭커들의 이목이 보에몽에게로 쏠렸다.
그들도 무척이나 궁금해 하고 있던 관심사였다.
이번에는 병력 배치를 제외하고는 사전에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보에몽도 알고 있는 것이 없어서 어깨만 으쓱했다.
“저도 모릅니다. 과거의 전투와는 다르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전혀 들은 내용이 없으십니까?”
“조금 얻어듣기로는 최대한 많은 적을 죽일 준비만 하라더군요.”
“죽일 준비만 하라니…”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몰라서 어리둥절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가 학살이기도 했다.
이윽고 연회장에는 초대된 인원 1,000명이 모두 참석했다.
영주들과 기사단장을 비롯하여 널리 이름을 날리는 최고 수준의 강자이거나, 군대를 소유한 이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헤르메스 길드를 이끄는 쌍두마차를 비롯하여 수뇌부들도 줄줄이 참석했다.
바드레이는 박수를 받으며 중앙에 섰다.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 여러분들에게 전투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중앙의 수정을 보시죠.”
연회장의 중앙에 놓인 대형 수정 구슬.
수정 구슬에는 가르나프 평원의 현재 모습들이 비춰졌다.
아마도 꽤나 높은 곳에서 보고 있는 듯, 평원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득히 작게 보였다.
“으음.”
누군가가 신음소리를 흘렸다.
드넓은 평원에는 모닥불과 횃불, 마법 등불로 가득했다. 불빛에 비치는 건 사람들로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멀리서 보는데도 우뚝 솟은 거대한 조각상들이나 목책, 해자와 같은 방어 시설들도 눈에 띄었다.
‘저기서 싸워야 하다니.’
‘이기든 지든 화끈한 하루가 되겠군.’
랭커들이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 전투에서 진다면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힘으로 세상을 얻는다.
헤르메스 길드가 초창기부터 쭉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다.
바드레이의 말이 이어졌다.
“이 순간, 12시가 되었습니다. 베르사 대륙의 운명을 건 그 날이 찾아온 것이죠.”
전투의 날!
드디어 날짜가 바뀌어서 운명적인 그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하늘을 보십시오.”
수정 구슬은 가르나프 평원의 별들이 수놓아진 멋진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과 땅.
너무나도 아름다운 대륙이기에 더욱 정복해서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은 바드레이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침묵이 흘렀다.
1분.
2분.
연회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보라고…’
‘뭐가 있다는 거지?’
몇몇 인내심이 부족한 이들이 고개를 돌리며 지루해하던 참이었다.
‘뭔가 있다?’
미심쩍어하며 수정 구슬을 보던 유저들은 눈을 반짝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작은 점들이 나타났다.
세 개의 작은 점!
처음부터 알아차렸던 것은 아니지만, 작은 점들이 점점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저건…”
“아, 유성이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이런 쪽에서는 감이 훌륭한 편이었다.
바드레이가 괜히 이 순간 밤하늘을 보라고 한 것이 아닐 것이다.
불타는 유성 소환!
로열 로드에서 궁극 마법 중의 하나인 불타는 유성 소환이 가르나프 평원을 향해 작렬하고 있었다.
* * *
“끄아아아. 드디어 정상이다.”
항구 바그나 출신의 유저 볼락은 암벽을 타듯이 기린 조각상에 올라왔다.
가르나프 평원에서 명작의 조각품 중의 하나로 머리까지의 높이가 무려 650미터나 되었다.
“오늘은 드디어 싸우겠네.”
기린 조각상의 머리에서 보이는 거리마다 사람들과 빛으로 넘실거리는 광경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볼락의 옆에도 광경을 보러 조각상에 올라온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너무나 환상적이야. 여기가 쭉 이대로 남겨졌으면 좋겠어.”
“응. 우리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장소가 되겠다.”
완성된 대형 조각상에는 드워프들이 구해온 빛나는 돌을 박아놓았다.
밤마다 조각상들이 달과 별, 지상의 불빛들을 반사시키며 오묘한 색채를 냈다.
“다시는 못 보게 될 광경일지도.”
볼락은 씩 웃었다.
밤바람도 상쾌하고, 어디선가 악기 연주 소리도 은은하게 들린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 우딘 : 너 어디냐.
- 보크사이드 : 우리 준비 끝났어. 슬슬 모일 건데.
이번 전투를 함께 치르기로 한 친구들로부터 귓속말이 왔다.
“기린 조각상 머리 위야.”
- 보크사이드 : 넌 준비 다 했어?
“싸울 준비는 끝났지.”
- 우딘 : 그래? 그럼 우리들이 그쪽으로 갈게.
“빨리 와라.”
볼락은 귓속말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먹을 것도 나눠주었다.
“구운 빵 드세요.”
“고맙습니다.”
가르나프 평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당연히 하벤 제국과의 전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 싸우기로 정해지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시작하자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마도 날이 밝으면 싸우게 되지 않을까? 그들이 가르나프 평원으로 와야 전투가 벌어지게 될 테니 말이야.’
기린 조각상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이 전투가 끝나면 베르사 대륙도 바뀌겠지?”
“응. 중앙 대륙에도 워터파크가 세워질 거라던데.”
“푸홀 워터파크도 얼마 전에는 물 반, 사람 반이었지. 사람이 더 많다는 얘기도 있었고.”
“휴가철에는 수영을 못할 정도였어. 주말에도 그렇고.”
“마판 상회에서 대륙을 잇는 길을 만든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상인들의 교역로로 시작해서 초보들도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길 말이야.”
“도시도 더 많이 세워질 거고…”
모두가 희망에 차 맑은 미래를 떠올리고 있었다.
볼락은 무심코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쳐다봤다.
‘오늘 반드시 이겨야겠지.’
친구들이 올 때만을 기다리며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던 그때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동쪽에 있는 세 개의 별들이 의식되었다.
이상한 점을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좁쌀처럼 그 작은 별들이 붉은 꼬리를 그리며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유성인가. 저걸 보면 행운이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뭐야, 저건.’
볼락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 하늘에서부터 붉은 꼬리를 달고 날아오는 세 개의 유성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볼락이 보는 동안에도 유성은 커지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고 그대로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유성입니다! 유성이 이곳으로 떨어져요!”
볼락이 살아오면서 가장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왜 저래. 저 사람?”
“몰라, 갑자기 저러는데.”
하지만 그들도 곧 볼락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하늘을 쳐다봤다.
“저거 뭐야?”
“뭐가 보이는데.”
“유성이잖아. 유성이… 날아온다?”
“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
기린 조각상만이 아니라, 다른 대형 조각상의 위에서도 경치를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유성을 발견한 것인지 사방에서 비명 소리들이 들렸다.
가르나프 평원에도 불빛들이 출렁이고, 시간차를 두고 바드들의 음악 소리도 멈췄다.
축제와 거리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비규환에 빠졌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안 돼, 피할 수 없어.”
“너무 빨라.”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동쪽에서 날아오며 대기권을 꿰뚫은 유성은 하늘을 새하얗게 밝혔다.
“온다.”
“으아아아아.”
쿠구구궁!
세 개의 유성이 가르나프 평원을 강타했다.
사람들은 대지 전체가 떨린 것처럼 느껴졌다.
화염이 끝도 없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축제로 모여든 사람들은 섬광이 일어나며 순간적으로 소멸한 것 같기도 했다.
* * *
아렌 성의 연회장.
불타는 유성 소환이 가르나프 평원을 강타하는 광경을 본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숱한 전투를 치른 그들이지만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최소한 수십만은 죽었다. 밀집해 있었으니 더 많이 죽었을까?’
‘이런 위력의 마법을… 길드에서 가지고 있었구나.’
대폭발이 일어나며 평원이 흔들리고, 대형 조각상들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들도 보였다.
감히 피해를 예측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마법의 위력에 대해 놀란 이후에는, 전투를 위해서는 대단히 유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르나프 평원에 모여 있는 유저들은 유성 소환의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것이다.
이때를 노려서 하벤 제국군이 진군을 한다면 초반에 얻을 수 이득이 대단히 크다.
보에몽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저한테 선봉을 맡겨주십시오. 가르나프 평원을 제압해보이겠습니다.”
칼쿠스는 검부터 뽑아들었다.
“4군단은 전투 준비가 완전히 끝난 상태입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지금 움직이면 15분 안에 가르나프 평원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바드레이는 병력 지휘관들과 랭커들의 눈길이 뜨거워졌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수정 구슬에 나오는 영상에는 평원이 불타오르는 광경이 나왔다.
지반이 붕괴하며 커다란 구덩이들이 생겨났으며 북부 유저들이 불가에서 다급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초보자들의 경우에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죽은 이들이 속출한 듯했다.
“어서 출진 명령을!”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합니다.”
보에몽과 칼쿠스가 거듭 재촉을 했지만, 바드레이는 차를 마시면서 여유를 부릴 뿐이었다.
모두의 궁금증이 커져갈 무렵에, 아크힘이 나서서 말했다.
“조금 더 지켜보십시오. 아직 준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으으으.”
“여기 사제님 와주세요. 사람이 곧 죽어요!”
“땅에 묻힌 유저들이 있어요. 모두 모여서 구해줍시다.”
가르나프 평원은 몇 분 사이에 지옥처럼 변해 있었다.
유성이 추락한 자리에 살아 있는 유저들은 없었고, 그 부근이라고 해도 충격파로 많은 이들이 죽었다.
불타는 유성이 대지를 강타하며, 순간적으로 온도가 크게 높아지며 화재까지 일어났다.
“물의 정령. 물방울 소환! 어서 불을 꺼주세요.”
“범람하는 강!”
정령사와 마법사들이 불을 끄기 위해 활약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유저들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레벨 10이나 30이하의 유저들.
사냥에서 마법을 잘 활용하지도 않고, 공격 마법에 맞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마법만 봐도 신기한 이들에게, 궁극 마법의 하나인 불타는 유성 소환이 날아와서 작렬한 건 정신을 놓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우리 살았냐?”
“어. 살긴 살았어. 근데 생명력이 반 이하로 떨어졌네.”
“완전 놀랐다. 유성 떨어지는 순간 몸이 하늘을 날았다니까.”
“거리가 1킬로도 훨씬 넘었는데. 조금만 가까웠으면 그냥 죽었겠다.”
불타는 유성 소환의 파괴력에 유저들은 겁에 질렸다.
하벤 제국과 싸우다가 죽을 각오를 하고 왔지만, 이런 경이로운 마법을 실제로 체험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이제 어떻게 싸우지?”
“몰라. 모여 있으면 또 유성 떨어지는 거 아냐?”
“얼마나 죽은 건데. 도대체.”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지. 저쪽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은 거 같아.”
“아이씨. 식당가가 있던 곳이었잖아. 건물이 다 사라졌네.”
살아남은 유저들은 고요해진 밤하늘을 보며 다시 유성이 떨어지지 않을지 불안과 초조에 떨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은밀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 프겔 : 목표 지점 도착.
- 다낭고 : 불 위에 뿌리고 빠져나옵니다. 확산 속도가 빠르니 주의합시다.
백여 명의 유저들이 조용히 활동하며 병에 담긴 무엇을 불 위에 집어넣었다.
사방에 몰려 있던 유저들도 그 광경을 보긴 했지만 별 거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막진 않았다.
- 프겔 : 임무 성공. 이탈합니다.
병에 담긴 액체를 불에 넣은 이들은 빠르게 빠져나갔다.
가르나프 평원은 혼란과 비탄에 잠겨서 유저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약초죽 부대원입니다. 저희들은 성기사와 사제들이 많으니 부상을 입으신 분들은 오세요!”
“닭죽 부대에서 지원을 나왔습니다.”
“붕대 필요하신 사람 있으면 나눠드릴게요!”
유저들은 다친 사람을 돌보고, 불을 끄고, 파헤쳐진 땅을 복구했다.
모라타에서부터 시작했던 유저들끼리의 끈끈한 정으로 불타는 유성 소환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돕고 있었다.
그때였다.
< 알킨 병에 감염되었습니다!
몸에서 알 수 없는 현기증과 고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초마다 14씩의 생명력의 피해를 입습니다.
최대 생명력과 마나가 감소합니다. >
“어어?”
“알킨 병?”
“이건 또 뭔데.”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된 알킨 병!
병에 걸린 유저들은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사제들을 찾았다.
“병이 생긴 것 같은데 치유 마법 좀 부탁드립니다. 바쁘실 것 같으니 기다릴게요.”
“괜찮아요. 지금 바로 해드릴게요.”
사제들은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어지간한 병이라면 그냥 간단히 나아버릴 수 있었다.
< 치유 마법이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
< 육체가 쇠약해지며 알킨 병이 심해졌습니다.
생명력이 매초마다 47씩 감소합니다.
체력을 52%까지 상실합니다. >
“이거 뭐지?”
“치유 마법으로도 병이 안 낫는데?”
병에 걸린 유저들이 당황하는 사이에도 점점 악화되었다.
생명력이 줄어들고, 몸을 아예 움직일 수 없게 되어서 쓰러졌다.
그렇게 회색빛으로 변해 죽어가는 유저들!
< 알킨 병에 전염되었습니다. >
가까이 있던 유저들.
남다른 저항력을 가진 사제들까지도 병에 걸렸다.
치유 마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전염병의 등장은 지역 채팅으로 알려지며 가르나프 평원을 공포로 물들였다.
* * *
아렌 성의 연회장에 있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감탄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지독하다. 우리 길드는 준비된 전투에서는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인해전술. 이걸 상대로 최적의 해법을 찾아낸 것이다.’
제국의 내정이 악화되며 라페이의 능력이 몇 차례나 의심받기도 했다.
아르펜 왕국이나 위드에 대해 좀 무력해보였는데, 이 시간 이후로는 더 이상 그럴 리가 없으리라.
가르나프 평원의 군중들을 확실하게 무력화시켜버렸으니까.
아크힘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
헤르메스 길드원으로서 이 자리에 오려고 한다면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한다.
그런 베테랑들임에도 불구하고 아크힘의 말에 신음소리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아직도 또?’
‘여기서 무언가를 더 남겨놓았다니. 내가 소속된 헤르메스 길드임에도 지독하구나.’
‘악마다. 악마야.’
위드와 아르펜 왕국.
그들은 어쩌면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연회장의 수정 구슬을 통해 나타난 건 판제롭 유령 기사단!
불타는 유성 소환이 작렬한 곳에서 등장해 가까이 있던 유저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렌슬럿이 물었다.
“언데드입니까?”
아크힘이 고개를 끄덕였다.
“판제롭 유령 기사단이라고 합니다.”
“음. 레벨이 꽤 높은가보군요.”
“620정도 될 겁니다.”
판제롭 유령 기사단의 정원은 대충 보니 250명 정도 되어 보였다.
유령 기사단이라면 불타는 유성 소환이나 알킨 병에 비해서는 평범하다고 여겨졌다.
헤르메스 길드의 무력단체 한 두 개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전력이랄까.
‘연속으로 혼란시키는 위력은 있겠지만… 대단한 건 아니군.’
‘따로 준비한 것치고는 약한데? 유성 소환이 너무 강렬했나?’
판제롭 유령 기사단을 막기 위해 북부 유저들이 나섰다.
레벨 200이하의 유저들은 거의 나타나자마자 쓸려나가고, 400대나 500대의 유저들이 결집했다.
중앙 대륙 출신의 유저들도 가르나프 평원에 꽤 많이 있었다.
수많은 마법 공격들이 작렬!
판제롭 유령 기사단은 분노한 유저들에 의해 처참할 정도의 공격을 당했다.
하벤 제국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이 아니기에 막강한 화력이 집중되는 광경이었다.
“허어.”
“저걸 어떻게?”
잠시 후에 드러난 광경은 놀라울 정도였다.
판제롭 유령 기사단은 무수히 많은 마법 공격을 당하고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일부의 유령 기사들은 흩어지기도 했는데, 아무리 많은 집중 공격을 당해도 소멸되지 않았다.
워리어, 전사, 성기사들에 의해 질주가 막히면 영체화가 되어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이동한다.
아크힘이 설명했다.
“판제롭 유령 기사단. 저들의 특징이라면 모든 피해로부터 면역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타격을 입더라도 그대로 존재합니다. 적을 다 제거할 때까지 말입니다.”
“…”
어떤 피해도 입지 않는 판제롭 유령 기사단.
헤르메스 길드에서 꺼낸 3번째 비책이었다.
“저렇게까지?”
“희귀한 병력이나 마법들을 총동원해서 두들기는 구나. 이건 방법이 없겠는데?”
아렌 성의 연회장에서 하벤 제국의 승리를 믿지 않는 자는 없게 되었다.
그제야 바드레이의 친위대 소속의 유저들이 각 병력 지휘관들에게 작전 계획이 담긴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각 군단들의 이동 경로와 작전 목표, 전투 대형들이 미리 적혀 있었다.
군단장들은 종이에 적혀 있는 작전 계획명을 확인했다.
- 전멸 계획.
1단계. 가르나프 평원이 불타는 유성 소환을 시전.
2단계. 알킨 병을 퍼뜨림.
즉시 감염되는 전염병으로 유저들이 전투력 상실, 공포 전염.
3단계. 판제롭 유령 기사단의 출현.
절망감을 안겨줌.
4단계. 제국군이 동서남북의 각 경로로 전면 진입.
강철 기사단과 소멸의 창 사용.
5단계. 불타는 유성 소환 재사용.
혼란 중에 위드를 비롯한 주요 유저들 암살이나 제압.
각 과정마다 상세 계획들이 수십 장씩 마련되어 있었다.
목표는 위드를 포함하여 모여 있는 유저들 중의 4할 이상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런 계획이라면 성공하기 쉽겠다.”
“도대체 함정에, 매복에. 위드라고 해도 무조건 걸려들겠는데.”
“다 죽이는 거지. 핵심은 다시는 우리에게 못 덤벼들게 하는 거야.”
아렌 성에 모여 있던 군단장들과 랭커들이 웃으면서 흩어졌다.
그들은 빨리 전장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얼마 전에 위드는 팔랑카 전투를 마치고 투신 바탈리에게 돌아갔다.
- 팔랑카 전투의 역사가 바뀌었다. 그리고 너는 놀라운 전투 업적을 세웠군. 기대했던 전사로서는 아니지만… 전사로서 해낼 수 없는 일을 했다.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위드는 공손하지만 당당하게 주장했다.
- 가지고 있는 힘을 쓰지 않는 것도 전사로서의 올바른 모습은 아닐 테지. 장갑은 여기 있다. 다음에 볼 때는 나의 전사들과 싸움을 시킬 것이다.
“그때도 보상이 있습니까?”
- 싸워서 이긴 자는 명예와 힘을 가질 수 있다.
“다음에 꼭 오겠습니다.”
인간들 외에도 온갖 종족들의 강자들이 모여 있는 투신의 대경기장에서 물러나왔다.
‘검술과 궁술, 창술까지 마스터하면 와서 다 때려잡아야겠군.’
위드는 그 이후에 페일이나 다른 동료들을 만나서 정비를 하고 있었다.
대장장이와 재봉 스킬을 이용해서 손상된 장비들의 손을 봤고, 식사도 좀 해야 한다.
맛있는 요리를 먹어서 체력을 보충하는 일은 전투 전에 상당히 중요했으니까.
조각술의 스킬 노가다를 할 필요가 없어지고 난 이후로, 다른 스킬들의 숙련도가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유성 소환이에요!”
그러다가 가르나프 평원의 소식을 급히 듣게 되었다.
로뮤나의 수정 구슬을 통해서 영상을 볼 수 있었는데, 불타는 유성 소환으로 어둠 속의 평원이 불붙은 바다처럼 타오른다.
알킨 병과, 판제롭 유령 기사단까지 출현하면서 북부 유저들이 당하고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무시무시한 카드를 꺼냈다.
그렇지만 바꿔서 본다면 일찍 전력을 노출한 것이기에 어떻게든 감당해내면 된다.
위드는 풀죽신교의 성녀 레몬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바쁘세요?”
- 레몬 : 네엣? 정신없긴 하지만 말씀하세요. 위드님!
“현장 상황은요?”
- 레몬 : 수습이 조금도 안 되고 있어요. 지휘체계도 완전히 무너졌구요.
풀죽신교는 거대한 규모를 수많은 죽부대들로 나누었다.
유성 소환이라는 재난에 빠르게 대처하기 어렵긴 했지만, 사실 어떠한 지휘 체계가 있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으리라.
- 레몬 : 그래도 사제나 성기사님들이 나서서 다친 분들을 돕고 있어요.
“역시 그렇군요.”
역시 북부 유저들의 정은 끈끈했다.
위험에 빠진 이들을 기꺼이 돕는 문화가 있었다.
- 레몬 : 전염병도 말이 나오고 있어요. 해결책이 없고… 유령 기사단도 마찬가지에요.
“그건 어떻게든 막아봐야겠군요.”
위드도 당장 손을 쓸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알킨 병이나 판제롭 유령 기사단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로열 로드에 있는 수많은 비밀들을 다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 레몬 : 위드님! 방금 조인족들에게 보고가 들어왔어요. 하벤 제국군이 가르나프 평원의 동, 서, 남, 북. 모든 곳에 나타났다고 해요!
* * *
하벤 제국군의 총 20개 군단이 갑자기 진격을 개시했다.
델라우드 강의 군사 기지 외에도, 비밀 기지들에서 병력들이 나와서 가르나프 평원을 목표로 삼아서 이동했다.
“총공격을 시작하라!”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서도 아렌 성에 대기하던 랭커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헤르메스 길드를 추종하는 유저들, 주로 레벨이 높은 이들을 이끌고 참전했다.
“앞으로는 중앙 대륙의 도시 뿐만 아니라 모든 땅에 하벤 제국의 깃발이 꽂힐 겁니다!”
“갑시다. 낮이 될 때까지는 전쟁을 끝내야지요!”
헤르메스 길드의 랭커들이나 병력 지휘관들이 당당하게 외쳤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오늘 벌어질 전투의 양상에 대해 걱정이 조금씩은 있었다.
유성 소환, 알킨 병, 판제롭 유령 기사단.
세 가지의 강력한 카드를 보고 나서는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의 발걸음은 그래서 주저함이 없었고,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가르나프 평원을 공략한다. 이번 전투 계획의 이름은 전멸 작전. 남김없이 쓸어버리자!”
“어설프게 상대하지 않는다. 헤르메스 길드의 방식으로 더 이상 저항하는 이들에게 자비 따위는 없다!”
가르나프 평원을 향해 동, 서, 남, 북. 모든 방향에서 20개의 군단이 진군을 한다.
이 광경들은 방송국들의 중계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진행자들은 전투 초반임에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쳤다.
“놀랍습니다. 신중하게 전력을 끌어 모아서 대치하리라 생각했지만 이런 전투를 열 수 있다니요.”
“헤르메스 길드의 진정한 역량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중앙 대륙을 정복할 당시의 완벽한 모습. 그대로인 것 같네요.”
“기세가 살아있습니다. 필승의 확신을 가진 것 같습니다.”
위드나 북부 유저들에 호의적인 KMC미디어의 진행자들도 하벤 제국을 높이 평가했다.
오주완은 여러 곳의 하벤 제국군의 영상들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북부 정벌 실패와 반란군을 상대로 미숙한 대처가 있기도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경우들이었습니다. 지금 등장한 제국군은 무적을 자랑하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르펜 왕국이 막을 수 있을까요?”
신혜민은 메이런으로서 전투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워낙 중요한 방송이라 진행을 맡았다.
2부로 이어진다면 그때는 휴식을 위해 진행자 교체가 될 테니 로열 로드에 접속해서 싸울 작정이었다.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벤 제국군이 작정하고 나섰고… 유성 소환이나 알킨 병까지 쓰는 것으로 봐서 어떤 비난도 감수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전투 승리만 생각하고 있네요.”
걸그룹 출신의 도찬미가 말했다.
“막다른 길에 몰려서 몸을 일으킨 호랑이 같아요.”
“음. 적절한 비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렇게까지 강력한 카드를 꺼낸 것을 보면 말이죠. 작정하고 칼을 빼들었고, 라페이의 전략에 바드레이의 군사력이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신혜민이 태블릿을 조작해서 몇 개의 자료들을 찾아보고는 물었다.
“알킨 병과 판제롭 유령 기사단. 이것에 대해 공개된 자료가 없는 것 같아요.”
“헤르메스 길드에서 극비리에 준비를 한 모양입니다. 전투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아르펜 왕국에서 막을 수 있을지도 지켜봐야겠네요.”
베르사 대륙의 전역에 있는 도시의 유저들마다 수정 구슬로 방송을 보고 있었다.
산 속이나 던전, 바닷가의 유저들도 모여서 말했다.
“진짜 이번 전투는 하벤 제국의 손을 들어주어야겠네.”
“이렇게 준비를 했다니 대박이다.”
“이걸로 끝이 아닐 거 아냐. 제국군의 군사력이 핵심이기도 하니까.”
하벤 제국의 군대가 이동할 때마다 승리를 기대하며 합류하는 유저들도 많아졌다.
중앙 대륙 출신의 고레벨 유저들은 자신들이 가입한 길드가 무너지고 소속을 잃었다.
북부로 옮기자니 아직은 발전도가 낮은 것 같고, 솔직히 명문 길드들의 횡포에 앞장서며 이득을 챙기기도 했던 자신들이었다.
“아르펜 왕국에 합류할까?”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어.”
“사냥 제한도 없고, 퀘스트 같은 걸 자유롭게 할 수 있잖아.”
“몰라. 난 예전이 훨씬 나은 것 같다. 마음대로 살면서도 힘에 대한 대우를 확실히 받을 수 있었는데 말이야.”
“초보들 눈치 보며 살고 싶진 않지. 솔직히.”
헤르메스 길드에 가입하고 싶었던 그들이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생겼다.
라페이가 공식적으로 중앙 대륙의 모든 이들에게 공지를 한 것이다.
- 베르사 대륙 정벌 전쟁!
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는 헤르메스 길드의 가입을 허락함.
중앙 대륙에서 레벨이 높은 이들이 대거 합류하고 있었다.
초반의 상황을 보니 아르펜 왕국의 승리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해보였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크니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하벤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너희들이니 그 뒷감당도 해야지.”
라페이는 아렌 성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하고 있었다.
그 역시 가르나프 평원으로 갈 예정이었다.
‘오늘 대륙의 역사가 결정된다.’
그때 라페이를 향해 갑옷을 입은 여자가 걸어왔다.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으세요?”
라페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여자를 봤다.
‘다인…’
로열 로드의 초창기에, 라페이와 다인은 사냥터에서 만나 자주 어울렸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라페이는 순수하게 사냥을 즐겼다.
‘강해지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같이 힘을 모아서 모험을 하는 것도 즐거웠고.’
그야말로 헤르메스 길드의 초창기다.
라페이와 바드레이를 중심으로 야망에 불타는 꽤 많은 유저들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거대한 체계를 갖추진 않았다.
로열 로드 자체가 새로웠고, 즐거웠기에 하벤 지역을 중심으로 대륙을 떠돌아다녔다.
당연히 강해지기 위한 사냥이 우선이었더라도 모험과 탐험도 비중이 있었다.
“이 세상은 참 재미있어요.”
다인이 환하게 웃는 그 미소가 좋아서, 라페이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행복한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지만…
“하벤 왕국부터 철저히 잡아먹어야 해. 우리들 세력이면 차분히 준비하면 돼.”
“다른 세력들을 도태시키려면 정상적인 방법만 쓸 수는 없지.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그리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척살대를 비밀리에 운영해서 제거할 자들을 미리 처리하자고.”
라페이와, 바드레이와 어울리면서 다인도 헤르메스 길드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다인의 물음에 라페이는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할 거야. 그럴 바에는 우리가 나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헤르메스 길드를 지켜보면서도 다인은 떠나지를 않았고, 그들의 사냥과 모험은 계속 되었다.
다인은 샤먼으로서 굉장히 유능한 유저였고, 사냥터에서도 다재다능했다.
50명 이상이 포함된 전투에서 전사 한두 명이야 없어도 되지만, 저주와 치료, 전투, 축복. 모든 것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다인은 귀중한 자원이었다.
어느 날, 천공의 섬 라비아스에서 다인이 이상한 말을 했다.
“앞으로는 자주 들어오지 못할 거 같아요.”
“어째서?”
“몸이… 좀 안 좋아요.”
“기다릴게.”
“언제 올지 몰라요. 최소 6개월? 어쩌면 1년이 넘을지도.”
라페이는 성장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다인이 사흘간 접속을 하지 않자, 바드레이를 비롯한 핵심 유저들은 떠나기로 했다.
“여기서 쓸 만 한 사냥터는 다 돌아본 것 같군. 조사해둔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지.”
“다인은요?”
“접속을 안 하는데… 쪽지라도 남겨놓자. 나중에 귓속말을 해도 되고.”
헤르메스 길드의 최상위권은 치열한 선두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드레이가 단연 앞서가고는 있었지만, 2위, 3위 등의 경쟁도 심했다.
다인을 위해서 시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그들과 라페이는 함께 떠나버렸다.
‘잘못된 것이었어. 다른 사람들은 떠나더라도… 나는 남아 있어야 했다.’
라페이는 뒤늦게 미안함과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는 로열 로드를 하더라도 즐겁지 않았지.’
다인과 연락이 두절되고 나서 사냥터에 가거나, 퀘스트를 하지 않았다.
오직 헤르메스 길드가 베르사 대륙을 차지한다는 목표를 위해서만 나아갔다.
그녀를 버리고 선택한 것이었던 만큼 실패자가 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다인이 어느 날 돌아왔을 때는 기뻐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중요한 칼라모르의 에바루크 성의 영주로 임명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훌륭하게 성을 다스렸고 평판도 굉장히 좋다.
라페이는 다인의 얼굴을 마주 보면 웃음이 나왔다.
“꼭 이길 거야. 내가 일군 헤르메스 길드는 절대 패배하지 않을 테니까.”
* * *
크레볼타.
로열 로드에서 10위 안에 드는 랭커인 그는 7군단을 맡았다.
“우린 선봉이다. 해야 할 일은 모조리 죽이는 것. 힘을 확실히 보여라.”
7군단은 중장갑보병과 기사들이 주력으로 구성되었다.
정석에 가까운 돌격 부대로서 무지막지한 공격력과 돌파 능력을 자랑했다.
둥! 둥! 둥! 둥!
전설급 아이템인 폭풍의 북이 내는 웅장한 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다 죽이고 길을 열어!”
7군단은 가르나프 평원의 남쪽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보이는 유저들을 학살하며 전진했다.
코뿔소를 닮은 투구에 흑색 갑옷을 입은 병력이 명령에 따라 일제히 달렸다.
“크우와아아아아아!”
기사들의 외침에 전진하는 중장갑보병은 활력이 샘솟았다.
“저리 비켜라!”
“보잘 것 없구나.”
무시무시한 힘과 파괴력으로 방패를 앞세워 유저들을 밀어붙였다.
“파괴자의 격노!”
“대지 강타!”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도 적극적으로 선두에 나섰다.
그들이 광역 스킬을 쓸 때마다 반경 10미터, 20미터의 유저들이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마, 막아!”
“무슨 수로?”
“어떻게든 해야지!”
가르나프 평원의 외곽에 있던 유저들은 뜻밖의 공격에 우왕좌왕하다가 무너졌다.
6군단은 그로스가 맡았다.
전쟁에 참여한 적이 드문 인물, 그렇지만 레벨을 기준으로 한 서열에서는 3, 4위를 늘 유지했다.
“체면 때문에라도 다른 군단에 져서는 안 되겠지.”
그로스는 간단히 병력을 운용했다.
궁수 부대를 전열에 세우고 쭉 전진시킨다.
우월한 사거리와 파괴력이 핵심이 된다.
북부 유저들이 공격하기 위해 다가오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다리던 기사들에 의해 미리 처형됐다.
“언덕이라… 동쪽을 폭격하지.”
“예.”
심상치 않은 곳은 마법을 사용했다.
하늘에서부터 돌무더기가 떨어지면서 유저들이 숨어 있던 지역을 강타했다.
16군단은 검투사 막스의 담당이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검투사 군단을 거느렸다.
군대에 속해 있는 십만의 병력이 모조리 검투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극강의 공격력과 맷집, 체력!
중앙 대륙 정복 전쟁 당시에 선두에 서서 싸우며 피해가 컸지만, 전공도 가장 크게 올렸다.
전쟁을 바탕으로 정예 병력으로 성장했고, 그 이후로도 던전과 사냥터를 통해서 단련된 병력이었다.
“신호를 올려라. 우린 진격한다.”
검투사들은 진형이랄 것도 없이 제멋대로 가르나프 평원의 유저들을 향해서 달렸다.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각자가 일당백의 병사들이다보니 유저들을 단숨에 학살했다.
“피, 오랜만에 피에 흠뻑 취하리!”
“술을 가져와라. 그러면 더욱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광란의 검투사 군단이 수많은 유저들을 제거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임무는 알아서 싸우는 것이었다.
북부 유저들이 약하기 때문에 가능한 전법은 아니었다. 매번의 전투를 이러한 방식대로 해왔다.
* * *
바드레이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델라우드 강의 군사 기지에 도착했다.
하벤 제국군의 1, 2, 3군단이 출동한 곳이며, 황제 직속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15만의 전투 골렘으로 이루어진 강철 기사단, 흑마법사들의 전유물인 키메라 군단도 준비되었다.
심지어 마녀와 흑마법사, 야수 군단 역시 바드레이의 직속 부대에 속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제국군에서도 최정예로 이루어진 군대를 황제 직속 군단에 포함시켰다.
바드레이가 이끄는 군대는 제국군의 상징이었고, 대륙 통치를 위한 권위가 필요했다.
“생각보다도 전황이 원활하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북부 유저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당한다고 합니다.”
“너무 많은 숫자가 모였기에 바람이 부는 대로 날리는 것이지요. 이대로라면, 1시간만 지나도 큰 피해를 입힐 것입니다.”
황제 직속군에는 가르나프 전투의 소식들이 계속 들어왔다.
“6군단에서 보고입니다. 중앙 대륙 출신으로 보이는 천여 명의 저항하는 무리들을 발견!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는 소식입니다.”
“19군단이 백만 명 이상의 대규모 집단을 격퇴했습니다. 적 사망자 45만 추정. 나머지는 도주했습니다.”
전투 보고마다 승전이 대부분이었다.
바드레이와 아크힘, 그리고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의 얼굴이 밝았다.
“초반 전황으로서는 좋군요.”
“쭉 이렇게 될 것입니다.”
“적들은 어느 순간이 되면 모두 무너지겠죠.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바드레이의 황제 직속군은 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과 은으로 장식한 갑옷을 입었으며, 마법 무구들을 사소한 것까지 모조리 착용했다.
돈으로도 맞추기 쉽지 않은 장비였지만, 오래전 전쟁의 시대에 만들어놓은 켈튼 왕국군의 무구 창고를 발굴했다.
중앙 대륙을 정복하고 있으면서 얻는 이점 중의 하나로, 이번에 처음으로 꺼내든 것이다.
아크힘에게 부관 중의 한 명이 와서 말했다.
“CTS미디어에서 11군단의 전투 영상의 중계를 요청하고 있답니다.”
“그쪽의 상황이 어떻죠?”
“쌍검 전사들이 앞장서며 전투를 이끌고 있습니다. 특이해서 관심을 끈 모양입니다.”
“화력이 압도적이어야 되죠. 모두가 두려움에 떨 수 있을 정도로요.”
“충분한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생방송으로 중계가 될 테니, 길드원들을 조금 더 지원해주고 시원하게 지르라고 하세요.”
하벤 제국에서는 방송국을 이용한 심리전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가르나프 평원에서 위드가 판을 짤 때는 모든 것이 불리했었다.
15일간의 시간 동안 잃어버린 전력과 주도권은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되찾아왔다.
* * *
클라우드 길드, 사자성, 로암 길드, 블랙소드 용병단, 흑사자 길드.
과거 다섯 개의 명문 길드들의 병력은 가르나프 평원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허어…”
사자성의 군트가 평원에서 섬광이 크게 번뜩이는 걸 보고 감탄성을 흘렸다.
“헤르메스 길드. 과거보다도 훨씬 더 막강해졌어. 인원수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이고.”
“군대의 전투력만 놓고 보면 비교도 안 될 정도인데요? 우리가 다 모였지만 다시 싸운다면 상대도 안 될 것으로 보입니다.”
블랙소드 용병단의 미헬도 눈을 찌푸리며 지켜보았다.
하벤 제국군이 북부 유저들을 밀어붙이는 광경을 보니, 중앙 대륙을 먹고 나서 얼마나 덩치를 불렸는지 알 수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원의 일부는 예전 자신들의 길드에 속했던 유저들이었다.
명문 길드들이 몰락하고 나서 강자들만 교묘하게 빼내갔던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위드가 질 수도 있겠는데.”
샤우드가 그렇게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은 신중한 의견이었다.
‘섣불리 결정할 사안은 아니야.’
‘샤우드는 매번 저런 식이지.’
‘위드에게 반대하면 뭔가 대단한 것처럼 느끼기라도 하나?’
5대 명문 길드들은 이미 전면적으로 아르펜 왕국에 귀속하기로 서약서를 제출했다.
현실적으로 세력이 위축되고 작아져서 자신들끼리만 무엇을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고민이 많긴 했지만 흑사자 길드와 로암 길드는 역사에 남을 광경을 직접 겪었다.
위드가 깃발 몇 개만을 들고 브리튼 지역에 반란을 일으켜서 장악해버리고 만 것이다.
헤르메스 길드가 커다란 곰이라면, 위드는 한창 전성기의 수사자다.
양쪽 다 강하기로는 마찬가지지만 수사자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트가 전투를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크게 지른 것인데. 아르펜 왕국에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가르나프 평원에 있었다.
축제도 겪었고, 조각품 건설에도 참여했다.
풀죽신교나 아르펜 왕국의 충성도 높은 유저들이 죽어나갈 것이 걱정되었다.
칼리스도 피식 웃었다.
“유성 소환이나 판제롭 유령 기사단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싸움은 이제부터가 되겠죠. 위드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말입니다.”
5대 명문 길드의 길드장들이나 소속 유저들은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북부 유저들을 거세게 밀어붙이는 하벤 제국군과 싸우고 싶다.
그들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다만 위드가 말했던 신호가 떨어지지 않았다.
* * *
“놀랍군.”
“어어, 어르신. 조심하세요!”
상인 바트는 가르나프 평원에 있었다.
“으헉!”
불붙은 돌조각이 날아오는 것을 옆사람이 알려줘서 간신히 살았다.
“아직 위험해요. 주변을 신경 쓰셔야 돼요.”
“고맙네.”
땅에 주저앉았던 바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타는 유성 소환이 날아올 때는 몸이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어.’
바트는 아슬아슬하게 파괴의 경계를 벗어났다.
충돌의 순간에 사제들이 희생의 주문을 외우고, 워리어들은 보호 스킬을 사용한 채 유성을 향해 몸을 던졌다.
실제로 유성의 파괴력을 얼마나 줄였는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북부 유저의 저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도 이번 싸움, 그 녀석에게도 쉽지 않겠구나.’
바트는 어렵게 끌고 온 마차의 지붕에 올라가서 외쳤다.
“회복을 위한 약초와 붕대가 잔뜩 있습니다. 모두 무료이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
“정말이세요?”
“예. 실컷 쓰십시오.”
장사꾼!
지금까지는 물품을 팔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야할 때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의 시대는 더 밝고 희망찰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