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52권 : 6장. 위드와 바드레이 (352/520)

6장. 위드와 바드레이 

라페이는 전투 영상이 나오는 수정 구슬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졌군...’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지만 지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벤 제국이 커질수록 부담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리라. 

꿈을 이루어간다는 즐거움 때문에 애써 외면했는데, 이번 전투의 패배는 정말로 뼈아픈 것이었다. 

‘분명 이길 수 있는 전술이었는데. 내 모든 수가 위드에게 막히고 말았다.’ 

위드. 

그 한 명을 노리고 전술을 짰다. 

아르펜 왕국의 핵심인 위드를 제거하는 것이 북부 유저들의 희망을 꺾어 놓으리란 생각에서였다. 

‘노림수들이 다 실패하고, 알킨 병마저 간단히 퇴치해 버리다니...’ 

라페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어떻게든 위드가 치료법을 찾으려고 고생할 것만 생각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전투를 뒤집을 방법은 없다.’ 

바드레이와 친위대, 1군단이 나서기 전이었지만 실패를 인정했다. 

‘이젠 틀렸다. 우리가 만든 하벤 제국에 미래는 없어.’ 

바드레이가 이끄는 병력까지 한꺼번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베르사 대륙의 통치를 위해서였다. 

전 병력을 이끌고 간신히 이긴다고 해도 하벤 제국이 가진 힘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었다. 

바드레이와 핵심 병력이 나서지도 않고 이겼다는 인상을 심어주어야 향후의 통치가 가능했으리라. 

힘이란 본래 쓰고 나면 뒤가 없는 것이니까. 

위드를 따르는 무리들이나, 반란군이 대대적으로 일어서게 되면 헤르메스 길드로서는 감당이 불가능했다. 

“무장 상태 점검해!” 

“바드레이님이 출진한다.” 

바드레이와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출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우리의 편이 아니었으니... 대륙 정복의 꿈도 이렇게 끝나는군.’ 

라페이는 임시 천막에서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 우리는 이긴다. 내가 대륙 최강이다. 

“바드레이 만세!” 

“가자고. 우리가 진짜 헤르메스 길드야!” 

“참나. 간단히 끝낼 일을 결국 우리까지 나서게 하는군. 성가시게 말이야.” 

바드레이가 친위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헤르메스 길드의 유저들과 기사들이 말을 타고, 무장한 대형 마수들을 풀어놓으며 출정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전군 출진 준비 끝났습니다.” 

“진격합시다. 어서!” 

덩치가 20미터, 30미터의 마수들이 수천이나 되면서 위압감을 자랑했다. 

하벤 제국이 남겨 놓은 최후의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헤르메스 길드의 힘을 발휘하겠군.’ 

라페이는 한계를 느꼈다. 

베르사 대륙을 통치하는 건 개인의 무력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에 있다. 

로열 로드의 초창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강자들을 모았지만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끝나고 말았다. 

‘대륙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야 한다. 위드라는 유저는... 스스로의 실력은 기본이고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능력도 탁월하구나. 분석력이나 계략으로도 따르지 못하는 점이지.’ 

머리로만 생각해서 북부에 아르펜 왕국을 일구어내고, 무모한 퀘스트들을 성공하진 못했으리라. 

무언가를 분석한다는 건 가능성이 높고, 효율적인 일을 찾아내는 것이다. 

‘마법의 대륙 시절부터 전쟁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했지.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어찌되었든 우리를 이기게 되겠군.’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앞두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렇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라페이는 모험가 판테를 불렀다. 

“꼭 해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무언가요?” 

“진행 중인 퀘스트를 공유해 주고, 드래곤의 알을 맡겨주십시오.” 

“드래곤의 알을...” 

판테는 난이도 S급의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드래곤의 알 

그린 드래곤 아란칼드가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 사이에서 낳은 알을 발견했다. 

아란칼드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떠나고 난 이후에 알은 현재의 자리에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알은 드래곤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분노를 해소할 방법은 무사히 알을 부화시켜서 새끼 드래곤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이다. 

난이도 : S 

제한 : 드래곤의 알 발견, 현재의 진행 단계에서 퀘스트 포기 불가능. 

“알겠습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많은 도움을 받은 판테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드래곤의 알을 맡기겠습니다.” 

< 퀘스트가 공유되었습니다. > 

* * * 

바드레이와 친위대, 1군단은 가르나프 평원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 스티어 : 10군단이 전멸했습니다. 7군단도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정보대에서 수시로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좋은 내용이라고는 없었다. 

아르펜 왕국의 편에 선 유저들에 의해서 죽어나갈 뿐이다. 

“몽땅 처치하자고.” 

“그래. 무신 바드레이님이 출정을 하니까 말이야.” 

“2군에 불과한 녀석들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지? 우리들이 나서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지.” 

말을 타고 있는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은 웃으며 떠들었다. 

길드 차원에서 여러 번의 패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다르다고 믿었다. 

바드레이와 함께 나아가는 유저들은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최고들만 모여서 자신감이 넘쳤다. 

“10군단이면 슬래터님이 이끄는 병력인데.” 

“거기 내 친구도 속해 있었어.” 

“정말 10군단이 다 쓸려버렸다고?” 

- 스티어 : 13군단도 전멸했습니다. 분전을 했지만... 초대형 조각 생명체 둘을 파괴하면서 드라카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드라카. 

과거 북부 정벌군 총사령관이었고, 실력만 놓고 보면 흠 잡을 데가 없던 휘하 병력과 함께 죽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자랑하던 유명한 강자들이 속속 쓰러지고 있었다. 

“정말 이런 일이...” 

“말도 안 돼. KMC미디어 영상 확인해 봐. 유저들이 산더미처럼 몰려들고 있잖아. 이걸 어떻게 버텨.”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은 대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야. 중앙 대륙 정복 전쟁을 할 때 경쟁했던 놈들이 모조리 아르펜 왕국의 편으로 붙었어.” 

전장이 될 가르나프 평원으로 나아갈수록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 스티어 : 다인 군단장이 이끄는 19군단이 항복했습니다. 칼라모르 지역의 유저들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아르펜 왕국으로 전향하기로 했답니다. 

다인은 전장에 나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녀의 편에 선 칼라모르 출신 유저들과 기대 이상의 활약을 했지만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세력 균형이 넘어갔다. 

“우린 졌어요. 무의미하게 싸우다가 죽을 필요는 없으니 항복하고 아르펜 왕국으로 넘어가겠어요.” 

다인의 결정에 19군단에 속한 유저들은 슬그머니 무기를 내려놓으며 뜻을 따랐다. 

“와... 사실 나 풀죽 겁나 좋아하는데.” 

“솔직히 중앙 대륙에 뿌리가 있어서 남은 거지. 진작 아르펜 왕국 편이 되고 싶었다고.” 

“아르펜 왕국이 중앙 대륙 차지하면 훨씬 살기 좋아지는 거지.” 

북부 유저들도 화답했다. 

“멈춰! 저들은 아군이다!” 

“공격 중지! 공격 중지!” 

“싸우지 말고 우리 풀죽이나 한 그릇씩 나눠 먹어요.” 

순식간에 훈훈한 풀죽 교류의 장이 열렸다. 

19군단에 속해 있던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도 함께 항복하며 아르펜 왕국군으로 전향하기로 했다. 

그들도 대세를 보는 눈이 있었기에 괜히 죽기 싫었던 것이다. 

황당한 것은 19군단이 싸움을 멈춘 것을 보고, 근처에 있던 헤르메스 길드원들 중의 상당수가 덩달아 항복한 것이다. 

“저희도 평소에 아르펜 왕국을 좋아했습니다.” 

“위드님이야말로 로열 로드의 진정한 영웅이죠.” 

“저 진짜 갈아탈 겁니다. 헤르메스 길드는 지긋지긋해요.” 

“바드레이 개새끼라고 해볼게요. 바드레이 개새끼. 바드레이 개새끼. 바드레이 개새끼.” 

이런 광경들이 고스란히 모든 방송국들을 통해 중계되고 있었다. 

CTS미디어나 KMC미디어가 아닌 중소 방송국들은 시청률 경쟁을 한다면서 자극적인 영상을 내보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 스튜디오에는 북부의 레인저로 유명한 새롬씨가 직접 나와 있습니다. 새롬씨. 

- 네. 

- 지금 상황으로 보니 헤르메스 길드는 완전 망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진행자들의 멘트도 강하고, 영상은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떼를 지어 죽어나가는 장면들만 나온다. 

가르나프 평원의 초대형 조각 생명체들이 질주하면서 짓밟혀 죽는 제국 병사들. 

- 헤르메스가 패배한 이유는 위드님의 생존력을 무시했기 때문이죠. 

- 생존력이요. 

- 네. 위드님을 잡으려는 계획 자체가 잘못된 거였어요. 상황이 그 지점에서 완전히 뒤집어진 것으로 보여요. 

- 맞습니다. 위드님의 지인들은 말하더군요. 위드님은 포위를 한다거나, 전염병으로도 죽일 수가 없는 존재라고요. 

- 그럼 어떻게 상대해야 합니까? 

- 몰라요. 정말 알 수 없어요. 웬만한 함정으로는 잡기가 불가능할 거예요. 

- 아. 지금 바라그 부대를 이끄는 풀죽 여신이 등장했습니다. 저들은 불타는 유성 소환을 한 마법사 병단을 제압하고 온 것입니다. 

화면에 서윤이 등장을 하자, 바드레이와 함께 출정한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시선을 빼앗겼다. 

아군이든 적이든, 남녀노소 누구라도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이었다. 

- 공격해요! 

서윤이 이끄는 바라그 부대와 아르펜 왕국의 최정예 부대들이 가세했다. 

그들은 하늘에서 화살을 쏘고, 마법을 날렸다. 

중요한 접전지로는 직접 낙하해서 공격을 하는데, 견고하게 버티던 하벤 제국의 방어선을 서슴없이 무너뜨렸다. 

19군단의 항복에 이어서, 아르펜 왕국의 강력한 지원군의 등장. 

심지어 하늘에는 조인족들이 끊임없이 병력을 수송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그 숫자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항복하겠습니다.” 

“죄 많이 지었는데 죽여도 돼요. 저는 더 이상 저항 안할게요.” 

“저도 어쩔 수 없이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헤르메스 길드에... 다시 살아나면 아르펜 왕국에 주민이 되겠습니다.” 

전장의 상황이 빠르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우린 이번에 헤르메스 길드에 가입됐어요. 중앙 대륙에서 살려면 가입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 저번에는 코롬 길드였어요. 초보자들에게 평판 좋았던 거 아시죠?” 

“저는 조회수 8백만이 넘는 인센 던전 공략글을 올렸던 적 있습니다. 변명 같겠지만 일부러 나쁘게 살려고 하진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죠. 지금이라도 용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여러분들.” 

헤르메스 길드가 커지면서 확대 가입되었던 유저들도 아르펜 왕국으로 전향했다. 

충성심이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으니 망설임도 적었다. 

- 여긴 가르나프 평원입니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속속 항복하고 있고... 

- 초대형 조각 생명체들의 위용. 도무지 죽지 않는 것 같습니다. 

- 하늘을 보십시오. 온통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들이 뛰어내립니다! 

가르나프 평원이 아르펜 왕국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벤 제국군들은 무너졌고, 아르펜 왕국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졌다. 

“젠장.” 

“이거 이길 수 있는 건가?” 

바드레이와 함께 출진하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의 마음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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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땅! 땅! 

파비오와 헤르만은 바쁘게 망치질을 했다. 

초대형 조각품을 긴급 수리했지만 그들의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런. 이러다가 너무 늦겠다고!” 

“세상에 이 갑옷이 없더라도 위드가 알아서 다 해먹어 버릴 것 같아.” 

그들은 신의 금속인 헬리움으로 대장장이 마스터의 명예를 걸고 방어구를 만들고 있었다. 

위드의 모험으로 유린이 가져온 에센 포라트의 가죽과 심장, 1급 마나의 결정체, 그라토르그의 철퇴, 멸망의 금속, 용의 눈물까지도 최적의 조합비를 만들어서 섞었다. 

“아깝지만... 이건 정말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지.” 

“저도 창고를 개방하겠습니다.” 

두 대장장이는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희귀 광물들을 내놓았다. 

- 나록의 결정체. 

- 신수의 뿔. 

- 지옥 별 파편. 

- 사신의 낫. 

- 깊은 대지 용암. 

1등급 희귀 대장장이 재료들을 전부 꺼내 놓고 방어구 제작에 협력했다. 

“위드에게 무시당할 수는 없지. 그때의 굴욕은 평생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어.” 

“예. 그렇지요. 어르신. 위드 놈이 깜짝 놀라서 기절할 정도의 작품을 보여주죠.” 

위드에 대한 불평, 불만! 

페가수스의 가죽과 깃털로 부츠를 만들고, 절대 깨지지 않는 보석을 듬뿍 박은 투구도 제작했다. 

“갑옷이 핵심이네.” 

“물론이죠. 위드가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닐 겁니다.” 

“다시 무시당할 순 없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활동하기 편해야 하고, 무게도 낮추어야지.” 

“방어력도 전무후무할 정도로 갖춰야 합니다.” 

“중갑옷 이상을 생각하고 있네.” 

“그래야지요. 재료들을 잘 조합하여 옵션도 많이 이끌어내야 할 것입니다. 아주 특수하고 귀한 꿀옵션들로 말이죠.” 

“어렵지만 해내야지.” 

파비오와 헤르만은 검을 만들던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강함을 드러내는 상징이 무기인 검이라고 생각했었다. 

막상 갑옷을 제작하는 건 신경 써야 할 것이 더욱 많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무조건 해내세.” 

“그럼요.” 

파비오와 헤르만은 대장장이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협력했다. 

- 별것 아닌데요? 

위드로부터 다시 이런 말을 듣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방어력을 중심으로 스탯과 옵션이 붙도록 모든 특성들을 준비했다. 

“아름다움까지 갖추도록 하세.” 

“별의 파편을 잘 박아 넣어야 될 것 같습니다.” 

두 대장장이들이 작업을 마쳐 가고 있을 때였다. 

- 위드 : 파비오 어르신. 방어구 제작은 잘되고 계시죠? 좀 늦네요.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면서도 묘하게 거슬리는 말투였다. 

“크흠. 거의 다 끝나 가네.” 

- 위드 : 이쪽 전투도 마무리가 되어 갑니다. 그런데 바드레이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알고 있다네.” 

- 위드 : 바드레이와 한판 붙을 때 쓰려고 합니다. 두 분이 만든 방어구가 빛을 볼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요. 

“완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바로 보내도록 하겠네. 우리에게 헬리움을 맡긴 걸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의 작품이 만들어졌어.” 

파비오와 헤르만은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고되고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최고의 방어구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 하늘 지배자의 갑옷 세트. 

위드가 이 갑옷을 입고 싸운다면 모두가 알게 되리라. 

그들이야말로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것을. 

‘근데 우린 원래 최고였잖아?’ 

‘뭐야.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지.’ 

작업을 다 하고 아쉬운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지금껏 많이 만들었던 검과는 달리 갑옷은 마치 자식처럼 애착이 느껴졌다. 

- 위드 : 참, 사이즈 좀 맞춰주세요. 

“아. 걱정하지 말게. 입으면 아주 편안할 테니. 딱 정사이즈로 맞췄어.” 

- 위드 : 오크 카리취의 형태로 해주세요. 

“오크? 그것도 카리취라고?” 

오크 카리취로 변신했을 때는 인간에 비해 몸집이 아주 커졌다. 

- 위드 : 바드레이랑 싸울 때 오크 카리취의 모습을 할 겁니다. 

“그걸 왜 이제야 말을...” 

- 위드 : 그러니까 빨리 작업해 주세요. 

파비오는 생각했다. 

‘위드. 이놈이 진짜 나쁜 놈 아닌가?’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그에게 의뢰를 넣을 때는 정중했는데, 이것저것 시켜먹는 모습이 영락없이 갑질을 하는 의뢰주다. 

‘그냥 하벤 제국에 눌러붙어 있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깊은 후회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 위드 : 만약 바드레이를 이긴다면 그건 다 두 분의 덕분일 겁니다. 

“우리 덕이라고?” 

- 위드 : 예. 방송국마다 인터뷰를 한다면 두 분의 도움 덕분에 이겼다고 가장 먼저 이름을 말할 생각입니다. 

“크흐흠. 뭐 그렇게까지야.” 

파비오는 체면상 거절하다가 헤르만을 보더니 고개를 서둘러 흔들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들. 

그들의 입장에서 명예에 대한 욕심은 무엇보다 컸다. 

그들은 거절을 하긴 했지만, 진짜 거절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었다. 

파비오는 혹시나 싶어서 서둘러 말했다. 

“우리 도움을 잊지 않아 주면 고맙긴 하지.” 

- 위드 : 네. 참, 조각 변신술이 끝나면 인간형으로 사이즈 조절 다시 해주실 수 있죠? 

“물론이지. 허허. 그거야 뭐가 어렵겠는가.” 

* * * 

바드레이와 하벤 제국군의 최정예 군단이 가르나프 평원에 도착했다. 

초창기 하벤 지역에서부터 성장을 해온 헤르메스 길드의 핵심 유저들이었다. 

“전투 대형으로!” 

“전원 전투 준비!” 

50만 명에 달하는 최정예 병력들이 마수를 앞세우며 넓게 펼쳐져서 진격을 하는데 북부 유저들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뭐지? 싸울 생각이 없나?” 

“우리한테 겁을 먹었다면 좋은 것 같은데.” 

항상 용감하게 들이받는 북부 유저들이었지만 지금은 거리를 두고 물러나고 있었다. 

“놈들이 도망가는데, 전부 죽입시다!” 

보에몽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조리 죽여서 헤르메스 길드의 강함을 보여줍시다!” 

“쓸어버려라!” 

하벤 제국군이 전투를 시작하기 위해 기사들을 앞세워서 돌격하려고 할 때였다. 

그들의 앞에 키가 조금 작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여성 유저가 걸어 나왔다. 

성녀 레몬이라는 이름으로 풀죽신교의 유저들 중에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여러분들에게 위드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어요.” 

하벤 제국의 대군 앞에서도 당당한 그녀였다. 

레벨이 낮다보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친위대의 아크힘이 뿔 달린 마수를 탄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마수 크논. 

레벨 600대가 넘는 마수로 왕성한 힘과 체력, 성문을 파괴할 정도의 돌파력을 가지고 있어서 비슷한 레벨의 기사단조차도 부숴버린다. 

“위드님이 바드레이님에게 한판 붙자면서 일대일의 결투를 신청했어요.” 

레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결투?” 

“일대일로 싸운다고?” 

“맙소사. 미치지 않고서야 위드가 바드레이님과 단둘이?”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바드레이의 승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위드가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 무모하게 느껴졌는데, 하물며 아르펜 왕국이 유리한 지금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고도 여겼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안으로 끌어들여서 바드레이님을 습격하려는 계획 아닐까?” 

“엄청난 비난을 받을 텐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레몬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 여기에는 어떤 음모도 없어요. 그냥 위드님의 표현대로라면 바드레이를 남에게 넘겨주지 않고 혼자 잡고 싶대요.” 

“...”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건 둘째 문제였고, 이 행운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그들은 반드시 전투를 이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곳까지 오며 자신감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바드레이가 위드를 잡아낸다면 전투는 훨씬 쉬워지리라. 

북부 유저들. 

아르펜 왕국의 핵심이 위드이니만큼 그를 해치운다면 상대는 구심점을 잃은 오합지졸에 불과할 테니까. 

따각따각 

바드레이가 말을 타고 레몬에게로 다가갔다. 장비들은 대륙 최고의 것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은백색의 말을 타고 있었다. 

과거에 타던 명마 린들린의 혈통을 이은 전투마 수아트. 

“위드가 진심으로 내게 결투를 청한 것입니까?” 

“그래요. 이 앞의 대결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의 안전은 풀죽신교의 이름을 걸고 보장할게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헤르메스 길드원들과 북부 유저들이 바드레이가 결정을 내리기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드레이가 척 손을 들었다. 

- 결투를 받아들인다. 전원 전진하라. 

하벤 제국군은 유저들이 비켜서자 열려진 길을 통해 나아갔다. 

* * * 

KMC미디어를 비롯한 방송국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이런 대결이 결정되었다고?” 

“예. 어마어마한 홍보 효과가 있겠는데요?” 

위드와 바드레이! 

베르사 대륙의 최강자를 결정하는 결투가 벌어질 거라는 소식에 시청률이 급등하고 있었다. 

“드디어! 시청자 여러분들이 궁금해하실 대륙 최강자가 누구인지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수많은 랭커들이 있지만 바드레이의 아성은 넘보지 못했죠. 위드 역시 마찬가집니다. 바드레이는 전투만 놓고 보면 사냥, 유저들과의 싸움. 그 어떤 것에서도 진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위드도 멜버른 광산에서 바드레이에게 패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네. 당시에도 위드에게 상당히 불리한 싸움이었다는 평가가 있었죠.” 

오주완은 실시간으로 보고되는 자료들을 검토했다. 

헤르메스 길드를 제외한 베르사 대륙의 거의 대부분의 유저들이 아르펜 왕국의 편이 되어 있었다. 

풀죽신교, 개척 정신, 새로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으로 큰 이변이 없는 한 아르펜 왕국의 승리가 굳어져 있었다. 

“세력의 균형이 깨진 이상 승부에 따라서 어쩌면 전투가 빠르게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북부 유저들은 위드가 패배한다고 해도 무너지진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하벤 제국은 금방 와해되겠죠.” 

“최강의 힘을 내세우던 헤르메스 길드이기 때문에 바드레이마저 꺾이는 건 타격이 큽니다.” 

“그렇지만 바드레이를 죽일 수 있을까요? 그가 착용하고 있는 갑옷들은 전설급이나 신의 사도에 가까운 것들이에요.” 

“네. 바드레이의 전투 영상들을 보면 단점으로 지적할 만한 부분이 없죠. 높은 공격력과 방어력. 그리고 최고의 스킬들을 다 익힌 완성형에 가까운 유형이에요.” 

“위드는 빠르고 과감합니다. 빈틈을 놓치지 않는 예리함과 기발한 상상력이 있다고 할까요? 그럼에도 바드레이가 가진 창과 방패에 무사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하벤 제국군이 가르나프 평원에 만들어지고 있는 대결 장소로 진군하는 동안, 스튜디오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위드가 먼저 대결을 제안한 것일까요?” 

오주완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중앙 대륙, 북부 대륙의 유명 유저들이 패널로 참석했지만 그들도 사정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저희가 보기에는 아르펜 왕국이 크게 유리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싸움이죠.” 

“위드는 무모한 판단을 잘 내리지 않는 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복수가 아니겠습니까? 바드레이에게 죽은 적이 있어서요.” 

“그런 단순한 감정을 이 큰 전장에서 꺼내 놓을까요.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복수가 될 텐데요.” 

“명예입니다! 베르사 대륙을 통일하면서 자신의 손으로 바드레이를 꺾었다는 명예가 필요한 것입니다.” 

“일리가 있긴 하군요. 그래도 패배할 수도 있는데 그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다들 한 마디씩 떠들었지만 무엇도 결정적인 근거가 없었다. 

오주완과 도찬미의 시선은 옆에 앉아 있던 신혜민에게로 향했다. 

위드와 모험도 같이 하고 친분도 있는 그녀라면 속사정을 알고 있을 거라는 추측에서였다. 

신혜민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주저하며 말했다. 

“어... 음.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요. 위드님의 목적이라면 장비를 욕심내는 게 아닐까요?” 

“장비요?” 

전혀 새로운 시각에 오주완이 눈을 크게 떴다. 

가르나프 평원의 전투를 결정짓는, 모든 유저들이 주목하고 있는 자리였다. 

명예나 복수, 본인이 직접 마무리를 짓고 싶다는 의도라면 모를까. 장비라니! 

“바드레이는 무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잖아요. 그런 만큼 유저들 중에서 최고급의 장비들을 잔뜩 가지고 있어요.” 

“그렇죠. 바드레이가 하벤 제국의 황제이니까요.” 

방송국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바드레이의 장비들을 취재했었다. 

매달, 매주마다 최상의 장비들을 바꿔가며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입수한 장비들은 주인이 있더라도 바드레이가 일단 쓰고 더 나은 것이 나오면 돌려주는 제도가 있었다. 

“위드님은 복수라는 감정에만 사로잡혀서 움직이는 분이 아니에요.” 

“복수가 이유가 아니다?” 

“복수를 하더라도 적자가 생긴다면 깔끔하게 포기를 했을 거라고 봐요. 원한은 반드시 갚더라도 이득이나 흑자로 만드는 것이 위드님의 방식이에요.” 

신혜민의 단호한 말에 다른 진행자나 참석자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복잡한 인간이 또 있을까. 

대단한 모험가인 것 같으면서 짠돌이이고, 전투의 천재면서도 조각사 직업을 마스터했다. 

철저히 복수를 다짐하는 성격이면서도 경제성이 없으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합리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도찬미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외쳤다. 

“무신 바드레이는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어요! 살인자 상태에 악명도 높으니 죽기만 한다면 꽤나 많은 장비가...” 

“그 장비들을 판매한다면 무신 바드레이 한정판이죠. 가격이야 부르는 게 값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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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와 바드레이의 대결 장소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불편하겠지만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을 거예요.” 

풀죽신교의 성녀 레몬의 말에 의해 사람들이 땅바닥에 앉았다. 

각양각색의 갑옷을 입은 유저들이 밀밭을 연상시킬 정도로 앉아 있었다. 

“우린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아... 위드님과 바드레이의 싸움을 못 보다니 이게 말이 돼?” 

멀리 있는 유저들에게는 가르나프 평원에서 생명이 부여된 초대형 조각 생명체들이 다가왔다. 

레벨이 700대, 800대에 달하는 지역의 패자로 분류될 만한 존재들은 산처럼 거대했다. 

- 인간들이여. 우리의 어깨와 등에 올라와라. 

- 높은 곳에서 편하게 보도록 해라. 

초대형 조각 생명체들은 관대하게 인간들을 머리와 등에 태워주었다. 

그들은 많은 인간들에 의해서 조각이 된 탓인지 성격이 밝고 긍정적이었다. 

백여 마리의 초대형 생명체들. 

10만 명이 훨씬 넘는 숫자가 올라가서 볼 수 있었고, 하늘은 조인족들이 차지를 했다. 

조인족들도 각자 최대한 많은 유저들을 등에 태우고 있었다. 

“위드님이 이길까?” 

“당연히 이기시겠지.” 

“바드레이는 엄청 강할 텐데... 검술의 비기만 6개 익혔다는 소문도 돌더라.” 

“눈이 호강하는 날이겠네.” 

“객관적으로 바드레이가 우세하다고 봐. 마음은 위드님을 응원하고 싶지만 말이야.” 

유저들의 부푼 기대도 대단했다. 

멋진 대결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위드의 도전 정신에 감탄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전쟁을 이기는데 거기서 승부를 거네.” 

“위드님이니까 가능한 거지.” 

곧 베르사 대륙의 최강자가 결정된다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휴. 사람이 많기도 하네요.” 

페일이나 다른 동료들도 대결 장소에 도착했다. 

헤르메스 길드와 질리도록 싸우고 이 자리에 오느라 저마다 옷차림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위드와 바드레이. 

그 명승부를 기대하는 건 친한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수르카가 불쑥 말했다. 

“우리 누가 이길지 내기해요!” 

“...위드님에 백 골드.” 

“위드에게 천 골드.” 

“저는 위드님한테 전 재산 몰빵이요.” 

“이러면 내기가 안 되잖습니까.” 

“파이톤님이 바드레이한테 거시면 되겠네요.” 

“그건... 위드에게 올인.” 

“...” 

동료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의리 때문에 응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위드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겪어 봤다. 

“위드님이 먼저 싸우자고 했잖습니까. 솔직히 바드레이가 강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위드님이 먼저 제안했다는 게 핵심이에요.” 

“페일님의 말이 맞아요. 위드님이 확실히 이길 작전을 준비했다는 거죠. 완벽한 함정. 통수요.” 

이리엔의 말에, 양념게장이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모든 일에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에요. 바드레이라고 해서 위드님과 싸울 대비를 안 했을까요?” 

“그럴 때의 꼼수도 준비가 되어 있을 거예요.” 

“으음...” 

양념게장은 머리를 좀 굴려보긴 했지만 딱히 둘이 싸워보기 전에 결과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무신 바드레이. 

그동안의 명성이나 전투 업적들이 너무나도 화려했다. 

하벤 제국군을 이끌던 바드레이의 모습은 무신이라는 별명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고 중앙 대륙 유저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내기가 성립하도록 저는 바드레이의 승리에 1만 골드를 걸죠.” 

수르카는 드디어 한 명이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소리쳤다. 

“아싸. 공돈이다!” 

* * *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마수를 몰고 위풍당당하게 대결 장소에 도착했다. 

“와. 진짜 바드레이다.” 

“거인 기사 보에몽! 대박...” 

“나 레인저 트로커님의 흑야산 공략 영상 보고 로열 로드 입문했잖아.” 

바드레이나 유명한 로열 로드 최상위권의 랭커들을 보며 유저들은 감탄을 내비쳤다. 

방송으로도 자주 보기 힘든 이들이 끔찍한 마수들을 타고 나타났다. 

악명을 자자하게 떨치기는 했지만, 북부 유저들은 막상 헤르메스 길드에 대해서 잘 몰랐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가장 유명세를 떨치던 유저들이다. 

“바드레이는 진짜 멋있게 생겼네.” 

“매력 같은 데 스탯 하나도 안 투자했지. 그래도 장비빨이 있으니 후광이 비춰 보인다.” 

“솔직히 생긴 걸로 따지면 바드레이 1승.”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들도 있었지만, 연달아 후속 부대가 도착하면서 구경하는 유저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전부 이마에 살인자 표시가 있네.” 

“웬만큼 죽이고 다녔다는 뜻이지.” 

“모라타에서는 적어도 도시 안에서는 살인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원래 헤르메스 길드가 아무나 죽이는 그런 곳이잖아. 패권 길드를 표방한다면서 말이야.” 

“장비들이 엄청 강해 보이긴 한다. 레벨 400대 후반에서 최고라는 새러데이 갑옷은 기본으로 다 입고 있어.” 

“인성이 별로지, 실력은 좋지. 솔직히.” 

“야야. 난 중앙 대륙에서 당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잠이 안 올 정도야.” 

“어느 정도인데?” 

초보자들도 있지만 레벨이 400을 넘는 실력자들도 군중들에 섞여 있었다. 

그들이 적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헤르메스 길드를 노려봤다. 

“말도 마. 구박받으며 던전 사냥하다가 이유도 없이 맞고, 돈 뜯기고...” 

“진짜? 거짓말 아냐?” 

“거슬린다고 죽이는 놈들이야. 그냥 자기들이 왕 노릇했다니까.”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가르나프 평원을 가득 메운 군중들에 조금 불안감을 느꼈다. 

‘근데 저거... 흑사자 길드의 제이코 아닌가? 저놈도 유저 꽤 많이 학살했는데. 언제 아르펜 왕국으로 넘어가서...’ 

‘와. 헤르메스 길드 가입 신청했던 놈들도 많은 것 같은데...’ 

세상의 인심이 바뀌었다는 것을 군중들의 태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잠깐씩 수정 구슬을 들어서 방송을 보니 전력상으로 하벤 제국군이 크게 밀리고 있다고 진행자들마다 말하고 있었다. 

- 지금 가르나프 평원에 모여 있는 유저는 1억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 잠깐만요. 처음에 1억 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전투를 치르면서 수없이 죽었잖아요. 

- 뒤늦게 오는 유저들도 많이 있었죠. 아르펜 왕국에서는 축제까지 벌이면서 참여를 독려했지만 느긋하게 움직인 유저들이 많았습니다. 

- 왜 그렇게 늦게 온 걸까요? 

- 사냥 때문이죠. 레벨이 높을수록 성장에 대한 욕심도 커집니다. 아슬아슬할 때까지 사냥터에 머무른 유저들이 가세했다고 보면 됩니다. 

- 중앙 대륙 유저들이... 이젠 정말 많이 눈에 띄어요. 화려한 갑옷만 봐도 알 수 있겠는데요. 

- 네. 그들이 아르펜 왕국의 진영에 섰네요. 마지막까지 하벤 제국과 아르펜 왕국을 저울질하던 유저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 어째서요? 

- 괜히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겠죠. 하벤 제국의 척살령도 두려웠을 테고... 레벨이 높을수록 고향과 캐릭터에 애착이 큽니다. 

- 그들이 아르펜 왕국의 편을 들었다는 건 대세가 확실히 넘어갔다고 보는 게 옳겠네요. 

- 예. 헤르메스 길드의 전술이 실패하는 걸 모두가 보았으니까요. 전투가 잠시 멈춘 사이에 아르펜 왕국은 전력을 완전히 보충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모든 것이 위드의 전략일지도 모른다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를 떠올려야 했다. 자신들 외에는 모두가 적인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바드레이가 있다.’ 

‘위드만 잡아준다면 변수가 생기는 거지. 절대적인 변수가...’ 

미약하지만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 * * 

“취이익. 번쩍번쩍하는군요.” 

“보석을 좀 박아놨네. 그래도 우리의 작품인데 눈에 띄어야 할 거 아닌가.” 

“어디 겁니까? 취췩!” 

“말비오 광산의 푸른 다이아몬드지.” 

위드는 오크 카리취의 형태로 파비오와 헤르만이 주는 갑옷을 입었다. 

꿈틀거리는 근육질의 몸을 화려하고 멋진 갑옷으로 덮었다. 오크의 야성미와 아름다운 갑옷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이것 이상의 완벽한 갑옷은 없을 거야.” 

파비오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 하늘 지배자의 갑옷 : 내구력 320/320. 방어력 330.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희귀한 금속들을 조합하여 만든 갑옷. 

대장장이 마스터 파비오, 대장장이 마스터 헤르만이 협력하여 만들었다. 

신의 눈물, 살아 있는 금속 헬리움을 비롯하여 많은 재료들이 포함되었으며, 완전한 용해를 위해 꺼지지 않는 화산의 용암을 사용했다. 

14번의 제련과 강화를 반복하여 지상에서 가장 단단하게 만들어졌다. 

불과 대지의 정이 깃들어서 스스로 완성되고 있는 갑옷. 

소유자에게는 무한한 명예와 영광이 주어질 것이다. 

제한 : 레벨 850. 

명성 300,000 이상 

힘 1300, 기품 500, 신앙 400. 

옵션 : 생명력과 마나의 최대치 200% 증가. 

모든 스탯 5% 상승. 

물리 피해 78% 감소. 

200미터 이상의 거리에서 쏜 화살의 피해를 입지 않음. 

마법 저항력 31%. 

마법 공격을 일정 확률로 차단함. 

모든 스킬 사용 시에 필요한 마나의 소모량을 75%로 낮춤. 

부상을 입으면 생명력 회복 속도가 5배가 됨. 

마나가 30% 이하가 되면 빠른 마나 재생. 

방어 스킬의 위력을 강화함. 

상태 이상에 면역. 

프레야, 미네, 바탈리 중의 한 명의 축복이 무작위로 부여. 

흑마법과 저주 마법에 저항. 

매우 가벼움. 

매우 견고함. 

이동 속도 증가. 

착용자의 능력에 따라 갑옷의 성능이 최대 20%까지 추가 성장. 

튼튼한 육체, 우러르는 맷집 스킬이 자동으로 발동됨. 

‘미쳤다. 이런 장비를 처음부터 썼다면 사냥이 얼마나 쉬워졌을까. 역시 대장장이 마스터들을 쥐어짜낸 보람이 있어.’ 

위드도 옵션을 보면서 만족했다. 

믿고 쓰는 드워프들이라고 할까. 

자부심이 높은 그들을 살살 긁어주니 이만한 작품이 나오고야 말았다. 

“취췩! 대장장이 장인들의 도시 토르를 그리워하는 드워프들이 많다고, 췩! 들었습니다.” 

“뭐, 그렇기야 하지.” 

“보답으로 드워프의 도시를 건설해 드리죠. 취이이잇!” 

위드가 북부 대륙에 아쉬워하는 부분은 쿠르소 같은 드워프 왕국이 없다는 점이었다. 

드워프들이 살긴 하지만 그들의 숫자도 적고, 뿔뿔이 흩어져 있다. 

대장장이 기술도 떨어졌는데, 마침 파비오와 헤르만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워서 중앙 대륙 출신의 드워프들을 많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장기를 만들어서 생산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엄청난 물량의 맥주들을 먹어치워서 그 돈도 남기지 않고 다 쓰지. 드워프는 많을수록 좋아.’ 

왕성한 생산과 소비를 하는 드워프는 주민으로 부려먹기 매우 좋은 종족이었다. 

“드워프의 도시라니 너무 대단한 보답 아닌가?” 

“영주도 한 번 해보셔야죠. 취취췻. 아르펜 왕국의 영주는 정말 재밌답니다. 췩!”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럼 누가 영주를 한단 말인가?” 

갑옷을 다 만들면서 화합했던 파비오와 헤르만의 눈에 다시금 경쟁의 불꽃이 타올랐다. 

“크흠.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드워프들이 정말 많은데...” 

“내가 부르면 최소 천여 명은 모일걸. 난 파비오라네.” 

“드워프 조합을 처음 만든 게 접니다.” 

“드워프 상인연합은 내가 만들었지.” 

파비오와 헤르만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들도 인생 경험이 많기에 이용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물러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애지. 특히 자존심은 더 강해져.’ 

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과 역량을 세울수록 자신이 최고로 인정받길 원했다. 

“두 분 모두에게 도시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추이이이잇! 물론 그 이후의 운영이야 달라지겠지만요. 취췩!” 

드워프들이 정착하면 인근 산의 광산도 개발해야 하고, 몬스터도 퇴치해야 하리라. 

파비오와 헤르만을 경쟁시키면서 남아 있는 단물까지 쏙 빼먹을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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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와 바드레이. 

로열 로드의 역사를 이끌어온 그들은 가르나프 평원에서 서로를 다시 마주보게 되었다. 

‘탈로크의 믿음 갑옷의 원한, 이자까지 톡톡히 받아주지.’ 

‘위드. 결국 이 자리까지 올라왔구나. 나와 베르사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게 되다니... 진작 밟아주었어야 했는데.’ 

위드는 오크 카리취의 모습을 했다. 

어깨는 떡 벌어져 있었으며 갑옷 사이로 흉기처럼 근육이 꿈틀거린다. 

따각따각. 

바드레이는 명마 수아트를 탄 채로 천천히 다가왔다. 

유저들은 두 사람이 마음껏 싸우도록 반경 800미터를 공터로 비워두었다. 

“이렇게 보게 되는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바드레이였다. 

“언제 꼭 다시 싸워보고 싶었다.” 

그는 베르사 대륙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던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전투 감각이나 용기는 인정하지. 하지만 정보대의 분석에 따르면 고작 500대 초반의 레벨. 너와 나는 체급이 달라.’ 

바드레이는 자신의 승리를 믿었다. 

“크흐, 췩!” 

위드는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다가갔다. 

말을 타고 있는 바드레이와 비슷한 크기의 커다란 육체! 

한 걸음, 한 걸음을 성큼성큼 뗄 때마다 긴장감이 높아진다. 

위드가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겨 놓고 멈췄다. 

“말은 됐다. 췩. 무기를 꺼내라.” 

“좋아. 나 역시 길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 보자.” 

둘은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 * * 

“드디어...” 

“붙는다!” 

샤우드, 군트, 로암과 미헬, 칼리스. 

옛 명문 길드들의 수장은 이번 전투에 베르사 대륙의 세력 구도가 결정됨을 알고 있었다. 

‘사실상 아르펜 왕국의 승리다.’ 

‘바드레이가 이기더라도... 전쟁은 끝났어.’ 

‘위드를 이길 수 있을까? 위드가 질 것 같지 않은데. 전투력만 놓고 보면 바드레이가 강할 것 같고...’ 

‘저 무대에 내가 섰어야 하는데.’ 

‘전쟁의 신 위드. 무신 바드레이. 로열 로드에서 다시없을 진정한 승부구나.’ 

그들을 비롯하여 서열 1,000위 안에 드는 최상위 랭커들은 이번 전투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 보게 되리라. 

이기는 쪽은 오랫동안 베르사 대륙의 최강자로 군림할 것이다. 

덤으로 어떤 스킬을 이용하고, 어떻게 싸우는지를 지켜보고 싶었다. 

칼리스가 천천히 팔짱을 끼며 말했다. 

“흠. 솔직히 바드레이와는 내가 싸워보고 싶었는데.” 

로암은 목을 꺾으며 우드득 소리를 냈다. 

“헤르메스 길드의 후광이 아니었더라면 바드레이도 평범한 유저들 중의 한 명이었을 뿐이야.” 

군트는 검을 뽑아서 손가락으로 검날을 쓸었다. 

“바드레이라. 내 검이 우는군. 아쉽게도... 위드가 지고 난다면 내게도 순서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미헬 역시 다른 이들에게 지지 않았다. 

“바드레이의 약점은 그동안 철저히 분석을 해놓았지. 항상 친위대를 끌고 다녀서 만날 기회가 없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약해지면 꺾으려고 했는데.” 

샤우드도 어떤 멘트를 날릴까 고민하는데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유저가 있었다. 

“거기 시끄럽습니다. 조용히 좀 봅시다.” 

“흐음?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샤우드와 명문 길드들의 수장이 험악하게 인상을 굳혔다. 

중앙 대륙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꼿꼿한 자존심만은 굽히지 않았다. 

“이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그들이 서서히 뒤를 돌아보는데, 검치가 300여 명의 수련생들을 데리고 있었다. 

“왜? 뭐 할 말 있어요?” 

* * * 

바드레이는 생각했다. 

‘로열 로드에서 공정한 대결 같은 건 없어.’ 

독이나 마법, 특수한 저주도 허용된다. 

숨겨진 보물이나 장비들을 활용하는 것도 개인의 능력이었다. 

사람들은 오로지 승리하는 쪽에 열광을 하리라. 

‘지금의 나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을 것이다.’ 

바드레이는 라페이와의 대화를 통해 전쟁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 우리에겐 미래가 없습니다. 이기든 지든 몰락하게 될 겁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 

- 그래도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게 낫겠죠. 끝없는 소모전은 하지 말고, 기왕이면 위드와 일대일의 대결을 벌이십시오. 

- 결투를 받아줄까?” 

- 모릅니다. 바드레이님이 위드와 붙어야만 그나마 희망이 있을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중앙 대륙의 랭커 출신들이 전부 달려들 테니까요. 

로암이나 칼리스를 비롯한 명문 길드들의 수장들. 

중앙 대륙의 유명했던 유저들이 바드레이를 벼르고 있으리라. 

‘죽더라도 잔챙이들에게 죽을 수는 없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보여준다.’ 

바드레이는 하벤 제국이 무너지더라도 무신이라는 영광스런 호칭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누구라도 자신 앞에 설 수 없음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위드를 꺾으면 된다. 그러면 나는 무신으로서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흑기사는 끊임없이 의심한다. 

흑기사는 불안해한다. 

흑기사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흑기사는 강한 힘을 손에 얻는다. 

흑기사가 황제가 된 이후에 열린 직업 특성. 

충성을 바치는 부하들을 죽일수록 전투 능력이 상승한다. 

‘황실 기사단 일곱 개를 제물로 바쳤다. 그러니... 나는 무적이다.’ 

평소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졌음을 느꼈다. 

흑기사의 약점. 

그것은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이미 그 단계는 지나버렸다. 

최고의 장비와 각 교단의 신들로부터 직접 축복도 받았다. 

‘지금이라면 아마도 레벨 800대나 900대의 몬스터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도 두렵지 않다. 

장렬하게 쏟아 내리라. 

이 마지막 걸음을 딛고 나면, 파멸밖에 남아 있지 않더라도.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위드를 비롯하여 덤비는 모든 녀석들을 차례차례 전부 꺾어준다. 그것으로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우는 것이다.’ 

* * * 

“휘몰아치는 돌격!” 

바드레이가 수아트를 타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서너 번 만에 최대의 가속이 이루어졌다. 

“취잇!” 

위드는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로아의 명검을 들어서 힘껏 후려쳤다. 

까아앙! 

강렬한 쇳소리가 나면서 양쪽이 동시에 비틀거렸다. 

< 감당하기 힘든 일격! 

적의 돌진에 의해 생명력이 4,281 줄어들었습니다. 

모든 스탯이 14초 동안 3% 감소합니다. > 

로아의 명검에 하늘 지배자의 갑옷 세트를 입었음에도 놀랄 만한 충격이 전달되었다. 

바드레이도 메시지창이 떴다. 

< 우직한 힘의 충돌! 

영혼을 뒤흔드는 충격이 전달되었습니다. 

생명력이 891 줄어들었습니다. 

4초 동안 마비 증상이 발생하며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이 저하됩니다. 

수아트가 피해의 일부를 흡수합니다. > 

‘무신 바드레이. 역시 강하다.’ 

위드는 두 발짝 물러났다. 

바드레이가 말을 탄 채로 세 번의 검을 더 휘둘렀지만 전부 막아냈다. 

그럼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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