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3화(53권-3화)
“사랑하는 동생아.”
- 유린 : ……장비 확인하고 싶다고
“어.”
- 유린 : 잠시만. 지금 봐 볼게.
위드는 로아의 명검이나 하늘 지배자의 갑옷을 비롯한 귀중품들을 급하게 여동생에게 맡겼다.
그녀의 임무는 케이베른이 오기 전에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치는 것!
헤르메스 길드가 드래곤과 싸우는 와중에도 유린은 와삼이를 타고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무려 바드레이가 떨어뜨린 물건들이다.’
위드는 전리품을 살펴보려니 가슴이 설렜다.
특히 붉은 빛깔의 술잔에는 심상치 않은 은근한 광택이 흘렀었다.
여동생만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믿지 못했으리라.
‘악명이 자자했으니 중요한 물품들을 떨어뜨렸을 거야. 당첨이 확실한 로또를 긁는 기분이군.’
도대체 어떤 보물이 나올지 몰라서 떨리는 순간!
- 유린 : 어……. 근데 옵션이 많네.
“많아 ”
- 유린 : 응. 뭐 전설이 봉인되어 있다고 하고…….
“전설까지 ”
두근두근.
위드는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옵션이 총 몇 개인데 ”
- 유린 :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옵션은 6개야. 근데 7개가 더 봉인되어 있다고 나와.
13개의 옵션!
상위 등급의 아이템일수록 꿀 옵션 하나에 가격이 열 배씩 달라지기도 한다.
사냥 속도와 관련된 옵션은 전체적인 전투 능력과 성장 속도를 좌우하기도 했다.
“어서 말해 봐.”
- 유린 : 응. 천천히 불러 볼게.
불꽃의 성배 : 내구력 30/30.
불의 정화가 담겨 있는 잔이다.
인간들이 간 적 없는 땅속 깊은 땅에서 흐르는 용암을 채취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백만 년 동안 타오른 불이 담겨 있다는 소문도 있다.
전설이 담긴 물품.
성배의 힘을 이끌어 내면 어떤 어둠도 물리칠 수 있으리라.
제한 : 없음.
옵션 : 소유하는 것으로 모든 스탯 53 증가.
생명력과 마나의 최대치 70,000 상승.
불과 관련된 모든 스킬의 위력이 200% 강화.
전투 스킬의 효과 +35%
화염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음.
열흘에 한 번씩 ‘성배의 평정’을 사용할 수 있음.
특수 : 전설이 봉인되어 있다.
밝혀지지 않은 옵션이 7가지 잠들어 있음.
성배의 평정 : 흐르는 용암의 강이나 폭발하는 용암 분출구를 소환하여 적을 쓸어버린다.
“미쳤구나! 미쳤어.”
단 하나만을 살폈는데도 옵션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완전 사기잖아.”
스탯의 상승이나 옵션들이 훌륭한 아이템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중앙 대륙을 지배한 채, 로열 로드에서 가장 좋은 물품들을 소유했을 바드레이라서 가지고 있던 물품.
“이 정도면 지금까지 나온 모든 아이템 중에서 알려진 것 중에는 최고의 보물이라고 부를 만 해.”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혜택을 주고, 심지어 이용 제한도 없는 물품!
“레벨이 낮을 때 불꽃의 성배가 있었다면 완전 사기적인 수준이었겠다.”
사실 너무나도 고급 아이템이라서 초보자가 이걸 가지고 있다면 다른 유저들에 의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꼭꼭 숨겨 두고 혼자 던전이나 사냥터에서 쓴다면 성장 속도가 몇 배는 빨라졌으리라.
레벨이 400대, 500대에 이른다면 효과가 상대적으로 감소할 테지만 소유하고 있다면 확실히 사냥 속도를 높여 준다.
경매 사이트에 올린다면 이 물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세상에 돈 많은 부자들이 한둘이 아니고, 어디서 누군가 몇 십억, 몇 백억을 지르는 정도야 뉴스거리도 아니었으니까.
“로열 로드의 인기를 감안하면 건물 몇 채가 오갔을 수 있겠어.”
바드레이가 성배의 평정을 사용했더라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사막의 대제왕 시절에 불과 관련된 스킬은 많이 겪어 보긴 했지만, 뻔히 대응할 수 있도록 티가 나게 쓰진 않을 것이다.
고레벨 유저일수록 전투의 감각이나 운용 능력이 뛰어나서 절묘한 타이밍에 사용한다면 크게 불리해졌으리라.
“이런 걸 꿍쳐 놓고 있었다니……. 역시 하벤 제국의 황제. 로열 로드 최강의 유저. 나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고 인정을 해 줘야 되겠군.”
위드는 바드레이의 높은 악명에 대해 감사했다. 그게 아니라면 보통은 이런 보물을 안 떨어뜨렸을 테니까.
“평생 못 받은 운을 지금 다 얻는구나.”
- 유린 : 다음 물건도 부를게.
바람 칼날 : 내구력 60/60.
가공되지 않은 바람 칼날.
지상의 모든 물질을 다루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손댈 줄 아는 대장장이만이 원하는 형상으로 만들 수 있다.
바람의 혼이 담겨 있다.
신비로운 전설급 대장장이 재료.
“크흡.”
위드는 라면 국물 한 모금에 소주 7병을 마신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름답구나. 술에 만취해서 로또에 당첨되면 이런 기분일까.”
죽음의 위기에나 보인다는 지나간 과거들이 스쳐 지나갔다.
헤르메스 길드와의 오랜 원한, 바드레이에게 멜버른 광산에서 죽은 적도 있지만 그 묵은 감정들까지도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헤르메스 길드에 조각품이라도 기념품으로 보내 주고 싶을 정도군.”
잠깐의 감정이긴 했지만 약간의 보답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
- 유린 : 명품 장인의 무지개 천도 있어.
“흐음. 무지개 천은……. 흠. 바드레이가 바느질을 하는 취미가 있었나 아니면 최근에 사냥터에서 얻은 것일지도 모르지.”
위드도 과거에 무지개 천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 얻은 명품 장인의 무지개 천은 그보다 훨씬 뛰어나긴 했지만 다른 두 개의 물품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다.
강남에 초대형 빌딩이 생겼는데, 대학교 근처의 원룸 하나를 더 얻었다고 할까.
명품 무지개 천으로 만든 옷은 비싸게 팔릴 테지만, 베르사 대륙에서 최고로 꼽을 수 있는 물품 두 종류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 유린 : 마지막 남은 하나는 확인이 안 돼. 감정에 실패했다고 나오면서 정보를 알 수 없어.
“마지막이 절망과 평온의 단검이었던가 ”
- 유린 : 응.
위드는 기대심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특정 직업만이 다룰 수 있거나 어떤 비밀이 숨겨진 것들은 감정이 안 되기도 한다.
빛을 흡수하는 것 같은 검은색 검신, 투박하지만 잡기 편한 손잡이.
“바드레이의 것이니 고급이고 비쌀 거야. 부르는 게 값이겠지.”
믿고 쓰는 바드레이의 전리품!
위드가 즐겁게 물건들을 확인하는 사이에도 헤르메스 길드와 드래곤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신성한 찌르기!”
“주문 폭주!”
“발광 타격!”
“악마의 내려침!”
검치와 사범들, 수련생들도 어느새 블랙 드래곤에게 달라붙었다. 목이나 등, 꼬리 부근까지 붙어서 신나게 검을 휘두른다.
“이것이 손맛이로구나!”
“죽여주는데요. 스승님.”
일점 공격술이나, 결 검술을 이용해서 블랙 드래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케이베른이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며 육체를 이용한 공격도 해 오고, 마법도 쓰지만 제법 버텨 내고 있는 상태였다.
‘짧은 시간 동안 전투가 격렬하게도 펼쳐지는군.’
드래곤의 육체는 웬만큼 타격을 받아서는 꿈쩍도 하지 않지만 수천 명의 유저들이 달라붙어서 싸우고 있다.
레벨 500대가 넘는 유저들이 저마다 가진 힘과 스킬을 실컷 터트리고 있었다.
하벤 제국군을 추격해 온 중앙 대륙 유저들도 검치가 나서면서 뜻을 함께해서 드래곤 공격에 나섰다.
블랙 드래곤과의 전투로 뜻을 모은 모습.
‘이렇게 되면 드래곤에게도 타격이 있을 거야.’
위드의 관심사는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을 향해 있었다.
개미 떼의 공격이라도 거대한 코끼리를 무너뜨릴 수는 있는 법.
‘나도 싸우고 싶다.’
위드의 피도 끓어오르기는 했지만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검치나 사범들, 수련생들이야 드래곤과의 전투에 은근슬쩍 끼어들더라도 도움이 되니 내버려 두지만, 위드라면 상황이 전혀 다르니까.
위드가 본 드래곤의 몸으로 다가간다면 블랙 드래곤을 내팽개치고 덤벼오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꽤 많을 것이다.
‘솔직히 싸움은 지들이 다 걸어 놓고, 나를 싫어한다는 게 억울하긴 하지만 세상이 다 그렇지.’
위드는 멀리서 전투 구경만을 하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이 실컷 헤르메스 길드를 약화시켜 주면 그것으로 좋았다.
‘드래곤이 이겨도 딱히 좋을 것 같진 않아. 드래곤도 적은 적이니까. 게다가 헤르메스 길드가 다 죽으면 다음은 내 차례가 될 테고.’
최상의 결과는 어느 한쪽이 크게 밀리지 않고 전부 망하는 것!
특히 마지막에 케이베른의 숨통을 끊어 놓는 건 자신이면 좋다.
막타를 쳐서 뺏는 건 매우 비매너적인 행동이었지만 사실 그만큼 짜릿한 게 또 없었으니까.
‘잘 하면 기회가 올 수도 있을 것 같군. 워낙 생명력도 많고,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 쉽진 않겠지만. 근데 이렇게 드래곤이 잡기 쉬운 존재였나 ’
위드의 예상보다 훨씬 못 싸우는 케이베른에 대한 의심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저거 싸움은 못하는데 겉멋만 들어 있던 드래곤이라든가. 혹은 새끼 드래곤 역사서에는 나이를 꽤 먹었다던데.’
위드의 등뼈가 조금씩 서늘해지고 있었다.
케이베른의 눈동자와 입가를 정확히 본 직후였다!
‘저건 얍삽한 표정이다. 틀림없어.’
평범한 유저들이라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미묘했다.
위드는 일찍이 10대 시절부터 눈칫밥을 배부르게 먹었으며, 조각사로서 동물들의 표정에 대해서도 관찰을 많이 했다.
‘악어 나일이와도 비슷해. 게으르게 누워 있다가 사냥감이 오면 덥석 물어뜯던…….’
전투 중에도 이런 여유를 보일 수 있다니!
이 표정이야말로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게 아닌가.
“스승님. 위험합니다. 어서 빠져나오세요!”
위드는 귓속말을 검치에게 보내고,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유저들이 속해 있는 채널에도 말했다.
- 위드 : 케이베른. 저거 심상치 않습니다. 얍삽한 짓을 저지르려고 하니 당장 피해야 합니다!
“어……. 스승님. 위드가 위험하다고 빠져나오라는데요.”
케이베른의 엉덩이 부근에 매달려 있던 검사 백이십칠치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들을 들은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이 멈칫했다.
위드의 말이라면!
로열 로드에서 아군과 적을 떠나서 모든 유저들이 믿음을 가졌다.
그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모험과 사냥, 왕국 건설, 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세운 위드의 업적들이었다.
블랙 드래곤의 거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에서 검을 내려찍던 검치가 외쳤다.
“나도 들었다. 하지만 너희들은 위험하다고 해서 빠져나갈 것이냐!”
검둘치, 검삼치.
사범들과 수련생들이 일제히 외쳤다.
“아닙니다!”
전투에 빠지면 재밌어서 물러서지 않는 이들!
“싸우자. 싸우다가 죽는 것이다.”
검치의 말에 수련생들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핫!”
“역시 이 맛 아닙니까!”
그렇게 블랙 드래곤의 몸을 신나게 두들겼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이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위드가 헛소리를 지껄인 모양인데.”
“우리가 드래곤 사냥에 성공하는 걸 시기해서 지껄인 거야.”
“지금이 기회다. 모두 총공격에 나서자.”
아크힘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이내 불안감을 떨쳐 냈다. 검치와 수련생들을 보고 안심한 것도 있었고, 워낙에 그동안 위드에게 많이 당해 왔기 때문이다.
“한창 치열하게 전투 중인데 물러선다면 드래곤에게 회복할 시간을 줘서 피해가 크다.”
그렇게 헤르메스 길드는 총공격에 나섰다.
블랙 드래곤 사냥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커져서 더 적극적으로 싸웠다.
‘아무래도 수상해.’
‘개인적으로는 어째 위드 말에 믿음이 가긴 하는데.’
의문을 느낀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도 있었다.
지능이 좋은 몬스터일수록 전투 방식이 까다롭다.
오우거처럼 적이 나타나면 무조건 정면으로 덤벼드는 방식으로 케이베른이 싸운다는 점에서 의문이 들었다.
‘드래곤은 멍청하지 않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단순하게 싸우는 거야. 그래도 우리한테 상당히 많이 얻어맞긴 했는데…….’
그럼에도 눈앞에 드래곤이 있으니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
그들은 동료들의 뒤를 따라서 끊임없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케이베른의 흑마법 중에서도 생명 계열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 모두 죽어라.
운명의 거울!
최근 10분 동안 받은 피해량을 가까이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되돌려 버리는 궁극의 흑마법.
케이베른을 공격하던 유저들이 일제히 허무하게 회색빛으로 변해서 우수수 사라져 갔다.
검치나, 수련생들도 한꺼번에 잿더미로 변해서 목숨을 잃었다.
- 희생자의 생명 흡수.
블랙 드래곤은 두 번째의 흑마법을 사용했다.
죽은 유저들의 생명력과 마나를 빼앗아서, 지금까지 입은 피해를 다시 복구해 버렸다.
상처로 몸이 뒤덮였던 케이베른의 몸에 새살이 돋아나더니 용아병들을 만드느라 빠졌던 비늘까지도 완벽하게 재생되었다.
- 어리석은 인간들.
너희들에게는 작은 희망조차도 사치다.
케이베른이 하늘에서 포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