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9화(53권-9화)
이현은 검술 도장에 여러 개의 현수막들이 걸려 있는 것을 봤다.
- 축. 베르사 대륙 정복!
- 우리는 전사들이다. 검을 들어라!
- 단기 속성, 사막 전사 과정. 학생, 직장인 환영. 여성 대환영!
도장 입구에도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 넘게 줄을 서 있었다.
미식축구를 하면 어울릴 듯한 건장한 체격의 백인이나 흑인들도 많은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이번 전투에 검치와 사막 전사들은 대활약을 펼쳤고, 여러 방송국들이 이들을 주목했다.
그 결과 대대적인 신규 고객들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 당신들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서구청장. ]
[ 멋진 사나이들의 땀. 강한 사내 조기 축구회. ]
[ 전진하라. 전진하라. 우린 해낼 것이다. 팔공 유격대. ]
[ 우린 쓰러지지 않는다! 꽃보다 사나이. ]
정문에는 지역 정치인, 기업, 단체 등이 선물을 한 화환들도 줄지어 놓여 있었다.
“막내야. 이쪽으로 와라.”
김인상.
검사백이십칠치로 활약하는 그가 이현이 온 것을 보고 뒷문으로 이끌었다.
“사형. 사람들이 많네요.”
“응. 네가 온 걸 알면 아마 저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킬 거야.”
“스승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아무래도 그렇지. 저들 중에서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일 할도 되지 않을 테니까.”
스포츠센터들이나 격투 학원들이 보통 그렇지만 꾸준히 다니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사나흘을 열심히 다니다가 발길을 끊는 경우가 다반사고, 어떤 이들은 가입만 해 놓고 나서 한 번도 방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안현도의 도장은 그런 면에 있어서는 확실한 면이 있었다.
어마어마한 훈련량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함!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하니 한 달 이상 다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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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은 도장에서 땀을 듬뿍 흘린 후에 안현도와 사범들과 함께 자리를 가졌다.
“스승님들. 사형들. 이번에 제가 제안을 드릴 게 있습니다.”
KMC미디어와 CTS미디어.
대형 방송국들을 만나서 먼저 이야기를 했던 내용이 있었다.
“전문적인 전사들을 위한 프로그램. 요리사들이 식재료를 가지고 요리 경쟁을 하는 것처럼 전사들이 몬스터와 싸우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현이 원하는 프로그램은 방송국의 입장에서 그렇게 새로운 건 아니었다.
로열 로드는 다양한 종류의 여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냈고, 몬스터 사냥에 대한 것도 당연히 있었다.
“진짜 전사들. 그러니까 정말 잘 싸우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겁니다. 시청자들이 보면 도움도 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로요.”
방송국 관계자들은 이 말에도 그렇게 끌리진 않았다.
대형 방송국이라면 제대로 된 프로그램 하나를 편성할 때, 내부 회의를 몇 번씩 하고 파일럿을 제작해서 시청자 반응들을 살핀다.
주제가 참신한 것도 아니고, 독보적인 시청률을 기록할 것 같지도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이현이 접속해서 모험이나 아르펜 왕국과 관련된 프로그램들을 내보내면 그게 더 높은 인기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현은 몇 마디 설득해 보다가 안 되니,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래서 안 됩니까 ”
“…….”
“방송 만들기 싫어요 ”
방송 프로그램 편성 확정!
방송국들의 입장에서는 갑질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라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위드의 뜻대로 하지.”
“국장님. 그래도 방송사가 개인에게 휘둘리는 건 안 좋습니다.”
“그래서 어쩌자고. 위드랑 싸울 거야 ”
“그건 아닙니다.”
방송국들은 진정한 전사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고, 요즘에 가장 유명한 이들에 대한 포섭을 시작했다.
파이톤이 손에 꼽혔고, 베르사 대륙의 레벨 최정상의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몇몇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가장 영입하고 싶은 인물들은 안현도나 사범들, 수련생들이었다.
검치, 검둘치, 검삼치, 검사치, 검오치…….
그들이야말로 가장 전사다운 전사였다.
“사형들이 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현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안현도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기색이었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광대가 되어야 하느냐 ”
“사형들이 얻을 이점들이 많습니다.”
이현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하기로 했다.
“우선은 사형들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맨날 도장에서 땀을 흘리는 사형들에게 잠깐이라도 여자를 만날 기회가 생기는 것이죠. 운이 아주 좋다면 연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좋구나.”
첫 번째 이유만으로도 여유롭게 방송 출연 확정!
“두 번째로는 명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형들이 나중에 도장을 연다면 인기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무도가에게도 명성이 중요하긴 하지.”
안현도는 공감할 수 있었다.
세상을 뒤집어 놓을 대단한 실력을 갖추었더라도 그게 알려져 있지 않다면 의미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사형들이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진짜 위험하고, 짜릿한 전투를요.”
이현은 그렇게 사형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도장에서는 강해질 수 있지만, 세상에 그 힘을 쓸 역할을 만들어 주는 것.
‘내 사람들은 내가 챙겨야지.’
전쟁이 벌어지면 사형들의 존재가 승패를 좌우할 정도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심 없이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은 기꺼이 해 줘야 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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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여기 보고서야.”
이현은 집에 돌아와서는 여동생으로부터 짜임새 있게 정리된 베르사 대륙의 현황을 살필 수 있었다.
“음. 헤르메스 길드의 피해가 크긴 했군.”
아르펜 왕국의 최근 일주일 세금 수입에서부터, 가르나프 평원에서 소모한 물자와 벌어들인 자금.
하벤 제국이 소모한 병력과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이 잃어버린 장비들의 잠정 수치까지 볼 수 있었다.
“자. 2만 3천 원.”
이현은 흔쾌히 자료 정리를 해 준 여동생에게 용돈을 주었다.
“자료가 깔끔해서 3천원 더 넣었어.”
“고마워.”
“그래. 너무 돈만 밝히지 말고.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
“알았어.”
이현은 건물주도 되었으니 여동생을 미리 단속해야 된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지 않으면 흥청망청 돈을 다 써 버리고 말리라!
이현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식당에서 파는 맛있는 음식은 뭐다 ”
“건강에 안 좋을 수 있다. 위생 상태를 확인하지 않았다. 과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옷은 ”
“단정하게. 유행을 타는 화려한 옷들은 잠깐의 만족이다.”
“휴대폰은 ”
“통화만 간단히. 최저 요금제를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이혜연의 대답은 이현이 원하는 정답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 탓에 7살 때부터 세뇌시켜 놓은 삶의 방식들!
“남자는 ”
“경계한다. 저녁 늦게 만나지 않는다. 가위를 반드시 가지고 만난다.”
“이유는 ”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먼저 잘라 버리기 위해.”
“용돈이란 ”
“아직 독립하지 못한 나에게 주는 고마운 지원 자금. 험한 세상에는 천 원이 없어서 굶고, 영양 부족으로 죽어 가는 아이들이 많다. 소중한 용돈을 쓰기 전에는 바람직한 것인지 다섯 번씩 고민한다.”
“좋아. 그런대로 부족하긴 하지만 마지막 한 가지 남았어. 자유는 ”
“돈이다.”
이현은 여동생을 훌륭하게 키운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이만하면 어디에 내놓아도 한 사람의 자린고비 몫은 충분히 해낼 정도로 컸다.
“동생아.”
“네.”
“만나는 남자가 있으면 데려와도 돼. 슬슬 연애도 해 볼 나이니까.”
이혜연은 이 말에도 절대 낚이지 않았다.
부모처럼 자신을 키워 준 오빠이긴 하지만 때때로 눈이 돌아갈 때는 그 누구보다 무섭다는 사실.
특히 그녀는 제피, 최지훈에 대해 조금씩 좋은 감정도 갖고 있었다.
‘돈은 좀 없어 보이지만 성실하고, 나를 아껴 줄 것 같은데.’
이혜연은 창밖을 봤다.
이현이 바쁜 탓에 최지훈이 와서 집을 수리하고, 텃밭에 쪼그려 앉아 콩과 마늘을 따고 있었다.
“만나는 남자 없어. 오빠처럼 좋은 사람 찾기 전에는 연애를 안 할 거야.”
“쉽지 않은 목표지만 열심히 해 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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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은 보고서를 읽고, 인터넷 게시판들을 돌아다니며 가르나프 평원의 전투 이후의 상황들을 확인했다.
그가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난 이후의 상황들이 몇몇 동영상들에 드러나 있었다.
- 형편없는 인간들. 정말 약하구나!
케이베른은 지상을 지배했다.
하벤 제국군이나 헤르메스 길드의 생존자는 계속 줄어들었고, 최후에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흑마법과 용아병들에 의해 차례대로 죽어 나갔다.
중앙 대륙 유저들, 가르나프 평원에 있던 유저들도 상당수가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 모두 죽어라!
하늘로 날아오른 케이베른을 더 이상 막지 못했다.
대파열!
케이베른은 가르나프 평원에 화염과 대지 계열의 최고 마법을 터트렸다.
땅과, 사람이 모두 부서지는 충격파가 대지를 타고 넓게 퍼져 나가며 모든 것을 파괴했다.
북부 유저들은 그나마 꽤 많이 빠져나갔지만, 어마어마한 인원이 사망했다.
이현의 표정도 단단히 굳어졌다.
‘흑마법도 곤란하고, 다른 대마법들도 상대하기에 너무 높은 수준이야. 지금 시점에서는 한 마디로 균형에서 어긋난 존재야.’
가르나프 평원마저 정리한 케이베른은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아렌 성의 상공에 케이베른이 출현했다.
여기서부터는 방송국들이 편집해서 보도한 영상들이 있었다.
이현은 KMC미디어의 영상본을 선택했다.
-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이 아렌 성에 나타났습니다.
케이베른이 화염 마법을 연속으로 터트리며 도시를 불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넓은 가르나프 평원에서는 사람들밖에 없었기에 마법의 위력이 덜 위력적으로 보였다.
호화로운 아렌 성이 불에 의해 타서 무너지는 광경은 대단한 것이었다.
주요 건물들과 탑들이 차례차례 무너지고, 다리와 성벽은 파괴되어 잔해로 변했다.
케이베른이 아렌 성의 탑에 서서 유저들에게 포효하는 광경은 배경 화면으로 써도 멋질 법한 광경.
- 아렌 성이……. 하벤 왕국 시절부터 명맥을 이어 오던 아렌 성이 드래곤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 아마도 헤르메스 길드가 케이베른을 분노하게 만든 이유로 보이는데요. 그들은 이런 결과를 예상했을까요
- 예상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도저히 짐작도 못했으리라고 보고요. 그렇지만 케이베른이 헤르메스 길드에 복수하기 위해서 아렌 성을 부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 어째서요
- 특별히 헤르메스 길드나 하벤 제국을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에 대한 복수를 천명했죠.
- 이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 예. 영주들에게 도시들이 케이베른의 목표가 될 거란 퀘스트가 떴죠. 아렌 성이 시작이 될 거란 불길한 예상이 듭니다.
아렌 성을 파괴하기 직전, 그 지역에 있던 유저들에게 퀘스트가 발생했었다.
[드래곤의 습격
악룡 케이베른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도망치기에는 늦었다.
살아만 남아도 큰 행운일 것이다.
난이도 : B
보상 : 전투 경험
퀘스트 제한 : 케이베른의 출현.]
그러나 살아남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판단이 정말 빠른 이들은 퀘스트를 받자마자 도망쳤지만, 짐을 챙기거나 설마 하고 기다렸던 이들은 뒤늦게 성문을 빠져나가려다가 대부분 죽었다.
아렌 성이 완전히 파괴된 이후에는 베르사 대륙의 모든 유저들에게 알림창이 떴다.
[드래곤의 복수]
악룡 케이베른은 인간들의 문명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정령과 요정들이 경고하고 있다.
“일주일 후에 케이베른이 에바루크 성으로 향하게 될 거예요.”
아렌 성을 철저히 부숴 놓은 케이베른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토르에 있는 자신의 레어로 돌아갔다.
이현은 레드 드래곤의 영상도 보긴 했지만 그건 참고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발악이라도 했지만 오크들이 힘없이 마법에 의해 대량으로 쓸려 나가고, 사방으로 도망치면서 격파되는 모습이었다.
오주완이 개인적인 추측임을 밝히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 에바루크 성의 파괴가 예고된 걸 보니 아렌 성이 첫 번째가 된 건 발전도에 따른 파괴로 보입니다.
- 발전도요
- 네. 아직 정확하진 않습니다. 발전도나 기술력, 인구, 영향력, 도시 명성. 뭐 이것들 중의 하나일 수도 있고, 복합적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 에바루크 성이 최근에는 칼라모르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 그렇죠. 어쨌든 중요한 건 가장 번화한 도시를 순서대로 파괴하는 것 같습니다.
- 레드 드래곤은요
- 그쪽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레어로 돌아가지 않고 오크랜드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무언가 정보들이 더 모이게 되면 시청자 여러분들께 바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KMC미디어에서는 베르사 대륙의 큰 도시들이 차례대로 드래곤의 주요 목표가 될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이현도 대략이지만 그 점에서는 동의했다.
“모라타도 그럼 언젠가 드래곤에 의해 파괴될 가능성이 높겠는데…….”
중앙 대륙만큼 부유하진 않지만 모라타는 북부 대륙의 핵심 도시다.
“모라타가 파괴된다면……. 그다음으로는 대지의 궁전이나 항구 바르나도 위험할 텐데.”
아르펜 왕국이 눈부시게 발전하긴 했지만 연결 고리는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북부 대륙은 니플하임 제국이 몰락하고 오래도록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모라타를 중심으로 발전된 도시가 몇 되지도 않고, 유저들도 초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몇 개의 도시만 부서진대도 왕국 전체의 생산이나 무역이 마비되는 사태에 다다르게 된다.
그때가 되면 북부 유저들은 떠돌이 신세가 될 것이고 아르펜 왕국의 발전도는 처참한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어쩌면 상당수는 중앙 대륙으로 이주를 선택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