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53권 : 14화 (368/520)

53권 14화

‘영주 자리를 돈을 받고 팔면 짭짤하겠어.’

위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솔 직하게 말하지는 못했다. 남들에게는 야박하기 짝이 없는 수전노이더라도 서윤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급히 두뇌 회전을 일으켜서 비 슷한 말이지만, 고급스러운 표현 을 떠올렸다.

“원래 동물을 분양받을 때도 책임비라는 게 있어.”

“책임 비요?”

“반드시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 는 의미로…… 잘 키우겠다고 내는 거지. 공짜로는 동물을 분 양해 주는 게 아니거든. 그리고 제국 발전을 위해서도 돈이 필 요하고. 그러니까 영주도 책임비 를 좀 내야 하지 않을까?”

서윤은 위드가 어떤 사기를 치

더라도 순수하게 받아들일 정도 로 단단히 콩깍지가 씐 상태였 다. 평소에는 이성적이고 똑똑하 지만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책임비는 얼마나 달라고 해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경매 방식으로 하면서 최소 천 골드 이상으로 해야 되지 않을까. 일 단은 성의 표현이니까.”

“알겠어요.”

위드는 시작 가격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경매란 끝날 때의 금액이 중요하다.

‘영주 자리를 팔아먹으면 유저들로부터 엄청나게 욕을 먹겠지.’ 사냥으로 얻은 장비들을 처분 하는 것과는 달랐다.

도시와 마을을 통치하는 영주 이기에 아무나 임명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번 한 번만큼 은 눈을 질끈 감고 욕을 먹어 보기로 작정했다.

‘제대로 한몫 챙길 기회가 흔치 않잖아. 어차피 인생은 한 방이야.’ 동시에 서윤은 정반대의 생각 을 했다.

위드가 내세운 명분을 철저히 믿고 있었을 뿐 아니라,이번 일

을 부족한 자금을 모아 아르펜 제국을 발전시킬 기회라고 생각 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좀 더 행복 하게 만들기 위한 돈이 필요해.’

* * *

- 제목 : 아르펜 왕국의 신임 영주를 모십니다.

안녕하세요.

과분하게도 아르펜 제국의 내 정을 담당하고 있는 서윤입니다.

중앙 대륙이라는 영역을 모두 의 힘으로 얻어 냈어요. 도시의 부서진 시설들을 고치고,몬스터 들도 대비를 해야 하는데……. 너무나도 힘이 부족하네요. 그래서 많은 분들의 참여를 필 요로 합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도시를 경영하고 싶은 꿈.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한 추진력.

영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면 충분합니다.

어서 아르펜의 영주에 지원을 해 주세요.

추신. 영주가 되시는 분들에게 는 책임비로 최소 1,000골드를 받을게요.

지원자가 많은 지역에는 가장 많은 책임비를 내신 분에 게 우선권을 드려요. 책임비는 아르펜 제국의 발전을 위해서 아껴서 쓰도록 할게요.

풀죽신교의 게시판에 진심을 담아서 쓴 글.

본인 인증을 위해 갑옷을 차려 입은 서윤이 와삼이를 타고 하 늘을 나는 이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존예……. 이게 현실에 존 재할 수 있는 외모임?

-이 얼굴과 분위기. 로열 로 드에서 매력 10,000 스탯 찍어 도 불가능하다고 방송에서 분석 했었죠.

-50,000 정도 찍으면 비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태어나도 안 되는 미

모입니다. 종족이 달라요.

-사진빨 아닌 거 학생들도 인정했죠. 대학 다닐 때 찍힌 일 상복 사진들 몇 개 올라왔었는 데. 후아.

-흰 티셔츠에 청바지. 거기 서 끝.

-위드가 부럽다. 다 가졌다…….

서윤의 외모에 대한 댓글들만 한동안 계속 올라왔다.

-근데 이거 진짜 풀죽 여신 님이 쓴 글?

-사진 위조 아님?

-위조가 불가능한 사진이잖 아요. 이 아름다움을 포샵으로 가능함?

-인정…….

-하늘에서 찍은 단독 사진이 라 본인이 아니면 올릴 수 없을 것 같네요.

-소심한 브이 자. 왜 이렇게 귀여우신지.

-아. 지금 내용 읽었습니다.

-영주 모집 글이네요.

-책임비 천 골드라니... 여

신님이 얼마나 소박하신지…….

-누구나 지원할 수 있겠네요. 경쟁률이 장난 아닐 것 같지만.

-실제로 천 골드에 결정되는 지역은 거의 폐허 정도겠네요. 돈으로 경쟁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만요.

아르펜 제국의 영주는 모두가 탐낼 만한 자리였다.

위드가 혹독하게 영주들을 쥐 어짠다는 소문도 있긴 했지만 사람들은 잘 믿지 않았다.

아르펜에서 영주 자리를 자발 적으로 내놓을 이들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명예만이 아니라 마을과 도시 를 발전시키는 재미에 푹 빠져 서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 더구나 중앙 대륙의 영주라면 그 지역의 주민들을 비롯해 욕 심내는 이들이 많았다.

-한번 해 볼까요? 모아 둔 재산은 꽤 되는데……. 검사 레 벨 480입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텼죠. 전 재산 올인 갑니다.

-아르펜의 영주가 되고 싶네 요. 멋지고 환상적인 경험이 될 것 같음.

-최소 레벨 500 이상. 혹은 상인들에게 유리한 경쟁일 듯.

-일단 가 봅시다. 영주 아닙 니까!

중앙 대륙 유저들 사이에서 영 주 열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 다. 그렇지만 북부 유저들은 실 망스럽다는 분위기가 컸다.

아르펜 제국이 지금까지 커 온 것은 초보 유저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돈으로만 영주를 뽑는다면 자신 들의 참여가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 *

흑사자 길드의 칼리스는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아르펜 제국에서 영주를 모집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대응을 해야 될 것 같군요.”

빈델,제크트,프로방스,시엔, 파인 등의 길드 내의 유명 유저들이 전부 참석했다.

한동안 흑사자 길드를 떠나 있 던 유저들까지도 헤르메스 길드 가 망하면서 돌아왔다.

“어떤 식의 대응 말입니까?”

빈델이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칼리스가 담담히 말했다.

“얼마를 내더라도 툴렌 지역은 우리가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 까? 오래전부터 우리들이 다스 리던 땅이니까요.”

“맞네요. 툴렌 지역은 남에게 넘겨줄 수 없죠.”

“절대 떠날 수 없는 우리 고향

입니다.”

흑사자 길드의 유저들이 저마 다 한마디씩 했다.

예전에는 명문 길드들이 전쟁으 로 영토를 빼앗고 잃었다면 아르 펜 제국에서는 돈이 있어야 했다. 시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이번 전투에서 열심히 싸운 것도 있는데,위드 님이 툴 렌 지역은 그냥 넘겨주지 않을 까요?”

희망에 차서 한 말이었지만 주 변인들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칼리스부터 고개를 저었다.

“우리 길드가 나서서 열심히 싸우기는 했어도,승패에 결정적 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닙니다. 거 의 위드가 혼자서 해낸 전투이 기도 했고요.”

“하지만……

“툴렌 지역의 가치가 얼마나 큰데 그걸 주겠습니까? 좀 깎아 달라고 말은 해 볼 겁니다. 근데 위드의 성격상 그것도 상당히 무리겠죠.”

칼리스나 흑사자 길드 유저들 은 목돈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어도 상황이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헤르메스 길드에 정복당했을 때는 강제로 고향을 떠나서 떠 돌아다니며 온갖 불이익을 다 받아야 했다.

“모아 놓은 돈을 좀 내더라도 영주의 자리를 얻으면 다시 그 금액은 언젠가 회수할 수 있으 리라고 봅니다. 우리의 활동 근 거지를 확실하게 마련할 수도 있고 말이죠.”

“저도 찬성입니다. 영주 모집이 라는 게 여러 번 벌어지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에 응하 지 않으면 아르펜 제국이 무너 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건데……. 우리 길드가 유지되기 위해서도 영토 가 필요합니다.”

흑사자 길드에서는 결국 돈을 모아서 툴렌 지역의 영주에 지 원하기로 했다.

칼리스처럼 다른 명문 길드들 의 선택도 같았다.

더불어 초창기부터 중앙 대륙 에 존재했던 중소 길드들도 재 결합했다.

영주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이들은 자신들이 모아 놓은 돈 을 몽땅 털어서 넣기로 했다.

* * *

- 최소 50곳에서 몬스터 웨이 브 발생 징조.

- 해안 지대도 붉게 물드는 등 심상치 않음.

라페이는 하벤 왕국의 군사 요 새인 라호냐에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중앙 대륙을 지배하던 제국은 가르나프 전투가 끝나고 다스리 는 영토와 인구가 줄어들며 왕 국으로 강등당했다.

심지어 아렌 성이 케이베론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력을 약화 시키는 결정타!

그럼에도 정보망들은 남아 있 어서 대륙의 소식이 들려왔다.

“대륙 전체가 위험하겠군요. 몬 스터 웨이브라……. 이 정도까진 생각하지 못했는데,케이베른이 대륙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 을 것 같습니다.”

“위드의 야망이 시작부터 흔들 릴 테죠. 유저들이 자기들의 고 향으로 돌아가기도 전입니다. 그 리고 도시마다 남은 병력도 거 의 없고요.”

정보대의 유저들이 나누는 대 화를 들으며 라페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일이 이대로 진행되면 위드는 절대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중앙 대륙에만 천 개 이상의 도시들이 있었으니 이를 전부 지켜 낸다는 건 무리였다.

헤르메스 길드가 의도치 않게 가르나프 평원에 모든 군사력을 쏟아부음으로써 요새와 성벽에 병력이 텅텅 비었다.

교통의 요지에 있는 몇 개의 도시들이 폐허로 변하면, 몬스터 들은 방어벽이 뚫린 것처럼 마 구잡이로 확산되어 갈 것이다. ‘케이베른이 에바루크 성을 비 롯해서 주요 도시들을 파괴하는 것도 예정되어 있지. 위드는 감 당하지 못할 거야.’

헤르메스 길드의 세력은 하벤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로열 로드에서 최고 수준의 유저들과 영주들은 불만이 가득했 지만 당장 발등에 더 큰 불이 떨어진 건 아르펜 제국이었다. 정보대의 소니아라는 유저가 말했다.

“유저들이 우리 헤르메스 길드 에 분노하지 않을까요?”

수많은 도시들이 부서지고,베 르사 대륙이 파괴당할 테니 당 연한 걱정이었다.

라페이는 실소를 머금었다.

“우린 더 먹을 욕이 없어요.”

"....."

“모두가 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실행한 계획입니다. 위드나 유저들도 실패를 겪어 봐야 되 겠지요.”

“실패요?”

“악룡 케이베른은 큰 피해를 입히고 말 겁니다. 중앙 대륙, 북부 대륙이 크게 파괴되면 사 람들은 위드에 대한 헛된 희망 을 버리게 되겠죠.”

라페이도 마지막 도박수를 던 진 것이었다.

케이베른에 의해 아렌 성이 파 괴되기도 했지만,막다른 길에 몰린 이상 이 정도의 악화는 아

무것도 아니다.

“일을 저지른 건 우리지만 어 찌 되었든 수습해야 하는 쪽은 위드가 될 겁니다.”

* * *

각 방송국들은 아르펜 제국의 영주 선정을 속보로 알리고 생 중계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 이틀 뒤의 자정부터 대지의 궁전에서 공개적으로 영주를 선 정한다고 합니다.

- 벌써부터 몇몇 도시들에는 영주 지원을 선언한 유저들이 꽤 많아요.

- 역시 그렇죠. 대도시들은 경 쟁이 정말 치열할 것 같아요.

CTS미디어나 KMC미디어 등 에서도 내부 회의를 거쳐 영주 를 신청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중립을 지켜야 하는 방송국이었기에 어느 세력에 속 하는 게 곤란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아르펜 제국이 북부 대 륙과 중앙 대륙의 대부분을 먹어

치운 이상 기술적인 중립은 의미 가 없게 되었다.

도시를 가지고 있으면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었고, 다른 방송국들과의 경쟁 때문에 라도 주요 도시의 영주를 신청 하기로 했다.

- 흑사자 길드에서는 툴렌 지역 을 사수하기로 공표를 했네요. 오 주완 씨,다른 사람들은 이쪽에는 아예 참여하지 말란 뜻 같아요.

-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흑사자 길드의 뜻대로는 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 어째서요? 좀 쇠락하긴 했 지만 흑사자 길드에서도 모아 놓은 돈이 꽤 많지 않나요?

- 그래도 툴렌 지역 전체는 욕심이죠. 상당한 부자들. 그리 고 부유한 길드나 개인들도 지 원을 할 겁니다.

- 툴렌 지역은 흑사자 길드의 영토였는데요.

- 아르펜 제국이 통치하는 이 상 예전의 영토라는 건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무력 으로 빼앗는 일이 흔히 벌어졌지만, 아르펜 제국에서는 영주로 임명되면 큰 문제가 없는 한 유 지가 된다고 합니다.

- 무력이 없어도 영주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이군요.

- 네. 아르펜 제국의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러니 누구든 책임 비……. 아마도 막대한 금액이 될 테지만 이것만 낼 수 있다면 영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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