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55권 : 7. 라면의 날 (395/520)

7. 라면의 날

드래곤의 레어를 성공적으로 털고!

이현은 막대한 장비들을 처분해야 한다는 행복한 고민에 잠겼다.

“이걸 한꺼번에 전부 팔아먹긴 무리고…….”

경매 사이트마다 거래가 많이 줄어 있었다. 드래곤의 장비들이 풀린다면 즉시 사기 위해서였다.

“당장 돈을 많이 벌면 숟가락 올리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겠지.”

이현은 도둑 영화를 볼 때마다 나눠 먹는 문제로 팀이 깨지는 걸 보며 교훈을 얻었다.

“마무리를 잘 지어야 해.”

보물들을 정리하는 일은 천천히 진행하기로 했다. 이미 챙겨 놓은 보물들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드워프들과 타격대, 마판 상단에 나눠 주고도 절반은 넘게 남을 테니까.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군.”

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평소에 사고 싶었던 것들도 사고…….”

두툼한 겨울 점퍼를 구입하리라.

시장 옷들은 아무래도 방한 기능에서 백화점에서 파는 브랜드 점퍼들보다 못했다.

“세일을 최대한 하는 걸로 찾아보면 크게 안 비싸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남은 돈으로는 전부 부동산을 사야지.”

결국은 부동산!

이현이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서 인터넷을 하는데 검색 순위가 보였다.

- 드래곤 레어 빈집 털이

- 악룡 케이베른

- 울타 산맥 산불

- 오베론 죽음

- 서윤 몸매

- 케이베른 레어

- 서윤 눈코입

- 서윤 키

- 드래곤 레어 보물

- 서윤 목소리

검색어 대부분을 휩쓴 드래곤 레어의 빈집 털이.

서윤의 경우에는 일 년 내내 대부분 검색어 상위권에 있었으니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근데 오베론 님이 죽었나?”

관련 동영상도 있었는데, 몬스터들에게 고립된 운송 팀 드워프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다.

동료들을 살리고 결국에는 사망.

희생의 화로를 사용해서 능력을 크게 높여 놓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을 살렸다.

몬스터들을 집중시킴으로써 다른 운송 팀의 무사 도주를 돕기도 했다.

“이분은 여기서 또 공을 세우고 있었구나.”

이현은 오베론이 고마우면서도 찝찝했다.

‘저렇게 살면 인생이 재미가 있을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야 뿌듯한 게 아니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생 유형이었지만, 어쨌든 고마운 건 고맙게 느껴졌다.

“레어에서도 그렇고 오베론 님의 공이 가장 컸다는 건 인정해야지. 이러면 최소한의 양심이란 게 있는데. 장비 두 개로 때울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떤 보상을 해 줘야 할지 크게 고민이 되었다.

이현은 일단 성의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방송국을 통해 희생의 화로를 썼던 오베론과 드워프들의 연락처를 받았다. 그리고 직접 문자를 보냈다.

- 안녕하세요, 위드입니다. 이번에 드래곤 레어에서 크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움을 마땅히 표현할 방법이 없는데. 흠흠.

내일 식구들끼리 라면을 먹기로 했습니다. 맛있게 담근 김치와 직접 빚은 만두도 나옵니다. 오렌지주스도 있죠.

생각 있으시면 와서 드실래요?

이현이 직접 끓여 주는 라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방송국 사람들이 들었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후한 대접이었다.

물론 단체 문자를 받은 유저들이 많이 참석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바쁜 사람들일 텐데. 설마 라면 먹으러 오란다고 진짜 오겠어? 문자로 성의나 보이는 거지.”

특히 오베론은 다른 유저들과는 다르게 외부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로열 로드에서는 길드를 창설하고 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지만, 현실에서 인터뷰나 방송 출연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에 유저들의 답장이 왔다.

- 영광입니다, 꼭 가겠습니다.

- 이런 날이 다 오는군요. 죽은 게 조금도 아쉽지 않습니다!

- 평생 뵙고 싶었습니다.

- 진심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반드시 가겠습니다.

- 회사에 휴가 신청했어요. 부장님이 흔쾌히 허락해 주심. 사인 한 장만 해 주세요.

- 당장 달려…… 아, 내일이군요.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달려가겠습니다, 슝슝.

물론 한국에 살지 않는 유저들도 있었다.

- 항공편 예약했습니다. 파리를 거쳐서 내일 새벽 한국에 도착합니다. 기대되네요.

- 저 엄마랑 같이 가도 돼요? 엄마도 가고 싶어 하시는데. 여긴 모스크바입니닷.

- 일본입니다. 인형 들고 갈 테니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와이번, 빙룡을 포함한 조각 생명체 45종 세트 전부 가지고 있어요!

- 터키에서 가요. 지금 바로 출발합니다. 무척 두근거리네요.

이현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냥 집에서 라면이나 끓여 먹지. 이걸 오란다고 정말 오네.”

사람들이 어지간히 눈치도 없었다. 그리고 오베론의 답장도 뒤늦게 왔다.

- 문자 확인이 늦었네요. 바로 비행기 타겠습니다.

도무지 푸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람들 평소에 라면도 못 먹고 살았나?”

* * *

뜻하지 않게 일이 커진 라면 파티!

이현은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서 서윤과 같이 시장으로 걸어갔다.

“점심에 손님들이 오면 라면을 끓여 줘야 돼.”

“알아요. 방송에서 봤어요.”

“방송?”

“네. CTS미디어에서 속보로 떴어요. 드워프들에게 라면 파티를 열어 준다고요.”

“…….”

집에서 라면 끓여 주는 일까지 속보로 전달하는 방송국!

이현은 유명해진 이상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피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성의 없이 그냥 라면만 끓여 줄 수는 없게 되었지.”

“소고기도 사야겠죠?”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라면에 이것저것 넣어 주자. 아낄 때는 아껴야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밥으로 인색하게 굴면 안 된다고 했어.”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의 추억이 많진 않았다.

그렇지만 집에 손님들이 오면 엄마가 요리를 잔뜩 차려 줬던 기억이 났다.

“바지락도 사고…… 꽃게도 조금 사자. 꽃게 국물에 끓여 주면 기가 막힐 테니.”

“생선회를 뜨는 건 어때요? 매운탕도 끓여 주게요.”

“다시 말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냐.”

이현은 매정하게 잘랐다.

참석 의사를 밝힌 유저들만 무려 28명이나 되었으니까.

둘은 시장을 돌면서 생활 용품이나 식자재들을 구입하며 일상에서의 데이트를 즐겼다.

* * *

이현은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이혜연의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

“다른 드워프들도 그렇지만, 오베론 님 오면 키 작다고 놀리면 안 돼.”

“알았어, 오빠.”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 외모를 가지고 놀리면 안 되는 거야.”

“나 안 그래. 그리고 드워프는 종족이 작은 거지. 실제 키는 상관없잖아.”

“방송 출연 안 하는 거 보면 몰라? 분명히 나보다 훨씬 키 작고 못생겼을 거야.”

“이상하네. 사람이 착해서 그렇지 리더십도 있고, 사람들을 이끄는 태도를 보면 아닐 거 같은데.”

“어허…….”

“조심할게.”

이혜연은 이해가 안 되는 논리였음에도 일단 수긍을 했다.

가벼운 잔소리를 잘 받아 주지 못하면 10시간짜리로 이어질 여지가 있었다.

오래전에 나쁜 친구들과 밖으로 나돌던 시절에 끝까지 반항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었다.

그 아픔이 대단했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일에 비하면 약과였다.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 매일 옆에서 10시간씩 잔소리를 하는 이현!

“우린 엄마, 아빠가 다 없잖아! 거지꼴로 다른 애들 보기 창피해서 얼마나 학교 다니기 힘들다고!”

거칠게 말대꾸를 해 봐도 효과가 없었다.

일단 시작된 잔소리는 과정과 결과까지 정해져 있었다.

“가난한 게 창피해? 그럼 아직 좀 더 버틸 만한 거야. 네가 어릴 때는 기저귀를 갈아 주고 매일 업고 다녔었는데. 다 잊어버렸구나. 똥오줌도 그렇게 못 가렸었는데.”

기억도 안 나는 아기 때부터 시작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학교를 보내기 위해 책가방이나 헌 옷을 주우러 다녔던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옛이야기에 지금의 행동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하나하나 분석해 가면서 잔소리를 펼쳤다.

과거와 현재,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승전결까지 갖춘 잔소리 폭격!

‘휴, 엄청나다.’

이혜연은 지쳐서 잠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잔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5일 정도 잔소리를 들었을 때, 이혜연은 생각했다.

‘내가 의외로 똑똑할지도? 무슨 잔소리를 하는지 다 외울 지경이야.’

그렇게 20일을 잔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아파 왔다.

‘차라리 맞는 게 속이 편해. 잔소리를 끊임없이 들으니 진짜 죽을 것 같아.’

이혜연은 그날 이후로 완벽하게 변했다.

나쁜 친구들은 전부 끊고, 공부도 열심히 하며 잔소리를 할 기회 자체를 제공하지 않았다.

“너…….”

“이번 달 영어 시험 98점 맞았어. 한 개 틀렸는데. 다음 시험에는 100점 맞을게.”

“아는 문제도…….”

“응. 두 번, 세 번 확인해서 실수를 줄일게.”

“친구들은…….”

“응, 학교에서 착실하게 공부하는 애들이야.”

“공부만…….”

“공부만 하지 않고 취미 생활도 다양하게 하고 있어. 책도 읽고. 운동도 빠지지 않고 해.”

사람의 영혼을 바꿔 놓은 잔소리!

그때 이후로도 몇 번씩 이현이 잔소리를 하는 꿈을 꿀 때마다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도 잔소리를 들을까?’

이혜연은 오빠의 실체를 알게 되면 서윤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거라 걱정했다.

몇 마디만 들어도 질리는 게 잔소리인데, 서너 시간씩 쏟아 낸다면 누구라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솔직히 다른 남자들도 많은데. 언니가 떠나고 나면 오빠도 크게 상처를 받겠지?’

언제 서윤에게도 잔소리가 시작될지 모른다.

울어도 그치지 않고, 반성을 해도 소용이 없는 무자비한 잔소리의 폭격.

그 조마조마함이 매일 이어져 내려왔다.

이혜연은 걱정되는 마음에 서윤을 찾아갔다.

“언니, 오늘은 오빠를 경계해야 돼요.”

“응?”

“드워프들한테 라면 끓여 주잖아요. 오빠 기분이 아주 안 좋을 거예요.”

“많이 그래?”

“제가 동생이라서 아는데 조심해야 돼요. 특히 남자들한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 걸지 마세요. 우리 오빠가 질투심이 굉장히 많거든요.”

“여자 친구 때문에 질투한 적 있었어?”

“여자를 사귄 자체가 없었지만…… 딱 보면 알잖아요. 속 좁고 질투심이 굉장히 많을 거예요.”

서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 아니야.”

“진짠데. 거기다 이건 진짜 비밀인데. 본인 스스로는 굉장히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서 가장 멋진데?”

“…….”

이혜연은 잔소리를 2시간 정도 들은 듯한 혼란이 찾아왔다.

‘콩깍지에 파묻혔구나.’

그럼에도 최후의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은 오빠가 잔소리가 아주 심해요.”

“좀 더 잘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말이잖니. 난 다 이해하는데.”

이혜연은 어릴 때부터 오빠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다는 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둘이 달달하게 지내는 모습들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살려면 빨리 독립해야 되겠어.’

TO BE CONTINUED

이현의 집 앞에는 방송국 카메라들이 수십 대나 기다리고 있었다.

한류 스타가 공항을 지나갈 때나 볼 수 있는 장면!

“거기 비켜요!”

“자기 촬영 구역 지켜 주시고요.”

기자들은 이현의 집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들어갈 때마다 인터뷰를 했다.

“드디어 왔군요. 저는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했습니다. 한국 라면은 처음인데…… 굉장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은 특별하고 멋진 하루죠.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두고두고 자랑할 일이 생겼습니다. 아빠가 위드 님이 끓여 주는 라면 먹는다! 참, 제 아이들의 소원은 위드 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제 꿈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굉장히 맛있는 라면을 먹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됩니다.”

그렇게 참석자들이 인터뷰를 마치고 점심 전에 전부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오베론의 존재감은 단연 돋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베론입니다.”

금발의 청년이 웃으면서 말을 건네 왔다.

잡지나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으로 재수 없게 잘생긴 미남의 얼굴이었다.

“정말 오베론 님이신가요?”

“맞습니다. 위드 님을 뵙게 되어서 굉장히 영광입니다.”

“한국어를 잘하시는데요?”

“취미로 배웠습니다.”

“취미요? 그럼 다른 나라 말도 할 줄 알아요?”

“예. 중국어나 일본어, 프랑스어도 요즘 할 줄 압니다.”

잘생긴 외모를 가진 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오베론!

이윽고 마당에 상을 펼치고 사람들이 줄줄이 앉아서 이현이 끓여 주는 라면을 먹었다.

“잘 먹겠습니다.”

꽃게와 여러 종류의 해산물, 생선 기름으로 국물을 낸 이현의 특제 라면.

문제가 있다면 너무나도 맛있다는 점이었다.

“앗, 뜨거!”

“미치겠네. 뜨거운데 맛있어서 식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스테이크? 이런 맛이라면 평생 그냥 라면만 먹고 살아도 될 것 같다.”

국가별 입맛 취향도 없애는 맛이었다.

미각을 완벽하게 만족시킨 후에 목구멍으로 내려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안겨 준다.

- 그래, 수고했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지?

인생은 힘든 일도 많지만 보람과 기쁨도 생길 거야.

앞으로도 힘내자.

국물이 영혼을 가지고 뜻을 전달해 주는 것만 같은 그런 미친 맛!

국물 한 모금에 인생의 깊이가 담겨 있었다.

2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릇을 비우고 나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치, 단무지도 깨끗하게 비워졌다.

“혹시 라면이 더…… 없……나요?”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이 순간 라면보다 더 중요한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한 그릇이라도 더 먹고 싶었다.

이현의 미간이 꿈틀거리긴 했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멀리서 비행기까지 타고 왔는데 한 그릇만 준다면 얼마나 매정한 일인가.

“기다리시면 더 끓여 올게요.”

“만세!”

“고맙습니다, 위드 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다시 끓이는 라면.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두 그릇, 세 그릇을 먹어 치웠다.

이현의 미간이 점점 좁혀져서 달라붙고 있었지만, 그들은 라면이 올 때마다 바로 면발을 후후 불어서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배 속에 뜨끈한 라면이 들어가자 슬슬 말문도 트였다.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그래도 로열 로드에서는 친한 이들이었다.

“라면을 먹으니 위드 님이 조각사로 시작했던 게 아쉽지 않아요?”

“맞아요. 요리사를 했으면 다 쓸어 버렸겠죠.”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라면 맛을 보면 다 탈주했을걸요.”

“로열 로드에는 라면이 없잖아요? 해물탕은 끓이겠지만.”

“위드 님이잖습니까. 밀가루를 반죽해서 면을 뽑아내고, 국물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렵지도 않죠.”

“로열 로드에서 좋은 재료들로 요리를 하면 그냥 최고겠네요.”

이현의 요리 실력은 정평이 나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잘하는 게 라면이었다.

어릴 때는 매일같이 제일 싸게 파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침저녁으로 먹으면서 맛을 내기 위한 고민을 수없이 했고, 면발을 탱글탱글하게 유지하기 위해 끓이면서 젓가락으로 휘젓는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한 봉지에 최고의 집중력을 바쳐서 끓였던 라면.

그 정수가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것이었다.

* * *

한 그릇씩이면 끝날 줄 알았던 라면 파티!

개개인이 3봉, 4봉을 넘어 7봉까지도 먹어 치우는 괴물들도 있었다.

중간에 라면이 떨어져서 이혜연은 마트에서 무려 두 박스나 사 왔다.

“캬…… 먹방을 찍어도 되겠다.”

“한센 님. 네덜란드 분이라고 했지. 정말 많이 드신다.”

그렇게 이현을 슬프게 만드는 라면 파티가 끝나고는 서윤이 오렌지주스를 나눠 주었다.

“맛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직접 간 거예요.”

“이런 영광이…….”

모인 사람들은 2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남자였다.

그들은 감격하며 황송하다는 듯이 두 손으로 오렌지주스를 받아 마셨다.

이현은 라면을 100봉도 넘게 끓여서 피곤했지만 로열 로드에서는 오베론으로 활약하는 로페스의 옆에 앉았다.

로페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정말 아늑하고 정겨운 집이군요.”

“직접 지은 곳이 많아서요.”

이현은 틈틈이 집을 손보긴 했었다.

나무와 타일을 사서 단장도 했고, 닭장이나 개집도 만들었다.

작은 곳 하나까지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100% 만족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주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바로 옆에 지어진 서윤의 아름다운 저택을 본다면 누구나 다 공감할 것이다.

“저도 집을 짓고 싶었는데 아직 못 지어 봤습니다.”

“그래요? 하긴…… 누구나 땅을 사서 집을 짓기는 쉬운 게 아니죠.”

이현이 공감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반지하 월세방에 살 때만 해도 자신도 집이 한 채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품었다.

너무 커서 현실처럼 와 닿지 않는 소원을.

“가문에서 쭉 내려오는 오래된 집에서 살고 있거든요.”

“몇 년이나 되었는데요?”

“150년 정도 되었습니다.”

이현은 로페스의 말을 들으며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찾아왔다.

보통 150년의 집이라면 허물어지기 직전의 폐가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문에서 내려오는 집이라는 미묘한 어감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혹시 땅 면적이 200평. 이런 거 아니죠?”

“평이요? 한국식 단위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290에이커 정도 됩니다.”

“290에이커라…… 옛날 집이라 그런지 좀 숫자가 많긴 하네요.”

이현이 즉시 휴대폰을 꺼내서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충격적인 수치가 나왔는데, 자그마치 35만 5천 평!

“290에이커라고요?”

“네.”

“그 넓은 땅에 집을 지었어요? 농사도 같이 짓나 보죠?”

“말을 키우기는 합니다. 그리고 활주로가 있어서요.”

“활주로요?”

이현은 뭔가 집에 있어서는 안 될 어색한 단어를 듣고야 말았다.

“집에 비행기가 있어요?”

“사진이 있는데 한번 보실래요?”

로페스는 휴대폰에 저장된 집 사진을 보여 줬다.

한국의 주택들처럼 올망졸망하게 꾸며 놓은 마당이 있는 그런 집이 아니었다.

항공 촬영으로 하늘에서 찍은 사진에는 활주로와 3대의 비행기, 엄청난 면적의 정원과 대저택이 있었다.

“여기가 집이라고요?”

“플로리다나 LA, 샌프란시스코에도 집이 있지만 이곳이 제가 사는 본가입니다.”

미국 대부호로서의 위엄을 자랑하는 로페스!

‘이러니 방송 출연을 할 필요가 없지.’

소소하게 인터뷰 비용이나 광고 출연료를 받아서 어디에 쓰겠는가.

비행기에 기름 한 번 넣기도 힘들 텐데.

‘이렇게 부자면 나도 200원 비싼 소금 사고 후회 안 했지. 돈을 왜 아껴. 아무리 써도 다 쓰질 못할 텐데…….’

이현은 아랫배가 살살 아파 오는 걸 참기 힘들었다.

“근데 라면을 먹으러 한국까지 왔어요?”

“하하, 예. 초대를 해 주셔서…….”

“집에 라면 없어요?”

아무리 부자더라도 위드에겐 공짜 라면을 7봉이나 먹은 원흉일 뿐!

* * *

위드가 다시 로열 로드에 접속했을 때는 대륙의 정세가 한층 위험해져 있었다.

드워프들의 왕국 토르는 그동안 케이베른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망했어, 내 광산…….”

“내 집이 무너졌다고.”

당장은 살아남았더라도 케이베른의 괴롭힘이 시작되었으니 드워프들은 토르 지역을 떠나서 강제 이주를 시작했다.

레어의 용아병들이 대륙의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몬스터들을 더 많이 이끌고 덤벼 오고 있다.

서윤은 드워프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 조치를 취하면서 이들을 포용해 냈다.

“지도를 바꾸어 버리는 드래곤이라…… 과연 이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드워프 종족 퀘스트가 발생한 것도 그렇고, 지금의 상황도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다.

“대도시들이 부서지고, 재난과 몬스터들의 증가.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지만 언제쯤 끝이 날까.”

엠비뉴 교단은 과거 베르사 대륙을 완전히 정복하려고 했었다.

위드가 퀘스트를 통해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상황이 심해졌다면 대륙이 그들에게 장악될 수도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막긴 했겠지만…… 아마 나도 특수한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이겨 내지 못했겠지. 엠비뉴 교단의 숨겨진 힘 같은 게 나오면 헤르메스 길드도 꽤 고전을 하지 않았을까?”

두 세력들끼리 제대로 맞붙었다면 그것도 나름 볼만한 광경이었겠지만, 엠비뉴 교단은 대륙의 평화를 확실하게 위협했었다.

이번에도 드래곤에 의해 대륙이 파괴되는 걸 누구도 원치 않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로열 로드에서는 말 그대로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필 지금이야. 이제 좀 먹고살 만해졌는데.”

정말 드래곤을 막지 못하면 파국이 올지도 모른다.

용사 퀘스트가 뜬 것은 우연이 아니며, 악룡 케이베른을 막지 못하면 낙원은 사라지고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리라.

무거운 생각들이 위드의 머릿속을 차지한 것도 잠시였다.

- 마판 : 오셨습니까! 물건들은 지금 울고르 고원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케이베른의 레어에서 훔친 엄청난 보물들!

위드의 입가가 슬며시 벌어졌다.

“크흐흣. 잘 챙겨 놓았겠죠?”

- 마판 : 물론입니다. 다른 마음을 품은 드워프들도 있었습니다만.

드래곤의 보물이 워낙에 막대하다 보니 욕심을 가진 드워프들이 있었다.

레어에서도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고, 산불까지 일어난 틈을 타서 보물을 조금씩 챙긴 이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영상을 확인한 후 적발이 되었다.

그럼에도 운 좋은 어떤 이들은 안 걸렸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가겠습니다.”

TO BE CONTINUE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