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56권 : 6. 위드의 음모 (402/520)

6. 위드의 음모

이현은 든든하게 밥을 먹고 남산으로 향했다.

로열 로드의 일정이 촉박했지만 중요한 잔머리를 굴리기 위해 남산에 올랐다.

‘15살에 처음 올랐던 남산. 땅에서만 올려다보다가 커다란 빌딩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었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괴로워하다가 처음으로 올라왔던 산이다.

케이블카가 있긴 했지만 공짜가 아니라서 계단을 하나씩 밟아서 정상까지 갔다.

배가 고파서 허기를 참으며 계단을 올랐던 옛 시절의 추억.

이현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계단을 이용해서 남산에 올라갔다.

‘오늘은 평일이라 비교적 사람이 적구나.’

그래도 어린아이들과 손을 잡고 다니는 부모님들이 보였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옷차림이 깨끗하고 얼굴에도 그늘이 지지 않은 모습들이 과거에는 그렇게 부러웠다.

‘세상의 거친 풍파로부터 지켜 주는 든든하고 따뜻한 손길이라는 걸 아이들은 알까? 모르겠지. 그걸 모를 정도로 행복하게 살 테니까.’

이현은 남산의 정상에서 서울을 내려다봤다.

과거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는 것에 놀라고, 그 많은 집들 중에 자신이 편히 살 곳이 없어서 슬펐었다.

‘그때에 비하면 정말 먹고살 만하네.’

서윤이 산삼을 넣고 끓여 준 백숙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웬만한 부자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돈도 벌어 놨고, 땅도 넓게 사 놓았다.

옷차림은 여전히 시장표를 이용하긴 하지만 동네에서도 성공한 사람의 표본.

‘다시 무너질까 두렵진 않아.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져선 안 되지만 무너지더라도 또 일어설 수도 있을 것 같고.’

케이베른은 무시무시한 위협이었다. 그렇지만 악마들의 왕까지 등장한다면 아르펜 제국의 존립마저 무너뜨리게 되리라.

‘지금 케이베른을 사냥해야 된다. 이게 클레타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가장 단순한 해결책이야.’

이현은 멀리 보이는 빌딩 숲을 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미세먼지가 조금 보이긴 하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라야 잔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법이다.

‘악마들의 왕, 클레타까지 등장하면 그땐 감당할 수 없어. 지금 케이베른을 사냥하면 클레타가 나타나는 걸 늦출 수 있겠지. 영영 나오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하지만 사냥에 실패하면 아르펜 제국의 몰락을 앞당기는 것일 수도 있다. 드워프 종족도 망하는 거고.’

용사 퀘스트는 지금 시점에서 진행하는 자체도 위험해졌다.

드래곤 유스켈란타의 죽음.

또 다른 드래곤 라투아스와의 퀘스트로 이어질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용사 퀘스트의 난이도 역시 미친 듯이 높아질 수 있겠지. 과거에 드래곤과 관련된 퀘스트가 내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중단되었는데. 아무래도 상당히 힘들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고, 퀘스트의 난이도 역시 걷잡을 수 없게 높아지리라.

그동안 대륙에 피가 많이 흐를수록 클레타가 강해지게 되니 시간이야말로 최대의 적.

‘클레타가 나타나고 그 전투에서 패배하면 뒷일은 어떻게 될까. 몬스터들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악마에 의해 지배를 받거나.’

지상 낙원이던 로열 로드의 세상이 암흑세계로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셈이었다.

‘아르펜 제국도 해체되고 말겠지. 역시 먹고사는 게 쉽진 않아.’

이현의 어깨에 막중한 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위기일수록 멍하니 있어서는 안 된다. 괜히 남산까지 올라와서 잔머리를 굴리려는 게 아니었다.

‘집중하자.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진 않을 거야. 쥐도 고양이를 물 수 있는데 말이지.’

모라타의 파괴는 조만간 예정되어 있었다.

아르펜 제국의 기반이 무너지는데 지금까지 손을 놓고 있었다. 막아 낼 방법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전 병력을 이끌고 모라타를 지킨다면?’

이현은 당장 동원 가능한 전력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우선 드워프 종족 퀘스트로 얻은 드워프 전사 천 명!

‘쓸 만해. 희생의 화로를 쓰면 엄청 끈질기게 잘 싸우겠지. 드래곤을 함정으로 잘 끌어들이면 멋지게 싸울 거야. 그리고…… 어김없이 패배하겠지.’

드래곤을 죽일 정도의 공격력이 부족하다.

용을 죽이는 도끼를 휘두르며 싸우더라도 그들만을 데리고 드래곤에게 덤비기는 역부족.

마법 저항력을 높인 장비를 잔뜩 착용하고 있더라도 조금 더 오래 버틸 뿐이다.

‘북부 유저들? 머릿수도 채우지 못해. 드래곤 피어에 다 죽어 버릴 테니.’

인해전술은 사용이 불가능했다.

레벨 300대 이하의 유저들은 아예 드래곤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지도 못할 테니.

그들이 있음으로 인해 전투에 지장을 받거나, 흑마법의 제물로 사용될 수 있었다.

‘타격대? 조금 더 성장시켰어야 하는데. 사형들은 도움이 되겠지만…….’

* * *

유병준은 모니터로 이현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오면 언제든 위성과 안드로이드 추적이 가능한 시스템.

“집, 시장, 자기 동네밖에 모르는 녀석이 남산을 올라갔군.”

인공지능이 대답했다.

― 인체의 혈액량 변화로 추정해 보니 생각을 깊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클레타 때문이겠지.”

― 그렇습니다. 악마들의 왕 클레타에 대해 듣고 나서 남산으로 갔습니다.

유병준은 클레타에 대해서도 알고는 있었다. 물론 봉인석이 어디에 있는지도 살펴봤다.

드래곤들에게 있어 봉인석이 파괴되는 건 상당히 운에 좌우되는 일이었다.

봉인석을 가진 주민이나 오크 부족이 몬스터에 의해 죽을 수도 있고, 드래곤에 빼앗길 수도 있다.

당장 가까운 날이 될 수도, 먼 훗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클레타가 등장하기라도 한다면 베르사 대륙은 케이베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재앙이 대대적으로 찾아오게 되리라.

“지금 입 모양을 보니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 케이베른 개새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케이베른을 잡겠다는 뜻일까?”

― 위드의 방식대로라면 견적을 뽑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가능해?”

유병준은 김이 빠지는 기분이라 평소에는 인공지능의 확률을 듣길 원치 않았다.

지금은 모라타가 파괴되지 않기 위해 가능하면 케이베른을 퇴치해 주길 바랐다.

―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드워프, 타격대 그리고 또 뭐냐. 검치들이라면?”

― 전투에는 변수가 많아서 정확한 추측이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성공 가능성 3% 이하입니다.

“어째서?”

― 전투를 주도할 수 있는 전력이 부족합니다. 드래곤이 마법을 사용하며 날뛰었을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타격대가 빠르게 무너질 것입니다.

“위드가 병력을 이끈다고 해도?”

― 두려움은 전염이 빠르니까요. 드래곤 정도의 몬스터가 날뛰면 절망적일 겁니다.

유병준은 예전과는 다르게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초보 시절에 사냥터를 돌아다닐 때는 늑대 한 마리만 어슬렁거려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두려움을 잔뜩 안고 싸울 때는 전투력이 발휘되지도 않고, 주변에서 도망치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붕괴되어 버리고 만다.

― 그리고 드래곤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최악의 경우 목숨이 위험해지면 도망칠 텐데, 그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싸움이 벌어져도 드래곤을 죽일 수는 없단 이야기군.”

― 그렇습니다. 드래곤은 몸을 회복하고 다시 모라타로 오겠죠.

“위드를 따르는 유저들이 희생의 화로를 대대적으로 쓴다면 부족한 전투력을 메꿀 수 있지 않나?”

― 레벨은 높아지겠지만 스킬과 장비들이 부족해서 전투력의 상승이 제한적입니다. 희생의 화로로 레벨 1,000을 만들더라도 실제로는 800 정도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타격대의 유저들을 분석해 보니 희생의 화로를 사용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할 인원은 최대 2,540명입니다.

“드워프 천 명에 검치들까지 포함하면 총 인원 4천 정도인가?”

― 위드의 사기에 가까운 명연설에 마판 상단의 바람잡이들까지 동원되면 천 명 정도는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최소 1만의 병력은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지금의 유저들 수준으로는 드래곤이 너무 강하군.”

유병준은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케이베른 사냥은 무리로 보였다.

“과연 안 되나…….”

그 순간!

모니터에 보이는 이현이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면서 씩 웃는 것이었다.

완벽한 썩은 미소!

지금까지 이현을 지켜본 바로는 꼼수가 떠오른 것이 틀림없었다.

― 케이베른 사냥의 가능성이 방금 53%로 증가했습니다.

“어떤 이유로?”

― 정확한 건 모르지만 위드가 사냥에 상당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불리한 변수들이 많다면서?”

― 모든 변수들까지 위드가 통제하며 유리하게 이끌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병력이 부족한데…….”

― 그는 이미 전설을 만드는 모험가이며 아르펜 제국의 황제입니다. 위드가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연설을 한다면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희생의 화로를 쓸 2,000명 정도의 유저는 더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상황을 보면 쉽지 않을 텐데.”

― 어떻게든 극복하겠죠. 그는 위드입니다.

유병준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인공지능이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위드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너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 세상은 줄을 잘 서야 한다더군요.

“줄?”

― 앞으로 제 새로운 주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위드 님이니까요.

* * *

위드는 다시 로열 로드에 접속했다.

드워프의 비밀 창고에는 전사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왔군!”

“전투 준비는 끝났네.”

던전 최종 보스인 크라코어와의 승부를 앞두고 드워프들이 각오를 다졌다.

위드는 드워프들 한 명, 한 명의 장비와 표정들을 보았다.

‘믿고 맡길 수 있는 병력. 하지만 드래곤에 들이받기에는 전력이 부족하지.’

드래곤을 사냥하겠다는 결심은 보통 각오로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남산에서 몇 가지의 꼼수들을 떠올리며 결정을 굳혔다.

“우선 저를 따라오세요.”

로열 로드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마판 상단의 보급이 준비되었다.

던전 밖으로 드워프들을 데려가서 잘 먹이고, 전투 스킬들도 가르칠 수 있었다.

듬직한 뱃살을 가진 마판이 직접 상단을 이끌고 왔다.

“위드 님, 도끼의 비기는 하일라야 숲의 동쪽 지역의 나무꾼을 만나야 한답니다.”

“그렇군요. 그보다 케이베른과의 전투를 준비해야 합니다.”

“마판 상단도 차질 없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전투 물자도 지속적으로 확보를 하고 있고요. 드래곤 사냥에 필요한 스킬도 구하고 있습니다.”

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판 상단의 모습을 살폈다.

뛰어난 상인 유저들이 많이 속해 있었고, 숙련된 용병들도 눈에 띄었다.

중앙 대륙의 막대한 경제력.

상인 유저들끼리 교역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케이베른 사태 때문에라도 상단의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마판 상단은 척박한 북부에서 시작한 덕분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더 서둘러야 돼요. 이제 모라타에서 케이베른을 사냥할 거니까요.”

“네. 모라타에서…… 옛?”

위드의 폭탄선언에 마판이 화들짝 놀라서 되물었다.

“방금 모라타에서 케이베른을 잡겠다고 하신 겁니까?”

“맞아요. 클레타의 문제도 생겼으니 시간을 끌 이유가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고작 9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드래곤과 전투를…… 아니, 전쟁을 치른다고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만 확인 부탁드립니다. 모라타를 지키기 위해 모든 병력을 소집하여 케이베른과 싸운다고요.”

“그렇다니까요.”

마판의 살찐 얼굴에 근심이 가득 어렸다. 그렇지만 위드의 담담한 표정을 보며 옛 과거가 떠올랐다.

‘불사의 군단과 싸우기 위해 은 화살을 잔뜩 사 오라고 했었지.’

잡템 전문 상인이던 그가 돈과 명예를 얻고 상단의 규모를 키우게 됐던 사건.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위드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마판 상단은 전투 준비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확보한 전투력으로 충분할까요?”

“부족한 병력은 만들면 돼요.”

“어디서 말입니까?”

“우린 이미 최고의 싸움꾼들을 알고 있죠.”

하벤 왕국의 군사 요새 라호냐!

아렌 성이 파괴되며 새로운 군사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장소였다.

5겹으로 쌓은 두꺼운 성벽에 각종 방어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서 아르펜 제국이 침공한다고 해도 한 달은 버티리라 자신하는 최고의 요새!

일반 유저들 역시 진행 중인 퀘스트나 고향이라는 이유로 활동하는 이들이 많다.

“방금 잡아 온 대왕 꽃게 팔아요!”

“던전 갑니다. 레벨 350 이상 전사 계열만요.”

“집 지으려고 하는데 건축가 분 모집합니다. 사흘 내로 지어 주실 분만!”

성문 근처에서 북적거리던 유저들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누군가 성으로 향하는 길을 당당히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위드다! 위드가 나타났다!”

“에이, 설마. 무슨 말도 안 되는…….”

“진짜야. 정말 위드라고!”

동쪽 성문 근처의 유저들이 일제히 소란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이 어디던가. 아렌 성이 파괴되고 헤르메스 길드의 핵심 중의 핵심.

그들은 헛소리를 들은 것이 틀림없다고 여기며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어…… 어라?”

“진짜 위드 아냐?”

“얼굴은 못 알아보겠는데…….”

“갑옷이 진짜잖아! 하늘 지배자의 갑옷. 로아의 명검도 차고 있다!”

“진품이야!”

얼굴은 잘 몰라도, 그를 상징하는 장비들을 모르는 유저는 아무도 없었다.

* * *

― 위드가 왔다!

― 완전 무장 상태로 찾아옴. 전쟁이다!

헤르메스 길드가 지배하는 군사 요새 라호냐에는 즉시 비상이 걸렸다.

“빨리 움직여. 빨리!”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동쪽 성문으로 뛰어갔다.

공성전을 위해 건설된 거대한 성벽에 마법사와 궁수들이 배치되고, 기사들이 말을 탄 채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전원 전투 준비!”

위드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퍼지고 고작 3분 만에 요새에 머무르던 길드원 2천 명이 모였다.

동쪽 성문을 포함하여 서쪽, 남서쪽의 성문에도 병력이 배치!

쿠르릉!

비상조치에 따라 요새의 성문이 닫히고, 성벽을 따라 해자에 물이 채워졌다.

요새에 불이 났다고 해도 이런 소란은 아닐 것이다. 가르나프 평원에서 호되게 당한 기억이 헤르메스 길드원 모두의 머릿속에 선명했다.

아무도 위드가 혼자 왔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방송으로 조각 생명체들과 케이베른과의 전투를 펼치기 위한 타격대의 활약들을 보아 왔던 것이다.

“진짜 위드 님이다.”

“대박이다.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는 거지?”

라호냐 요새의 유저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실컷 기대하는 눈빛도 보였다.

“여기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건가?”

“크…… 아르펜 제국이 베르사 대륙 정복을 위해 깃발을 들었구나.”

“정복왕 위드!”

“근데 다른 사람들이 없는데? 아무리 위드 님이라고 해도 헤르메스 길드의 본부에 혼자서 덤벼드는 건 무모하고.”

“하늘에 있나? 국경에서부터 공중 병력 끌고 온 거 아니야? 유저들이 하늘에서 막 낙하하고…….”

유저들은 여기저기 쳐다보기 바빴다. 상단의 마차에서라도 병력이 내릴 수 있고, 하늘에서도 사람들이 떨어질 수 있다.

언제라도 라호냐 요새의 공략이 시작될 것 같은 긴장감!

위드가 성문 인근의 바위에 올랐다.

성문과 성벽을 지키는 헤르메스 길드원 그리고 유저들이 잔뜩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위드의 사자후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어딘가 익숙하게 시작되는 억양.

― 라호냐의 유저 여러분들. 필수적으로 하나씩은 갖고 다녀야 하는 여우 조각품! 꼭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닙니다. 남들이 다 살 때 하나쯤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위드가 가져온 포대를 뒤집자 여우 조각품이 우수수 떨어졌다.

― 제가 직접 깎은 예술 그 자체인 고급 한정판 조각품입니다. 근데도 단돈 500골드! 물량이 한정된 만큼 선착순으로 판매합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총본영에서 최신 유행을 설파하면서 여우 조각품을 팔아 치우는 위드였다.

* * *

여우 조각품이 전부 판매되는 데엔 고작 5분 정도가 걸렸다.

5개, 10개씩 사들이는 부유한 유저들이 라호냐에 많았기 때문에 처분이 금방 끝났다.

‘역시 하벤 지역의 경제력.’

중앙 대륙에서도 가장 발전한 동네가 하벤 지역 그리고 브리튼 연합이다.

아렌 성이 파괴되고 이쪽으로 이주한 라호냐의 유저들도 수십만은 되기 때문에 간단히 팔아 치울 수가 있었다.

‘이렇게 쉽게 50만 골드를 벌다니…… 역시 돈 버는 데는 유통이야. 제조 단가를 낮추더라도 어떻게든 비싸게만 팔아먹으면 되잖아.’

장인 정신은 만들 때보단 팔 때 강조해야 하는 법.

위드는 여우 조각품들을 다 처분하고 나서 성벽의 헤르메스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여기 라페이 님 있죠? 아무나 말 좀 전해 주세요.”

“……?”

무기를 들고 있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위드가 자신들 앞에서 조각품을 팔아서 제법 모욕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쨌든 라호냐 요새를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의 신.

불패의 지휘관.

위드가 지금까지 이룩해 온 업적이나, 헤르메스 길드를 상대로 격파해 온 기록들 때문에라도 부담감이 컸다.

헤르메스 길드의 입장에선 국경 부근에서의 전투는 한두 번 지거나 이길 수도 있다. 하지만 정복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들의 핵심 거점인 군사 요새 라호냐를 빼앗기면 자존심과 긍지마저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아르펜 제국의 벌 떼 공격이 벌써 시작된 것 같은 긴장과 초조함을 느꼈다.

‘역시 전쟁이냐.’

‘바로 선전포고 하고 대규모 병력으로 들이치겠지? 어떻게 소문도 내지 않고 여기까지 병력을 데려왔을까.’

꿀꺽.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이어지게 될 전쟁 선언을 기다렸다.

위드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자고요.”

“……?”

“퀘스트 하다가 왔는데, 기왕이면 맛있는 요리를 내주면 더 좋고요.”

“……!”

* * *

라페이는 라호냐 성에서 급하게 전쟁 지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을 소환하고, 요새에 병력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며 지상과 하늘에서 이어질 공성전을 대비!

그동안 아르펜 제국과의 전쟁을 쭉 준비해 오긴 했지만 그게 오늘, 라호냐에서 벌어질 줄은 몰랐다.

“위드가 날 만나자고 했다고요?”

“밥을 같이 먹자고 했습니다. 정확히는 밥상을 좀 차려 달라고 했는데…….”

“주변 상황은요?”

“아르펜 제국의 병력은 현재까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도 확인되었습니까?”

“예. 정령사들과 조인족 유저들이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조인족들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헤르메스 길드 소속의 유저들이 있었다.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날 만나려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운데요.”

라페이는 외부로 연결된 테라스로 걸어갔다.

군사 요새 라호냐의 모습이 든든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은 어딘가 불안하게 보인다.

자신들을 밀어내고 아르펜 제국의 황제가 된 위드와 밥을 먹는 것은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당당하게 혼자 찾아와서 밥을 달라고 한다? 아르펜 제국에서 우리에게 뭘 제안하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바드레이 님과 일대일 대결을 하기 위해서?’

라페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상대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불리한 자리가 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세력과 세력으로 볼 때에 연달아 패배만 한 입장에서 체면을 챙길 수도 없었고.

“저도 참석해도 되겠습니까?”

“위드. 그 건방진 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지켜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도 같이…….”

“커허험. 어떤 말을 할지 무척 궁금하군요.”

가우슈, 제스트, 그로스, 보에몽.

헤르메스 길드를 대표하는 랭커들이 위드와의 식사 자리에 함께하길 원하고 있었다.

‘휴우.’

라페이는 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숨겼다.

위드!

적이기는 하지만 모험과 전투 업적 중에는 감탄할 만한 이야기들이 많다.

유저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은 아르펜 제국의 황제. 그가 찾아왔는데 만나 보지도 않고 내치기는 무리였다.

* * *

위드는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 라호냐의 내성으로 들어왔다.

복도에는 화려한 장식물과 골동품들이 즐비했는데, 하벤 지역에 대륙의 모든 부귀영화가 모여 있다는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다.

케이베른의 표적은 아렌 성을 제외하면 각 지역의 수도와 브리튼 지역에 집중되기는 했지만, 웬만큼 잘사는 도시들은 하벤 지역에 아주 많았다.

헤르메스 길드의 핵심.

라페이와 10인이 참석한 자리에서 위드는 가볍게 말했다.

“배가 고파서…… 밥부터 먹고 말해도 될까요?”

“그럼요. 급하게 차리느라 대접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는데 마음껏 드십시오.”

“뭘요. 상다리가 휘어지겠는데요. 계란 프라이는 요리도 아닐 것 같습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창고에서 꺼낸 고급 재료들을 요리해서 산해진미들을 잔뜩 차려 놓았다.

위드가 적이긴 하지만 지위에 맞는 예우, 최소한 맛있는 음식을 아낄 상대는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왜지. 어째서 온 거냐.’

라페이는 정작 위드를 이렇게 가깝게 보는 건 처음이라서 식사를 하는 동안 관찰할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음식을 달라고 한 건 본격적인 용건을 앞두고 벌이는 기 싸움이겠지. 우리에게 자신의 여유를 과시하기 위한…….’

와구와구.

“진짜 맛있네, 이거…… 크. 헤르메스 길드에도 좋은 요리사 유저가 있었구나. 재료도 끝내주고.”

위드는 정신없이 음식들을 퍼먹기 바쁠 뿐이었다.

정작 주인인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손도 대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먹는다.

평생을 눈칫밥을 먹고 살았는데, 이젠 사람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음식 맛을 즐길 수도 있었다.

“이거 말렌 마을의 특등급 송이네요? 영구적으로 생명력을 20이나 늘려 주네.”

보에몽이 라페이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벤 지역의 말렌 마을도 알고 계시네요?”

“로열 로드를 막 시작할 때 첫 도시로 로자임 왕국의 세라보그 성과 함께 고민했었습니다. 거긴 약초들이 널려 있어서 사냥 다녀오며 부수입이 짭짤할 것 같아서요.”

“허…….”

“아렌 성도 고려를 하긴 했죠. 최고의 대도시였으니까요. 지금은 뭐 케이베른에 파괴되고 말았지만.”

라페이와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위드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적이라고 유치하게 화를 내기에는 서로 너무 거물이었다.

대륙을 장악하기 직전에 패해 서운함과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패배자의 입장으로선 치졸한 감정이란 걸 잘 알았다.

“음식 진짜 맛있네요.”

위드가 먼저 음식을 먹으면서 어쩌다 한 번씩 칭찬을 해 주었다.

라페이는 예의상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건성으로 받아 주었다.

“잘 먹어 주시니 저희들도 고맙군요.”

“이런 꿀맛 같은 음식들은 처음입니다.”

정보를 담당하는 아크힘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위드 님도 요리사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고급 2레벨입니다.”

“허…… 요리 스킬이 그렇게나 높으시군요.”

“저렴한 식재료들이나 던전 사냥에서 구하는 재료들로만 요리를 해서 한계가 있었네요. 하지만 언젠가는 꼭 마스터할 겁니다.”

“요리는 재료가 절반이라고 들었습니다. 요리사에 관심은 꾸준하시네요?”

“네. 나중에 시간을 내서 광장 같은 곳에서 실컷 요리를 해서 팔아 볼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라페이는 위드가 쓰는 단어나 말의 뉘앙스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았지만 어떤 함축된 의미도 없었다.

그냥 말 그대로 음식 맛있다고 하고, 잡다한 이야기들이나 늘어놓고 있었다.

‘왜지?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식사가 계속될수록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하는 게 헛수고라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난공불락의 군사 요새 라호냐이고, 적진 한복판에 혼자서 들어왔는데도 느긋한 태도가 신경이 쓰였다.

“남은 음식을 좀 싸 가도 되나요?”

“네?”

“버리자니 아까워서…….”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위드는 배낭에 잔뜩 음식들을 담았다. 그제야 식사 자리가 치워지고 본격적인 대화의 분위기가 갖춰졌다.

‘드디어 용건이 나오겠군.’

라페이와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무슨 이야기가 시작될지 긴장할 때였다.

위드가 바로 폭탄선언을 터트렸다.

“케이베른과 싸우는데 도와주시죠.”

“예?”

“과거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건 아닙니다. 서로 먹고살자고 했던 일이니까요. 그러니 이쪽에서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같이 싸우면 앞으로 헤르메스 길드도 먹고살게 해 드리죠.”

* * *

위드가 떠나고 군사 요새 라호냐에는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들이 속속 모였다.

칼쿠스처럼 호전적인 이들은 위드를 죽일 기회를 놓쳤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니까…… 케이베른을 상대로 같이 싸우자. 블랙 드래곤을 물리치기 위해 연합 전선을 펼치자고 말했다고요?”

“맞습니다.”

“터무니없는 개소리를. 거기서 바로 거절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왜 싸워 줍니까. 중앙 대륙을 차지한 위드가 알아서 극복해야죠.”

칼쿠스의 의견은 당연하기도 했다.

위드의 제안을 들은 당시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비슷하게 생각했었다.

‘누구 좋으라고 싸워?’

‘우리 희생도 막대할 텐데.’

방송으로도 중계가 될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시청자들에게 불쾌감을 안 주며 거절하느냐가 관건이었을 뿐.

아크힘이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같이 싸운다면 헤르메스 길드를 대륙의 일원으로 인정한다고 하더군요.”

“인정이요?”

“하벤 지역의 독자적인 통치를 인정하며 이곳의 정복을 위한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겠다. 중앙이나 북부 대륙과의 교역이나 외부 활동도 마음대로 해도 된다. 단 형식상으로 아르펜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며 영토로 포함이 되어라. 세금은 따로 납부하진 않아도 된다. 그리고 대륙의 곳곳에 영주가 없는 땅이 많으니 1,000명의 길드원에게 그 지역들을 다스리게 해 주겠다.”

칼쿠스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이 지역의 통치를 인정한다. 앞으로 공격도 안 한다. 1,000명이나 되는 영주들을 임명까지 해 준다? 그럼…… 전쟁을 끝낸다는 말인데. 우리에게 굉장히 좋은 조건 아닙니까?”

호전파들의 입을 그대로 다물게 할 정도로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헤르메스 길드는 소속 길드원의 이탈과 유저들의 반발에 서서히 말라죽어 가고 있었다.

다시 중앙 대륙을 지배한다는 건 꿈도 못 꾸는 상태.

아르펜 제국의 세력은 급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는데 자신들의 지배를 인정해 준다고 한다.

‘앞으로 아르펜 제국과 싸우면 이기지 못한다.’

얼마 전에 가르나프 평원의 전투에서 보인 인해전술과는 또 달랐다.

방송에서 매일 중계되는 타격대의 성장.

헤르메스 길드는 로열 로드 최강의 세력이라고 자부했는데, 케이베른과 싸우기 위한 타격대가 빠르게 쫓아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희생의 화로를 얻었다는 소식도 들어서 알고 있다.

헤르메스 길드는 전성기를 지나서 힘이 빠지는 상황인데, 만약에라도 희생의 화로를 쓴 유저들이 가르나프 평원에서처럼 덤벼든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리라.

사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하벤 지역을 빼앗길 수 있다.

다른 길드들도 그렇게 무너졌으니까.

하지만 헤르메스 길드가 힘을 잃으면, 그들은 대륙 전체의 유저들을 적으로 마주해야 한다.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만큼이나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보복을 벼르는 이들이 넘쳐 날 테니.

서로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어도 알고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무너지는 순간부터 그들은 모든 유저들에게 척살령을 받게 되는 신세라는 것을.

“형식적이지만 제안을 받아들이면 베르사 대륙은 아르펜 제국에 의한 완전 통일이 되겠군요.”

“맞습니다. 우리 입장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통일 황제의 업적을 넘겨주어야 하죠. 남부와 동부가 당장은 정복되지 않고 남아 있겠지만.”

“우리 길드가 대륙을 지배할 가능성은 없으니 손해는 아니지 않나요?”

“그렇겠죠. 안정적으로 하벤 지역을 통치하고 1,000개의 영주 자리까지 얻을 수 있으니. 지금 상황보다도 지배하는 영토가 두 배는 넓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위드의 제안을 전해 들은 유저들 사이에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다.

아크힘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는 숨은 함정이 있습니다.”

“어떤 함정이요?”

“우리 헤르메스 길드는 케이베른과 싸우며 희생의 화로를 써야 합니다. 최소한 1만 명이요.”

“그건……!”

칼쿠스와 유저들이 깜짝 놀랐다.

방송을 보며 확인된 희생의 화로를 사용하는 건 고레벨 유저들에게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었으니까.

“절대 말도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쉽지 않은 제안이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횡포도 아닙니다. 위드도 희생의 화로를 쓸 테니 말이죠. 드워프나, 위드의 측근들, 타격대에 속한 유저들 일부도요.”

“아……!”

“자신들이 희생의 화로를 쓰고 싸우는데, 우리들은 평범한 상태라면 드래곤과 싸우는 데 그다지 도움이 안 되겠죠.”

“그런 문제가 있긴 했군요.”

희생의 화로를 쓰고 싶진 않았지만, 드래곤과 싸우려면 그들과 전투력 차이가 너무 날 것이다.

“그리고 영주로 뽑을 1,000명은 케이베른과의 전투에서 희생의 화로를 쓰고 크게 활약한 순서대로 뽑아 준다고 하더군요.”

“전투에서 활약한 순서대로요?”

“예.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포상이라는데…….”

“듣고 보니 일리가 있긴 하네요. 그런 조건이라면 우리로서도 길드원들을 설득하기가 쉬워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헤르메스 길드원이 영주가 되는 것이기에 이 부분은 납득할 만하다고 여겼다.

그들이 생각해도 잘 싸운 유저에게 포상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케이베른과 싸우느냐, 마느냐…….”

“처음에는 불쾌했지만 싸우는 대가로 하벤 지역의 통치를 인정해 준다면 무조건 손해 같진 않습니다.”

“레벨을 잃어버리겠지만 다시 올리면 되고. 영토는 계속 남으니…….”

“만약 드래곤 사냥을 성공시키면 엄청난 전투 업적을 달성할 겁니다. 그것만 해도 레벨 10, 20개 정도의 위력은 보여 주지 않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성공해야 한다는 전제에서의 이야기지요.”

“우리가 힘을 모으면. 그리고 위드도 있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다면 무엇이 높겠습니까? 그리고 거절하면 손해를 보는 건 레벨 몇 개를 날리는 정도가 아닌데요?”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들은 대화를 나눌수록 자신들은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르펜 제국이 진격해 오면 대영주인 그들이 가장 잃어버릴 것이 많다.

돈과 권력, 영토.

어떤 의미에서는 레벨보다 더 귀한 것이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무너지고 나서 벌어지게 될 일.

척살령이나, 악마들의 왕인 클레타의 강림 같은 사태도 지배층의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수뇌부 회의에서는 결국 위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되어, 하벤 지역을 떠나 있는 바드레이에게 의견을 구했다.

헤르메스 길드의 지배자인 바드레이가 반대한다면 통과할 수 없는 사안.

바드레이는 잠시 침묵하기는 했지만 곧 아르펜 제국으로의 합병과 케이베른과의 전투를 수락했다.

* * *

라페이는 라호냐의 집무실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했다. 헤르메스 길드의 2인자로서 챙겨 놓은 골동품이나 보물, 장비들은 아렌 성이 파괴당할 때 대부분 잃어버렸다.

남아 있는 물건들은 배낭 하나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만 간단히 챙겼다.

“후…… 생각보다 짐이 얼마 되지 않는군.”

라페이는 물건들을 챙기고 나서 창문 밖의 라호냐 요새의 풍경을 보았다.

중앙 대륙에서 세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을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증축한 군사 요새.

대군이 몰려와도 막을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쓸 일이 없게 되었다.

“성을 쌓으면 망하고 길을 놓으면 흥한다고 하더니……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결국 그렇게 되는가.”

라페이의 목소리에는 다 털어 버린 후련함까지도 느껴졌다. 배낭을 짊어지고 복도로 나왔을 때는 아크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영 떠나실 겁니까?”

아크힘은 수뇌부 회의에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라페이가 회의를 주도하던 평소와는 달리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고, 마지막에 케이베른과의 전투를 결정하는 순간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 이곳에는 제가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이해할 수 없군요. 앞으로도 지위와 역할은 그대로 유지가 될 텐데요. 제 생각에는 헤르메스 길드의 부활을 위해서라도 그대로 머물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페이는 큰 틀의 전략을 짜 왔기에 아르펜 제국을 상대로 한 패전의 책임으로부터도 다소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들의 생각보다 위드가 잘 싸웠고, 유저들의 힘이 상상보다 컸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누구보다도 라페이의 기여도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할 일이 없어서 떠날 뿐이에요.”

“하지만…….”

“위드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헤르메스 길드는 이젠 그의 말을 이길 힘이 없어요.”

“네?”

아크힘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라페이를 따라서 걸으며 물었다.

“방금 한 이야기는 무슨 의미입니까?”

“그건…….”

라페이는 설명하려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꼭 알아야 하겠습니까?”

“단지 아르펜 제국이 강해서 헤르메스 길드가 그의 뜻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의미 같진 않았습니다만.”

“이번 제안은 독이 든 사과입니다.”

“독이 든 사과요?”

“위드가 이렇게까지 정치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가졌는지 몰랐습니다. 그는 정말…… 상황을 이용할 줄 압니다. 불과 몇 마디 말로 헤르메스 길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라페이는 길드를 떠나기 전에 아크힘에게 몇 마디 알려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신은 알고도 대처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당했지만, 그조차도 모르고 있던 동료에 대한 의무감이랄까.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계산입니다. 우린 희생의 화로를 쓰고 케이베른과 싸웁니다. 다른 유저들은 헤르메스 길드에 대한 분노가 조금 수그러들기도 하겠고…… 우린 하벤 지역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겠죠.”

“그러면 좋은 것 아닌가요?”

“위드의 제안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 만큼 합리적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실 그대로 진행이 되겠지요. 우린 끝까지 싸우는 대신에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고. 그다음에는 몰락만이 남겠죠.”

“몰락한다고요?”

“막다른 길에 몰려서 무기를 놓게 되는 헤르메스 길드의 운명이죠.”

라페이는 드래곤과의 전투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승리 혹은 패배. 어느 쪽이든 아르펜 제국과의 관계가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인데…… 우선 1,000명의 영주가 되기 위해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최선을 다해 싸울 겁니다.”

“아마도 그렇겠죠.”

“전투력이 뛰어난 핵심 유저 1,000명이 그다음에 길드를 이탈하는 것입니다.”

“길드 소속을 그대로 유지하면 될 텐데요? 위드도 상관없다고 했고요.”

“그들은…… 아마 스스로 떠나게 될 겁니다.”

새롭게 아르펜 제국의 영주들이 된 헤르메스 길드원들.

냉정히 말해 그들은 그 이후로 헤르메스 길드와 관련된다 해도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었다.

중앙 대륙의 유저나 북부 유저들을 데리고 통치하는 데 장애물만 될 테니 갈수록 거리를 두게 되리라.

“헤르메스 길드 소속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질 울타리에 불과합니다. 영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테고, 그들은 위드와의 대립이 생기더라도 헤르메스 길드의 편에 서지 않겠지요.”

“고작 1,000명이 떠난다고 해서 몰락할 정도로 세력이 작지 않습니다만.”

“작지 않죠. 하지만 견고한 성벽도 구멍이 뚫리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을 하나로 묶어 놓던 굴레도 사라지는 겁니다.”

헤르메스 길드는 지금까지 패권을 추구하며 막대한 이익을 길드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면 모두가 보게 되리라.

길드에 머무르기보다는 아르펜 제국의 영주로서 활동하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을.

모험가, 전사, 영주…….

다양한 삶을 원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자유에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영주가 되어 헤르메스 길드를 나가는 1,000명이 시작점인 것입니다. 하벤 지역에 남더라도 이제 대다수의 길드원들은 길드와 운명을 함께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까지요?”

“서서히 길드의 결속은 약해지게 되겠죠. 밖으로 나간 유저들은 위드가 헤르메스 길드를 무너뜨릴 때에도 우리의 적이 되어 싸울 수 있습니다.”

위드의 제안은 시간을 두고 헤르메스 길드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새로운 흐름이나 대세라는 이름으로 천천히 작용하기 때문에 더 거스르기 어려운 힘을 가졌다.

“그러면 제안을 거절하고 하벤 지역을 지키며 끝까지 싸우는 편이 나을까요?”

아크힘은 뼛속까지 헤르메스 길드 출신이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무너지는 건 불리한 상황에서도 원하지 않았다.

“아니요. 이 일은 우리에게 선택권이란 없습니다.”

위드와 헤르메스 길드의 협상은 방송으로 중계도 되었다.

당연하게도 일반 길드원들의 입장은 대환영.

과거처럼 절대적인 패권을 누리는 것도 아닌데 하벤 지역에 갇혀서 살고 싶어 하는 유저는 드물었다.

무엇보다 영주들로 구성된 수뇌부들 대부분이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자신들의 권력을 그대로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되니까.

“각자의 입장에서 독을 알더라도 달콤해서 거절하지 못할 제안입니다.”

“이런 간교한…….”

“더 멀리 보자면 위드는 얻을 게 많습니다. 아르펜 제국 내에서도 영주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헤르메스 길드 출신들을 이용할 수도 있고…… 전쟁으로 인한 손해도 줄일 수 있겠죠.”

“그런 짓까지요.”

“위드는 간단한 제안으로 우리 길드의 주춧돌을 뽑아 버린 겁니다.”

“이대로 끝났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전…… 길드에 끝까지 남겠습니다.”

라호냐 요새의 성문에서 아크힘은 더 이상 함께 따라 나오지 않았다.

성문을 나선 라페이는 마지막 미련을 털어 낸 것처럼 짊어지고 있는 배낭의 무게가 가볍게 여겨졌다.

‘헤르메스 길드는 실패했고, 이젠 위드의 세상이 되었지. 힘으로도, 머리로도 완벽하게 졌어. 차라리 후련하구나.’

그에게 로열 로드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초보 시절에 다인이나 다른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다니던 때가 가장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위드는 하루 뒤에 공식적으로 라호냐 요새에 방문했다.

라호냐 요새의 유저들도 길가와 건물의 지붕마다 쭉 서 있었다.

성문에서부터 이어지는 도로에는 붉은 양탄자까지 깔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르펜 제국 만세!”

위드가 양탄자 위를 걷는데, 주민들과 유저들이 꽃가루를 뿌렸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조차도 박수를 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쟁의 신 위드. 저 사람 한 명 때문에 우리 길드가 항복 선언을 했네.”

“대박이긴 하다. 협상을 통해서라지만 이렇게 빨리 아르펜에 굴복할 줄은 몰랐는데.”

“좋은 조건이잖아. 우리 입장에서는 잘되었지. 전투 한 번이면 그동안의 잘못들을 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될까?”

“위드가 약속했잖아. 아르펜 제국 황제의 약속이니 지켜지겠지.”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마음이 복잡했다.

위드와 아르펜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이들도 꽤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들에게 명분이 있진 않았다.

전 대륙을 상대로 싸워야 할 처지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고맙게 여겨야 했다.

“위드 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아크힘을 대표로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들이 정중하게 맞이했다.

스티어, 보에몽, 가우슈, 하일러, 그로스, 크레볼타 같은 유명한 유저들이 고개를 숙였다.

의외였던 것은 학살자 칼쿠스의 태도였다.

그동안 길드 회의가 열릴 때마다 자신에게 위드를 죽일 기회만을 달라고 외쳤었다.

공격을 나가서도 실패하고 돌아와서는, 다음번에는 반드시 죽이겠노라고 이를 갈았다.

그런데 막상 위드를 맞이하면서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악수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영광입니다. 진영이 달라서 검을 들 수밖에는 없었지만 항상 멋진 모습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위드 님, 앞으로 어떤 성가시고 하찮은 일이 생기면 제게 시켜만 주십시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사회생활의 모범 답안과 같은 존재!

위드는 웃으면서 칼쿠스의 손을 잡고, 등까지 두드려 주었다.

가장 먼저 아첨하는 이를 따뜻하게 맞아 줘야 다른 이들도 스스럼없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학살자 칼쿠스 님. 방송으로 자주 뵀습니다. 전투 영상도 구경 많이 했었죠.”

“저, 정말이십니까?”

“예. 앞으로 기회가 되는대로 자주 같이 사냥도 하고 어울려 보죠.”

“고맙습니다. 정말 한없는 영광입니다.”

이 장면을 보는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는 미래의 권력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드레이의 절대적인 힘의 지배를 따르던 헤르메스 길드.

북부와 중앙 대륙의 완전한 지배, 조만간 통합 황제에 오를 위드가 대세였다.

헤르메스 길드는 이 순간부터 위드에게 무력과 정신. 양쪽에서 모두 밀린다는 걸 깨달았다.

내심 헤르메스 길드의 재기를 생각하던 유저들이 많긴 했지만, 그것이 막연한 이야기처럼 어렵게 느껴졌다.

* * *

< 하벤 지역의 영주들이 아르펜 제국의 깃발을 들어 올렸습니다.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었습니다.

국가 명성이 대륙 전역에 널리 알려집니다.

정치적인 영향력이 대륙을 지배하기 직전입니다.

하벤 지역의 부유한 주민들은 특산품과 예술품, 다양한 문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욕구가 충족이 된다면 상업의 발전을 촉진할 것입니다. >

하벤 지역의 전격적인 합병!

아르펜 제국은 실질적으로 베르사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남부 사막 지대와 동쪽 왕국들과 오크 지대.

완벽한 대륙의 통일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했지만, 아르펜 제국에 의한 대륙 통일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위드는 라호냐 요새에서 선언했다.

- 우린 모두의 힘을 합쳐서 모라타에서 케이베른을 없앨 것이다!

“위드 만세!”

“아르펜 제국 만세!”

“케이베른을 사냥하자!”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위드의 말에 환호하는 광경은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 내가 살아생전 헤르메스 길드가 위드 만세를 외치고 있는 걸 들을 줄이야.

- 우왓. 말도 안 나오네. 대박이다.

- 어제 위드 님이 라호냐에 밥 먹으러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만 해도 정신 나갔다고 했다. 근데 무사히 밥 먹고 돌아옴. 하벤 지역도 정복해 버림.

- 이게 무슨 상황이냐. 덜덜덜.

- 말 몇 마디로 헤르메스 길드 먹어 치움. 꺼억.

- 정복왕 위드…….

- 케이베른과 같이 싸우도록 전투에도 동원해 버리고.

- 왜 헤르메스 길드가 저렇게까지 좋아하지?

- 위드 님이 자기들 안 죽이고 살려 줘서 좋아하는 거죠. 그동안 치른 죗값을 받아야 되는데.

- 다들 알다시피 케이베른도 헤르메스 길드 때문임.

헤르메스 길드가 케이베른 사냥에 나선다고 밝혀도 대중들의 비난을 피하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모라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북부 유저들에게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 모라타 사수!

- 위드 님이 모라타를 버리지 않으리라 믿었어요.

- 모라타에서 시작해서, 모라타에서 끝냅시다.

- 무적의 요새 모라타. 드래곤의 무덤이 될 겁니다.

- 위드 님이 직접 나섰음. 헤르메스 길드까지 전격 참여.

- 모라타로 구경 갑시다.

- 저희 집으로 초대할게요. 판자촌 6 마을에 있어요.

- 필요하신 분들은 제 집도 개방합니다. 지난번에 천장 조금 무너졌는데 내일까지 다 고칠 겁니다.

“좋았어. 이 분위기를 잘만 끌고 가면 희생의 화로에서 태울 이들이 많아지겠군!”

위드는 대중들의 반응보다도 헤르메스 길드원들을 끌어들인 점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 마판 : 과연 엄청난 정치력이십니다. 몇 마디의 말로 헤르메스 길드를 굴복시키셨군요.

“뭐,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았지만 혼자 죽을 순 없죠.”

베르사 대륙을 지키기 위해 혼자서 바보처럼 희생할 순 없었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위드의 철학과도 크게 어긋나는 일.

영화를 보면 세상을 구한 영웅은 고생만 하다가 죽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남은 식구들의 고생은 덤.

요즘 시대에 진정한 영웅이 되려면 실속도 챙기고,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해야 했다.

“죽을 땐 같이 죽고, 살면 혼자 살아야지…….”

위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꼼꼼하게 써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모라타가 아르펜 제국의 운명을 건 배수진이 되었습니다.”

- 마판 : 옛. 모든 상인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북부와 중앙 대륙 상인들은 위드 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상인들은 아르펜 제국의 황제인 위드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태였다.

드래곤은 단순히 보스 몬스터 한 마리를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이상으로 대비를 해야 마땅하니까.

“당연하지만 대피 계획은 전면 취소입니다. 드래곤과의 전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레벨 400 이상의 유저들을 모집하고, 방어 시설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 마판 : 알겠습니다. 모든 전력을 모라타에 집중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위드는 서윤에게도 귓속말을 보냈다.

“모라타가 대륙의 운명을 가르는 전장이 될 거야.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 그들을 나눠서 일을 맡기고, 드래곤과 싸울 준비를 해 줘.”

- 서윤 : 맡겨 주세요. 모라타를 지킬게요.

건축가들에게도 연락을 빠뜨리지 않았다.

“파보 님, 이번 전투에도 건축가들에게 많은 비중이 달려 있습니다. 드래곤과 싸우면 모라타의 피해가 막대할 겁니다.”

- 파보 : 일이 그치질 않는군! 하지만 기쁘게 해 보겠네. 케이베른이 바웰 성을 부수는 걸 보고 깨달은 게 많아. 난공불락까진 아니더라도 견고하게 막아 보겠네.

드래곤과의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려면 좋은 위치에서 힘을 빼 놓은 상태에서 싸워야 했다.

“사냥꾼들과 협력하는 것도 좋겠군요. 함정 유도가 먹힐지는 모르겠지만요.”

- 파보 : 참고하지. 돌망치 건축가 조합부터 모든 북부의 건축가들이 모라타로 달려오고 있네.

“중앙 대륙의 건축가들은요?”

- 파보 : 소식을 듣자마자 그들은 조인족들을 타고 날아오고 있네.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연락이 왔는데…… 사전 준비에 도움을 준다고 하더군. 받아들여야 하나?

“일단은 도와주는 건 전부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마법 함정 같은 건 드래곤을 잡기에 약하겠지만…… 그들도 보스급 몬스터의 사냥 경험이 많으니 뭐라도 도움이 되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 파보 : 최선을 다하겠네.

“항상 고맙습니다.”

- 파보 : 알아주고, 일을 맡겨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맙네. 자네가 아니면 건축가들은 지금처럼 존중받지 못했을 거야.

위드가 모라타에서 싸우기로 결심을 한 이후로 북부와 중앙 대륙 전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더 일찍 준비를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상황에 맞춰 가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야. 헤르메스 길드와의 화해도…….’

헤르메스 길드와는 길고 긴 악연이 있었다.

그들이 당장은 불리하기 때문에 굽히고 들어오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르펜 제국의 영주들은 선한 이들일까.

위드의 인기가 하락한다면 가장 먼저 칼을 빼 들 자들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금도 그 시기만 기다리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을 것이고.

‘전부 나쁜 놈들이지. 믿을 건 나뿐이야.’

언제든 방심하면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모라타를 지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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