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케이베른의 분노
― 하찮은 인간들. 더욱 저항해 보아라!
케이베른이 모라타에 세워진 건물들을 꼬리를 휘두르고 발로 걷어차면서 파괴했다.
“꺄아악!”
“튀, 튀어!”
건물들이 부서질 때마다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케이베른을 보자마자 다리가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 죄악의 씨앗을 타고난 인간들아. 죽는 순간까지 위대한 존재를 추앙하라.
케이베른이 인간들이 겁에 질린 것을 보며 즐겼다.
― 중력 강화!
일시에 모든 것들의 무게가 5배가 되었다.
유저들은 땅에 짓눌려야 했고, 건물들은 와장창 소리를 내며 일시에 붕괴. 기둥이 무너지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 마법이 여기까지…….”
“어서 나가!”
베르사 대륙에서 최대의 인구를 가진 모라타였다.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초보 유저들이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위드와 바드레이의 활약까지 동시에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중앙 대륙과 로자임 왕국의 구경꾼들까지 가세한 상태였다.
며칠 동안 모인 유저들은 성문 밖으로 조금 빠져나가긴 했지만, 대피령을 무시한 엄청난 인원이 남았던 것이다.
“우얏!”
“비, 빙룡 광장으로…….”
“내 집!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게 뭐야, 도대체!”
― 플레임 쇼크!
케이베른의 마법이 휩쓸고 지나가며 천여 명에 가까운 유저들이 사망했고, 충격파에 수백 채의 건물들이 주저앉았다.
마법 범위에 포함되지 않은 유저들은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 인간들, 재미있구나. 더 열심히 달려 봐라!
케이베른은 불의 장벽을 쳐서 유저들을 가두었다. 그러고는 앞발과 꼬리를 휘두르며 학살을 계속했다.
― 피의 연쇄 화염!
유저들의 몸에 불이 붙으면서 터져 나간다.
거리의 유저들이 줄어들면 그다음에는 가까운 건물들을 부수며 튀어나오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블랙 드래곤!
모라타는 재난 영화의 한복판처럼 황폐화되고 있었다.
“들키겠어!”
“이건 아니잖아.”
“일단 빠져나가!”
유저들도 자신들 때문에 전투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영리하게 빙룡 광장으로 방향을 트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멀리 도망도 가지 못하고 케이베른에게 붙잡혔다.
― 마력 폭풍!
드래곤의 마법에 의해 마나의 힘이 회오리를 일으켰다.
중급 수준의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반경 수십 미터에 달하는 마력 폭풍이 건물을 파괴하며 돌아다녔다.
“이런 망할!”
리버스도 자신이 숨어 있던 건물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잔해에 깔리지 않기 위해 바로 뛰쳐나왔다.
“모라타가 얼마나 넓은데. 하필이면 내 집을 부수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그는 현실에서 달짝지근한 코코아라도 한 잔 마시며 모니터로 전투를 구경했으리라.
그렇지만 로열 로드를 모라타에서 시작했으니, 거대한 전투를 실감 나게 보고 싶었다.
그 결과 전망이 탁 트인 예술가의 언덕 근처에 있는 집을 사들였다.
집을 가지고 있어야 모라타의 주민으로서의 소속감이 더 느껴진다는 말도 실감되었다.
케이베른의 마법 공격에 의해 시장에서 물건을 사서 꾸며 가던 집이 파괴되었고, 이젠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도망은 칠 수 있겠지?”
현질로 장만한 몇 가지 장비들을 믿었다.
경매 사이트에서 산 야생마의 신발은 달리기 시작하면 가속도를 크게 높여 주었다.
“눈에만 안 띄면 되니까. 그리고 멀리 도망쳐야지.”
다른 유저들도 있는 이상 근처 골목으로라도 들어가면 안전해지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드래곤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저렙인지를 알게 되었다.
< 영혼에 마비시키는 절대적인 공포를 마주하셨습니다.
생명력이 94% 감소했습니다.
마나가 사용 불가능합니다.
모든 스킬을 쓰지 못합니다.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매초마다 540의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
“이게 뭐야.”
고양이 앞의 쥐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드래곤이 근처에만 있어도 알아서 죽어 버리는 저렙!
“죽어도 어떻게 이렇게 죽을 수가…….”
리버스는 몸부림을 쳐 보다가 꼼짝도 하지 않자 금방 삶을 포기했다.
케이베른이 다른 유저들에게 마법을 던지더라도 자신은 그냥 가만히 서 있다가 휩쓸려서 죽어야 하는 처지.
주변을 보니 다른 초보 유저들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하하하. 드래곤이 진짜 세네.”
“동감이에요. 구해 달란 말도 못 하겠네요.”
달려서 도망이라도 가는 유저들은 완전 초보는 아니고 한가락씩은 하는 이들이다.
몸이 굳은 채로 서 있거나,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떼는 이들은 영락없이 초보들.
리버스와 초보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법이 휩쓸고 있었으니 아무리 봐도 살아남기는 틀렸다.
“지난번에 뵌 적이 있는데 옆집 어르신이시죠?”
“맞습니다.”
“이렇게 죽게 되네요.”
“모라타에서 구경을 하려고 했는데, 방송이나 봐야겠습니다.”
다 포기하고 이웃들과 대화나 나누고 있던 그 순간!
― 이 시커먼 도마뱀아, 여기 네 집을 털어 간 위드핸드가 왔다!
멀리서부터 들리는 우렁찬 포효!
케이베른이 앞발로 건물을 부수다가 고개를 돌렸다.
― 내 집을 털어 갔다고? 드워프!
블랙 드래곤이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거센 바람이 주위를 휩쓸고 지나가며 주변에 붙어 있는 불이 조금 꺼졌다.
― 세상의 드워프들을 다 죽여서라도 널 찾으려고 했다. 드디어 네놈을 만났구나!
드래곤은 방금 전까지 학살하던 유저들에게는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았다. 즉시 수백 미터의 높이로 솟구치더니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 신체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습니다.
생명력이 매초마다 34씩 회복되고 있습니다. >
초보 유저들은 숨을 돌리고 간신히 말했다.
“우리 살아 있는 거야?”
“드래곤이 떠났어.”
“진짜네. 겨우 살아남았다.”
리버스는 아직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조만간 마비도 풀리리라.
그보다도 건물마다 숨어 있던 유저들이 지붕 위로 올라오는 모습들이 보였다.
어떻게든 숨고, 도망치려고 했던 유저들이 거리로도 뛰쳐나왔다.
“위드 님이다! 위드 님이 케이베른을 불렀어.”
“대박! 케이베른이 공격하려 해.”
“위드 대 케이베른이다!”
* * *
위드는 케이베른이 아마도 반응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레어를 털어 간 도둑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관심이 집중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사자후까지 터트려 가며 외쳤다.
― 이 시커먼 도마뱀아, 네 집을 털어 간 위드핸드 님이 오셨다! 어서 나와라!
유저들의 비명이나 무너지는 건물, 작렬하는 마법들.
온갖 소음들이 뒤섞인 난전이 벌어지고 있으니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 케이베른. 네 볼기짝을…….
위드가 예술가의 언덕까지 절반도 가지 않았는데, 하늘에서 날아오르는 케이베른이 보였다.
― 드워프!
모라타 전역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분노에 찬 커다란 목소리.
드넓은 도시, 수많은 유저들이 도망 다녔다.
케이베른의 분노에 찬 검은 눈동자가 위드를 정확히 쳐다보고 있었다.
― 드디어 너를 찾아냈구나!
깊은 땅속에서 울리는 듯한 드래곤의 목소리는 공포 영화의 소리를 크게 키워 놓은 것처럼 살벌했다.
드래곤이 불타는 모라타의 건물들을 아래로 둔 채 검은 날개를 펼친 채 말하고 있었다.
그 무지막지한 위압감!
― 드래곤의 이름을 걸고 너를 만 갈래로 찢어 죽일 것이다, 드워프!
케이베른이 그렇게 선언한 후에 날아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다.
“관심을 받을 줄은 알았지만, 이러면 완전 쪽박인데.”
위드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예술가의 언덕은 한참 남아 있었고, 빙룡 광장도 마찬가지. 어중간하게 중간에 끼어 버린 상태에서 케이베른이 날아오고 되었다.
“케이베른, 나도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드가 일단은 호기롭게 외치며 로아의 명검을 뽑아 들었다.
‘병력을 준비시켜 놓고 혼자 여기서 싸우는 건 미친 짓이다. 어떻게든 도망쳐서 빙룡 광장으로 유인해 간다.’
가볍게 호흡을 고르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
약한 유저들은 드래곤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으로 얼어붙지만 그 수준은 크게 벗어났다.
드래곤 피어에 맞서는 자란 호칭도 갖고 있었으며, 날벼락의 왕관도 도움을 주리라.
‘레벨과 장비들은 충분히 갖췄다. 그러니…….’
위드가 더 이상 차분히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케이베른의 그림자가 어느새 그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마.
하늘에서 그대로 내려찍어 오는 드래곤의 뒷발!
위드는 앞으로 날렵하게 몸을 날려서 땅을 굴렀다.
쑤왜애애액!
발톱이 스치며 지나가는 소리가 무시무시하다.
목표를 빗나간 뒷발 공격은 3층짜리 석조 건축물을 그대로 부숴 버렸다.
‘하나는 피했…… 이크!’
위드는 즉시 차원문을 통과하며 땅을 박차고 이동했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꼬리가 대지를 내려쳤다.
도로의 석판들이 부서지면서 튀어 올랐고, 한숨을 돌릴 사이는 당연히 없었다.
― 널 잡을 것이다.
케이베른이 땅에 내려오더니 그대로 질주하며 쫓아오고 있었다.
― 납작하게 눌러 주마!
위드는 네 발로 뛰며 힘껏 달렸다.
“네 발 뛰기!”
드래곤 역시 날개를 펼친 채로 건물을 마구 부수며 쫓아왔다.
사람이나 몬스터와의 전투는 익숙했다.
그렇지만 케이베른이 너무 크다 보니 눈에 다 들어오질 않아서,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확인이 늦었다.
― 날쌘 찬바람 : 꼬리입니다! 높이 뛰세요!
꽈아아앙!
위드가 몸을 날리자마자 꼬리가 땅을 스치며 지나갔다.
― 날쌘 찬바람 : 이번에는 주둥이!
눈으로 보긴 했지만 도망치기에도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다.
절묘하게 상황을 알려 주는 조인족의 도움.
“타핫!”
위드는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며 차원문을 통과했다.
딱!
케이베른의 이빨이 바로 뒤에서 맞부딪쳤다.
‘드래곤 피어의 영향을 벗어난다면 피할 수 있어.’
드래곤의 육체 능력이란 어마어마하지만, 동작이 크고 단순해서 빨리 움직여서 피하는 것이 가능하다.
수천 명 이상의 유저들이 드래곤을 상대로 싸울 때에는 공격 한 번에 쓸려 나가지만 혼자라면 도망칠 수 있었다.
― 도망치지 마라! 얼음 창살!
쩌저적!
위드의 주위에 얼음의 기둥들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도로가 갈라지고 얼음 기둥이 튀어나와서 연속으로 폭발했다. 반경 300미터가 빙판으로 변하면서 얼음의 잔해들이 땅에 깔렸다.
< 얼음 창살이 몸을 얼립니다.
움직임이 36% 느려집니다.
흑마법의 저주에 의해 몸이 얼어붙고, 썩기 시작합니다.
전투력이 22%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25초 동안 매초마다 740씩 줄어듭니다. >
위드는 몇 발자국 걸어가긴 했지만, 발이 땅에 달라붙으면서 이동 속도가 감소했다. 어쩔 수 없이 얼음 기둥을 밟고 높게 도약했다.
― 이번엔 걸렸구나!
― 날쌘 찬바람 : 바로 뒤로 올 거 같습니다.
설명은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콰과광!
케이베른이 대지를 박찼다. 그러고는 주둥이를 벌린 채 위드를 향해 몸 전체를 날렸다.
절대적인 위기!
“콜 데스 나이트 반 호크, 콜 뱀파이어 토리도!”
― 불렀는…….
― 부름을 받고…….
“드래곤을 막아!”
위드는 반 호크를 그대로 케이베른의 입안으로 던졌다.
고위급 언데드라고 하지만 어비스 나이트였더라도 단독으로 드래곤에게 대적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노림수가 있었다.
― 푸훽!
케이베른이 입안으로 들어온 반 호크를 내뱉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 하찮은 언데드 주제에 내 입을 더럽히다니!
드래곤이 매우 싫어하는 언데드!
데스 나이트나 스켈레톤이나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마찬가지라서, 잠깐이라도 입안에 들어온 것을 불쾌해했다.
― 주인을…… 지켜야 한다.
반 호크는 땅바닥에 내뱉어진 후에도 충직하게 검을 들었다.
거대한 블랙 드래곤에 맞서는 데스 나이트!
오래된 망토는 갈기갈기 찢어져서 휘날리고 있었고, 투구와 갑옷마저도 온전하지 않았어도 결의가 느껴졌다.
― 암흑 투기!
반 호크는 시커먼 투기를 일으키면서 공격력을 증가시켰다.
― 파탄의 돌격!
콰직!
용감하게 케이베른에게 달려든 반 호크는 밟히는 것으로 역소환을 당했다.
그사이에 위드는 박쥐로 변한 토리도의 발에 매달려 얼음 창살 지대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 도망치도록 놔두지 않는다!
케이베른은 얼음 기둥을 몸으로 부수면서 다시 쫓아왔다.
미끄러운 빙판이 바닥에 형성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밟아서 모조리 파괴하며 추적하는 광경.
“토리도, 너도 할 일이 있다.”
― 드래곤에게 덤비라는 것 빼고는 뭐든 말해라, 주인.
“그걸 해.”
― 차라리 내 송곳니를 뽑아라.
“송곳니 뽑고 드래곤한테 던질까.”
박쥐로 변해서 날던 토리도는 뱀파이어로 모습을 바꾸었다.
― 피의 폭주!
― 뱀파이어 따위가…… 연쇄 폭발!
케이베른을 2초 정도 지연시켰지만 마법 공격에 의해 산산이 타 버리고 말았다.
― 드워프 주제에 잘도 도망치는구나! 붕괴! 붕괴! 붕괴!
위드가 도망치는 길이 30미터씩 아래로 푹 꺼지기 시작했다.
건물들과 함께 무너지는 땅!
장애물 경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등 뒤에서는 케이베른이 바짝 뛰어오고 있었다.
“네 발 뛰기!”
방향을 바꿔 가며 공중으로 뛰며, 연속으로 차원문을 통과하며 혼란을 일으켰다.
케이베른은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는 위드를 보며 표적형 화염 마법을 사용했다.
― 불이여, 응답하라. 나의 적을 태워라!
사방에서 불의 기운이 밀려들어와서 위드의 몸을 태웠다.
“끄아아아아아악!”
― 더 고통스러워해라. 이 미천한 드워프!
“꺅꺅. 우와아아아아악!”
위드는 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도 정면을 주시하며 힘차게 달렸다.
< 불의 정화에 의한 피해를 입습니다.
생명력이 매초마다 570씩 감소합니다. >
‘이 정도면 크게 남는 장사지.’
불꽃의 성배 때문에 화염 피해를 별로 안 입었다. 일부러 아픈 척을 하면서 빙룡 광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연기 대상을 탈 정도로 리얼한 모습.
불덩어리가 되어 고통스러운 듯이 발을 휘청거리고 땅을 한 바퀴 구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교묘하게 차원문을 통과하며 열심히 달렸다.
― 이제 그만 거기 서라! 영혼 속박!
< 영혼이 강제로 속박됩니다.
이동 속도가 85% 감소합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멀어질수록 전투 능력과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
빙룡 광장을 고작 400미터 정도 남겨 놓고 걸린 속박 마법!
얼음 창살의 영향도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였다.
위드는 차원문을 이용하며 달렸지만 속도가 거북이처럼 느려졌다.
― 날쌘 찬바람 : 케이베른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땅의 흔들림을 통해서도 케이베른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모라타의 도로가 깨지고, 건물들이 드래곤의 몸에 부딪쳐서 마구 부서지고 있었다.
‘어떻게 한다…… 찰나의 조각술로 빠져나간다면?’
드래곤과의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하는데, 벌써부터 시간 조각술을 사용하기에는 아까웠다.
― 드디어 잡혔구나!
잠깐 망설이는 동안 어느새 케이베른이 다시 뒤까지 쫓아오고야 말았다.
거대한 드래곤의 돌진이 지상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 날쌘 찬바람 : 케, 케이베른이…… 어서 피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인데…….”
위드가 뒤를 돌아보니 케이베른의 주둥이가 쩍 하고 벌어져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입 사이로 송곳니가 선명하게 보이고, 역겨운 입 냄새까지 퍼져 왔다.
― 오베론 : 위드 님! 접니다!
그 순간, 구원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슈유유우우욱!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강철의 창!
오베론이 던진 창이 드래곤의 왼쪽 눈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며 얼굴을 맞혔다.
― 드워프! 또 드워프로구나!
케이베른이 얼굴에 상처를 입고 분노를 터트렸다.
빙룡 광장에서 기다리던 헤르메스 길드도 어느새 건물의 지붕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맡지.”
바드레이가 선언하듯이 말했다.
* * *
아르펜 제국으로 합류하게 된 헤르메스 길드.
로열 로드 최강의 전사들이란 자부심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륙 전부와 싸워서 졌다. 그것은 다른 어떤 길드도 할 수 없는 일.’
‘아르펜 제국의 대영주들이라고? 그들이 뭔데? 하벤 제국 시절에는 우리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던 자들이 좋은 세상을 만났군.’
‘헤르메스 길드는 최강이다. 다시 우리들의 세상은 온다. 오게 만들고야 만다.’
바드레이를 중심으로 아크힘, 보에몽, 그로비듄, 가우슈, 라미프터 등등.
대륙 전역에 이름을 날리는 유저들이 헤르메스 길드에는 흔하다.
하벤 지역을 지키며,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르펜 제국으로의 합류를 선택했다.
헤르메스 길드가 찢겨지고, 약해지리라는 라페이의 우려는 충분히 들었다. 나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모든 일이 예상대로만 재미없게 흘러가는 것도 아니지.’
‘칼을 쥐고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처할 수 있다. 우리가 무너졌던 것처럼 아르펜 제국이 그러지 말란 법도 없고.’
‘우리가 최고다. 아르펜 제국 내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다음 기회를 노린다.’
헤르메스 길드의 군단장들, 영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르나프 평원에서 지고 난 이후에는 좌절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도 아니었다.
최고의 실력자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는 최강의 세력.
드래곤 사냥에서 모든 유저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힘을 보여 준다면 헤르메스 길드의 이름이 다시 빛날 수 있다.
당분간 아르펜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야 하지만, 다른 대영주들과의 경쟁은 우습기만 했던 것이다.
“모두 출격 준비.”
바드레이의 말이 떨어졌을 때에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전투 준비가 끝나 있던 상태였다.
드래곤이 엄청난 파괴를 할 때에도 두려움보다는 숨을 죽인 채 기다려 왔다. 완벽한 포위망만 갖춰진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가우슈는 죽음의 창을 손에 들었다.
“렌슬럿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와 위드는 존재감이 다르지. 위드를 살리기 위해 빙룡 광장에서 조금 움직인 정도야 이해해 주겠지.”
학살자 칼쿠스도 양손에 두 개의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하나의 검은 드래곤의 몸에 박아 놓기 위한 것. 꾸준히 상대의 피와 생명력을 흡수해서 공격력이 강해지는 마검이다.
창고에 오랫동안 봉인해 놓았던 무기인데 드래곤과의 전투를 위해 꺼내 왔다.
“렌슬럿은 버릴 수 있지만, 우리 헤르메스 길드의 미래를 위해 위드 님은 아니죠.”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위드가 죽고 헤르메스 길드가 이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지 않아도 비호감인 그들은 온갖 흉흉한 소문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 바드레이 : 누구도 의문을 갖지 못하도록 힘으로 증명한다. 그게 내가 이끄는 우리 길드의 방식. 모두 동의하는가?
헤르메스 길드원들의 뜻은 드래곤을 상대로 싸워서 승리하는 것으로 모였다.
어떤 가능성도 그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드래곤과 싸워서 이긴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은 로열 로드 최강의 전사들이었으니까.
‘믿을 수 있는 건 나의 검이다.’
무신 바드레이가 그들을 이끈다.
정치나 세력 확대, 여러 가지를 생각하긴 해도 그들은 언제나 패도의 길을 걸어왔다.
* * *
위드는 헤르메스 길드가 공격을 개시하면서부터 슬그머니 벗어날 수 있었다.
“싸움 구경이란 언제나 재미있는 법이지.”
헤르메스 길드와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
얼마나 흥미진진한 승부란 말인가.
목표로 했던 빙룡 광장이 아닌 상가들이 밀집한 번화가이긴 했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에 평지로 변해 버리고 말리라.
― 기사단 돌격!
헤르메스 길드의 기사단이 창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푸힝!
전투마에는 안대와 귀마개가 덮여 있었다.
드래곤의 위압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고, 기사의 명령에 따라 돌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골목마다 내달리는 기사들이 큰 길로 모여서 드래곤에게 돌진했다.
“전원 거창!”
“던져!”
기사들이 힘껏 창을 드래곤에게 날렸다.
― 휘몰아치는 불길, 전역 천둥!
케이베른도 화염, 벼락, 흑마법, 얼음, 바람 계열의 고위 마법들을 마구 터트렸다.
최소 수십 미터에서 수백 미터 반경에 이르는 광역 마법들이 엄청난 파괴를 일으켰다.
쿠르르르.
모라타의 건물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기사들이 튕겨지고 쓰러져 나갔다.
번개가 떨어질 때마다 도로가 깊게 파이고, 흙더미가 날렸다.
감전된 유저들은 수십 명씩 쓰러지기도 했다.
“위험하더라도 가까이 달라붙어!”
“날개가 우선 목표야. 몸은 때리지 말고 날개를 노려.”
건물 지붕마다 수만 명의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땅에서 무기를 휘두르고, 하늘을 날아서도 드래곤의 몸에 올라탔다.
“힘의 내려치기!”
“어디 맛 좀 봐라. 고통의 꿰뚫기!”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사용하는 스킬들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친 랭커들이 흔히 보인다.
드래곤의 몸에 올라간 유저들이 두세 가지의 스킬들만 쓴다는 것도 눈에 띄는 점이었다.
헤르메스 길드는 중앙 대륙을 정복하며 강력한 전투 스킬들을 마음껏 익혔다.
드래곤을 상대로 관통력이 높은 스킬들을 위주로 쓰고 있었다.
위드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하며 감탄했다.
“잘 싸우긴 하네. 확실히 준비도 잘한 모양이고…… 모범생들이 작정하고 시험 준비를 한 느낌이랄까. 저러니 중앙 대륙을 해 먹었지.”
케이베른의 마법이 작렬할 때마다 백 명이 넘는 이들이 죽어 나갔다.
― 인간들 주제에…… 바람의 절단!
그럼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에 헤르메스 길드의 명성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였다.
“해 볼 만하다. 모두 덤벼!”
“드래곤을 죽이자! 그 영광은 내가 가질 것이다!”
가르나프 평원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부터 사기가 최악을 넘나들었지만 준비가 갖춰진 지금은 달랐다.
― 아르펜 제국 1,000명의 영주!
한 번의 전투에서만 잘 활약하면 꿈에 그리던 영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충분히 목숨을 걸어 볼 만한 일이었다.
방송사마다 중계에 열을 올렸고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 저게 바로 진짜 헤르메스 길드의 참모습이다.
― 베르사 대륙을 제패하던 시절이 보이는 거 같음.
― 그래도 북부는 못 먹었죠. 탈탈 털림.
― 소수 정예…… 그러니까 소수도 아니지만 아무튼 최강의 집단인 건 확실함. 드래곤을 상대로 저 정도로 싸우는 건 아무나 못하죠.
― 중앙 대륙 유저들로 구성된 타격대도 잘 싸워요.
― 에이…… 그래도 수준 차이는 있음. 헤르메스 길드는 보스 몬스터 레이드만 수천 번은 될걸요.
시청자들의 환호까지 자아낼 정도로 드래곤을 상대로 멋지게 싸웠다.
마법에 휘말리거나, 꼬리에 채여서 죽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보일 때마다 전투의 열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 하찮고, 미련하구나! 인간들 따위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케이베른의 발길에 차이는 모라타의 건물들. 제법 멀리 떨어진 건물들도 충격과 마법의 여파로 연달아 허물어졌다.
“크윽. 내 피 같은 건물들이…….”
위드는 돈이 공중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느끼며 절규했다.
전투 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지만 하필이면 그곳이 모라타!
―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모두 죽어라!
집중 공격을 받던 케이베른이 포효하며 드래곤 피어를 터트렸다.
―드래곤 피어에 의해서 신체 능력이 제약을 받습니다.
절대적인 위엄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생명력이 36% 감소합니다.
일시 신체의 마비 증상이 일어납니다.
이동 제약!
9초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부족한 지혜로 스킬 사용이 87% 제약을 받습니다.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하며 실패 확률이 상승합니다.
잘 싸우던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일시에 마비와 공포 상태에 빠져들었다.
도로가 줄줄이 밀려나면서 파괴되고, 건물들은 또다시 일제히 주저앉았다.
“드, 드래곤 피어…….”
“와…… 이거 엄청나네!”
모라타에 있는 구경꾼들은 멀리에서도 숨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쓰러져서 목숨을 잃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반경 1킬로미터 정도의 초보 유저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생명력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처음 당하는 것도 아니라서 대비가 되어 있었다.
투지를 높여 주는 장비들을 사전에 갖춰 놓았고, 사제들의 축복 마법에 의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드래곤이 마나를 회복할 여유를 주지 말고 계속 공격해야 해!”
군단장들의 지휘 아래에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계속 덤벼들었다.
이미 시작된 전투.
드래곤이라는 대적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방어 탑에 설치된 마법공학 대포도 작동을 시작했다.
“발사해!”
빛의 포탄들이 날아와서 드래곤의 거대한 몸에 박혔다.
“궁수 부대. 사격!”
가까이 접근해서 직접 싸우는 이들과, 지붕마다 배치된 궁수들의 일제 화살 공격.
마법사들도 주문을 외우면서 드래곤에게 매초마다 수백여 개의 마법들을 쏘아 댔다.
블랙 드래곤을 상대로 무서울 정도의 화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전쟁이네. 하필이면 모라타가 전투 장소라서 아쉽기는 하지만.”
위드는 파괴되는 건물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도시 곳곳의 판자촌은 불에 타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드래곤 주변의 건물들도 전부 무너져 내렸고, 마법들이 연달아 터지고 있었으니 눈에 보이는 건물들 중에서 멀쩡한 곳들은 거의 없었다.
“드래곤만 이긴다면 뼈를 팔아서라도 복구할 수 있겠지.”
가장 단단한 무기 재료가 되는 드래곤의 뼈.
헤르메스 길드와의 협상을 통해 드래곤의 시체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은 도시 복구에 먼저 쓰기로 했다.
“순진한 인간들…… 어디 가서 사기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물론 그 과정에서 공사비 부풀리기 등으로 상당히 많이 빼돌리는 것은 인지상정!
중앙 대륙을 정복했던 헤르메스 길드라고 해도 어디서 예산 빼돌리기 같은 걸 당해 본 적은 없었으리라.
― 페일 : 타격대는 전투 대기 중입니다. 헤르메스 길드는 희생의 화로를 안 쓰고도 진짜 잘 싸우네요.
페일이 전설급의 궁수 갑옷과 세계수로 만든 하이엘프의 활을 착용하고 타격대의 원거리 부대를 이끌었다. 세계수의 활은 이번에 엘프들을 구해 주고 나서 얻은 것이었다.
위드는 케이베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음. 타격대를 꾸준히 성장시키긴 했지만 헤르메스 길드가 여전히 전투력이 월등해 보이는군요. 보스급 몬스터를 저들보다 더 잘 잡을 수 있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죽을 때마다 속이 시원하긴 했지만, 케이베른을 빨리 사냥하는 것도 원했다.
― 페일 : 슬슬 희생의 화로를 쓰는 2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가 아닌가요?
“그건 바드레이나 아크힘이 판단할 겁니다.”
헤르메스 길드는 아직 희생의 화로를 쓰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현장에서 직접 판단해야 할 문제.
“드래곤의 마나를 소모시켜 놓는 것도 괜찮겠죠. 전투 규모가 좀 크긴 하지만요.”
― 페일 : 케이베른이 계속 지상에서 싸워 줄까요?
“지금까지의 상태로 봐서는 계속 싸울 것 같습니다. 흑마법을 믿고 있을 테니까요.”
헤르메스 길드의 공격이 거세지만, 드래곤이란 워낙에 강대한 생명체.
마법 공격은 화려함에 비해 위력이 거의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케이베른이 여전히 지상에서 싸우는 데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 어둠의 해일!
케이베른이 궁극의 흑마법을 사용했다.
전투를 치르면서 잃어버린 생명력과 죽은 이들을 제물로 발동시킨 흑마법.
어둠이 물결치듯이 퍼져 나가면서 헤르메스 길드원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신성 장벽!”
“거룩한 보살핌!”
“마법 반사!”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어둠의 해일에 대해서 대비가 되어 있었다. 사제들의 축복과 보호 마법으로 견뎌 냈지만 천여 명이 넘는 유저들이 죽어 나갔다.
무지막지한 흑마법에 의해 병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물러서지 말고 달라붙어!”
“몸을 타고 올라가.”
헤르메스 길드의 전사들은 마법 공격을 보고서도 과감하기 짝이 없었다.
대형 마법이 발동된 직후를 기회로 삼아서 드래곤의 다리와 날개를 타고 기어 올라갔다.
“내가 슬래터다! 충격 분쇄!”
“어디 이 울타르의 섬광의 꿰뚫기도 받아 봐라!”
― 꺼져라!
케이베른이 몸을 뒤틀고, 날개를 펄럭여도 매달린 전사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유저들, 드래곤이 잠시만 빈틈을 드러내도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공격하며 몸을 타고 올라갔다.
― 지긋지긋하다. 절대 폭발!
케이베른이 이번에는 화염 계열의 궁극 마법을 터트렸다.
바로 가까운 곳에서 작은 붉은 점이 생성되더니, 급속도로 퍼지면서 대폭발을 일으켰다.
헤르메스 길드원 수백 명이 슬래터와 울타르와 함께 잿더미가 되어서 사라졌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다시 덤벼들었다.
“바람의 길!”
“검의 수호자!”
“별의 기원!”
사제들의 축복을 받은 유저들이 창을 던지고 검을 휘둘렀다.
케이베른이 한 번의 공격을 할 때마다, 땅과 하늘에서 수백 명이 피해를 입고 있었다.
* * *
“크음. 굉장하군.”
“역시 헤르메스 길드입니다.”
미블로스와 드라고어, 미레타스는 멀리 떨어진 황소 광장의 마탑에서 전투를 구경하고 있었다.
건축가, 재봉사, 농부의 정점을 찍은 이들.
넉넉하게 3, 4킬로는 떨어진 장소였지만, 드래곤의 크기가 워낙 커서 잘 보였다.
“뭐가 날아온다.”
“피해요!”
가끔은 마법도 날아와서 인근 지역을 타격했다.
십여 채의 건물이 무너지며 화재가 크게 일어나긴 했지만 금방 유저들이 몰려들어서 꺼 버리는 모습.
미레타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람이 많네요. 모라타에 도대체 몇 명이나 남아 있는 겁니까?”
“잘은 모르지만…… 제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남았습니다.”
드라고어는 모라타가 주요 활동 무대였다.
많은 유저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은 거의 가까운 곳에서의 구경을 포기하지 못했다.
“죽을 수도 있을 텐데…….”
“이런 구경은 돈 주고도 보기 힘든 것이잖습니까. 언제 다시 드래곤과 싸울지도 모르고요.”
미블로스는 내내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케이베른을 정해진 장소로 끌어들이지 못했습니다. 빙룡 광장에 만들어 놓은 함정은 쓰지 못하겠군요.”
건축가들은 이번 전투에 많은 준비들을 해 놓았다.
시가전이 벌어질 때를 대비하여 건물들의 보강과 방어 시설들을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빙룡 광장에는 특별한 함정을 팠다.
케이베른이 오기만 한다면 광장 전체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지하에는 뾰족한 작살들이 거꾸로 꽂혀 있었는데, 모라타의 대장장이들이 협력해서 만든 초고강도 합금!
대륙 전역에서 구해 온 저주받은 유물들을 가지고 주술사들이 대형 몬스터들을 약화시키는 의식도 치러 놓았다.
건축가들과 대장장이들이 마련한 회심의 작품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쓸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오. 다시 쏜다!”
“발사다.”
모라타에서 구경하는 유저들은 볼 수 있었다.
도시의 각 지역에 설치해 놓은 마법공학 대포!
마나를 충전해서 쏘는 대포들이 일제히 케이베른을 향해서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 * *
― 쿠와아아악! 인간들. 쥐새끼처럼 준비해 놓았구나.
케이베른의 몸에 마법공학 대포들이 적중했다.
< 마법공학 대포
마법사들의 마나를 충전하여 무속성의 원거리 발사체를 쏠 수 있다.
물리 피해는 약하지만, 매우 강력한 관통력을 가짐. >
마법공학 대포의 빛이 적중할 때마다 거대한 드래곤의 몸이 휘청하며 밀려났다.
보석을 펼쳐 놓은 것만 같은 드래곤의 비늘도 일부가 깨졌다.
헤르메스 길드가 고대 유물이 있는 던전에서 발굴한 물건.
지금까지 꺼내지 않았던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
전쟁에서는 마법사들의 마법 공격이 훨씬 효과적이었고, 다양한 용도로 운용할 수 있었다.
마법공학 대포는 고정된 위치에 설치해야 했고, 무거워서 운반도 까다로웠으며, 운용에도 막대한 마나를 소모한다.
장점이 있다면 강력한 적의 방어력을 꿰뚫는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일반 몬스터에는 쓸 일이 없었다.
“4포대, 5포대. 발사!”
아크힘의 지휘 아래에 마법사들이 연신 마나가 충전된 대포를 발사했다.
― 다 죽여 주마!
케이베른이 마법공학 대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상의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계속 공격을 하고, 다리와 등을 타고 오르기도 했다.
전쟁!
드래곤을 상대로 완벽한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드래곤의 연기력이 대단하군. 처음 싸우는 거라면 속아 넘어갔겠지만.”
바드레이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싸우는 모습을 냉정하게 지켜보았다.
케이베른이 지상에서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독하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블랙 드래곤답게 스스로의 상처까지 제물로 바치면서 흑마법을 빠르게 충전하기 위함이었다.
“어느 순간이 되면 피해를 되돌려 주는 운명의 거울이나, 생명력을 흡수하는 마법을 쓸 테지.”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드래곤과 흑마법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했다.
희생자의 생명 흡수.
시체들로부터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흑마법.
드래곤의 막대한 생명력을 단숨에 채워 줄 수 있는 궁극의 흑마법이다.
네크로맨서들이 언데드로부터 조금씩 생명력을 전달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가졌지만 제약도 있었다.
모든 역사서들을 찾아보았고, 발동 조건들을 확인해 보니 매우 많은 시체들이 필요하고, 엄청난 마나를 소모하게 된다.
“움트고 있는 생명력. 그 전부를 보여 다오. 뷰 라이프 포스!”
네크로맨서 그로비듄은 가장 먼저 스스로의 레벨과 생명력을 희생의 화로에 바쳤다.
레벨을 1,000으로 맞추고, 흑마법의 의식으로 제물까지 바치며 드래곤의 생명력을 강제로 확인했다.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
심연에서 태어난 …… …
…… …… 죽음으로 … 왕 … 성에서 ……
“…… …”
“인간……. …”
“…… …”
… 파괴…, … 피가 ……, …… ……
케이베른…… ……
생명력 : 86%/100%
마나 : 71%/100%
그로비듄은 드래곤의 상태를 확인하고 길드 채널에 말했다.
“생명력 86%, 마나는 71%가 남았습니다!”
몇 개의 궁극 마법을 터트렸는데도 삼분의 이 이상이 남아 있는 마나!
헤르메스 길드의 전사들과 마법사들이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생명력을 조금밖에는 줄여 놓지 못했다.
드래곤의 마법이 전장을 휩쓸고 있는 데다 높은 물리, 마법 저항 때문이었다.
바드레이나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당연히 그러리라 짐작했다.
레벨 500대의 유저들도 드래곤을 이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가르나프 평원에서 이미 확인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