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각 생명체들의 결의
케이베른의 최후!
블랙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땅에 쓰러졌다.
― 드래곤이 죽었다!
― 우리가 다 함께 드래곤을 사냥했다.
― 승리의 함성을 질러라. 드디어 이겨 냈다! 베르사 대륙의 멸망을 막았다!
모라타에 있는 유저들이 힘껏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드디어 끝났어? 정말?”
“다 끝난 거 맞는 것 같은데.”
온 힘을 다해서 싸웠던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기진맥진해서 주저앉았고, 타격대 유저들도 자신의 동료들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바빴다.
드래곤의 마법이 펼쳐질 때마다 타격대는 백여 명씩이 죽어 갔기에 희생자들이 많았다.
물론 헤르메스 길드의 손실은 막심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특히 마지막 3분여의 시간 동안에는 모든 화력이 집중되면서 피해가 가장 컸다.
마법사 라미프터는 생존자들을 찾았다.
“바드레이 님은 어디에 있죠?”
“대답이 없습니다. 드래곤과 함께 죽은 것 같습니다.”
“아크힘 님은?”
“함께 죽음을 맞이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케이베른의 등에서 마지막까지 싸웠던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8할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군단장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드레이 님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단 말인가?”
“너무 엄청난 공격들이 드래곤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집중되었던 이유 때문이겠지.”
“그건 그렇겠군.”
“마지막까지 버틴 것도 대단한 거지. 바드레이 님이 아니었더라면…….”
“바드레이 님이 우릴 이끌면서 그렇게 잘 싸우실 줄은 몰랐어.”
헤르메스 길드는 자신들의 피해가 크더라도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드레이와 친위대 유저들이 죽은 데는 아군의 공격도 영향을 주었을 테니까.
마법 병단의 화력이 가장 강하게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누가 그 순간에 마법 주문을 멈출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블랙 드래곤의 시체가 떨어진 잔해 근처에서 두 명의 유저가 몸을 일으켰다.
“야. 튀어, 튀어.”
“그래. 서둘러 모라타를 떠나자고.”
마르고와 그랜.
뒤치기의 4인조 중에 살아남은 두 사람이었다.
“크흐흐흐. 제대로 해내고 말았다.”
“쉿. 그건 평생 무덤에 갖고 가야 할 비밀이야.”
“어, 그래.”
케이베른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뒤치기의 4인조는 드래곤을 사냥하겠다고 큰소리로 외치며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속임수!
이틀 전,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야. 우리 너무 착해진 거 같지 않냐.”
“그러게. 그동안 순순히 위드의 말을 듣고 살았지.”
“한 번쯤은 반항할 때도 되었어. 모라타에 불을 지르면서 난리를 쳐 보는 건 어떨까.”
뒤치기의 4인조는 반란을 꿈꿨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모라타에 최고 수준의 유저들이 잔뜩 몰려 있을 텐데, 거기서 우리가 뭘 해 봐야 바로 죽지.”
“위드가 얼마나 보복할지 몰라? 뒤끝이 아마 끝이 없을 거야. 그건 진짜 두고두고 무섭다.”
마르고는 품에서 단검을 하나 꺼냈다.
“나. 솔직히 말하면 독 단검 있다. 전투 중에 써 보는 거 어때.”
“단검? 드래곤을 상대로 단검은 쓸모가 없을 것 같은데.”
“드래곤이 아니라도 먹을 것은 많잖아. 특히 위드나 바드레이라면…….”
꿀꺽!
뒤치기의 4인조는 마른침을 삼켰다.
전쟁의 신 위드.
무신 바드레이.
로열 로드를 하면서 그 엄청난 위명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살아온 그들이었다.
악마가 속삭이는 듯한 마르고의 목소리가 동료들을 유혹했다.
“만약 드래곤 사냥이 성공적으로 끝날 때쯤에는 서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난장판이 일어날 거야.”
“그렇겠지.”
“이 단검의 레벨 제한은 700. 과감하게 희생의 화로를 쓴 다음에 단검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는 거지. 그리고 위드나 바드레이를 노리는 거야.”
“허억! 너무 위험할 것 같은데?”
“무지막지하게 위험하지. 그래도 모두가 드래곤에 집중해 있을 테고,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마법 저항력에 중심을 둔 장비들만 입고 있겠지. 그럴 때 다가가서 쓱. 어때?”
뒤치기의 4인조는 그 말에 전율했다.
자신들의 별명처럼 완벽한 뒤치기의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
마르고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결정타를 가했다.
“드래곤은 목숨 걸고 뛰어들어도 누가 잡을지 아무도 몰라. 쟁쟁한 놈들을 제치고 우리한테까지 기회가 올까? 아마 안 오겠지? 하지만 주변에 널려 있는 헤르메스 길드원이라면? 전투에 지쳐 있고, 사방이 마법과 스킬들로 작렬하는 난장판에서 대여섯 명만 죽인다면…… 위드나 바드레이라면 가장 좋고 말이야.”
뒤치기의 4인조는 간단한 계산을 해 보고 나서도 확실한 이득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들이 마지막 순간 노린 것은 드래곤이 아닌 바드레이!
“으헤헤헷.”
“룰루루.”
마르고와 그랜은 그렇게 바드레이를 죽이는 전투 업적을 달성하고 유유히 모라타를 떠났다.
* * *
― 날쌘 찬바람: 랜도니의 도착까지는 3분 정도 남았습니다.
케이베른 사냥에 성공했지만 모라타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 모두 전투를 위한 정비를!
위드가 사자후를 터트리며 타격대와 헤르메스 길드를 지휘했다.
바드레이와 아크힘이 죽은 이후였기 때문에 헤르메스 길드도 말을 따르게 되었다.
라미프터와 가우슈가 대화를 나눴다.
“후아…… 오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랜도니까진 어렵겠군. 부대를 정비할 시간마저 없어.”
헤르메스 길드는 피해를 수습할 시간이 없었다.
살아남은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볼 시간도 없고, 저마다 물과 음식을 먹으며 다음 전투를 대비하기도 바빴다.
“회복 좀 부탁드립니다.”
“사제님, 어디 없어요?”
랜도니의 도착 전에 부상을 회복하려는 유저들로 정신이 없었다.
일부는 잔해에 우선 몸을 숨기고 습격 기회를 엿보기도 했다.
― 체이스: 랜도니의 전투 방식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오크들을 상대로 브레스나 대규모 마법을 터트리진 않았지만, 그건 무언가를 찾기 위함이었으니 말입니다.
― 스펜슨: 위드 님도 아시겠지만, 레드 드래곤이 드래곤 중에서도 전투력으론 최강입니다. 블랙 드래곤이 흑마법을 써서 까다로운 면이 있지만 강함 그 자체로는 랜도니가 훨씬 압도적이리라 예상합니다.
안 좋은 소식들만 가득.
케이베른을 사냥했으니 곧 랜도니의 분노가 모라타를 뒤덮고 말리라.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씩 웃었다.
“끝까지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지.”
“그래. 여기서 죽더라도 뭐…….”
“마지막까지 싸워 보자는 건가. 이거 진짜 마음에 드네.”
지금까지 멋진 전투를 치러 온 헤르메스 길드였기 때문에, 케이베른을 잡고 나서도 사기가 올라 있었다.
위드는 잔해가 널려 있는 땅에 드러누웠다.
‘우선 대륙의 위기는 벗어나긴 했어.’
케이베른만 없어지더라도 악마들의 왕 클레타의 위협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절반쯤은 폐허가 된 모라타에서 레드 드래곤과의 전투를 준비하는 이들.
― 마판: 라투아스의 도착까지는 15분 정도가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그마저도 지상에서 본 거라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악기 연주 소리들도 들렸는데, 금세 연주가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장중한 협주로 변했다.
살아남은 바드들이 전사들을 위한 연주를 시작한 것이다.
바드 마레이 역시 신들린 듯한 바이올린 연주를 선보이고 있었다.
“화령님이 춤춘대.”
“진짜?”
“엄청 이쁘다더라. 옷도 그냥 아주…….”
“잠깐이라도 보게 가 보자. 어서.”
“볼 건 보고 죽어야지.”
미녀의 춤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헤르메스 길드원들을 일으켰다.
위드는 유저들이 모여 있으면 레드 드래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버려 뒀다.
누더기가 된 이들이 도망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마지막 전투를 치르는 이들에게 잠깐 쉴 시간이라도 주어야 할 테니까.
― 뮬: 공중 팀 피해는 20% 정도 됩니다.
― 페일: 타격대 손실은 대략 30% 이상입니다. 전투 불능에 빠졌던 유저들이 회복되면 조금 더 나아질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병력을 맡은 이들의 보고도 올라왔다.
위드도 들고 있는 짐 때문에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그래. 마지막까지 싸워 봐야지.”
― 마르고: 위드 님, 저희가 해냈습니다.
뒤치기의 4인조로부터 귓속말이 들려왔다.
“뭘요?”
위드는 평소라면 무시하고 말았겠지만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대꾸했다.
― 그랜: 우리 손으로 바드레이를 처치했습니다.
“처치……했다고요?”
위드는 근처에 있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듣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그것도 바드레이를요?”
― 그랜: 캬하하핫. 할마와 레위스가 죽긴 했지만 진짜 숭고한 죽음 아닙니까. 뒤통수를 멋지게 쳐서 잡아 버렸죠!
“에휴.”
위드는 바드레이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가 남아 있었더라면 레드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헤르메스 길드의 힘을 더 집중시킬 수 있었으리라.
‘아무튼 이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뒤통수치는 것밖에 모르는 놈들이야.’
경쟁자인 바드레이를 제거하긴 했지만 그래도 애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
― 그랜: 바드레이가 갖고 있던 검은 아쉽게도 못 얻었는데요. 그래도 바지와 부츠는 획득했습니다. 끝내주지 않습니까?
위드는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둘 중에 하나는 내놔요.”
― 그랜: 넵?
“하나는 상납해야죠. 베르사 대륙을 떠나고 싶지 않다면요.”
― 그랜: 아무리 위드 님이라고 해도 솔직히 좀 아까운데요.
“간단한 질문을 하나만 할게요. 아르펜 제국이랑 헤르메스 길드에 동시에 쫓기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 그랜: …….
“헤르메스 길드는 어차피 타협의 여지가 없게 되었죠. 걔들이 바드레이의 장비를 내놓는다고 해서 보복을 안 할 리가 없어요. 근데 저한테까지 쫓기면 어디로 숨을래요?”
― 그랜: 드리겠습니다.
위드는 악당들에게 착취를 함으로써 바드레이의 죽음을 위로하기로 했다.
그사이에 희생의 화로를 쓴 유저들은 모여서 전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든 남아 있는 병력은 마지막까지 싸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
― 날쌘 찬바람: 랜도니 도착 1분 전. 남쪽 하늘에서 곧 보일 겁니다.
레드 드래곤 랜도니.
케이베른보다도 덩치가 30% 정도는 크고, 훨씬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드래곤.
남쪽 하늘에서 붉은 점이 보이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드래곤과 한 번 싸우는 것도 힘든데, 연달아 두 번이나 싸워야 하다니.’
위드는 모라타에 있는 모든 유저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잘 들으세요. 오늘은 참 기나긴 하루라는 점에서 모두 공감할 겁니다.”
나직하게 말하기는 하지만, 모두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사자후를 터트리지 않아도 황제의 권능으로 모라타에 있는 유저들에게는 충분히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다.
빙룡 광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이 파괴되어서 흑색 거성이나 대도서관, 예술 회관도 천만다행으로 아직 건재했다.
모라타의 판자촌이 다 잿더미로 변했고 상업 시설들이 파괴되었고, 대지는 마법의 흔적들로 깊게 파이고 불탔다.
그럼에도 도시의 절반 정도는 기적처럼 건재했다.
“랜도니와의 싸움. 당연히 쉽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힘이 부족해서 우리들이 다 전멸할 수도 있겠죠.”
현실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미리 이야기를 했다.
전투의 열기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 무리한 요구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랜도니에게 일제 돌격하라는 명령.
이런 무모한 짓을 하라고 하는 대장이 있다면 위드는 절대 따르지 않았으리라.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 확률을 높이고, 피해는 줄여야 했다.
“처음에는 무리하지 말고 드래곤을 지켜봅니다. 간단히 말하지만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 총공격은 금지입니다. 랜도니가 마법을 쓸 수도 있고, 브레스를 뿜어낼 수도 있겠죠. 어떻게든 라투아스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른바 생존 작전.
랜도니의 공격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기에 피해를 입더라도 버티고, 전력을 보존하는 쪽을 택했다.
“그게 맞겠군.”
“그래. 어떻게든 지켜보고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지.”
헤르메스 길드의 군단장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합리적인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레드 드래곤이다.”
“너무…… 압도적이군.”
구름을 뚫고 나오는 거대한 붉은 생명체.
아름답기도 했지만 절대적인 힘의 상징이기도 했다.
케이베른보다도 훨씬 강한 레드 드래곤의 등장은 모라타에 있는 유저들을 질식할 듯한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위드도 꿀꺽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라투아스가 온다는 소식을 안 들었다면 그냥 다 도망치라고 했을 텐데.’
헤르메스 길드와 타격대는 케이베른 사냥에 모든 걸 다 쏟아부었다.
병력이 남아 있다고 해도 전투력은 처음보다 훨씬 못한 상황.
‘어떻게든 살아야 된다. 라투아스가 도착하면 상황은 또 바뀔 테니까.’
위드의 생각에 모라타에 남은 유저들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여기서 죽고 싶진 않다.
케이베른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았으니, 어떻게든 라투아스가 올 때까지 살아서 끝을 보고 말리라.
“어? 빙룡이다!”
누군가가 외쳤을 때에도 사람들은 레드 드래곤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위드도 레드 드래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또다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빙룡! 불사조! 와이번들! 전부 날아오고 있다고요!”
설마 하는 마음에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봤다.
푸르른 동쪽 하늘이었다.
익숙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빙룡과 불사조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고 있었다.
빙룡, 불사조, 킹 히드라, 백호, 나일이, 데스 웜, 은새, 와이번 등, 조각 생명체 군단에게는 일찌감치 모라타 출입 금지령이 떨어졌다.
위드가 케이베른과의 전투를 앞두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 놓은 것이다.
불사조가 무언가를 느끼고 말했다.
― 드래곤. 레드 드래곤이 오고 있다.
불의 정화인 불사조에게는 불의 기운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강렬하기 짝이 없는 레드 드래곤은 불사조도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
― 무섭다. 골골.
금인이는 바위 뒤에 숨었다.
지성을 가진 조각 생명체들은 모라타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알고 있었다.
전투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대기가 떨리고, 땅이 울리는 충격이 먼 곳까지도 전달되었다.
― 주인이 위험하니 우리에게 모라타를 떠나라고 한 것이다.
악어 나일이는 개천에 몸을 절반쯤 담그며 헤엄을 쳤다.
조각 생명체들은 겁이 많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기도 했다.
― 우릴 살리기 위해서…….
누렁이가 커다란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위드의 입장에서는 조각 생명체들이 아까워서라도 피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조각 생명체들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달랐다.
― 주인이 우릴 구박하면서 못났다고 했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던 것 같다.
― 맞다. 우릴 누구보다 아껴 준다. 솔직하지 못할 뿐이다.
― 강하게 키우기 위해 거칠게 다뤘던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빙룡은 과거 위드의 말과 행동들을 떠올렸다.
부족한 힘에 비해 큰 몸집을 가져서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할 때 얼마나 자신을 보며 안타까워했던가.
― 주인이 날 만들 때는 정성을 쏟았다. 눈과 얼음의 폭풍을 견디면서 나를 조각했다.
불사조와 금인이, 누렁이도 당연히 할 말이 있었다.
― 주인은 내 형제들이 죽을 때도 슬퍼했었다.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 나를 잊지 않고 되살려 주었다. 골골. 날 위해 비싼 보석도 잔뜩 썼다.
― 주인이 나를 제일 자주 데리고 다녔다. 내 몸을 보며 진짜 멋지다고 감탄도 해 줬다.
조각 생명체들끼리 경쟁에 불이 붙었다.
여전사 게르니카, 하이엘프 엘틴, 기사 세빌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 내 강인한 육체가 가장 아름답다.
― 하이엘프만큼이나 예쁜 종족은 없지요. 주인님께서 가장 정성을 들여서 날 만들었답니다.
― 정의를 위해 살아가는 주인님을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저입니다. 마음이 중요하지요.
데스 웜이나, 백호, 나일이를 비롯한 조각 생명체들은 대부분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들이 있었다.
강력함의 상징이라거나, 가죽이 비싸고 귀하다거나 하는 우월함!
― 난 맨날 주인을 태우고 다녔다.
― 그렇다. 우리 와이번들이 가장 부지런했다.
― 너희들보다 오랫동안 우린 주인과 함께였다.
대충 조각해서 만들었던 와이번들마저도 슬쩍 끼어들었다.
조각 생명체 중에서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불사조가 가장 먼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 주인이 위기에 빠져 있다. 나는 모라타로 가서 싸울 것이다.
― 같이 가자.
불의 거인이 날렵하게 몸을 날려서 불사조의 등에 탔다.
청개구리처럼 빈둥거리며 말을 안 듣던 빙룡도 오늘만큼은 생각이 달랐다.
― 주인을 구해야 한다. 나도 갈 것이다.
빙룡도 날아오르고, 킹 히드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 골골골.
― 음머어어어어어.
조각 생명체들이 출격하게 된 것이다.
* * *
위드는 모라타로 날아오는 불사조와 빙룡을 보고 당황했다.
“아니, 저놈들이 왜?”
모라타에 접근 금지를 시켜 놨음에도 명령을 따르지 않은 부하들.
빙룡이 날아오며 근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레드 드래곤이여. 모라타는 나 빙룡의 영역이니 썩 물러가라.
그 소리가 대기를 뚫고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위드는 빙룡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레드 드래곤도 당연히 그것을 무시하고 모라타로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점점 커지는 레드 드래곤의 형체.
― 빙룡아, 어서 도망쳐라.
위드가 사자후를 터트려 봤지만, 빙룡과 불사조도 모라타로 계속 날아왔다.
불사조에 타고 있는 불의 거인도 보였다.
― 어서 떠나라니까!
― 목숨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잘 지켜봐라, 나의 힘을. 후으아하아아아압!
빙룡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배가 빵빵하게 불러 왔다.
최강의 무기인 아이스 브레스를 내뿜기 위한 것.
― 콰아아아아아!
빙룡의 아이스 브레스가 거친 소용돌이를 치며 발사되었다.
정확히 랜도니를 향해 일직선으로 대기를 꿰뚫고 날아가는 아이스 브레스.
“이거다. 빙룡의 브레스야!”
“제대로 맞췄어. 선제공격을 날린 거야.”
모라타에 있는 유저들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랜도니의 앞에서 검붉은 용암으로 된 장벽이 일어났다.
허무하게도 아이스 브레스는 용암의 장벽에 부딪쳐서 수증기로 변해 갔다.
빙룡이 온 힘을 다하기는 했지만 레드 드래곤의 마법을 뚫기에는 너무나도 약했다.
― 쿠룩?
브레스를 다 토해 낸 빙룡이 큰 눈동자를 굴리면서 당황했다.
평지를 설원으로 바꿔 버리던 아이스 브레스였다.
수십 마리의 몬스터도 한 방에 얼려 버렸는데, 그것이 마법에 의해 완벽하게 차단될 줄이야.
이것이 진짜와 짝퉁의 현격한 차이.
― 내 차례다. 화염의 격노!
이번에는 랜도니가 반격했다.
이글거리는 수십 미터짜리 불꽃 덩어리들이 생성되더니 춤을 추듯이 너울거리며 빙룡을 향해 밀려갔다.
무시무시한 열기가 지상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 친구는 내가 지킨다.
불사조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빙룡의 앞에 섰다.
불꽃 덩어리들이 밀려와서 불사조를 불태웠지만 깃털이 일부 흩날릴 뿐 무사히 막아 냈다.
화염의 상성을 바탕으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 모라타는 나도 같이 지킬 것이다.
불의 기운을 흡수하며 덩치가 20미터 정도는 커진 불사조!
순수한 불의 정화로 원래의 육체가 220미터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고, 빙룡은 그보다도 조금 더 컸다.
끝없이 타오르는 재료인 카스탈, 대작 조각품 출신인 불의 거인은 불사조를 타고 있었다. 그 역시 100미터가 넘지만 힘을 쓸 때마다 크기가 더 커지게 된다.
드래곤에 견줄 수 있는 초대형 생명체로서 덩치로는 크게 밀리지 않았다.
― 모라타를 파괴하려면 우리부터 이겨야 한다.
불의 거인의 말에 랜도니는 분노했다.
랜도니는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의 길이가 350미터를 넘는 초대형 드래곤.
― 인간들이 위대한 나의 형제를 안식으로 데려갔다. 방해하는 놈들은 모조리 처치한다!
랜도니는 가속 마법을 쓴 채 하늘을 날아서 불사조를 덮쳤다.
― 나도 있다!
불의 거인이 함성을 지르며 불의 칼을 휘둘렀고, 빙룡도 옆에서 레드 드래곤의 날개를 노렸다.
네 마리의 초대형 생명체들이 하늘에서 뒤엉키며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난리냐.”
위드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모라타에서 랜도니를 힘겹게 막아야 할 줄 알았는데, 조각 생명체들이 먼저 나서서 싸우다니.
“든든해 보이네.”
“그것도 소문으로만 듣던 불멸의 불사조야. 불사조가 싸우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드래곤과 불사조, 빙룡까지?”
헤르메스 길드나 타격대나 덕분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잠깐의 여유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의 상황은 조각 생명체들에게 전혀 유리하지 않았다.
― 페일: 위드 님, 빙룡이 너무 위험합니다.
레드 드래곤은 마법력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능력도 월등해서 불사조의 날개를 움켜쥐고, 빙룡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네 마리의 초대형 생명체들이 근접전을 펼치는데 레드 드래곤은 힘이 일방적이라고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불사조가 일부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훼방을 놓거나, 불의 거인이 주먹과 칼을 휘두르지 않았으면 빙룡의 목숨이 위험할 만한 순간도 여럿 나왔다.
― 눈보라!
빙룡이 마법을 사용했지만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공중에서 녹아 버렸다.
마법의 격차가 2, 3단계는 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하늘에서는 눈보라 마법의 영향으로 뜨거운 비가 내렸다.
“빙룡, 이 멍청한 놈…….”
위드는 빙룡의 몸이 점점 녹아서 작아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레드 드래곤 앞에서는 정상적으로 육체를 유지할 수 없었고, 사실 극한의 열기를 뿜어내는 불사조와 가까이 붙어 있는 것도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아직 모라타가 끝장난 건 아닌데. 헤르메스 길드가 싸울 수 있는데.’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느냐의 문제였지, 라투아스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았다.
그나마 불사조에게는 유리한 특성도 있었다.
꺼지지 않는 불의 속성
체력이 완전히 다 사라지더라도 작은 불길만 있으면 되살아납니다.
되살아날 때는 최대 생명력과 마나의 50%씩을 보유합니다.
불사조나 불의 거인은 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다. 그렇지만 레드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빙룡이 살아남을 방법이란 처음부터 없었다.
― 꾸에에에엑! 주인. 우리도 왔다.
― 와이번 와삼.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 우리의 집인 모라타를 지키자.
일곱 마리의 와이번들까지 날아오고 있었다.
“저놈들까지…….”
위드는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론 감동하려는 순간이었다.
와이번들은 레드 드래곤을 제대로 보고는 몸을 돌렸다.
― 저건 우리가 싸울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 급한 일이 생긴 것 같다.
― 모라타에 오지 말라던 주인의 말을 따르자.
날갯짓을 파닥파닥하면서 올 때보다도 신속하게 사라지는 와이번 무리들!
일찍이 전투력으로 빙룡이나 불사조에 비교할 수가 없었으니 도망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 내가 왔다.
― 내려와라, 싸우자!
파괴된 남쪽 성문으로 킹 히드라와 데스 웜도 모라타로 들어왔다.
조각 생명체들 중에서도 엄청난 전투력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드래곤에 견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지상 생명체들의 특성에 따라 하늘을 보며 구경밖에 할 수 없는 처지.
위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평범한 전투라면 제법 도움이 되었을 거야. 하지만 드래곤이다. 희생의 화로도 쓰지 않은 상태에서는 전투에 끼는 것도 무리다.’
그렇다고 조각 생명체들을 강제로 떠나보내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모라타를 지키기 위해 모인 유저들이 배신감을 느끼고 말리라.
‘어쩔 수 없지. 만약에 죽는 녀석들은 되살려 주는 수밖에.’
위드는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우선 땅에 떨어진 얼음 조각과 불씨들을 주웠다.
빙룡과 불사조, 불의 거인의 육체의 일부!
‘희생의 화로를 썼는데, 조각 생명체들까지 다시 살려야 하다니…… 레벨 손해가 막대하겠군.’
그때 랜도니가 마법을 시전 했다.
― 옥죄는 화염.
불사조와 불의 거인은 내버려 두고, 빙룡을 불태우는 화염 마법.
― 크롸라라라락!
빙룡이 몸부림을 쳤지만 화염의 구속은 풀리지 않았다. 거대한 수증기를 일으키며 날개가 먼저 녹아내리면서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빙룡…….”
위드가 애타게 보고 있는데, 모라타에서 수많은 빛들이 솟구쳐서 빙룡을 감쌌다.
이리엔이 조용하던 평소의 말투와는 다르게 큰 소리로 소리쳤다.
“사제 여러분들, 빙룡에게 모두 집중해 주세요!”
모라타의 사제들이 회복 마법을 빙룡에게 사용해 주고 있었다.
그 순간에 오는 짙은 감동!
녹아내리던 빙룡의 몸이 다시 회복되면서 희미하게 원래의 크기를 갖춰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랜도니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작은 희망마저 사라졌다.
― 영혼까지 태워 주겠다.
랜도니의 강렬하기 짝이 없는 파이어 브레스가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
빙룡을 꿰뚫어서 소멸시킨 브레스는 모라타의 일부분까지 잇따라 날려 버렸다.
“대피해요, 대피!”
“모두 빠져나갑시다.”
모라타의 성문들이 활짝 열리고 유저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랜도니의 입에서 토해진 브레스는 빙룡을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리고 모라타를 강타했다.
대폭발이 일어나며 대기가 모여들고, 뜨거운 기운이 상승하며 먼지와 연기를 피워 올렸다.
“버섯구름이다.”
“브레스 미쳤다, 미쳤어.”
― 마판: 라투아스의 도착까지는 7분 정도 남았습니다.
블루 드래곤 라투아스까지도 북부 대륙으로 넘어왔다는 소식에 유저들은 모라타가 초토화될 것을 예상했다.
“왁, 진짜 초대박이네.”
“불사조도 세다. 레드 드래곤은 말할 것도 없고.”
“빙룡은 너무 불쌍해.”
유저들은 고개를 돌려 모라타의 하늘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며 잠깐씩 넋을 놓았다.
드래곤과 불사조가 충돌하는 광경이란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불사조의 붉은 깃털이 하늘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빙룡이 보고 싶어질 것 같아.”
“드래곤은 너무 강하지. 케이베른보다도 훨씬 강한 것 같은데.”
유저들은 빙룡의 최후를 안타까워했다.
“어서 가자. 멀리서라도 보게.”
모라타를 빠져나가는 유저들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목숨이 아깝기도 했지만, 이 멋진 전투를 살아남아서 끝까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 드래곤이 저 정도였나?”
리버스는 공포마저 느꼈다.
모니터로 보던 드래곤을 실제로 겪어 보니 이만한 대괴수가 따로 없었다.
* * *
빙룡의 죽음.
위드는 땅에 떨어져 있던 얼음 조각을 추가로 배낭에 넣으며 말했다.
“조각 재료는 넉넉하군. 생명을 다시 부여할 수는 있겠는데.”
하늘에서는 랜도니와 불사조, 불의 거인이 뒤엉켜서 싸웠다.
전투력으로는 열 배 이상 강한 랜도니라서 압도하고 있었지만, 불사조와 불의 거인은 작은 불씨에도 생명력을 회복하며 되살아났다.
“미치겠네.”
케이베른과 전투를 펼치며 절반쯤 박살이 났던 모라타.
랜도니의 브레스가 남아 있던 건물들을 삼분의 일쯤 부쉈다. 그것도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정도로.
지금은 불사조의 몸 일부분이 잘리며 불덩어리가 되어 모라타로 계속 떨어졌다.
“이길 필요는 없으니 도망치면서 버티기만 해!”
― 알겠다, 주인!
― 그렇게 하겠다.
불사조와 불의 거인은 빙룡이 죽고 나서 더욱 움직임이 편해졌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공중전을 펼치며 불의 잔재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불의 기운들을 흡수할 때마다 생명력을 회복하는 불사조의 불의 거인.
이기진 못해도 속성상으로 어렵게 버티고 있었다.
― 라미프터: 보고만 있지 말고, 마법 지원을 해 주지.
지상의 유저들도 하늘로 화염 마법을 날리면서 도움을 주었다.
불사조는 화염 마법들을 흡수하며 생명력과 체력을 회복했다.
사제들은 보호 마법과 회복 마법도 걸어 주면서 불사조와 불의 거인을 지원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들이 죽고 나면 그다음은 모라타의 차례라는 것을.
― 마판: 라투아스 도착까지 3분 전!
불사조는 몸이 찢겨도 다시 되살아나며 상당한 시간을 벌어 주었다.
불의 거인의 공격은 어쩌다 적중되더라도 레드 드래곤의 피부에 잠깐 불을 지를 뿐이었지만.
― 지겨운 것들. 완전히 끝내 주지. 절대 소멸.
랜도니는 궁극 마법을 발동시켰다.
불이나 바람 같은 어느 한 종류가 아니라, 마법 그 자체의 정점에 달한 마법.
대상자의 육체를 파괴해 버리는 궁극 마법이었다.
― 주인, 힘이 다했다. 더 이상은…….
불사조와 불의 거인이 저항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마법에 집어삼켜지며 소멸되고야 말았다.
― 이제 내 형제를 해친 너희들의 차례다!
랜도니가 지상에 있는 유저들을 향해 포효했다.
― 인간들과 드워프. 아무 가치 없는 족속들 때문에 형제가 이곳에서 죽게 되다니……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위드는 용을 죽이는 도끼를 움켜쥐었고, 다른 유저들도 저마다 싸울 준비를 갖췄다.
조각 생명체들이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다행히 생명력과 체력, 마나가 꽤나 회복되어 있었다.
― 어리석은 놈들. 무의미한 저항을 하려는 것인가.
랜도니는 지상의 유저들을 보며 조소했다. 그리고 마법의 진이 하늘에 넓게 펼쳐졌다.
드래곤으로서도 많은 마나가 필요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 남김없이 멸망하라. 불타는 유성 소환.
“아…….”
“저건…….”
위드와 지상에 있던 유저들이 가진 희망을 남김없이 짓밟아 버리는 궁극 마법이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유성을 소환하기도 했지만, 드래곤이 사용하는 마법은 규모부터가 월등했다.
도시 하나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아돌 정도의 마법력이 사용되고 있었다.
지상까지 내려와서 직접 몸을 움직이며 전투를 하던 케이베른과는 다르다.
레드 드래곤은 최강의 공격력으로 완전한 파괴를 즐기는 드래곤.
마법이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 랜도니!
남쪽 하늘에서 보이기 시작한 블루 드래곤.
바다처럼 푸른빛을 가진 라투아스가 날아오고 있었다.
― 고작 악마들의 졸개가 되어 드래곤의 격을 떨어뜨리는구나.
― 라투아스. 그대가 낄 곳이 아니다.
― 어리석은 놈. 진실에 눈을 떠라. 세상을 파괴하는 건 올바른 길이 아니다.
― 헛소리하지 마라. 나는 다 알고 있다. 인간들을 지켜 주는 드래곤들이 어리석다는 것을.
― 말이 통하지 않겠군. 내 허락이 없는 한, 인간들을 죽이지 못한다.
라투아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강하게 내뿜었다.
아쿠아 브레스!
물의 속성을 가진 브레스가 랜도니에게 쏘아져 나갔다.
랜도니는 아까처럼 용암 장벽을 소환해 막아 내긴 했지만 방어벽을 뚫은 브레스에 몸이 멀리 밀쳐졌다.
― 라투아스, 인간들을 감싸면 너도 죽인다.
― 악마들의 졸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라투아스가 브레스로 선제공격을 하긴 했지만 랜도니가 덤벼들면서 곧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드래곤끼리의 육탄전이라니.”
위드는 전투를 지켜보며 가슴을 졸였다.
천만다행인 점은 불타는 유성 소환이 취소되었다는 점.
랜도니는 극단적으로 강력한 힘과 마법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드래곤들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레드 드래곤.
“라투아스가 밀릴 수도 있으니 우리도 싸울 준비를 해 주세요.”
― 페일: 알겠습니다.
― 칼쿠스: 병력을 잘 회복시키고, 충분히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지상의 유저들은 출격해서 싸울 준비를 했다.
“만약 싸우게 된다면 공중전을 벌여야 할 겁니다.”
― 칼쿠스: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을까요?
“불리하겠죠. 하지만 아까의 상황만 봐도 레드 드래곤이 지상에 내려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법사들이 비행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 라미프터: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법사들이 총동원되면 5만 명씩은 하늘로 띄울 수 있을 겁니다.
위드는 유저들을 준비시킨 채 라투아스와 랜도니의 전투를 지켜봤다.
두 마리의 드래곤이 하늘에서 맞부딪치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상대를 발로 차고, 때리고, 꼬리로 후려치며 뒤엉키면서 목덜미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랜도니는 강한 힘을 가졌지만 싸우는 건 어설펐다.
무식하게 돌진하고, 상대를 물어뜯으려다가 발에 채이고 날개에 얻어맞았다.
“드래곤끼리 뒤엉키는데, 라투아스가 의외로 더 잘 싸우네요?”
― 페일: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전투가 더 능숙한 것 같습니다.
두 드래곤은 근거리 마법 공격도 서로 주고받았는데, 나이가 많은 라투아스의 마법력이 좀 더 강했다.
― 인간들을 죽이기 전에 너부터 찢어 죽여 주마!
― 어리석은 아이야, 케이베른이 없는 이상 나를 이기지 못한다.
생명의 바다, 물의 기원, 바다의 수호자 등.
양쪽이 비슷하게 부상을 입어도 회복과 강화 마법까지 쓰는 라투아스는 장기전을 치를 수 있었다.
10여 분 만에 랜도니는 부상을 입은 채 도망가기 시작했다.
― 다시 돌아오겠다. 그땐 모조리 멸망시켜 줄 것이다.
― 도주를 해? 드래곤으로서 형편없는 짓만 하는구나.
라투아스는 즉시 랜도니를 추격했고, 모라타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며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두 드래곤 모두 마법 저항력이 높아서 물리적인 타격이 주가 되었지만, 추격전이 벌어지면서부터는 궁극 마법들의 향연이 되었다.
― 아쿠아 웨이브.
― 파멸의 손.
― 스타 더스트!
― 지옥불 연소.
궁극 마법이 지상으로도 떨어지면서 호수가 생기고, 산이 무너져 내렸다.
모라타의 남쪽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가는 것이다.
라투아스는 랜도니를 계속 추격했고, 중앙 대륙으로 넘어가는 경계에서는 마침내 결정적인 기회를 맞이했다.
― 드래곤의 수치여. 이걸로 끝이다.
― 아, 안 돼!
라투아스는 부상을 입은 랜도니의 등에 올라탔다. 목을 물어뜯어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했다.
― 크롸라라라라라락!
라투아스의 포효.
길었던 모라타에서의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위드는 잔해에 우뚝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
북부 최고의 대도시였던 모라타가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성도 사라졌네.”
흑색 거성도 언제인지 모르지만 무너졌다.
빛의 광장 부근에는 석조 건물들 백여 채가 간신히 남았고, 예술 회관도 결국에는 파괴되어 있었다.
도로와 광장, 건물들의 터.
어디에도 잔해들만 잔뜩 쌓였다.
나무들은 모두 타 버렸고, 부서진 벽돌이나 건물들이 파괴된 흔적들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
― 마판: 예술품들은 안전한 곳에 다 옮겨 놨습니다. 재건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그래요. 대도서관은요?”
― 마판: 기둥이 몇 개 쓰러지고 벽에 금이 가긴 했지만, 미블로스 님이 당분간 버틸 수 있을 거라 했습니다. 보강 공사를 실시하면 괜찮겠죠.
“다행이네요.”
위드는 피해 상황을 살펴보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모라타를 다시 새로 지어야 되겠네.”
폐허가 된 모라타.
드래곤과 싸우면서 멀쩡한 지역은 오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도 들긴 했지만 잠깐 동안의 감정에 불과했다.
“진짜 승리했다!”
“케이베른을 잡고…… 랜도니도 처치했다.”
“베르사 대륙에 평화를!”
“전쟁의 신 위드!”
잔해 더미에서도 수많은 유저들이 환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기긴 한 건가.”
케이베른의 시체가 마치 산처럼 쓰러져 있었다.
뼈와 피, 살.
모든 것이 귀중한 마법 재료였기 때문에 유저들이 달라붙어 해체하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으리라.
< 죽은 드래곤을 보는 것으로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듭니다.
투지가 9 증가합니다.
힘이 5 늘었습니다. >
구경하는 이들에게는 영구적인 혜택도 부여해 주는 효과.
위드에게는 퀘스트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 창도 떴다.
띠링!
< 드워프 종족 퀘스트를 더 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대륙에 있는 드워프들은 모일 필요가 사라졌다.
종족의 자랑거리인 위드핸드와 드워프 전사들이 케이베른을 해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
< 드워프 종족이 악룡의 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드워프들은 노른 산맥과 울타 산맥의 몬스터들을 정리하고 불과 강철의 왕국을 세울 것입니다.
그들이 잃어버렸던 자긍심을 회복하여, 성장 한계의 잠재력이 개방됩니다.
드워프들의 손재주와 대장장이, 재봉, 조각술, 조선에 10%의 추가 효과가 붙습니다. >
< 종족의 영웅!
위드핸드의 이름은 1년 동안 드워프들이 만드는 모든 무기와 방어구에 새겨질 것입니다.
― 위드핸드. 불같은 그의 삶을 추앙하며. >
― 명성이 100,000 증가합니다.
― 종족 퀘스트를 해결하며 모든 스탯이 8씩 증가합니다.
― 보상으로 손재주의 효과가 5% 늘어났습니다.
― 대장장이 마스터 드워프, 어둠의 대장장이 마스터 드워프들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사브리나 호수의 비약 퀘스트가 중단되었습니다.
악룡 케이베른이 영겁의 어둠으로 돌아가면서 용사의 임무도 끝났습니다.
당신의 용기가 케이베른을 해치우면서 대륙을 구했습니다.
악마들의 왕, 클레타의 계획도 실패하고 말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교활한 악마들이 남겨 놓은 씨앗이 대륙 어딘가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대륙을 구한 영웅이여…….
당신은 더 많은 전투와 모험을 통해 강해져야 합니다.
짙은 어둠이 몰려올 때에, 빛을 세상에 퍼뜨릴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
<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모든 스탯이 10씩 증가합니다. >
< 요정들과 엘프, 드워프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 악마들이 남긴 씨앗을 찾아내야 합니다. 신들과 이 세계의 주민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명은 계속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
위드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내일의 자신에게 미루어 두기로 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치킨부터 한 마리 먹어야 되겠어.”
위드가 접속을 종료한 후 모라타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집집마다 머물러 있던 구경꾼들이 거리로 나왔고, 도시 밖에서도 사람들이 쉬지 않고 들어왔다.
“이게 케이베른이다.”
“이렇게 큰 걸 잡았어? 최고네, 진짜…….”
“아르펜 제국에 승리를!”
거리마다 축제의 분위기.
한편으로 전투에 참여했던 헤르메스 길드원들이나 고레벨 유저들은 여유가 생기니 떠들기 시작했다.
“근데 케이베른은 누가 죽였던 거야?”
“누구지? 드래곤을 잡은 사람은 엄청난 전투 업적을 쌓았을 텐데.”
“KMC미디어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투 업적으로 강해지는 효과로 레벨 10, 20개 정도는 문제도 아니라더라.”
“용의 피? 용의 심장? 드래곤을 직접 사냥한 사람만 그걸 얻는데, 요리를 해서 먹으면 생명력도 엄청 오르고 맷집도 단단해진다고 하고.”
“드래곤의 투지도 생긴데.”
“호칭도 많이 생겼겠지.”
“그런 건 아무것도 아냐. 생명력과 마나가 증가하니까.”
케이베른에게 매초마다 수백 개 이상의 마법이 적중했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죽인 거 아냐?”
“역시 그렇겠지? 제일 가능성이 높은 이들이라면…….”
“먹고 나서 조용히 입 다물고 있겠지. 누가 그걸 소리 내서 떠들겠어.”
“마법사 쪽이 더 유력하지 않을까? 바드레이나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드래곤과 같이 죽어 간 마당에 막타를 칠 때까지 살아 있기도 힘들었을 텐데.”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레벨 200짜리들도 덤벼들었어.”
“확률로는 거의 희박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내용이 아니기는 한데…….”
모라타에서 전투에 참여한 유저들은 악룡에 맞선 영웅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전투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힘과 정신력, 생명력, 투지가 큰 폭으로 늘어났다.
안전한 던전 위주로 사냥한 이들에게는 지금까지 얻은 수치보다도 훨씬 높은 정도.
그렇기에 드래곤을 사냥한 이에 대한 조사가 계속 이어지려고 할 무렵, 곧 소문이 돌았다.
― 케이베른을 제거한 것은 어둠의 살인자다.
― 베르사 대륙 최고의 암살자. 그가 드래곤을 해치웠다.
― 최후의 일격을 가한 그의 정체는 영혼을 파괴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모라타의 유저들 사이로 파고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암살자?”
“아…… 맞네. 원래 막타는 암살자들이 잘 날리잖아.”
“상대가 드래곤인데?”
“드래곤이라도 마찬가지지. 치명적인 일격 펑펑 터트리면서…… 정면이라면 몰라도 암살자 공격력은 강하잖아.”
“어둠의 살인자, 영혼을 파괴하는…… 익숙한 별명인데.”
“양념게장이다!”
어느새 퍼지고 있는 소문이었지만, 유저들이 수긍하기에 충분한 설득력을 가졌다.
― 양념게장이 드래곤을 죽였다.
― 드래곤을 죽인 유저는 양념게장이다!
* * *
“우리…… 얼마나 살아남았지?”
“글쎄요…… 많이 죽긴 했습니다. 하지만 드래곤 사냥에는 성공했군요.”
헤르메스 길드의 고위 랭커들은 모라타에 제멋대로 널브러져서 휴식을 취했다.
드래곤과의 전투는 그들에게도 극심한 피로와 긴장을 안겨 주었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큭큭.”
“마지막에 얻었던 전투 업적은…… 뭐 나쁘지 않았습니다.”
“멋지게 싸웠으니 되었지요.”
가우슈, 칼쿠스, 라미프터, 보에몽.
군단장들은 살아남은 동료들이 몇 안 되는 걸 보며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싸우고, 생존한 내가 승리자지.’
‘경쟁자들의 불행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오늘은 얻은 게 많았다. 아르펜 제국과의 관계도 당분간 우호가 될 것이야. 우리 영지의 특산품인 비취와 수정으로 교역을 적극적으로 해 보는 것도 좋겠지.’
‘내일부터의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헤르메스 길드의 강함은 또다시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이번 전투의 승리에는 위드의 사전 작업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
모라타에서 모든 것을 거는 승부수를 던지고, 퀘스트로 희생의 화로를 준비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영주들로 구성된 다양한 세력을 아우르는 영향력도 가까이에서 확인했다.
― 가우슈: 헤르메스 길드는 당장은 독보적인 강함이 아니라,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아르펜 제국에 협력하는 쪽이 나을 것입니다.
― 라미프터: 저도 동감입니다. 애초의 계획이 현명했던 것 같군요.
― 칼쿠스: 희망도 얻었습니다. 위드의 영향력은 강력하지만 아르펜 제국 내에서 헤르메스 길드의 경쟁자는 없어요. 위드는 어떤 면에서는 독불장군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인 세력은 약하죠.
― 가우슈: 드래곤 사냥은 우리가 해낸 겁니다. 위드가 이끌었다고 해도 헤르메스 길드이기에 가능했던 업적이란 걸 모두가 알아줄 겁니다.
― 보에몽: 목표대로 우린 힘을 증명했습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강력한 힘을요!
군단장들은 아르펜 제국의 체제라도 당분간 지내기에 좋을 것 같았다.
위드를 따라잡긴 힘들지 몰라도, 경쟁 세력들과 격차를 벌이면서 지내다 보면 기회는 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우리끼리 잘만 뭉친다면…….”
“이탈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흑사자 길드? 로암 길드? 저들은 무능하니까요. 위드만 아니면 이미 끝났을 겁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힘을 계속 기릅시다.”
“암요. 우린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 * *
북부의 건축가들.
미블로스와 파보는 폐허로 변한 모라타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강철의 건축물 몇 개가 잔해 더미에서도 건재하긴 했지만 별 의미는 없었고, 도시 전역이 옛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예술 회관, 대도서관이 남긴 했습니다. 예술 회관은 건물 외벽이 좀 부서졌지만 복구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수로가 다 무너져서 흔적마저 사라졌어요. 도시 계획도 다시 짜야 할 판이에요.”
“이 잔해들은 언제 다 치웁니까. 그리고 옛 모라타를 재건하려면 건축 재료들은 어디서 구해 오죠?”
건축가들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대도시를 하나 짓는 것은 오랜 역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
모라타도 북부의 발전과 함께 커지면서 도로와 건물들이 자리를 잡았다.
드래곤이 날뛴 결과 대륙에서 손꼽히던 대도시는 처참하게 파괴되어 부서졌다.
“복구보다는 근처에 새로 짓는 게 빠르겠습니다.”
“모라타를 완전히 이전한다고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임시로 만들어 놓은 거주지를 확장하면서 건물들을 올려야지요.”
“문제가 정말 한둘이 아니겠네요.”
건축가들은 암담한 현실을 맞이했다.
케이베른이 결국 사냥당하고, 대륙에 드리운 위기가 걷히긴 했지만 파괴된 모라타가 그들의 관심사.
건물 한두 개도 아니고, 도시 전체의 재개발이 필요했다.
“이건 도무지…….”
하벤 제국의 황궁을 지어 봤던 미블로스도 고개를 저었다.
모라타가 잿더미와 잔해로 변했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건축가들이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모라타로는 북부 유저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먼 곳에서 구경을 하거나, 텔레비전으로 전투를 지켜봤던 이들.
“여기가 우리 집인가?”
“모르겠어. 다 타 버려서…….”
“잿더미밖에 없네.”
집을 잃은 유저들이 잔해를 정리하고, 얇은 나무판자들을 세웠다.
새로운 판잣집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식당부터 문을 엽시다.”
“그래요.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잖아요.”
“교역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시장도 필요하겠네요.”
“우리 상인들이 어떻게든 물자를 공급해 줄 겁니다. 북부의 모든 상단이 동맹을 맺었어요.”
유저들과 상인들도 광장과 상업 거리가 있던 잔해 더미에서 대충 좌판을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
“자.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드리지요.”
“줄을 서세요. 그리고 제대로 된 자리가 없지만 어디서든 앉아서 드세요. 오늘은 무료입니다.”
드래곤과 전투를 펼치느라 시간이 많이 흘러 곧 밤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배가 고플 유저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 요리사들이 요리 재료를 지지고 볶으면서 음식을 만들었다.
어제 요리 대회에 참가했던 요리사들이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다.
폐허로 변한 모라타에는 좌절만이 지배하진 않았다.
유저들은 벌써 새로운 오늘을 준비하고 있었다.
건축가들은 미소를 지었다.
“내일부터는 재건 사업이 확실히 벌어지겠군요.”
“예. 모라타의 역사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더 크게 펼쳐질 겁니다.”
“모라타의 밤이 화려하게 빛나는 그날이 오겠죠.”
도시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 일이 무척이나 보람되고 재밌을 것 같았다.
* * *
페일은 들리는 소문에 당황해했다.
“양념게장 님이 케이베른을 해치웠다고요?”
“그렇지. 역시 암살자라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한 것 같습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며 파이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페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그는 화살을 쏘면서 양념게장이 케이베른의 마법에 휘말려서 죽는 걸 똑똑히 봤다.
― 그림자 암살법!
양념게장은 죽은 이후에도 전투를 펼쳤다.
언데드로 되살아나는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힘과는 달리, 암살자의 비기로 일정 시간 동안 그림자가 일어나서 싸우는 것.
공격 속도와 치명적인 피해를 두 배나 입힐 수 있게 된다.
그림자가 되어서도 열심히 공격하긴 했지만 결국 소멸되고 말았다.
“최소한 10초는 먼저 죽었는데.”
“예?”
“아닙니다.”
페일의 입은 무거운 편이었다.
확실히 잘 알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진 않았다.
“정말 힘든 전투였네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이긴 것도 기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검치와 수련생들은 전투 중에 전부 사망.
정면에서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드래곤에게 덤벼들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타격대의 유저들도 처음부터 싸우지 않았던 것치고는 많은 희생을 치렀다.
케이베른의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막타를 노린 희생이 어마어마했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던 위드 님의 말씀이 맞았네요.”
“가끔 그는 정말 맞는 말을 하지요. 어떤 통찰력이 있는 것처럼.”
파이톤은 살아남은 것에 대한 자책감마저 느꼈다.
세간에서 그를 대단한 전사로 추앙해 주었지만, 헤르메스 길드가 싸우는 걸 보고 느낀 감정이 많았다.
“위드 님께 따로 작별 인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알아서 전해 주세요.”
“가실 겁니까?”
“더 강해져서 오겠습니다. 10대 금역이나 좀 돌아봐야 되겠군요.”
파이톤은 그렇게 검을 들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페일에게 찾아왔다.
“중앙 대륙의 상인들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모라타 복구 계획에 참여 의사를 밝혔는데요.”
“건축가들이 복귀 계획에 대한 시안을 짜 봤다고 합니다.”
“풀죽신교에서 공식적으로 축제 개최에 대한 문의가 왔습니다. 악룡을 해치웠고, 모라타에서 대륙의 평화를 지켰는데, 다 같이 먹고 마셔야 하지 않겠냐고요.”
페일은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기겁했다.
“이런 얘기들을 왜 저한테 하시죠?”
“위드 님은 쉬러 가셨고, 그동안 모라타 방어전을 준비했던 서윤 님도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
뒤처리를 잔뜩 남겨 놓고 떠나 버린 그들.
페일은 모라타의 축제에서부터 복구에 대한 회의까지 개최해야 했다.
“술이 부족합니다.”
“고기를 조달해야 하는데요. 북부 상단들에 빨리 의뢰를 넣어야…….”
“헤르메스 길드에서 공식 요청이 왔습니다. 대량으로 포도주를 구입해 가고 싶답니다. 정기적으로 구매가 가능한지도 문의가 왔습니다.”
어마어마한 업무가 몰려들고 있었다.
“하……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
페일은 잔해 더미에 앉아서 업무들을 하나씩 기록하고 검토했다.
어렵고 귀찮은 일이 잔뜩 몰려들긴 했지만 책임을 맡은 이상 꼼꼼하게 처리하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위드는 다시 로열 로드에 접속했다.
밥을 먹고, 짧게 낮잠을 자긴 했지만 편히 쉬진 못했다.
“역시 궁금해서 기다릴 수가 없단 말이지.”
모라타에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유저들이 모여 재건 작업이 한창이었다.
― 더 멋진 집을 위해!
― 기대해라. 이번에는 2층집이다.
―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아름다운 집이 모여 있는 곳을 만들어 봐요.
유저들은 멋진 집을 짓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잔해들을 정리하며, 넓은 도로부터 만들고 있었다.
“새로 만드는 도시는 옛 모라타보단 훨씬 좋아야지.”
“모라타의 문화와 정서로 꽉꽉 채우면서도 아르펜 제국의 기원이 되었던 역사를 드러내면 멋지겠어.”
“위드 님께 의뢰해서 케이베른의 대형 조각상을 도시 정중앙에 만드는 것은 어떤가?”
“좋은 아이디어로군. 드래곤과 싸운 도시라는 역사도 자랑해야지.”
기념관이니, 위대한 건축물이니 하는 아이디어들을 내놓는 건축가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잠시 좌절하기도 했지만 유저들로부터 기운을 듬뿍 얻은 것이다.
‘바람직한 모습이군.’
위드는 주변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폐허가 된 잔해 더미로 들어갔다.
전투와 관련된 갑옷과 무기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벗어 버리고, 10골드짜리 여행자 복장을 착용했다.
“으음, 아무도 없지?”
위드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반쯤 파괴된 석조 건물로 들어갔다.
모라타 경비대의 숙소.
일반 유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곳이지만 아르펜 제국의 황제에게는 당연히 허용된 곳이었다.
“여긴 사람들이 안 올 거야.”
모라타의 병사들은 드래곤과의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제부터 도시 밖으로 빼놓았다.
“그럼…… 먼저 할 일부터.”
위드는 배낭에서 불씨가 담긴 재들을 꺼냈다.
이것은 불사조와 불의 거인의 시체!
케이베른과 싸우다가 죽은 그들의 잔해를 챙겨 온 것이었다.
“후후후. 이것만이 아니지.”
손을 넣은 배낭에서 그다음에 나온 것은 케이베른의 뼈였다.
블랙 드래곤이 죽는 순간 챙겼던 물건.
< 드래곤의 뼈: 내구력 800/800
고귀한 생명체에서 비롯된 매우 단단한 물질.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부수거나 가공하기 대단히 힘들지만, 이것으로 만드는 무기나 방어구는 전설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전설적인 대장장이 재료.
전설적인 조각 재료.
옵션: 제작과 관련된 스킬을 1단계 상승시켜 줌.
완성품에는 드래곤과 관련된 옵션이 7가지 부여됨. >
“후후. 이건 그냥 잡템에 불과해!”
드래곤의 뼈마저도 이 순간에는 잡템일 뿐!
“감정!”
< 악룡 케이베른의 심장: 내구력 100/100
지독하게 강대한 마력을 뿜어내는 드래곤의 심장.
흑마법사들이 간절히 바치기 원하는 제물이며, 영구적으로 작동하는 마법 생명체나 마법진을 만들 수 있다.
혹은 요리사들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튀기거나, 찌거나, 굽고, 조금 태우면 먹다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으리라.
전설적인 마법 재료.
전설적인 요리 재료.
주의!
케이베른의 심장으로 궁극의 요리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먹다가 죽을 수 있음.
옵션: 성공적으로 요리를 했을 시에는 먹는 이의 신체적인 능력을 크게 강화해 준다. >
“음…… 흑마법으로 바칠 건 아니니까 이건 어떻게 먹을지 천천히 생각을 해 봐야 되겠군.”
팔 생각은 없는 물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