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조각사 58권
1. 대륙 통일
위드는 사냥터에서 아르펜 제국의 영토가 대륙을 통일하기 직전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케이베른과 싸우면서 잃어버린 레벨을 복구하기 위해 조각 생명체들이 총동원된 상태였다.
“나의 힘을 맛보아라!”
블랙 드래곤의 뼈로 만든 육체를 얻어서 강력해진 빛날이!
“누구든 지킨다. 나를 넘지 못한다. 으랴아아아아!”
철혈의 워리어 바하모르그!
“검을 위하여!”
“다 맞추겠어요.”
기사 세빌과 하이엘프 엘틴이 동원되어서 무섭게 몬스터들을 돌파하는 중.
― 마판: 로자임 왕국과 브렌트 왕국의 영토 65%를 흡수했습니다.
“꽤 많이 했네요.”
위드는 사냥터에 머물며 몬스터를 때려잡으면서도 대륙 통일을 위한 작업은 착실히 진행.
베르사 대륙 전체로 보면 불과 2, 3% 땅만이 아르펜 제국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고 있었다.
남부 사막에서 북부의 끝까지, 대륙의 거의 모든 지방에서 황제로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던전 베탄은 일찍이 공략된 적이 없는 곳이었지만, 조각 생명체들의 무서운 돌파를 막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언데드들까지 몰려갔다.
― 마판: 아르펜 제국의 명성이 악화되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늦어졌습니다. 영주들이 경계하긴 했어도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흡수하지 못하는 땅들이 문제로군요.”
― 마판: 예, 그렇습니다. 로자임 왕국과 브렌트 왕국에서 직접 지배하는 지역이라서 정복해야 될 것 같습니다.
로자임 왕국의 세라보그 성.
브렌트 왕국의 네할레스.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수도 부근은 문화로 정복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리라.
‘세라보그 성이라…….’
위드는 로열 로드에 막 접속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만 하더라도 첫 가상현실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신기했었다.
철저히 연구하고 시작하긴 했지만 몸으로 느끼는 건 경이로운 기적 그 자체였으니까.
초보 수련관에서 허수아비를 치고, 성문 밖으로 나가서 몬스터들을 사냥했던 일들이 모두 추억이었다.
‘리트바르 마굴에서 조각사로 전직하기도 했지.’
위드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세라보그 성에서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던 유저 중에서 이렇게 출세한 사람이 또 있을까.
‘크흠, 그러면 세라보그 성으로 갈 준비를 해 볼까?’
한 달 동안 사냥하면서 레벨은 거의 복구를 해 놓았다.
매일 1.5개 이상의 레벨을 올리는 엄청난 사냥 속도.
케이베른을 처치하고 전투력이 제법 상승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건 조각 생명체들과 언데드 소환 덕분이었다.
그들을 잘 부려 먹을수록 증가하는 사냥 효율.
“똑바로 싸워. 게으름 피우지 말고.”
“알겠다, 주인.”
“몸을 가진 건 좋은데 맨날 사냥만 하는 것 같다.”
“원래 몸은 고생하라고 있는 거야.”
본격적으로 착취당하는 빛날이.
원래 성격이 좋기도 했지만 가끔씩 얼굴을 다듬어 주면 더욱 만족해했다.
“칼리스 님.”
― 칼리스: 예! 위드 황제 폐하.
흑사자 길드의 칼리스.
툴렌의 대영주이기도 한 그는 소위 말하는 군기가 들어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까지도 합류한 아르펜 제국의 기세에 잔뜩 눈치를 보아야 했으니까.
“로자임 왕국을 정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위드는 몇 마디의 설명을 더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생략해 버렸다.
여러 말 꺼내지 않아도 금방 알아들으리라 믿었으니까.
― 칼리스: 흑사자 길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당장 병력을 로자임 왕국의 접경 지역으로 출발시키겠습니다.
“로암 님.”
― 로암: 예, 폐하. 말씀만 하시지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영주들이 위드에게 폐하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한때 바드레이가 받긴 했지만, 이제는 아르펜 제국 내에서는 공식적인 칭호.
한두 명이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해졌다.
“로자임 왕국을 쳐야 합니다.”
― 로암: 드디어…… 그날이 왔군요. 케이베른 사냥 이후로 로암 길드에서는 대륙을 통일하는 날을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잘 알아들었다.
“로자임 왕국으로 가죠.”
미헬이나 군트, 샤우드에게도 귓속말을 보냈다.
― 미헬: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대륙 통일을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 군트: 폐하께서 출정하시는 날을 기다리며 황금 마차를 제작해 놨습니다. 소 20마리가 끄는 마차입니다.
― 샤우드: 역시…… 대륙의 주인이 되실 분은 위드 님뿐입니다.
다들 속마음은 다르겠지만 아부만큼은 확실히 늘었다.
그들도 같이 엮인 시간이 길다 보니 위드가 아부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아부를 잘한다고 해서 어떤 특혜나 호의를 베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로자임 왕국으로 갑시다.”
― 뮬: 옛! 알겠습니다. 그리폰, 와이번 군단도 출동합니다.
헤르메스 길드 소속이었던 뮬.
그라디안의 영주이기도 한 뮬까지 출동시키기로 했다.
공중 병력까지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멋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좋았으니까.
* * *
로자임 왕국의 국경 부근에 병력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중앙 대륙의 영주들이 군대를 이끌고 왔고, 알카트라가 이끄는 아르펜 제국군도 진열을 갖추었다.
음머어어어어.
푸흥!
소 떼에 탄 기사들의 모습은 아르펜 제국군만의 독보적인 모습.
“저게 아르펜 제국군이구나.”
“나 처음 보는 거 같아.”
구경하는 유저들의 눈빛에 알카트라가 부끄러움을 느꼈다.
헤르메스 길드 소속으로 북부를 공격하고, 그 이후로 당시에는 아르펜 왕국으로 합류했다.
왕국군을 맡아서 병력 증강과 훈련에 꾸준히 힘을 쏟았지만 대규모 전투에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헤르메스 길드와 맞붙는다면 반나절도 안 되어서 몰살당하리란 것이 객관적인 수준.
그럼에도 북부의 유저들 중에는 알카트라의 헌신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케이베른 사태만 하더라도 북부의 각 지역에서 몬스터 군단을 치열하게 막아 내며 숱한 마을들을 구했다.
“고맙습니다, 알카트라 님. 덕분에 살았어요.”
“별말씀을요. 저희는 이 부근의 몬스터들을 소탕하고 다른 곳으로 또 가 보겠습니다.”
“정말 바쁘게 움직이시네요.”
“북부는 저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아르펜 제국군도 최근에는 병력이 꽤나 확충되어 있었다.
기사 유저들이 많아지면서, 전투가 벌어지면 말이나 소를 타고 와 자유롭게 참전한다.
기사들은 전장에 가는 것만으로도 공헌도와 명성을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많이 모였다.
“로자임 왕국과 브렌트 왕국만 끝내면 아르펜 제국이 대륙을 통일한다!”
“정복이다, 정복! 야호!”
“아르펜 제국이 정복 전쟁에 나설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영토가 조금 남았는데 대륙 통일을 안 하기도 무리잖아. 두 왕국의 유저들도 원하고 있고.”
“그건 그렇지.”
기사들은 아르펜 제국에 속하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최초로 대륙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면 그들에게도 특별한 업적이 부여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 꾸우와아아아앗!
하늘에서는 뮬의 그리폰 군단이 보였다.
케이베른이 처치되고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 새끼 그리폰들도 데리고 왔다.
“작은 날개를 펼치고 따라다니는 새끼 그리폰들이 진짜 귀엽네.”
“한 마리 키우고 싶다. 먹는 거만 해결되면 정말 키우기 좋을 텐데.”
브리튼 지역으로 넘어가는 바로크 산맥을 등지고 모여드는 유저들.
수많은 유저들이 아르펜 제국군이 로자임 왕국의 국경을 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드 님은 언제 오시는 거지?”
“글쎄…… 슬슬 오실 때가 되지 않았나?”
그 순간이었다.
― 크롸라라라라락!
흉포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산맥의 봉우리 위로 드래곤만큼이나 거대한 새들이 나타났다.
바라그 부대!
게이하르 황제가 남긴 조각 생명체들이기도 하며 난폭하기 짝이 없는 전투 병력.
유저들의 눈에 위드가 바라그의 등에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위드 님이다!”
“드디어 왔어.”
지상에 도열해 있는 아르펜 제국군의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 오셨다.”
“모두 함성을 질러라.”
“후아! 후아!”
대략 30만에 달하는 제국군 병력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기사 유저들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욱 많아진다.
푸히힝!
소들까지도 투레질을 하면서 그들의 황제를 영접했다.
“한마디만 해 주세요!”
“노래를. 전투를 위한 노래를!”
유저들의 성화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로자임 왕국과 브렌트 왕국.
전쟁이 남아 있긴 했지만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위드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이겼을 텐데, 이만한 병력까지 끌고 왔으니 멋진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했다.
― 도시가스가 무엇이냐.
겨울에도 추운 밤이 지나면 해가 떠오르지.
위드도 흥분에 빠져서 노래를 시작했다.
첫 음부터 옥타브를 잔뜩 올리고, 박자 따위도 무시한 채 내지르는 거친 목소리.
― 어릴 때부터 꿈을 꾸었네.
잘 먹고 잘 살리라는 꿈을.
등이 따뜻하고 싶어서,
배가 부르고 싶어서 서럽게 울었던 것 같아.
노래는 뭔가 엉망진창이었지만 감정 하나는 제대로 전달이 되었다.
배고프게 살아온 과거, 막연하지만 무언가를 해내고 싶었던 시절들.
― 나는 무엇일까.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몰랐어.
자존심이 밥을 먹여 주지 않는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알았지.
우는 것도 사치.
눈물은 약해지게 만들 뿐.
달려라. 달려.
몬스터를 때려잡았네.
막 두들겨 패.
이것은 내 밥줄.
두둥! 두둥!
누군가 절묘하게 북을 두들겼다.
아르펜 제국 기사들이 타고 있는 황소들이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는데, 위드의 노래에 반응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
― 해가 떠오른 모든 땅에 있는 아르펜 제국이여.
치킨을 먹고,
농사를 지어라.
삼겹살을 굽고,
물건을 팔아라.
시원한 맥주를 마시려면,
사냥을 해라.
부지런히 살면 좋은 일이 생기지.
인생에는 노가다가 필수야.
“아…….”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어. 가사가 어렵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가난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열심히 살자는 의미 아닌가?”
“대략적으로는 그게 맞는 것 같지?”
위드의 노래를 듣는 유저들은 국어 시간에 주관식 정답을 맞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꿀꿀, 꽥꽥, 꼬끼오!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이네.
힘이 들어도 같이 걸어가자.
즐겁게 노래하면서.
살아가자.
어리던 나를 보며 안아 주었던 그분들.
그 따뜻한 품을 잊지 말고,
살고, 살고, 살아 보자.
위드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하품을 할 때에나 나오던 눈물이, 과거를 떠올리니 흘렀다.
고생을 한 건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견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에는 선명하더라도 다시 불러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르펜 제국군이 당당히 세라보그 성을 향해 진군했다.
“전군 진형을 유지하라. 기사들이 앞에서 길을 열어라.”
알카트라가 총사령관으로서 부대를 이끌었는데, 국경을 넘어온 이후로도 로자임 왕국의 군대는 보이지도 않았다.
“투란 마을의 영주가 병력을 데리고 왔습니다. 100명의 병사가 합류했습니다.”
“베이커스 마을에서도 영주가 찾아왔네요. 25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기사도 3명 있습니다.”
“달탄그라 요새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했습니다. 기마병만 1,000명입니다.”
로자임 왕국 출신의 영주들이 경쟁적으로 병력을 데리고 왔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위드 황제 폐하.”
“로자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영주들이 바짝 긴장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들에게도 헤르메스 길드를 제압하고 중앙 대륙을 통일한 위드라면 자신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일반 유저들과는 위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와 줘서 고맙군요.”
“저희들이 선봉에 서겠습니다.”
“아뇨. 우선 뒤를 따라오도록 하세요. 전투에는 나서진 않아도 됩니다.”
위드는 투항한 영주들의 병력은 써먹을 생각이 없었다.
‘세라보그 성이 많이 깨져서는 곤란하지.’
중앙 대륙의 대영주들이 이들보다는 훨씬 믿을 만하다.
세라보그 성의 함락전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피해로 점령하는 것.
아르펜 제국은 지금도 모라타를 복구하는 데에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고 있었다.
위드는 미헬, 칼리스, 로암 등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절대 불을 내면 안 됩니다. 정복도 좋지만 건물에 불이 나면 불부터 끄세요.”
“알겠습니다.”
“성문도 가능하면 부수지 마세요. 그것도 다 돈이니까요.”
“넵?”
“로자임 왕국 병사들도 막 죽이고 그러면 안 됩니다. 정복하고 나면 민심 나빠져요.”
“…….”
웃으면서 여유롭게 왔던 대영주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어떻게 점령하죠?”
“그건 여러분들이 이제부터 고민해 보셔야죠.”
“…….”
위드는 황제가 된 후 훨씬 더 편해졌다.
귀찮고 힘든 일이 있으면 유능한 이들에게 맡겨 놓고 뒷짐을 지고 있으면 알아서 해결이 되는 것이다.
“직접 다 관여할 필요는 없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알아서 해 주겠지.”
권력의 달콤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영주들도 정말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저들이 왕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군대를 운용하기가 쉽습니다. 편안하지요.”
“성벽은 무시하고 날아서 넘어가거나 하고, 적 병사들은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재웁시다.”
“좋은 의견이군요. 안 죽이고, 건물 안 부수고 싸워야 되지만……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왕국 기사들이나 병사들의 수준으로 우릴 해칠 순 없으니 느긋하게 싸워도 될 것입니다.”
대영주들은 고레벨의 실력자들을 길드에서 잔뜩 데려왔다.
대륙 통일의 위업이 달성되는 순간이라서 유저들의 관심도 받기 쉬웠다.
희생의 화로를 쓰지 않았던 그들은 어부지리로 로열 로드에서 최상위권의 레벨들을 갖고 있었다.
“정지!”
“모두 차분하게 전투 준비를 하자!”
세라보그 성문 앞의 평원에 병력이 넓게 진을 쳤다.
로자임 왕국의 다른 도시와 성들도 남아 있긴 하지만, 왕성이 정복되면 대부분은 항복하게 되리라.
위드는 바라그의 등에 탄 채로 하늘을 날았다.
세라보그 성에서는 중앙 광장과 훈련소, 분수대, 상업 거리 등. 수많은 유저들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위드 님이 오셨다!”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위드 님!”
“아르펜 제국 만세!”
“풀죽! 풀죽!”
로자임 왕국 유저도, 구경을 온 북부의 유저도 뒤섞여 있었다.
위드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환영해 주는 유저들에게 답례를 했다.
‘성문과 성벽에는 꽤 많은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군.’
로자임 왕국의 왕성이 있기에 병사들만 해도 5, 6만은 되어 보인다.
당연하게도 유저들이 로자임 왕국의 편에서 성벽을 지킨다고 나서는 이는 드물었다.
“이번 임무는 저에게는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기사 수행을 다녀오겠습니다.”
“그냥 아르펜 제국에 항복하시지요. 위드 님은 엄청 좋은 분이랍니다.”
로자임 왕국의 기사 유저들도 손을 떼고 나갔고, 그럼에도 수십 명 정도는 충성과 의리를 선택했다.
“아이고. 죽을 자리더라도 싸워야지. 지금까지 퀘스트 한 번 포기해 본 적이 없는데.”
“적이 국경 안으로 침략했다고? 하필 아르펜 제국이네. 하벤이라면 기꺼이 싸울 텐데. 뭐 이러나저러나 죽긴 마찬가지겠지만.”
“그냥 한 번 죽어 주자.”
기사 유저들은 명예와 충성을 지키지 못하면 악명이 쉽게 붙어서 잘 사라지지 않는데, 그래서 차라리 목숨을 내놓을 작정으로 전투에 나섰다.
위드는 사자후를 터트렸다.
― 공격하라.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게 하고, 무엇도 파괴되지 않도록 해라!
“응?”
“무슨 말이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유저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구경을 위해 와서 아르펜 제국과 함께 싸우려던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자. 이젠 우리들의 시간이다.”
“무기는 꺼내지도 말자고. 괜히 병사들 잡으면 안 되잖아.”
레벨 500 이상의 유저들만 먼저 나섰다.
케이베른 사냥을 함께했던 타격대 소속의 유저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먼저 성벽으로 달려갔다.
< 세라보그 성에서 공성전이 발생했습니다.
아르펜 제국의 침략!
유저들은 공성전에 참여하여 아르펜 제국이나, 로자임 왕국의 편에 설 수 있습니다.
전투의 결과에 따라 국가 공적치와 명성, 업적이 부여됩니다. >
“쏴라!”
“적의 군대가 성벽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라!”
로자임 왕국군이 화살을 쏘고, 외부로 조준되어 있는 투석기를 발동시켰다.
고레벨 유저들은 거뜬히 피하거나, 그냥 몸으로 맞으면서 전진했다.
성벽에서는 얌전히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갔다. 괜히 공격 스킬을 써서 성벽이 파괴되기라도 하면 위드의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 뮬: 우리도 나서겠습니다.
그리폰 부대는 성벽을 단숨에 넘어서 세라보그 성 안에 고레벨 유저들을 투입시켰다.
“힘 조절 잘해.”
“조심해서 살짝살짝씩 때려!”
아르펜 제국의 유저들이 로자임 왕국군을 거뜬히 제압했다.
마법사들은 대규모로 수면 마법을 사용해서 푹 재우는 방식을 선택했다.
심지어 흑사자 길드에서는 감기 걸리지 말라고 모포를 꺼내 덮어 주는 매너까지 발휘.
“저것이 아르펜 제국의 병력…… 너무나도 무섭군.”
“항복입니다, 항복!”
“목숨만 살려 주세요.”
전투가 벌어지고 불과 5분도 되지 않아서 성벽 부근의 로자임 왕국군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압도적인 전투력이 있기도 했지만, 바라그 부대가 슬쩍 근처에서 날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려서 싸우려고 들지 않았다.
“아르펜 제국의 황제는 악룡 케이베른도 사냥한 분이야.”
“그가 해낸 모험들은 감히 우리로서 감당할 수 없지.”
“저분이 아르펜 제국의 황제 위드……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무서워.”
위드의 카리스마와 투지. 그리고 수많은 전투 업적들이 병사들을 굴복시키는 역할도 했다.
“아, 어쩔 수 없네. 조금은 저항해 보려고 했는데…… 저희도 항복입니다.”
로자임 왕국 편에 섰던 유저들도 두 손을 들었다.
위드는 바라그를 탄 채로 외쳤다.
“주요 거점들도 정복하고, 오늘 안에 세라보그 성을 정리합시다. 그다음에는…….”
다음 정복 지역을 말하려고 하던 찰나.
흑사자 길드의 드워프 전사 빈델이 말했다.
“축제입니까?”
“예?”
“오늘은 존경하는 위드 황제 폐하께서 로자임 왕국을 정복하는 기쁜 날인데, 세라보그 성에서 맘껏 마시고 놀아도 될까요?”
“…….”
로자임 왕국의 유저들은 두 손을 들어 환호했다.
“만세! 축제다!”
“로자임 왕국에서도 축제가 벌어진다.”
“실컷 먹고 마시자. 이젠 우린 아르펜 제국 소속이야.”
“위드 님 최고예요!”
* * *
세라보그 왕성.
드높은 명예와 친밀도를 쌓은 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장소.
왕국 기사들과 왕성의 경비병들은 레벨이 300대에서 400대에 달하는 최정예였다.
“여기서부턴 우리가 맡겠습니다.”
아르펜 제국군을 책임지는 알카트라가 길을 열었다.
그가 선두에 서고, 제국군 기사 유저들 중에서 레벨이 높은 이들이 함께 싸웠다.
아무도 죽이지 않도록 하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무난하게 정리하고, 대전까지 바로 들어갔다.
국왕과 귀족들 그리고 서른 명 정도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히 네놈이 이 땅을 침략하다니!”
로자임 왕국의 국왕은 윈스터!
과거에 전대 왕이었던 시오데른의 의뢰를 받아서 피라미드를 만든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위드도 만나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침략이라…….”
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것은 가볍게 인정해도 되리라.
“우리가 침략한 거 맞습니다.”
“횡포다. 큰 제국이라고 해서 작은 왕국을 짓밟아도 되는가.”
띠링!
< 로자임 왕국의 국왕 윈스터 로자임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지역 주민들의 충성도와 국가 명성에 변화가 생깁니다. >
정복 전쟁에 있어서도 명분은 필요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명문 길드나 헤르메스 길드는 영토를 넓히면서도 명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강제로 정복한 이후에 군사력으로 반란을 억제하면 되었고, 치안이 떨어진다고 해도 감당했던 것이다.
아르펜 제국의 입장에서는 대륙 전역을 지배해야 했기 때문에 솔직히 로자임 왕국까지는 신경 쓰기도 어려운 처지.
‘바라그 부대를 보내서 초토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다 국가적인 손해란 말이지.’
위드는 독재를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르펜 제국은 자신의 소유물이었다. 그렇기에 가볍게 입술에 침부터 발랐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릴 침략한 것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뻔뻔하게도 그런 거짓말을!”
국왕의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위드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을 물리쳤지만 대륙의 위기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로자임 왕국보다는 힘이 있는 제국이 사람들을 지켜 줘야 합니다. 악마들의 왕 클레타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대륙의 평화를 위한다는, 언제든 먹히는 명분!
띠링!
< 명성과 업적의 영향으로 왕실 기사들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왕실 기사들은 현재의 국왕 윈스터에게 많은 실망을 해 왔습니다.
욕심만 많고 무능한 그보다는 절대적인 명성을 쌓고, 세상을 구한 영웅이 로자임을 지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메시지 창이 슬며시 힌트를 주고 있었다.
“로자임 왕국은 우리끼리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엠비뉴 교단에 위기가 생겼을 때에도 망할 뻔했었지요. 케이베른 사태에서도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로자임 왕국은 제가 없었더라면 두 번은 멸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저에게 맡겨 주시지요. 주민들을 잘 보살피고, 기사들을 명예롭고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국왕 윈스터는 왕실 기사들의 손에 의해 쓸쓸히 자리에서 끌려 나왔다.
위드가 대전의 왕좌에 앉자 메시지 창이 떴다.
띠링!
< 로자임 왕국이 항복했습니다.
세라보그 성과 그 주변 영토가 아르펜 제국으로 합류합니다.
지역 영주들의 일부가 끝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국가 명성이 7 증가했습니다. >
저항군이라고 해도 대단하진 않는 수준.
로자임 왕국의 유저들이 이미 아르펜 제국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알카트라 님.”
“옛.”
“저항군을 정리해야 되겠습니다. 이번 주 내로 처리하고 브렌트 왕국을 정복하러 가죠.”
“알겠습니다.”
“근데 한 명도 죽여선 안 되고, 건물의 손상도 없어야 됩니다.”
“그게…….”
“할 수 있겠죠? 못하겠으면 헤르메스 길드 데려올까요?”
“어떻게든 해내겠습니다.”
브렌트 왕국을 정복하기는 더 쉬웠다.
베르사 대륙 통일의 마지막!
전 대륙에서 수많은 유저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아르펜 왕국의 편에 서서 브렌트 왕국 기사들을 한 명씩 무장 해제시켰다.
“비폭력! 비폭력!”
“마법사들이 재워요. 편안하게요!”
왕성으로 진군하는 마법사 부대만 수만 명이 넘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학살자 칼쿠스의 전사들과 라미프터가 이끄는 마법사들이 참여했다.
“우리까지 와야 합니까?”
“대륙이 통일되는 날인데 그래도 자리는 지켜야지요. 당분간 위드의 눈치를 봐야 하니 말입니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불편한 기분을 안고 찾아와서 브렌트 왕국의 네할레스 성 함락을 구경했다.
“내성의 성문을 제압했다!”
“왕궁 기사단 항복!”
“기사들이 일제히 투항하고 있습니다.”
브렌트 왕국은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병사들이 몇 번의 화살을 쏘기도 했지만, 오베론이 이끌고 온 드워프 전사들이 몸으로 맞으면서 걸어가서 제압.
“황제여. 당신의 뜻에 따를 테니 목숨은 살려 주시오.”
브렌트 왕국의 국왕이 선뜻 항복하면서 전투는 30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 브렌트 왕국이 항복했습니다.
네할레스 성이 아르펜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제국의 뜻을 저항하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국가 명성이 50 증가했습니다.
대륙 전역의 교역로가 안전합니다.
상업의 발달을 촉진합니다.
인구가 대대적으로 증가됩니다.
제국 기사들과 병사들의 충성심이 최대가 됩니다. 현재의 상태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민들은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아르펜 제국의 황제의 위엄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
“아르펜 제국 만세!”
“드디어 베르사 대륙이 하나가 되었다.”
“위드 만세!”
“위드 황제 폐하 만세!”
네할레스 성에는 왕성과 광장, 거리에 넘치도록 많은 유저들이 있었다.
중앙 대륙과 북부에서 찾아온 유저들이 꽃가루를 뿌렸다.
“우리도 해 볼까?”
“그러자. 그럼.”
빛의 마법사들은 하늘로 마법을 사용했다.
형형색색의 빛들이 아름답게 수를 놓으며 아르펜 제국의 대륙 정복을 축하했다.
위드는 공포를 자아낼 수 있는 바라그보단 와삼이의 등에 탄 채로 그 모습들을 지켜봤다.
“크흠. 드디어 이런 날이 오다니…….”
― 주인, 울고 있는 건가?
“아니야. 눈에 조금 먼지가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야.”
사막처럼 메마른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눈가에 눈물이 조금 맺혔다.
그동안 고생했기 때문에 우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생각하며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세금을 거두기만 해도 먹고 살겠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부자가 되어서 사는 거야. 매달 월세를 받는 것처럼 세금을 거두면…….”
전 대륙의 주민들이 세입자와 마찬가지!
그리고 로열 로드의 모든 유저들에게 메시지 창이 떴다.
띠링!
< 아르펜 제국이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북부의 작은 마을 모라타에서 시작된 아르펜 제국이 전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드워프, 엘프, 오크.
대륙을 주도하는 네 종족들이 아르펜 제국의 지배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베르사 대륙의 모든 영토를 정복했습니다.
사막과 호수, 험한 산맥과 얼어붙은 땅까지 아르펜 제국의 통치력이 구석구석 미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위드에게만 뜬 메시지 창!
< 베르사 대륙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아르펜 제국의 황제!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기 어려운 정복자의 업적을 최초로 달성한 유저입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십시오.
막강한 권력을 만끽하십시오.
대륙의 전역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이 당신의 지배를 따릅니다.
정복 업적으로 모든 스탯이 100씩 증가합니다.
정신력, 명예, 투지, 기품의 효과가 40%씩 늘어납니다.
명성이 알려지는 효과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모든 인간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입니다.
대륙의 각 종족들이 희귀한 공물들을 가지고 찾아올 것입니다.
지배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대륙을 바꿔 놓게 될 것입니다.
다른 종족과의 교역이나 새로운 세계로의 탐험, 기술 개발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신이나 악마의 뜻을 받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베르사 대륙이 움직입니다. >
베르사 대륙의 통일.
그 위대한 업적을 이룬 위드는 입가를 끌어 올리며 씩 웃었다.
“마판 님.”
― 마판: 옙!
마판은 아직 모라타에 머물고 있었다.
전후 복구 작업이 한창이기도 했지만, 대륙 통일이 예정되면서 모라타의 엄청난 농작물과 식료품들을 운송하는 업무도 맡았다.
“상단들은 전부 준비가 되었죠?”
― 마판: 물론입니다. 북부 상단들을 비롯하여 대륙의 모든 상단들이 동원되어 오늘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지금부터 일주일입니다. 모든 물자들을 푸세요.”
― 마판: 전달하겠습니다. 계획대로 지역의 수도와 대도시에서 동시 개최하겠습니다.
아르펜 제국의 대륙 통일 축제!
일찍이 없었던 규모로 개최되어서 술과 음식을 풀 예정이었다.
물론 특별한 날이니만큼 평소보다 약간의 바가지 정도는 씌워야 마땅하리라.
* * *
“아…….”
흑기사 길드의 헤겔은 위드가 대륙 통일을 했다는 메시지 창을 보고 아랫배가 심하게 아파 왔다.
“사람 인생 모른다더니 정말 이렇게 되는구나.”
대학교에서 봤을 때만 하더라도 흔히 별 볼 일 없고 만만한 복학생으로 보였다. 지금은 아는 사이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로암 길드의 로암이 헤겔을 찾아왔다.
“위드 님을 안다고요?”
“예. 같은 학과에 다녀서요.”
“수업도 같이 들었고요?”
“당연하죠. 밥도 같이 먹었는데. 물론 그 형은 서윤, 그러니까 풀죽여신 님이랑 자주 먹었지만요.”
헤겔은 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기름칠을 잔뜩 했다.
“엠티도 같이 갔고, 모험도 한 적이 있죠.”
“위드 님과 모험까지요?”
“네. 뭐 별건 아니었어요. 멜버른 광산도 사실은 같이 갔었던 거죠. 흑사자 길드에선 다들 알고 있지만요.”
형인 드워프 전사 빈델을 통해서 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속사정은 그렇게 친하진 않단 점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길드의 사람들은 헤겔이 위드를 개인적으로도 안다는 점만 퍼졌다.
“요즘도 연락하세요?”
“서로 바빠서요. 그래도 가끔 안부는 묻고 그러죠. 친구니까요, 친구.”
“친구……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하세요. 장비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지원도 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뭘요. 말 나오신 김에 돈이나 좀 주세요.”
다른 대영주들로부터 삥을 뜯는 헤겔!
헤겔은 인맥을 바탕으로 여러모로 혜택을 입으면서도 배가 아파 왔다.
“아…… 그 형이 잘돼도 너무 잘됐네.”
* * *
― 아크힘: 위드가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바드레이는 10대 금역 중의 한 곳인 아베리안의 숲에서 사냥을 하다가 소식을 들었다.
“결국에는 그렇게 되었군.”
헤르메스 길드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이상 아르펜 제국의 대륙 통일은 확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보에몽이 붉은 빛깔이 도는 포도주를 가져왔다.
“그윽하게 풍기는 향이 좋은 술 같은데.”
“모라타의 것입니다.”
“모라타.”
“헤르메스 길드원들에게 전부 한 잔씩 돌릴 예정입니다.”
바드레이는 아크힘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강해지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아온 자신보다도 헤르메스 길드를 좋아했던 남자.
“아르펜 제국의 통일을 축하하며 마시는 포도주라. 각별한 맛이 있겠군.”
“그렇죠. 평생 잊지 못할 술의 맛입니다.”
바드레이는 포도주를 한입에 마셨다.
떫으면서도 부드럽고 쓴 무언가가 느껴진 것도 같았다.
“평생 잊지 못할 술맛이다.”
“헤르메스 길드원들 모두에게 그럴 겁니다. 아쉽지만 다음 잔은 모라타에 가서 마셔야 합니다.”
“모라타에 가려면 강해져야 한다.”
“예. 강해져야 합니다. 모라타에 우리 길드의 검을 꽂으려면 말이지요.”
헤르메스 길드의 칼은 무뎌지지 않았다.
더욱 강하고 날카롭게 벼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라페이는 조용히 북부 여행을 하던 도중에 소식을 들었다.
“아르펜 제국이라…….”
하벤 제국 시절이 떠올랐지만 두 제국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북부 대륙의 개척과 초보 유저들을 이끄는 위드가 중심이 된 제국.
라페이는 베르사 대륙의 역사가 이대로 멈춰 있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아직은 신생 제국. 그 힘이 커지고 있지만 정점에 이르면 언젠가는 약해지고 말 것. 헤르메스 길드는…….”
헤르메스 길드는 그의 예상보다도 견고하게 잘 버티고 있었다.
라페이가 앞에서 이끌어 왔지만, 그가 떠난 이후에도 헤르메스 길드는 건재했다.
“위기가 그들을 내 생각보다도 강하게 만들어 낸 것일까.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다만 베르사 대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이 거친 대륙의 역사는 아르펜 제국의 통일로 끝나는 것은 아닐 테니까.
헤르메스 길드가 있고, 야심가들이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많은 유저들이 강해지고 있었다.
“전쟁이란 불꽃은 언제든 다시 타오를 것이다.”
* * *
유니콘사에서는 신속하게 보도 자료들을 배포했다.
― 베르사 대륙, 드디어 통일!
― 전쟁의 신 위드가 대륙의 지배자가 되다.
― 아르펜 제국의 깃발이 꽂혀 있는 세라보그 성!
― 유니콘사에서는 통일 황제에게 로열 로드의 초창기 약속을 지키기로 함.
― 한 달 매출액의 10%. 과연 그 천문학적인 금액의 액수는?
위드가 베르사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유니콘사로부터 포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
언론사들은 포상금의 액수에도 관심이 많았다.
― 로열 로드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유니콘. 한 달 매출액은?
― 인수 합병을 통해 초거대 기업 집단이 된 유니콘.
― 위드. 게임 분야의 1달 매출액의 10%를 상금으로.
유병준은 뉴스들을 읽다가 인공지능 베르사에게 물었다.
“요즘 유니콘의 한 달 매출액이 얼마지?”
인공지능 베르사가 빠르게 계산하고 대답했다.
― 73조 정도 됩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로열 로드를 운영하며 4억 명이상의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국가마다 요금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일 년 매출액은 800조를 넘었다.
“한 달 매출액에서도 고작 10%. 7조라…… 훗.”
유병준은 제법 많은 액수이긴 하지만 자신이 물려줄 재산에 비하면 푼돈이라고 생각했다.
유니콘 그룹의 수많은 핵심 계열사들과 전 세계에 퍼진 부동산, 금융 자산들에 비하면 고작이라는 말이 어울릴 테니까.
‘7조로도 부자라고 불리기는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물려주는 돈은 그 정도가 아니야. 경제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금액이지.’
그의 능력을 알아주지 못한 세상에 대한 통쾌한 복수!
‘그런데 내가 평생 쓴 돈은 얼마일까.’
불현듯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젊어서부터 연구 활동에 매진하면서 밤샘을 밥 먹듯이 했다.
배가 고픈 것도 밥을 먹을 시간이 아까워서 참아 내면서 로열 로드를 만들어 냈고, 지금은 세계에서 압도적인 부를 쌓았다.
‘위드의 말대로라면 버는 놈 따로 있고 쓰는 놈 따로 있다고 하지. 생각해 보니 이 모든 자산을 물려준다고.’
유병준은 배가 아파 오긴 했어도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처음의 생각대로 진행하는 것이 옳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수십 년 인생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니까.
― 위드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진행해.”
― 초인 프로젝트는요?
생명공학을 이용한 개조.
신체 능력까지도 최고로 만들어 주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해야지. 그런데 부작용이 있었지?”
― 의지가 약한 사람은 뇌 기능 활성화의 과정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못 깨어날 가능성은?”
― 극한 상황에 이른 정신이 스스로 붕괴될 수 있는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막대한 재산에 더해서 완벽한 육체와 지능까지도 물려주는 계획.
베르사 대륙을 통일한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었지만 정작 그걸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인공지능은 초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대상자가 스스로 두려워하는 꿈을 꾸게 만들 것이다.
꿈에서조차 의지가 꺾인다면 깨어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유병준은 모라타에서 본 위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도 단연 영웅처럼 느껴졌다.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그게 운명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