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58권 : 2. 꿈의 인생 (413/520)

2. 꿈의 인생

이현은 햇빛이 비치는 마당에 앉아 오랜만에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그의 옆에는 털에서 윤기가 좔좔 흐르는 개가 누워 있었다.

“보신아.”

멍멍!

“요즘 정말 살맛 나지 않냐. 역시 사람은 은행 잔고가 넉넉해야 돼.”

멍멍!

방송국에서 차곡차곡 입금되는 금액.

로열 로드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막대한 세금이 거두어졌다.

“행복은 확실히 돈 순서야. 뭐, 아니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대체로 맞아.”

부자들은 평균적으로 더 오래 살고, 맛있는 걸 먹으며, 좋은 집에서 살며 멋진 옷을 입는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한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세상!

“예쁜 여자도 만날 수…… 크흠. 반드시 그런 건 아니겠구나.”

서윤을 만나게 된 건 자신이 한참 더 돈이 없을 때였으니까.

지금은 잘 풀리긴 했지만 한때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도대체 왜 내가 좋은 건데?’

이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갔다.

돈, 학벌, 외모, 성격, 매력.

어떤 점에서도 서윤이 자신을 좋아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보신아, 객관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데. 역시 나한테 매력이 있긴 한가 봐.”

멍멍!

“아니면 역시 내가 잘생겨서 그러는 건지도…….”

으르렁.

“너 지금 대드냐?”

이현의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의 생활에도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작은 웅덩이에서 살던 오리들은 서윤의 집에 있는 수영장에서 마음껏 헤엄쳤다.

넓은 걸 좋아하는 개들은 여기저기를 오가면서 뛰어놀길 좋아하지만 식사와 잠은 반드시 서윤의 집에 가서 해결했다.

닭이나 고양이들은 하루 종일 건너오지도 않았다.

“개들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말도 다 옛날이야기지. 시대가 바뀌었어. 요즘은 밥 잘 주는 주인을 따르지.”

이현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요즘 개들은 무엇을 먹고 지낼까.

몸보신의 새끼들을 비롯해서 과거에는 항상 배고파 하던 녀석들이 요즘에는 어째서 느긋해졌을까.

서윤의 집 마당에 있는 개들의 밥그릇을 보니 갈비를 먹은 흔적이 보였다.

“아…… 갈비 먹었구나. 근데 나도 오늘 갈비 먹었는데.”

서윤은 요리를 하며 이현의 것과 개들의 음식을 함께 만든 것이다.

* * *

이현은 유니콘 본사에 찾아가기 위해 외출복을 입었다. 시장에서 구입한 깔끔한 옷이었다.

방송국으로부터 백화점 상품권도 많이 받긴 했지만 아껴 두었다.

훗날 아이라도 낳으면 기왕이면 좋은 옷을 입히고 싶었으니까.

자신이 어릴 때 했던 처절한 고생은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유니콘의 한 달 매출액만 하더라도 엄청난 금액이라고 하던데…….”

이현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조 단위가 될 거라고 추정하고 있었고, 그 정도의 돈을 가진 부자는 한국에도 많지 않았다.

재벌 회사의 소유자들은 10조, 20조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까마득한 금액.

“앞으로 친척들한테 연락 와도 전부 무시해.”

“응, 알았어.”

이현은 거실에서 이혜연에게 단단히 일러 두었다.

돈이 생기면 귀신처럼 연락해 오는 사람들이 먼 친척들이니까.

“도둑이나 강도가 찾아올 수도 있어. 그러니 집을 잘 지켜야 한다.”

“알았어. 사람 잔뜩 와 주기로 했어.”

최지훈이 와서 집안일을 거들어 주기로 했다.

집 근처에는 방송국 카메라들이 즐비했으니 웬만큼 간이 큰 강도라도 얼씬도 하지 못하리라.

이현이 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번쩍거리는 카메라 조명들이 마구 작렬했다.

“통일 황제의 위업을 달성하신 소감은요?”

“한마디만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대륙을 통치하실 건가요?”

“악마들로 인한 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나요? 시청자들에게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방송국마다 대표로 나온 기자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현은 마치 국회의원이라도 당선된 기분이었다. 로열 로드의 통일 황제라면 국회의원이 부럽진 않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가식적인 이야기를 해 줘야 해.’

담담한 목소리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모두가 여러분들의 덕분입니다. 앞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 겁니다.”

가능한 짧은 소감만을 해 주는 게 좋으리라.

이현은 괜히 잘못된 말을 남겨서 대륙 통치를 하며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세금은 인상하실 계획인가요?”

“대륙 재건을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하기에 세금 부담은 가능하면 줄여 보려고 합니다.”

세금을 올린다는 말 같기도 하고, 올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전적으로 듣는 사람의 기분 탓!

“클레타의 퇴치 계획은요?”

“로열 로드는 항상 새로운 도전이 있기에 즐겁습니다. 클레타와의 전투도 언젠가 벌어질 겁니다. 정말 먼 훗날이 되었으면 좋겠지만요.”

“경쟁자인 바드레이가 케이베른을 사냥하다가 죽었는데요. 그에 대해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정말 용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도움을 많은 분들이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바드레이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있는데요.”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케이베른의 레어에 남아 있을 보물들은 가져오실 계획인가요?”

“당연히 챙겨야…… 예정에는 없지만 보물들을 찾아와서 모라타와 파괴된 도시들의 재건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현은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유니콘 본사까지는 전철과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했지만, 수금을 위한 즐거운 길!

사실 택시를 타는 것도 고려를 하긴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이쪽에 빵 가게가 말이야…….”

“컵밥이 더 맛있는데.”

“난 자장면!”

동네를 나와서 큰길로 나가면 행인들이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딜 가도 금방 평범해질 수 있는 외모.

‘역시 인생은 편한 게 최고야.’

이현은 승객들로 가득 찬 마을버스를 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평소와는 다르게 도저히 참지 못할 정도로 졸렸다.

* * *

마을버스는 잠든 이현을 태우고 유유히 달려서 동네 근처의 5층짜리 건물로 들어갔다.

초인 프로젝트를 위해 내부 개조가 끝난 건물이었다.

― 대상자를 포획했습니다.

최신형 안드로이드 로봇에 의해 이현은 차가운 수술대에 누웠다.

― 초인 프로젝트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유병준도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대상자의 육체와 두뇌를 강화하는 초인 계획.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육체까지도 이현의 완성을 위해 투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얄미운 놈 때문에 목숨까지 바치라고?’

이현을 보고 있자니, 손해를 봐도 크게 손해를 보는 듯한 기분.

도박판에서 마지막까지 앉아 있다가 전부 털리는 듯한 그런 느낌.

― 초인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로봇 팔에 의해서 큼지막한 주사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 잠깐. 취소하자.”

― 초인 프로젝트를 취소할까요?

“그건 그대로 진행을 해. 하지만 생명공학에서 일부는 취소하는 게 좋겠어. 신체 개조를 위해 내 육체를 사용하는 걸 포함해서 말이지.”

― 기능이 조금 떨어질 수 있습니다만.

“얼마나 떨어지는데?”

― 15% 정도입니다. 완벽한 초인의 탄생을 위해서는 박사님의 육체 활용이 필요합니다.

“그냥 그건 빼도록 하자.”

― 지금까지 오랫동안 꿈꿔 오던 목표였는데 다시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날 죽이고 싶냐? 취소해.”

― 알겠습니다.

유병준은 마지막 순간에 생각을 조금 바꾸었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날 정도의 초인에서, 최대한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수준으로.

목숨이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과거와는 다르게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만들어 낸 세상, 로열 로드를 통해서 배웠다.

때론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지나가기 마련이다.

인생을 어떻게 즐겁게 사느냐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였다.

― 프로젝트를 축소해서 부작용은 줄어들며 안정성은 상승할 것입니다.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은?”

― 프로젝트 자체의 불안정성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는 긴 꿈을 꿀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살려고 하고, 깨어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유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시해.”

로봇 팔이 이현의 입으로 알약을 가져왔다.

― 아. 하십시오.

이현은 잠이 든 상태에서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한국인 대부분이 좋아하는 음식인 잘 튀긴 치킨!

“아…….”

이현은 들리는 목소리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꿀꺽!

* * *

이현은 길고 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죽고 나서 어렵게 살아오던 시절에 대한 꿈이었다.

“네 인생? 그런 게 어디 있냐. 적당히 크면 팔려 나갈 거야. 가족? 같이 팔아 줄게.”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면서 처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때때로 검은 유혹의 손길도 뻗어 왔다.

“간단한 심부름만 하면 돼. 물건만 가져다주고 오면 빚에서 300만 원 빼 줄게.”

“더 쉬운 일 시켜 줄까? 한 명만 처리해라. 안 걸리면 좋고, 걸려도 잠깐 교도소 다녀오면 2억이야.”

이현은 매번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악의로 가득한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마법의 대륙?”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마법의 대륙이라는 게임.

― 게임은 사회악.

― 게임은 마약이다.

이현은 그러한 말을 떠올리며 마법의 대륙을 외면했다.

“먹고살기도 바빠.”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스무 살이 되었다.

“급하게 한 명 처리해 줘야 할 녀석이 생겼다. 가족을 생각해서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 이번은 큰 건이라 무슨 짓을 벌일지 우리도 몰라.”

이현은 사채업자들의 진지한 강요를 받았다.

목표는 상대 조직의 중간 보스였다.

‘이걸 해야 하나. 하고 나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해.’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해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와 여동생을 위해서라면…….

‘해야 해.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원하지 않은 일이지만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자신이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면, 사채업자들이 가족들을 내버려 둘 리가 없다.

그들은 법보다는 돈을 따르는 자들이니까.

‘상대도 범죄자야.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자.’

이현은 며칠을 따라다니며 염탐을 했다.

‘으슥한 밤보다는 점심 무렵을 노리는 게 낫겠어.’

새벽에는 영업장들을 돌며 관리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드물다.

점심때쯤에나 깨어나서 해장국을 먹으러 갈 때가 기회.

이현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기다렸다.

막 문이 열리고 중간 보스가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는 척 지나가다가 칼로 배를 찔렀다.

“너…….”

영원히 잊지 못할 그 순간.

이현은 상대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가족들만 생각하자.’

상대를 찌르고 또 찔렀다.

주변에서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쯤은 무시했다.

‘살자. 살아야 한다.’

슬프고,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혐오로 고통스러웠다.

인생이 아무리 비참해지더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했다.

* * *

또 다른 꿈.

이현에게는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 할머니와 여동생까지 집을 떠나고 나서 그 혼자 남겨졌다.

“우리한테 빌린 돈은 갚아야지. 죽고 싶냐?”

“…….”

사채업자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리 두렵진 않았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보다 무섭진 않았으니까.

실컷 마음 놓고 마법의 대륙에 빠졌다.

― 위드바보똥개: 이 멍청아?

< 위드바보똥개 님을 죽였습니다. >

― 위드바보똥개: ㅋㅋㅋㅋ 이거 완전 또라이…….

< 위드바보똥개 님을 죽였습니다. >

― 위드바보똥개: 개놈시키.

< 위드바보똥개 님을 죽였습니다. >

― 위드바보똥개: 저기요, 님아.

< 위드바보똥개 님을 죽였습니다. >

― 위드바보똥개: 선생님. 지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 위드바보똥개 님을 죽였습니다. >

거슬리는 이들은 모조리 죽일 뿐.

마법의 대륙의 명문 길드들은 몽땅 박살을 내고, 로열 로드에 접속했다.

‘이곳이 내가 잠시 머물게 될 세상이로군. 과연 내 허전함을 달래 줄 강자들이 있을까?’

몬스터란 몬스터는 미친 듯이 때려잡았다.

위드.

밟혀도 살아난다는 잡초라는 의미도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이름.

피의 광전사가 되어 몬스터들과 싸우다 보니 눈에 띄게 빨리 강해졌고, 헤르메스 길드의 눈에 띄었다.

“제법 쓸 만한 것 같은데. 마법의 대륙의 위드였지? 긴말하지 않지. 우리 길드로 들어와라.”

“내 심장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있어. 함부로 가까이 오지 마라. 나약한 자들은 타 버리고 말 것이다.”

“……됐으니까 그냥 가입할 거냐, 말 거냐.”

“잠시 머물겠다.”

위드는 헤르메스 길드의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해 갔다.

“성장에 필요한 물품들을 말해라.”

“말한다면?”

“뭐든 제공해 줄 것이다. 레벨에 맞는 가장 좋은 장비들도 모두 길드 내에 있으니 제공될 거다.”

“받아는 주지.”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건가?”

“별로. 공짜로 받을 생각은 없어. 나중에 몇 배로 밥값을 치러 주지.”

“하하. 그날이 오길 기대하도록 하지.”

남들보다도 두세 배 빠른 사냥 속도로 레벨 200대에서 400대가 되었다.

헤르메스 길드의 상위권 유저들도 긴장하게 만드는 성장이었고, 하루 종일 사냥만 하는 그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저 녀석이 위드라고?”

“그렇다는군.”

숱하게 벌어지는 전투와 보스급 몬스터 사냥.

위드는 헤르메스 길드에서 세력전을 벌일 때에만 참여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사냥터에서 지냈다.

“헤르메스 길드다!”

“저 새끼들 때문에…….”

가끔 들리는 도시에서 욕을 먹으면 서슴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 피의 광전사로서 살육에 눈을 떴습니다.

악명에 따라 공격력이 증가합니다. >

< 당신의 목에 현상금이 걸렸습니다.

현상금: 4,797,213 골드. >

어느덧 베르사 대륙에서 최악의 악명을 가진 학살자가 되었다.

“위드. 저걸 내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쓸모가 많을 것 같은데 기다려 보죠.”

라페이가 이끄는 헤르메스 길드는 위드를 지켜보기만 했다.

전사로서 키워 주면서도 직접 간섭하진 않는다.

헤르메스 길드의 입장에서는 세력을 확대하는 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적합한 대상으로 여겼다.

위드도 그런 의도를 알지만 내버려 두었다.

“사냥개 취급인가. 내 마음이 머물 곳이 없군.”

로열 로드를 하며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동네의 아이들에게 옷과 학용품들을 사 주었다.

* * *

라페이가 헤르메스 길드의 군단장들을 소집했다.

위드도 그들 사이에 끼어서 당당히 한자리를 맡고 있었다.

전쟁의 신, 로열 로드 최악의 학살자.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위드를 따르는 길드원들도 많았기에 그들을 모아서 전투단으로 편성을 했다.

다른 길드와의 충돌에도 항상 선봉을 서며 악착같이 싸우는 무리들.

위드의 직업도 피의 광전사였고, 퀘스트를 주로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레벨이 올라가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헤르메스 길드의 최상위 랭커들도 위드의 전투력만큼은 인정했다.

“우리는 이제 엠비뉴 교단과 싸운다.”

엠비뉴 교단.

베르사 대륙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 들어가는 단체.

여러 왕국들이 위험에 빠졌고, 헤르메스 길드는 이를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출정한다.”

헤르메스 길드의 14개 군단이 출격했다.

대륙의 남서쪽, 네스트 왕국과 토르 왕국 사이에 있는 사이고른 산맥이 엠비뉴 교단의 비밀 기지가 숨어 있는 위치.

“위드 님만 따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번에도 선봉에 섭시다!”

위드는 자신을 따르는 길드원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싸우고 싶을 뿐이었고, 그들이 자신을 따르는 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사이고른 산맥은 엠비뉴 교단에서 적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미끼.

“함정이다!”

“넘어가. 돌아갈 길이 무너졌으니 계속 진격해라!”

광신도들의 자폭과 엠비뉴의 사제들이 펼치는 신성 마법들.

엠비뉴의 성기사들과도 싸워야 했다.

위드는 헤르메스 길드로부터 받은 마검 드로어를 뽑아 들었다.

전투가 매일 벌어지기에 마검은 최고의 공격력과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는 핏빛 상태를 유지했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

위드는 엠비뉴 교단의 끝을 모를 병력을 보고도 그들을 향하여 달렸다.

가족을 잃은 이후에는 한순간 주저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싸우고, 이긴다.

그는 혼자였지만 동네에서 돌봐 주는 아이들이 떠올랐으니까.

‘죽더라도 잡템을 하나라도 더…… 응? 잡템……이라고? 그걸 내가 왜 주워야 하지?’

위드는 조금 이상함을 느꼈지만 처절하게 싸웠다.

피의 광전사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다.

아군의 죽음마저도 기쁘고, 새로운 힘과 체력을 샘솟게 만든다.

“위드 님에게 몰아줘.”

“그래. 여기서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내며 죽어 갔다.

그들이 목숨을 잃을 때마다 위드는 광기의 눈을 떴다.

“멸살의 검!”

점점 폭주하며 강해지는 공격력은 아군들까지 베었고, 마침내 엠비뉴 교단의 대사제마저 해치웠다.

“승리다!”

“이겼다.”

피투성이의 승리.

위드는 전투 업적을 쌓으며 또다시 한 단계 강해졌다.

* * *

헤르메스 길드에서 위드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위드를 따르는 군단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선두에서 싸웠다. 무서운 공격력으로 적진을 돌파하며 아무도 물러나지 않는다.

흑사자 길드나 로암 길드에서도 위드의 군단이 나타났다면 싸움을 회피하기 바빴다.

라페이가 새로운 갑옷을 가지고 왔다.

“피의 광전사 위드…… 이 갑옷을 받고, 1군단을 이끌기를 명합니다.”

“귀찮은 건 질색인데.”

“거절하는 겁니까?”

“딱히 달리 할 일도 없으니 받아들이지.”

위드는 1군단장이 되어서도 싸웠다.

강해지는 것이 목적이긴 하지만 적과의 전투를 즐겼다.

“군단장님, 외곽부터 차근차근 무너뜨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방식대로 한다.”

“어떻게요?”

“적진의 중심까지 뚫고 나간다.”

“적진 돌파입니까?”

“적진 한복판까지 뚫는다. 그래서 적 지휘관을 벤다.”

“그다음엔요?”

“다 죽인다.”

“……!”

위드의 부대에 속하게 된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집단 광기에라도 빠져든 것 같았다.

가장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는 곳에서 극강의 공격력을 발휘하며 적들을 부숴 놓았다.

그들의 돌파력은 전투를 결정지었다.

― 아크힘: 1군단을 지원해.

― 라미프터: 길을 여는 것을 도와라. 저들이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면 전투는 우리의 승리다.

― 뮬: 그리폰 부대도 지원하겠습니다.

다른 세력들과 싸우는 헤르메스 길드의 전투 방식은 적극적으로 1군단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군단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면, 그곳에서부터 균열이 커지게 된다.

조금만 지원을 해 주더라도 적진 전체가 와해되어 버렸다.

― 미친 광기의 부대.

― 그들을 막을 수 없다.

― 헤르메스 길드의 창과 검.

― 1군단이 20분을 싸운 결과, 무려 20배가 넘는 사상자 발생.

― 1군단과 로암 길드가 정면충돌! 말도 안 되는 전력 차이였지만 패퇴하는 로암 길드.

1군단은 전투 집단으로서 로열 로드의 전설이 되었다.

때론 몰살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전투 업적들을 쌓았다.

“저도 1군단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군단장님처럼 싸울 수 있습니까?”

“가장 명예로운 1군단. 거기에 배속되어 싸운다면 바랄 게 없습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전쟁 방식까지 바꿔 버리는 1군단.

1군단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명예롭고, 뛰어난 전사로 존중을 받았다.

“라페이 님, 위드에게 힘이 너무 실리는 것 같습니다. 길드 내부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아크힘이 라페이를 찾아와서 말했다.

바드레이는 그동안 헤르메스 길드의 강함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의 존재 때문에라도 강해지고 싶은 유저들이 모여들었다.

최근에는 1군단이 헤르메스 길드의 힘의 상징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다른 경쟁 세력들은 위축이 되었고, 외부의 강자들도 1군단의 매력에 빠져서 헤르메스 길드로 들어왔다.

“제 생각은 반대인데, 1군단을 더 키울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도 더요?”

“그들을 앞세우면 대륙 정복에 변수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어떤 전장이든 투입하면 상황을 바꿔 놓으니 말입니다.”

“……아시겠지만 1군단의 영향력이 커지는 건 우려스럽습니다. 특히 위드는 우리 길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만나 보면 느끼시겠지만 단순합니다. 길드 내의 권력 다툼에는 관심이 없어요. 싸울 자리만 만들어 준다면 우리의 말을 계속 따를 겁니다.”

“대륙을 통일한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땐…….”

라페이는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 싱긋 웃었다.

“사냥개가 먹이를 축내는 정도는 참아 줄 생각입니다.”

“그 이상으로 욕심을 부린다면요?”

“사냥개입니다. 사냥개의 운명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아크힘은 설명에 만족하고 돌아갔지만, 라페이는 위드를 그냥 버릴 패로 쓰진 않을 작정이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강해지려면 바드레이와 위드의 경쟁 구도가 되어야 좋지. 위드가 본인의 능력으로나 세력으로나 한참 열세지만…… 성장 속도는 빠르다. 바드레이 쪽도 긴장해야 될 거야.’

* * *

헤르메스 길드는 중앙 대륙을 통일했다.

다른 세력들과의 모든 전투를 압도적으로 이겨 냈고, 반란군들을 상대로도 인정사정이 없었다.

― 피의 부대.

― 헤르메스 길드에서 바드레이와 친위대가 가장 강하지만, 제일 무서운 건 1군단이다.

― 묘하게…… 매력이 넘쳐. 빠져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 사냥 속도 미침.

위드는 사냥터와 전쟁터를 오가며 살았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도전자는 많았고, 그나마 심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파이톤이다. 한 수 가르쳐 다오.”

“얼마든지.”

위드와 파이톤의 대결.

파이톤은 힘을 바탕으로 하는 검술을 사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위드는 헤르메스 길드의 사냥터와 장비 지원을 받아서 레벨이 높았다.

길드 내에서도 5위권 안에 들었고, 스킬들도 최고로 갖추었기에 파이톤은 가볍게 무릎을 꿇었다.

피투성이가 된 파이톤이 말했다.

“멋진 승부였다.”

“나에겐 시시했어.”

< 파이톤을 살해하셨습니다. >

양념게장이나 다른 여러 유명인들과도 싸웠다.

중앙 대륙을 통일한 헤르메스 길드의 적은 많았다. 로암, 칼리스와의 승부도 즐기면서 끝없이 싸울 뿐이었다.

1군단의 부하들이 물었다.

“바드레이 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한 사람이지.”

“저희는 위드 님이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드레이는 직접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대륙 정복 전쟁에서 최고의 무훈을 올린 것이 위드였고, 그의 1군단이었다.

1군단에 속한 유저들은 헤르메스 길드보다도 자신들이 더 위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바드레이라…….”

“싸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희는 싸우면 위드 님이 이길 거라고 봅니다.”

위드는 웃고 말았지만, 그와 바드레이를 비교하는 유저들은 갈수록 많아졌다.

외부만이 아니라 길드 내부에서도 위드의 추종자들이 늘어나고, 라페이도 은근히 신경을 써 주었다.

― 위드와 1군단은 절망의 평원으로 떠나라. 오크들을 정벌하고 돌아와라.

이번에는 평소처럼 라페이에게서 내려온 명령이 아니라, 길드의 수뇌부에서 직접 전달되었다.

누가 봐도 위드와 1군단을 길들이겠다는 뜻.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싸웁시다. 해치워 버리면 됩니다.”

“그냥 떠나도 되죠. 우리가 독립하겠다면 누가 막겠습니까?”

“길드에서 위드 님을 따르는 이들이 삼분의 일은 됩니다.”

위드는 생각에 잠겼다.

숱한 전투에 뛰어들 때에도 주저함은 없었지만 헤르메스 길드에 칼을 거꾸로 들고 싶진 않았다.

가족을 잃고 방황하던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더라도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으니까.

지금까지 받은 것이 많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나는 헤르메스 길드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1군단은 해체한다.”

위드는 헤르메스 길드를 이탈했다.

― 1군단장 위드는 길드를 무단이탈했다. 앞으로 그는 우리 헤르메스 길드의 적이다.

그날로 척살령이 발동되었지만 돌아다닐 수 있는 던전은 어디든 있었다.

라페이가 은근한 비호를 해 주기도 했고, 아크힘이나 바드레이의 추종자들도 위드가 세운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했다.

본격적으로 척살조를 파견하면서까지 위드를 공격하는 건 길드 내부에 혼란을 키울 수도 있었으니 그냥 내버려 두는 쪽을 택했다.

칼쿠스가 웃으며 아크힘에게 말했다.

“위드. 그놈의 무력도 결국 우리 길드를 통해서 강해졌습니다.”

“헤르메스 길드를 떠나면 별거 아니란 얘긴가?”

“그렇죠. 그가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났으니 1군단에 속해 있던 길드원들을 다른 군단에서 나눠서 흡수하면 됩니다.”

“그래도 내버려 두면 신경이 쓰이는 존재야. 그의 전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을 테지.”

“무모하게 덤빌 뿐. 그런 전투 방식이 통했던 것도 우리 헤르메스 길드였기 때문 아닙니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

“1군단의 잔당들이 모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약간의 병력이 이탈한다고 해도 아무 군단이나 보내도 짓밟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로암 길드, 클라우드 길드 등으로 구성된 저항군에서 길드를 떠난 위드에 복수하기 위해 추격해 왔다.

“그동안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라!”

“싸우고 싶다면 덤벼.”

위드는 서너 번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저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고, 나중에는 흔적 없이 사라져서 뒤를 쫓아오기도 힘들어졌다.

베르사 대륙에서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반헤르메스 길드 연합군이 생겨서 거의 모든 유저들이 공격해 오기도 했고, 북부 대륙에서 바르칸 데모프가 이끄는 불사의 군단이 침공해 오기도 했다.

― 죽음의 공평함으로 너희들을 인도하리라!

아크 리치.

불사의 군단을 완벽히 재편하여 중앙 대륙을 침공한 바르칸.

해골들이 끝없이 밀려 내려왔고, 고위급 언데드들이 무리를 지었다.

북부의 변방까지도 불사의 군단이 정복하면서 초대형 몬스터들까지도 언데드가 되었다.

― 아크힘: 불사의 군단이 무시무시합니다. 데리암의 황무지를 지나고 있는데, 일주일 내로 아골타 지역의 초토화는 시간문제입니다.

― 크레볼타: 죽여도 되살아나고…… 그러면 신성력으로 정화하면 되지 않습니까?

― 가우슈: 신성력에도 저항력이 높다고 합니다. 기록을 보면 과거에도 대륙을 멸망 위기로 몰고 갔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헤르메스 길드는 남다른 정보력으로 베르사 대륙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불사의 군단은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 위협.

북부 대륙에서 세력을 떨치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진압 부대를 일찍 파견하진 못했다.

“당장 바르칸을 처치해야 합니다.”

라페이가 매주 개최된 회의에서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위험한 일을 떠맡고 싶은 군단장은 없었다.

“위드의 1군단이 이런 일은 도맡아서 했었지.”

“괜히 1군단을 일찍 해체한 것 아닌가?”

헤르메스 길드에서 쌓아 올린 힘의 문화는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들에게 위협을 줄 정도로 강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겨 왔으며 그 선봉에는 1군단이 있었다.

대륙 정복 이후에는 저마다 이권을 챙기기 바빠서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들었다.

바드레이조차도 경쟁자가 없으니 긴장이 느슨해진 상태.

라페이가 지도를 펼쳐 놓고 북부 대륙과의 접경인 아골타 지역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서 불사의 군단과 싸워야 합니다.”

“모든 병력이라니…… 그러려면 자금이 얼마나 드는 줄 압니까?”

“압니다. 하지만 그래야만 합니다. 불사의 군단이 만에 하나라도 승리를 한다면 그들의 전력은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몬스터들과는 다르게 불사의 군단은 전투를 거듭해도 전력 손실이 없다. 특히 헤르메스 길드를 격파하기라도 하면 엄청난 양의 언데드들이 증가하게 된다.

“맞는 말이군요.”

“그들을 물리칩시다. 손해야 좀 있겠지만 대륙부터 지켜야지요.”

라페이의 말에 군단장들도 공감은 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정예 병력은 각종 이유들을 내세워서 출전시키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아골타 지역에 모인 건 헤르메스 길드의 절반 정도.

“전군 공격 개시!”

그럼에도 헤르메스 길드는 강력했다. 마법 병단을 앞세워서 언데드들을 처치하며 승리를 확신했다.

“언데드라 그런지 숫자는 많아도 별거 아니네.”

“이 정도면 대륙이 초토화될 위기까진 없었겠어.”

“직접 싸우지 않으면 작은 위험도 크게 느끼기 마련이잖아.”

군단장들이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전장에는 아크 리치인 바르칸 데모프가 나타났다.

― 빛에 의해 흩어지지 않는 칙칙한 어둠이여, 이곳에 내려와 죽음을 일깨우는 자들에게 깃들라. 데스 오라!

언데드들이 데스 오라에 의해 변이가 시작되었다.

보잘 것 없는 스켈레톤들도 커지면서 뼈마디가 굵어졌다.

생명력, 힘, 방어력, 이동 속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강화가 이루어졌고, 그 영향은 고위 몬스터들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

데스 나이트들은 눈빛에서 칙칙한 광휘를 뿌려 대었고, 둠 나이트들은 상대하는 헤르메스 길드원들을 무참히 살상했다.

― 모든 마나의 흐름이여, 지금 생명들의 종말을 제물로 바치나니 소멸과 거스름의 원리에 따라서 움직여라!

절대 마법 방어.

바르칸에 의해 헤르메스 길드의 모든 마법들이 차단되었다.

이제부턴 언데드와 전사들의 육박전이었다.

― 이 땅은 내 암흑의 율법이 지배한다. 영원한 불사의 힘이 장악하리라.

다크 룰!

그러나 바르칸의 3대 마법이 모조리 발동되었다.

전선에서 죽어 가는 이들은 모두 언데드가 되어 일어났으며, 대규모 살상이 가능한 마법들은 봉인이 된 상태.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여긴 도저히 이길 수 없다.”

헤르메스 길드가 무너지고 있었다.

다른 보스급 몬스터와 싸운다면 이러진 않으리라. 그렇지만 동료가 죽는 순간 강력한 언데드가 되어서 일어난다.

아군은 죽어 가는데, 적은 끊임없이 늘어난다는 것이 엄청난 공포.

헤르메스 길드는 아골타에서 패배하고 전력의 삼분의 일을 잃어버리며 퇴각했다.

불사의 군단은 더 세력을 넓혔고 중앙 대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바르칸 데모프의 부하들이 한 지역들을 차지하면서 대량의 언데드 생산 기지도 설치.

베르사 대륙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에 위드는 던전에서 나왔다.

“실컷…… 싸울 수 있는 건가.”

라페이로부터 소식을 들어서 대륙의 정세에 대해서는 알았다.

불사의 군단이 있으니 그들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생각뿐.

라페이는 바드레이의 추종자들을 설득해서 위드의 권한을 복권시켰다.

― 1군단은 모여라.

위드는 1군단을 지휘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뿐이었다.

그 즉시 1군단이 예전처럼 재결성이 되었다.

옛 부하들이 다시 돌아오는 데는 어떤 주저함도 없었고, 과거보다도 규모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우리도 받아 주십시오.”

“불사의 군단과 싸우는 일에는 협력하고 싶습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강자들이, 순수하게 힘을 쫓던 이들이 1군단을 따르기로 결심을 한 바.

총인원 5만.

위드는 그들을 이끌고 북상했다.

최종 방어선인 기덴 성에서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 짐작하겠지만 헤르메스 길드에서의 지원은 없다.”

꿀꺽.

1군단의 유저들이 긴장을 드러냈다.

그들은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았다.

오로지 자신들뿐이었다.

헤르메스 길드가 전부 나섰을 때도 패배했던 전투를 해결해야 한다.

“목표는 단순합니다. 바르칸. 우린 언데드들을 돌파하여 바르칸에게 도달해야 합니다. 대략 거리로는 3킬로미터 정도를 뚫어야 되겠더군요.”

“…….”

아무도 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위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싸워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선두에 선 자신과, 부하들이 얼마나 잘 싸우느냐에 달려 있었다.

‘재미있겠네.’

위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자신은 전장의 그 어디에서라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을 뿐이니까.

‘살자. 살아야지.’

할머니와 여동생을 찾았다.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를 알아보았고, 매달 돈도 보내 주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고 싶진 않아. 그게…… 나한테 남은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 * *

유병준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이현을 보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지?”

― 안정적입니다.

“정신적으로도?”

― 이상 없습니다.

캡슐형 로봇들이 신체 내부를 개조하고 있었고, 유전자 강화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마취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손상과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육체에는 괴로운 과정이었다.

“그럼 무사히 깨어나겠군.”

― 95% 이상의 확률로 깨어날 것입니다.

“만약 초인 프로젝트를 축소하지 않았더라도 괜찮았을까?”

― 90% 이상 깨어났을 것입니다. 대상자의 정신력이 너무나도 강력합니다.

유병준은 가만히 잠든 이현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봤다.

시술 초반에 울었고, 지금 다시 울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도 알고 있나?”

―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몇 개의 단어는 전달되었습니다.

“그건…….”

유병준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이현의 인생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 * *

이현은 이유를 모를 극심한 통증 때문인지 주로 아프거나 다치는 꿈을 많이 꾸었다.

때때로 로열 로드에서 지독하게 싸우기도 했고, 자동차 앞의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기도 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희도 먹고살기 힘들어서요.”

“…….”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지만, 어린아이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저씨, 고마워요.”

“그래.”

이현은 언제나 살고 싶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상황에서도 그냥 살고 싶었다.

‘살아야 해.’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날부터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이현은 그때에 여동생을 등에 업고 실컷 울었다.

‘아무리 울더라도 돌아오지 않아.’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와 따뜻한 품이 그리워도 참아야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죽는다.

괴롭거나, 슬프거나.

이 세상에서 영원한 건 없다.

죽음을 일찍 배웠기에 이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살고 싶었다.

* * *

초인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다.

가장 힘든 과정이며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단계.

이현은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빌딩과 도로들이 마치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약. 약이면 돼.”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마약을 복용하면 해결되었다.

일시적인 환희에 불과할지라도, 약의 효과가 떨어지면 공허함과 괴로움이 찾아오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그때가 되면 또 약을 찾으면 된다.

‘인생에 무슨 가치가 있어. 약에 취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주머니에는 마약이 가득했다.

이현은 배가 고프면 마약을 먹고, 잠이 올 것 같아도 마약을 먹었다. 약을 먹을수록 고통이 줄어들고 몸은 편안해졌다.

마약중독자의 삶.

밤이 되면 어딘가에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깨어나면 음식을 먹지도 않고 돌아다녔다.

몸이 비쩍 메말라 가고 눈은 퀭하니 파고들어 갔다. 그럼에도 환희가 가득했다.

‘이젠 약이 떨어졌어.’

이현은 마약을 사기 위해 거래하는 곳으로 갔다.

“10만 원만 내. 특별히 싸게 해 줄게.”

“10만 원?”

“돈은 넉넉하지 않나?”

마약상의 말을 듣고 지갑을 보니 어찌 된 이유인지 수표와 현금이 두둑했다. 수억 이상을 들고 다녔던 것이다.

이현의 몸은 마약의 효과가 사라지면서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고 있었다.

“5만 원. 아니, 만 원은 안 됩니까?”

“시세가 있어서 그런 가격으로는 곤란한데. 살 생각이 없나?”

“있긴 한데…… 만 원을 넘는 금액으로는 안 살 겁니다.”

이현이 단호하게 말하자, 마약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만 원에 팔지.”

“생각해 보니 만 원도 비싸네.”

“뭐라고?”

“돈 아까우니 끊을게요. 아저씨도 좀 건설적인 일을 하세요. 마약이나 팔고 다니지 말고.”

마약을 사지 않았다.

이현은 극심한 피로와 고통을 견디고 몸을 칼로 난도질하는 그런 아픔을 참았다.

죽는 게 낫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리라.

가족들이 있었고, 머릿속 한구석에는 누군가의 얼굴도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곁에 있는 한 사람.

그녀의 웃는 모습에 고통은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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