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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템왕-4화 (4/350)

4화 악연 (1)

성안은 밖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인산인해였다.

“와!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모였으면 무슨 제국 수도도 아닌데 걸어 다니기가 힘들 정도냐? 진짜 대관식이 별일은 별일이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로 혼잡한 길을 헤치는 내 가슴은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곧 있으면 금사자 기사단장 레이몬드를 만난다는 사실이 실감 났기 때문이다.

‘이번 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비싼 뽑기다. 최소 수백만 원에서 진짜 진짜 초대박이 터지면 큰 거 2, 3장짜리가 나올지도 몰라.’

하도 오랜 만인지라 잘 굴러가지도 않는 행복회로를 열심히 돌리며, 나는 내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데 막상 내성에 도착하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 있었다.

공성전 때 외에는 오가는 사람이 적어 한적했던 내성 입구가, 오늘은 입구 앞 다리에서부터 내성문 안쪽까지 유저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아오! 그냥 텔 타고 올걸! 항상 난 푼돈 좀 아끼려다 이렇게 일이 꼬인다니깐? 이놈의 소탐대실 인생, 지겹다 지겨워!”

도대체 난 왜 대범하게 태어나지 못했을까?

분명 대관식 뉴스를 보고 접속했는데도, 이런 상황을 예상 못 했다는 것이 어처구니없었다.

“뒤로 좀 비켜 줘요! 전 그냥 구경 안 하고 다시 나갈 거란 말이에요! 이렇게 1시간이나 더 기다릴 바엔 그냥 사냥이나 갈랍니다!”

“야! 나도 지금 꼼짝을 못 해! 여기서 누가 뒤로 빠지겠어? 참석 포기하려면 그냥 귀환 주문서를 써!”

“주문서 값 아깝게 그걸 여기서 왜 써요? 그냥 조금만 비켜줘요 쫌! 여긴 아직 한참 입구잖아요!”

내성 입구 주변은 이미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수천 명의 사람이 낑겨서, 대충 훑어봐도 아수라장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냥 로그아웃해서 대관식 중계나 보다가, 끝나고 들어오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아니야, 끝나더라도 사람들이 빠지려면 3시간은 족히 걸릴 거야. 거기다 얼마 만에 나한테 찾아온 운빨인데? 이렇게 흐름이 좋을 때 이어가야지 괜히 로그아웃했다가 들어오면 운빨이 끊길지도 몰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지금 들어가서 뽑아보자!’

정말 난 강화 러쉬나 뽑기를 할 때 미신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예감이 무척 좋았다.

아까도 초반에 악운이 있었지만, 결국 밀어붙였더니 대박이 나오지 않았던가!

“좋아! 꽝이 나오더라도 지금 결판을 보고야 만다! 비켜요 비켜!”

아무리 현실감이 뛰어났어도 게임은 게임이었기에, 타연에는 유저들의 편의를 위한 몇 가지 인위적인 설정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모든 마을 안은 시스템상 절대적인 안전지대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필드에서는 PK의 위험도 있고 전투 중에는 로그아웃도 되지 않는 등 몇 가지 제약사항이 있다.

그러나 안전지대에서만큼은, 유저끼리 절대 공격할 수가 없고 언제든지 대기 시간 없이 로그아웃할 수 있었다.

[안전지대인 ‘번스타인 외성 마을’에서 벗어났습니다.]

한데 내성문과 연결된 해자 위 도개교에 바싹 붙자, PK 가능 지대로 들어섰다는 안내 멘트가 떠올랐다.

외성과 달리 내성은 공성전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에 PK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망 패널티가 큰 타연이었기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있어도 무차별 공격이나 PK 등의 꼬장을 부리는 유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다리 입구 부근에 선 나는, 내성문 부근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이내 안쪽에 있던 사람이 전진하자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그림자 밟기!]

“앗! 당신 뭔데? 어디서 새치기야! 아, 도둑놈들이 자꾸 그림자 밟기로 껴대가지고 짜증나 미치겠네!”

“죄송합니다 기사님! 전 지금 대관식이 아니라 퀘스트 때문에 성안으로 꼭 들어가 봐야 해서요. 금방 앞으로 빠질게요!”

모든 유저들은 5번의 레벨업마다 1개의 스킬 포인트를 얻는다.

그 소중하고 아까운 스킬 포인트를 5개나 투자한 ‘5성 그림자 밟기’ 덕분에, 나는 차근차근 줄을 서서 들어올 필요가 없었다.

[그림자 밟기(고유 스킬): ★★★★★]

* 마나 소비: 120

* 사용 대기시간: 60초

* 선택한 대상의 등 뒤로 즉시 이동합니다.(제한 거리: 20m)

원래 10m 범위였던 1성 스킬을 최고 단계인 5성까지 성장시켜놓은 보람이 있었다.

나처럼 긴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도둑은 생각보다 드문 편이었기에, 안쪽에 방심하고 있던 유저 뒤로 이동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뭔 헛소리를 하세요? 보아하니 길드도 없구만 무슨 성과 관련된 퀘스트를 한다는 건데요?”

“구라가 아니라 진짜예요. 1분만 기다리시면 금방 앞으로 빠져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진짜고 나발이고 이렇게 다짜고짜 스킬로 밀고 들어오면 어떡해요! 아, 가뜩이나 막자 때문에 빡쳤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어휴, 내가 이놈의 대관식, 그냥 안 보고 만다 말아! 로그아웃!”

내가 타겟팅해서 이동한 유저 뒤에 서 있던 기사는, 결국 울화를 참지 못하고 로그아웃해버리고 말았다.

“아, 제가 원래 이런 노매너 플레이는 하지 않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상당히 민망하고 머쓱했지만 둘러쓴 복면만 믿고 철판을 깐 채, 쿨타임이 차자마자 다시 이동했다.

그림자 밟기는 단순한 이동기인 터라, 아무리 써도 공격판정은 받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대여섯 번 더 사용하고 나니, 마침내 병목 구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와! 겨우 빠져나왔네. 평소라면 금방 왔을 거리를 얼마나 걸린 거야? 하여간 막자 새끼들은 오늘 같은 날에 더 설쳐댄다니까!”

내성문 입구에서는 PK를 하는 머더러(murderer)들 대신, 사망 페널티를 겁내지 않는 몇몇 저렙들이 막자를 하고 있었다.

굳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왜 저러는 줄은 모르겠지만, 막자들이 오늘 같은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가 없기는 했다.

힘겨웠던 입구를 통과해서 조금 걸어 들어가자, 매달 공성 전투가 이루어지는 광장과 그 너머로 주성(主城) 건물이 길게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주성과 이어진 광장의 절반은 이미 태성 길드원들이 바리케이드를 반원으로 쳐서 비워두었는데, 보아하니 그 안쪽 공간이 대관식의 메인 장소로 사용될 예정인 듯싶었다.

바리케이드가 쳐진 경계부터는 먼저 들어온 유저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완전 야외 콘서트장같은 무대가 됐구나! 생각보다는 훨씬 더 그럴듯하게 보이는데?”

그에 반해 광장 끝에 있는 주성 건물의 양 사이드는 한적해 보였다.

그래서 레이몬드가 있는 주성 안으로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조 출입문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여기서부터는 출입금지입니다. 대관식 구경하시려면 중앙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 전 대관식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순전히 퀘스트 때문에 왔습니다. 금기사단장 레이몬드를 만나러 들어가 봐야 하니 좀 들여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셔도 안 됩니다. 2층 이상부터는 원딜러들의 공격 각도가 나와서, 주성 안으로 들어가는 건 저희가 아침부터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퀘스트는 대관식이 끝나면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성으로 통하는 모든 출입문을 다리우스의 2, 3군 길드 소속으로 보이는 유저들이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성 마을과 다르게 내성 안은 안전지대가 아니다.

따라서 오늘 대관식을 진행하는 다리우스를 노려 공격하는 것도 이론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세상에 본인의 성에서 자기네 부하 길드원들 수백 명과 하위 길드원들 수천 명으로 둘러싸인, 그것도 타연 속 랭킹 1위인 다리우스를 공격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가 뉴스에서는 대관식이 수백 명의 마법사가 만든 쉴드 속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설령 누군가 장난치듯 원거리 공격을 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공격이 닿기는커녕 공중에 펼쳐진 쉴드에 부딪혀 폭죽처럼 터지고 말 것이라는 얘기였다.

물론 그 공격을 날린 사람은 곧바로 태성 길드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어 단 1초 만에 사망할 테고 말이다.

사망 페널티가 상당히 큰 이 게임에서, 그따위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할 유저는 애초에 없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이런 사정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태성 측이, 퀘스트를 진행 중인 나 같은 일반 유저들의 출입까지 통제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오버하는 것이었다.

“오늘 다리우스 님의 대관식이 있어서 왜 그러시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보시다시피 원거리 공격 스킬도 없는 그냥 도둑 캐릭입니다. 제가 2층, 3층에 올라가봤자 공격은커녕 그저 구경하는 것밖에는 할수 있는 게 없어요. 게다가 보다시피 230렙까지 키워 놓은 캐릭으로 꼬장이나 부릴 리도 없지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절대 안 됩니다.”

“아니, 전 진짜 퀘스트 때문에 레이몬드를 찾아온 거란 말입니다. 게반 마을 몬테나 아시죠? 거기서 나온 특급 치유 물약 때문에 여기 온 거라니까요?”

“도둑님, 지금 태성 길드 산하 2, 3군 길드원 수천 명이 전부 대관식 관련 통제 업무와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오늘만큼은 태성의 1군 길드원 외에는 그 누구도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진짜 말이 안 통하네. 그런다고 내가 이대로 포기할 것 같…….”

“그리고!”

나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방패 기사가 갑자기 내 말을 끊으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도둑 캐릭이라고 하시니 혹여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림자 밟기로 저희 뒤로 넘어가서 들어갈 생각 같은 건 추호도 하지 않길 바랍니다. 만약 그러신다면 이유 불문 즉시 어택 들어갈테니 시도조차도 하지 마세요. 미리 경고했습니다.”

“와! 진짜 태성,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자기들 멋대로네요? 아무리 님네가 번스타인 성을 먹고 있다곤 하지만, 일반 유저들이 퀘스트를 못 하게끔 막을 권리까지 있나요? 본인들은 남의 성에 가서는 안 그러잖아요!”

예의를 갖춰 부탁했음에도 주성 안으로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자, 점차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나름 매너 있게 막고 있던 방패 기사와 달리, 옆에 있던 도끼 전사가 발끈해서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아! 쫌!! 그냥 좀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어! 대관식 끝나면 비켜준다는데 왜 자꾸 이러는 건데? 당신이 이러고 있는 게 꼬장이지, 별게 꼬장이야?”

물론 상대방의 입장이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굳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내 고집이었다.

사실 난 어느 순간부터, 내가 평소보다 훨씬 더 흥분한 상태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맞다.

만약 평범한 날이었다면 태성 같은 거대 길드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큰소리를 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임 속에서까지 매일 퀘스트 노가다나 하는 삼류 인생에 불과한데, 아침부터 내가 싫어하는 그 자식이 왕이 된다는 뉴스를 접해서 그런지 배알이 꼬인 모양이었다.

다리우스 박태후.

오직 그 한 놈만을 위해 이토록 많은 구경꾼들이 모였고, 수많은 길드원이 동원된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나는 고작 그놈의 콧방귀만도 못한 영향력에 가로막혀, 이렇게 출입을 저지당하고 있었다.

‘그놈이 대체 뭐라고! 그저 운 좋게 태어난, 싸가지 없고 비열한 자식일 뿐이잖아! 세상은 왜 그따위 녀석한테 이렇게나 열광하는 건데!’

물론 자격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레이몬드 뽑기 또한, 왠지 아까의 주머니 뽑기와 같이 계속 이어서 하면 대박이 나올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출입을 통제한다는 말에 평소보다 욱한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아니, 여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저쪽에 있는 생방송 관계자들이 자꾸 힐긋힐긋 쳐다보잖아, 뭔 일인데?”

그때, 연병장 쪽에서 화려한 은빛 풀 플레이트 아머과 장검을 착용한 기사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머리 위로 보이는 아이디는 태성의 1군 길드 마크를 단 ‘일도양단’.

이렇게 실제로 만나보는 건 처음이지만, 방송으로는 여러 차례 본 적 있는 아주 유명한 랭커였다.

“아! 일도양단 님, 별일 아닙니다. 여기 이 도둑분이 주성 출입이 안 된다는데 자꾸 퀘스트 한답시고 들여보내 달라고 떼를 써서요.”

다리우스가 보스 몹을 레이드할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같이 참여하는 주력 파티의 멤버.

또한 같은 태성 길드의 간부이자 타연 최고의 탱딜러 중 하나로 손꼽히는 유저가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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