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악연 (2)
“퀘스트? 이 번스타인 주성 안에 일반 유저가 할 만한 퀘스트가 있었나? 대부분 성 길드원들 대상의 퀘스트만 있을 텐데?”
“게반 마을에 몬테나 주머니 퀘스트 있잖습니까? 거기서 특급 치유 물약이 나왔다고 레이몬드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특급 치유 물약? 아, 그 유니크 악세 주는 퀘템? 오! 나 그거 나왔던 스크린 샷 보고 삘 받아서 주머니 500개를 사서 까도 안 나왔던 건데! 당신 구라지? 그거 미칠 듯이 안 나오는 건데, 그게 나왔다고?”
“찾아온 타이밍이 그렇긴 하지만 사실입니다. 오늘 운빨이 좋았는지 어쩌다 보니 그게 나와서 보상 템 받으러 온 거예요. 사실 전 지금 대관식 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흠……. 그게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당신 말대로 나왔다고 쳐. 근데 하필이면 왜 지금 와서 바꾸겠다는 건데? 대관식 시작하기 몇십 분 전에 와서 그것 때문에 들여보내 달라면 누가 믿겠어? 꼬장 부리려고 왔는데 출입 통제한다니깐 그냥 급조해서 구라치고 있다는 게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일도양단은 시종일관 건방진 말투와 반말로 날 다그쳐왔다.
‘이 자식, 방송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에 매너도 좋고 말투도 점잖더니, 다 컨셉이었잖아? 실제로 만나보니 이거 완전 양아치 새끼네?’
방송에서만 보던 이미지와 너무도 다른 말투와 강압적인 태도에 살짝 당황했지만, 나는 이내 생각을 가다듬고 녀석에게 반박했다.
“대관식 날, 그것도 바로 직전의 바쁜 시간대에 찾아온 건 제 불찰이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번스타인 성의 주인인 길드라 해도 게임 내의 퀘스트 NPC를 못 만나도록 통제하는 건 너무 하는 처사 아닌가요? 저는 대관식에 꼬장 부릴 것도 없는 도둑 캐릭터인 데다가 저 한 명뿐입니다. 이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하! 너무하긴 뭘 너무해? 그나저나 이놈 말하는 투가 좀 건방진데? 보아하니 저렙도 아닌것 같은데, 너 지금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이러는 거지? 가만! 어찌 됐건 네 말대로라면 지금 특급 치유 물약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아, 진짜라니까요. 랭커분이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요? 당장 교환 걸어 보세요, 교환 창으로 보여 드릴게요!”
내가 당장에라도 교환창으로 확인시켜주려고, 조금 떨어져 있던 일도양단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야! 너 거기 당장 안 멈춰? 내 곁으로 다가오기만 하면, 바로 검 날아간다!”
“…… 네?”
“뭔가 착각했나 본데, 내가 언제 교환 창으로 보여 달랐어? 네가 정말 가지고 있다면 거기 니가 서 있는 곳에 떨궈 봐. 그렇게 여기 있는 모두에게 진짜로 갖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면, 내가 책임지고 주성 안으로 들여보내 줄게.”
“네? 그게 뭔 개소리세요? 교환창으로 보여주면 될 거 가지고, 내가 왜 이 비싼 아이템을 땅에 떨궈요?”
아무리 랭커라 해도 듣다 보니 막말이 도가 지나쳤다.
누굴 호구로 보나, 내가 미쳤다고 이걸 땅에 떨궈?
“하하! 이놈 봐라, 흥분하니깐 막 나가네. 지까짓 게 누구한테 개소리래? 너 완전 돌았구나?”
“왜? 넌 반말 지껄이더니만 난 뭐 막말하면 안 되냐? 여기에 다른 유저들 없다고 아주 처음부터 개무시 모드더만!”
게임 속에서 장난식으로 구는 노매너는 흔히 접해봤다.
하지만 이렇게 악의로 가득 찬 채 나를 대하는 노매너는, 너무도 오랜만에 겪어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순간 나도 모르게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됐고! 떨궈보기 싫으면 말던가! 어떤 간 큰 놈이 대관식 앞두고 소란 피우나 와봤더니…… 그냥 쫄보 새끼였네?”
“와, 막말 진짜…… 아니, 그냥 교환창으로 보면 되는 걸 왜 땅에 떨굽니까, 위험하게!”
“야, 그러는 우리는 리스크가 없냐? 도대체 너의 뭐를 믿고 우리가 대관식하는 주성 안으로 들여보내 줘야 하는데? 못 보여주겠으면 그만 질척대고 꺼져라. 알겠냐?”
“진짜 일도양단 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이렇게 안하무인에 개매너로 게임하는 막장인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알겠습니다. 그냥 갑니다 가! 더러워서 나중에 바꾸고 말지!”
나는 놈의 계속된 노매너와 억지에, 결국 끓어오르는 빡침을 참지 못하고 독설을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방송을 통해 태성 길드원들의 실력과 레이드 성공에 솔직히 감탄한 적도 많았었는데…….
‘이제는 태성의 태 자만 들어가는 방송이 나와도, 다시는 쳐다도 안 본다. 더러워서 원, 퉤!’
어쨌든 놈이 아무리 도발을 해대도, 내가 특급 치유 물약을 땅에 떨궈 보는 그런 미친 짓을 할 린 없었다.
그렇게 포기하고 뒤돌아 가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일도양단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매너? 막장? 뭐, 더러워서 어쩌고저쩌고? 이 새끼가 완전 미쳤구만? 야…… 너 거기 멈춰.”
“…… 뭡니까?”
“노길드 솔플 유저면 눈치껏 알아서 기었어야지, 무슨 솔플러 주제에 탑티어 길드원보다 더 뻣뻣하게 개겨대? 나한테 두 장밖에 없는 척살권을 쓰더라도 오늘 니 싸가지는 내가 고쳐버리고 만다.”
척살권.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일도양단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나와버렸다.
개개인이나 길드의 원한 대상들을 명부(名簿)로 만들어 공유한 뒤, 보이는 족족 무차별로 PK하는 시스템.
그게 바로 척살이었는데, 대형 길드들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이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 내가 이놈의 욱하는 성격 때문에 게임 접을 날이 올 줄 알았지. 그냥 안 된다고 했을 때 조용히 뒤돌아 갔으면 됐을 거 가지고, 왜 굳이 입을 놀려서…….’
현실에서 내세울 것 없는 백수라서 그런지, 나는 간혹 게임 속에서도 무시당할 때가 생기면 이렇게 입으로라도 개겨대곤 했다.
물론 나의 이런 욱하는 면은 사실 게임이 갖고 있는 일종의 익명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제까지 개겼었던 상대들이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라 별 탈 없이 넘어갔었지만, 이번만큼은 완전히 급이 다른 대상이었다는 걸 간과했다는 점이다.
“척살이라니……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자존심을 부렸네요. 이렇게 사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키운 내 캐릭터인데 이런 사소한 일로 망칠 순 없었다.
게임 속이기에 욱하면 미친놈마냥 개길 수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게임이기에 이렇게 발빠르게 사과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진 않은 일이었다.
“아니다. 방금은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니가 정말 퀘스트 보상받으러 온 유저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너무 악당 같잖아?”
“아니, 그렇지 않아요. 누가 일도양단 님을 악당으로 생각한단 말입니까? 일단 저는 절대 아닙니다.”
“노 노. 이러면 내가 너무 개인 유저를 협박했던 거로 보일 것 같아.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니가 퀘템을 떨구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게 니 결백을 여기 있는 모두에게 증명한다면, 당장 나도 사과하고 성안으로 들여보내 줄게.”
녀석의 원래 성격이 개차반인 건지, 아니면 무슨 기분 나쁜 날에 내가 잘못 걸린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암만 봐도 나를 상대로 뭔가의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랭커이자 최강 길드의 간부라는 놈이, 이렇게까지 비상식적으로 행동할 리가 없었다.
“흠,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오늘은 대관식도 있고 그러니 그냥 나중에 조용할 때 와서 퀘스트 할게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허 어딜! 이렇게 그냥 가면 지금까지 우리가 대화를 나눈 보람이 없잖아? 뭐야, 그렇게나 결백하다면서 왜 그렇게 쫄고 그러는데? 여기서 발밑에 떨군 템을 스틸할 유저가 어디 있다고? 자, 어디 날 한번 봐봐!”
일도양단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이 차고 있던 검을 해제하더니 발밑에 드랍했다.
<+4 사자왕 번스타인의 미스릴 장검>
순간 메마른 돌바닥이 환하게 빛날 정도로 멋진 외형의 장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가, 금세 일도양단의 품으로 사라졌다.
유니크 템이 드랍된 것도 본 적 없었는데, 레전더리 템의 첫 실물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봤지? 어려운 거 아니잖아? 난 이렇게 레전더리 검도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는데 말야?”
“아, 아뇨. 결백하다는 걸 굳이 그런 식으로 증명할 필요까진 없잖아요? 전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어허? 지금 니가 그렇게 가면 날 완전 개무시하는 거잖아. 내가 손수 검까지 풀어서 보여줬는데 넌 그냥 간다고? 정말 이대로 게임 접고 싶은가 보네. 하하!”
이건 분명 날 호구로 보고 개수작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나 내가 특급 치유 물약을 떨궈보기를 원하고 있다는 건, 당연히 내 아이템을 먹자하거나 무슨 수를 써서 골탕 먹이겠다는 의도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이제 와서 그냥 무시하고 돌아가거나 로그아웃하기엔 늦은 것 같다. 저 개차반 성격을 봤을 때, 그렇게 하면 분명히 척살 리스트에 올릴 게 뻔해…….’
빠르게 생각, 또 생각해 봤지만…… 외통수에 빠져 버렸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유심히 둘러본 후,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내렸다.
‘광장 중앙 부근은 여전히 인산인해. 하지만 여긴 떨어져 있고 통제를 해서 그런지 확실히 유저들이 전혀 다니질 않는다…….’
가까운 곳에 먹자를 할 만한 다른 유저가 없었기에, 크게 위험할 것도 없어 보이기는 했다.
그렇다면 역시 은신이나 투명화 가능 유저들만 조심하면 됐는데, 어차피 그 상태에서의 아이템 습득은 원천적으로 제한됐기에 크게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아, 사과가 영 안 통하는 분이시네요? 뭐, 알겠습니다. 그러면 남자답게 떨궈 보도록 하죠. 그쪽에는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으니 1초쯤으로도 충분하겠죠? 한 번만 할 테니, 꼭 제대로 확인하시고 약속 지키세요.”
“아아 그러지, 그러고말고! 쫄보지만 그래도 아주 상쫄보까지는 아니었나 보네? 간만에 재밌는 녀석을 만났어. 크크.”
“아 진짜, 씨……. 어휴, 말을 말자. 그럼 떨굽니다!”
끝까지 거만한 저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야 척살을 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물약을 떨구었다.
그렇게 잠시 1초 정도의 여유를 두고, 다시 물약을 줍기 위해 몸을 굽히는 순간이었다.
[도발의 살기!]
일도양단이 갑자기 나를 대상으로 공통 스킬인 도발을 시전해 왔다.
레이드나 필드에서 대(對)몬스터 용으로 주로 쓰이는 어그로 스킬, 도발의 살기.
하나 유저를 대상으로 쓰면 한순간이지만 시전자를 강제적으로 바라보게 기능도 있는 스킬인지라, 도주하거나 공격 중인 유저의 모션을 훼방 놓을 수 있는 유용한 스킬이었다.
“그럼 그렇지! 니 새끼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조용히 넘어가 주기를 바랐건만, 역시나 그냥 확인만 할 놈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으니, 도발의 살기만으로 내가 특급 물약을 줍는 걸 막을 순 없다.
순간적으로 그런 판단을 내린 나는, 물약을 다시 줍는 것을 포기한 채 주저 없이 옆을 향해 몸을 던졌다.
[에어 밤!]
콰쾅!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내가 서 있던 곳에 넉백을 유발하는 바람 마법이 날아와 터졌고, 나는 간발의 차이로 그걸 피할 수 있었다.
“뭐, 뭐야? 저 자식! 어떻게 알았는데!”
일도양단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직 내겐 대꾸할 시간이 없었다.
설령 내가 에어 밤을 맞아 넉백당했다 하더라도, 그사이에 놈이 내 앞까지 다가와서 퀘템을 먼저 줍기에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그 말인즉슨, 녀석에게는 물약을 대신 먹어 줄 조력자가 아직 남아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그 유저는 가까이에 있었을 것이고, 조금 전까지 내 시야에는 없었으니 답은 하나였다.
은신.
혹은 투명화 캐릭이 줄곧 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림자 밟기!]
이런 생각의 흐름이 내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순간!
역시나 보이지 않던 도둑 캐릭 하나가 내 바로 뒤로 익숙한 스킬을 써서 이동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내가 도발과 에어 밤으로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은신을 풀고 먹자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역시 랭커는 랭커구나!’
분명 이런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 급조한 멤버였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의 연계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짜임새 있게 이어졌다.
따라서 잠시만 한눈을 팔았거나 어리바리를 탔다면, 내 뒤로 순간이동한 도둑이 분명히 한발 앞섰을 것이다.
‘만약 내가 평범한 도둑이었다면 말이지!’
하지만 난 돌아가는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했고, 먹자를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루트를 선택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철컥.
물약을 집는 순간, 뒤편의 도둑이 뻗은 손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모습이 보였다.
하마터면 몇백만 원짜리 아이템을 녀석들에게 고스란히 빼앗겨 버릴 뻔했다.
“이 양아치 새끼들! 설마 했는데 니들이 그러고도 랭커라고 할 수 있…….”
[차징!]
울화와 함께 터져 나온 나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
달려오던 일도양단이 직업 고유 스킬인 차징을 시전해서 나를 날려버렸다.
퍼엉, 쿵!
[일도양단으로부터 2,274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2초간 넉백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차징은 고작 전진기이자 상태 이상기 스킬인지라 공격력 계수가 강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공격 한 방에 체력이 1/3이나 깎이며 날려져서, 녀석 앞에 볼품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처음으로 맞아보는 랭커 기사의 위력적인 차징.
그건 확실히 이제까지 만나왔던 기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격’ 자체가 달랐다.
“와…… 이 새끼 뭐 하는 놈이냐? 우리가 셋이나 나섰는데도 이걸 실패했다고?”
아쉬워하는 녀석의 말에 맞장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