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대관식 (2)
‘멋지긴 멋지구나……. 실제 성격은 개차반일지라도, 겉모습만큼은 정말 남자가 봐도 간지가 나. 하지만 더는 널, 부러워만 하며 살진 않을 거다.’
평소였다면 질투에 쓰린 속을 그저 다스려야만 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다리우스의 저 당당한 모습은 내가 달성해야 할 최종 목표가 실체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오늘부로 도전도 해보지 않은 채 포기부터 떠올리던 강지환은, 세상에 없었다.
저벅저벅.
녀석은 양옆으로 길게 무릎 꿇고 도열해 있는 수백 명의 길드원을 지나, 홀의 가장 안쪽에 있는 왕좌까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비어 있는 왕좌의 옆에 서 있던 NPC, 로베르타 추기경의 앞으로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빛의 신 루이튼 님의 신실한 종 다리우스가, 교단의 로베르타 추기경을 뵙습니다.”
“다리우스 경. 저는 그대의 요청에 따라 루이튼 님의 성스러운 가호 아래 새로운 국가의 건국을 천명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대는 국가의 성립 조건을 모두 충족하였습니까?”
“네, 모두 충족했습니다. 추기경님.”
유저가 국가를 건국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2가지 방법이 알려져 있다.
하나는 타연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제국의 황제 NPC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
나머지 하나는 각 교단을 통해 모시는 신으로부터 인정받는 방법이었다.
다리우스는 아무래도 제국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되고 싶다고 본인의 목표를 공공연하게 밝혀왔기 때문인지, 교단을 통한 건국을 선택한 듯싶었다.
추기경이 인공지능 NPC인지라 대화가 어색한 감이 있었지만, 다리우스는 내색하지 않고 국왕이 갖춰야 할 태도를 썩 잘 연기해냈다.
“확인되었습니다. 빛의 신 루이튼 님께서는 그대의 요청에 기뻐하시며, 앞날에 축복을 내려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제 그대가 건국할 나라의 이름을 제게 알려 주시겠습니까?”
“네. 새롭게 건국할 국가명은 ‘태성전자’로 하겠습니다, 추기경님.”
“알겠습니다. 국가의 이름은 태성전…….”
[슬립!]
그 순간이었다.
국가명이 정해지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운영자 테오시스가 둘 사이에 나타나 추기경을 강제로 재워버렸다.
‘와! 설마 슬립? 도대체 레벨이 얼마나 되길래 추기경급 NPC를 단번에 재울 수 있는 거지?’
새삼 운영자는 천외천(天外天)의 존재라는 사실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운영자가 추기경을 재운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다리우스 님, 이미 저희 일루전에서 사전에 충분히 안내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길드명과 달리 국가명은 일반 유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강제성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기에, 광고나 홍보 목적의 브랜드명 사용은 절대 불가하다고 말입니다. 방금 정하신 국가명은 게임 정책상 허용될 수 없습니다. 약관에 동의하셨던 대로 협조해 주시기를 다시 한번 정중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랬었지요. 죄송합니다, 테오시스 님. 제가 너무 흥분되고 긴장된 상태라 가장 짓고 싶었던 국가명을 실수로 말해버리고 말았군요. 잠시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다리우스 님. 유저 최초로 국가명을 결정하시는 만큼, 신중히 정하시길 바랍니다.”
작은 해프닝이었기에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 넘겼을지 몰라도, 내 눈에는 달리 보였다.
운영자가 미리 안내까지 했다면 절대 실수일 리가 없다.
분명 녀석은, 모른 척 시도했다가 결정되면 이득이고 안돼봤자 본전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손익에 민감하고 철저한 놈이야. 하긴 저런 성격이었으니 줄곧 통합 랭킹 1위 자리를 지켜낸 거겠지…….’
“아울러 방송으로 대관식을 시청하고 계시는 모든 유저분들께서도 방금 제가 말씀드린 사항을 항상 염두에 두시고 플레이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다리우스 님, 이제 결정하셨습니까?”
“네, 결정했습니다.”
길드 간부진들과 채팅을 잠시 나누는 듯싶던 다리우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운영자는 추기경에게 회복 스킬을 사용한 뒤 모습을 감추었다.
“국가의 이름은 태…….”
“잠시만요, 추기경님! 실례지만 국가명을 정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대가 건국할 나라의 이름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빛의 신 루이튼 님의 가호 아래 제가 건국할 국가의 이름은 ‘티에스’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국가의 이름은 ‘티에스’로 책정하여 루이튼 님께 봉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국가명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는지 운영자의 개입이 없었다.
태성전자는 안 되지만 영문 이니셜은 무사통과라니, 유저들이 바보도 아니고 너무 줏대 없는 기준이 아닌가 싶었다.
여하튼 추기경은 곧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고, 이내 전신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와 홀 안을 온통 환하게 빛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초쯤 지났을까, 내 눈앞에 타연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전체 알림’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타이탄 연대기에 새로운 국가 ‘티에스’가 건국되었습니다.]
[‘티에스’국을 건국한 초대 국왕은 ‘태성’ 길드의 ‘다리우스’ 님입니다.]
“신생 티에스국에 루이튼 님의 무한한 영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기경님. 그럼 이만…….”
자리에서 일어난 다리우스는 천천히 왕좌를 향해 한 발자국씩 걸어 올라가더니, 이내 좌중을 향해 망토를 휘날리며 뒤돌아 왕좌에 앉았다.
그렇게 왕좌에 앉는 것과 동시.
홀의 벽과 내부, 스크린 밖으로 보이는 내성 광장의 모습, 심지어는 지금 내가 숨어 있는 이 방에 이르기까지 성의 장식들이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곳곳에 태성전자의 로고와 똑 닮은 티에스국의 국기도 새롭게 내걸렸다.
지붕과 성벽, 건물 등에 새겨져 있던 태성 길드의 문양도, 모두 티에스국의 문양으로 순식간에 덧칠하듯이 변해 버렸다.
게임이기에 가능한 광경이겠지만, 정말 어떤 마법으로도 볼 수 없는 신비스러운 광경이었다.
‘열은 받지만,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비록 게임 속이지만 국가를 건국한다는 건…… 이렇게나 간지 나는 일이었어.’
한낱 게임 속의 짧은 이벤트에 불과하다지만, 누가 감히 이 건국의 순간을 고작 게임 속 일일 뿐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모든 유저들에게 친히 전체 알림창으로 다리우스의 위업을 모를 수 없도록 직접 알려줬다.
또한 주변 환경과 게임 속 NPC들, 그리고 수백만 명의 유저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장 이곳만 봐도 수만 명의 유저들이 직접 이 대관식을 구경하기 위해 몸소 참석하도록 만들었으며, 방송을 통해 그 몇십 배가 넘는 사람들이 생방송으로 시청하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달성하고 이끌어낸 영향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봐도 너무 대단한 모습이었다.
‘저런 삶을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결심은 했다지만…… 내가 정말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생전 처음, 질투심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모자란 그런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도, 스크린 속 다리우스는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대관식 행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렇게 저희 티에스국의 건국을 축하를 위해 참석해 주신 유저분들, 또한 방송을 시청하고 계시는 시청자 여러분들께 먼저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크나큰 관심과 애정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 저희 티에스에서는 별것 아니지만 몇 가지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건국을 선포했으니 파티가 빠질 순 없는 법.
그저 유저들이 자주 하는 마법 난사쇼나 물약 쇼 등이 다소 성대한 스케일로 이어지겠다고 예상했으나, 뒤에 나온 말은 모두의 예측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저희 태성 길드에서 준비한 대규모 불꽃놀이와 총 10만 개의 물약 드랍쇼가 있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내기에는 너무 싱거우시겠지요? 그러니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저희 태성 길드가 3년 동안 모아온 모든 업적치를 바쳐 ‘신의 선물’ 랜덤 뽑기에 타연 최초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많은 성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와아아!!
다리우스의 폭탄 선언이 끝나자마자, 이를 스크린으로 지켜보고 있던 수만 명의 유저들이 일제히 광장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질렀다.
나 또한 ‘신의 선물’은 전혀 예상 못 했었던 것이기에, 깜짝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국가 업적치’를 대가로 바쳐야 하기에, 도전 가능 필수 요건으로 ‘국왕’이라는 자격을 요구하는 세계관 최고의 랜덤 뽑기.
그 신의 선물을, 건국하자마자 수많은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도하겠다는 말이었다.
『와! 놀랍습니다! 김석용 아나운서님, 드디어 대관식의 하이라이트가 공개됐는데, 이건 저희 측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굉장한 빅 이벤트네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대관식 행사에 우려를 나타냈었잖아요? 게임 내에는 따로 대관식이라는 시스템적 이벤트 효과가 없는데, 굳이 뭐 볼 게 있다고 거창하게 방송까지 하느냐고 말이죠!』
『네, 맞습니다, 양민아 앵커. 사실 방금 보셨다시피 건국 시스템은 황제의 사자나 교단의 고위 사제 NPC가 파견 나와, 조건 달성만 확인하면 끝나는 굉장히 간단한 과정이지 않습니까? 물론 태성 휘하의 길드원들 수천 명이 복장을 맞춰 입고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는 연출도 충분히 멋졌던 장면이기는 하지만, 사실 대관식이라고 칭하기에는 진부하고 미진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죠.』
『네. 그래서 급하게 이번 대관식을 준비했던 태성 길드 측에서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텐데요. 사실 대규모 불꽃놀이나 아이템 뿌리기 등은 많은 유저들이 예상했던 이벤트들이긴 했지만, 이렇게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신의 선물’을 생방송으로 시도해 볼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그렇습니다! 타이탄 연대기가 타이탄 에이지의 설정을 대부분 계승했기에, 많은 유저들이 ‘신의 선물’ 시스템이 최초로 오픈되거나 시도될 날을 손꼽아가며 기다려 왔을 텐데요. 여기 가상현실 게임으로 계승된 타이탄 연대기에서는 바로 오늘! 저희 타이토닉TV를 통해 최초로 공개될 수 있겠네요!』
중계 앵커들의 호들갑스러운 대화만큼이나, 광장은 흥분으로 가득 찬 열광의 도가니였다.
비록 PC 버전이었던 타이탄 에이지는 가상현실 버전이 출시되며 운영을 종료했지만,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세계관이나 지리, 설정 등이 대부분 계승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골수팬들은 아직 초창기에 불과한 이 가상현실 버전에서, 차후 구현될 기존의 설정들이나 아직 오픈되지 않은 옛 콘텐츠가 공개될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가장 유명하고 드라마틱했던 콘텐츠 중 하나인 ‘신의 선물’이 갑자기 잠시 후에 공개된다고 하니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온라인 게임은 스토리나 게임성도 중요하지만, 지속 가능한 콘텐츠의 유무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패키지 게임과는 달리 길게는 몇십 년이고 하루도 빠짐없이 유저들이 접속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말하자면 ‘엔딩이 없는’ 게임이니 말이다.
따라서 게임사들은 지속해서 대규모 업데이트를 한다거나 새로운 요소들을 첨가하고는 했지만, 사실 그들 입장에서 ‘강화 러쉬’와 ‘랜덤 뽑기’만큼 손쉽고 효과적인 게 없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이 두 개의 시스템만 있어도, 퀘스트와 노가다를 반복하기 위해 매일같이 게임에 접속했기 때문이다.
이런 두 시스템을 가장 잘 써먹고 흥했던 게임이 바로 타이탄 에이지였으니, 역시나 갓겜이라고 칭송받는 지금의 타연에서도 어찌 보면 가장 근간에 있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었다.
그중 디바인급의 아이템을 뽑을 수 있는 ‘신의 선물’은, 오직 국왕인 유저만이 할 수 있는 게임 설정상 가장 최상위에 존재하는 뽑기였다.
『이미 요건이 공개된 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너무나 힘든 요건들 때문에 3년간 봉인 상태였던 신의 선물이 드디어 오늘 개봉되는군요. 사람들은 태성 길드가 대가인 국가 업적치 1000만으로 맞바꿀만한 길드 업적치를 아직 충족하지 못해, 건국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었는데요. 하지만 태성은 이미 1000만이라는 어마무시한 길드 업적치를 충족하고 있었군요!』
『정말 그렇네요. 사실 그동안 태성 길드는 창설된 후 3년여의 세월 동안 수많은 명 길드전을 탄생시켰던 승리의 주역이잖아요? 또한, 5성을 통일하기까지 매달 열린 공성전에서 성을 뺏고 뺏기면서 쌓은 승전 업적치도 상당했을 거고요.』
『네, 맞습니다. 당장 저도 인상 깊었던 공성전들이 몇 개 떠오를 정도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다리우스 님의 레이드 팀이 달성한 퍼스트 킬 업적치들도 역시나 상당한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벌써 1000만 업적치를 모았었다니, 정말 독보적인 1등 길드답네요. 역시 태성, 정말 클라스가 다르긴 다르네요!』
『양민아 앵커, 방금 말씀은 게임 내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대형 길드들이 듣는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인 것 같군요.』
『어머! 제가 너무 흥분해서 실언을 했네요. 여러 유수의 길드 관계자분들과 팬분들께서 언짢으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옆에서 같이 중계 중인 젊은 여자 앵커가 예상 밖의 이벤트에 흥분한 것 같자, 김석용 아나운서가 주의를 주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타이토닉을 즐겨보는 애청자라면 양민아 앵커가 태성 길드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대부분 눈치채고 있었다.
‘석용 아재, 여전히 깐깐하시구만. 사실 양민아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없는데 말야……. 인정하기 싫다만, 태성이 부동의 원탑인 건 맞지 뭐.’
야구나 축구 같은 종목들이 구단들마다 수많은 팬을 보유한 것처럼, 타연 속 유명 길드들도 이미 수많은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하나의 브랜드 상품이나 마찬가지인 시절이다.
따라서 수많은 팬덤들은 길드끼리 전쟁을 한다거나 공성전 및 레이드 경쟁을 할 때마다, 열렬히 분석과 비교를 하거나 중계방송을 보며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태성 길드와 다리우스의 레이드 팀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한목소리였다.
어나더 클래스(another class)!
다리우스는 건국도 모자랐는지 최초로 디바인급 아이템 획득에 도전해, 누구도 지금의 평가를 넘볼 수 없도록 만들 작정인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