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대관식 (3)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불가능한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겠지?’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도중에도, 태성이 준비한 불꽃놀이와 물약 드랍쇼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불꽃놀이는 수천 명의 마법 계열 길드원들이 화력을 주도했는데, 내성에 모인 일반 유저들까지 가세해 광장의 하늘을 온갖 스킬과 마법들로 화려하게 수놓았다.
당연히 별다른 폭죽 아이템이나 게임 시스템적인 도움 요소가 있는 불꽃쇼는 아니었다.
하나 수만 명이 동시에 쏘아내는 마법과 스킬들이 쉴드 마법과 부딪쳐 터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일 뿐만 아니라, 유저들이 기념으로 삼을 만한 특별한 순간이었다.
이후에는 공언했던 대로 10만 개의 물약 드랍쇼가 이어졌다.
현재 타연에 얼마 없다는 그리폰과 페가수스 펫을 가진 태성의 라이더들과 플라이 마법을 쓴 길드원들이, 내성의 상공을 날아다니며 유저들의 머리 위로 물약을 뿌려댔다.
주성 옥상에 물약들을 쌓아 두고 쉴 새 없이 보충하며 뿌려대는 모습을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창문 밖으로 뛰쳐나갈 뻔하기도 했다.
‘아, 저 물약들 10개만 주워도 돈이 몇만 원인데! 크으, 아깝다! 그나저나 태성이 진짜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지금 물약값으로만 억 단위를 뿌리고 있는 거잖아?’
물론 이 대관식 중계를 통해 방송사로부터 벌어들이는 돈이나 길드와 기업의 홍보 효과, 차후 연계될 CF 등의 여러 가지 부가적인 수입 등이 있기에 가능한 이벤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스케일이 워낙 남달랐기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러모로 성대한 축제의 한복판이었다.
이윽고 유저들이 가장 즐거워했던 물약 드랍쇼까지 끝이 나자, 마침내 기다려 왔던 운영자의 축복 버프가 이어졌다.
“범위 설정…… 목표 대상 총 53,921명. 성장의 가호!”
방송 관계자들의 진행에 따라 운영자 테오시스가 광장 한복판에 나타났고, 몇 마디 멘트와 함께 하늘로 두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수천, 수만 가지의 빛줄기가 비처럼 내려와 내성 안에 있는 모든 유저들에게로 빠짐없이 흡수되었다.
[GM 테오시스로부터 ‘테오시스의 가호(성장)’ 버프 효과를 받았습니다.]
* 성장의 축복: 일주일 동안 경험치 획득률이 150% 증가합니다.
* 부활의 축복: 일주일 동안 사망 시, 부활 후유증이 삭제됩니다.
나 또한 빛이 스며들자, 시야 상단 버프 구간에 GM 테오시스의 실루엣으로 만들어진 버프 효과가 표시됐다.
‘좋아, 이제 운영자 버프까지 받았으니 오직 레벨업에만 전념한다!’
시작이 좋았다.
랭커가 되고자 다짐하자마자 경험치 축복을 받았고, 수중에 장비를 장만해줄 유니크 템까지 얻은 상태였다.
일단 한 달 동안 주머니 노가다로 모아둔 몇달치 생활비까지 있었으니, 당분간은 템을 팔아 가며 노가다를 할 필요 또한 없었다.
‘역시 데스라 사막의 리자드맨 군락지가 제일 괜찮으려나? 경험치는 잘 주는데 대박 템이 없어 버림받은 곳이니까 말야.’
혼자 가면 물약 값도 못 메꿀 사냥터이기는 했지만, 몬스터들이 많아 쉴 새 없이 사냥이 가능한 사냥터가 떠올랐다.
게임 속에서 최고가 되려면, 템도 중요하지만 역시 레벨부터 일단 최상위권에 먼저 도달하는 게 정답이었다.
그렇게 마을 귀환 주문서를 사용해서 성을 빠져나가기 직전, 다시금 스크린에 다리우스의 모습이 비치며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이제 대관식도 끝이 보이는 듯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리우스 님이 공언하셨던 신의 선물 도전만이 남은 것 같은데요. 다리우스 님, 이제 드디어 모두가 기다려 왔던 신의 선물을 도전하실 차례인 건가요?』
『네, 맞습니다. 테오시스 님의 도움으로, 신전이 아닌 추기경 로베르타를 통해 이곳 번스타인 성에서 곧바로 시도할 수 있는 배려를 받았습니다. 덕분에 대관식의 피날레는 여러분들의 앞에서 타연 최초로 디바인 아이템에 도전하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뽑기까지만 보고 갈까? 뭐가 나올지 진짜 궁금한데……. 그래, 뭐가 나오는지만 보고 바로 귀환하자. 어차피 다리우스가 최종 목표인데, 무슨 디바인 템이 나오는지 정도는 미리 알아둬야 좋지 않겠어?’
나 또한 이 타이탄 연대기를 3년 동안 플레이한 헤비 유저였기에, 마음이 급하더라도 당장 저기서 뭐가 나올지 너무 궁금했다.
아마 확률상 방어구 중 한 피스나 액세서리쯤이 나오겠지만, 만약 스펙을 바로 공개한다면 디바인급의 장비가 어느 정도 수준의 옵션들로 구현됐는지 알 수도 있었다.
‘뭐, 설마 1% 미만의 확률로 나온다는 디바인 무기가 나오지는 않을 테지만 말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설레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 저희는 따로 신전으로 이동해서 중계를 진행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곳에서 바로 하시기로 이미 이야기가 됐었군요! 다행입니다, 여러분. 이곳에 계신 수만 명의 유저분들께서는 이 번스타인 성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겠습니다!』
『하하! 역사적인 순간이라니 너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밤낮없이 몰두해서 겨우 획득한 자격인 만큼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맞이하고는 싶군요. 여기 계신 유저분들과 시청 중이신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도 제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다 같이 응원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좋은 결과라면 아무래도 디바인 ‘무기’겠지요? 빛의 신 루이튼의 무기라면 설정상 신검이자 7신기 중 하나인 ‘룬 페이토나’겠군요. 마침 기사 클래스이시니, 만약 신검을 뽑으신다면 정말 너무나 잘 어울리시겠습니다.』
『하하하! 말씀만 들어도 무척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디바인 무기를 뽑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사실 제가 그렇게나 운이 좋은 편은 못 됩니다. 기다리시는 시청자분들도 그렇고 시간도 이미 많이 지체된 것 같으니, 이만 각설하고 도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양심도 없는 새끼…….’
그런데 저놈, 뚫린 입이라고 헛소리를 잘도 나불대고 있었다.
재벌 3세로 태어나 랭킹 1위까지 하고 있는 네가 운이 좋은 놈이 아니라면, 도대체 대한민국 사람 중에 누가 운이 좋은 사람이냐?
『네, 저도 덩달아 긴장되기 시작하는군요. 아무쪼록 빛의 신 루이튼 님과 수많은 유저분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다리우스 님의 도전은 저희 타이토닉TV가 계속 함께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한 시도 눈을 떼지 말고 이 순간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김석용 아나운서의 멘트를 마지막으로, 다리우스는 아직 남아있던 추기경 로베르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길드 업적치를 국가 업적치로 변경하자마자 바쳤는지, 로베르타가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모션을 취하며 외쳤다.
“자애로운 빛의 인도자, 루이튼 님이시여! 이곳에 당신의 기적을 내려주소서!!”
쿠왕!
단순한 빛이었기에 이러한 소리는 없었지만, 시각만으로도 충격음이 들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로베르타가 천장을 향해 뻗은 두 손 위로, 하늘에서 거대하고 눈부신 빛기둥이 홀의 천장을 통과해서 내리꽂히기 시작한 것이다.
현란한 빛의 향연으로 인해 온 성이 흔들리는 것만 같은, 장엄하면서도 신성한 광경이었다.
“…….”
광장의 모든 유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전부 대화를 멈췄고 세상은 한순간 적막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당하면서도 가슴이 세차게 떨릴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이었다.
『빛, 빛의 기둥이! 추기경의 두 손 위에 점차 집중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김석용 아나운서의 멘트만이 마이크를 통해 광장에 울려 퍼지던 그때.
마침내 시스템의 전체 알림창이 모든 유저들의 눈앞에 다시 한번 떠올랐다.
[빛의 신 루이튼의 신검 ‘룬 페이토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최초의 디바인 무기 출현으로 ‘타이탄’ 시스템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와아아아아!
어리둥절한 채 시스템 알림창을 바라보던 유저들은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하다가, 곧 온 광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한 번, 단 한 번 만에……! 그것도 최초로 시도되는 첫 트라이 만에 극악의 확률을 뚫고 신검이 뽑히고 말았습니다! 티에스국의 국왕 다리우스 님이 최초의 디바인 무기, 신검의 주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미쳤구나! 이건 진짜 미친 거 아냐? 어떻게 1%의 확률이라는, 아니 그보다 낮을지도 모른다는 디바인 무기를 첫 시도에서 뽑아버리는데? 와, 진짜 인생 거지 같네! 저렇게 다 가진 놈이 운마저도 저렇게 좋으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내 입에서도 기함이 터져 나왔다.
내가 조금 전 그렇게 결심했던가?
저런 놈을 따라잡아서 지존이 돼보겠다고?
순간적으로 미칠 듯한 탈력감과 시기심이 몰려와, 가상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현실에서는 신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대신 게임 속 신이라는 루이튼이라는 놈을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런 놈에게 신검까지 쥐여 주면, 도대체 나 같은 놈은 어떡하냐고 말이다.
“하하…… 하하하! 으하하하하!!”
점차 커지던 녀석의 웃음 소리가, 나중에는 어찌나 큰지 이 방까지 직접 울려 퍼져왔다.
길게 이어지던 웃음이 점차 줄어드나 싶더니, 어느새 스크린에는 녀석이 신검을 하늘로 치켜세우고 있는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천장의 창문 사이로 한 줄기 빛줄기까지 내려와, 마치 녀석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비추고 있었다.
왕좌를 뒤로 한 채 화려한 신검을 들고 있는 녀석의 모습.
신화 속 기사가 그대로 강림이라도 한 듯,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광휘에 둘러싸인 신의 기사.
그리고 어둠 속에 웅크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는 한낱 도둑.
비참하지만…….
굳게 다짐했었던 내 각오와 계획들이, 시작도 하기 전에 눈 녹듯이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 * *
[한 시간 후, 게임의 업데이트를 위해 임시 점검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예상 시간은 약 2시간입니다.]
[모두 안전한 곳에서 로그아웃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내 심정과는 달리, 시스템 창은 무심하게도 내 눈앞에 알림창을 띄워 왔다.
가뜩이나 불타고 있던 각오가 꺾이는 와중이었는데 찬물까지 끼얹어 버리는 임시 점검 소식이었다.
‘아! 텄네, 텄어. 일단 로그아웃해서 점심이나 먹으면서 다시 맘을 다잡아봐야겠다.’
스크린 속 다리우스는 호들갑을 떨고 있는 2명의 아나운서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화려한 신검의 모습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사람들은 지겹지도 않은지 연신 탄성을 터뜨려댔다.
그 순간이었다.
복도 쪽에서 희미하게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내가 있던 방의 방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은 몇 명의 궁수와 마법사들이었는데, 난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앉아있던 소파 옆쪽으로 몸을 던져 은신인 상태 그대로 숨었다.
[간파!]
역시나 들어오자마자 누군가 공통 스킬인 간파를 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행히 문 쪽에 있는 녀석들 시야의 사각(死角)으로 몸을 숨기는 데 성공했는지,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는 못한 듯싶었다.
“역시 아무도 없다. 어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창문 밖에서 보일 수도 있어. 그러니 모두 고개를 숙인 채로 대기해야 한다!”
작은 목소리로 서로 간의 주의사항을 속삭이듯 공유하며, 녀석들은 내가 있던 창가 쪽으로 다가왔다.
‘이상하다? 이제 곧 대관식이 끝나는데…… 이놈들은 대체 뭐지?’
녀석들이 내 앞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꼼짝 안 한 채 숨어 있다가, 이내 간파의 지속 시간이 얼추 끝났을 때쯤 몰래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다다닥!
복도 벽에 붙어 살며시 주변을 살펴보니, 계단을 통해 수십 명의 유저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올라온 인원들은 분산되어 3층의 방안으로 일사불란하게 들어갔다.
한데 녀석들은 특이하게도, 복도 양쪽으로 고르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광장 쪽을 향해 창이 난 방만을 골라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들 전부 태성의 적대 길드잖아? 분명 입구는 통제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피닉스, 고조선, 아틀란티스, 인천 연합 등 최소 10개 이상의 길드 마크들이 아이디 여기저기서 보였다.
그 모습까지 확인하자마자 나는 은신이 들킬세라 곧바로 마지막 층인 4층으로 뛰쳐 올라갔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많은 적 길드원이 여기 들어올 수 있었지? 분명히 주성 입구는 태성의 산하 길드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혹시…… 아까 연우 님이 재미난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던 게 이거였나?’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상황은 명백해 보였다.
바로 태성 길드 내부에서의 배신.
그렇다면 이들이 잠입한 목적 또한 하나밖에는 없었다.
‘잠시 후 이곳에서…… 설마 다리우스의 암살이 시도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