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신검의 주인 (2)
바로 멀린이었다.
다리우스에게 속박을 건 뒤, 집중포화의 각도에서 살짝 벗어난 곳으로 물러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다리우스가 죽자마자, 마법사의 고유 이동기인 ‘블링크’ 스킬을 시전해서 나보다 훨씬 앞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안 돼!”
멀린이 먼저 도착해서 줍고 말 것이라는 다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서,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뛰어났던 판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그동안의 내 게임 인생 20년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순간이었다.
[재빠른 몸놀림!]
먼저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를 올려 주는 도둑 클래스의 대표적인 고유 스킬 ‘재빠른 몸놀림’ 버프를 사용한 뒤,
[그림자 밟기!]
곧이어서 신검을 향해 단 두어 걸음만 남겨놓고 있는 멀린의 뒤통수를 향해 그림자 밟기를 시전했다.
십 수 미터를 앞서가던 멀린은 바로 뒤에 내가 순간이동을 한 듯 나타나자, 달려나가는 도중에도 뭔가 이상했는지 뒤돌아봤다.
마치 내 몸에 있는 모든 아드레날린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이, 신기하게도 나는 녀석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슬로우 모션처럼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하나 난 녀석과 달리 드랍템을 향해 지체 없이 몸을 던졌고, 결국 그 선택은 내 인생을 바꿔버리고 말았다.
이속 버프까지 걸었던 탓에, 아주 털끝 같은 차이로 신검에 내 손이 먼저 닿았던 것이다.
철컥!
그리고 뒤늦은 철컥!
간발의 차이로 내가 신검을 줍는 사이, 곧바로 도착한 멀린 녀석이 남아 있던 하나를 주웠다.
하나 더 남아 있던 드랍템, ‘마을 귀환 주문서’였다.
곧바로 넋나간 표정으로 내게 소리치는 멀린의 입 모양을 보면서, 나는 한순간 느리게 흘러가던 세상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느어어 무어야아? 가압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새끼냐고! 네가 지금 뭘 처먹은 줄 아는 거야 씨발!!”
녀석의 고함을 더 들어주고 싶어도, 듣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인지 속도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난 내가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을 순간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신검이잖아, 이 등신 새끼야! 로그아웃!!”
오직 자가 버프 하나와 이동기를 사용했을 뿐.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았던 난, 그대로 게임 밖으로 로그아웃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 * *
“헉헉! 헉!”
캡슐 안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온 나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긴장했었는지 온몸 또한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지금 뭔 짓을 한 거야! 아니, 뭘 먹어버린 거야? 설마 이거 꿈은 아니겠지!”
몸을 던져 땅에 꽂혀있던 신검을 잡던 감촉이, 아직 손아귀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캡슐 밖으로 나왔음에도, 아직 내 귓가에 멀린이 고함지르는 소리가 먹먹하게 울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데 이게 꿈이라고?
그럴 리가!
“와, 재림을 안 쓰고 그밟 썼으면 못 먹었을 거야. 아니 절대로 못 먹었다.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이속 버프부터 쓸 생각을 했다니……. 진짜 개쩔었다, 강지환! 잘했어, 강지환!”
대관식 직전, 비슷하게 아이템을 뺏길 뻔한 일을 겪었던 건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랐다.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아직 생방송이 진행 중일 거라는 사실이 생각나 급히 TV를 틀어 보았다.
삑!
『……습니다! 정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대사건, 아니 비극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대관식 당일, 그것도 수만 명의 유저들을 앞에 두고 이런 대범한 암살 작전과 전투라니요!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현재 주성 안은 아직 귀환과 로그아웃을 못 한 상대측 길드 연합과 태성 길드원들간의 피 튀기는 전투로 아수라장입니다. 근접 카메라맨이 전사하여 이렇게 원거리 카메라로밖에 현장을 중계하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저희 측 카메라맨이 원거리에서 담았던 다리우스 국왕의 사망 장면의 슬로우 화면이 준비됐다는 소식입니다! 지금 다 같이 한 번 보시겠습니다!』
사망했던 아나운서들은 금세 부활했는지, 어느새 격앙된 목소리로 생방송을 중계하고 있었다.
로그아웃한 후의 내성 상황이 순식간에 엉망이 돼버릴 것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내 캐릭터의 아이디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것이었다.
‘매그넘03’.
헐레벌떡 신검을 줍는 복면 쓴 도둑의 머리 위로, 내 아이디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모습이 연거푸 재생 중이었다.
“아…… 맞다. 이거 생방송 중이었지? 이거 큰일 났네.”
원래 게임 속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동영상 녹화 기능이 없는 타연이었지만, 몇몇 예외가 있었다.
몇 가지 제약 사항이 붙기는 하나, 일루전 측과 사전 협의가 된 방송사의 촬영 같은 경우가 그중 하나였다.
사실 방송이 아니었더라도 워낙 많은 사람이 앞에 있었으니 결국 소문은 금세 퍼졌겠지만, 내가 벌인 일이 워낙 대형 사건이었기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내, 내 신상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정보는 없겠지? 줄곧 솔플만 해왔으니깐 말야! 그러니 내가 매그넘이라는 거 아는 사람, 몇 명 없잖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명이 아니라 게임 속에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바로 내 친구, 류현중!
띠리리리!
이 자식도 양반은 못 될 거다.
내가 현중이를 생각해낸 그 순간, 휴대폰의 액정 위로 녀석의 이름이 떠올랐다.
-야! 지환아! 너 맞지? 너 맞잖아 매그넘, 영! 삼!
-야야야! 조용히 해! 너 어디야? 주위에 다른 사람 없고?
-집이다, 자식아! 좀 전에 일어나서 방송 보며 아점 먹다 전화하는 중이다. 아, 대관식 버프 받았어야 했는데!
-…… 백수 새끼. 설마 지금 쳐 인났냐? 너 자는 사이에 형이 타연에서 무슨 업적을 세웠는지 모르고?
-미친 새끼, 진짜로 너 맞구나! 와! 내가 너 먹자 기질이 남다른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신검을 먹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넌 자식아 먹자로 9시 뉴스에 나오게 생겼어, 지금!
-크크크. 농담하지 마, 이놈아. 나도 지금 얼떨떨해 죽겠으니깐.
-농담은 무슨 농담이야! 너 분명히 오늘 9시 뉴스뿐만 아니라 해외 토픽에도 나올걸? 나중에 너튜브에 방송 업로드되면 몇억 뷰 이상도 가뿐히 찍힐 거고! 니가 먹은 게 뭔데? 신검이잖아, 신검!
-야, 됐으니까 할 거 없으면 지금 우리 집으로 와 봐라.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이 얘기 아무한테도 하면 안 되는 건 알지?
-당연하지! 나 밥 다 먹었으니깐 후딱 갈게, 신검 들고 딱 기다리고 있어라!
호들갑스러운 녀석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불안했던 내 마음도 왠지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 * *
“왔냐?”
“야 이 새끼야! 오면서 폰으로 계속 돌려봤는데 어떻게 블링크를 보자마자 그림자 밟기 쓸 생각을 다 했냐? 0.1초만 늦었어도 못 먹었을 것 같던데. 아무튼 짜식아, 넌 이제 인생 폈다 폈어!”
자취방의 문을 열어주자마자, 현중이는 내 목에 헤드록을 걸며 유난을 떨어댔다.
녀석은 외골수적인 게임 플레이만 하던 내가, 대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들게 된 게임 친구였다.
우연히 동기들과 함께 갔던 피시방에서 녀석과 난 서로의 실력에 순수히 감탄하게 됐고, 이내 게임 성향과 실력이 엇비슷해 금방 뭉치게 됐었다.
알고 보니 녀석도 머리는 좋으면서 게임만 하느라, 나처럼 인서울은 못하고 집 근처에 있는 지방 사립대로 온 골수 게임 폐인이었다.
한 가지 나와 다른 점은, 녀석 또한 여러 게임을 좋아하지만 유독 PC 버전이었던 타이탄 에이지만은 출시 때부터 쭉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녀석은, 타연에서도 예전 길드 사람들과 함께 플레이하느라 게임 속에서 자주 보긴 힘들었다.
듣자 하니 지금 속한 길드 ‘세인트’의 사람들과는, 알고 지낸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인연이기는 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 성격에 대관식을 직접 보러 그곳에 갈 놈도 아닌데 거기는 왜 갔고, 뜬금없이 신검은 또 어떻게 주운 건데? 뭐 미리 알고 있던 게 있었어?”
“알긴 뭘 알아? 솔플만 하고 사는데. 들어봐…….”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있었던 일들을 전부 다 차례대로 현중이에게 설명해줬다.
“일도양단, 그 개자식…… 다리우스 따라다녀서 그만큼이나 큰 거지, 혼자면 뭣도 아닐 새끼가 양아치 짓은 혼자 다 했네? 잘됐다! 네가 다리우스의 검을 주운 건 어찌 보면 인과응보야. 일도양단 그 새끼가 네 퀘템을 뺏으려고 안 했으면 네가 신검 먹을 일이 있었겠어?”
“그치? 와, 아까는 얼마나 빡치던지, 바로 로그아웃했으면 나 캡슐 부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다리우스 캡슐은 멀쩡하려나? 크크, 불쌍하네. 기껏 운 좋게 신검을 뽑아놓고는…….”
“이놈 또, 또 금세 맘 약한 소리 하네? 양단이랑 둘이 현실에서 사촌인 거 몰라? 그리고 다리우스 그 자식도 니 말은 들어보려고도 안 했다면서? 하여간 잘 먹은 거다 진짜. 얘기 다 들어보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 먹자였구만!”
“그런가? 근데 스틸한 것도 아닌데 먹자는 무슨 먹자야! 엄연히 땅에 떨어져 있는 주인 잃은 장비를 우, 연, 히 주웠을 뿐야!”
“인마! 신검을 주워놓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다리우스가 뽑는 거 전 국민이 다 봤는데, 뭔 주인이 없어? 크크크.”
“누가 뽑든 죽어서 떨구면 주인 없는 거지 뭐. 내가 비매너나 불법을 저질렀으면 운영자한테 진작 연락 왔을걸? 근데 아마 앞으로도 안 올 건데……? 어때, 내기할래?”
해킹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가상현실이지만, 아이템을 사기당하거나 하는 경우로 운영자가 비공개로 개입하는 일이 간혹 있다고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사기는커녕 엄연히 게임 시스템적으로 문제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지환아, 말 나온 김에 신검 스펙 확인 좀 해보자. 언제 접속해 볼 거야?”
“지금은 임시 점검 시간이라 접속하려면 아직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걸?”
“와, 옵션 졸라 궁금하네. PC판에서는 종료 때까지 7신기 중 3개밖에 안 풀렸었고, 완전 미친 밸붕템이었는데! 근데 타연에서 벌써 풀리고, 지환이 니가 그걸 먹었다니……. 아참, 너 아직 옵션 못 봤지? 방송 보니깐 칼같이 로그아웃하던데.”
“못 봤지, 크크. 다리우스 다이하니깐 멀린이 줍게 해준다고 공격이 잠깐 멈춰서 다행이었지, 아마 거기서 0.5초만 더 지체했어도 공격당해서 로그아웃도 못 했을 거다. 진짜 지금 생각해봐도 운이 개쩔었네!”
“야, 그것만 운 좋은 줄 아냐? 너 로그아웃하고 바로 임시 점검인 건 어쩌고? 임시 점검 없었으면 너 아마 보름 넘게 접속 못 했을 수도 있어, 태성 애들이 전부 너 로그아웃한 곳에서 대기 탔을 테니까 말이야.”
“아…… 맞네?”
그랬다.
임시든 정기든 간에, 점검을 하면 몬스터의 리스폰(respawn)이 초기화된다.
따라서 예상치 못한 몹사를 방지하기 위해, 점검이 끝나면 예외적으로 로그아웃한 장소가 아닌 가장 가까운 안전지대에서 로그인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죽으면 100% 신검을 드랍하는 구조상, 임시 점검이 아니었다면 나를 죽이기 위해 다음 정기 점검 날까지 무한 대기하고 있었을 게 뻔했다.
“현중아, 그건 그렇고 이거 얼마나 할까?”
“응? 검 팔아 버리게?”
“그럼 이걸 내가 쓰냐? 이게 얼마짜리인데 내가 직접 써? 당연히 팔아야지!”
“그래? 나라면 직접 썼을 텐데……. 인생에서 이런 템을 써 볼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어? 하긴 뭐 팔아 버리는 게 나쁜 선택은 아니지. 아니, 일반적이라면 파는 게 당연하겠구나?”
“야, 너 간 졸라 크다? 죽으면 무조건 떨구는 템인데 이걸 어떻게 직접 쓰겠다는 소리가 나와? 너 절대 안 죽을 자신 있어? 하여간 이거 얼마나 할까……. 10억? 설마 20억? 신검이니깐 충분히 그쯤은 가겠지? 와, 상상만 해도 쩐다!”
나는 약간 오바 같지만, 진짜 로또 1등에 당첨된 기분 못지않았기에 그 금액에 견주어 신검의 가격을 불러봤다.
“농담하냐? 너 200레벨대에 맨날 솔플만 해서 아직도 타이탄 연대기 수준을 제대로 모르는구나? 신검의 스펙이랑 옵션을 봐야지 정확히 알 것 같은데, 일단 최초의 디바인급 ‘무기’인 것만 가늠해 봐도 최소 100억이야.”
“뭐? 100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