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타이탄 소환 (2)
[루이투스 봉인에 얽혀 있는 비밀: 일회성 퀘스트]
* 클리어 난이도: F
* 현재 신검 ‘룬 페이토나’는 루이투스의 소환이 봉인된 상태입니다.
* 봉인된 루이투스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페이센 왕국의 수도 룬몬(!)에 있는 루이튼교의 성지를 찾아가십시오.
* 루이튼교의 성지에 도착하여 교황 안테로(!)를 찾아간다면 봉인을 해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이도가 F등급인 걸로 보아, 그저 루이튼교의 교황을 찾아가기만 해도 봉인이 풀린다는 거저먹는 퀘스트로 보였다.
나는 곧바로 공간이동술사를 통해 룬몬으로 이동했다.
[페이센 왕국의 수도, 룬몬에 도착했습니다.]
“길드원 모집합니다! 레벨 150 이상의 힐러시라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모십니다!”
“사기꾼 제보합니다! 시간 끌다가 교환창에 다른 아이템 올리는 개자식이에요!”
확실히 한 왕국의 수도인 만큼 유저들이 떠드는 소리로 북적북적했다.
아무리 마을 안에서 들킬 일이 없는 8성 은신이라지만, NPC를 만나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까지 은신 상태로 할 순 없다.
그러니 무턱대고 교황 앞까지 갔다가 유저들의 눈에 띄기라도 했다가는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내 아이디는 이미 유저들에게 퍼질 대로 퍼졌을 테니……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퀘스트는 사람들이 뜸할 새벽 시간에 접속해서 깨야겠어.’
그렇게 난 내 운명이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 길고 길었던 타연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 * *
“후아! 벌써 저녁 뉴스 시간인 건가?”
캡슐 밖으로 나와 보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9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잘 보지 않던 저녁 뉴스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에 예외적으로 TV를 켰다.
이미 타이토닉TV에서는 저녁 뉴스가 시작된 지도 꽤 지났을 텐데도, 여전히 나에 관한 토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서 보도해 드린 바와 같이, 다리우스 님의 신검을 획득한 도둑 유저는 아무래도 반(反)태성 연합과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한 추측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연합에서 어떠한 인터뷰에도 응하고 있지 않아, 정확한 사실관계는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 밝혀지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혹시나 만약에라도 일반 개인 유저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같은 편이었다면 신검을 줍기 전, 멀린 님과 그렇게나 치열하게 경쟁했던 것이 이상하잖아요? 무엇보다 그곳에는 일반 유저분들이 무려 5만 명이 넘게 모여 있었으니 말이죠!』
『만약 그렇다면 정말 이 타이탄 연대기의 역사에, 아니 전 인류의 게임 역사상, 가장 커다란 행운을 쟁취한 유저라고 할 수 있겠군요. 사실로 밝혀진다면, 정말 너무나도 부러운 일입니다!』
TV 속 스튜디오에서는 낮에 방송을 진행하던 김석용 아나운서와 양민아 앵커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여태까지 생방송을 하고 있네. 퇴근도 안 하나?”
자료 화면으로 내가 아이템을 줍는 장면들이 계속 리플레이 되고 있었는데, 다시 봐도 감회가 새로웠다.
어느덧 아이디는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지만, 스크린 위로 내 모습을 보는 느낌이 조금 묘했던 것이다.
“어차피 아이디는 모자이크해 봤자잖아. 그곳에 몇 명이나 있었는데……. 그나저나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됐다는 말을 내가 하는 날이 올 줄이야…….”
타연의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내 아이디를 검색해보니, 놀랍게도 수천 건의 글들이 검색됐다.
고작 반나절 만에 수없이 많은 글들이 올라올 만큼, 화제의 인물이 돼버린 것이다.
-매그넘03, 그의 정체에 대해!
가장 조회 수가 높은 글부터,
-매그넘03 잡으면 신검 떨굽니다. 같이 수배 공유하고 사냥하실 분들로만 오픈 채팅방 모집합니다!
어느새 날 레이드하겠다는 공개 모집 글까지…….
-[필독] 매그넘03 행적 제보합니다!!
심지어 게임 속에서 날 봤다는 사람들의 제보까지 별의별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뭐야, 이거 쓴 사람 아이디가 ‘무한상사’잖아? 하하하! 이 자식, 내가 신검 먹는 걸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을꼬? 킥킥.”
나를 주제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떠들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 낯선 기분이 그다지 싫지 않았기에 이런저런 글들을 읽다 보니 금세 시간이 꽤 지났다.
내일 새벽에 중요한 볼일이 있었기에, 억지로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평소 잠들던 시간대보다 일찍 누워서 그런지,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 내가 겪게 될 미지(未知)의 삶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도 몰랐다.
‘와, 내 인생에 진짜 이런 날이 찾아오다니…… 이게 정말 꿈은 아니겠지? 지존이 되려면 신검을 어떻게 써야 좋을까? 정말로 내가 목표한 것들을 이룰 수 있을까? 부모님께는 언제, 어떻게 말씀드리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뒤척이다, 결국 1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 *
빠빠 빠빠빰!
새벽 5시.
평소보다 훨씬 이른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얼른 전등보다 TV를 먼저 틀어 보니, 여전히 어제 대관식 사건을 다룬 재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그래, 정말 꿈이 아니었어!’
나는 서둘러 이른 아침을 대충 챙겨 먹고, 씻지도 않은 채 타이탄 연대기에 접속했다.
-라라 랄라라.
아직 멍한 정신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노랫소리가 나를 반겼다.
이윽고 나타난, 기특하기 이를 데 없는 내 매그넘03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로그인했다.
역시 이른 새벽인지라 광장은 어제 로그아웃을 할 때와 달리 사뭇 고요했다.
페이센 왕국의 수도 룬몬은 빛의 도시라고 일컬어질 만큼 경관이나 건물들이 수려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수많은 유저들과 NPC들로 북적대는 번잡함 또한 장관인 도시였다.
나는 곧바로 교황을 찾아가기 전, 이왕 이곳에 온 김에 특별한 장소부터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너무나 화려하고 특별했기에, 유저들의 이목을 항상 집중시킬 신검.
하지만 이런 큰 도시에는 그걸 감출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외형 변경 NPC가 어딨더라…… 여깄구나, 동부 광장 쪽 9구역!”
어느 게임에서나 아이템의 성능 못지않게 외형 또한 중요시하는 유저들의 수는 많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게임사는 소위 말하는 ‘룩덕’ 유저들과 일반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외형 변경 기능을 마련해 두었다.
타이탄 연대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제작된 가상현실 게임이라고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게임이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가상현실인지라 멋진 외형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은 더욱 컸기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기능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저희 ‘백년 가보’ 대장간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판매 ‘목록’ 좀 보여줘.”
반갑게 반겨준 판매 점원 NPC로부터 외형이 수수한 싸구려 노멀 장검 하나를 샀다.
그리고는 곧바로 조금 옆에 떨어져 있던 수석 대장장이 NPC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신가, 젊은 모험가 양반! 내게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는 모양이지?”
“맞아. 무기를 ‘외형 변경’ 하려고.”
외형 추출에는 큰 비용이 들지 않지만, 추출된 아이템은 아무 보상도 없이 사라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굳이 비싸고 멋진 외형의 템으로 바꿀 필요까진 없었다.
[외형을 추출할 무기를 빈칸 위에 올려주세요.]
[외형을 추출할 무기로 ‘튼튼한 강철 장검(일반, 한 손 무기)’을 선택하셨습니다. 맞습니까?]
나는 곧바로 YES를 클릭하고, 이어서 떠오른 적용 대상 칸에 신검을 올렸다.
[외형을 적용할 무기로 ‘룬 페이토나(디바인, 한 손 무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추출된 외형을 적용합니다.]
[선택한 무기의 외형 변경이 완료됐습니다.]
외형은 금방 적용되었고, 나는 NPC로부터 신검을 건네받아 드디어 신검을 착용해서 들어 보았다.
“자, 어떤가? 새롭게 적용된 외형이 마음에는 드는가?”
“물론! 항상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역시 타연이 게임은 게임이라니까!”
가끔 다른 세상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 넘치는 타연.
그래서 아직도 한 번씩은 지금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신검의 스펙은 그대로건만, 외형은 순식간에 흔하디흔한 강철 장검으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어쨌든 외형 변경도 끝마쳤으니, 본래 목적이었던 교황을 찾아 성지인 룬몬 신전으로 이동했다.
이른 새벽임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유저들이 몇 명 보였지만, 8성 은신을 사용한 덕에 별다른 트러블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빛의 신 루이튼교의 성지, 루벤트>
안으로 들어가자, 맵의 특성으로 인해 눈앞에 건물 이름이 떠올랐다.
‘현실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바티칸 성국(聖國)의 베드로 성당에 찾아갔더니 교황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 뭐, 그런 일인 거잖아? 그러고 보니 언제 시간 나면 제국의 황제나 한번 만나보러 가 볼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신전답게 저지하는 NPC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드나드는 유저들도 뜸한 시간대였기에, 쉽사리 교황의 방까지 입장할 수 있었다.
중요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관련 퀘스트들이 전부 고레벨 전용이었기에, 교황은 방안에 홀로 한적하게 앉아 있었다.
“저는 루이튼 님의 신실한 종이자 빛의 교단을 맡고 있는 안테로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왔는지요?”
‘이거 한 교단의 수장인 교황치고는 너무 무게감 없어 보이는데? 저래 봬도 타연 세계관 최고의 실력자 중 하나일 텐데 말이야.’
안테로 교황은 직책답지 않게 수수한 사제복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또한 평범한 NPC들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말투를 쓰고 있어, 딱히 무게감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뭐가 됐든지 간에 지금의 나완 별 상관이 없었기에, 바로 퀘스트의 키워드 단어를 꺼내며 말을 건넸다.
“교황님, 저는 ‘신검’의 ‘봉인’을 풀기 위해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이럴 수가! 이 검은 루이튼 님의 신기, 빛의 검 ‘룬 페이토나’가 아닙니까? 다시금 세상에 7신기가 모습을 드러내다니…… 정말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계시가 곧 이루어질지도 모르겠군요! 오, 루이튼 님이시여! 부디 저희를 굽어살펴 주소서!”
“뭐, 뭐야? 갑자기 혼자 급발진하네? 풋!”
평범한 강철 장검 외형을 한 신검에 호들갑 떠는 모습에 실웃음이 터진 사이, 눈앞에 갑자기 시네마틱(cinematic) 영상이 펼쳐졌다.
[퀘스트 ‘루이투스 봉인의 비밀’에 관한 고대의 기억이 재생됩니다.]
“와아아!!”
“으아아!!”
장엄하면서 비장한 배경 음악을 뚫고 전사들이 외치는 함성이 들려왔다.
메마른 대지 위 곳곳에는 시퍼런 포탈들이 생성되었는데, 그 안에서는 악마들이 끝없이 튀어나왔다.
그런 악마들의 상공에는 거대한 드래곤과 수많은 드레이크들이 위협적으로 피어를 내지르며 홰를 치고 있었다.
영상은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인간과 여러 종족의 연합 진영을 빠르게 훑어주며 대규모 회전(會戰)의 모습을 담아냈고…….
이윽고 두 진영이 맞부딪치는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자, 인간 진영의 최선두에서 수백 기의 타이탄들이 소환되어 다가오는 악마군들을 맞이했다.
“뭐야 갑자기? 가만, 이거 예전에 봤던 건데?”
별다른 건 아니고, 3년 전 타이탄 연대기가 처음 출시되던 당시 대대적인 CF 광고로 홍보했던 영상이었다.
그 당시에 본 시네마틱 영상은 인간 진영과 악마 진영이 맞부딪치는 순간, 큼지막하게 타이탄 연대기라는 타이틀이 뜨면서 끝이 났다.
수십 번도 넘게 봤던 영상이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교황이 보여주는 영상은 예전 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어라?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
그 후의 장면이 이어져서 진행된 것이다.
영상은 인간과 악마 진영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는데, 전투는 누가 봐도 인간 진영이 역부족인 것으로 보였다.
드래곤에게 물려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는 타이탄의 모습과,
고위급 악마로 보이는 존재에게 검은 화염 마법을 맞고 몰살당하는 군단들까지.
영상은 인간 진영이 일방적으로 패퇴 당하는 모습을 담담히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전투가 기울어지던 순간!
몇 개의 빛줄기가 검은 먹구름을 뚫고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어두웠던 전장을 환하게 밝혔던 빛의 기둥.
그 빛이 사라진 곳에 나타난 것은, 다른 타이탄들보다 더 크고 화려한 모습의 타이탄 7기였다.
그중 찬란하게 빛나는 검을 들고 있는 타이탄의 모습이 조금씩 포커싱 되는가 싶더니만, 시네마틱 영상은 막을 내렸다.
다시 게임 속으로 돌아온 나의 시야에,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가는 교황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인간계를 침공해온 마왕 ‘베르투스’와 용족의 연합 공격으로 인류는 종말의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에 인류는 여러 종족과 힘을 합쳐 맞섰고, 신화 속 전사들을 본떠 만든 타이탄으로 대적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역부족이었지요.”
“하암, 여기서도 또 그 얘기야?”
내가 지루해하는 게임 속 스토리 구간.
평상시에는 스킵하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스토리였기에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역사는 이를 가엾게 여긴 몇몇 신들의 가호와 개입 끝에 결국 마왕군을 다시 마계로 쫓아내고 드래곤들은 깊은 산맥마다 봉인하였다고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조금 감춰진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 진영이 마왕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일곱 신께서 내려주신 신기에 신들의 마장기 ‘로드(lord)급 타이탄’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저들에게 이미 익숙한 신마전쟁(神魔戰爭) 전설.
그것과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아 시큰둥하게 듣고 있다가, 마지막에 들린 단어에 귀가 번쩍 뜨였다.
“뭐? 로드급 타이탄이라고?”
게임에서 굳이 급을 나눠뒀다는 것.
그건 보나 마나 신검으로 소환한 타이탄이 다른 타이탄들보다 급이 더 높을 거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