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스탯 리빌딩 (1)
-우리 지환이, 클라스 장난 아니던데? 혼자서 태성을 무너뜨리겠다고 선전포고하는 거 보고 형님 지릴 뻔했잖아. 어디에 그런 깡을 숨겨두고 있었냐? 찐따인 줄 알았는데 완전 상남자였잖아!
-안 닥칠래? 가뜩이나 지금 얼떨떨해 죽겠는데.
-왜? 크크, 중2병 같았지만 그래도 남자답더구만! 거기다 일루전이 특별 취급해 준 최초의 유저 아니냐? 오직 너만을 위한 긴급 패치라니……!
-현중아, 네가 정말 맞고 싶어 환장했구나?
임시점검으로 할 일이 없어졌기에, 나는 현중이와 의논도 할 겸 통화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튼, 도대체 몇 개나 먹은 거냐? 방송 보니까 아주 신나게 주워 먹던데?
-흐흐흐. 레전더리 두 개하고 유니크 6개, 기타 잡템들은 20개쯤. 얼추 6, 7억 치는 먹은 거 같다.
-뭐? 와, 이거 실화냐? PK 한 번으로 7억을 벌었다고?
-운이 좋았어. 특히 절반 이상이 일도양단이 떨군 레전더리 무깃값이야. 그러고 보니 그쪽 형제들 검을 어쩌다 보니 내가 두 자루나 먹어버렸네? 하하하!
언제부터 고강화 레어템을 잡템이라고 할 수준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다른 템들에 비하면 잡템이라 취급할 만했다.
레전더리 무기 하나만 해도 싸게는 1억에서 비싸면 그 몇 배까지 호가가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루전이 서둘러 패치를 했겠지. 이거 뭐 네가 몇 번 더 해 먹게 내버려 뒀으면 일루전도 주가 엄청 떨어졌겠는데? 일개 유저 한 명이 이렇게나 깽판 치는 게임을 누가 하겠어? 그래도 니 입장에서는 아쉽겠다?
-아니. 충분히 예상했던 바라서 괜찮아. 내가 하면서도 이건 너무 심하다 싶었거든. 운 좋게 한 번만으로도 군자금은 충분히 달성했으니 만족한다. 그리고 업데이트 내용은 ‘유저’한테 만이라고 쓰여 있었어. 이건 타이탄을 보스 몹 레이드나 다른 곳에 써먹어도 괜찮다는 얘긴 거지.
-다른 곳? 그게 어딘데?
-있어. 일단은 구상만 해본 정도야. 나중에 알려줄게.
사실 현중이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직도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대고 있었다.
자그마치 7억.
평생을 저축한다 해도 모으기 힘들 돈을, 단 하루 만에 벌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건 신검과 달리 모조리 현금화할 수 있는 템들이었으니, 어느새 솟구쳐 오르고 있는 유혹을 참기 어려웠다.
더 이상 위험하게 태성과 계속 싸우지 말고, 신검으로 적당히 골드나 벌면서 조용히 살자는 유혹이!
‘아니야. 그동안 백수로 지내면서 뼈저리게 느꼈잖아. 무의미하게 젊음을 낭비한 인생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말야.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가슴 떨리는 삶을 살아보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데…… 벌써 잊을 순 없지!’
나는 조금 전 게임 속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려봤다.
비록 가상현실이었지만, 수천 명의 유저들과 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내 각오를 모두에게 외치던 그 순간!
나는 이것이 바로 내가 꿈꿔왔던 삶이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을 수 있었다.
‘소탐대실 인생……. 이제까지는 그렇게 살아왔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말자. 당분간은 타연에서 얻은 아이템은 돈이 아니라 그저 아이템일 뿐이라고 억지로 되뇌는 거야. 목표했던 대로 이 게임에서 지존이 된다면, 돈이라는 건 알아서 따라올 테니 말야.’
-지금 게시판 보니까 니 글로 도배 장난 아니다. 니 욕부터 게임사 욕, 밸런스 욕까지! 뭐 1초에 10개씩은 올라오는 거 같은데? 와! 이런 건 처음 본다, 너도 한 번 봐봐!
-됐다. 어차피 읽어봤자 변하는 것도 없는데 뭐. 이제 점검 풀리면 해야 할 일이나 리마인드하고 있으련다.
-응? 이만 쉬지 않고 점검 풀리면 또 접속하려고? 뭐 할 건데? 렙업?
-할 일이 많단다 친구야. 내가 얘기 안 했었냐? 나 캐릭 새로 키울 거야. 레벨다운 해서 아이디 바꾸고 다시!
* * *
마나 쉴드를 사용해서 생존력을 극대화한 도둑 캐릭을 완성하겠다!
내가 야심차게 구상한 캐릭의 메인 콘셉트였다.
하지만 이 캐릭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232레벨까지 키워왔던 기존의 캐릭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 와서 마력 스탯을 올리고 마나 쉴드까지 스킬 포인트를 찍기에는, 너무 늦었을뿐더러 효율적이지도 못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이 테크트리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생존력이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는데, 그러면 레벨업을 하는 도중에 사망할 위험이 너무 컸다.
보나마나 태성이나 머더러 유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아 필드 구석구석까지 뒤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처음 현중이에게 이 캐릭에 관해 말을 꺼낸 순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내 ‘매그넘03’ 캐릭을 10레벨까지 다운해서 새 아이디로 다시 키울 것임을.
그래서 오직 마력 스탯만 찍으며 신검에 최적화된 스킬 테크트리로 성장한 ‘올마력’ 도둑 캐릭으로 재탄생할 것임을!
[타이탄 연대기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점검이 풀려 유저들이 하나둘 접속했으나, 역시 내가 있던 이 이바슈 성은 유저들이 거의 없었다.
나는 일단 획득한 아이템들부터 골드화 시키기 위해 거래소를 찾았다.
먹은 것들 중에는 내가 쓸 만한 템이 없었기에, 레전더리 검을 제외한 모든 템을 판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중, 가장 낙찰가가 기대되는 템은 역시나 홍당무가 드랍한 레전더리 반지였다.
<+2 정령왕 실로키네의 바람 반지(레전더리, 반지)>
* 방어력 30(+6)
* 마법 방어력 80(+16)
* 민첩 +30(+6), 마력 +30(+6)
* 바람 속성 내성 +5%(+2%)
* 초당 MP 회복 +9(+2)
* 바람 속성의 무기 및 스킬을 사용 시, 속성 마법 공격력과 사정거리가 +30%(+6%) 상승합니다.
* 바람의 정령왕 실로키네의 권능을 담은 반지입니다.
* “나의 작지만 강인한 산들바람은 이 반지에 담겨, 그대에게 폭풍과도 같은 힘이 되어 주리라.” -정령왕 실로키네-
홍당무가 바람 속성 마법을 주로 사용하고 사정거리가 유독 길었던 이유.
그 비결은 바로 이 레전더리 반지에 있었다.
‘사정거리를 가늠해 보면…… 아마 같은 걸 쌍가락지로 차고 있었겠지? 정말 돈이 오지게 많긴 많구나.’
역시 마법사 랭커 홍당무다운 놀라운 아이템 세팅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저 감탄과 함께 부러워만 했겠지만, 앞으로는 내가 탈탈 털어먹어야 할 먹잇감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여하튼 바람 속성의 활을 사용하거나 바람 마법 테크트리로 키운 유저라면 누구라도 탐낼 아이템.
나는 이 아이템을 마지막으로, 득템한 모든 아이템들을 거래소에 올렸다.
[즉시 입찰 가격과 입찰 기한을 입력하세요.]
띠링!
[+2 정령왕 실로키네의 바람 반지가 거래소에 등록되었습니다.]
레어나 유니크 템은 검색해보고 전부 최저가보다 조금씩 싸게 올렸지만, 이 레전더리 반지만큼은 기간 3일의 ‘경매’로 등록했다.
원래 거래소는 수수료 10%를 떼어가기 때문에, 평소 나는 좀 비싼 아이템들을 매매할 때 항상 장사꾼들을 통해 직거래했다.
하지만 몇 날 며칠 동안 제값 받겠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경매를 통해 한 번에 팔아치우는 것이 돈은 손해여도 더 효율적인 판단이었다.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낙찰될 템은 아니니깐 말이지……. 아무튼 이제부터는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일.
하지만 지금부터 나는, 푼돈에 집착하던 지난 성격을 버려야만 했다.
그래야만 내가 이 게임에서 톱이 될 수 있었다.
“이제 장비 맞출 골드도 마련될 테고…… 드디어 시작인 건가!”
망설일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미리 점찍어 뒀던 장소로 이동했다.
[지웰 성 북부, 휴포드 산악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휘이이잉!
도착하자마자 세찬 산바람이 내 두 뺨을 부딪치며 환영해왔다.
게임 설정상, 지웰 성 북부는 고레벨 몬스터들이 득실득실한 가트웰 산맥과 맞닿아 있었다.
그 가트웰 산맥의 초입에 있는 이 마을은, 현시점에서는 랭커들조차도 사냥이 어려운 고레벨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그렇기에 현존하는 모든 마을 중, 유저들이 가장 찾지 않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참 다행이야. 만약 신검이 창고에 맡겨지지 않았다면, 캐릭을 새로 키우겠다는 아이디어는 떠올리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야.”
나는 은신인 채로 모든 아이템을 전부 다 창고에 맡기고, 신전에 귀환 등록까지 마쳤다.
더 이상 레벨 다운이 안 되는 10레벨까지 죽기로 한 이상, 남들 눈에 띄었다가는 캐릭터를 새로 키우려는 내 의도가 들통 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수천 번의 죽음을 반복하는데 적합한 장소.
바로 여기 휴포드 마을이 딱 그곳이었다.
“우와! 역시 높긴 높구나. 아무리 게임이라 해도 가상현실이다 보니 장난이 아니네!”
비탈길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 입구와 달리 뒤편은, 까마득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오하고 오긴 했지만, 막상 뛰어내리려고 하니 살짝 망설여졌다.
경험치 손실이 없는 10레벨 이전에는 낙사할 곳이 마땅히 없었고, 그 이후부터는 경험치 손실과 부활 후유증 때문에 일부러 낙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게임이란 걸 잘 알지만, 아무래도 절벽 위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망설여 봤자 무엇할까?
아무도 내가 캐릭터를 새로 키울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할 시기에, 빠르게 레벨 다운을 비밀리에 끝마쳐야만 했다.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억지로 절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으아아, 와아!! 이거 진짜 실감난……!”
쿵!
[낙하로 인하여 25,355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등록해 놓은 안전지대에서 부활합니다.]
시야가 암회색으로 변하는 걸 느끼는가 싶더니, 곧바로 마을 신전에서 부활했다.
오랜만에 경험해 보는 게임 속 죽음이었다.
[은신!]
타연은 인스턴트 던전을 제외한 일반 필드에서 사망할 시에, 무조건 그 즉시 안전지대에서 부활하게 되어 있다.
나는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의 눈에 띌까 봐, 되살아나자마자 은신부터 사용했다.
‘굿! 역시 부활 후유증이 없구나!’
원래 부활하면 10분간 주어지는 올스탯 및 이동 속도 80% 감소 페널티가 있다.
한데 말이 쉬워 80%이지, 사실상 전투나 사냥 중에 사망했을 시에 빠르게 재투입되는 것을 원천봉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유저들은 부활 후 10분 간을 대부분 채팅이나 거래소 등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운영자의 이 버프를 200레벨 넘게 다운하는 데 써먹는 인간은, 아마 타연에 나 하나밖에 없을 거다! 크크, 하여간 내가 생각해도 난 잔머리 하나만큼은 잘 돌아간다니깐!’
현재 내 레벨은 222.
이 레벨을 10까지 다운시키는 일은 사실 가상현실인 이 안에서도 손꼽히는 상노가다였다.
본인이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레벨이 하락했습니다.]
[스탯 포인트가 감소했습니다.]
[스킬 단계가 떨어졌습니다.]
‘이 지겨운 추락이 멈추는 날……. 그때부터 난, 그 누구보다 더 높게 비상하고 말 테다!’
지루한 반복에 나태해지는 발걸음을 다잡으며, 나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절벽을 향해 뛰어갔다.
* * *
[매그넘03: 드디어 달성했다... 아이디 변경 가능 레벨 50!]
[축복받은얼굴: 와ㄷㄷ 아무리 봐도 넌 진짜 대단한 새끼야. 고작 2일 만에 그만큼이나 렙따하다니 ㄷㄷ]
[매그넘03: 내가 원래 진성 게임 폐인이잖아.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그것만큼은 아주 디바인급이라고 자신할 수 있지. 으하하!]
워낙에 심심한 일이었기에 그동안 난 현중이 녀석과 파티를 맺은 채 수다를 떨며 낙사했다.
[축복받은얼굴: 난 스탯 리빌딩하는 사람들 보면 진짜 대단하단 생각만 들더라. 지우고 새로 키우고 말지 부휴까지 낀 채로 몇 날 며칠을 죽기만 한다니... 으아, 나라면 죽어도 못 할 거야. 근데 그러고 보니 아이디는 뭐로 할지 정했냐?]
[매그넘03: 나도 운영자 버프 없었으면 돌아버렸을 거다. 암튼 결정했다. 죽으면서 그것만 생각했으니까]
원래 게임을 시작할 때 누구나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이 바로 아이디 짓는 일이다.
기껏 고민고민하다가 정해서 입력하려면, 이미 등록된 아이디라고 거부당하다가 대충 짓고 후회하는 것이 아이디 아니겠는가?
비장한 마음으로 지존이 되기 위해 인생을 걸기로 작정한 만큼, 앞으로 내 얼굴이나 마찬가지가 될 아이디를 대충 지을 순 없었다.
[축복받은얼굴: 뭔데?]
[매그넘03: 산드로]
[축복받은얼굴: 산드로? 별론데? 뜬금없이 그건 또 뭔데?]
[매그넘03: 형님이 검색 좀 해 봤지. 원래 다리우스가 페르시아의 유명한 왕이었는데, 그 페르시아를 후에 알렉산드로스가 쳐부쉈다더라? 근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있어서 중간 이름만 따서 하려고. 산드로라고 아이디 지은 사람은 없더라고]
[축복받은얼굴: 어감이 뭐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만... 뭐 사람들이 매그넘03만 떠올리지 못한다면 상관없겠지. 니 뜻대로 될지 안 될지 나도 결말이 궁금은 하다. 과연 그 캐릭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매그넘03: 복수도 복수지만... 이제부터 랭킹 1위를 목표로 달릴 테니 다리우스는 내 1차 목표일 수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은 뜻을 모르겠지만, 난 항상 이 아이디를 보면서 내 목표를 리마인드 할 거다. 그래서 난, 마음에 들어]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현금 19,800원을 결제해서 아이디 변경권을 구매한 뒤, 변경권을 클릭했다.
일루전의 주된 BM(business medel)은 정액 계정비와 골드 환전소 수수료였기에, 몇 안 되는 캐쉬템 중 하나였다.
[새롭게 변경하실 아이디를 입력해 주세요.]
매그넘03.
3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나의 분신 같은 캐릭.
또한,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행운을 안겨준 고마운 놈.
‘생각해보니 의미심장한데? 아무 의미 없이 지었던 첫 아이디를…… 이런 뜻으로 바꾸게 되다니? 이건 마치 내 인생 같잖아?’
그렇게 나는 다시 태어날 새로운 분신의 이름을 입력했다.
[산드로]
[캐릭터의 아이디가 변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