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매지컬 씨프 (2)
옆을 보니, 녀석의 고함을 듣고 쾌남서준네 파티 또한 사냥을 멈추고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하하하! 이게 웬 대박이야! 레어 풀템을 덕지덕지 차고 사냥 중인 쪼렙이라니? 도대체 무슨 깡으로 여기서 혼자 사냥 중인 거지? 버스도 없이 맨몸으로 다니면, 뺑소니 당하는 게 이 바닥인 거 몰랐어?”
“앞에서는 매너 있는 척하더니 귓말로는 머더러나 부르고 있었냐? 그딴 식으로 겜하고 싶냐? 어?”
“그런 게 바로 타연의 묘미 아니겠어? 흐흐.”
나는 녀석의 파티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며, 놈의 도발에 대꾸했다.
그러나 녀석이 저렇게 날 다잡은 쥐새끼 마냥, 자신만만해 할만은 했다.
어느새 이속 버프까지 사용해서 빠르게 다가온 쾌남쭈호가, 내 후방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쉭! 쉭!
[쾌남쭈호로부터 352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쾌남쭈호로부터 317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놈이 달리면서 휘두르는 무빙 공격에, 내 HP는 뭉텅뭉텅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쉴드!]
나는 급한 마음에 마나 쉴드를 위해 미리 익혀두었던 쉴드를 사용했다.
[쉴드가 244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쾌남쭈호로부터 66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챙!
허나 쉴드는 녀석의 공격을 맞고 생성되자마자 깨져버리고 말았다.
“뭐야? 갑자기 웬 쉴드? 너 딜러 테크탄 거 아니었냐?”
“마법 쓴다고 딜러 아니냐? 그럼 장검 들고 있으면 전부 다 기사게?”
녀석이 의외인 듯 외쳤지만, 그렇다고 공격을 멈추진 않았다.
나는 지그재그로 도망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 보았다.
일단 분지 외곽까지는 도달해야,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다.
[매직 미사일!]
펑!
“얼씨구? 뭐야, 매직 미사일까지?”
하지만 무지막지하게 나는 레벨 차이 때문에 마법은 저항이 떠버려서, 놈을 잠시 놀라게 하는 것 외에는 별 의미는 없었다.
“너 정말 미쳤구나? 딜러로 키우면서 쉴드도 모자라 매직 미사일까지 찍어? 이거 템만 좋았지 완전 개초보였네?”
“엥? 그럼 개초보도 지금 제대로 못 잡고 있는 사람들은 뭐죠? 개후잡들이신가요?”
“곧 뒤질 놈이 입만 살았네. 차고 있는 게 그냥 레어 풀템이 아닌가 봐? 도대체 몇 강이길래 아직도 안 뒤지는 건데? 공간이동비 쓰고 시간도 투자해서 온 보람이 있겠어! 하하하!”
“뒤지긴 누가 뒤진다고 그래? 내가 너 따위한테 죽으려고 비싼 계정비 내면서 타연 하고 있겠냐, 이 자식아!”
강한 척하며 외쳤지만, 실상은 패색(敗色)이 짙었다.
아니, 대충 봐도 200레벨은 돼 보이는 녀석을 상대로 승부라는 말은 처음부터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무엇보다 녀석의 이동 속도가 기본적으로 더 빨랐기에, 나는 달리는 와중에도 계속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 드디어 도착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상급 체력 물약을 쉬지 않으며 버티며 달린 결과.
나는 결국 분지의 가장자리인 절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남아있는 HP는 이제 겨우 10%도 안 되는, 그야말로 딸피만 남은 상태였다.
“하도 여기로 달려오길래 누구 도와줄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냥 아무도 없는 절벽이잖아? 여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온 거야? 아하! 맞아 죽지 않고 낙사할 테니까, 귀찮더라도 내려가서 주워라 이건 거야? 하하!”
“…….”
나는 말없이 절벽 끝에 선 채로 밑을 한번 내려다봤다.
20미터 정도의 높이.
사실 절벽이라고 말하기는 모자란 수준의 가파른 비탈길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걸어서 올라올 수 있는 각도는 결코 아니었다.
놈은 날 이미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했는지 공격을 멈췄고, 그사이 쾌남서준네 파티 또한 도착해 함께 포위했다.
“와! 이놈 설마 10강화만 차고 있는 거 아니에요? 형이 그렇게 치고 우리도 계속 화살 날렸는데, 아직까지도 살아있네요?”
“그런가보다 서준아. 얘는 아무리 봐도 ‘진짜’다. 저 자식이 지금 들고 있는 게 자그마치 이베루탄 장검이잖아. 오늘 간만에 소고기 먹겠는데? 흐흐흐.”
“형! 제가 먼저 알아보고 귓말 넣었다는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꼭 뽀찌 주셔야 해요!”
“그래그래. 이제 수다는 그만 떨고 뽑기를 시작해 보자. 제발 대박! 장검이 떡하고 뽑혀 나오길!”
잠시 여유 부리며 대화를 나누던 녀석들이, 마침내 절벽 끝에 서 있는 내게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녀석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 쾌남서준이 파티 사냥을 권했던 것은 내 장비를 가까이서 확인해 보기 위한 접근이었다.
‘역시 외형 변경을 해올 걸 그랬구나. 뭐가 됐든 이미 다 지난 일…… 아직 살아날 방법은 있어!’
내가 즉흥적으로 떠올렸던 계획.
그 시나리오대로 여기까지는 잘 유도해 왔다.
사실 죽는다 해도 큰 상관은 없지만, 지존을 꿈꾸는 내가 이런 허접들에게 죽는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저 내 도박이 통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자식들, 김칫국은 오지게도 많이 마시네. 머더러에 정당방위도 아니니까, 죽여 봤자 템 떨굴 확률도 낮은데 말야.”
“물론 나온다는 보장은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안 나온다는 보장도 없잖아? 안 그래 인간 뽑기야? 흐흐흐!”
“아, 쪼렙한테 쪽팔리지도 않냐? 뭘 그리 거물같이 폼을 잡아?”
“풀 레어템으로 둘둘 감은 쪼렙도 있냐? 근데 쫄이나 버스도 없이 솔플하는 거 보면 뻔한 거지. 한 마디로 먹어도 뒤탈 없는 개꿀이다, 이거 아니겠어?”
“입 좀 그만 다물고! 그럼 어디 한번 직접 잡아보든가, 이 자식들아!”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들.
난 놈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며, 뒷걸음질 치던 그대로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아무리 저레벨에 딸피라지만, 여기서 떨어진다고 낙사할 높이는 되지 않는다.
따라서 누군가는 나를 따라 뛰어내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떨어진 후 다시 이곳까지 올라오려면…… 가파른 절벽 탓에 한참을 빙 돌아서 걸어 올라와야만 했다.
쾌남쭈호.
그러니 이 자식이 나를 따라 뛰어내려야 했다.
그래야만 내가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딜 도망치냐, 뽑기야! 넌 내가 직접 뽑는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녀석은, 내가 뒤로 점프하자마자 덩달아 나를 쫓아 뛰어내렸다.
“하하하! 멍청한 자식, 걸렸구나!”
이 순간을 대비했던 스킬 트리였고, 뜀박질이었으며, 도발이었다.
[그림자 밟기!]
나는 따라서 뛰어내린 쾌남쭈호에게 한 번 씽긋 웃어주고는, 곧바로 그림자 밟기를 시전했다.
놈이 아닌, 절벽 위에 남아있는 쾌남서준을 향해!
만약 쾌남쭈호가 그 즉시 허공에서 뒤돌아 그림자 밟기로 쫓아 올라왔다면,
나도 녀석의 순발력을 인정하며 순순히 죽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준의 컨이 되는 놈이었다면, 여기서 나 같은 쪼렙이나 뒤쫓고 있을 리 없었다.
“자 서준아, 형 다시 왔다. 이제 니네 쭈호형인가 뭐시긴가 올라오기 전까지…… 형한테 좀 맞자!”
나와는 달리, 그대로 절벽 밑으로 떨어져 버린 쾌남쭈호.
반면 허공에서 다시 절벽 위 쾌남서준의 뒤로 순간이동해버린 나는, 이제 이곳의 포식자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3대 1로 수는 부족했지만, 놈들은 죄다 나와 비슷한 레벨대였으니 말이다.
“뭐, 뭐야? 아직 전직도 못 한 놈이 어떻게 그림자 밟기를 쓸 수 있어? 너 설마 캐릭 다시 키…….”
“어허! 누가 너랑 수다나 떨고 싶대?”
쉭, 연속 베기! 쉭, 쉭!
녀석이 말하는 걸 다 들어줄 필요는 물론, 시간도 없었다.
충분히 놀려주고 싶었으나, 혹시나 녀석이 눈치 빠르게 절벽 밑으로 뛰어내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뒷걸음치는 걸 보아하니, 녀석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치, 치지 마! 머더러가 되도 상관없어? 쪼레벨에 머더러가 되면 레벨업도 못 할 텐데?”
이렇게 급변한 상황에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이미 내게 정당방위 표식이 떠 있는 상태라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너 아까 쫓아오면서 계속 화살 날렸던 것도 잊어먹었냐? 아직 엄연한 정당방위 상태인데 무슨 소릴 하고 있어? 너 지금 멘탈 나갔구나?”
“으악! 뭐가 이렇게 아파? 힐! 힐! 도빈아, 구경하지만 말고 화살 좀 빨리 날려 봐! 이 자식 장비가 좋아 봤자 우리랑 비슷한 렙이잖아! 게다가 딸피라고!”
“알았어! 좀만 버텨 봐!”
[힐!]
[쉴드!]
[쾌남갓빈으로부터 87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쾌남갓빈으로부터 74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핑! 핑!
남자 힐러로부터 쾌남서준에게 계속해서 힐이 들어왔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녀석에게 달라붙어 칼을 먹였다.
여기서 화살이 날아오고 녀석이 힐로 버티는 것 같다고 공격을 멈추면, 이도 저도 되지 않았다.
‘일단은 한 놈부터…… 먼저 잡아버린다!’
나를 암살하러 온 고렙의 도둑 유저가 버거웠던 거지, 이런 초보존에서 사냥 중인 3인 파티 쫌이야 바위 골렘 3마리만도 못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난, 그런 놈들쯤이야 눈감고도 잡을 자신이 있었다.
꿀꺽!
나는 차고 있는 장비의 스펙과 차오르는 물약의 회복력을 믿으며, 도망가는 쾌남서준의 뒤통수만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렇게 2번째 연속 베기의 쿨타임이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연속 베기!]
“악! 안 돼에에!!”
슈우우우.
결국 쾌남서준은 더 이상 힐과 물약으로 버티지 못하고, 아이템을 떨구며 잿빛으로 산화해버리고 말았다.
웬일로 무기인 장검을 떨궜지만, 그래 봤자 잡템 수준인 ‘노멀’ 등급의 템이었다.
“안 되겠다! 도빈아, 튀자!”
나머지 두 녀석은 의리도 없이, 쾌남서준이 떨군 템을 대신 먹어주려고도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모습을 내가 지켜만 보고 있어 줄 이유는 없었다.
[매직 미사일!]
먼저 궁수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 있던 힐러를 향해 즉발(卽發) 스킬인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쾌남쭈호에게는 레벨 차이로 헛방이 났지만 궁수는 나와 동렙 수준.
달려가다가 매직 미사일을 맞고 경직에 빠진 녀석은, 당황한 듯 주춤거렸다.
그사이, 나는 빠르게 따라붙어 놈을 향해 칼을 쑤셔 넣는 데 성공했다.
‘아까 서준이가 분명, 이놈이 힐을 5성까지 찍었다고 했지?’
오직 파티 플레이만을 염두에 둔 몰빵형 테크트리.
그렇게 솔플도 할 수 없을 만큼 힐에만 스킬 포인트를 투자했다면, 당연히 대부분의 스탯도 마력이나 지력만 찍었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탱킹은 쾌남서준이 줄곧 담당했을 테니, 이 힐러의 생존력이 절대 좋을 리가 없었다.
“아아악! 힐! 나 죽으면 안 돼! 이거 다 빌린 템들이란 말이야!”
역시나 힐러 녀석은 연속 베기에 이은 평타 3방 만에 그야말로 순삭당하고 말았다.
내 10강화 레어 장검은 비록 초보존 유저들 한정이겠지만, 이 순간 신검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6 녹색 마탑의 마력 목걸이(레어)를 획득했습니다.]
“엥? 이게 뭐야. 레어 템을 떨궜다고?”
한데 정당방위 상태여서 그런지, 뜻밖에도 이 힐러는 레어 액세서리를 하나 드랍했다.
물론 안전 강화 수준이었지만, 쾌남서준에 비하면 준수하다 못해 아주 월척인 수준이었다.
이런 초보존에서는 레어템은커녕, 원래 액세서리를 찬 유저도 찾아보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떠오르는 잡생각을 지우며 그동안 반대편으로 열심히 도망친 궁수의 뒤를 쫓았다.
“멀리 갔으면 포기하려고 했는데…… 하하! 이게 뭐야?”
하지만 의외로 궁수 녀석은 얼마 도망가지도 못한 상태였다.
원래 여기는 바위 골렘이 무수히도 많이 리스폰되는 곳인지라, 우리가 실랑이 벌이는 사이에 어느새 바위덩이들이 빈틈없이 쌓였던 것이다.
그렇게 골렘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하며 도망쳐야 했으니, 가면 얼마나 갔겠는가?
반면 나는, 거리낄 게 전혀 없었다.
“얀마, 포기하고 그만 좀 멈춰라!”
“으악! 저 미친놈! 전부 다 깨우면서 쫓아오고 지랄이야!”
그렇다.
어느새 난 물약과 자체적인 체력 회복 때문에 절반 이상의 HP가 채워져 있었다.
그러니 바위 골렘들 따위는 수십 마리를 깨운다 해도, 내게 위협이 될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