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피닉스 길드 (1)
나는 전사가 따라오든 말든 사람들을 헤치며 게시판으로 다가가 다시 한번 살펴봤다.
[명예의 전당]
-1위 산드로(1분 55초 03)
-2위 라스트챤스(2분 26초 99)
-3위 관우(2분 31초 15)
……………………
-100위 0검신0(2분 41초 05)
라스트챤스가 최상위 랭커의 템을 고스란히 5초를 앞당긴 것도 놀라운 수준이었는데, 그 기록을 자그마치 30초 넘게 경신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어때요? 제 말 맞죠? 2분 안에 끝낸다고 했잖아요.”
“님. 아니, 당신 도대체 뭐 하는 분이에요? 혹시 운영자 가족이세요?”
“풋, 운영자 가족이면 바랄 게 없겠네요.”
“아니, 무슨 버그를 발견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걸 이렇게 남용하면 안 돼요! 일루전이 어떤 곳인데 버그 쓴 사람을 가만 놔둘 거 같아요? 캐릭터 곧 삭제당할 수도 있어요!”
“버그는 무슨……. 잡을 게 있으면 어디 한번 잡아가 보라고 하세요. 이건 님이 아까 친절히 대해 주셔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비결은 누구도 시도 안 해본 테크트리와 템빨의 조합에 있습니다. 곰곰이 연구해 보시든가 하세요. 아무튼, 전 이만 갑니다!”
“자, 잠시만요! 좀만 더 힌트를 주셔야 연구를 하든가 말든가 하죠!! 전직한 직업은 뭔데요! 법사 맞아요?”
나는 이 인산인해를 빠져나가면서 힌트도 줄 겸, 멀리 있는 유저를 향해 그림자 밟기를 써서 여유롭게 빠져나왔다.
그 길로 곧바로 북부 광장에 도착하니, 현중이가 분수대에 앉아 멍하니 천사 조각상의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중아, 뭘 그리 멍 때리고 있냐?”
“뭐,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설마 벌써 타임 어택 끝내고 온 거야?”
“인마, 형이 1등 한다고 했잖아. 1등이니깐 금방 끝내고 오는 게 당연한 거지.”
“헐? 아무리 1등이라도 벌써? 기록은 괜찮게 떴고?”
“1분 55초. 2등보다 무려 30초 넘게 빠른 기록이다. 이건 아마 향후 10년간은 안 깨질 듯?”
1, 2단계 방에 있는 모든 병사의 어그로를 끌고 3단계 방까지 가는 것만 해도 1분이 넘게 소모된다.
한데 모든 병사와 하급 기사 볼턴까지 잡아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이 기록을 깨려면, 300레벨급의 마법사가 광역 마법을 난사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해 보였다.
“와! 대박! 그 정도면 오늘 올타에서 핫 이슈로 선정되거나 기사도 뜨는 거 아니냐? 우리 지환이 이러다 타연 스타 되겠는데?”
“크크, 또 헛소리 할래? 저렙 고인물들만 하는 걸 얼마나 관심 있게들 본다고……. 아무튼 어서 장비나 받아라. 덕분에 잘 썼다 현중아.”
“아, 장비 말인데. 안 그래도 방금 누님이랑 귓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기셔서 3시간만 있다가 재접속하신다네? 시간이 붕 떠서 그런데, 지금 장비 있을 때 렙업이나 해볼래? 내가 보조 장비 차고 따라 다니면서 경호해 줄게.”
“어? 그래도 되겠어? 그러면 나야 완전 고맙지!”
“너 기록 세운 것도 그렇고, 아직 100레벨도 안 됐지만 네가 말한 ‘죽지 않는 도둑’이라는 게 어떤 건지, 직접 한 번 보고도 싶어져서. 이젠 마쉴도 8성이고 여차하면 타이탄을 소환하면 되니까 위험할 일도 거의 없잖아? 어때, 괜찮지?”
“오키, 콜! 그럼 캄랑으로 갈게 먼저 가 있어! 그럼 난 빛마석 좀 찾아서 따라갈게!”
나는 서둘러 창고에 들러 물약과 빛나는 마력석을 챙긴 후, 공간이동술사를 통해 데스라 사막 남부에 있는 캄랑 마을로 이동했다.
목표 사냥터는 사막 리자드맨 군락지 입구.
내가 매그넘 시절 열렙 사냥터로 떠올렸던 지역으로, 드랍 아이템이 좋지 않아 인기는 없지만 그 덕에 몹만큼은 많은 곳이었다.
솔플로는 200레벨대는 되어야 무난히 사냥이 가능했지만, 한정된 시간 내에 장비빨로 폭업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
현중이와 함께 마을 밖으로 나와 보니, 사막 지역답게 끝없이 펼쳐진 모래더미 위로 각종 몹들이 띄엄띄엄 펼쳐져 있었다.
확실히 버려진 사냥터답게 마을 입구 부근임에도 불구하고 유저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막 스콜피온’, ‘폭탄 선인장’ 등등.
곳곳에 여러 몬스터들이 보였지만, 내 레벨 대에는 독이나 폭발 데미지 같은 것들이 특히나 위험했기에 무시했다.
주 타겟 몹은 오직 ‘사막 리자드맨’.
나는 그놈만을 찾아 계속해서 전진해 나갔다.
(나: 현중아 앞에 리자드맨 한 마리 혼자 있는 거 보이지? 저거 사냥할 테니까 너도 근처에서 사냥하는 척하다가 혹시 누가 뒤치기하면 보호 좀 해줘.)
(축복받은얼굴: 남인 것처럼 굴라는 거지? 과연 이곳 몹에 칼이나 제대로 박힐까 싶지만... 알겠다ㄱㄱㄱ)
나는 현중이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하고는 사막 리자드맨에게 다가갔다.
무려 100레벨이 넘게 차이 나는 몹을 솔플로 트라이 하는 순간이었다.
[매직 미사일!]
[재빠른 몸놀림!]
[약점 포착!]
[그림자 밟기!]
먼저 4방의 매직 미사일을 날려 보내고, 가지고 있는 2개의 자가 버프를 사용한 후 녀석의 후방으로 순간이동 했다.
휙, 휙, 휙, 휙, 휙.
허나 허탈하게도 매직 미사일은 전부 저항이 떠버렸고, 칼질 또한 약점 포착이 지속되는 동안 휘두른 5번의 공격이 전부 다 헛방이 나 버리고 말았다.
“와! 뭐야? 진짜 장난 아니게 안 박히네! 내가 너무 오버해서 온 건가?”
절로 한탄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몸빵을 믿고 계속해서 평타를 휘둘러 봤다.
[마나 쉴드가 1,202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1,231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퍽, 퍽, 퍽.
그러나 계속해서 헛방만 뜰 뿐, 사막 리자드맨이 휘두르는 시미터에 내 MP는 한 대당 300씩 무참히 깎여 나갔다.
‘확실히 100레벨대 몹들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황급히 상급 마나 물약을 먹어 가며 계속해서 평타를 날렸더니, 결국 열 대 만에 드디어 한 방 적중하는 데 성공했다.
“취익!”
번쩍!
거기다 운 좋게 신검 고유 옵션인 빛 속성 마법 데미지가 터지며 들어가, 이 유효타 한 방으로 녀석의 피를 자그마치 1/3이나 날려 버렸다.
레벨 차이가 날수록 명중률과 공격력 등이 보정 페널티를 먹는 타연에서, 100레벨 차를 극복하고 들어간 데미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폭딜이었다.
[연속 베기!]
이때다 싶어 연속 베기도 써 봤으나 역시나 헛방.
오히려 손해였다.
“어이쿠, 앞으로 공격 스킬은 봉인해야겠다. 괜히 헛방으로 마나 소비하면 피통만 줄어드는 셈이네!”
그렇게 재빠른 몸놀림의 지속 시간이 끝나고도 수십 방을 더 휘두른 결과, 기어코 사막 리자드맨을 솔플로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상급 마나 회복 물약을 10개가량 먹으면서 잡았음에도, 풀 MP의 3/4을 소모하고 난 사투 끝에 얻은 결과였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보람이 있었다.
어제 하루 동안 겨우겨우 10레벨을 올렸는데, 이 200레벨의 리자드맨 한 마리로 레벨업을 해버린 것이다.
어제까지는 운영자 버프가 있었던 걸 고려해보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경험치였다.
(축복받은얼굴: 뭐냐? 1마리로 1렙업? 이거 실화냐? 아니 혼자만 다른 게임하나, 무슨 10레벨짜리도 그렇게는 안 오르겠다!)
(나: 아무리 타임 어택 업적을 받았다곤 해도, 경험치가 90%는 오른 것 같다ㄷㄷ 역시 신검으로 사냥 개시하면 장난 아니었어. 신검이 아니라면 누구도 이렇게 레벨 차이 나는 사냥이 가능할 리 없으니까 말야!)
(축복받은얼굴: 어쨌든 결론은 사냥이 되기는 한다는 거네? 짱나지만 확실히 이 겜은 템빨이라니깐! 그나저나 체력 대신 마나가 빠지니 내가 힐 해줄 수도 없고 얄짤 없이 엠피타임 가져야겠네?)
성기사인 현중이는 힐을 해 줄 수 있어 보디가드 겸 힐러로 쓰기에 최고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쉴 도둑인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하다못해 오라(aura) 버프를 받고자 파티를 할 수도 없는 게, 그러면 레벨 차이 때문에 경험치를 아주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MP가 차오르길 기다리는 동안.
100레벨을 찍으며 새로 생긴 스킬 포인트로 공통 스킬인 소드 마스터리를 찍었다.
[소드 마스터리(공통 스킬): ★☆☆☆]
* (passive) 도검류의 무기를 사용할 시에 명중률과 공격력, 가드 성공률이 +8% 추가됩니다.
지금까지는 타임 어택에 최적화된 스킬부터 찍느라 못 배운 스킬.
유저라면 누구나 자신의 주력 무기 마스터리(mastery)를 찍는 편이었다.
물론 간혹 스킬 포인트를 아낀다고 마스터리를 안 찍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사냥은 렙빨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 쳐도, 공성전이나 PK를 조금이라도 염두에 뒀다면 명중률 때문에 무조건 찍어야만 했다.
따라서 나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이 스킬을 5성까지 찍을 생각이었다.
앞으로의 사냥 코스에는 레벨 차가 높은 몹들밖에 없으니, 반강제적으로 찍을 수밖에 없기도 했고.
“오! 이제 완전 잘 박히는데?”
어쨌든 고작 1레벨업 만으로 4성의 소드 마스터리를 얻게 됐더니, 사막 리자드맨을 잡는 일은 훨씬 더 수월해졌다.
솨아아.
솨아아.
솨아아!
한 마리당 얻는 경험치는 계속 줄어들었지만, 레벨업 속도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수준.
근처에 이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유저가 없어, 정말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 현중아, 이젠 칼도 잘 박히니까 군락지 근처로 이동해서 사냥해 볼까?)
(축복받은얼굴: 그냥 여기서 3시간 풀로 채우고 가자. 거긴 누가 볼 수도 있으니깐 말야)
(나: 하긴, 여기도 괜찮은데 굳이 무리할 필욘 없겠지? ㅇㅋ ㄱㄱㄱ!)
그렇게 3시간이 채워지기 5분 전.
나는 무려 110레벨이라는 놀라운 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아무리 경험치를 많이 주는 필드 몬스터를 사냥하고 업적 덕분에 추가 경험치가 있다 하더라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속도였다.
곁에서 내내 렙업 속도를 지켜봤던 현중이의 볼멘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다.
“진짜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120레벨 찍는 데 거의 1년이 걸렸었는데. 이건 사기야 사기…….”
“야, 난 100레벨까지 1년 걸렸다. 나야말로 제대로 얼떨떨하다. 크크!”
그렇게 녀석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장비를 벗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로부터 귓속말이 들어왔다.
(라스트챤스: 님, 뭐죠? 긴말 안 해도 아시겠죠, 타임 어택! 무슨 버그를 발견한 건지 몰라도 그따위로 겜하지 마시죠? 그렇게 다른 사람의 기록을 방해하면서 겜하면 재밌어요?)
바로 훈련소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던 피닉스 길드의 라스트챤스였다.
(나: 버그는 무슨 버그요? 전 정상적인 게임 플레이로 기록 세운 건데요?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획기적인 방법을 쓰긴 했지만요)
(라스트챤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제가 여기서 열흘 동안 도전했는데 님은 오늘 처음 봤어요. 근데 고인물도 아니면서 1위? 그것도 1분 55초? 아니, 적당한 수준이어야 믿든지 말든지 하죠. 아무튼 일단 이거 일루전에 신고해 뒀으니 기록 박탈당하고 제재당할 건 각오하고 계세요!)
(나: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시네. 못 믿겠으면 마세요. 걍 차단하겠습니다.)
1위를 달성하자마자 빼앗겼던 것이 꽤 분했는지, 다소 공격적인 어투였다.
계속 상대해주기도 피곤할 것 같아, 그냥 속 편하게 라스트챤스를 차단해 버렸다.
“왜 그래, 장비를 벗다 말고? 누님 막 접속하셨으니깐 장비 얼른 줘. 빨리 돌려드리려 가봐야 해.”
“어? 그래. 아니 갑자기 귓말이 들어 와서 그랬…….”
그 순간이었다.
차단한 라스트챤스 대신 다른 거물의 귓속말이 눈앞에 떠오른 것은.
(히든캬드: 산드로님, 혹시나 차단하실까 봐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의심하지도 않겠습니다. 정식으로 제안 드리죠. 저희 피닉스 길드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이 업계 최고의 대우와 서포트를 약속드리겠습니다.)
타이탄 연대기 속 TOP 2를 다투는 거대 길드.
그 유명한 ‘피닉스 길드’로부터 갑작스럽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