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오크 로드 레이드 (1)
(라스트챤스: 네? 루비 반지요? 대에에박! 산드로님은 정말 운빨 죽이는군요! 무슨 사냥한 지 2주 만에 루비 반지를 드셨어요?)
(나: 이거 먹기 힘든 건가요? 사실상 저도 이게 첫 득템이나 마찬가지인 템인데…….)
(라스트챤스: 주우셨으니 옵션 보셨을 거 아니에요? 장담하건대 그 반지는 현존하는 탱커와 딜러용 반지 중에 가장 좋은 겁니다. 그만큼 우리 길드에서 그 템 먹으려고 1년 넘게 고생했던 사람들도 엄청 많았어요. 그렇게 고생해도 먹게 된다면 이득이거든요!)
정말 요즘 나한테 득템운이 제대로 붙은 모양이었다.
그동안 아이템이 너무 안 나온다고 투덜대며 사냥했었는데, 오히려 무척이나 운이 좋은 케이스라니 말이다.
(라스트챤스: 어쨌든 그 반지는 저희 측 길드에 사겠다는 사람들 줄 서 있어요. 양심껏 말씀드리자면 사파이어 반지 2개가 아니라 그 이상과도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사파이어 반지는 비록 레전더리라도 가치가 너무 떨어지거든요.)
피흡이든 마흡이든 효과를 보려면 물리 공격을 해야만 가능한데, 확실히 탱딜러들에게는 MP 흡수보다 HP 흡수의 효용이 수십 배는 더 뛰어났다.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아무래도 사파이어 반지는 길드 내에서 계륵 취급을 받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게는 더 좋은 일이었다.
나에게만큼은 이 사파이어 반지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아이템은 없었으니!
(나: 오! 잘됐네요. 여러 개 받을 수 있다면 저야 좋죠! 챤스님, 혹시 가능하다면 주선 좀 해 주실 수 있으세요? 피닉스 라인한테만 판매할 수 있는데, 제가 알고 있는 그쪽 라인 사람은 챤스님밖에 없어서요.)
(라스트챤스: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죠. 루비 반지는 워낙 인기가 많아서 당장이라도 판매가 될걸요? 일단 저희 길드 총무 형한테 귓말해 볼게요. 아마 매물이 나왔다면 길드 간부진들에게 먼저 판매해주시길 원하실 거예요. 거기다가 당장 전부 골드로 지급할 수 있을 만큼 길드 자금도 많이 갖고 계시니깐요.)
(나: 아니에요! 전 골드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사파이어 반지 다수와 맞교환하고 싶네요. 꼭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스트챤스: 흠... 사파이어 반지는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진짜 딜러들한테는 유니크만도 못해서 싼 편인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귓말을 넣었던 건데, 라스트챤스는 마치 현중이처럼 내 손익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말투였다.
하지만 평범한 딜러들한테는 그렇겠지만, 나는 타연에 이만한 템이 또 없다니깐?
(라스트챤스: 아, 방금 연락 왔네요. 지금 거래 가능하시대요. 듀메인 성 외성 광장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총무 형이랑 같이 찾아뵐게요!)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귀환을 하고, 마을 광장에서 라스트챤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흐흐흐, 대박이다 진짜! 사파이어 반지 1개만 먹어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온 곳이었는데, 한 번에 3개랑 교환할지도 모른다고? 이러면 추가 강화를 해봐도 되는 거잖아?’
이 정도면 목표 달성은 물론, 한참이나 초과한 셈이었다.
그렇게 평생 템이 될지도 모르는 거래를 기다리다 보니, 라스트챤스가 처음 보는 힐러 유저와 함께 광장에 나타났다.
“슈바 형, 이분이세요. 제가 말씀드렸던 산드로 님. 히캬 형님의 허락으로 여기 듀메인 성 인던을 몇 주째 돌고 계셨던 분이죠.”
“반갑습니다. 저는 피닉스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슈바이쳐라고 합니다. 인던에서 루비 반지를 먹으셨다고요? 먼저 확인부터 가능할까요?”
“네, 얼마든지요.”
교환창을 통해 슈바이쳐에게 루비 반지를 확인시켜주니, 금세 기쁜 기색이 역력해졌다.
“와, 이거 정말 오랜만에 나온 매물이네요. 다른 건 몰라도 이 루비 반지가 정말 안 나오기로 유명하거든요. 요즘은 다들 레벨이 높아져 듀메인 인던을 잘 돌지 않아서 더욱 그렇고요. 그러니 가격은 제대로 쳐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길마 님과 여기 라챤이의 지인이기도 하시니깐요.”
“라스트챤스 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사실 골드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사파이어 반지와 맞교환이 하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오히려 저희로서는 더욱 감사하죠. 사실 사파이어 반지는 그래도 레전더리급이라 너무 싸게 팔기는 뭐한데 인기가 없어서, 길드 창고에 매물이 쌓여 있었거든요.”
확실히 명문 길드다운 태도였다.
자신들의 독식 사냥터에서 나온 아이템임에도 불구하고 그 값어치를 제대로 산정해서 치러주는 모습.
덕분에 간단한 흥정 끝에 나는, 슈바이쳐로부터 무려 3개의 사파이어 반지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사실 루비 반지의 값어치로 따지자면 추가 골드를 조금 더 받는 게 맞다고 했지만, 어차피 피닉스 소유의 성에서 먹은 템이었기에 그 정도는 아낌없이 빼줬다.
태성이 워낙 노매너였는지 아니면 내가 변해서 대접이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피닉스와는 계속 좋은 인연이 쌓이고 있었다.
“루비 반지를 득템하시고도 빼돌리지 않고 이렇게 저희 측으로 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길드원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었거든요. 아무튼 다음에도 혹시 드시게 된다면 다시 좋은 거래로 만나 뵀으면 좋겠네요.”
“저야말로 가격을 잘 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들게 구하신 만큼 좋은 곳에 쓰이길 바랄게요.”
어차피 히든캬드와 약속했던 2주간의 인던 출입 기간도 끝나갔고, 레벨업도 이제 많이 더뎌졌기에 조만간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한데 사파이어 반지를 이렇게 1개도 아닌 3개씩이나 구하게 되었으니, 목표했던 바는 전부 다 이루게 됐다.
슈바이쳐가 떠나자, 인벤 창에 들어온 사파이어 반지의 스펙을 자세히 확인해 봤다.
<고대 뱀파이어 귀족의 사파이어 반지(레전더리, 반지)>
* 방어력 20
* 마법 방어력 80
* 지력 +35, 마력 + 40
* 물 속성 내성 +7%
* 초당 MP 회복 + 14
* 물리 공격으로 대상에게 입힌 데미지의 2%만큼 마나를 뺏어옵니다(대상이 마나가 없을 경우에는 뺏지 못합니다)
* 고대 뱀파이어 귀족 중에서도 고위급이 즐겨 착용하던 반지입니다.
* “피의 구속에서 벗어난 마나는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하여 우리 뱀파이어 일족은 불멸을 넘어 더욱 위대한 존재가 되리라!” -뱀파이어 로드 엘 메디토-
이로써 나의 사기급 스펙을 완성하기 위한 컬렉션이 갖춰졌다.
사실 초창기 마쉴 도둑을 계획했을 때부터, 난 줄곧 이 사파이어 반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현중아. 신검, 마나 쉴드, 그리고 마나 흡수. 이 삼 박자가 갖춰진다면 무한 솔플 사냥이 꿈이 아니야. 그게 이루어진다면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르게 레벨업 할 수도 있어!
-근데 그건 다 네 상상 속 일이잖아. 실제로도 네 생각처럼 잘 돌아갈까? 무엇보다 마나 흡수 템은 어떻게 구할 건데?
현중이의 반문대로, 마나 흡수 템은 매물이 통제되어 구하기가 무척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서 일단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생각지 않은 인연과 행운으로 이렇게 이른 시간 만에 구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것도 쌍 반지로 갖추게 되었으니, 마음 같아서는 웬만한 레벨 차이의 보스 몹들도 죄다 1:1로 잡아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우신 분이네요, 산드로 님은요.”
“네? 그게 무슨……?”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라스트챤스가, 반지를 확인하며 흐뭇해하던 내게 말을 건넸다.
“처음 스킬 포인트 10개를 소모해서 5성 마쉴을 찍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전 내색은 안 했지만 사실 무척 충격받았답니다. 저만큼, 아니 저보다 더 특이한 캐릭을 이렇게 과감히 키우고 계신 분이 있다는 사실에요.”
“…….”
“거기다 심지어 저레벨임에도 불구하고 그 캐릭의 완성도가 높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더더욱 놀랐어요. 한데 오늘 이렇게 사파이어 반지까지 차게 된 모습을 지켜보고 나니, 이제야 산드로 님이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지 알 것 같네요.”
지난번 대화로 알게 되었지만, 이 라스트챤스라는 유저는 겉보기와 달리 결코 가벼운 남자가 아니었다.
상당히 진중하고 머리 회전이 비상한 스타일.
이 사람이라면 이미 내 테크트리가 무슨 콘셉트이고, 어떤 스킬과 아이템 조합으로 무슨 전투 스타일을 펼칠 계획인지 전부 꿰뚫어 봤을 것이다.
어쩌면…… 내 캐릭터의 카운터를 벌써부터 연구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분하지만 저로서는 그런 시도는 엄두도 못 낼, 아니 그런 발상조차 못 해봤을 캐릭을 꿈꾸고 계신 것 같더군요. 바로 일인무쌍(一人無雙). 어때요, 제 생각이 맞나요?”
“뭐, 왜 물으시는지 모르겠지만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혼자서 태성과 싸우려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 시작하겠더군요.”
“멋있어서 그런 겁니다. 정말 순수하게 그저 님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도 게임이라면 누구한테 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한 게임 하면서 살아온 놈이에요. 근데 님을 보다 보면 질투심이나 경쟁심보다는 호기심만 떠오르네요. 이 사람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과연 완성될 수 있을지 끝까지 지켜보고 싶달까요?”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칭찬이 너무 과했다.
정말 순수한 호의를 갖게 된 걸까?
아니면 호의를 가장한, 다른 어떤 속셈이 있는 걸까?
“그래서 실수하는 건지 몰라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보고 싶어졌네요. 훗날 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러시는 거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줘 볼까 합니다. 얼마 전 제가 타임 어택에서 했던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고 했었죠? 지금, 그 비밀을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라스트챤스는 내게 귓속말로 어떤 한 아이템의 정보를 링크 걸어 보내줬다.
(라스트챤스: <+2 용맹한 오크 로드의 증표(레전더리, 목걸이)>, 제가 가진 이 템이 제 기록의 비밀이었습니다. 도전을 시작하기 전에 HP를 25% 미만으로 맞춰 놓고, 타임 어택에 들어갔거든요.)
나는 곧바로 링크된 아이템의 스펙을 살펴봤다.
<+2 용맹한 오크 로드의 증표(레전더리, 목걸이)>
* 방어력 70(+14),
* 마법 방어력 180(+36)
* 근력 +70(+14), 민첩 + 70(+14)
* 불 속성 내성 +10%(+2%), 바람 속성 내성 +10%(+2%)
* HP가 25%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불굴의 용맹함’ 효과가 발동됩니다.
-불굴의 용맹함: 공격력이 40%, 공격 속도가 20% 증가합니다.
* 오크 로드에게 계승되는 가장 용맹한 오크의 상징입니다.
* “너희들은! 지금 내가 흘린 피보다! 수백 배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잿빛 산맥의 오크 로드 줌바카-
라스트챤스가 보여 준 아이템은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상상도 못 해봤던 템이었다.
타연에 이런 옵션이 붙은 아이템이 있었다니!
“이, 이거 진짜예요? 정말 챤스 님한테 이 아이템이 있다고요?”
“네. 놀라셨겠지만 진짜입니다. 실제로 제가 캐릭을 새로 키우게 된 이유가 이 아이템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걸요.”
광(狂)전사 특성.
다른 게임에는 빈번하게 등장하는 설정이었으나, 타연에서는 단 한 번도 비슷한 스킬이나 아이템이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들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런 템이 존재하는 줄 알고 있었다면, 내 마쉴 도둑의 목표 아이템 No.1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목걸이였을 것이다.
원래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체력 회복이 있기에 HP를 25% 미만으로 계속 유지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거기에 파티 사냥이라도 하게 되면, 힐이나 버프, 오라 등으로 인해 더욱 그러했다.
설령 억지로 이 조건을 맞춰서 사냥이나 전투를 한다 해도, 낮은 HP로 인한 사망의 위험성 때문에 특정 상황을 제외하고는 효용성이 떨어져 보였다.
하지만 MP로 몸빵을 대신 하는 나에게 HP를 25% 미만으로 유지한다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인벤토리의 무게 게이지가 75%를 넘어가게 되면, HP와 MP가 자연 회복되지 않는다.’
이 점을 이용한다면 얼마든지 HP를 25% 미만에 맞춘 상태에서 이 옵션을 무제한 발동시키며 다닐 수 있다.
물론 MP 수치도 덩달아 자연 회복되지 않는 건 아쉽겠지만, 대신 사파이어 쌍 반지를 손에 넣었으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이 목걸이 단 하나만으로…… 내 공격력은 거의 1.5배나 더 강해질 수 있다!’
여러모로 이 레전더리 목걸이는, 애초에 이 아이템을 염두에 두고 캐릭을 새로 키웠다고 말해도 믿어질 만큼 나와 너무도 궁합이 딱 맞아떨어졌다.
이건 정말 흥정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달라는 전부를 줘도 아깝지 않을 아이템이었다.
“챤스 님! 이 템 저한테 넘겨주실 수 있으세요? 가격이라면 얼마를 부르시던지 구해보겠습니다!”
“역시 산드로 님한테도 혹하는 템이죠? 근데 안타깝지만, 저 또한 이 목걸이를 정말 간신히 얻은 거라서 판매하는 건 어렵습니다. 이게 없다면 저도 캐릭을 새로 키우는 의미가 없거든요.”
“이런…….”
“하지만 뭐 제가 산드로 님을 약 올리려고 말을 꺼냈겠습니까? 다 방법이 있어서 말씀드린 거죠.”
“네? 방법이요?”
“네. 매물이 없다면 구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오크 로드를 레이드해서 직접 득템하세요. 제가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