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용병 제의 (1)
‘레벨업이란 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매그넘 때와는 진짜 비교조차 할 수 없네.’
또 한 번의 몹몰이를 끝내고 난, 지금 내 심정이었다.
1시간을 넘게 날아다녔어도 아쉬웠던 비행을 끝내고, 나는 번스타인 성 지역에 있는 벤토 숲에 착륙했다.
듀메인 성 인던을 졸업하고 다음 사냥터로 점찍었던 곳이, 바로 이 벤토 숲에 있는 홉고블린 부락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블린 파티가 쉴 새 없이 리스폰되는 꿀 사냥터.
하지만 숲속 깊숙한 곳에 있어 작정하고 파티를 꾸리고 오지 않는 이상, 시간 대비 효율성이 떨어져 다소 버림받은 곳이기도 했다.
특히 이 벤토 숲은 필드 보스인 ‘히드라’가 리스폰되는 늪지대가 워낙 인기라, 이곳이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었다.
하지만 난 이렇게 유저가 드문 사냥터만 일부러 골라 다녔기에, 다음 레벨업 코스로 아주 적합했다.
[연속 베기!]
몹몰이가 한 타임 끝났다고 잠시 숨 돌릴 시간을 갖는 것은 사치.
속된 말로 지금 레벨에 잠이 오냐란 수준이었기에, 곧바로 리젠된 홉고블린 파티의 주술사를 처치하며 또다시 몹몰이를 시작했다.
이곳의 홉고블린 파티는 보통 전사 네다섯 마리와 주술사 한 마리로 구성됐다.
주술사가 버퍼와 힐러 역할을 하며 원거리 마법 공격도 했는데, 그런 만큼 HP가 낮아 신검으로 쓰는 평캔 연속 베기 콤보에 한 방이었다.
[연속 베기(공통 스킬): ★★★★★☆☆☆]
* 마나 소비: 80
* 사용 대기 시간: 8초
* 대상을 향해 공격력의 130%에 해당하는 공격을 빠르게 2번 휘두릅니다.
어느덧 8성을 달성한 내 연속 베기는 쿨 타임이든 공격력 계수든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사기 스킬로 변해 있었다.
근접 딜러들이 사냥 시에 심심하지 않도록 남발하라고 만들어 준 스킬답게, 마나 소비도 8성치고는 굉장히 적은 수치였다.
그 덕에 연속 베기를 쓸 때마다 마나가 줄어들기는커녕, 높은 데미지 덕분에 소비된 마나의 몇 배가 넘는 MP가 채워졌다.
‘다음은 왼쪽 두 파티!’
주술사만 죽이고 빠지자, 어그로가 끌린 나머지 5마리의 홉고블린 전사가 쫓아왔다.
나는 그 파티를 끈 상태로 바로 옆 두 파티로 다가가 또다시 은밀한 일격과 연속 베기로 주술사만 죽이고 옆으로 빠졌다.
이렇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주술사만 잡고 빠지면, 나머지 홉고블린 전사들은 당연히 나를 쫓아오게 된다.
하지만 놈들이 빠르다 한들 재빠른 몸놀림 8성을 찍은 내 이속을 따라잡지는 못하기에, 데미지를 입을 일이 없었다.
그렇게 근처에 리젠되어 있는 8개 파티의 주술사를 죽이고 나니, 얼추 40여 마리의 홉고블린 전사가 내 뒤를 우르르 뒤쫓아왔다.
‘몹이 많으니까 금세 또 한 타임이구나!’
또 한번 완성된 몹몰이.
난 먼저 자버프를 모두 돌린 후, 무리 중간쯤에 있는 놈에게 그림자 밟기를 사용해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케르! 케륵!”
“케르륵!”
내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반사적으로 공격하는 홉고블린 전사들.
나는 놈들의 칼과 창들을 무시한 채, 최근 열심히 스킬 포인트를 찍고 있는 유일한 광역 스킬을 사용했다.
[회전 베기!]
스킬명을 외침과 동시에, 내 몸이 저절로 360도 회전하며 검이 휘둘러졌다.
그 검로(劍路)를 따라 검기 같은 이펙트가 튀어나갔고, 반경 3미터 내를 감싸던 모든 홉고브린에게 광역 데미지를 입혔다.
[회전 베기(심화 스킬): ★★★☆☆☆]
* 마나 소비: 300
* 사용 대기 시간: 30초
* 반경 3m 안의 모든 대상에게 공격력의 110%에 해당하는 피해를 줍니다.
연속 베기를 5성까지 찍으면 익힐 수 있는 심화 스킬, ‘회전 베기’.
그동안 상성 등을 이용해서 빠르게 레벨업을 해왔지만, 역시 몹몰이 사냥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사실 이 스킬은 몹몰이를 위해 찍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하고 있었다.
퍼버버버벙!
스킬 한 번으로, 여기저기서 신검에 있는 빛 속성 마법 데미지가 추가로 터졌다.
동시에 이 많은 몹들로부터 마나가 흡수돼, 내 MP 수치는 순식간에 가득 차올랐다.
닳아도 닳아도 곧바로 차오르는 MP.
나는 마나 쉴드의 몸빵을 믿고, 타임 어택 때 훈련소 몹들을 상대할 때처럼 검을 널찍하게 휘두르며 멀티 히트를 먹였다.
신검과 약점 포착, 불굴의 용맹함의 환상적인 콜라보.
덕분에 내 평타는 한방 한방이 여느 딜러들의 주력 공격 스킬보다 몇 배는 강했다.
그렇다 보니 한 차례 큰 광역 데미지를 입은 홉고블린 전사들은, 낫질에 베이는 잡초처럼 우수수 쓰러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뭐야? 벌써 또 레벨업이라고?”
5시간 전쯤 레벨업을 했던 것 같은데 다시 또 돌아왔다니…….
직접 하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정말 엄청난 사냥속도였다.
필드 사냥은 인던보다 경험치를 많이 주지만, 매번 사냥터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제법 걸리고 PK와 아이템 드랍이라는 위험 요소가 있다.
또한 갑작스러운 몹 리젠이나 변수 등에 대비해 힐러와 원딜러가 포함된 4인 파티 정도는 되어야 사냥이 안정적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마을과 멀리 떨어지고 몹도 많은 사냥터에서 솔플 사냥을 하는 간 큰 유저는, 드물다 못해 없다고 말해도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솔플 필드 사냥을, 그것도 도둑 주제에 몹몰이로 하고 있었다.
심지어 파티원과 경험치를 나눌 필요도 없으면서 경험치 추가 업적까지 적용된 상태.
이렇다 보니 일반적인 동렙들보다, 레벨업 속도가 10배 이상 빠를 수밖에 없었다.
땅에 떨어진 노멀급 템은 무게 때문에 줍지도 않았다.
그저 가끔 드랍하는 골드와 보석만 빠르게 수거하는 중, 라스트챤스로부터 이틀 만에 귓속말이 들어왔다.
(라스트챤스: 형님 바쁘세요? 렙업은 많이 하셨고요?)
(나: 아니. 새벽부터 사냥 중인데, 방금 막 271레벨 찍었다)
(라스트챤스: 와! 진짜요? 전 이제 겨우 230인데.... 정말 렙업 속도 미치셨네요ㅋㅋ 잠은 주무세요?)
(나: 아직도 멀었지 뭐. 그런데 무슨 일이야? 너도 렙업하느라 바쁠텐데)
(라스트챤스: 아, 형님. 다름 아니라 모레 공성전 때문에 귓말드렸어요.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
(나: 오늘이 벌써 금요일이었나? 요즘 렙업만 하느라 요일 개념이 없어져서ㅋㅋ)
저번 오크 로드 레이드 이후, 라스트챤스와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동맹을 맺은 후로 수시로 귓속말을 보내면서 살갑게 굴기에, 아직 신상까지 트진 않았지만 사소한 개인 정보 따위는 알게 되었다.
녀석의 나이는 나보다 2살 어린 26살.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녀석은, 지금처럼 형님 형님 거리면서 깍듯하게 대했다.
여하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녀석이 내게 귓속말을 한 이유는 피닉스 길드에서 내게 공식적으로 참전을 제의한 모레 공성전 때문이었다.
한창 테이밍에 열 올리고 있던 2일 전.
피닉스는 라스트챤스를 통해 내게 비밀리에 의뢰를, 아니 부탁을 해왔다.
-혹시 이번 공성전에 용병으로 참여해 주실 수 있으세요 형님? 저희 피닉스가 태성의 로젠타스 성을 뺏어 볼까 하거든요.
어느새 한 달이 지나 다시 찾아온 공성전.
지난 공성전에서 태성이 번스타인 성을 뺏기면서 4성 체제로 격하된 것은 한 달 동안 가장 큰 핫이슈였다.
그동안 타연 내에서 압도적으로 선두였던 태성이 건국 직후 독주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로 고꾸라졌기 때문.
그러나 나로 비롯됐던 태성의 비극은, 다른 2위권 길드들이 약진하도록 만든 분수령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번스타인 성을 차지한 올림푸스는, 유력한 두 번째 건국 후보이자 태성의 라이벌급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건 극비인데요, 저희 길마 형님이 이번에 제대로 한 건 하셨어요. 우리 동맹 길드인 인천연합 아시죠? 그 인천연합을 우리 피닉스가 인수하기로 그쪽 길마 및 간부진과 합의가 끝났습니다. 정말 초대박이죠? 아직 발표는 안 났지만, 이번 공성전이 끝나면 곧바로 공표할 예정이에요.
길드들이 합치고 갈라지고 하는 일들은 워낙 흔한 일이라, 평소 크게 이슈가 되거나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합의가 사실이라면 그 의미는 남달랐다.
인천연합은 평범한 길드가 아닌 1개 성을 소유한 길드였기 때문이다.
현재 피닉스가 소유 중인 성은 3개.
여기서 인천연합을 흡수하게 되면 총 4개가 된다.
그 말인즉슨, 만약 이번 공성전에서 한 개 성을 더 차지하는 데 성공한다면 곧바로 5성 길드가 되어 건국 조건을 충족한다는 얘기였다.
-태성은 이번 공성전 때 지난번 뺏긴 번스타인 성 재탈환에 총력을 기울일 거예요. 실제로 그런 진행 상황을 누나를 통해 전달받았고요. 그러면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칼젠 성이나 로젠타스 성의 수성이 약화될 수밖에는 없겠죠? 그중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우리 지역과 맞닿아있는 로젠타스 성을 탈환하기로 오늘 결정 났어요.
최초의 국가가 나온 지도 얼마 안 지났는데, 벌써 두 번째라…….
너무 이른 도전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다른 길드의 견제나 방해가 없는 사이 갑자기 성이 2개나 늘어나게 된다면, 건국이란 것이 생각보다는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인천연합도 수성을 해야 하고, 저희도 3성을 수성해야 해서 인원을 많이 뺄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열악한 상황이지만 만약 형님의 도움만 있다면, 로젠타스 점령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형님에게는 비장의 타이탄이 있으니까요!
-타이탄으로 뭘 해주길 바라는 거지?
-몰래 잠입하셔서 로젠타스 성의 마법사 부대만 타이탄으로 전멸시켜 주세요. 형님이 거기까지만 해주시면 그 이후는 저희 피닉스가 알아서 다 처리하겠습니다.
물론 아직 300레벨도 달성하지 못한, 도둑 산드로에게 부탁해 온 건 아니었다.
현재 게임 속에서 유일하게 1기 있는 타이탄의 ‘주인’에게 온 것이었다.
지난번 공성전에서 내가 타이탄으로 보여줬던 압도적인 활약.
그건 벌써 한 달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뇌리에 선명히 박혀 매일같이 회자되고 있었다.
물론 도닥통의 추측대로 내가 이번 공성전은 참여 못 할지도 모른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태성을 상대로 분명히 깽판을 벌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글 또한, 하루에도 수천 개씩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타이탄이라는 조커 카드의 행방을 알고 있는 피닉스로서는, 당연히 이번 공성전에서 내 도움을 받고 싶어 안달 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타이탄을 자신들 뜻대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테니 말이다.
허나 그렇게 좋은 만큼이나, 나를 부려먹는 데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페이는? 내가 마법사 부대를 전멸시키는 조건으로 피닉스가 나에게 제시할 대가 말이야.
-200만 골드요. 슈바이쳐 총무 형이 길드 공금으로 제시한 금액이에요. 이걸로 만족 못 하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다고 길마 형님이 전해달라셨어요.
타이탄의 소환 시간은 길어야 5분 남짓.
근데 고작 그 시간을 써먹는 대가로 2억이나 주겠다고?
요즘 내가 살아왔던 세상과 너무 다른 금액대를 자주 접하다 보니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번 공성전에서 7억 가까이 되는 템을 먹었던 것은, 거의 버그(bug)적 요건에 의한 일회성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전더리를 득템했던 오크 로드 레이드에 이어 이번에도 2억이라는 큰돈을 제의받고 나니, 정말 내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는 것이 새삼 실감 났다.
아무리 그래도…… 게임 속 아이템 하나 주웠다고 인생이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크흠, 일단 고민해보고 나중에 말해줄게.
그렇게 허세를 부리며 대답을 미뤘지만, 그날 밤 곧바로 하겠다는 확답을 준 게 바로 이틀 전이었다.
(라스트챤스: 다름 아니라 저희 길마 형님이 지금 산드로 형님을 뵐 수 있냐고 물으시네요. 중요한 일이니만큼 착수금을 핑계로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요.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나: 어, 피닉스 길마님이라면 나도 한번 뵙고 싶었는데 잘됐네. 어디로 가면 될까?)
(라스트챤스: 형님 익숙하신 듀메인 성 광장에 오시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 * *
간만에 다시 찾은 듀메인 성.
한적한 광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라스트챤스가 한 남자와 함께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형님! 여깁니다! 먼저 와계셨네요!”
기사 랭커답게 화려한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장착했지만, 투구를 착용하지 않아 얼굴은 그대로 노출한 상태였다.
40대 초반의 훤칠한 미남형 얼굴.
짙푸른 빛으로 염색된 장발의 헤어 스타일은, 왠지 그의 아이디와 어울려 한층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피닉스 길드의 마스터이자 기사 랭킹 5위의 랭커.
더불어 아틀란티스의 ‘아리스토’, 올림푸스의 ‘제독’과 더불어 두 번째 국왕이 될 유력한 후보로 손꼽히고 있는 타연 속 거물.
그가 바로 내 앞에 서 있는 이 남자, ‘지옥불’이었다.
“유명하신 분을 드디어 만나 뵙게 됐군요. 반갑습니다. 피닉스를 이끌고 있는 지옥불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