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용병 제의 (2)
“반갑습니다, 지옥불 님. 저도 그동안 방송으로 많이 봬서 꼭 한번 직접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 사람이 갤럭시 워의 살아있는 전설, 헬파이어!’
내가 고등학생 시절, 가장 즐겨 했던 게임의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당시 ‘헬파이어’라는 아이디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명성을 떨쳤던 유명한 인물이자, 게임업계 대중화에도 크게 이바지한 프로게이머.
오죽했으면 이탈리아 올림픽의 성화 봉송과 타임지(紙) 표지에까지 실린 적이 있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역대 모든 프로게이머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프로게이머!피닉스 길드를 창설하고 거대 길드로 성장시킨 길마는, 바로 그런 기록을 남긴 자였다.
“얼마 전 부길마가 불순한 의도로 접근했다고는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 일이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이 끝난 일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라스트챤스 님의 호의 덕분에 이미 잊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히든캬드도 함께 올 줄 알았는데 오지 않았다.
하긴 성기사 랭킹 1위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눈코 뗄 새 없이 사냥에만 전념해야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라챤이에게 산드로 님에 대해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라챤이는 이 타연 판을 뒤집어 놓으실 만한 슈퍼 루키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저 운 좋게 신검을 득템한 평범한 분이신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신검이 워낙에 좋은 템이라서 그 덕을 보고 있는 거죠.”
“하지만 그동안의 활약을 돌이켜 보니 확실히 범상치 않으시더군요. 정말 저희 길드로 영입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어떻습니까? 저희와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과찬의 말씀과 과분한 제의지만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전 혼자가 편해서요. 아무튼 서로 바쁜 사람들인 것 같은데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과연 방송에서 봤던 대로 시원시원한 분이군요. 사실 이번 공성전이 저희 피닉스 길드에게는 명운이 걸린 중요한 일이라서, 마지막으로 확인하고자 이렇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방송으로 타이탄의 활약을 봤으면서도 그런 염려를 하나 싶었는데, 이어진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공성전은 수성 측이 대부분 수적 열세인 경우가 많아 제법 큰 어드밴티지가 주어지는 편이었다.
그 어드밴티지는 각 성마다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조금씩 다르게 주어져서, 성마다 다른 공성 전략을 유도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어느 성은 해자가 있지만 어떤 성은 없었다.
어디는 너른 벌판에 있기도 했지만, 절벽 위 요새같이 홀로 동떨어져 있는 성도 있었다.
이도저도 지형적인 메리트가 없는 성이라면, NPC 기사단이 강력하거나 마법사와 사제 같은 특수 NPC가 수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내가 참전할 로젠타스 성.
그곳이 바로 절벽 위에 성만 떡하니 위치해 있어, 막대한 지형적 이점으로 악명 높은 성이었다.
진입로라고는 절벽과 길게 이어진 강철 다리 하나뿐인지라, 수성 측이 수비에 집중하기 아주 유리했다.
하지만 그것만이었다면 그토록 악명을 떨치진 않았을 터였다.
성문 주위에 높이 솟은 4개의 첨탑.
태성이 이 위에 마법사들을 빼곡히 배치한 이후로, 로젠타스의 내성문은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로젠타스 성은 태성이 가장 손쉽게 수성 중인 성이지요. 아실지 모르겠는데 점령 초창기에는 많은 길드가 공성에 도전했으나 요즘은 일절 없습니다. 로젠타스의 내성문을 뚫는다는 것은, 당분간 절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이지요.”
태성이 첨탑 4개에 배치한 마법사 부대들.
반은 쉴드로 보호하고 반은 광역 스킬을 쏘아대는 이 마법사 부대들 때문에, 외다리를 뚫고 내성 문까지 도달할 수 있는 유저는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물론 공중 이동이 가능한 부대가 대규모로 동원된다면 이 수성 전략은 파훼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현재로선 몇 개월이 더 지난다 해도 요원했다.
요즘은 공성전이 진행되는 1시간 동안 수다나 떨며 시간을 때운다는 태성의 마법사 부대.
그 마법사들을 불시에 습격해 전멸시켜 달라는 것이, 바로 내게 제시된 의뢰였다.
“제가 산드로 님께 확언받고자 하는 것은 암습이 정말 가능하겠냐는 것입니다. 타이탄의 위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의 구조 때문에 말이지요.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고 내성 안으로 잠입하는 것. 그리고 4개나 되는 첨탑을 짧은 시간 만에 전멸시킨다는 건, 아무리 봐도 혼자서 해내기에 너무 과한 의뢰가 아닌가 싶군요.”
수성 측은 죽는다 해도 주성 안의 부활 포인트에서 복귀할 수 있다.
그래서 4개 첨탑의 인원 전부를 짧은 시간 내에 죽이지 못한다면, 부활 후유증 때문에 이속이 느려졌다 해도 부대 진형을 다시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다.
타이탄으로 1개 첨탑의 인원을 전멸시키는 건 당연히 가능한 일.
하지만 짧은 소환 시간 동안, 나머지 3개 첨탑을 이동하면서 전부를 잡아낼 수 있겠냐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확실히 그가 충분히 염려할 만한 리스크였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아셨다시피, 내성문을 뚫기만 하면 로젠타스 성은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워낙 뚫기가 힘든지라, 이제는 태성 측도 오벨리스크에 인원을 많이 배치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산드로 님의 활약 여부가 곧 공성전의 성패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정말 가능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서 어떠한 확신도 없이 의뢰를 수락했을 리 없었다.
라스트챤스의 제의를 받은 그 날, 로젠타스 공성전의 지난 영상들을 찾아보고 충분히 자신이 생겼기에 의뢰를 받아들였다.
“가능합니다. 이미 눈치채셨을 것 같은데, 저는 간파 스킬로 발견하지 못하는 은신을 쓸 수 있습니다. 번스타인 공성전 때 홍당무의 마법사 부대를 습격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였죠.”
“네? 타연에 그런 은신이 있습니까? 저도 타연에는 모르는 게 거의 없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그건 처음 듣는 얘기군요.”
“그뿐만 아니라 최근 마침맞게 비행이 가능한 펫까지 얻게 되어, 첨탑 간의 이동도 크게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흠…… 아무리 비행이 가능한 펫이라도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오벨리스크를 지키는 인원이 없을 뿐이지 마법사와 궁수만큼은 넘쳐나도록 배치된 게 바로 이 로젠타스 성입니다. 사실 제가 염려하는 부분은 이동 여부가 아니라, 타이탄의 소환 시간이 따라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아저씨…… 안 그런 척하지만 계속 내 타이탄의 소환 시간이나 단점 등에 관한 정보를 은근하게 물어보고 있었다.
사실 의뢰 달성 여부를 확인하고 싶다는 건 핑계였고, 대화를 나누며 타이탄에 관한 정보를 캐내려는 게 본심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긴 PC 버전을 계승했다고는 하나 다른 부분이 제법 많았기에, 타이탄의 정보를 미리 하나라도 더 알아내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내가 방송을 통해 타이탄의 위력을 대중에게 공개한 이후.
타연은 알게 모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앞으로 타연의 헤게모니를 쥐게 될 세력은, 누가 봐도 타이탄을 빠르고 많이 보유한 길드가 될 것이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질문을 지금 하실 이유가 있을까요? 제 타이탄이라면 첨탑의 마법사 부대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있었으니 의뢰하셨을 텐데요? 그리고 제 펫은 좀 특별한 녀석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이런, 기분 나쁘라고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사과드리지요. 한데 특별한 녀석이라고요?”
“네. 제 펫은 유달리 좀 크고 쎈 놈이거든요. 모레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제가 왜, 이토록 자신했는지!”
* * *
“그래서? 이번 공성전에도 타이탄으로 또 참전하게 됐다, 그 말이지?”
“어. 계약금까지 받았는데 무를 수는 없지. 그럴 이유도 없고 말야.”
새벽 4시.
이제는 단골이 됐다고 말해도 될 만큼 현중이와 자주 찾게 된 편의점 앞에서, 나는 낮에 있었던 지옥불과의 만남에 관해 얘기해 주었다.
“헬파이어. 확실히 나긴 난 사람이네. 네 말대로면 그 사람이 두 번째 국왕이 되는 게 거의 확정적인 거 아냐? 프로게이머 출신들이 타연에서만큼은 대부분 죽 쓰는데, 그 사람은 여전히 잘나가네?”
“응. 비록 게임 속이었지만 만나 보니 확실히 아우라가 있더라. 말하는 거 한마디 한마디에도 무슨 의도가 숨겨진 것 같아 조심스럽게 되고. 확실히 초대형 길드의 길마답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치열한 게임판. 그것도 정상에서 20년을 넘게 굴렀는데 경험치가 다르긴 다르겠지. 그래도 뭐 그 사람 살아온 걸 보면 뒤통수치거나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어 맞아. 만약 원래의 나였다면 피닉스 길드 영입 제안만 해도 대단한 영광이었겠지.”
이 말을 뱉고 나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거물 취급을 받고 있는 게 과연 내 자리가 맞는 걸까?
그저 운 좋게 최강의 아이템을 얻어서 받는 과분한 대접은 아닐까?
평소 운 좋은 사람들을 애써 폄하하며 살아왔지만, 어제 지옥불도 속으로는 나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맥주를 홀짝이며 잠시 감상에 빠진 내 모습에, 현중이가 뭔가 눈치챘는지 말했다.
“새꺄, 뭘 그렇게 청승 떨고 있냐? 너도 뭔가 진득하게 한 게 없어서 그렇지, 아무것도 이뤄놓은 게 없었던 건 아니잖아! 니가 했던 그 많은 게임들이 결국 다 경험이 되고 내공이 됐으니깐 지금 이렇게 대접받고 있는 거야. 아무나 신검 줍는다고 다 너처럼 할 수 있을 것 같아? 형님 정도면 모를까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어!”
“청승은 누가 떨었다고 헛소리냐? 그냥 요즘 들어 왠지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아서 그래.”
“다른 세상?”
“어.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데도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접하는 돈의 단위도 내가 알던 단위가 아니고 말야. 막상 내가 사는 원룸이나, 이 편의점 맥주같이 주위 것들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지환아. 난 말이지 이렇게 생각한다. 밑바닥부터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지금 너와 같은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
“축구화 살 돈이 없어서 맨발로 축구했다는 개리필드를 떠올려 봐. 걔가 연봉 800억을 받게 될 때까지 과연 너처럼 얼떨떨해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까? 오디션에 수십 번 떨어졌지만 지금은 월드 투어를 다니는 RTO의 백준도, 지금 위치를 원래 자기 자리인 것마냥 생각했겠냐고?”
뜬금없이 급 진지해진 말투로 인생 선배인 것처럼 조언을 해주는 현중이.
하지만 녀석의 말에 그다지 틀린 부분은 없어 보였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잖아. 그들이나 너나 다 뭔가를 꾸준히 해왔고 그러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서 성공한 거야. 비록 넌 그게 하필 게임인 거라 그동안 방구석 폐인으로만 보였겠지만! 흐흐!”
“얀마, 똑같은 방구석 폐인이 자꾸 헛소리할래? 아무튼 니 맘 알겠으니깐 이제 그만하자. 알겠냐? 방구석 폐인한테 검이나 빌려 쓰고 계신 막장폐인 님아?”
“형 말에 수긍하려니 쪽팔리냐? 그나저나 공성전은 어떨 것 같아? 자신 있냐? 아무리 타이탄이라고 해도 첨탑들 하나씩 하나씩 4개나 조지려면 시간 좀 제법 걸릴 텐데?”
“응? 누가 로젠타스 성에서 타이탄 쓴다고 그랬어. 난 거기다 타이탄 안 쓸 건데?”
“뭐? 방금 전엔 이번 공성전에서 타이탄 써먹는다며? 그럼 어디다가 쓰려고?”
뜻하지 않던 레드 드레이크 테이밍에 성공하게 되면서, 난 내가 세웠던 계획의 많은 부분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수정된 계획 중에는, 현재 타연에서 오직 나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칼젠 성에서! 현중아, 난 이번 공성전에서 성을 먹을 거다. 타연 최초로 나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