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천인대전 (3)
“지금껏 모습이 안 보이는 걸 보니 도둑이신가 봅니다! 도둑으로 끝까지 살아남다니, 참 운도 좋군요! 하지만 지금까지 꿀 빠셨으면 2등으로 만족하시는 게 어떨까요?”
조금 전 랭킹 9위의 기사, 0타락전사0를 잡느라 고생한 비상구의 심정이 느껴졌다.
그로서는 이번 천인대전의 마지막까지 오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원래 궁수가 도둑한테 약한 게 사실이니 미련이 남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버텨봤자 시간 낭비잖아요? 공중에 있는 저를 무슨 수로 잡겠습니까? 그러니 이만 포기하시죠!”
스르륵.
공중에 떠 있는 그와 멀지 않은 지상에서 은신을 풀자, 그가 내게 말했다.
“아까 소리쳤던 그분이셨네요? 그래도 말이 통하는 분이라 다행입니다. 대전이 끝나서 나가게 되면 귓말 주세요. 마지막엔 매너플 해주셨으니 따로 보상이라도 넉넉히 챙겨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은신을 푼 게 아니거든요.”
“네? 그럼 공짜로 죽어주시겠다는 말씀인 건가요?”
“설마요? 이유야 당연히 하나죠. 제가 당신을 잡아야만 이번 천인대전이 끝나니까요!”
“하하하하!”
내 말에 폭소를 터뜨리는 비상구.
그의 오버 액션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그리폰이 크게 흔들릴 지경이었다.
“끝까지 남은 걸 보니 어느 정도 실력이야 있겠지만…… 운이 상당히 나쁘군요. 며칠 전, 드디어 이놈을 얻게 된 저는 이제 무(無)상성이랍니다!”
현재 밝혀진 탑승용 공중 펫은 모두 3개.
물론 테이밍 몬스터 스킬을 사용한다면 그 종류는 더 늘어나겠지만, 대중들에게 공개된 건 아직 이 정도뿐이었다.
그중 그리폰은 ‘그리폰의 알’이라는 특수 아이템을 통해 얻을 수 있었기에, 그나마 조금은 친숙한 편이었다.
“그리폰이라…… 물론 좋기야 좋죠. 한데 고작 그거 가지고 무상성이라고요? 랭커신데 너무 순진한 거 아니세요?”
“하하! 이놈을 얻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게 되면, 고작이란 소리를 그렇게 쉽겐 못 할 겁니다. 하여간 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항상 말은 쉽게 하는군요!”
“알 구매할 돈과 퀘스트 몇 개 깰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탈 수 있는 거 가지고…… 생색이 심하네요. 그 정도 가지고 힘들었다면, 저는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자꾸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요? 영양가 없는 대화는 그만하고 업적이나 얻어야겠습니다. 하필 궁수라 참 얻기 힘든 업적이었는데, 열 번이 넘는 도전 만에 결국 오늘에서야 얻게 되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비상구는 공중에서 지상에 서 있는 내게 살을 매겨 날렸다.
화살의 탈을 쓴 푸른 번개.
보는 것만큼이나 데미지 역시 위협적이었다.
[마나 쉴드가 2,313의 물리 피해를 흡수했습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맞아 준 번개는 내 몸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마나 쉴드가 번개를 흡수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마, 마나 쉴드? 아니 이게 뭔 잡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종종 정정해 주는데······ 이런 건 잡캐가 아니라 하이브리드캐라고 하는 겁니다!”
“타락전사 님보다도 오래 살아남아서 뭔가 비장의 수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흔한 컨셉러였네요? 어차피 도둑이라 제게 공격도 못 하실 텐데 그따위 건 아무 의미 없잖아요?”
“섭섭하게 무슨 공격을 못 한다고 그러세요?”
“단검 투척? 그게 여기까지 닿는다고요?”
“아아, 이래서 히든 스킬이라고 불리는 거구나. 하긴 어느 누가 도둑 캐릭으로 마쉴도 모자라 테이밍 몬스터까지 배웠을 줄 상상이나 했겠어?”
“네? 설마 테이밍까지 배웠다고요? 진짜 제대로 똥망캐 도둑이네. 하하하!”
“그 똥망캐가 무슨 맛일지, 어디 맛 한 번 봐보시겠어요? 훼라리 소환!”
무상성 타령을 하던 비상구.
이제 그를 향해, 어떤 것이 진정한 무상성인지 가르쳐줄 차례였다.
펄럭, 펄럭-
거대한 콜로세움 한복판에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대한 피막 날개.
일개 ‘펫’이라고 칭하기에는, 정말 양심 없게 느껴질 정도로 위엄 넘치는 모습이었다.
“아니, 설마 센츄라의 레드 드레이크? 그 보스 몹을 테이밍했다고? 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분명 처음 보는 아이디인데……!”
“그거야 내일이면 자연히 알게 되실 거고요. 아무튼 비상구 님?”
“네?”
“그동안 위에서 편하게 지냈죠? 그러니 이제 그만 내려오시지 않겠어요?”
키에엑-!
나는 소환된 훼라리에 탑승하지 않고, 그냥 원격으로 공격을 지시했다.
‘훼라리가 유저를 상대론 얼마나 센지, 어디 한번 테스트해볼까?’
펑!
화염구부터 쏘아낸 훼라리가 날아올라 붙으려 하자, 비상구는 곧바로 더 높이 날아오르며 화살 공격을 쏴댔다.
하지만 훼라리는 무려 보스 몹 출신.
아무리 강력한 푸른 번개라고는 해도, 몇 대 맞아봤자 큰 위협이 되진 않았다.
“우왓! 테이밍 몹 주제에 뭐 이렇게 공속이 빨라!”
훼라리가 달라붙어 그리폰을 물어뜯자, 비상구는 금세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몸을 뒤로 젖힌 채, 공격을 멈추지 않는 모습만큼은 칭찬해줄 만했다.
[폭풍 연사!]
스킬 덕분에 족히 세 배는 빨라진 화살들.
비상구는 승부를 건듯, 훼라리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영혼의 맞다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너무 막강했다.
“삐이익!”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빛으로 사라지는 그리폰.
과연 레전더리 활답게 훼라리의 체력이 빠르게 줄어들었지만, 물어뜯기던 그리폰의 체력이 먼저 닳아 역소환되고 말았다.
[백스텝!]
그대로 공중에서 떨어지던 비상구의 몸이 지상에 떨어지기 직전!
비상구는 궁수 직업 고유 이동기로 낙하 데미지를 무효화시켰다.
하지만 진작부터 밑에서 대기 중이던 나는, 곧바로 자버프를 걸며 지상에 내려온 그에게 따라붙었다.
“어때요, 제 펫? 좀 많이 맵죠?”
“이, 이런! 더블 샷!”
땅에 떨어지자마자 그림자 밟기에 뒤를 잡힌 비상구.
그는 재빠르게 뒤돌아 공격해 왔으나, 근접 딜러가 원딜러에게 붙은 이상 이미 결론은 나왔다.
아무리 랭커라 할지라도 상성에게, 그것도 신검으로 맞아보는 건 또 처음이었을 테니 말이다.
[연속 베기!]
허공에 새겨지는 이단 공격.
연달아 평타 한대를 캔슬하며 회전 베기까지 들어가자, 비상구는 당황해하며 외쳤다.
“데, 데미지가 미쳤잖아! 당당 님과 결투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도둑 랭킹 1위와 비교해주니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게 느껴졌다.
‘확실히 레벨 보정이 무섭구나. 원래였다면 데미지가 2배는 더 들어갔을 텐데!’
신검이라는 막강한 무기와 8성 소드 마스터리 덕분에 헛방이 적었지만, 데미지 감소 보정이 얼추 50%는 적용된 듯싶었다.
내게 보정으로 추가된 화살 데미지가 상당히 아팠기 때문이었다.
“큭! 이놈의 마나 쉴드는 도대체 언제 깨지는 겁니까!”
하지만 아무리 레벨 차이로 보정이 된 무시무시한 데미지라 해도.
풀로 채워져 있던 내 MP양은 그보다 더 대단했다.
[냉기 화살에 적중당하여 5초간 상태 이상 ‘감속’에 빠집니다.]
이속 저하 스킬을 써서 뒷걸음질 치는 비상구였으나, 8성 재빠른 몸놀림을 쓰니 마법 디버프를 맞은 것 같지도 않았다.
퍽, 퍽! 펑!
랭커답게 제법 버텨낸 비상구였지만, 금방 한계였다.
어느새 가세한 훼라리의 공격을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궁수는 붙어서 맞다이를 하라고 만든 캐릭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럴 수가! 드디어 업적을 얻는가 싶었는데……!”
푹.
내 찌르기 공격을 마지막으로, 비상구는 잿빛으로 산화해 버리고 말았다.
[천인대전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업적 ‘콜로세움 챔피언’을 획득했습니다.]
[아레나 업적치 50,0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이번 회차 1순위자로 총상금 중 131,710골드를 분배받습니다.]
“오! 첫 트라이로 업적 획득! 게다가 꽁돈도 생겼네? 하긴 랭커가 있어서 좀 까다로웠지만, 성공하는 게 당연한 건가?”
비상구가 그나마 랭커 궁수였기에 이만큼이라도 버틴 것이었다.
하지만 내일 내가 상대할 마법사 부대에는, 불행히도 단 한 명의 랭커도 존재하지 않았다.
‘확실히 얼토당토않은 계획은 아니야! 랭커도 이렇게 잠시를 못 버티는데, 법사가 버틸 수 있겠어? 첨탑 싹쓸이 작전……. 이건 분명히 통한다!”
전의를 불태우는 한편, 매표소 인근에 있는 NPC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티켓 값보다 훨씬 더 벌린 골드와 함께 들어온, ’아레나 업적치‘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천승 투사의 단검: 30,000 아레나 포인트]
[만승 투사의 단검: 300,000 아레나 포인트]
……………………
구매가 가능한 여러 투기장 전용 장비들.
하지만 최상위급 장비라고 해도, 현재 공개된 것들은 레전더리 템에는 조금 못 미쳐 보였다.
다만 소모성 아이템은 일회용이라 그런지, 의외로 현재 제작 가능한 수준보다 훨씬 앞선 성능을 뽐내고 있었다.
‘역시 변한 게 없구나. 투기장 포인트로 장비가 아니라 소모템을 사고 싶은 사람은, 아마 타연에 나 하나뿐이겠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절대다수의 유저들은 투기장에서 얻은 포인트로 장비를 구매했다.
그래서 심지어는 이런 소모성 아이템을 왜 만들어뒀냐고 불평하는 유저도 있을 지경이었다.
미친놈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힘들게 모은 포인트로 이렇게나 비싼 일회용 소모품을 사먹겠냐고 말이다.
[특급 체력 회복 물약: 1,000 포인트]
……………………
[세계수의 열매: 200,000 포인트]
[불사조의 심장: 500,000 포인트]
‘영단(靈丹)’, 혹은 ‘영약(靈藥)’.
아이템 재료로 쓰이거나 스탯 등을 영구히 올려주는 다용도 소모품들.
사기적인 효과를 자랑했지만, 그 대신 스펙업은 캐릭당 단 1번 최초 섭취밖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10만이 넘어가는 포인트부터는 이 영단이란 것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는 영단의 스펙업 효과보다는 다른 효과가 더 또렷이 들어왔다.
터무니없이 비싸 누구도 이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을 테지만, 내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소모템 효과.
바로 체력, 혹은 마나를 ‘퍼센트’로 회복한다는 부가 효과였다.
각각 섭취 쿨타임이 굉장히 길게 적혀있었지만, 세계수의 열매만 해도 체력과 마나를 즉각 50% 회복해 주었다.
‘장비 때문이 아니라 이 회복 아이템들 때문에라도…… 나중에 투기장 좀 돌아야겠는걸?’
위급할 때 써먹을 비장의 한 수.
아직은 할 일이 많아 투기장에 투자할 시간이 없지만, 차후에 꼭 다시 들러야 할 만한 비밀 무기를 찾게 됐다.
그렇게 템까지 확인하고 떠나려는 순간, 비상구로부터 귓속말이 들어왔다.
(비상구: 님.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보아하니 길드에 가입되어 있지 않으시던데, 저희 길드에 들어오실 생각 없으세요? 님이라면 바로 장로급으로 간부 대우해드리겠습니다.)
처음 피닉스 길드원들과 만났을 때와 놀랍도록 똑같은 반응.
고급 인재가 귀한 타연인 만큼, 무길드인 나를 보고 그냥 지나칠 길드는 아마 없는 모양이었다.
(나: 죄송하지만 생각 없습니다. 안 그래도 잠시 후에 바로 길드를 창설할 생각이었거든요)
(비상구: 네? 님이 대단하신 줄은 알겠지만 길드를 새로 만들어서 키운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희와 함께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장담하는데 함께 길드를 키우고 건국도 하다 보면 혼자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나: 그건 나중에 두고 보실 일 같네요... 아무튼 제가 지인들 외엔 귓말을 받지 않아서 죄송하지만 차단하겠습니다.)
(비상구: 아니, 잠깐만요!!)
(나: 네?)
(비상구: 혹시 그럼 정말 마지막 부탁인데요... 레드 드레이크를 테이밍한 비법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사례는 정말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나: 하하! 뭐 그놈이 무슨 꼼수나 비법 같은 게 통할 것 같나요? 그냥 혼자서 잡고 피 깎은 다음에 테이밍 스킬 건 게 전부입니다.)
(비상구: 네? 그게 무슨...?)
(나: 아무튼 이만 차단합니다! 오늘 투자 많이 하셨을 텐데 업적 받아간 건 죄송합니다!)
[‘비상구’의 귓속말을 차단합니다.]
“아 이거 참.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하니 차단 목록이 나날이 늘어가는구나.”
타임 어택 1위를 달성한 후.
차단 유저가 계속 늘어나게 됐지만, 아직까진 그래도 소소한 편이었다.
내일 공성전에서 내가 벌일 일과 정체가 공개된 후 벌어질 일을 예상해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차단하는 게 귀찮더라도 귓속말 기능을 포기할 순 없었다.
음성 공유 프로그램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타연이었기에, 귓속말의 편의성을 포기하는 건 현실에서 폰 없이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일정 레벨 이하 귓속말 차단 설정은 가능해서, 최소한의 필터링을 할 수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야! 이거 엄청난데? 이래서 업적 업적 하는 거구나? A등급 업적이라 그런지 확실히 급이 달라!”
천인대전에서의 우승.
1등답게 한 번에 막대한 아레나 업적치와 골드 보상을 독차지했지만, 그 모든 것을 합쳐도 이 업적 하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업적: 콜로세움 챔피언(A)]
* 오스타그 콜로세움의 천인대전에서 최후까지 생존한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물리 방어력 +500, 마법 방어력+500)
* 업적 효과로 유저를 공격 시 추가 피해를 줍니다. (PvP시 모든 데미지 +5% 추가)
* 업적 효과로 모든 투기장 입장에 우대를 받습니다.
최후 생존으로 받은 업적답게 방어력에 추가 수치가 주어졌다.
또한 투기장에서 얻은 업적답게, PvP에 특화된 효과도 추가되어 있었다.
“확실히 내일 공성전에 충분히 도움이 되겠어! 역시 업적이야. 순식간에 이만큼이나 스펙 업이 된다니!”
투기장 아이템은 스펙도 준수했지만, 특별하게도 PvP 추가 보너스가 붙어 있다.
그 때문에 순수 투기장 콘텐츠를 즐기는 유저들 외에도, PK나 공성 전투를 위해 투기장에서 결투 노가다를 하는 유저가 많았다.
그 힘든 노가다를 통해 풀 유니크급 투기장 세트를 장만하더라도, 추가로 주어지는 PvP 보너스는 10% 남짓.
한데 나는 업적 하나로, 단번에 그 절반가량을 손에 넣었다.
“한 달……. 단 한 달 만에, 드디어 타연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캐릭이 완성됐구나. 정말 기대가 된다. 내일 공성전이 어떻게 진행될지……!”
짧다면 짧지만 내게는 긴 시간이었다.
그 결과 드디어 내일, 태성을 상대로 한 전투가 한 달 만에 재개될 예정이었다.
이번엔 타이탄뿐만이 아닌, 내 손에 쥐어진 신검으로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