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일인 성주 (1)
밤새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새벽에 잠시 짧은 수면을 취한 것을 제외하고, 온종일 홉고블린 부락에 짱박혀 레벨업에만 몰두했다.
그 노력의 결과, 목표했던 274레벨을 달성했다.
더 사냥해봤자 공성전 전까지 레벨업하기에는 무리였기에, 사냥을 그만 접고 마을로 귀환했다.
공성전에 다시 참전하게 되었으니 길드부터 창설해야 했다.
저번 ‘자금마련’ 길드는 창설한 지 하루도 안 되어 해산해 버렸기에 다시 관공서를 찾았다.
[‘내집마련’ 길드가 창설되었습니다.]
“이번 길드명은 왠지 저번보다 훨씬 맘에 드는걸?”
계획대로라면 최소 한 달간은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나름 심혈을 기울여서 지은 이름이었다.
태성, 그리고 다리우스와 그 일당들.
놈들에게 갚아 줘야 할 내 분노는 아직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나는 복수의 과정을 만찬을 음미하듯 천천히, 하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골고루 먹어치울 작정이었다.
지난번이 번스타인 성이었다면, 이번에는 로젠타스 성과 칼젠 성 2곳을 동시에 빼앗기는 것으로!
(라스트챤스: 형님, 준비 다 되셨나요? 이제 곧 공성전 타임인데요.)
(나: 어. 준비할 건 다 끝마쳤다. 이제 시작만 하면 돼)
(라스트챤스: 전 아직 쪼렙인지라 참전 못 하는 게 아쉽네요. 아무튼 정확한 투입 타이밍은 길마 형님에게 지시받으면 되는 거 아시죠? 건투를 빌겠습니다!)
(나: 그래, 고맙다. 기대하고 있어. 끝날 때쯤엔 깜짝 놀랄 소식을 듣게 해줄 테니까!)
혹시 모를 혼동을 피하고자, 피닉스의 요청대로 길드 마크를 통일시켰다.
어차피 길드 마크는 아무 때나 바꿀 수 있으니 별 상관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쏙 들었다.
날개를 펼치고 있는 불사조 모양의 실루엣.
이 문양이 뭔가 내 애룡이 된 훼라리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티에스국의 남부, 로젠타스 성 외성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슝-
공간이동술사로 이동해 온 이곳은 의외로 한적했다.
방금까지 있었던 소란스러운 번스타인 성과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
공성전 개시 10분 전의 성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방송이 하나도 안 붙을 만하구나. 아마 모든 성 중에서 가장 관심 없는 공성 현장이 아닐까?’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나와 훼라리는, 앞으로 수없이 회자될 전설을 만들 계획이었다.
이 공성전을 찍지 못한 것을, 방송사들이 두고두고 후회할 만큼!
[산드로(도둑), Lv. 274]
* HP: 9122/9122 * MP: 31518/31518
* 근력: 290 * 체력: 300 * 민첩: 291 * 지력: 354 * 마력: 1244
* 공통 스킬: 마나 쉴드(심화), 매직 미사일, 몬스터 라이딩, 무기 던지기, 무기 방어, 소드 마스터리, 쉴드, 연속 베기, 회전 베기(심화)
* 고유 스킬: 그림자 밟기, 덫 설치, 약점 포착, 은밀한 일격, 은신, 재빠른 몸놀림, 집중 회피
* 특별 스킬: 테이밍 몬스터
으레 그래왔듯이 전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상태창을 점검해 봤다.
근래 레전더리 템을 몇 개 더 갖추었더니, 내 상태창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
특히 랭커 마법사들조차 비교가 안 될 만큼, 마력 수치와 MP가 비상식적으로 높았다.
스탯은 백 단위마다 최초 상승 수치의 10%씩 그 효과가 늘어난다.
100 미만일 때는 마력 1 스탯으로 MP 10과 마법 방어력 1이 올라갔지만, 지금과 같은 1200구간에서는 MP 22와 마법 방어력 2.2가 올랐다.
그러니 300레벨이 멀지 않은 지금, 그 위력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었다.
캐릭을 새로 키워서 오직 마력 스탯만 찍은, 그 누적(累積) 효과가!
“드디어 오늘, 이 미친 마법 방어력의 효과도 처음으로 체감해 보겠구나!”
높은 마법 방어력으로 탱딜러뿐만 아니라 마법 계열의 천적이 될 캐릭터.
그야말로 약점이란 게 존재하지 않을 사기 캐릭의 존재감이, 어느덧 제법 드러난 상태창이었다.
(지옥불: 산드로님, 도착하셨지요? 저희 측 인원은 경계를 방지하기 위해 다른 마을에 흩어져 대기 중입니다. 저는 수성 관계로 더는 귓말이 어려우니, 진입 타이밍은 이번 로젠타스 공성을 맡은 히든캬드와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뭐, 공적인 일이니 개인감정은 접어 두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진입 사인만 받으면 서로 마주칠 일도 없으니까요)
(지옥불: 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실패한다면 바로 수비가 강화될 테니, 꼭 한번에 성공해야만 합니다. 그럼 이만, 멋진 활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지옥불이 직접 올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가 뜬금없이 이곳에 왔다는 것이 눈에 띈다면, 수성 측에서도 갑자기 주의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가뜩이나 인원도 부족한데 아무나 보낼 수는 없는 법.
히든캬드라면 타연 최고의 탱커 중 한 명이었기에, 선봉에 서서 내성문까지의 험로를 뚫는 데 딱 적합한 인물이었다.
어차피 오벨리스크를 쓰러뜨리면 그 즉시 그 성의 공성전은 종료된다.
빠르게 쳐서 함락시키고 남은 시간 동안 다른 곳의 수성을 도와주려면, 이 정도 급의 인물을 투입하는 편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나: 오랜만이군요 히든캬드님. 지옥불님께 듣고 연락드립니다.)
(히든캬드: 오랜만이군요 산드로님. 찾아뵙고 사과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동안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말은…….
하여간 겉과 속이 다른 놈이었다.
(나: 뭐, 신검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싶습니다. 그 일은 접어두고 공성에 집중하도록 하죠. 타이밍 보다가 적당한 순간이 오면 바로 연락 주세요. 전 지금부터 잠입해 있다가 귓말 주시면 그 즉시 첨탑의 마법사 부대들을 처리하겠습니다.)
(히든캬드: 네, 알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일은 저희 피닉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이나 마찬가지이니, 개인 원한은 접어두시고 최선을 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왕이면 성공해서 잔금도 챙기셔야 좋지 않겠습니까?)
‘꼭 말을 저따위로 해야 속이 편하나? 참 볼수록 밉상인 놈이네.’
억지로 사과는 했지만, 여전히 나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녀석이 뭐라 생각하든지 간에, 난 의뢰받은 일만 제대로 해주면 됐다.
로젠타스 성 내성이 보이는 다리 너머.
유저들이 자리 잡은 곳에 섞인 채, 공성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최소 수천 명이 넘어가는 다른 공성전과는 달리, 이곳의 구경꾼들은 겨우 백 명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적어 보였다.
피닉스 길드원 200명은, 불시에 공격하기로 전략을 세우고 다른 마을 공간이동술사 앞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상당히 적은 수 같았지만, 내부 스파이를 배제하기 위해선 이 정도가 최선이라고 전해 들었다.
아무튼 작전 시각은 공성이 개시되고 대략 15분 후.
오늘도 로젠타스 성에는 도전하는 길드가 없어 쉽게 끝나겠구나, 란 방심이 들 때가 바로 이번 암습 작전의 타이밍이었다.
빠빰! 빠빠빰!
드디어 내성의 나팔 소리가 무척이나 바쁜 1시간이 될 이번 공성전의 시작을 알려왔다.
불과 1달 만에.
나는 타연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기록될 레전드를 남기기 위해, 또 한 번의 공성전을 선포했다.
[‘태성’ 길드를 향해 ‘내집마련’ 길드가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온 세상은 나, 산드로란 이름을 기억하게 되리라!
[은신!]
사용 중이던 은신을 재사용해서 쿨타임을 초기화한 후, 성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코스인 다리 위에 올랐다.
폭 10여 미터, 길이 50미터 정도로 이루어진 아치형의 기다란 강철 다리.
이 시각 다른 성들에서는 수많은 유저들이 전투를 시작했을 내성문 앞이, 이곳은 한적하다 못해 적막할 지경이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광역 마법의 폭격으로, 일명 ‘절망의 다리’라고 불리는 곳.
그 고요한 다리를 나 홀로 은신을 쓴 채 건넜다.
내성문 바로 앞까지 다가서는 동안 성문 위의 병력 중 누구도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난 굳게 닫혀있는 강철문을 뒤로하고, 내성 벽을 따라 나 있는 좁은 틈새 길을 통해 뒤쪽으로 이동했다.
영상으로 미리 살펴보며 목표로 삼은 잠입 경로는 정문의 반대편.
성은 깎아질 듯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기에, 유저들의 유일한 진입로인 내성문 쪽에만 방어 인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후방 경계는 NPC 궁수병들에게만 맡긴 채, 일반 유저는 전부 내성문 앞에만 몰려있었다.
어차피 후방은 공중 이동으로밖에 들어올 수 없으니 적절한 전략이었다.
‘간파 마법사가 넘치는 첨탑을 앞에 두고, 은신 도둑이 유유히 지나갈 생각은 하질 못했겠지. 근데 난 8성 은신이다, 이 말씀이야!’
성벽과 절벽의 틈 사이에 있는 아슬아슬한 틈새 길로 후방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대로 NPC 궁수병들의 모습만 보였다.
내 주력 이동기인 8성 그림자 밟기의 사정거리는 26미터.
성벽 바로 밑까지 붙는다면 궁수병에게 충분히 닿고도 남는 거리였다.
[그림자 밟기!]
[은신!]
휙!
내가 타겟팅해서 이동한 NPC 궁수병은, 시야 때문에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허나 옆에 있던 다른 궁수병이 나를 발견한 듯 몸을 트는 찰나, 곧바로 쿨타임이 채워진 은신을 써서 숨었다.
방어력 낮고 HP도 적은 도둑이지만, 컨트롤 좋은 유저가 플레이하면 너무나 죽이기 힘든 이유.
은신은 지형을 잘 이용하고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사용할 수만 있다면, 사기 소리를 백 번 들어도 할 말 없는 스킬이었다.
살금살금.
나는 NPC 병사들과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성벽 위로 쭉 이동했다.
도중에 내성 안쪽 광장을 둘러보니, 오벨리스크 주변에 100여 명의 탱커와 힐러, 궁수 조합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와, 진짜 제대로 빈 집이네. 수성하는데 저 정도밖에 배치하지 않았다고? 만약 태성이 이번에 뺏기면 다신 찾지 못할 거라던 말이, 정말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구나!’
지난번 공성전 당시, 번스타인 성의 오벨리스크에는 태성 측 인원이 족히 2천 명은 넘게 바리케이드를 구성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동서남북으로 탱커, 원딜러, 힐러 조합의 4개 부대로 나누어져 있을 만큼!
거기에 비하면 이곳 로젠타스 성은 완전 놀자판이나 마찬가지였다.
내성문을 뚫기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저렇게 적은 인원만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허술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오벨리스크에 투입할 인원을 빼서 최대한 내성문 방어에 힘쓰는 게 맞았다.
‘하나 그것도 지금까지나 통했던 전략이었지. 내가 전쟁을 선포한 지 1달이나 지났는데, 감히 나란 존재를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겠다? 이런 전략을 고수한 실책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주마.’
어느새 내성문 부근까지 도착한 나는, 조심스럽게 성벽과 연결된 첫 번째 첨탑의 계단에 올랐다.
첨탑의 수는 총 4개.
내성문을 가운데 두고, 약 50미터가량 거리를 둔 채 2개씩 나란히 솟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옥불이 내게 이번 작전이 가능한 건지, 재차 물어본 원인이었다.
타이탄으로 한쪽 편의 첨탑 2개를 순식간에 전멸시키는 건 당연히 가능했다.
하지만 50미터나 떨어진 반대편 첨탑 2개를 마저 습격하기 위해서는 지상으로 내려와 이동해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정문에 있던 탱딜러 부대의 반격을 뚫고 지나가야만 할 터!
한적한 공성전에 느닷없이 나타난 타이탄 1기.
그곳에 쏟아질 온갖 원딜과 탱딜러의 자살 공격을 생각하면, 4개의 첨탑을 모두 전멸시키기 전에 타이탄의 체력이 다 닳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지옥불이 충분히 염려할 만은 했다.
하지만 그건 타이탄이 지상으로 이동할 때나 생기게 될 문제.
내가 이곳에서 걱정할 사항은 전혀 아니었다.
오늘 루이투스는…… 로젠타스가 아닌 다른 성에서 소환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오늘도 여긴 따분하기만 하구나. 오늘 번스타인 성 재탈환이 그렇게 재밌을 거라고 다들 기대하던데.”
“그래서 굳이 거길 가고 싶다고? 수성도 아닌 공성에 차출됐다가 몇 번이나 죽을 줄 알고? 그냥 좀 심심해도, 여기서 안전하게 죽 때리는 게 최고야.”
“어차피 공성전에서는 템도 잘 떨구지 않고, 떨궈도 길드에서 어느 정도 보상해 주잖아? 야, 솔직히 우리가 이렇게 멍만 때리려고 태성에 들어온 건 아니지 않냐? 막말로 우리 같은 고급 인력들이 여기서 수다나 떠는 건 전력 낭비 아니냐고?”
“그려 그려, 알겠으니까 넌 담부터 공성 파트에 자원해서 가라. 여기 오고 싶다는 법사 애들 줄 서 있으니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여긴 항상 너무 따분해서 그러지. 내가 미쳤다고 이 자릴 포기하겠냐? 헤헤.”
지붕 없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첨탑.
그 안은 한창 수다 중인 마법사들로 바글댔다.
수는 무려 30명.
좁은 공간에 그 숫자가 채워져 있다 보니, 그 흔한 탱커 한 명 없이 오직 마법사로만 꽉 채워져 있었다.
첨탑 아래를 탱딜러들이 지키고 있다 보니, 일견 당연한 세팅이었다.
아무튼 첨탑마다 30명씩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면, 대략 120명가량.
이 많은 인원이 다리를 건너는 적대 길드원들에게 원거리 광역 마법을 난사할 테니, 과연 절망의 다리로 불리고 있을 만했다.
‘이런 구조니 지옥불이 날 떠올렸던 거겠지. 이곳에서 타이탄을 소환한다면, 마법사들이야 순식간에 전멸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말야.’
하지만 나는 공성 영상을 찾아본 후, 굳이 타이탄을 소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곳에 들어와서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나 예상한 그대로였다.
‘왜냐하면 난, 너희들의 천적인 마쉴 도둑이니까!’
미친 몸빵과 그보다 더 미쳐버린 마법 방어력.
심지어 신검으로 썰어대며 마나 흡수도 가능했기에, 내게 마법사들은 마르지 않는 회복 물약이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방심하고 있는지, 그 흔한 간파조차 쓰는 놈 하나 없구나.’
한층 더 느긋해진 마음으로 녀석들의 수다를 들은 지 5분여.
마침내 히든캬드로부터 공격 사인이 들어왔다.
(히든캬드: 산드로님, 약속했던 15분입니다. 이제 타이탄을 소환해 주세요. 님이 4번째 첨탑에 공격이 들어가는 순간, 다리로 진입하겠습니다.)
(나: 말씀하신 첫 번째 첨탑 안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다만 타이탄이 보이지 않는다고 당황하지는 마세요. 의뢰받은 대로 4분 안에 4개 첨탑, 모두 깔끔하게 정리할 테니 말입니다.)
(히든캬드: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나: 제가 자주 하는 말인데, 이제 곧 알게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