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두 번째 7신기 (1)
[‘아마존’ 길드에 가입을 요청합니다.]
[‘판도라’ 님이 가입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정말 가입하시겠습니까? 길드 마스터가 가입하게 되면 ‘내집마련’ 길드의 모든 자산과 인원은 ‘아마존’ 길드로 흡수됩니다.]
중요한 사항인 만큼, 타연에서는 보기 드문 재확인 메시지까지 떴다.
허나 선금을 이미 받았으니 망설일 것은 없었다.
[Yes]
[축하합니다! ‘내집마련’ 길드와 ‘아마존’ 길드는 이제 하나가 됐습니다.]
“완료됐네요. 보유 성 목록에 칼젠 성이 추가됐고, 업적치 14만도 이전된 게 확인됐어요. 근데 업적치는 꽤 많이 쓰셨네요?”
“아, 이것저것 좀 시험해보다 보니 제법 쓰게 됐네요. 아무튼 칼젠 성과 한 달간 정이 많이 들었는데, 시원섭섭하네요.”
“정 그러시면 피닉스 길드를 돕던 것처럼, 오늘 공성전에서 저희 수성도 좀 도와주시는 건 어떠세요?”
“태성이 상대면야 가능하지만, 저 좀 비싼 몸인데 괜찮으시겠어요?”
“호호, 저희 이제 돈 없어요. 오죽하면 이번 수성에 필요한 소모 비용도, 장비 팔아서 하는 거랍니다. 이제 2성을 쭉 지켜내서 바짝 벌어야 한답니다.”
제독과의 거래 후, 곧바로 판도라를 만나 칼젠 성 이전 작업을 마쳤다.
공성전은 저녁 6시에 시작되지만, 그때까지 본인 길드원들을 데리고 인원 배치 및 진형을 짜 두려면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근데 괜찮으려나? 아마존 길드가 신생 길드 중에는 제법 강한 곳인 건 분명하지만, 한 번에 성 2개나 수성할 수 있을 만큼 큰 길드는 아닌 거 같은데…….’
기존에 2위 길드를 다투던 피닉스, 올림푸스 같은 대형 길드들도 얼마 전까지 2, 3개의 성을 수성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다.
한데 아무리 수성이 유리하다고는 해도 1성을 먹은 지 얼마 안 되는 아마존 길드가, 벌써 2성을 갖겠다는 건 암만 봐도 염려가 됐다.
‘뭐,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한두 푼도 아니고 +3 대도 부츠를 건네면서까지 얻은 성인데 말야. 아니면 무리하더라도 2성을 계기로 길드를 더 키워 보려고, 명운을 걸어보는 건지도 모르고.’
타연이 재미있는 이유, 아니 이런 다중 접속 게임이 재미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캐릭 하나하나가 전부 실제 유저들이기에, 저마다의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전부 다 제각각이라는 점.
아무리 NPC의 인공지능이 진보한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인간 특유의 감성과 특성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누구는 안전함을 추구하지만, 다른 누구는 도박을 한다.
누구는 협력을 추구하지만, 다른 누구는 가슴속에 배신을 품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 군상이, 타연 속 캐릭터 안에 현실과 똑같은 특징과 생각을 투영하며 플레이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현실 속에서 억눌렀던 본능이나 본성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게임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현실과는 달리 노력 여하와 운빨에 따라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태성같이 서포트와 현질로 떡칠한 넘사벽도 있긴 하지만…….’
예전에는 두텁고 단단한 그 벽의 존재에 좌절한 채, 꿈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벽이 더 이상 예전처럼 넘지 못할 절망의 벽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내 성장에는 어느덧 가속도가 붙었다.
스노우볼을 굴리듯 아주 작은 움직임에 불과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타연 최고의 유망주로 떠오를 만큼!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유망주에서 만족할 것이 아닌, 다음 목표인 ‘랭커’를 향해 달려나갈 차례였다.
[‘아마존’ 길드에서 탈퇴했습니다.]
그렇게 칼젠 성을 넘기며 또 한 번의 전의를 다졌다.
* * *
(라스트챤스: 형님, 그래서 이번 공성전은 패스하실 거예요?)
(나: 어. 벌써 두 번이나 연속으로 참여했잖아? 도닥통의 말을 전부 다 믿을 순 없지만, 나를 노리는 태성의 부대가 있다고 했으니까 패턴을 바꿀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연속 베기 한 방으로 불꽃 도마뱀을 삭제시키며, 라스트챤스의 귓속말에 답장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만의 전용 사냥터가 없었기에, 나는 성을 넘기고 다시 필드 사냥터로 복귀했다.
확실히 한 달간 인던 사냥만 하다가 필드 사냥으로 전환하니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제는 내 아이디가 워낙 유명해졌기에, 한 곳에서 1시간 이상 사냥을 지속하기에 너무 위험했던 것이다.
그래서 귀찮아도 일정 시간마다 이곳저곳을 전전했는데, 지금은 예전 레드 드레이크를 테이밍했던 센츄라 화산에서 사냥 중이었다.
(라스트챤스: 패턴이요?)
(나: 어. 놈들은 분명 이번에도 어딘가의 성에서 내가 타이탄으로 참여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을 거 아냐? 그런 예상을 깨뜨리게 아예 참여를 안 하는 거지. 그럼 다음부터는 계속 헷갈려 할걸?)
(라스트챤스: 하긴 그러네요. 타이탄이 떴다는 소식이 퍼지면, 놈들이 공간이동술사 타고 몰려드는 데 2, 3분이면 충분하긴 하죠. 조심하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그래도 아깝네요, 형님의 타이탄은 정말 공성전에 써먹는 게 최곤데 말이죠.)
(나: 응? 꼭 공성전뿐만 아니라 쓸 데가 얼마나 많은데? 이번 공성전 타임에 난 사냥은 잠시 멈추고 순찰만 돌 거야.)
(라스트챤스: 네? 무슨 순찰이요?)
(나: 순찰이 하나밖에 더 있어? 보스 몹 순찰 말야)
누가 뭐래도 타연의 꽃은 공성전이다.
그러니 최상위 유저들이 포함된 최상위 길드들은, 이 공성전 타임에 전부 수성과 공성을 준비하느라 바쁘기 이를 데 없었다.
공성전이 진행되는 1시간 동안뿐만 아니라, 그 직전인 몇 시간 동안도 말이다.
그 말인즉슨, 공성전 타임에는 필드 보스 레이드의 경쟁이 한없이 낮아진다는 뜻!
난 이번 공성전에는 훼라리를 타고, 유명 아이템을 떨구는 보스 몹들의 필드를 빠짐없이 순회 돌 생각이었다.
‘훼라리로 돌면 어지간한 곳은 전부 둘러볼 수 있어. 안 뜨면 몰라도 떠 있는 걸 발견한다면, 무조건 독식 각이다!’
공성전 타임에 수십 명의 최상위 유저가 레이드를 위해 빠져나오기란 힘든 법.
애초에 나같이 1인 보스 몹 레이드가 가능한 유저가 없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물론 이런 걸 염두에 뒀기고, 굳이 힘겹게 레드 드레이크를 테이밍했던 이유도 있었다.
(나: 근데 레벨업은 잘 돼가고 있어? 어째 서둘러 동맹은 맺어 놨는데, 나중에 써먹을 구석이 없을 것 같다? 이거 내가 너무 손해 아냐?)
(라스트챤스: 아, 진짜 잠도 못 자고 미친 듯이 하고 있어요. 나중에 두고 보세요. 진짜 제 덕 볼 일이 톡톡히 있을 테니까.)
라스트챤스가 구상한 새로운 테크트리의 캐릭은 한마디로 ‘폭딜 저격수’라 할 수 있었다.
불굴의 용맹함과 몇몇 아이템, 그리고 운 좋게 얻은 특별 스킬 조합의 궁수 캐릭.
체력과 몸빵은 말도 안 되게 약하지만, 반대 급부로 원거리 화력만큼은 타연 원탑으로 불려도 될 것으로 보이는 테크트리였다.
거기에 녀석의 컨트롤 실력이 더해진다면, 그 캐릭이 얼마나 위협적일지 충분히 예상됐다.
지금이야 내가 앞서가고 있지만, 조만간 라스트챤스도 두각을 드러내며 새로운 타연 유망주로 주목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공성전까지 2시간을 앞둔 시점.
갑자기 태성 길드에 잠복해 있는 연우님으로부터 귓속말이 들어왔다.
(연우: 산드로님, 큰일 났어요! 혹시 들으셨나요?)
(나: 아니요? 무슨 일 있었나요?)
(연우: 하긴 이제 막 벌어진 일이니 듣지 못하셨겠구나. 지금 저희 길드 채팅창에 서로 인사들 나누느라 난리 났어요. 조금 전 아마존 길드가 저희 태성 길드로 흡수됐거든요!)
(나: 네? 아마존이요?)
갑자기 뒷골이 땡겨 왔다.
설마설마 하지만, 이건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서글하지만 강단 있어 보였던 판도라.
그녀가 칼젠 성을 구매한 속셈은 길드를 성장시키려던 게 아니라, 애초부터 태성에게 넘기려던 거였단 말인가?
(연우: 길드를 판 건지, 아니면 원래 태성 측 인물이 비밀 길드로 세력을 키우고 있던 건지는 아직 확실치 않아요. 분명한 건 이번 통합으로 태성은 다시 5성을 수성하는 것으로 이번 공성전을 시작한다는 점이에요.)
아무리 태성이라도 누군가가 지키고 있는 칼젠 성을 재탈환하는 것은 제법 힘든 일.
하지만 진작부터 칼젠 성을 먹어봤기에, 수성의 입장이 된다면 누구보다 수월히 칼젠 성 방어에 성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내가 아마존 같은 신생 길드가 칼젠 성을 돈으로 사는 것을 모험이라고 표현했던 것이지만, 반대로 태성이 돈으로 사게 된다면 이보다 가성비 좋은 선택은 없었다.
허나, 내가 태성에게 칼젠 성을 판매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그러니 태성, 아니 다리우스는 수를 쓴 모양이었다.
제삼자를 통해 구매를 진행하고, 성을 넘겨받는다.
돈으로 길드를 인수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몰래 산하 길드를 키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상 후자 같았다.
훗날을 위해 보험과도 같이 숨겨 뒀던 비밀 길드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리라.
‘이런……. 나 또다시 소탐대실해버린 거야?’
지옥불의 제의대로 올림푸스에게 성을 넘겨줬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1 수치에 눈이 멀어 또다시 악수(惡手)를 두고 말았다.
게임 플레이나 컨트롤 측면에서는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줄곧 솔플만 해와서 그런지, 이런 암투가 벌어지는 타연의 메인 스트림에서의 판단은 아직도 미숙했다.
그토록 변화하겠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는데도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부분.
이번 소탐대실을 끝으로, 다음부터는 절대 작은 것에 연연해 하지 않고 대범하게 게임하기로 다짐하며 계획을 바꿨다.
어떻게 뺏었던 칼젠 성인데, 다시 태성한테 넘어가 있는 꼴을 볼 순 없었다.
또한 이제는 클 만큼 컸으니, 한 대 맞았다면 바로 갚아줘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지옥불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나: 지옥불님. 이미 소식 들으셨겠죠? 혹시 이번 공성전에서 절 용병으로 고용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부담되지 않도록 보수는 후불로 받겠습니다. 성공 보수로 말이죠.)
* * *
(축복받은얼굴: 너무 위험하지 않겠냐? 니 말대로면 널 노리는 태성의 특수 부대가 따로 있는 거라며?)
(나: 괜찮아.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깐.)
(축복받은얼굴: 생각은 무슨 생각? 아무리 니가 쩔더라도 아차 하는 순간에 잘못될지도 모르는 게 이 타연 판이야.)
(나: 현중아. 너 만화 보면 항상 악당들이 주인공보다 세면서도 결국 왜 당하는 줄 아냐?)
(축복받은얼굴: 이 자식은 뭔 헛소리를 하냐 또? 그래, 들어나 보자. 도대체 왜 당하는데?)
(나: 주인공이 악당 예상보다 더 빨리 강해져서 그런 거야. 요 정도면 잡겠지 했는데, 싸울 때 보면 그거보다 좀 더 강해져 있는 게 주인공이거든.)
(축복받은얼굴: ㅋㅋㅋㅋ 그래서? 니가 그렇다고?)
(나: 어느새 사람들이 나를 스페셜 원이라고 부르고 있더라. 그렇다면 이번에도 스페셜한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 줘야지 않겠냐? 적도 스페셜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한 놈들이라면 떼거리로 몰려온다 해도 겁 안 난다.)
(축복받은얼굴: 아, 이 자식이 방송 좀 타더니 헛바람 제대로 들었네. 그려, 맘대로 해라! 니가 말린다고 들을 놈이냐? 아무튼 항상 뒤통수 조심은 명심하고!)
어차피 나와 태성과의 전쟁이 시작된 지는 오래였다.
지금 와서 내가 겁먹고 사릴 생각이었다면, 첫 번스타인 공성전에서 그렇게 무작정 혼자 난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길드명 ‘반품회수’.
이번에 머리 굴리고 돈도 쓰느라 수고가 많았다, 태성.
하지만 너희가 가져간 그 칼젠 성, 미안하지만 다시 반납해야겠다.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할 성이 너희에게 잘못 간 모양이니 말이다.
그렇게 관청 NPC에 들러 길드를 재창설하는 것으로, 이번 공성전 참여 준비를 서둘러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