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두 번째 7신기 (2)
(지옥불: 정말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나: 건국하고 오히려 성장세가 둔화된 것 같다 시면서요? 그러면 언제 쫓아가서 뒤따라 잡겠습니까? 한 번쯤 도박과도 같이 앞서 나가 봐야 격차가 메꿔지든지 하지 않겠어요?)
조금 전 내가, 이번 공성전은 얌전히 5성 수성에 집중하려던 지옥불을 꼬실 수 있었던 이유였다.
현재 태성은 3개의 알짜배기 성을 소유한 상태였는데, 갑작스럽게 아마존을 흡수하며 다시 5성으로 복귀했다.
반면 피닉스는 저번 공성전으로 5성이 되었으나, 사실 실속 있는 성은 듀메인 성밖에 없어 태성에 비할 바는 못 되는 상황.
하지만 만약 이번 공성전에서 칼젠 성을 뺏는 데 성공한다면 피닉스는 6성, 태성은 4성이 된다.
아무리 알짜배기 성만 가진 태성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되면 다음 한 달간 태성과의 격차는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단 길드가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전용 사냥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했으니 말이다.
(나: 이대로 현상 유지만 하다가는 절대 태성을 못 따라잡습니다. 놈들이 가진 걸 하나씩 뺏어와야지만 따라잡을 가능성이 있어요. 한데 이번 칼젠 성 공성은 저와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떠세요? 한번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지옥불 : ....비용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 : 오케이! 제가 먼저 제의 드린 거니, 저번 로젠타스 때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지만 그만큼만 받겠습니다. 이건 뭐 거의 특가라고 할 수 있죠, 특가!)
현재 피닉스는 수성만도 벅찼기에, 6번째 성을 노릴 인원은 쥐어짜다시피 해도 마련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것도 무려 태성이 수성하는 성을 뺏는 거라면 더더욱.
하나 그건 타이탄이 없는 공성전만 해왔던 유저들의 고정관념!
난 그 허점을 이용한 의외의 전략 하나를 제시해 보았다.
(나: 끝으로 피닉스가 칼젠 성을 노린다는 것은 완전히 비밀로 해야만 합니다. 아마 태성은 이번 칼젠 성 수성에 많은 인원을 배치하지는 않을 거예요. 괜히 그들을 자극해 지원 병력이 오지 않도록, 공성전이 끝나기 10분 전까지 단 한 명의 길드원들도 오늘 계획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지옥불: 저번 공성전 때도 그렇고... 정말 산드로님은 공성전을 위해 태어나신 분 같군요. 아마 이번 작전도 성공한다면, 이건 타연에서 최초로 등장한 공성 전략이 될 겁니다.)
(나: 과찬입니다. 이게 다 타이탄을 저만 갖고 있으니 가능한 새로운 시도일 뿐이죠. 그러니 아직 저 혼자만 갖고 있을 때 제대로 써먹자는 겁니다.)
공성전은 성마다 고유의 특성들이 있지만, 대부분 비슷한 형태로 진행된다.
우선은 내성문을 뚫기 위한 소모성 전투가 벌어진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 끝에 내성문이 뚫리게 되면, 내성 곳곳에 자리 잡은 원거리 부대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진격하는 구조.
물론 속전속결을 위해 이 원거리 딜러들을 무시하고 진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벨리스크를 공략할 때, 후방에서 들어올 원거리 부대의 화력을 감당할 자신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시간이 들더라도 원딜러 부대의 정리를 꼼꼼히 진행하고,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바리케이드 등의 진형을 갖춘 수성 인원을 물리치는 것이 정석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1시간 안에 이뤄지다 보니, 당연히 시작부터 밀도 있고 치열한 전투들이 쉼 없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어떤 성들은 1시간 내내 전투가 이루어져도, 내성문조차 뚫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냥 고레벨 NPC들만 지키고 있어도 뚫기 힘든 게 성인데, 유저들이 각 잡고 지키고 있으니 오죽 뚫기 힘들겠는가?
그러니 종료 10분 전까지 내성문조차 뚫지 못했다면, 보통 그날의 수성은 성공했다고 미리 자축할 만도 했다.
그래서 난, 이번 공성전에서 그 편견을 최대한 활용한 전략을 펼칠 생각이었다.
피닉스가 수성하는 5성은 하나같이 실속 없으면서 뚫기는 어려운 성들.
새로 먹은 로젠타스 성을 제외하면 수성을 지속한 지도 오래됐기에, 새로 도전하는 길드도 딱히 없는 상태였다.
만약 오늘의 공성전에서의 수성도 평소처럼 무난하게 진행된다면, 남은 시간에 수성 인원을 조금씩 줄인다 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나: 종료 10분이 남았을 때까지 내성문이 뚫리지 않은 성이 있다면, 그곳마다 인원을 차출해 주세요. 대략 수성 인원의 10% 정도만 빠져나왔더라도, 남은 10분간 오벨리스크는 충분히 지킬 수 있겠죠. 차출한 인원들을 모두 칼젠 성으로 쳐들어갈 겁니다.)
(지옥불: 최소 3개 성이라고 계산하면 대략 200명 정도 차출이 가능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인원이 인원인 만큼, 지시를 내리고 공간 이동해서 칼젠 성에 모이는 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5분은 걸릴 겁니다. 그럼 남은 5분으로 내성문을 뚫고 오벨리스크까지 함락해야 한다는 말인데.... 정말 자신 있습니까?)
(나: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번엔 제 타이탄이 예전과 같이 게릴라로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내성문부터 함께 뚫고 전진해서, 단 5분 만에 오벨리스크까지 점령하겠습니다. 내성문 앞에 모인 피닉스 부대와 함께!)
누가 그랬던가?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이번 공성전은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증명하는 전투가 될 것이다.
* * *
용병으로 고용되는 게 확정되고는 지옥불로부터 피닉스 길드로의 가입을 권유받았다.
함께 공성을 진행하고 여러 돌발 변수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려면, 아무래도 같은 길드인 편이 좋긴 했다.
더불어 피닉스 길드원들의 버프나 도움을 적절히 받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요즘 여러 큰 사건을 몇 차례 겪으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이 타연 판에서는 그 누구도 완전히 믿어선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공격 좀 맞더라도, 내 행적이나 은신이 노출될 수 있는 같은 길드나 파티 상태보다는 1인 길드를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최소한 1인 길드로 동맹을 맺고 참여하면 아군의 광역 공격에는 맞지 않으니, 썩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오늘 칼젠 성 공성은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나 보네?”
“그래도 뭔가 있지 않을까 해서 기다려봤는데 시간만 낭비했네. 한 달간 다사다난했던 칼젠 성이 결국 이렇게 태성의 품으로 되돌아가는구나!”
자리를 잡고 공성을 구경 중인 유저들의 수다가 들려왔다.
더는 볼거리가 없어 보이자, 늦게나마 다른 성의 공성을 보기 위해 떠나는 유저도 몇몇 보였다.
공성 종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칼젠 성 앞.
성문과 성벽에 티에스 국의 국기가 걸린 탓인지, 이번 공성전 동안 칼젠 성은 내내 한산했다.
아무래도 아마존이 태성 길드로 흡수됐다는 것이 상당한 핫뉴스였던 만큼, 공성을 준비 중인 길드들에게 순식간에 전파됐던 것이다.
그렇게 꼬장 유저 몇몇과 구경 온 무길드 유저들 소수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찾은 유저라곤 거의 없었다.
난 이런 조용한 성안을 8성 은신을 쓴 채 샅샅이 뒤져서, 태성의 수성 병력을 정확히 파악해 두었다.
‘총 인원은 500명 정도. 내성문 앞에 200명 정도가 있고, 주성 건물과 성벽에 원딜러 부대 100명 정도가 흩어져 있다. 광장의 오벨리스크에 바리케이드를 친 인원이 나머지 200명!’
이 성은 내가 한 달간 소유했던 곳.
그러니 이번 공성의 지휘를 맡기에 나만큼 적격인 사람도 없었다.
최적의 동선과 곳곳에 자리 잡은 원딜러들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되뇌다 보니,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나: 이제 시작할 시간입니다. 참여 인원들에게 명령 하달해서 바로 칼젠 성 내성문 앞으로 모이게 해 주세요. 절대 5분이 넘게 걸려선 안 됩니다.)
(지옥불: 네. 바로 간부진을 통해 하달하겠습니다.)
종료 7분 전.
미리 몇몇에는 언질해 뒀는지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무리 수성 측이 방심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라곤 해도, 제법 많은 인원이 공간이동술사를 통해 이동해 오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것도 전부 피닉스 길드 마크를 단 유저들이 뭉태기로 넘어오는 데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설마설마할 수도 있는 타이밍이었다.
종료가 몇 분 안남은 상태에서, 고작 이정도 인원이 넘어왔다고 태성이 지원군부터 부를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조금만 버티면 이달의 공성전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놈들이 방심한 사이에, 순식간에 내성문을 뚫고 논스톱으로 성을 차지해야만 했다.
“키에엑!”
종료 6분 전.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카로우면서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젠 성 상공을 활공하는 거대한 레드 드레이크.
태성의 길드원들이 훼라리의 등장에 놀라,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산드로의 레드 드레이크다!”
“젠장! 놈이 또 이 칼젠 성에 왔어!”
“저번 공성전처럼 하늘에서 오벨리스크로 떨어지려는 건가? 모두 드레이크를 주시하면서 오벨리스크 방어에 집중해! 두 번은 안 통한다!”
“지 혼자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꼬장 온 거겠지!”
지상에서 올려다보면, 내가 훼라리에 타고 있는지 자세히 보이진 않는다.
그 점을 활용해서, 난 수성 측 태성 유저들의 시선 분산을 유도했다.
내성문을 뚫는, 아주 잠깐의 틈을 만들기 위해!
(나: 정확히 55분에 내성문을 지키는 기사들 사이로 난입하겠습니다. 그러면 곧바로 따라붙어 내성문 앞의 탱커진들을 함께 처리해 주세요. 그러다 내성문이 뚫리면, 오벨리스크를 향해 바로 직행하겠습니다. 명심하세요, 이번 공성은 시간이 생명입니다!)
(히든캬드: 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짜릿한 공성전을 경험하겠군요.)
이번 칼젠 공성의 책임자로 결정된 피닉스 측 멤버는 히든캬드.
확실히 성기사 랭킹 1위라는 자리는 이런 기습 공격의 선봉에 서기에 최적화된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길드의 상징과도 같은 간판스타였고, 무엇보다 부길마인 만큼 길드원들로부터의 신임도 두터웠다.
히든캬드만 있다면 결국엔 뚫어낼 수 있다!
뭐, 길드 내에서 이런 위상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인성은 몰라도…… 실력이 믿음직스러운 것만큼은 사실이긴 하지. 잘된 거야.’
내성문 앞에 배치된 궁수와 마법사들이 훼라리를 향해 공격을 쏘아댔다.
허나, 턱없이 부족한 사정거리 덕분에 적중되는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종료 5분 전.
유저들의 정신이 공중을 향해 있을 때, 이제는 매달 열리는 공성전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루이투스가 갑자기 소환됐다.
하늘이 아닌 내성문 바로 코앞에서!
[광휘의 방패!]
[영광의 검!]
콰쾅!
내성문 앞에 일렬로 줄지어 서 있던 기사들 한복판에 갑자기 타이탄의 광역 공격이 떨어졌다.
그리고 신검의 공격력과 엇비슷한 타이탄의 무시무시한 평타 공격이, 기사들 뒤에 있던 힐러들을 향해 연속해서 휘둘러졌다.
“모두 전진!!”
“다 죽여! 어서 내성문을 뚫자!”
거대한 타이탄의 모습이 드러난 것을 신호로, 히든캬드의 부대들이 내성문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볼 새도 없이, 어느새 정신을 추스르고 있는 힐러들을 향해 넉백기를 사용했다.
[심판의 전진!]
발밑에서 공격을 가하던 기사들과 서둘러 힐과 버프를 캐스팅하던 힐러들.
내성문 앞에 진형을 갖추고 있던 모든 유저들이, 내 전진 스킬에 우수수 나동그라지며 넘어졌다.
쾅, 쾅! 콰쾅!
그와 동시에, 피닉스 진형에서 쏘아 낸 에어 밤과 파이어 볼 같은 광역 마법들이 도착했다.
“으아악!”
“버텨 봐! 이러다간 진형이 무너진다!”
잘 짜인 진형 한복판에 갑자기 타이탄이 솟아오르듯 튀어나오니,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양 그대로 진형이 파괴되어 버렸다.
광역 원거리 공격이 들어온 피닉스군(軍)의 2차 공격에 이어, 빠르게 도달한 히든캬드 등의 근접 탱딜러들이 어느새 태성군에게 붙은 것이다.
고개를 들어 내성문 위를 바라봤다.
성벽 위에선 지상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이, 우리를 향해 침착하게 공격을 쏟아붓는 궁수와 마법사 부대의 모습이 보였다.
‘훼라리 컴온!’
내 부름을 받고 꺾어지듯 지상으로 강하한 훼라리.
녀석이 어느 정도 다가오자 정면을 향해 점프했다.
그리고는 도움 닿기를 하듯 훼라리의 등을 발판 삼아 한 번 더 점프해서, 가까스로 성벽 난간에 한 손을 걸칠 수 있었다.
쿵, 쿵.
거대한 몸체만큼이나 육중한 소리가 성벽 위로 진동과 함께 울려 퍼졌다.
설마 20미터나 되는 성벽 위로 타이탄이 올라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듯, 경악해 하는 태성군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미쳤어! 드레이크를 밟고 여길 올라왔다고?”
“안, 안돼! 버틸 수가 없어! 여깄다간 다 죽어!”
“우리만이라도 후퇴해서 오벨리스크로 합류하자! 잘못하면 성을 도로 뺏기겠다!”
탱커와 힐러 부대도 내 타이탄을 버텨내지 못했는데, 종이 몸들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올라오자마자 펼친 영광의 검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살아남은 원딜러들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을 향해 도망쳤다.
나는 그들을 뒤쫓지 않고 몇 차례 검을 휘두르며 잔당을 정리하고는, 성벽 너머 내성문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이젠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은 내성문 안쪽.
그 내성문을 사정없이 내려치며 공격하자, 수리하는 인원이 없어서 그런지 내성문은 금방 파괴되었다.
종료 4분 전.
나는 태성의 탱커진 잔당을 정리하느라 아직 내성문을 공격조차 못 하던 피닉스군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며 성안으로 초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