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두 번째 7신기 (4)
『양민아 앵커, 오늘도 역시나 그분의 활약이 굉장히 눈부셨었죠?』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나타난 이상 제대로 눈부셨죠! 김석용 아나운서님, 이제는 매달 공성전 때마다 반복되는 그분의 활약상에 공성전만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시청자분들도 많으실 거라고 생각되네요!』
『그동안 타연에서 단기간에 이정도 임팩트를 안겨준 유저가 또 누가 있었나 싶군요. 모두 기다리실 테니, 먼저 오늘 있었던 칼젠 성 공성전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칙!
간만에 시원한 맥주 캔을 따서 한 모금 들이키며 티비를 트니, 마침 타이토닉TV의 뉴스가 시작한 상태였다.
내 루이투스의 독보적인 활약상을 시청자의 입장으로 지켜보는 것.
그건 제법 쏠쏠한 재미를 안겨줬다.
그래서 굳이 이 저녁 뉴스를 시청하기 위해 일찌감치 로그아웃했다.
‘나르시시즘이 있는 건 아닌데, 자꾸 대단하단 소리를 듣다 보니 계속 듣고 싶어지네. 설마 내가 원래부터 이런 성향이었는데 그동안 모르고 살아왔던 건가?’
물론 누구라도 루이투스를 타게 된다면 독보적인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워낙에 설정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놈인 데다, 아직 단 한 대뿐인 타이탄이었으니…….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현존하는 유저들 중 나보다 더 잘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 나오는 영상만 보더라도 타이탄이 역소환되던 순간, 도대체 내가 아니면 누가 살아남을 수 있었겠단 말인가?
『지금 나오는 저 장면! 꺄아! 성루에서 레드 드레이크로 점프해서 타는 것 좀 보세요! 저 모습을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타이탄만으로도 부러운데, 저 레드 드레이크는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군요! 사실 저도 관계자들을 통해서 들은 얘기입니다만, 현재 여러 기업에서 광고 모델로 산드로 님을 섭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워낙 베일에 싸인 분이셔서 그런지, 연락이 닿는 대로 거절을 당하고 있다고 하네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많진 않고 대략 네 군데에서 연락이 왔었다.
물론 광고 계약은 신상이 노출되는 것이 필연적이었기에, 대화가 길어지기 전에 곧바로 차단을 박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나운서님. 멋진 활약상은 전부 살펴봤으니, 이제 조금 진지한 얘기를 나눠 볼까요? 아무래도 산드로 님이 이번 칼젠 성 공성전에서 나타난 걸 보면, 확실히 피닉스 길드와 깊은 관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추측이겠죠?』
『저번 달 로젠타스 공성전에서도 피닉스의 공성을 도왔고, 이번 칼젠 성에서도 함께 참여한 걸 본다면 아무래도 그렇게 간주해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공성전에서는 타이탄이 역소환될 정도로 적극적으로 피닉스 길드원들을 보호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상 이번 칼젠 성은 산드로 님이 피닉스 길드에게 떠먹여 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까지도 드는군요.』
『이제는 그 덕도 톡톡히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 공성전을 통해 피닉스 길드는 6성, 태성 길드는 4성으로 전세가 뒤바뀌어 버렸잖아요? 듣기로는 피닉스 길드의 상승세 때문에 실력 있는 중립 유저분들의 가입 요청이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요즘 타연은 한 치 앞을 예측 못 할 정도로 나날이 흥미진진해지는 것 같네요!』
『독보적으로 앞서가던 태성 길드에게 이렇게 강력한 라이벌 길드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게 다 한 사람이 나타나면서부터 생겨난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나비효과요?』
『네. 산드로 님이 신검을 먹지 않았다면 과연 타연 정세가 지금처럼 돌아가고 있었겠습니까?』
『아하! 하긴 정말 그렇네요!』
삑!
더는 낯 뜨거워서 못 봐줄 정도였기에, 그만 티비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내가 지금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세운 공성 작전은 태성의 허를 찔렀고, 모든 것들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이뤄졌다.
하지만 표면상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법 위험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타이탄의 엄청난 HP로도 근접 탱딜러들의 집중 공격은 예상보다 오래 버티지 못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오벨리스크에서 벗어날 때도 태성의 원딜러들은 내가 생각과는 달리 죽어라 나만 공격해왔다.
무엇보다 뛰어난 컨트롤을 가진 8명의 고레벨 도둑 부대까지…….
만약 제사장의 머리 장식이 없어서 녀석들의 그림자 밟기를 먼저 빼놓지 않았더라면, 생각보다 떨쳐내기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승승장구해왔다고 너무 방심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성장하는 만큼 적들도 레벨업을 꾸준히 하고 있고, 타이탄의 파훼법에 관해서도 이런저런 공략이 진행되는 것 같은데 말이지. 이러다가 타이탄의 연구가 끝나서 곧 생산되기라도 시작한다면……?’
여러 개의 레전더리 장비.
2천만이 넘어가는 풍족한 골드.
리버스국이라는 든든한 아군까지…….
이정도면 디바인 무기와 타이탄이라는 타연 속 혼자만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잘 써먹었다.
그러니 이제는 처음 생각했던 대로 랭커 수준에 이를 때까지 조용히 레벨업만 할 시기였다.
눈에 띄지 않게 성장을 거듭하다가 PvP에 나서도 자신 있을 레벨에 이르는 순간, 나는 무제한 게릴라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태성이라는 길드 마크를 달고는 필드에 나서기가 두려워질 정도로, 그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존재가 될 때까지!
그렇게 난 공성전을 복기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되짚어보다가 잠이 들었다.
* * *
(지옥불: 일찍부터 사냥하고 계셨나 보군요. 지금 좀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나: 어제 신나게 달리셨나 보네요. 지금에서야 귓말을 주시는 걸 보니요.)
(지옥불: 하하! 도무지 안 마실 수가 없어서 말이죠. 건국한 지 1달 만에 6성의 국왕이라니... 정말 어제는 제2의 게임 인생으로 타연을 선택한 것을 너무 잘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산드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전 10시.
사냥을 시작한 지 5시간이 흘러서야 기다리던 지옥불로부터 귓속말이 왔다.
애초에 솔플만 하는 나와는 달리, 한 국가의 수장인 지옥불은 수백 명이 함께 플레이할 수 있는 초대형 캡슐방에서 길드원들과 공성을 치렀을 것이다.
그러니 공성이 끝나고 뒤풀이를 안 했을 리 만무.
가뜩이나 어제같이 태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날은 더더욱 그러했다.
(나: 물론 제가 많은 역할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지옥불님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로젠타스 성도 그렇고, 이 칼젠 성도 그렇고 결국 지옥불님이 성주가 될 자격이 있으셨으니 그렇게 된 거죠.)
(지옥불: 정말 연석이, 아! 라스트챤스라고 해야 알아들으시겠구나! 녀석이 산드로님과 좋은 인연을 맺게 해줘서 너무 고맙군요. 아무튼 지금 듀메인 성으로 와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직접 찾아봬야겠지만 여기서 할 일이 있어서요.)
(나: 돈 받으러 가는 건데 당연히 제가 가는 게 맞죠. 곧 가겠습니다.)
급히 귀환하고 듀메인 외성 마을의 광장으로 향하니, 지옥불이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최초의 6성 성주님!”
“하하! 덕분에 2성이나 먹은 것인데요, 뭘. 정말 저희 길드로 오실 생각이 아직도 없으십니까? 타연 최고의 대우에 최고를 더 얹어드릴 텐데 말이죠.”
“항상 그래 왔듯이 혼자가 편해서요. 여러모로 바쁘실 텐데 얼른 거래를 마칠까요?”
성공 보수를 받기 위해 교환창을 여니, 곧바로 200만 골드가 올라왔다.
틀림없이 맞는 금액이기에 바로 확인 버튼을 터치했는데, 교환창이 닫히지 않았다.
“지옥불 님……? 확인 안 누르세요?”
“잠시만요. 인벤토리에서 이것 좀 찾느라……. 아! 여기 있군요!”
그렇게 올라온 추가 아이템.
그건 이미 내 캐릭의 필수템이자 이제는 평생템이 되어버린, ‘고대 뱀파이어 귀족의 사파이어 반지’였다.
“예전에 이 아이템을 찾으셨었죠? 해주신 거에 비해 성공 보수가 다소 부족한 듯싶어, 뭘 더 드릴까 하다가 하나 챙겨왔습니다.”
“아…… 이거라면 너무 좋긴 한데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거 이래 봬도 레전더리인데요?”
“괜찮습니다. 제가 바로 피닉스의 길드 마스터인걸요. 부담 갖지 마시고 필요한 데 쓰십시오.”
확실히 이 사람은 볼수록 매력적인 부분이 많았다.
사실 지옥불이 갤럭시 워에서 한창 활동할 당시에는, 화려한 컨트롤과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특유의 포스 때문에 나 또한 이 사람의 팬을 자처했었다.
불과 한두 달 전만 해도 히든캬드에게 길드 영입을 제안받기만 해도 얼떨떨했는데, 이제는 전대(前代) 프로게이머의 전설에게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니…….
정말 내가 타연 속 거물이 됐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의를 봐서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덕분에 또 한 번 강화를 시도할 수 있겠네요.”
“하하! 레전더리를 강화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유저도 참 드물 겁니다.”
“예전엔 잘 몰랐었는데, 정상급에서는 한 끗 차이가 무시 못 할 결과를 만들어내더라고요.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이렇게 조금씩 스펙을 늘려나가는 중입니다.”
“그 마음이 뭔지 잘 알 것 같군요. 제가 갤럭시 워를 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항상 느꼈던 바거든요. 아, 그런데 혹시 지금 바쁘십니까?”
“아니요?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돕는다기보다는…… 괜찮으시다면 저와 잠시 동행을 좀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금방이면 끝날 일이기는 합니다.”
말투는 여전히 격식 있지만, 대하는 태도와 표정은 이미 친한 동생을 대하는 것 같이 살갑게 구는 것이 느껴졌다.
“동행 정도야 얼마든지요. 그런데 어딜 가시는 건데 그러세요?”
“저희 듀메인 성의 전용 사냥터가 왜 뱀파이어 인던인 줄 아십니까? 이 성에 바로 암흑신 데이베스의 신전이 있기 때문이지요. 전 지금, 바로 그곳에 가려고 합니다.”
“암흑 신전에요? 거기는 왜…… 서, 설마?”
“네, 맞습니다. 저희 피닉스는 어제 칼젠 성 점령을 통해, 마침내 국가 업적치 천만을 전부 모았습니다.”
* * *
룬 페이토나가 뽑힌 지 어언 2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시간.
그래도 설마 길드 업적치 천만을 다 모은 길드가, 벌써 하나 더 생겼을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천 연합은 1성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사실 길드원 대다수가 투기장 죽돌이라 길드 업적치가 상당했습니다. 그 업적치들이 통합되면서 전부 고스란히 저희 길드 업적치로 넘어왔지요. 거기에 최근의 공성에서 획득한 공성 및 수성 성공 업적치도 상당했습니다.
하긴 태성이 건국 직후 ‘신의 선물’ 뽑기에 도전할 당시, 딱 천만을 모았던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피닉스도 3년 넘게 업적치를 모아왔을 테니, 신의 선물에 도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법했다.
“정말 이렇게 조용히 도전해도 괜찮으시겠어요? 길드원들도 모두가 기대하는 일인 텐데요.”
“다들 바쁘고 피곤할 텐데, 괜히 소란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다리우스처럼 생방송으로 뽑는 일은 더더욱 못하겠고 말입니다. 신검의 주인인 산드로 님. 행운의 상징과도 같은 당신과 함께라면, 충분히 좋은 결과가 있을 것만 같더군요. 이런 이상한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저도 이런저런 뽑기 미신이 많은걸요. 그 마음, 타연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걸요? 자, 그럼 제 신검의 기운이 또 다른 신검을 부를 수 있도록 안테나를 세우겠습니다!”
나는 괜스레 검을 뽑아 들어 두 손으로 붙잡고는, 힘을 주어 기를 불어넣는 척을 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번 신의 선물에서 디바인 무기가 또 나올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려진 설정상 7신기 중 한 손 검은 딱 2자루.
신검 ‘룬 페이토나’와 마신검(魔神劍) ‘룬 제스베라’뿐이었다.
아무래도 지옥불은 자신이 기사 캐릭이니, 이미 뽑혀버린 신검 대신 혹여나 나올지도 모를 마신검을 노리고 이 암흑 신전을 고른 듯싶었다.
극악의 확률을 뚫을 만한 행운의 버퍼 역할로, 나를 대동한 채 말이다.
하지만 뽑기의 이름이 달리 뽑기가 아니지 않은가?
뽑고 싶다고 뽑힐 검이었다면, 애초에 그 얻기 힘든 디바인 템들 중에서도 굳이 ‘7신기’라고 따로 분류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지옥불은 이미 밤새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는지, 신전의 추기경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국가 업적치를 전부 다 바쳤는지, 곧이어 추기경이 허공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침묵과 안식을 안겨주는 어둠의 지배자, 데이베스 님이시여! 이곳에 당신의 기적을 내려주소서!!”
예전 루이튼의 추기경 로베르타는 환한 빛을 두 손에 모았었으나, 이 암흑신의 추기경은 반대였다.
그의 두 손에서 짙은 어둠이 생성되더니 점차 그 범위가 넓어졌다.
검은 물감이 번지듯 급속히 어두워진 신전 안.
그리고 마침내 이 넓은 신전 안이 눈앞의 두 손도 확인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칠흑으로 뒤덮인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어둠이, 지옥불의 두 손 사이로 전부 뭉쳐졌다.
[암흑의 신 데이베스의 마신검 ‘룬 제스베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어둠이 걷혀 밝아진 내 시야에 떠오른 전체 알림창.
그 알림창에는 예전에 한 번 봤던 글귀와 비슷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마신검, 룬 제스베라.
방금 추기경이 외쳤던 문장 그대로, 이곳에 기적이 내리꽂혔다.